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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키오르 은다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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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멜키오르 은다다예는 1993년 부룬디 최초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자 최초의 후투족 대통령이었다. 그는 1993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했지만, 임기 4개월 만인 1993년 10월 쿠데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의 암살은 부룬디 내전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그는 민주주의의 순교자이자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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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키오르 은다다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93년의 멜키오르 은다다예
1993년의 은다다예 대통령
직책
제4대 부룬디 대통령임기 시작: 1993년 7월 10일
임기 종료: 1993년 10월 21일
총리실비 키니기
전임자피에르 부요야
후임자프랑수아 은게제
개인 정보
출생일1953년 3월 28일
출생지루안다우룬디, 냐비항가
사망일1993년 10월 21일 (향년 40세)
사망지부줌부라, 부룬디
안장 장소부줌부라
배우자로렌스 은다다예
사망 원인암살
학력르완다 국립 대학교
프랑스 국립 공예원
직업정치인, 은행가
정당부룬디 민주 전선(FRODEBU)
부룬디 노동자당(UBU)

2. 어린 시절과 교육

멜키오르 은다다예는 1953년 3월 28일 루안다우룬디의 냐비항가 코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파이 은다다예와 어머니 테레즈 반두슈벵게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후투족 가문의 10명의 자녀 중 첫째였다. 음보고라의 초등학교를 다녔고, 1966년 기테가의 사범학교에 입학했다.[1] 1972년 부룬디 정부가 교육받은 후투족을 대상으로 학살한 이키자[2] 이후, 그는 기테가의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 르완다로 피신했다.[3] 그는 부타레의 부타레 공립학교에 등록하여 중등 교육을 마치고 1975년에 졸업했다. 그 후 르완다 국립대학교에 입학하여 교육학을 공부하였고, 1980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4] 은다다예는 1980년부터 1983년까지 르완다 남부 세이브의 리세 페다고지크에서 강의했다.[5]

3. 초기 정치 활동과 부룬디 귀환

1993년 선거 승리 후 FRODEBU 집회에서 연설하는 은다다예


은다다예는 르완다에서 정치에 참여했으며, 1976년에는 르완다에 망명한 부룬디 후투족 학생들을 위한 진보 운동 단체인 르완다 부룬디 진보 학생 운동(Mouvement des Étudiants Progressistes Barundi au Rwanda, BEMPERE)을 설립했다.[1] 1979년 8월, 은다다예와 다른 부룬디 망명자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인 부룬디 노동자당(Umugambwe wa'Bakozi Uburundi, UBU)을 창당했다. 그는 당의 정보 담당 비서이자 당의 신문인 "Le Flambeau"와 "Ukuri"의 편집장을 맡았다.[2] 1982년부터 1983년까지 UBU 내에서 이념적 분열이 발생했는데, 한 세력은 무장 혁명을 주장했고, 실베스트르 니티반퉁냐와 은다다예가 이끄는 다른 세력은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를 옹호했다.[1][2] 은다다예는 "부룬디 진보 세력의 연합"을 촉구하는 문서를 발표하며 다른 구성원들과 더욱 거리를 두었다.[2] 이러한 분열의 결과로 은다다예는 UBU를 떠나 1983년 부룬디로 돌아갔다.[1][2]

1984년 7월 은다다예는 로렌스 니니나하즈웨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그해부터 1986년까지 그는 부줌부라에 있는 카멩게 신경정신과 센터에서 일했다.[1] 이 기간 동안 그는 또 다른 정당인 민주주의 투쟁 전선(Front de Lutte pour la Démocratie, FROLUDE)의 회원이 되었지만, 정부에 침투했다는 의혹이 커지고 일부 회원이 체포되면서 이 단체는 해산되었다.[2]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은다다예는 기테가에 있는 Coopératives d'Épargne et de Crédit를 이끌었다. 1989년 그는 부줌부라로 돌아와 메리디안 은행 비아오의 신용 서비스 부서장이 되었다. 이후 파리의 국립 공예 기술원에서 Institut Technique de Banque에서 공부하여 1992년 고등 은행학 학위를 취득했다.[1]

4. 1993년 대통령 선거

1991년 헌법은 다당제 정치를 규정했고,[3] 1993년 4월 18일 부룬디 민주주의 전선(FRODEBU) 의회는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은다다예를 후보로 지명했다.[1] 그는 후투족의 해방자로 여겨졌으며, 소수 후투족이 지배하는 야당 연합인 민주 변화 세력(FCD)의 지지도 얻었다.[1] FRODEBU의 또 다른 창립 멤버인 니반퉁야는 은다다예가 "정치적 순수"하다는 대중의 인식으로부터 더 많은 이점을 얻었다고 말했다.[1]

