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카 비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모니카 비티는 이탈리아의 배우로, 1931년 로마에서 태어나 2022년 사망했다. 1950년대 후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정사》, 《밤》, 《태양은 외롭다》, 《붉은 사막》 등 그의 대표작에 출연했다. 1974년 영화 《폴베레 디 스텔레》로 다비드 디 도나텔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1995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1990년 영화 《비밀 스캔들》을 연출하며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나스트로 디아르젠토 - 알바 로르바케르
알바 로르바케르는 이탈리아의 배우로, 영화 《사랑의 재발견》으로 데뷔하여 《날들과 구름의 흐름》으로 다비드 디 도나텔로 여우조연상을, 《조반나의 아버지》로 다비드 디 도나텔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으며, 언니와 함께 영화에 출연하고 TV 드라마에서 내레이션과 연기를 했다. - 나스트로 디아르젠토 - 오르넬라 무티
이탈리아 배우 오르넬라 무티는 14세에 데뷔하여 1970년대와 80년대에 이탈리아 유명 배우들과 함께 코미디와 드라마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고,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장르의 영화와 TV 프로그램에 출연, 국제적인 경력을 쌓았으며, 결혼과 출산, 사업가 활동, 러시아 시민권 취득 의사 표명 등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다. -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 마리오 모니첼리
마리오 모니첼리는 100편 이상의 각본과 60편 이상의 영화를 감독하며 이탈리아식 코미디 장르를 개척하는 데 기여한 이탈리아 거장 영화감독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사회 풍자와 해학을 곁들인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 에토레 스콜라
에토레 스콜라는 사회 비판적 시각과 휴머니즘을 결합한 작품들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이자 각본가로,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사랑했네》, 《특별한 날》 등의 대표작이 있으며 말년에는 오페라 연출가로도 활동했다. - 신경 질환으로 죽은 사람 - 톰 시즈모어
톰 시즈모어는 웨인 주립대학교와 템플대학교를 졸업하고 1989년 영화 데뷔 후 다양한 작품에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으나, 마약 중독과 범죄 혐의로 어려움을 겪다 2023년 뇌동맥류로 사망한 미국의 배우이다. - 신경 질환으로 죽은 사람 - 릴리언 디즈니
릴리언 디즈니는 월트 디즈니의 아내로서 미키 마우스의 이름에 기여했으며, 결혼 생활 동안 두 딸을 두었고, 월트 디즈니 사후에는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며 디즈니 제국을 넘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니카 비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마리아 루이사 체차렐리 |
출생일 | 1931년 11월 3일 |
출생지 | 로마, 이탈리아 왕국 |
사망일 | 2022년 2월 2일 |
사망지 | 로마, 이탈리아 |
활동 기간 | 1954년–1992년 |
직업 | 배우 |
배우자 | 로베르토 루소(2000년) |
웹사이트 | 모니카 비티 사이트 |
주요 작품 | |
주요 작품 | 정사(1960년) 태양은 외로워 붉은 사막 |
수상 | |
베를린 국제 영화제 | 은곰상 (특별 개인 공헌상) 1984년 필르트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 명예 황금사자상 1995년 |
2. 생애
1931년 11월 3일 로마에서 마리아 루이사 체치아렐리(Maria Luisa Ceciarelliita)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연기에 관심을 보여 10대 시절 아마추어 극단 활동을 시작했고, 로마의 국립 연극 예술 아카데미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졸업 후 유럽을 순회하며 연극 배우로 활동했다.
1954년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1957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극단에 합류한 것이 경력의 전환점이 되었다.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 《모험》(1960), 《밤》(1961), 《일식》(1962), 《붉은 사막》(1964) 등에 연이어 출연하며 특유의 분위기와 연기력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 안토니오니 감독과는 연인 관계이기도 했다.
안토니오니와의 작업 이후에는 코미디를 포함한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도전하며 연기 폭을 넓혔다. 1974년 영화 《폴베레 디 스텔레》(Polvere di stelleita)로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다수의 상을 받으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1995년에는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평생 공로상에 해당하는 명예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1995년 영화 감독 겸 사진작가인 로베르토 루소(Roberto Russoita)와 결혼했다. 오랜 투병 끝에 2022년 2월 2일 로마에서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49]
2. 1. 초기 생애 (1931-1953)
1931년 11월 3일 로마에서 마리아 루이사 체치아렐리(Maria Luisa Ceciarelliita)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안젤로 체치아렐리(Angelo Ceciarelliita), 어머니는 아델레 비틸리아(Adele Vittigliaita)이다. 예명 '비티'는 어머니의 처녀 적 성에서 따왔다.[5][6]10대 시절부터 아마추어 연극 무대에 섰으며, 로마 국립 연극 예술 아카데미에서 연기를 공부하여 1953년에 졸업했다. 학창 시절 피트먼 칼리지(Pittman's College)에서 다리오 니코데미(Dario Niccodemi)의 연극 ''라 네미카''(La nemicaita) 자선 공연에 십대 역할로 참여했다.

