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들롱
1. 개요
알랭 들롱은 1935년 파리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로, 2024년 8월 18일 사망했다. 17세에 해군에 입대하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으며, 제대 후 영화계에 진출하여 1960년 영화 《태양은 가득히》로 스타덤에 올랐다. 《로코와 그의 형제들》, 《사무라이》 등 거장 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하며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85편의 영화에 출연, 82편에서 주연을 맡았다. 2019년 칸 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으며, 2019년 뇌졸중을 겪고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그의 사생활은 여러 여성과의 관계, 법적 문제, 가족 갈등 등으로 끊임없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으며,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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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알랭 들롱 |
|---|---|
| 로마자 표기 | Alain Delon |
| 출생 이름 | 알랭 파비앵 모리스 마르셀 들롱 |
| 출생일 | 1935년 11월 8일 |
| 출생지 | 프랑스 오드센주 소 |
| 사망일 | 2024년 8월 18일 |
| 사망지 | 프랑스 루아레주 두시몽코르봉 |
| 국적 | 프랑스 스위스 |
| 직업 | 배우 영화 프로듀서 영화 각본가 가수 사업가 |
| 활동 기간 | 1949년–2019년 |
| 키 | 178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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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 프랑스 해군 해병대 |
|---|---|
| 복무 기간 | 1952년–1956년 |
| 참전 전투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 주요 작품 | 태양은 가득히 (1960년) 젊은이의 모든 것 (1960년) 태양은 외로워 (1962년) 표범 (1963년) 지하실의 멜로디 (1963년) 모험자들 (1967년) 사무라이 (1967년) 안녕, 친구 (1968년) 볼사리노 (1970년) 레드 선 (1971년) |
|---|---|
| 전체 작품 목록 | 전체 목록 |
| 명예 황금종려상 | 2019년 영화 및 연극계에서의 오랜 공로 |
| 명예 황금곰상 | 1995년 영화 및 연극계에 대한 오랜 기여 |
| 작품상 | 1976년 파리의 등불이 멀리서 보인다 |
| 남우주연상 | 1984년 우리들의 이야기 |
| 금상 | 1981년 테헤란 43 |
| 배우자 | 나탈리 바르텔레미(1964년 결혼, 1969년 이혼) |
|---|---|
| 동거인 | 로미 슈나이더 (1958년–1964년) 미레유 다르크 (1968년–1983년) 로잘리 반 브레멘 (1987년–2001년) |
| 자녀 | 앙토니 아누슈카 알랭파비앙 크리스티앙 아론 불로뉴 포함 최소 4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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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스위스로 이민간 사람 -
지지 장메르
지지 장메르는 프랑스의 발레리나, 샹송 가수, 배우로 활동하며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경력을 시작해 롤랑 프티와 결혼 후 발레 드 파리의 간판 무용수가 되었고, 샹송 가수로 데뷔하여 그랑프리 뒤 디스크를 수상했으며, 영화 배우로도 활동하다 2020년 사망했다. -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이민간 사람 -
알베르트 코헨
알베르트 코헨은 그리스 출생으로 프랑스에서 성장한 스위스 소설가로, 유대인 정체성과 이민자의 삶, 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을 발표했으며 대표작으로 자전적 소설 『솔라르』가 있다. -
스위스로 귀화한 사람 -
티나 터너
로큰롤의 여왕으로 불리는 미국의 가수이자 배우 티나 터너는 아이크 터너와 듀엣 및 솔로 활동으로 성공을 거두며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고 그래미상을 12번 수상하는 등 음악적 업적을 이루었으며, 1970년대 불교로 개종 후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
스위스로 귀화한 사람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독일 태생의 이론물리학자로, 상대성이론을 개발하고 광전 효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질량-에너지 등가 공식으로도 유명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 한 명이다. -
프랑스의 작사가 -
알랭 바리에르
프랑스의 샹송 가수 알랭 바리에르는 1961년 자작곡으로 우승 후 1963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국제적 인지도를 얻었으며, "Elle était si jolie" 등의 히트곡으로 프랑스 최고 스타가 되었고, 독립 레이블 설립, 미국 생활, 재기 후에도 활동하다 2019년 사망했다. -
프랑스의 작사가 -
이브 몽탕
이브 몽탕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영화 《밤의 문》의 주제가 〈고엽〉으로 인기를 얻었고, 크루너 스타일의 노래와 배우 활동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으며 1991년 사망했다.
2. 생애
1935년 파리 남부에서 태어난 알랭 들롱은 중학교 졸업 후 17세에 프랑스 해군에 입대했다. 퐁트레앙 해양훈련센터에서 훈련을 받고 보르메트 통신학교에서 복무했지만, 장비 절도 사건에 연루되어 해군에서 퇴출당하고 20번째 생일을 감옥에서 보냈다. 프랑스 인도차이나 사이공에서 복무하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도 참전했다. 제대 후 미국과 멕시코를 방랑하다 1956년 프랑스로 돌아와 몽마르트르 등지를 전전하며 여러 임시직에 종사했다. 이 시기 그는 미래의 가수 달리다를 만나 연애를 했고, 피갈과 몽마르트르의 지하 세계 인물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삶을 경험했다.
이후 영화계에 진출하여 이브 알레그레 감독의 여자가 사건에 얽힐 때로 데뷔했다. 1960년,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에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청년을 연기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을 비롯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조셉 로지 등 거장 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하며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로미 슈나이더와의 만남과 관계는 그의 삶과 연기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85편의 영화에 출연, 82편에서 주연을 맡았고, 24편의 영화를 제작, 2편의 영화를 감독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할리우드 진출도 시도했지만 프랑스와 일본에서 더 큰 인기를 얻었다.
2.1. 초기 생애
1935년 11월 8일, 파리 부근 쏘(Sceaux)에서 태어났다. 파리 남부의 부유한 교외 지역인 쏘(Sceaux)의 99 뤼 두당(Rue Houdan)에서 영화관 '르 레지나(Le Régina)'의 영사기사였던 프랑수아 파비앙 들롱과 약국 조수였던 에디트 마리 Suzanne 아놀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시민 계급 가정에서 자랐다. 네 살이던 1939년 부모가 이혼했고, 이후 양부모에게 맡겨졌으나, 어린 시절의 상처로 남았다. 양부모는 발드마른(Val-de-Marne)의 프레느 감옥(Fresnes Prison) 교도관이었다. 1945년에는 친프랑스 협력자 피에르 라발(Pierre Laval)의 처형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양부모 사망 후 친부모에게 돌아왔으나 부모의 관심 부족으로 말썽꾸러기가 되어 여러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3세에 쌩 니콜라 디뉘 연구소(Saint Nicolas d'Igny Institute)에 입학했고, 짧은 무성 영화에도 출연했다. 14세에 미국으로 도망치려다 실패하고, 학업을 포기했다. 이후 어머니가 재혼한 정육점 및 식료품점에서 3년간 일했다. 끊임없는 파티와 싸움, 갱단 활동 등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머니의 재혼과 부모의 이혼, 그리고 이후의 불안정한 가정 환경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의붓아버지와의 불화와 어머니의 무관심은 그의 소외감을 심화시켰다.