변화를 옹호하며 은다다예와 그의 동맹자들은 "새로운 부룬디" (키룬디: ''우부룬디 부샤샤'')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했다. 그는 정치, 경제 및 사회 문화적 문제와 관련된 46가지 구체적인 조치로 구성된 "새로운 부룬디 건설을 위한 우리의 제안"이라는 제목의 플랫폼을 제시했다.[1] 그는 투치족이 지배하는 군대를 해산하고 각 부룬디의 콜린에서 공평한 모집을 기반으로 군대와 헌병대를 재창설하여 보다 민족적으로 균형 잡힌 군대를 확보할 것을 옹호했다.[1] FRODEBU의 반대자들은 당을 후투족 극단주의 조직으로 비난하고 반군 단체인 민족 해방군(PALIPEHUTU)과 연결하려 했다. 은다다예는 이러한 특징을 비난하고 대신 국민 진보 연합(UPRONA) 지도부가 민족 분열을 조장하려 한다고 비난했다.[1]

FRODEBU와 FCD의 지지를 받은 은다다예는 UPRONA의 후보인 피에르 부요야, 그리고 인민 화해당의 피에르 클라베르 센데게야와 경쟁했다. 1993년 부룬디 대통령 선거에서 은다다예는 64.86%의 득표율을 얻었고, 부요야는 33.20%, 센데게야는 1.26%를 얻었다.[1] 선거는 국제 참관인에 의해 자유롭고 공정하다고 인증되었으며, 후보자 중 아무도 결과를 다투지 않았다.[4] UPRONA 멤버들은 은다다예의 압도적인 승리에 충격을 받았다. 부요야에 따르면, 일부 당원들은 그에게 자신이 승리한 것으로 결과를 조작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자신의 정직성을 훼손하고 내전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느껴 거절했다.[1] 외국 참관인들 또한 부요야의 패배에 놀랐지만, 민간인이 권력을 잡고 민주적인 절차가 준수되고 있다는 점에 대체로 만족했다.[1]

군대가 정권 교체를 방해하기 위해 개입할 것이라는 소문이 부룬디에 퍼졌다.[1] 은다다예는 지지자에게 "그들은 은다다예를 죽일 수 있지만, 500만 명의 은다다예를 모두 죽일 수는 없다"고 안심시켰다.[1] 7월 3일에 은다다예의 거주지를 점거하려는 소수의 장교들의 음모는 군대의 다른 구성 요소의 지원 부족으로 실패했고, 그 결과 용의자 지도자인 슬리베스트르 닝가바 중령을 포함한 여러 체포가 이루어졌다. 닝가바 중령은 부요야의 ''비서 실장''이었다.[1] 부요야와 군 지도자들은 쿠데타 시도를 비난했다.

5. 대통령직

은다다예는 1993년 7월 10일 부룬디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부룬디 최초의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국가 원수이자 최초의 후투족 대통령이 되었다.[7] 그는 취임 연설에서 "새로운 부룬디"를 만들겠다고 약속하며, 국내외적으로 여러 활동을 펼쳤다.

1993년 부줌부라 공항에서 멜키오르 은다다예(왼쪽)가 실비 키니기 총리(오른쪽)와 악수하는 모습

5. 1. 국내 정책

은다다예는 1993년 7월 10일 부룬디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부룬디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가 원수이자 최초의 후투족 대통령이 되었다.[7] 취임 연설에서 그는 "새로운 부룬디"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13명의 FRODEBU와 6명의 UPRONA 회원으로 구성된 23명의 장관으로 정부를 구성했는데, 투치족은 UPRONA 소속 실비 키니기 총리를 포함해 9명이었다.[7] 또한 후투족 15명과 투치족 15명으로 구성된 민족통일위원회를 임명하여 민족 문제에 대해 조언하게 했다.

