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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리앵 은타랴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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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프리앵 은타랴미라는 부룬디의 정치인으로, 1994년 2월부터 4월까지 부룬디 대통령을 역임했다. 후투족 출신으로 1976년 학생 운동을 시작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으며, 1986년 부룬디 민주주의 전선(FRODEBU)을 창립하고 농업부 장관을 지냈다. 1993년 10월 멜키오르 은다다예 대통령 암살 이후, 국민 의회 투표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994년 4월 르완다 대통령과 함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부룬디 내의 민족 분쟁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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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리앵 은타랴미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93년의 은타랴미라
이름시프리앵 은타랴미라
출생일1955년 3월 6일
출생지벨기에 루안다-우룬디 부줌부라주 무빔비
사망일1994년 4월 6일 (39세)
사망지르완다 키갈리
사망 원인암살 (지대공 미사일)
배우자실바나 음파브와나요
출신 학교르완다 국립 대학교
정치 경력
소속 정당(1979년–1986년)
ブルンジ 민주 전선 (1986년–1994년)
관직
직위ブルンジ 대통령
대수제5대
임기 시작1994년 2월 5일
임기 종료1994년 4월 6일
이전 대통령실비 키니기(대행)
다음 대통령실베스터 은티반퉁가냐

2. 초기 생애 및 교육

시프리앵 은타랴미라는 1955년 3월 6일 당시 벨기에의 국제 연합 신탁통치령이었던 루안다-우룬디의 부룬디 루랄주 무빔비 코뮌 마제요 지역에서 태어났다.[1] 그는 후투족 출신[2]으로, 11명의 형제 중 여섯째였다.[3]

그는 르슈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1968년에는 부줌부라에 있는 Collège du Saint-Ésprit에 입학하여 중등 교육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1]

그러나 1972년, 투치족 출신 대통령 미셸 미콤베로 정권에 대항한 후투족의 반란이 일어나자, 부룬디군은 이키자로 알려진 대규모 후투족 학살을 자행하며 이를 진압했다.[1][1] 이 혼란 속에서 은타랴미라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의 사촌 프랑수아 응제에 따르면, 정부 행정관 바실 가테레체가 두 사람을 자신의 집에 2주 동안 숨겨주었으나, 당국의 의심이 커지자 가테레체는 이들이 루지지 강을 건너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왔다. 당시 수천 명의 후투족이 은타랴미라처럼 학살을 피해 국외로 탈출했다.[1][1]

자이르를 거쳐 결국 르완다로 망명한 은타랴미라는 키갈리 현의 릴리마 칼리지에 재입학하여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중단했던 학업을 이어갔다.[1] 이후 르완다 국립대학교에 진학하여 학문적 역량을 키웠고, 1976년 이학 학사 학위를, 1979년에는 농업 공학 학위를 취득하며 고등 교육을 마쳤다.[1]

1985년에는 실바나 음파브와나요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1]

3. 정치 경력

시프리앵 은타랴미라는 해외 유학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갖고 1976년 '진보 부룬디 학생 운동' 공동 설립에 참여했으며,[1] 이후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인 부룬디 노동자당(UBU) 창당 멤버로 활동하며 중앙위원회에서 경제 및 사회 문제를 담당했다. 1983년 부룬디로 돌아와 농업 관련 분야에서 일했으나, 1985년 UBU 활동과 관련되어 정치범으로 1년간 투옥되기도 했다.[1]

냉전 종식과 함께 민주화 요구가 높아지자, 그는 멜키오르 은다다예 등과 함께 사회주의 노선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1986년 부룬디 민주주의 전선(FRODEBU)을 창립했다. 그는 FRODEBU 내에서 정치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며 후투족투치족 간의 협력을 통한 통치를 지지했고, 당의 경제 정책 수립에 기여했다.[1]

1993년 부룬디 최초의 민주 선거에서 FRODEBU가 승리하고 멜키오르 은다다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은타랴미라는 부줌부라 농촌 지역구의 국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실비 키니기 총리 내각에서 농업 및 축산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 그러나 같은 해 10월, 군부 쿠데타 시도로 은다다예 대통령과 주요 정부 인사들이 암살되면서 국가는 극심한 혼란과 1993년 부룬디의 민족 폭력 사태에 빠져들었다.[5][1]