2.2. 군 복무
1935년 파리 남부에서 태어난 알랭 들롱은 중등교육을 마친 후 17세에 프랑스 해군에 지원입대했다. 퐁트레앙 해양훈련센터에서 훈련을 받고 1953년 보르메트 통신학교에서 복무를 계속했으나, 장비 절도 사건에 연루되어 해군으로부터 복무 중단 또는 복무 기간 연장의 선택권을 받았다.
결국 일등 수병으로 프랑스 인도차이나 사이공 병기창의 보호 부대에 배치되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지프차 절도 및 사고로 체포되어 무선 통신 면허가 취소되고 해군에서 퇴출되었으며, 20번째 생일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군 기강과 명예심, 프랑스 국기에 대한 존중을 깨닫고 무기에 대한 열정을 키웠으며, 두치 파스 오 그리스비(Touchez pas au grisbi)에서 장 가방(Jean Gabin)의 연기에 매료되었다.
1955년 휴전 협정에 따라 제대 후에는 미국과 멕시코를 방랑하며 1956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부모와의 불화로 인해 몽마르트르 등을 전전하며 여러 임시직을 전전했고, 생제르맹데프레에 정착하여 농산물 취급원, 웨이터 등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그는 미래의 가수 달리다(Dalida)를 만나 연애를 하기도 했고, 피갈과 몽마르트에서 프랑스 지하 세계 인물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가치관에 매료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배우 인생에 나름의 영향을 미쳤다. 미성년자였던 그는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입대했으나, 이 과정에서 어머니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되었다.
2.3. 데뷔 및 전성기
1935년 파리 남부에서 태어난 알랭 들롱은 중등교육 후 17세에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세계를 방랑하다 파리로 돌아와 영화계에 진출, 이브 알레그레 감독의 여자가 사건에 얽힐 때로 데뷔했다. 1960년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에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청년을 연기하며 국제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 등 명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하며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다. 1958년 영화 크리스틴 촬영을 통해 로미 슈나이더와 만나 약혼했으나 파혼했다. 1959년에는 프랑스에서 큰 성공을 거둔 여자는 약하다를 통해 미국에도 진출하여 뉴욕에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 해, 로코와 그의 형제들 촬영 중 진행된 인터뷰에서 장 마레를 자신의 우상으로 언급하며 꾸준히 자신을 지키려는 자세를 보였다. 태양은 가득히와 로코와 그의 형제들의 성공은 그를 세계적인 배우로 만들었고, 1961년에는 존 포드의 희곡을 바탕으로 로미 슈나이더와 함께 무대 데뷔를 하기도 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주연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결국 피터 오툴이 캐스팅되었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일식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누구나 이길 수 있다 촬정을 통해 제작에 참여하게 되면서 비스콘티 감독의 표범에서 버트 랭커스터,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와 함께 출연하며 명성을 더욱 높였다. 이후 할리우드 진출을 시도하며 MGM, 컬럼비아, 유니버설 등 여러 스튜디오와 작업했으나 미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일본에서는 여전히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2.4. 배우 활동
1935년 파리 남부에서 태어난 알랭 들롱은 중등교육 후 17세에 군에 입대, 제대 후 세계를 방랑하다가 프랑스 영화계에 진출했다. 알레그레 감독의 《여자가 다가올 때》로 데뷔한 그는 1960년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에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청년을 연기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루치노 비스콘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조셉 로지 등 거장 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하며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다. 미녀 배우들과의 숱한 스캔들로도 유명했던 그는 43년간 85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이 중 82편에서 주연을 맡았다. 또한 24편의 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2편을 감독하기도 했다. 영국 영화 한 편과 할리우드 영화 네 편 출연 후 프랑스로 돌아와 리노 벤투라와 함께 주연한 《마지막 모험》은 1960년대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지만, 북미에서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장-피에르 멜빌 감독과 함께한 네오 누아르 범죄 스릴러 《사무라이》 와 쥘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악마처럼 당신의 것》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로미 슈나이더와 함께 출연한 《죽은 자의 영혼들》과 오토바이를 탄 소녀는 영국과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하며 그의 인기를 더욱 확고히 했다. 찰스 브론슨과 함께 출연한 《친구여 안녕》은 프랑스 박스오피스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로미 슈나이더와 다시 호흡을 맞춘 《수영장》은 둘 사이의 복잡한 감정을 스크린에 생생하게 담아내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영화 촬영 중 발생한 그의 비서의 죽음과 관련된 "마르코비치 사건"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과 관련된 논란 속에서 그는 동성애에 대한 질문에 대해 "내가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이 잘못입니까?"라고 답하며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그는 제프, 시실리안 클랜, 보르살리노 등 갱스터 영화에 출연했지만, 미국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70년대 초, 그는 다시 할리우드 진출을 시도했고, 《트로츠키 암살》, 《붉은 태양》 등에 출연했다. 1973년에는 달리다와 함께 부른 듀엣곡 "파롤 파롤"이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할리우드에서의 활동은 《스콜피오》의 흥행 실패로 이어졌고, 이후 그는 프랑스 영화로 돌아와 《불탄 헛간》, 《크리지》, 《두 남자의 도시》, 《보살리노 앤드 컴퍼니》 등을 제작했다. 《조로》에서 주인공을 연기하며 이탈리아-프랑스 합작 영화에도 출연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범죄 영화들을 제작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1976년 《몽시외 클랭》으로 세자르 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서두르는 남자》, 《부패한 남자의 죽음》, 《갱》, 《조심해, 아이들이 보고 있어》 등의 스릴러 영화를 제작하고 주연을 맡았다. 1979년에는 할리우드 진출을 마지막으로 시도했지만 《콩코드…에어포트 '79》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80년대에는 《테헤란 43》, 《경찰의 가죽》, 《충격》, 《투사》 등의 작품에 출연했으며, 베르트랑 블리에 감독의 《우리의 이야기》로 세자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스완 인 러브》 등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후에도 그는 《경찰의 약속》, 《패시지》, 《잠자는 경찰을 깨우지 마라》, 《댄싱 머신》 등의 스릴러 영화에 출연했고,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누벨바그》에서는 쌍둥이 역할을 맡았다. 그의 마지막 주요 작품은 장 폴 벨몽도와 함께 출연한 《두 번의 기회》였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1997년 은퇴를 선언했으나, 간헐적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2000년대에는 TV 드라마 《파비오 몬탈레》, 《프랭크 리바》에 출연하며 인기를 이어갔다. 2008년에는 《아스터릭스: 올림픽 게임》에서 줄리우스 시저 역을 맡았고, 2011년에는 TV 영화 《평범한 하루》에 출연했다. 2019년에는 칸 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으나, 과거 여성에 대한 그의 발언으로 인해 논란이 있었다. 2019년에는 새 싱글 "Je n'aime que toi"를 발표하기도 했다. 1950년대 말 로미 슈나이더와의 만남과 관계, 그리고 여러 여성과의 관계는 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는 2017년 은퇴 의향을 밝혔으나,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2.5. 제작 및 감독 활동
85편의 영화에 출연한 알랭 들롱은 그 중 82편에서 주연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암흑가의 두사람 등 24편의 영화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연출 경험도 있는데, 최후의 방어선, 형사 이야기 등 2편의 영화를 직접 감독했다.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의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영화계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한 셈이다. 특히, 위험한 속삭임과 독수리 등의 작품에서 그의 연출 능력이 두드러졌다.