대통령으로서 신중한 접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 중 일부는 지역 사회에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전 투치 정부 하에서 승인된 계약과 양보에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는 강력한 투치 엘리트와 군대의 경제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는 군대에 대한 개혁을 시작했고, 국가 경찰을 별도의 지휘부로 이동시키고, 군과 경찰의 입학 요건을 변경하여 투치족의 지배력을 줄이고자 했다. FRODEBU의 우세는 지역 차원에서 문제를 일으켰는데, 은다다예의 후투족 지지자들이 이전에 투치족이 공공 서비스에서 차지했던 많은 위치를 차지했으며, 1972년 학살 이후 귀환한 난민들의 재정착을 실패하여 많은 투치족 가족들이 집을 잃게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새롭게 자유로워진 언론에 의해 악화되었고, 언론은 인종적 긴장을 부채질하는 방식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장 비코마구 중령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7]

5. 2. 대외 관계

국제적으로 은다다예는 1993년 8월 4일 르완다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마련된 평화 협정인 아루샤 협정 서명식에 참석했다.[7] 그는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브자리마나와 관계가 불안정했다. 9월에는 유엔 본부를 방문하여 유엔 총회에서 연설했다. 10월 18일에는 모리셔스에서 열린 프랑스어권 국가들의 정상 회담에 참석했다.[7]

6. 암살과 그 이후

멜키오르 은다다예의 암살은 부룬디 전국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임시 국가 원수로 임명된 프랑수아 응제는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고, 프랑스 대사관에 피신해 있던 실비 키니기 총리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면서 쿠데타 시도는 빠르게 실패했다.[6]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유엔 총회는 암살과 쿠데타를 규탄했다.[6]

이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양측에서 살해되었으며, 그 수는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계속되는 폭력 사태는 부룬디 내전으로 이어졌다.[6]

1996년 유엔 조사 결과는 육군 지휘부가 암살에 책임이 있으며, 투치 군대의 대량 학살에 공모했다고 비난했다. 은다다예의 전임 대통령이었던 피에르 부요야는 암살에 어떤 역할을 했을 것으로 오랫동안 의심받아 왔다.[6]

1999년,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은다다예 암살 연루 혐의자들에 대한 체포가 이루어졌다. 주모자로 추정되는 육군 장교 폴 카마나를 포함한 5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다른 74명은 1년에서 20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기소된 고위 관리 대부분은 무죄를 선고받아 은다다예 지지자들의 비난을 받았다.[6]

부룬디에서 은다다예는 민주주의의 순교자이자 국민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7] 매년 10월 21일은 은다다예의 날로 기념되며, 은다다예 묘소에 화환을 바친다.[6]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정부는 부줌부라의 로터리에 은다다예와 루이 르와가소레를 함께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은다다예의 관이 묘지로 내려지고 있다

6. 1. 암살 배경

1993년 10월 19일, 한 육군 장교가 장마리 은겐다하요 통신부 장관의 부인에게 육군 본부 인사들이 대통령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알렸다.[1] 10월 20일 15시, 대통령 경호를 담당하는 이사이 니비지 소령은 은다다예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수상한 군사 동향을 보고했다.[2]

그날 오후 늦게, 은다다예는 부줌부라에서 취임 100일을 기념하고 정부가 선거 공약에 비해 무엇을 달성했는지 논의하기 위해 각료 회의를 주재했다.[3] 회의가 끝날 무렵 은겐다하요는 은다다예와 단독 면담을 요청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은겐다하요는 은다다예의 안전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며, 투치족이 주도하는 야당인 UPRONA가 12월 지방 선거 전에 수천 명의 부룬디 난민의 귀환을 허용하는 정부의 인기 정책을 비난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이 UPRONA의 선거에 손해를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정책에 반대하는 유일한 이유는 암살과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으려는 계획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4]

샤를르 은타키제 국방부 장관은 은다다예에게 11기갑차량대대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으며, 10월 21일 02시에 대통령궁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은다다예는 7월에 쿠데타를 시도하다 체포된 전 육군 대령 실베스트르 닝가바의 상황을 물었고, 그를 다른 감옥으로 이감하여 쿠데타 세력이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은타키제는 밤에 수감자를 이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대통령궁에 추가적인 장갑차를 배치하여 추가적인 경비를 하겠다고 약속했다.[5] 은다다예는 대통령 경비대에 대한 훈련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 후 두 장관을 저녁에 돌려보냈다.[6]

은다다예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궁으로 돌아갔는데, 언론인 가에탕 세부단디와 피에르-올리비에 리차드는 대통령이 7월 3일의 음모처럼 쿠데타가 쉽게 좌절될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7] 크루거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은다다예의 측근들이 그를 그렇게 지능적이라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호를 위한 그런 빈약한 준비를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외부인에게는 놀라운 일로 보일 것이다. ... 그러나 소문으로 끊임없이 불안한 수도에서는 보고된 모든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지치는 일이다. 게다가 은다다예는 수많은 생명을 위협하는 도전을 극복하고, 최근에 맡은 직위와 책임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일종의 '체 사라, 사라', 즉 운명론적인 태도를 가졌을 수 있다."