권력 공백 상태에서 FRODEBU는 은타랴미라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고, 야당과의 협의를 거쳐 1994년 1월 13일 국민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6] 헌법적 논란과 정치적 갈등 끝에 2월 5일 공식 취임한 그는 평화 회복, 인권 증진, 난민 문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국민 진보 연합(UPRONA)과의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7]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은 계속되는 민족 갈등과 경제 위기로 인해 순탄치 않았으며, 민족 폭력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1] 그는 지역 안정을 위해 자이르모부투 세세 세코, 탄자니아의 알리 하산 음위니, 르완다의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등 주변국 정상들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1]

3. 1. 초기 정치 활동

해외에 있는 동안 은타랴미라는 부룬디 정치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으며, 1976년에는 학생 운동인 Mouvement des Etudiants Progressistes Barundi|진보 부룬디 학생 운동fra을 공동 설립하고[1] 정보 부서를 이끌었다.[1] 1979년 8월, 이 학생 운동 회원 중 일부는 Umugambwe wa'Bakozi Uburundi|부룬디 노동자당run (UBU)이라는 혁명적 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을 창당했다. 1981년까지 그는 UBU 중앙위원회에서 경제 및 사회 문제 담당 국가 서기로 활동했다. 1983년 3월 부룬디로 돌아와 부룬디 농업 계획 총국에서 고문으로 일했으며,[1] 무빔비에서 양계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1] 이듬해 1월에는 콩 관리 회사(Compagnie de Gérance du Coton)의 북부 면화 지역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5년 5월, UBU와 연계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엠핌바 감옥에 수감되었다. 약 1년간 수감 생활을 했으며, 당시 장-밥티스트 바가자 대통령 부인(어린 시절 친구)의 요청으로 석방되었다는 설이 있다.[1]

1993년 FRODEBU 집회에서 은타랴미라(가운데). 멜키오르 은다다예가 오른쪽에 서 있다.


냉전 종식기에 접어들면서, 은타랴미라, 멜키오르 은다다예 등 일부 UBU 회원들은 기존의 사회주의 이념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에서 보다 폭넓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민주주의와 선거 과정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1] 은타랴미라는 민족 문제에 있어 정치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했으며, 다수파인 후투족이 소수파인 투치족과 협력하여 부룬디를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1] 1986년 8월, 은타랴미라는 은다다예 등 10여 명과 함께 Front pour la Démocratie au Burundi|부룬디 민주주의 전선fra (FRODEBU)을 창립했다. 그는 정치국 위원으로 활동하며 당의 경제 정책 수립에 기여했다.[1] 1987년 12월에는 부룬디 농업 및 축산 국장으로 임명되었다.[1]

FRODEBU는 부룬디 최초의 민주 선거인 1993년 부룬디 대통령 선거 및 총선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고, 이로써 소수 투치족 군 장교들과 Union pour le Progrès national|국민 진보 연합fra (UPRONA)의 오랜 집권이 막을 내렸다. 멜키오르 은다다예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4] 은타랴미라는 부줌부라 농촌 지역구에서 부룬디 국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93년 7월 10일, 실비 키니기 총리 내각에서 농업 및 축산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 이 자리에서 그는 농업부 주요 직책에 여러 투치족 인사를 임명하기도 했다.[1]

1993년 10월 20일에서 21일 사이 자정 무렵, 부룬디 군 일부가 1993년 부룬디 쿠데타 시도를 일으켜 은다다예 대통령을 체포하기 위해 대통령궁을 공격했다. 당시 대통령 부인이 은타랴미라에게 직접 전화하여 상황을 알렸다.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한 은타랴미라는 투치족 이웃의 집에 몸을 숨겼다. 군인들이 그의 집에서 그를 찾지 못하자 이웃집으로 찾아와 행방을 물었으나, 집주인이 은타랴미라가 다른 길로 도망쳤다고 둘러대어 위기를 넘겼다. 이후 그는 쿠데타 시도가 진압될 때까지 외국 대사관에 피신해 있었다.[5] 결과적으로 은다다예 대통령과 국민의회 의장 및 부의장 등 대통령 계승 순위에 있던 주요 인사들이 살해되면서 권력 공백 상태가 발생했다.[1] 이 암살 사건은 1993년 부룬디의 민족 폭력 사태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후투족 민간인들이 투치족을 학살하고 군대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후투족을 살해하면서 수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3. 2. 부룬디 민주 전선(FRODEBU) 활동