2.6. 은퇴
2018년에는 쥘리엣 비노슈와 공동 주연으로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신작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2018년 11월 프랑스 언론은 이 프로젝트가 취소되었음을 발표했다. 중단의 구체적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2019년 5월 19일,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영화계에 대한 긴 세월의 공헌을 기려 알랭 들롱에게 명예 황금종려상이 수여되었다. 하지만 그의 여성에 대한 발언으로 인해 수상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들롱은 이 상을 받으며 "저에게는 이것은 경력의 끝이 아니라 삶의 끝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사후 헌정을 받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2019년 7월 뇌졸중을 일으켜 스위스에서 요양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스위스 병원에서는 인지 기능 검사를 5번 받았지만 모두 통과하지 못했고, 이복 여동생이 다른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하는 소동으로 번졌다. 퇴원 후에는 프랑스 루아르셰르주 두시에 있는 자택에서 지냈으며, 2024년 1월에는 아들인 앙투안이 알랭 들롱이 자신의 쇠퇴에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언론에 밝혔다. 2024년 2월에는 법원의 지시를 받고 자택을 방문한 담당자가 권총을 발견하여, 신고를 받은 경찰 당국은 허가 없이 소지한 권총 72정을 압수했을 뿐만 아니라 3000발 이상의 탄약과 사격장도 발견했다. 같은 해 8월 18일, 두시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한 것이 세 자녀에 의해 발표되었다.
2.7. 사망
알랭 들롱은 88세의 나이로 2024년 8월 18일, 루아르셰르주 두시에 있는 자택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평화롭게 사망했다. 같은 해 초에 B세포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사망 전, 2019년 7월 뇌졸중을 일으켜 스위스에서 요양했으며, 퇴원 후에는 두시 자택에서 지냈다. 2024년 1월에는 아들 앙투안이 알랭 들롱의 쇠퇴에 대한 심각성을 언론에 알렸고, 같은 해 2월에는 법원의 지시로 자택을 방문한 담당자가 권총 72정과 3000발 이상의 탄약, 사격장을 발견하는 사건이 있었다.
3. 출연 작품
알랭 들롱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로서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1960),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태양은 외로워》(1962),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레오파드》(1963),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사무라이》(1967)와 《암흑가의 세사람》(1970), 테렌스 영 감독의 《레드선》(1971) 등이 있다. 로튼 토마토에 따르면, 그의 가장 호평받은 영화는 《태양은 가득히》(1960),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 《일식》(1962), 《표범》(1963), 《사무라이》(1967), 《수영장》(1969), 《붉은 원》(1970), 그리고 《몽씨에 클랭》(1976)이다. 이 외에도 다수의 작품에서 주연 및 조연으로 활약하며, 제작에도 참여하는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다음은 알랭 들롱의 주요 출연 작품 목록이다.
| 공개년 | 한국어 제목 원제 | 역할 | 비고 |
|---|---|---|---|
| 1957년 | 여자가 사건에 얽힐 때 Quand la femme s'en mêle | 조 | |
| 침묵 속의 포옹 Sois belle et tais-toi | 루루 | ||
| 1958년 | 오직 사랑만을 Christine | 프란츠 로브하이너 | |
| 1959년 | 아가씨, 살살하세요! Faibles Femmes | 줄리앙 페날 | |
| 학생들의 길 Le Chemin des écoliers | 앙투안 미쇼 | ||
| 1960년 |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 | 톰 리플리 | |
| 젊은이들 모두 Rocco e i suoi fratelli | 로코 파론디 | ||
| 1961년 | 삶의 기쁨 Che gioia vivere | 율리세스 체코나토 | |
| 찬란한 연인들 Amours célèbres | 알베르트 왕자 | ||
| 1962년 | 태양은 외로워 L'Eclisse | 피에로 | |
| 프랑스식 십계명 Le Diable et les dix commandements | 피에르 | ||
| 1963년 | 지하실의 멜로디 Mélodie en sous-sol | 프랑수아 베를로 | |
| 표범 Il Gattopardo | 탕크레디 | ||
| 1964년 | 검은 튤립 La Tulipe noire | 줄리앙/기욤 드 상플루 백작 (이중 역) | |
| 위험 가득한 곳 Les Félins | 마르크 | ||
| 방랑하는 늑대 L'Insoumis | 토마 | ||
| 노란 롤스로이스 The Yellow Rolls-Royce | 스테파노 | ||
| 1965년 | 도둑을 잡아라 Once a Thief | 에디 | |
| 1966년 |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Lost Command | 피에르 에스크라비에 | |
|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Paris brûle-t-il? | 자크 샤방-델마스 | ||
| 텍사스 Texas Across the River | 돈 안드레아 발다자르 | ||
| 1967년 | 모험가들 Les Aventuriers | 마누 보렐리 | |
| 사무라이 Le Samouraï | 제프 코스텔로 | ||
| 악마 같은 당신 Diaboliquement vôtre | 피에르 라그랑주/조르주 캄포 | ||
| 1968년 |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이야기 Histoires Extraordinaires | 윌리엄 윌슨 | |
| 그 가슴에 다시 한번 La Motocyclette | 다니엘 콜로니 | ||
| 친구여, 안녕 Adieu l'ami | 디노 바란 | ||
| 태양이 알고 있다 La Piscine | 장-폴 | ||
| 1969년 | 제프 Jeff | 로랑 | 제작 겸임 |
| 시실리안 Le Clan des Siciliens | 로제 살트 | ||
| 1970년 | 볼사리노 Borsalino | 로코 시프레디 | 제작 겸임 |
| 의리 Le Cercle rouge | 코레 | ||
| 밤색의 매드레이 Madly | 줄리앙 | ||