6. 2. 암살 과정

1993년 10월 19일, 한 육군 장교가 장마리 은겐다하요 통신부 장관의 부인에게 육군 본부 인사들이 대통령 암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알렸다.[1] 10월 20일 15시, 대통령 경호 담당 이사이 니비지 소령은 은다다예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수상한 군사 동향을 보고했다.[2] 그날 오후 늦게 은다다예는 부줌부라에서 취임 100일을 기념하고 정부의 성과를 논의하기 위한 각료 회의를 주재했다.[3] 회의가 끝날 무렵 은겐다하요는 은다다예와 단독 면담을 요청하여 그의 안전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4] 은겐다하요는 투치족 중심 야당인 UPRONA가 12월 지방 선거를 앞두고 수천 명의 부룬디 난민 귀환을 허용하는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이는 암살 및 쿠데타를 통한 권력 장악 계획의 일환일 수 있다고 말했다.[5]

샤를르 은타키제 국방부 장관은 은다다예에게 11기갑차량대대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으며, 10월 21일 02시에 대통령궁을 공격할 것이라고 보고했다.[6] 은다다예는 7월 쿠데타 시도로 체포된 실베스트르 닝가바 전 육군 대령의 상황을 묻고, 그를 다른 감옥으로 이감하여 쿠데타 세력의 도움을 막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은타키제는 밤에 수감자를 이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대통령궁에 추가 장갑차를 배치하여 경비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7] 은다다예는 대통령 경비대 훈련 가능성에 대해 논의한 후 궁으로 돌아갔고, 부인 로렌스에게 쿠데타 음모에 대해 알렸지만 은타키제의 말에 안심했다.

10월 20일 자정 무렵, 11기갑차량대대 쿠데타 세력은 10여 대의 장갑차를 몰고 무하 캠프를 출발하여 부줌부라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한 시간 안에 그들은 대통령궁을 포위했고, 다른 11개 군사 캠프에서 수백 명의 군인과 헌병이 합류했다. 10월 21일 01:00 직전, 은타키제는 은다다예에게 전화하여 장갑차가 무하 캠프를 출발했다고 알리고 즉시 궁을 떠날 것을 조언했다. 은다다예는 궁 경비대 사령관 일데폰스 무슈와부레 대위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01:30에 쿠데타 세력은 포격으로 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은다다예는 군복을 입고 정원에 있던 경호원들의 장갑차에 숨어 6시간 동안 머물렀다.

오전 7시 30분경, 로렌스 은다다예와 아이들은 궁을 떠나 경내에 있던 차에 탔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장갑차에 있던 은다다예와 합류했지만, 궁이 쿠데타 세력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슈와부레 대위의 지시에 따라 은다다예는 가족과 함께 무하 캠프로 가기로 결정하고 오전 7시 30분에 출발했다. 오전 8시에 기지에 도착하자, 그들의 차는 제1대대 쿠데타 세력에 의해 포위되었다. 은다다예는 비코마구 육군 참모총장과 다른 육군 고위 장교들과의 회의에 참석했고, 약 한 시간 후 보안 국무 장관 라자레 가코리오 대령과 함께 돌아와 장교들과 구두 합의를 마쳤다.

은다다예는 서면 합의를 위해 가코리오와 함께 장갑차에 다시 탔지만, 국무 장관이 내리자 군인들이 대통령에게 나오라고 소리쳤다. 비코마구는 군중을 진정시키고 은다다예는 군인들에게 평화롭게 협상하자고 호소했지만, 군인들은 대통령에게 다가갔다. 비코마구는 군인들에게 가족은 풀어주라고 지시했고, 로렌스의 지시에 따라 군인은 그들을 프랑스 대사관으로 데려가 피난시켰다. 비코마구는 은다다예를 가리키며 쿠데타 세력에게 "그가 당신들이 찾던 사람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그를 어떻게 하든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은다다예는 지프에 태워져 인근 제1공수대대 캠프로 끌려갔고, 비코마구, 가코리오, 니비지 소령이 뒤따랐다. 대통령은 10명의 하급 장교들이 있는 사무실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검시 보고서에 따르면 은다다예는 군인들이 그를 14번 칼로 찌르는 동안 목에 끈이 묶인 채 붙잡혀 있었고, 흉부 관통상과 출혈로 인한 폐 충만이 사인으로 밝혀졌다. 군인들은 캠프 중앙에 집단 매장지를 파고 은다다예와 다른 희생자들을 매장했지만, 몇 시간 후 시신을 발굴하여 가족들이 수습하도록 허용했다. 은다다예는 12월 6일 부줌부라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재매장되었다.