졸업 후 이탈리아 연극단과 함께 독일 순회 공연을 했고, 로마에서는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의 ''만드라고라''(La Mandragolaita) 공연으로 처음 무대에 섰다.
2. 2. 초기 경력 (1954-1959)
1931년 11월 3일, 로마에서 마리아 루이사 체치아렐리(Maria Luisa Ceciarelliit)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0대 시절부터 아마추어 극단에서 활동했으며, 로마의 국립 연극 예술 아카데미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유럽을 순회하며 무대 배우로 경력을 쌓았다.비티의 첫 영화 출연은 1954년 에도아르도 안토니(Edoardo Antonit) 감독의 영화 《웃어! 웃어! 웃어!》(Ridere! Ridere! Ridere!it)에서 맡은 단역이었으나, 크레딧에는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이후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Adriana Lecouvreurit)》(1955), TV 시리즈 《알피에레(L'alfiereit)》(1956), TV 영화 《퀘스티 라가치(Questi ragazziit)》(1956)와 《일 툰넬(Il tunnelit)》(1958) 등에 출연했다. 또한 1958년에는 TV 시리즈 《몽토리올(Mont-Oriolit)》의 한 에피소드에 출연했으며, 영화 《마돈나 거리의 큰 거래(I soliti ignotiit)》에서 배우 로사나 로리(Rossana Roryit)의 목소리를 더빙하기도 했다.
1957년에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 감독의 극단에 합류하여 그의 영화 《사랑의 방황》(Il Gridoit)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비티가 배우로서 처음으로 널리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6세 때인 1958년, 마리오 아멘돌라(Mario Amendolait) 감독의 영화 《르 드리테(Le dritteit)》에서 프랑코 파브리치(Franco Fabriziit)와 함께 주연을 맡으면서부터였다.[7] 1959년에는 TV 영화 《일 부르제제 젠틸루오모(Il borghese gentiluomoit)》에 출연했다.[8][9]
2. 3. 안토니오니와의 협업 (1960-1964)
1957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밀라노 테아트로 누오보 극단에 합류하여,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 《일 그리도》(1957)에서 도리안 그레이의 목소리를 더빙하는 것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후 몇 년간 안토니오니 영화에서 소외를 강렬하게 그려내는 역할을 맡으며 감독의 생각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10]비티는 국제적으로 극찬받은 안토니오니의 영화 《모험》(L'Avventura, 1960)에서 주연을 맡아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실종된 여자친구의 연인과 관계를 맺게 되는 무심하고 차가운 인물을 연기했다.[2][11] 비티의 스크린 존재감은 "놀랍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녀는 안토니오니가 제작비를 모으는 데 도움을 주고 힘든 로케이션 촬영을 함께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모험》은 비티를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하게 했고,[6] 훗날 이탈리아에서는 이 영화를 기념하는 우표에 그녀의 모습이 담기기도 했다.[12] 뉴욕 타임스는 비티의 "염세적인 분위기가 그녀가 연기한 여주인공들의 비현실적인 느낌을 완벽하게 전달한다"고 평했다.[13]
이후 비티는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 《밤》(La Notte, 1961)에서 장느 모로,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와 함께 주연을 맡아 다시 한번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6] 그녀는 TV 영화 《흰 밤》(Le notti bianche, 1962)에도 출연했으며,[14] 안토니오니와의 세 번째 협업 작품인 《일식》(L'Eclisse, 1962)에서는 알랭 들롱과 호흡을 맞췄다.[15]
이 시기 비티는 다른 감독들의 작품에도 출연했다. 여러 스타가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사랑의 세 가지 우화》(Three Fables of Love, 1962)에 출연했고, 《달콤하고 신랄한》(Sweet and Sour, 1963)에는 카메오로 등장했다. 로제 바딤 감독의 코미디 영화 《엉뚱하고 장난기 많은 샤토》(Nutty, Naughty Chateau, 1963)에서는 주연을 맡았다. 또 다른 옴니버스 영화 《높은 불신》(High Infidelity, 1964)에도 참여했다.