| 1971년 | 다시 한번 사랑해 Doucement les Basses | 시몽 메듀 | |
| 레드 선 Soleil Rouge | 고슈 | ||
| 돌아오지 않는 새벽 La Veuve Couderc | 장 | ||
| 1972년 | 암살자의 멜로디 The Assassination of Trotsky | 프랭크 잭슨 | |
| 고등학교 선생님 La Prima notte di quiete | 다니엘레 도미니치 | ||
| 리스본 특급 Un flic | 에두아르 콜먼 | ||
| 쇼크 요법 Traitement de choc | 닥터 데빌러스 | ||
| 1973년 | 스콜피오 Scorpio | 장 로리에 (스콜피오) | |
| 타버린 헛간 Les Granges brulées | 피에르 라르셰 | ||
| 빅 건 Les Grands Fusils | 토니 아르젠타 | ||
| 암흑가의 두 남자 Deux hommes dans la ville | 지노 스트라브리지 | ||
| 1974년 | 개인 생활 La Race des 'seigneurs' | 줄리앙 댄디유 | |
| 연인 관계 Les Seins de glace | 마르크 릴슨 | ||
| 볼사리노 2 Borsalino & Co. | 로코 시프레디 | 제작 겸임 | |
| 1975년 | 알랭 들롱의 조로 Zorro | 조로 / 디에고 | |
| 플릭 스토리 Flic Story | 로제 보르니시 | 제작 겸임 | |
| 르 지탕 Le Gitan | 위고 세나르 (지단) | 제작 겸임 | |
| 1976년 | 파리의 불빛은 멀리 Monsieur Klein | 로베르 클라인 | |
| 부메랑처럼 Comme un boomerang | 잭 바트킨 | 제작 겸임 | |
| 1977년 | 친구여, 조용히 죽어라 Le Gang | 로베르 | 제작 겸임 |
| 프레스티지 L'Homme pressé | 피에르 | 제작 겸임 | |
| 체이서 Mort d'un pourri | 자비에 '자브' 마레샬 | ||
| 1978년 | 나이트 히트 Attention, les enfants regardent | ||
| 1979년 | 에어포트 '80 The Concorde ... Airport '79 | 폴 메트랑 기장 | |
| 미지의 전장/유럽 198X Le toubib | 장-마리 데스프레 | ||
| 1980년 | 포커 페이스/알랭 들롱 위드 잭 드레이 3 hommes à abattre | 미셸 | 각본/출연/제작 |
| 1981년 | 테헤란 43 Tegeran-43 | 조르주 로슈 | |
| 위험한 속삭임 Pour la peau d'un flic | 슈카스 | 감독/각본/출연/제작 | |
| 1982년 | 마지막 표적 Le choc | 마르탱 테리에 | 각본 겸임 |
| 1983년 | 독수리 Le battant | 잭 | 감독/각본/출연/제작 |
| 1984년 | 스완의 사랑 Un amour de Swann | 샤를뤼스 남작 | |
| 자정의 미라주 Notre histoire | 로베르토 | 세자르상 남우주연상 수상 | |
| 1985년 | 복수의 빅 건 Parole de flic | 다니엘 프랫 | 제작 겸임 |
| 1986년 | 데몬 월드 Le passage | 장 디아스 | |
| 1988년 | 알랭 들롱/사형 경찰 Ne réveillez pas un flic qui dort | 외젠 그린델 | 각본 겸임 |
| 1990년 | 누벨바그 Nouvelle Vague | 로제 레녹스 / 리샤르 레녹스 | |
| 1992년 | 카사노바 최후의 사랑 Le Retour de Casanova | 카사노바 | 제작 총괄 겸임 |
| 1995년 | 백일몽 Les Cent et une nuits de Simon Cinéma | 알랭 들롱 | |
| 1998년 | 하프 어 찬스 Une chance sur deux | 줄리앙 | |
| 2002년 | 알랭 들롱의 형사 이야기 Fabio Montale | 파비오 몬탈 | TV 미니시리즈 |
| 2003년 - 2004년 | 알랭 들롱의 형사 프랭크 리바 Frank Riva | 프랭크 리바 | TV 시리즈 |
| 2008년 | 아스테릭스와 친구들 올림픽 대활약 ASTERIX AUX JEUX OLYMPIQUES | 유리우스 카이사르 |
알랭 들롱 출연작 목록도 참고할 수 있다.
3.1. 주요 영화
*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 1960년) 르네 클레망 감독. 니노 로타 음악. 로튼 토마토에 따르면 들롱의 가장 호평받은 영화 중 하나이다.
* 젊은이들 모두 (Rocco e i suoi fratelli, 1960년) 로튼 토마토에 따르면 들롱의 가장 호평받은 영화 중 하나이다.
* 태양은 외로워 (L'eclisse, 1962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 죠반니 푸스코 음악. 로튼 토마토에 따르면 들롱의 가장 호평받은 영화 중 하나이다.
* 표범 (Il Gattopardo, 1963년)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 니노 로타 음악. 로튼 토마토에 따르면 들롱의 가장 호평받은 영화 중 하나이다.
* 사무라이 (Le samouraï, 1967년) 장 피에르 멜빌 감독. 로튼 토마토에 따르면 들롱의 가장 호평받은 영화 중 하나이다.
* 시실리안 (Le Clan des Siciliens, 1969년)
* 볼사리노 (Borsalino, 1970년)
* 레드 선 (Soleil Rouge, 1971년) 테렌스 영 감독. 모리스 자르 음악.
* 몽씨에 클랭 (Monsieur Klein, 1976년) 로튼 토마토에 따르면 들롱의 가장 호평받은 영화 중 하나이다.
3.2. TV 시리즈
알랭 들롱은 2002년 알랭 들롱의 형사 이야기(원제: Fabio Montale)라는 TV 미니시리즈와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방영된 알랭 들롱의 형사 프랭크 리바(원제: Frank Riva)라는 TV 시리즈에 출연했다. 두 작품 모두에서 그는 주연 형사 역할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4. 사생활
== 사생활 ==
알랭 들롱의 사생활은 여러 법적 문제와 가족 간의 갈등으로 끊임없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1960년대 말 발생한 전 바디가드 살인 사건은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고, 최근에는 가족 간의 상속 문제와 건강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68년 발생한 전 바디가드 스테판 마르코비치 살해 사건은 당시 프랑스 총리였던 조르주 퐁피두의 이름까지 거론될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들롱은 중요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지만, 퐁피두의 정치적 영향력과 수사 과정의 혼란 속에서 결국 불기소 처분되었고, 사건은 공소시효 만료로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마르코비치와 들롱의 아내 나탈리 들롱 사이의 불륜 관계라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면서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마르코비치 사건 항목에서 자세히 다룬다.