6. 3. 이후의 영향

은다다예의 죽음은 부룬디 전국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임시 국가 원수로 임명된 민간 정치인 프랑수아 응제는 쿠데타 지도자들을 지원하지 않았고, 쿠데타에서 살아남아 프랑스 대사관에 숨어 있던 키니기 총리에게 통제권을 넘길 것을 요구하면서 쿠데타 시도는 빠르게 실패했다. 이 움직임은 곧 핵심 군 지휘관들의 지지를 받았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유엔 총회는 암살과 쿠데타를 규탄했다. 그 결과, 수많은 민간인들이 양측에서 살해되었으며, 추정치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10만 명 이상으로 합의되었다. 계속되는 폭력은 수십 년간 지속된 부룬디 내전으로 발전했다.[6]

1996년에 발표된 은다다예 살해에 대한 유엔 조사 결과는 육군 지휘부가 암살에 책임이 있으며, 투치 군대의 대량 학살에 공모했다고 비난했다. 특정 인물의 책임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은다다예의 전임 대통령이었던 부요야는 암살에 어떤 역할을 했을 것으로 오랫동안 의심받아 왔다.[6]

1999년, 내전을 종식시키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은다다예 암살 연루 혐의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일련의 체포가 이루어졌다. 주모자로 추정되는 육군 장교 폴 카마나를 포함한 5명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다른 74명은 1년에서 20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기소된 고위 관리 대부분은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이는 은다다예 지지자들에게 비난받았다.[6]

부룬디에서 은다다예는 사후에 민주주의의 순교자이자 국민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7] 은다다예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매년 10월 21일에 은다다예의 날이 기념된다. 이 날은 은다다예 묘소에 화환을 바치는 것으로 기념된다.[6]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정부는 부줌부라의 로터리에 은다다예와 루이 르와가소레를 함께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7. 유산

은다다예의 죽음은 부룬디 전국에 심각한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쿠데타 시도는 임시 국가 원수로 임명된 민간 정치인 프랑수아 응제가 쿠데타 지도자들을 지원하지 않고, 프랑스 대사관에 숨어 있던 키니기 총리에게 통제권을 넘길 것을 요구하면서 빠르게 실패했다. 이 움직임은 핵심 군 지휘관들의 지지를 받았다. 키니기는 대통령과 국회의장 모두 암살로 인한 헌법적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유엔 총회는 암살과 쿠데타를 규탄했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양측에서 살해되었으며, 추정치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10만 명 이상으로 합의되었다. 계속되는 폭력은 수십 년간 지속된 부룬디 내전으로 발전했다.

7. 1. 은다다예에 대한 평가



은다다예의 죽음은 부룬디 전국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쿠데타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되었고, 부룬디 내전으로 이어졌다.[6]

1996년 유엔 조사 결과는 육군 지휘부가 은다다예 암살에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은다다예의 전임 대통령이었던 부요야도 암살에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았다.[6]

1999년, 내전 종식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은다다예 암살 연루 혐의자들에 대한 체포가 있었다. 주모자로 추정되는 폴 카마나를 포함한 5명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고위 관리 대부분은 무죄를 선고받아 은다다예 지지자들의 비난을 받았다.[6]

부룬디에서 은다다예는 민주주의의 순교자이자 국민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Ndadaye is remembered in Burundi as a martyr for democracy and a national hero.영어 매년 10월 21일은 은다다예의 날로 기념되며, 은다다예 묘소에 화환을 바치는 행사가 열린다.[6]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정부는 부줌부라에 은다다예와 루이 르와가소레를 함께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참조

[1] 뉴스 À la Mémoire de Cyprien Ntaryamira http://www.arib.info[...] 1996-04
[2] 웹사이트 Evolution du contexte général entre 1991 et 2021 https://www.iwacu-bu[...] 2021-06-04
[3] 뉴스 Burundi: Unity at Last? 1992-03
[4] 웹사이트 Challenger Wins Burundi Election https://www.latimes.[...] 2015-01-14
[5] 뉴스 Freed From Fear 1993-09
[6] 서적 Burundi https://books.google[...] Simon and Schuster 2014-09-02
[7] 뉴스 Freed From Fear 199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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