해외에 있는 동안 은타랴미라는 부룬디 정치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으며, 1976년에는 학생 운동인 진보 부룬디 학생 운동(''Mouvement des Etudiants Progressistes Barundi'')을 공동 설립했다.[1] 그는 이 운동의 정보 부서를 이끌었다.[1] 1979년 8월, 일부 학생 운동 회원들은 부룬디 노동자당(UBU, ''Umugambwe wa'Bakozi Uburundi'')이라는 혁명적 사회주의 사회주의 정당을 창당했다. 1981년까지 그는 경제 및 사회 문제 담당 국가 서기로서 당 중앙위원회에 참여했다. 1983년 3월 부룬디로 돌아와 농업 계획 총국에서 고문으로 일했으며,[1] 무빔비에서 양계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1] 이듬해 1월에는 면화 관리 회사(Compagnie de Gérance du Coton)의 북부 면화 지역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5년 5월, UBU라는 정치 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엠핌바 감옥에 수감되었다. 1년 후, 당시 대통령 장-밥티스트 바가자의 부인이자 그의 어린 시절 친구의 요청으로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1]

냉전이 끝나갈 무렵, 은타랴미라, 멜키오르 은다다예 등 여러 UBU 출신 인사들은 사회주의 이념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에서 더 받아들여질 수 있는 민주주의와 선거 과정을 지향하기 시작했다.[1] 은타랴미라는 민족 문제에 있어 정치적으로 온건한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다수 후투족이 소수 투치족과 협력하여 부룬디를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1] 1986년 8월, 은타랴미라, 은다다예 등 12명은 부룬디 민주주의 전선(FRODEBU, ''Front pour la Démocratie au Burundi'')을 창립했다. 은타랴미라는 당 정치국에서 활동하며 경제 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7년 12월에는 부룬디 농업 및 축산 국장으로 임명되었다.[1]

FRODEBU는 부룬디 최초의 민주 선거인 1993년 부룬디 대통령 선거 및 의회 선거에서 승리하여, 오랫동안 집권해 온 투치족 중심의 군부 및 국민 진보 연합(UPRONA, ''Union pour le Progrès national'')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멜키오르 은다다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4] 은타랴미라는 부줌부라 농촌 지역구를 대표하여 부룬디 국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93년 7월 10일, 그는 실비 키니기 총리가 이끄는 내각에서 농업 및 축산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이 직책에서 농업부의 주요 직책에 여러 투치족 인사를 임명하기도 했다.[1]

1993년 10월 20일 밤, 부룬디 군 일부가 1993년 부룬디 쿠데타 시도를 일으켜 은다다예 대통령을 체포하기 위해 대통령궁을 공격했다. 대통령 부인은 은타랴미라에게 전화하여 상황을 알렸다.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한 은타랴미라는 투치족 이웃집에 숨었다. 군인들이 그의 집에서 그를 찾지 못하자 이웃집으로 와 그의 행방을 물었으나, 집주인이 은타랴미라가 다른 길로 도망갔다고 말해 위기를 넘겼다. 그 후 그는 쿠데타 시도가 끝날 때까지 외국 대사관에 숨어 있었다.[5] 이 쿠데타로 은다다예 대통령과 국민 의회 의장, 부의장 등 대통령 계승 순위에 있던 주요 인사들이 살해되면서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1] 이 암살은 또한 1993년 부룬디의 민족 폭력을 촉발하여, 후투족 민간인들이 투치족을 학살하고 군대가 보복으로 후투족을 살해하는 참극으로 이어져 수만 명의 사망자와 대규모 난민 사태를 낳았다.