2023년에는 들롱의 세 자녀가 그의 동거인 히로미 롤린을 상대로 정신적 학대 등 여러 혐의로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몽타르지 검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두 건의 고소를 모두 기각했다. 히로미 롤린 사건 참고.
2024년에는 아들 앙토니 들롱이 아버지의 건강 상태와 상속 문제를 둘러싼 가족 간 갈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논란이 커졌다. 아들과 딸 사이의 갈등은 아버지의 건강 악화와 맞물려 더욱 심각해졌고, 결국 알랭 들롱은 강화된 후견인 제도 아래 놓였다. 가족 민사 분쟁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같은 해 들롱은 총기 불법 소지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총기 불법 소지 혐의 참고.
알랭 들롱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골주의자라고 밝히며, 여러 차례 우파 정치인들을 지지했다. 하지만 국민전선에 대한 긍정적 평가 발언은 그의 정치적 스탠스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적 견해 항목에서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2019년 뇌졸중을 겪은 이후, 알랭 들롱은 건강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림프종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으나, 가족 간의 의견 차이로 치료 중단 결정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는 안락사를 지지하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건강 문제 참고. 이처럼 알랭 들롱의 사생활은 법적 분쟁, 가족 갈등, 건강 문제 등 복합적인 요소가 뒤섞여 그의 이미지와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4.1. 여성 관계
알랭 들롱은 여러 여성과의 관계로 유명하다. 1959년 영화 크리스틴에서 만난 로미 슈나이더와 약혼했으나, 1964년 결별했다. 그들의 관계는 "화려한 연인들", "영원한 약혼자들", "무서운 연인들"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뜨거웠으며,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슈나이더의 가족의 반대도 있었다. 들롱은 2009년 슈나이더와 결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고, 2018년에는 그녀를 인생의 사랑이라고 언급했다.
1963년, 그는 모델 나탈리 바르텔레미(본명 프란신 카노바스)를 만나 1964년 결혼했고, 아들 앙토니 들롱을 낳았다. 하지만 결혼 생활 중에도 마리사 멜과 불륜 관계를 맺었으며, 나탈리 들롱은 들롱의 마음이 여전히 로미 슈나이더에게 있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1969년 이혼했다. 이 기간 동안 앤-마그렛과 라나 우드와도 관계를 맺었다.
1968년에는 미레이유 다르크와 1982년까지 교제했으며, 이후 앤 파리요와 캐서린 블레니와도 짧은 관계를 맺었다.
1987년에는 네덜란드 모델 로잘리 반 브레멘을 만나 딸 아누슈카 들롱과 아들 알랭-파비앙 들롱을 낳았다. 두 사람은 2001년에 헤어졌다. 니코와의 사이에서 아들 크리스티앙이 태어났지만, 들롱은 친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4.2. 법적 문제
1968년 10월, 베르사유 근교 에랑쿠르 마을의 공중 쓰레기장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수사 결과 알랭 들롱의 전 바디가드였던 스테판 마르코비치로 밝혀졌다. 마르코비치는 해고 전 친척에게 살해당할 경우 알랭 들롱과 프랑수아 마르칸토니의 소행이라고 적은 편지를 남겼다. 더욱이 마르코비치가 당시 들롱의 아내였던 나탈리 들롱과 불륜 관계였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삼각관계로 보도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69년 1월, 수사 당국은 들롱과 친분이 있던 마피아 마르칸토니를 실행범으로 체포하고 들롱을 중요 참고인으로 소환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총리이자 대통령 선거 유력 후보였던 조르주 퐁피두의 이름까지 거론되면서 수사는 혼란에 빠졌고, 마르칸토니는 석방되었으며 들롱은 불기소 처분되었다. 수사는 일단 중단되었고, 퐁피두는 같은 해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후 들롱은 1970년 4월, 대통령에 취임한 퐁피두에게 공개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저항했지만, 결국 공소시효 만료로 용의자 불상으로 수사가 종결되었다. 프랑스는 살인죄 등 중죄의 공소시효를 10년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수사 중에는 시효가 진행되지 않고 수사가 중단되면 시효가 진행되지만 새로운 사실이 나와 수사가 재개되면 시효가 리셋되는 "시효 정지" 제도가 있다.
4.2.1. 마르코비치 사건
1968년 10월 1일, 알랭 들롱의 경호원 스테판 마르코비치의 시신이 파리 서부 외곽 엘랑쿠르의 쓰레기 매립장에서 발견되었다. 마르코비치는 사망 전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알랭 들롱과 코르시카 출신 갱스터 프랑수아 마르칸토니의 책임이 있다고 적었다. 이 편지와 언론 보도, 그리고 증언들을 바탕으로 수사가 진행되었고, 놀랍게도 당시 프랑스 총리이자 차기 대통령 유력 후보였던 조르주 퐁피두까지 수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퐁피두는 마르코비치와 들롱과 함께 여러 파티에 참석한 사실을 인정했다. 마르코비치의 죽음은 퐁피두 부인을 포함한 집단 성관계 사진과 관련된 소문으로 이어졌다. 퐁피두는 루이 발롱과 앙리 카피탕이 프랑스 해외정보국(SDECE)를 이용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 후 SDECE 개혁을 단행하고, 소련 스파이 의혹이 있던 르네 베르트랑을 해고하기까지 했다.
1969년 1월, 수사 당국은 마르칸토니를 실행범으로 체포하고 들롱을 중요 참고인으로 소환했다. 그러나 퐁피두의 연루설이 제기되면서 수사는 혼란에 빠졌고, 마르칸토니는 석방되었으며 들롱은 불기소 처분되었다. 퐁피두는 같은 해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들롱은 1970년 4월 퐁피두 대통령에게 공개 탄원서를 제출하며 저항했으나, 결국 공소시효 만료로 수사는 종결되었다. 더욱이 마르코비치가 당시 들롱의 아내 나탈리 들롱과 불륜 관계였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삼각 관계"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정치권과 연예계를 뒤흔들었으며, 여전히 많은 의혹을 남기고 있다. 프랑스는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10년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수사 중에는 시효가 진행되지 않으며, 수사 재개 시 시효가 리셋된다.