1964년, 비티는 안토니오니와의 네 번째 영화인 《붉은 사막》(Il Deserto Rosso)에서 리처드 해리스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2][16] 안토니오니 감독은 비티에 대해 "그녀를 보고 연출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분명히 영감을 받지만, 내가 그녀에게 주는 역할은 그녀 자신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기도 했다.[17] 비티와 안토니오니의 연인 관계는 이 시기 이후 끝났고, 두 사람은 1980년 《오버발트의 수수께끼》(Il mistero di Oberwald)를 작업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함께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36]
안토니오니와의 협업 시기 막바지에 비티는 틴토 브라스 감독의 코미디 영화 《비행접시》(The Flying Saucer, 1964)와 옴니버스 영화 《인형들》(Le bambole, The Dolls, 1964)에도 출연했다.[18]
2. 4. 국제적인 활동 (1965-1979)

비티의 첫 번째 영어 영화는 테렌스 스탬프와 더크 보가드가 공동 주연을 맡고 조셉 로시가 감독한 모드족(Mod) 제임스 본드 스파이 패러디 영화 ''모데스티 블레이즈''(1966)였다. 이 영화는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 혹평을 받았다.[19]
그녀는 옴니버스 영화 ''퀸즈''(1966), 텔레비전 시리즈 ''Les fables de La Fontaine''(1966), 장 소렐과 함께 출연한 ''빨리 날 죽여줘, 난 추워''(1967), 그리고 ''재미로 너와 결혼했어''(1967)에 출연했다.
비티는 토니 커티스와 함께 출연한 ''십자군 전쟁 길에서 만난 소녀...''(1967),[11] 스탠리 베이커와 함께 출연한 ''총을 든 소녀''(1968),[46] 모리스 로네와 함께 출연한 ''암캐는 피를 원한다''(1969), 그리고 알베르토 소르디와 함께 출연한 ''도와줘요, 내 사랑''(1969)에 출연했다.[20]
2. 5. 1970년대 (1970-1979)

비티는 에토레 스콜라 감독의 매우 성공적인 로맨틱 코미디 영화 ''드라마 델라 젤로시아'' (''피자 삼각형'', 1970)에서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6] 이후에는 ''니니 티라부시오, 라 도나 케 인벤토 라 모사'' (1970), 소르디와 함께 출연한 ''레 코피에'' (1970), ''평화주의자'' (1970), ''라 수퍼테스티모네'' (1971), ''우리는 그렇게 여자다'' (1971), 그리고 ''명령은 명령이다'' (1972)에 출연했다.[21]
비티는 ''라 토스카'' (1973)의 한 버전에 출연했고,[5] 1970년대 몇 년 동안 파트너였던 카를로 디 팔마 감독의 여러 코미디 영화에 출연했는데, ''테레사 도둑'' (1973)으로 시작했다.[22] 그녀는 알베르토 소르디 감독의 ''폴베레 디 스텔레'' (1973)을 제작했으며,[5] 이 작품으로 1974년 다비드 디 도나텔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23]
비티는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자유의 유령'' (1974)의 비네트 중 하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24] 그녀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와 함께 ''불멸의 독신남'' (1975)[25]와 ''검은 가죽의 금발'' (1975)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22][26]
그녀는 ''오렌지 소스에 담근 오리'' (1975),[27] ''미미 블루엣… 피오레 델 미오 지아르디노'' (1976),[22] ''바스타 케 넌 시 사피아 인 지로!..'' (1977),[28] ''랄트라 메타 델 치엘로'' (1977),[29] ''국가 이유'' (1978), ''일 실린드로'' (1978, 텔레비전용), ''페르 비베레 메글리오, 디베르티테비 콘 노이'' (1978), ''아모리 미에이'' (1978),[30] 그리고 우르술라 안드레스와 함께 출연한 ''립스틱을 바른 호랑이'' (1979)에 출연했다.