1994년 1월 9일, 국민 의회는 헌법 제85조를 수정하여 차기 대통령을 선출할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1] FRODEBU는 은다다예의 후임자를 지명하는 과정에서 실베스트르 은티반퉁가냐와 레오나르드 니앙고마 사이의 경쟁이 벌어졌다. 은티반퉁가냐가 중앙위원회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당무에 집중하겠다며 사퇴하자,[1] 장-마리 은젠다하요는 은타랴미라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한편, 전 대통령 피에르 부요야는 은타랴미라가 다른 FRODEBU 인사들과 당 외부 인사들에 의해 경쟁을 피하기 위해 "강요"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야당은 은타랴미라가 1993년 투치족 학살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판단했고, 그는 "합의" 후보로 부상했다.[1] 1월 13일, 국민 의회는 투표를 통해 78 대 1로 은타랴미라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6]

은타랴미라는 1월 22일 취임할 예정이었으나, UPRONA 주도의 야당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는 헌법 개정이 불가하다는 헌법 제182조를 근거로 헌법재판소에 취임 금지 소송을 제기했다. FRODEBU 측은 전국 선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공석을 메우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반박했다. 헌법재판소는 민족 구성에 따라 분열되어 야당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에 후투족 판사들이 사임하고 정부는 투치족 판사들을 해임했다. 이로 인해 부줌부라에서 며칠간 폭력 사태가 발생했지만, 2월 3일 정부와 야당은 은타랴미라를 대통령으로, UPRONA 출신 인사를 총리로 임명하고 헌법재판소를 복원하기로 합의했다. 은타랴미라는 2월 5일에 취임했다. 취임 연설에서 그는 평화 회복, 인권 증진, 수천 명의 부룬디 난민 및 국내 실향민 재정착을 최우선 과제로 선언했다.[7] 그의 정부는 FRODEBU와 UPRONA 출신의 후투족과 투치족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연립 정부로 구성되었으며, UPRONA 소속의 아나톨 카니엔키코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카니엔키코의 임명은 일부 UPRONA 지도부의 불만을 샀고, 은타랴미라는 정부 구성 시 수도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인물들의 임명은 막았다.

은타랴미라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부룬디는 심각한 민족 폭력과 분쟁, 그리고 가뭄으로 인한 경제 위기에 시달렸다. 그는 국가 정보국 (부룬디)을 개편하고[1] 도미티앙 은다이이제예를 국장으로 임명했으며,[8] 이민 서비스와 시 경찰 개혁을 시도했다.[1] 또한 부줌부라에서 자행된 잔혹 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 설립을 발표했다.[9]

시민 민병대를 해산하기 위해 정부 대표단을 파견했으나, 특사들이 총격을 당하는 등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의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민병대를 막으려 했지만, 3월 말 군대는 수도에서 민족 분쟁에 휘말렸고 정부와 별개로 후투족 지역 무장 해제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라디오 연설에서 은타랴미라는 군대에 전투 중단과 철수를 호소했다.[10] 그는 부룬디 전역의 무장 해제와 유럽의 무기 수출 금지를 지지했는데, 이는 반군에 대한 강경 진압을 원하고 금수 조치가 국가 주권을 침해한다고 본 카니엔키코 총리와의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 궁극적으로 그의 민족 폭력 종식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1] 그는 자이르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과 탄자니아의 알리 하산 음위니 대통령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했으며,[1] 르완다 대통령 주베날 하비아리마나와도 매일 전화 통화를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1994년 4월 4일, 그는 가바돌리트에서 모부투, 하비아리마나와 만나 지역 안보 문제를 논의했다.

3. 3. 농업 및 축산부 장관

1982년 르완다 국립 대학교에서 농학을 전공한 후, 1983년 부룬디로 돌아와 농업 관련 직업에 종사했으나 장-밥티스트 바가자 정권 시절인 1985년에는 일시적으로 정치범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1986년 8월에는 부룬디 민주 전선(FRODEBU) 창립에 참여하여 경제 정책 부장을 맡았다. 피에르 부요야 정권 하에서 치러진 1993년 6월 1일 선거에서 FRODEBU는 소수파인 투치족 중심의 국민 진보 연합(UPRONA)을 누르고 승리했다. 이 선거 결과에 따라 부룬디 최초의 후투족 출신 대통령으로 멜시오르 은다다예가 취임했으며, 국민 통합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 정권에서 은타랴미라는 농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총리에는 투치족 출신이자 UPRONA 소속인 실비 키니기가 임명되었다.