4.2.2. 히로미 롤린 사건
2023년 7월 5일, 알랭 들롱의 세 자녀는 그의 동거인 히로미 롤린을 상대로 정신적 학대, 서신 감청, 동물 학대, 고의적 폭행, 불법 감금, 약자에 대한 폭력 등을 이유로 고소했습니다. 안토니 들롱의 말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롤린에게 두시몽코르봉 자택을 떠날 것을 서면으로 요청했다고 합니다. 7월 6일 예비 조사가 시작되었고, 7월 7일 히로미 롤린의 변호사 야신 부즈루는 사건 전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롤린이 7월 5일 들롱 가족 구성원과 경호원들로부터 가중 고의적 폭행을 당했고 이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한편 롤린은 몽타르지 검찰청에 편지를 보내 알랭 들롱의 동거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20년 이상 사적인 관계를 맺어왔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인터뷰에서는 "33년간의 연애 관계였다"고 진술). 몽타르지 검찰은 세 들롱 자녀가 롤린을 상대로 제기한 두 건의 고소에 대해 범죄 사실이 불충분하게 규명되었다는 이유로 기각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롤린이 들롱 자녀들을 상대로 제기한 고소 또한 같은 이유로 기각되었으나, 롤린의 변호사는 의뢰인이 수사 재개를 위해 민사 고소를 제기할 계획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안토니 들롱은 "진실이 밝혀지도록" 롤린을 상대로 민사 고소인이 될 의향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4.2.3. 가족 민사 분쟁
알랭 들롱은 2024년 1월, 아들 앙토니 들롱이 파리 마치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건강 상태와 상속 문제를 둘러싼 가족 간 갈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앙토니는 이복 누나 아누슈카 들롱이 아버지를 조종하여 상속 문제에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아버지의 쇠약해진 건강 상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2019년 뇌졸중 이후 실시된 아버지의 인지 기능 검사 결과가 가족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반면 아누슈카는 자신의 형제들이 아버지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아버지의 스위스 치료를 방해했다고 비난했다. 알랭 들롱의 변호사는 아들 앙토니의 공격적인 태도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아누슈카는 2024년 1월 인스타그램에 공개된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대화 녹음을 문제 삼아 사생활 침해로 형제들을 고소했다. 앙토니와 알랭-파비앙 들롱은 "타인의 사생활 침해로 얻은 문서 또는 녹음의 사용, 보관 또는 공개" 혐의로 2025년 4월 재판을 받게 될 예정이다. 2024년 4월, 알랭 들롱은 세 자녀가 참석한 가운데 몽타르지 법원의 심리 후 강화된 후견인 제도 아래 놓였다. 이는 1월 25일부터 이미 시행되던 후견인 제도를 강화한 것으로, 후견인은 그의 재산 관리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알랭 들롱의 건강 악화와 더불어 그의 가족 내부의 심각한 갈등을 드러내는 사례로 볼 수 있다.
4.2.4. 총기 불법 소지 혐의
2024년 2월 26일, 프랑스 경찰은 알랭 들롱의 자택을 급습하여 총기 72정과 탄약 3,000발을 압수했다. 이는 법원 임명 관리가 들롱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무기를 발견하여 판사에게 알린 후 이루어진 조치였다. 들롱은 총기 소지 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4.3. 정치적 견해
알랭 들롱은 스스로를 드골주의자로 묘사하며, 드골주의 정신 속에서 성장했다고 말한다. 1969년 드골 장군이 국민투표에서 패배해 대통령직에서 사퇴했을 때, 들롱은 그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편지를 썼다. 이후 그는 중도우파 성향을 보이며, 1974년과 1981년 대선에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을 지지했다. 1988년 대선에서는 레이몽 바르를, 2007년 대선에서는 니콜라 사르코지를 지지했다. 2017년 대선에서는 드골주의 후보 프랑수아 피용을 지지했으나, 결선 투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2022년 대선에서는 발레리 페크레스를 지지하며 그녀를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유일한 여성이라고 언급했다.
2013년 인터뷰에서 들롱은 국민전선의 선거 성공에 대해 동정심을 표하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하지만 2018년 다른 인터뷰에서는 마린 르펜에게 투표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러한 발언들은 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우파 성향을 견지하며 여러 우파 후보들을 지지했지만, 국민전선에 대한 그의 발언은 그의 정치적 스탠스가 단순히 우파를 넘어서는 복잡한 측면을 가짐을 시사한다.
4.4. 건강 문제
2019년 6월, 알랭 들롱은 뇌졸중을 겪었다. 어지럼증과 두통을 호소하여 병원에 입원했고, 8월에는 스위스 병원에서 회복 중이었다. 2022년 9월에는 진행 속도가 느린 림프종에 대한 실험적 치료를 시작했으나, 2023년 여름 그의 세 자녀는 이 치료가 그의 건강을 악화시킨다는 이유로 치료 중단을 결정했다.
2021년 파리 마치(Paris Match)와의 인터뷰에서 들롱은 안락사를 지지하며 "가장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2022년, 그의 아들 앙투안 들롱은 자신의 자서전 Entre chien et loup에서 어머니 나탈리 들롱의 사망 후 아버지 알랭이 만약 혼수상태에 빠진다면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면 자신의 요청을 들어달라고 자신에게 부탁했다고 밝혔다. 이후 일부 뉴스 매체는 들롱이 안락사를 통해 곧 생을 마감할 계획이라고 보도했지만, 그의 아들 알랭-파비앵은 앙투안 들롱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 문맥에서 벗어났다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2024년 1월, 들롱은 건강이 좋지 않고 두시에 있는 라 브뤼러리 저택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동시에 그의 세 자녀 – 앙투안, 아누슈카, 알랭-파비앵 – 사이에 들롱의 건강을 둘러싼 공개적인 불화가 발생했는데, 세 자녀 모두 들롱이 "병들었지만 명료하고 불화를 인지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이 갈등은 앙투안이 그의 이복 여동생 아누슈카를 스위스 의사들이 아버지에 대해 실시한 인지 능력 검사 결과를 은폐했다며 "거짓말"과 "조작"으로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자녀들은 2023년 중반에 아버지를 학대한 혐의로 들롱의 전 동거녀 히로미 롤린을 성공적으로 퇴거시키기 위해 연합했다.
5. 일본에서의 인기
알랭 들롱은 일본에서도 오랫동안 큰 인기를 누렸다. 친일파로도 알려져 있으며,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1963년 첫 방일 당시에는 제3회 프랑스 영화제에 참석하여 그의 출연작인 『지하실의 멜로디』를 비롯한 여러 작품이 상영되었다. 프랑스 영화제 (일본) 이때 일본 배급권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는데, 알랭 들롱이 직접 일본 헤럴드 영화와 계약하면서 도호동화와 쇼치쿠영배와의 마찰이 발생했다. 결국 3사 공동 배급으로 영화가 개봉되었다.