비티의 두 번째 영어 영화는 마이클 리치 감독의 ''거의 완벽한 관계'' (1979)로, 키스 캐러다인과 공동 주연을 맡았으며, 칸 영화제 기간에 배경을 두고 있다.[31] 당시의 ''뉴욕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비티는 장거리 여행, 특히 항공 여행을 싫어하고 자신의 영어 실력이 충분히 높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국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32] 실제로 유럽을 떠나는 것을 매우 꺼렸기 때문에 파라마운트 픽처스는 ''거의 완벽한 관계'' 개봉을 홍보하기 위해 미국에서 조직한 홍보 투어의 첫 번째 단계를 취소해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33]
2. 6. 후기 경력 (1980-1990)

비티는 안토니오니와 다시 만나 '''오버발트의 수수께끼'''(''Il mistero di Oberwald'', 1980)에 출연했다.[32] 이후 '''이제 너는 이해할 수 없어''' (1980), '''호텔 방''' (1981), '''질투의 탱고''' (1981), 소르디와 함께 출연한 '''나는 네가 내가 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알고 있어''' (1982), '''사과해도 괜찮아''' (1982), '''플리트''' (1983), 그리고 '''프란체스카는 내 것이다''' (1986)에 출연했다. 그녀는 마지막 두 편의 영화('플리트', '프란체스카는 내 것이다')의 공동 각본을 쓰기도 했다. 1984년 프랑스는 그녀에게 예술문학훈장을 수여했다. 프랑스 문화부 장관 잭 랭은 그녀가 이탈리아 영화의 쇄신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고 칭찬하며 "프랑스 영화가 다른 유럽 국가들 한가운데 섬으로 남지 않도록 이탈리아 영화가 다시 건강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34] 1995년 1월 26일, 그녀는 그 훈장의 사령관으로 승격되었다.[35] 1986년까지 비티는 배우이자 교사로서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1989년, 비티는 각본과 연출을 시도하여 '''비밀 스캔들''' (1990)을 만들었고, 이 영화에서 엘리엇 굴드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36]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그녀는 영화계에서 은퇴했다.[2] 1990년대에는 텔레비전 드라마 '''너는 나를 사랑해?''' (1992)에 출연하며 텔레비전 활동을 했다.[37]
1993년 비티는 프랑스의 크레테유 국제 여성 영화제에서 페스티벌 트리뷰트 상을 수상했다.[38]
2. 7. 은퇴 이후 (1991-2022)
2000년, 1973년부터 관계를 맺어온 로베르토 루소와 결혼했다.[39] 그녀는 2002년 파리에서 열린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초연에 참석한 것이 마지막 공식 석상이었다.[40][41]2011년에는 알츠하이머병이 "지난 15년 동안 그녀를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42][43] 2018년, 그녀의 남편 루소는 비티가 로마의 자택에서 자신과 함께 여전히 생활하고 있으며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그녀를 돌보고 있다고 확인했다.[44]
비티는 2022년 2월 2일 로마에서 루이 소체 치매 합병증으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45][49]
3. 주요 작품
모니카 비티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페르소나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대표작들에 연이어 출연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특히 정사(1960), 밤(1961), 태양은 외롭다(1962), 붉은 사막(1964) 등 안토니오니 감독과의 협업은 그녀의 초기 경력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이 외에도 코미디 영화 모데스티 블레이즈(1966), 질투(1970), 초현실주의 영화 자유의 환상(1974)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3. 1. 영화
그롤라 도로 여우주연상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외국어 영화 여우주연상 후보
나스트로 디아르젠토 여우주연상 후보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골든 플레이트상
나스트로 디아르젠토 조연상 후보
나스트로 디아르젠토 조연상 후보
그롤라 도로 여우주연상 후보
나스트로 디아르젠토 여우주연상 후보
나스트로 디아르젠토 여우주연상
이탈리아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그롤라 도로 여우주연상
나스트로 디아르젠토 여우주연상 후보 (또한 질투에서도 후보)
줄리아
("사자" 편)
조이
안눈치아타
테레사
알베르타
엘리아나
캐서린
에리카
팔미라
아가타
로라
풀비아
("낭만적인" 편)
("엄마" 편)
("사랑의 노예" 편)
("세상은 걷는다" 편)
("베트남" 편)
("그리고 주님은 오셨다" 편)
("오토바이" 편)
("주인의 마음" 편)
("하늘의 구석" 편)
("팜므파탈" 편)
("로마 21-21에 전화하세요" 편)
나스트로 디아르젠토 여우주연상
리아
("오해" 편)
이탈리아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여우주연상 후보
나스트로 디아르젠토 여우주연상 후보
이탈리아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신인 감독상 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