3. 4. 대통령 선출

1993년 6월 1일 선거에서 부룬디 민주 전선(FRODEBU)이 소수파인 투치족 중심의 국민 진보 연합(UPRONA)을 누르고 승리했다. 이 선거 결과로 멜시오르 은다다예가 부룬디 최초의 후투족 출신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국민 통합을 위해 투치족인 실비 키니기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때 은타랴미라는 농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93년 10월, 은다다예 대통령이 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암살되면서 부룬디 내전이 다시 격화되었다. 군이 사태를 수습한 후, 국민 의회는 FRODEBU와 UPRONA의 통합 정권 유지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94년 2월, FRODEBU 소속이었던 은타랴미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UPRONA 소속의 아나톨 카넹키코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4. 암살

1993년 10월 멜시오르 은다다예 대통령 암살 이후 재개된 부룬디 내전 속에서 1994년 2월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불과 2개월 뒤인 4월 6일 르완다의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과 함께 탑승한 항공기가 격추되어 사망했다.

4. 1. 르완다 대통령과의 만남

1993년 10월, 멜시오르 은다다예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부룬디 내전(1993년 - 2008년)이 다시 시작되었다. 군이 사태를 수습한 후, 국민 의회는 부룬디 민주 전선(FRODEBU)과 국민 진보 연합(UPRONA)의 통합 정권 아래에서 FRODEBU 소속인 은타랴미라를 1994년 2월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는 UPRONA의 아나톨 카넹키코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대통령에 취임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이웃 나라인 르완다의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과 함께 탑승했던 항공기가 격추되어 사망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국민 의회 의장인 실베스테르 은티반퉁가냐가 대통령 대행으로 선출되었다.

4. 2. 항공기 격추 사건

1994년 4월 6일, 은타랴미라는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에서 열린 지역 정상 회담에 참석했다가 르완다의 쥐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은타랴미라는 하비아리마나의 다소 팔콘 50 대통령 전용기가 자신의 비행기보다 빠르다는 이유로 동승을 요청했으며, 키갈리에 들러 아내를 데려오고자 했다. 하비아리마나는 이에 동의하고 은타랴미라와 부룬디 장관 두 명의 동승을 허락했다.

오후 8시 23분경, 비행기가 키갈리 국제공항에 접근하던 중 지대공 미사일 두 발이 발사되었고, 두 번째 미사일이 기체를 명중시켰다. 비행기는 추락하여 은타랴미라와 하비아리마나를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미사일을 발사한 공격자의 정확한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1] 일각에서는 아루샤 협정에 불만을 품은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르완다 애국전선(RPF)의 지도자였던 폴 카가메가 암살을 지시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4. 3. 암살의 영향

은타랴미라의 뒤를 이어 실베스트르 은티바퉁가냐(사진)가 부룬디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관찰자들은 은타랴미라의 죽음이 1993년 10월 멜시오르 은다다예 대통령 암살 때처럼 부룬디에서 광범위한 폭력 사태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12] 그러나 항공기 격추 사건이 르완다 집단 학살의 도화선이 된 르완다와는 달리, 부룬디의 상황은 대통령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에도 비교적 평온을 유지했다. 부룬디 정부는 처음에 비행기 추락이 사고였다고 발표했으며,[1] 국회의장 실베스트르 은티바퉁가냐는 국방부 장관과 육군 참모총장과 함께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국민들에게 침착함을 호소했다. 한편, 수도에서는 수백 명의 투치족이 거리로 나와 대통령들의 죽음을 축하하는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13] 외교관들은 대부분의 부룬디인들이 이번 암살이 은타랴미라보다는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르완다 대통령을 겨냥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14]

은티바퉁가냐는 은타랴미라의 죽음을 "상황의 사실"로 받아들이며 그가 직접적인 표적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1] 그는 임시 대통령으로서 은타랴미라의 자리를 계승했다.[15] 아나톨 카넨키코 총리가 이끌던 정부는 공식적으로 사임했지만, 후임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일상 업무를 계속 수행했다. 은티바퉁가냐의 대통령직 승계가 임시적인 것으로 간주되면서, 여당인 부룬디 민주 전선(FRODEBU)과 야당 사이에 새로운 권력 분담 논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인종 간 긴장은 여전히 높았고 폭력 사태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1] 4월 20일, 헌법재판소는 국회가 은타랴미라를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 있도록 허용한 이전의 헌법 수정안이 위헌이라고 다시 판결했다.