1960년대에는 후지TV의 『스타 천일야』와 NHK의 『꿈으로 만나요』 등에 출연했으며, 1964년 도쿄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준공식에도 참석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레나운의 '더반'과 마쓰다 카펠라의 CF에 출연하며 일본 대중들에게 더욱 친숙해졌다. 1983년에는 도요공업의 초청으로 히로시마를 방문,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과 원폭 자료관을 방문하여 원폭 피해에 대한 충격을 표현하기도 했다.
사카키바라 이쿠에의 싱글 「알 파치노+알랭 들롱<당신」에서 언급될 정도로, 일본에서 '미남'의 대명사처럼 여겨질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의 영화 흥행은 1970년대 중반 『개인 생활』을 정점으로 하락세를 보였다. 도에이양화가 알랭 들롱과 브루스 리를 흥행의 기둥으로 삼으려 했으나, 알랭 들롱 출연 영화들이 기대에 못 미치면서 도에이양화는 알랭 들롱 영화 배급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알랭 들롱과 함께하는 파리 여행 상품이 인기를 끌었고, 2010년에는 탄생 75주년 기념 영화제가 개최되는 등 그의 인기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2007년에는 SMAP×SMAP에 출연하기도 했다. 키시다 모리와 함께 영화 『친구여 조용히 죽어라』의 방일 이벤트에도 참석했다.
6. 평가 및 영향
알랭 들롱은 제라르 드파르디외, 장 르노, 카트린느 드뇌브, 오드리 토투와 함께 해외에서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 배우 중 한 명이다. 장-미셸 프로동은 전후 프랑스 영화에서 들롱이 독보적인 인물이며, 그의 스크린 속 에너지와 지성은 장-피에르 멜빌과 같은 영화 제작자들에 의해 훌륭하게 활용되었다고 평가한다. 닉 리스-로버츠와 대런 월드론은 "알랭 들롱만큼 수많은 세대의 영화 팬들에게 상징적이고 영향력 있는 남성 유럽 배우는 드물다"고 언급하며 그를 영화계의 아이콘으로 평가하고, 그의 긴 경력이 그의 이미지와 페르소나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필요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지적한다. LaCinetek과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에서 공개한 여러 전문가들의 영화 추천 목록에서도 들롱이 주연을 맡은 여러 작품들이 언급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알랭 들롱을 "영화 역사상 가장 멋진 배우 중 한 명"으로 꼽았다. 키아누 리브스는 들롱을 자신의 롤 모델이라고 언급하며, "매우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라고 칭찬했다. 매슈 본은 마이클 케인을 알랭 들롱에 비유하며, 두 배우가 각자의 나라에서 독특한 영화적 영향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클라이브 오웬은 알랭 들롱의 "자연스러운 우아함"에 매료되었다고 말하며, 『사무라이』와 『수영장』을 그의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는다. 조지프 로지 감독은 알랭 들롱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며, "어려운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재능 중 하나"라고 말했다. 로버트 에반스는 그의 회고록에서 들롱을 "영화에서처럼 인생에서도 나의 형제"이자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우"로 칭찬했다.
알랭 들롱의 연기는 프랑스를 넘어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사무라이에서의 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장-피에르 멜빌 감독은 들롱을 위해 이 영화를 제작했고, 이 만남은 베르트랑 블리에 감독에 의해 "역사적이며 상호 매료되는" 만남으로 평가된다. 스티븐 테오는 사무라이를 "아마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프랑스 범죄 스릴러 영화"로 칭하며 들롱의 연기를 극찬했다. 이 작품은 마틴 스코세이지, 퀘틴 타란티노, 짐 자무쉬, 마이클 만, 존 우, 두기펑, 데이비드 핀처, 기타노 다케시, 니콜라스 윈딩 레픈, 뤽 베송, 코엔 형제, 안톤 코르바인, 안투안 푸쿠아, 채드 스타헬스키 등 수많은 거장 감독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의 연출 스타일에 모티브로 차용되었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프렌치 커넥션(1971)과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화(1974) 등 뉴 할리우드 영화들에도 사무라이와 제프 코스텔로 캐릭터의 영향이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페드로 알모도바르, 마이클 만, 데이비드 핀처, 존 우, 폴 슈레이더, 니콜라스 윈딩 레픈, 채드 스타헬스키, 짐 자무쉬 등의 감독 작품에서 안토니오 반데라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톰 크루즈, 마이클 패스벤더, 양조위, 리처드 기어, 라이언 고슬링, 키아누 리브스, 포레스트 휘태커, 주윤발 등 많은 배우들이 들롱의 연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로코와 그의 형제들에서 들롱의 연기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분노의 황소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르살리노에서 들롱과 장 폴 벨몽도의 연기는 스팅의 로버트 레드포드와 폴 뉴먼에게 영감을 주었다. 일라리아 우르비나티 등 패션계 인사들도 들롱을 스타일 아이콘으로 꼽는다. 마크 갤러거는 들롱의 명성이 배우 그 이상으로, 전 세계적인 스타일 아이콘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들롱은 아라비아의 로렌스, 대부, 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등의 작품 출연 제안을 받았으나, 여러 이유로 거절했다. 또한, 미지와의 조우, 마지막 탱고 in 파리, 제임스 본드 역 등의 제안도 거절했다. 미국 영화 연구소는 들롱이 조슈아 로건, 토니 리처드슨, 시드니 폴락, 앙리 베르뇌유, 마틴 스코세이지, 존 휴스턴 등의 작품에 출연 제안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6.1. 연기 스타일
알랭 들롱은 차갑고 냉소적인 이미지로 유명하며, 이러한 이미지는 그가 맡은 매력적인 악역 연기와 잘 어울렸다. 그의 연기는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1960년대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스타일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섬세한 감정 표현은 많은 팬들을 사로잡았고, 이후 많은 배우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연기가 다소 단조롭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특한 연기 스타일은 프랑스 영화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6.2. 문화적 영향력
알랭 들롱의 연기는 프랑스를 넘어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사무라이에서의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장-피에르 멜빌 감독은 들롱을 위해 이 영화를 제작했으며, 이 만남은 베르트랑 블리에 감독에 의해 "역사적이며 상호 매료되는" 만남으로 평가된다. 스티븐 테오는 사무라이를 "아마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프랑스 범죄 스릴러 영화"로 칭하며, 들롱의 연기를 극찬했다. 이 작품은 마틴 스코세이지(택시 드라이버, 분노의 주먹), 퀘틴 타란티노(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짐 자무쉬, 마이클 만(콜래터럴, 히트, 컨트롤의 한계), 존 우, 두기펑(풀타임 킬러), 데이비드 핀처(킬러(2023)), 기타노 다케시, 니콜라스 윈딩 레픈, 뤽 베송(레옹), 코엔 형제, 안톤 코르바인(아메리칸), 안투안 푸쿠아(이퀄라이저), 채드 스타헬스키(존 윅 시리즈) 등 수많은 거장 감독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의 연출 스타일에 모티브로 차용되었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프렌치 커넥션(1971)과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화(1974) 등 뉴 할리우드 영화들에도 사무라이와 제프 코스텔로 캐릭터의 영향이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페드로 알모도바르, 마이클 만, 데이비드 핀처, 존 우, 폴 슈레이더, 니콜라스 윈딩 레픈, 채드 스타헬스키, 짐 자무쉬 등의 감독 작품에서 안토니오 반데라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톰 크루즈, 마이클 패스벤더, 양조위, 리처드 기어, 라이언 고슬링, 키아누 리브스, 포레스트 휘태커, 주윤발 등 많은 배우들이 들롱의 연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로코와 그의 형제들에서 들롱의 연기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분노의 황소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르살리노에서 들롱과 장 폴 벨몽도의 연기는 스팅의 로버트 레드포드와 폴 뉴먼에게 영감을 주었다. 일라리아 우르비나티 등 패션계 인사들도 들롱을 스타일 아이콘으로 꼽는다. 언론평론가 마크 갤러거는 들롱의 명성이 배우 그 이상으로, 전 세계적인 스타일 아이콘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들롱은 아라비아의 로렌스, 대부, 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등의 작품 출연 제안을 받았으나, 여러 이유로 거절했다. 또한, 미지와의 조우, 마지막 탱고 in 파리, 제임스 본드 역 등의 제안도 거절했다. 미국 영화 연구소는 들롱이 조슈아 로건, 토니 리처드슨, 시드니 폴락, 앙리 베르뇌유, 마틴 스코세이지, 존 휴스턴 등의 작품에 출연 제안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7. 기타
1999년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알랭 들롱은 오랜 연기 경력 동안 다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주요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1961년 영화 《일식》으로 모니카 비티와 함께 치악 도로상을 수상했고, 1962년에는 영화 《삶의 기쁨》으로 크리스털 스타즈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1963년에는 영화 《누구든 이길 수 있다》로 프랑스 영화상 최우수 프랑스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72년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특별상, 1974년 발렌티노 도로 올해의 배우상, 1977년 다카르에서 수여된 캉구루 도르, 1981년 금마장 영화제 특별상, 1985년 영화 《우리의 이야기》로 세자르 영화제 최우수 남우주연상, 1987년 밤비상 국제 밤비상, 1989년 타오르미나 영화제 공로상, 1991년 영화 《표범》으로 산 조르디 영화상 특별 심사위원상(스페인 문화부 장관 조르디 솔레 투라 수여), 1995년 제4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곰상, 1997년 마르 델 플라타 국제 영화제 평생공로상(노르마 알레안드로 수여), 1998년 골드네 카메라(평생공로상, 장 폴 벨몽도도 같은 날 같은 상 수상), 1999년 카이로 국제 영화제 공로상, 1999년 플리아노 상 공로상, 2001년 세계 배우 트로피(미하일 고르바초프 수여, 올해의 남자 2001 시상식), 2003년 UN 및 유니세프 국제상 올해의 최우수 배우상, 2003년 마라케시 국제 영화제 황금별상, 2005년 러브 영화제 은빛 화살, 2009년 프랑스 엑셀런스 상, 2009년 브루투스 드 시네마 최우수 세자르상, 2011년 텔레즈베즈다 TV 채널상 명예 게스트로 특별상, 2011년 아카풀코 영화제 특별상 Acuerdate de Acapulco, 2012년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 평생공로상, 2012년 프랑스 중국 영화제 명예 게스트, 2012년 아르메니아 음악상 특별상,
7.1. 자선 활동
알랭 들롱은 유니세프 활동에 참여하여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 활동을 펼쳤다. 구체적인 내용은 자료 부족으로 확인되지 않으나, 그의 대중적 인지도를 활용한 홍보 활동이나 기부 등의 참여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추가적인 정보를 확인하여 보다 자세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다.
7.2. 수상 경력
알랭 들롱은 그의 긴 연기 경력 동안 다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했다. 주요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 1961년 치악 도로상: 영화 《일식》으로 모니카 비티와 함께 수상
* 1962년 크리스털 스타즈: 영화 《삶의 기쁨》으로 최우수 남우주연상 수상
* 1963년 프랑스 영화상: 영화 《누구든 이길 수 있다》로 최우수 프랑스 남우주연상 수상
* 1972년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특별상
* 1974년 발렌티노 도로: 올해의 배우상
* 1977년 캉구루 도르: 다카르에서 수여된 상
* 1981년 금마장 영화제: 특별상
* 1985년 세자르 영화제: 영화 《우리의 이야기》로 최우수 남우주연상 수상
* 1987년 밤비상: 국제 밤비상
* 1989년 타오르미나 영화제: 공로상
* 1991년 산 조르디 영화상: 영화 《표범》으로 특별 심사위원상 수상 (스페인 문화부 장관 조르디 솔레 투라 수여)
* 1995년 제4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곰상 수상
* 1997년 마르 델 플라타 국제 영화제: 노르마 알레안드로 수여, 평생공로상
* 1998년 골드네 카메라: 골든 카메라 (평생 공로상: 같은 날 장 폴 벨몽도도 같은 상 수상)
* 1999년 카이로 국제 영화제: 공로상
* 1998년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공로상 명예 조지상
* 1999년 플리아노 상: 공로상
* 2001년 세계 배우 트로피: 미하일 고르바초프 수여, 올해의 남자 2001 시상식
* 2003년 UN 및 유니세프 국제상: 올해의 최우수 배우상
* 2003년 마라케시 국제 영화제: 황금별상
* 2005년 러브 영화제: 은빛 화살
* 2009년 프랑스 엑셀런스 상: 수상
* 2009년 브루투스 드 시네마: 최우수 세자르상
* 2011년 텔레즈베즈다 TV 채널상: 명예 게스트로 특별상
* 2011년 아카풀코 영화제: 특별상 Acuerdate de Acapulco
* 2012년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 평생공로상
* 2012년 프랑스 중국 영화제: 명예 게스트
* 2012년 아르메니아 음악상: 특별상
* 2012년 제라르 드 시네마: 인생 역할상 (후보)
* 2017년 트란실바니아 국제 영화제: 공로상
* 2019년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
* 1964년 골든 글로브상 신인 남자 배우상 후보 (영화 《표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