결국 9월에 이르러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국회는 은티바퉁가냐를 4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내각의 45%는 야당에 배분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더욱 심화되었다. 군대가 후투족 민간인에 대한 숙청을 자행했고, 이에 맞서 다수의 반군 단체들이 결성되어 부룬디 내전은 격화되었다.

5. 유산

은타랴미라의 시신은 추락 사고로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1994년 4월 7일 오전 3시경 신원이 확인되었다. 1994년 4월 16일, 부줌부라의 레지나 문디 대성당에서 수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그를 위한 진혼 미사가 열렸고, 이후 대통령 궁 부지에 안장되었다.[16]

역사가 장피에르 크레티앙과 멜키오르 무쿠리는 은타랴미라의 대통령직에 대해 "불과 두 달 동안, 그리고 즉각적으로 매우 긴장된 분위기에서 운영된 정권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은타랴미라의 죽음은 부룬디 정부에 의해 매년 4월 6일에 기념된다.[17][1] 그의 비행기 격추 사건으로 인한 사망은 일반적으로 하비아리마나의 죽음과 그에 따른 르완다 집단 학살에 의해 대중의 기억 속에서 가려졌다.[18] 2017년 4월 6일, 그의 미망인은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은타랴미라를 국가적 영웅으로 인정하고, 유엔에 그의 비행기 격추 사건에 대한 국제 조사를 요청할 것을 요구했다.[19] 2021년 4월, 정부 대변인은 정부가 격추 사건의 세부 사항을 더 자세히 조사하기 위한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20]

참조

[1] 뉴스 À la Mémoire de Cyprien Ntaryamira http://www.arib.info[...] 1996-04
[2] 뉴스 Obituary: Cyprien Ntaryamira https://www.independ[...] 2021-05-26
[3] 웹사이트 Commémoration du 26ème anniversaire de l'assassinat du Président Cyprien NTARYAMIRA https://assemblee.bi[...] National Assembly of Burundi 2021-06-23
[4] 뉴스 Freed From Fear 1993-09
[5] 뉴스 Reformer who tried to do the impossible 1994-04-08
[6] 뉴스 New President Elected https://books.google[...] 1994-01
[7] 뉴스 Burundi 1994-03
[8] 뉴스 New President https://books.google[...] 2003
[9] 뉴스 New strife erodes Burundi peace hopes https://www.csmonito[...] 2021-06-01
[10] 뉴스 2 Burundi Tribes Battle In Capital 1994-03-24
[11] 뉴스 Rwanda, Burundi Crisis : Ethnic strife links two countries https://www.newspape[...] 1994-04-08
[12] 뉴스 Burundi and Rwanda: Joined in death 1994-04-09
[13] 뉴스 Burundi Teeters Between Peace, Renewed Killing Africa 1994-06-04
[14] 뉴스 Specter of Hate Stalks Burundi, Too: Tutsi soldiers and armed Hutu rebels mimic Rwandans. 1994-04-26
[15] 뉴스 40 Injured by Grenade in Latest Outbreak of Burundi Violence https://www.newspape[...] 1994-09-10
[16] 뉴스 Thousands of people jam cathedral for funeral of Burundi president 1994-04-17
[17] 뉴스 " Les Burundais ont le droit de savoir les circonstances dans lesquelles il a trouvé la mort " 2018-04-05
[18] 웹사이트 Burundi silent over shared tragedy http://news.bbc.co.u[...] 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 2021-06-23
[19] 웹사이트 Former President's widow asks for recognition and justice for her husband https://www.iwacu-bu[...] 2021-05-27
[20] 뉴스 27ème commémoration de l'assassinat du président Cyprien Ntaryamira : AVOD réclame vérité et justice https://www.iwacu-bu[...] 2021-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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