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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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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륭은 오호 십육국 시대 후연의 인물로, 모용수의 아들이다. 369년 아버지 모용수와 함께 전진으로 망명했으며, 전진 멸망 후 후연 건국에 기여했다. 전진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장군이 되었고, 고양왕에 봉해졌다. 모용수 사후 모용보가 즉위한 후에도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으나, 397년 모용회에게 암살당했다. 시호는 강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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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륭
지도
기본 정보
모용(慕容)
이름륭(隆)
시호경소제(景昭帝)
생몰 기간355년 ~ 398년
재위 기간397년 ~ 398년
대업(大業)
묘호세종(世宗)
생애
출생355년
사망398년
부친모용수
가족 관계
황후부황후(苻皇后)
후궁간씨(簡氏)
아들모용희
고양공주(高陽公主)
발간공주(撥紇公主)
기타
시대오호 십육국 시대
국가후연

2. 생애

369년 모용수(慕容垂)가 모용평(慕容評)의 견제를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전연(前燕)에서 전진(前秦)으로 망명할 때 모용륭도 함께 따라갔다.[2] 비수 대전 이후, 384년 모용수가 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후연(後燕)을 건립할 때 전진의 부비룡(苻飛龍)을 살해하였다.[2]

이후 모용륭은 전진의 영토를 점령하는 공을 세워 장군이 되었으며, 384년 부비(苻丕)가 모용수를 추격할 당시 모용수를 구원했다. 386년 모용수는 모용륭을 고양왕(高陽王)으로 봉했다.[2]

396년 모용농(慕容農)으로부터 용성(龍城)의 수비를 인계받을 당시 모용농의 규정을 그대로 따랐다.[2] 성애황후(成哀皇后) 단씨(段氏)는 모용농과 모용륭 중 한 명을 황태자(皇太子)로 세울 것을 요청했으나, 모용보(慕容寶)를 마음에 두고 있던 모용수는 이를 거절하였다.[2]

같은 해, 모용보의 군사가 참합파(參合陂)에서 북위(北魏)에 대패하자, 모용륭은 중산(中山)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모용농과 함께 북위를 공격해 승리하였으나, 모용수는 병으로 사망하였다.

모용보는 모용수의 후계에 관한 이전 논의를 알고 있었기에 성애황후에게 자결을 명하였지만, 처음에는 모용농과 모용륭을 신임하였다. 396년 (후연 영강 원년) 가을, 북위가 후연을 공격하여 도무제가 모용농을 격파하고 병주(幷州)를 빼앗았으며, 중산으로 진격했다. 모용보는 모용린에게 중산을 지키게 했지만, 모용린이 농성하자 모용농과 모용륭은 불만을 표출했다.

397년 봄, 모용린이 모반에 실패하자 중산에서 도망쳤다. 모용보는 모용린이 모용회(慕容會)의 원군을 격파할 것을 두려워하여 중산을 버렸다. 모용농과 모용륭의 신하는 모용보를 따르기보다는 중산에 남을 것을 설득했지만, 모두 충효를 이유로 거절하고 모용회의 원군과 합류했다.

태자가 자신이 아닌 모용책이 된 것에 분노한 모용회는 모반을 계획했다. 이를 알아챈 모용보가 모용회의 군대를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나누어주었지만, 이는 모용회를 더욱 분노하게 하여 암살을 위한 자객이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보내졌다. 모용농은 살아남았지만 뇌가 드러날 정도의 중상을 입었고, 모용륭은 살해되었다. 사후 시호는 강(康)으로 하였다.[3]

2. 1. 후연 건국 이전

369년, 아버지 모용수전연에서 신변의 위험을 느껴 전진으로 망명할 때 함께했다.[2] 비수 대전 이후, 384년에 모용수가 전진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전진의 부비룡을 격파했다.

모용륭은 전진의 영토를 빼앗은 후연에서 장군으로 활동했다. 384년(연원 원년), 전진의 잔당인 부비가 모용수를 궁지에 몰아넣었을 때 구원한 인물이 바로 모용륭이었다.[2] 386년, 모용수는 모용륭을 고양왕(高陽王)에 봉했다. 이후에도 다른 세력 및 동진과 계속해서 싸웠다. 389년, 형인 모용농으로부터 용성(龍城)의 수비를 이어받았을 때 모용농의 규정을 모두 그대로 따랐다. 모용농과 비슷한 정도로 존경받았다고 한다.[2]

단황후는 모용보보다 황제에 더 적합한 사람을 태자로 세울 것을 건의했지만, 모용수는 모용보의 재능을 믿고 이를 거절했다.

396년(영강 원년) 초, 모용보의 군대가 참합피 전투에서 대패하자, 모용수는 다시 북위에 대한 공격을 생각하고, 모용륭을 중산(中山)으로 불러들이고 용성은 모용회에게 맡겼다. 모용륭과 모용농이 군대를 이끌고 북위를 공격하여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참합피를 지나 이전의 대패를 애도하고 있을 때 모용수가 분사하고, 모용보가 뒤를 이었다.

2. 2. 모용수 시대

369년 모용수(慕容垂)가 모용평(慕容評)의 견제를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전연(前燕)에서 전진(前秦)으로 망명할 때 모용륭도 함께 따라갔다.[2] 비수 대전 이후, 384년 모용수가 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후연(後燕)을 건립할 때 전진의 부비룡(苻飛龍)을 살해하였다.[2]

이후 모용륭은 전진의 영토를 점령하는 공을 세워 장군이 되었으며, 384년 부비(苻丕)가 모용수를 추격할 당시 모용수를 구원했다. 386년 모용수는 모용륭을 고양왕(高陽王)으로 봉했다.[2]

396년 모용농(慕容農)으로부터 용성(龍城)의 수비를 인계받을 당시 모용농의 규정을 그대로 따랐다.[2] 성애황후(成哀皇后) 단씨(段氏)는 모용농과 모용륭 중 한 명을 황태자(皇太子)로 세울 것을 요청했으나, 모용보(慕容寶)를 마음에 두고 있던 모용수는 이를 거절하였다.[2]

같은 해, 모용보의 군사가 참합파(參合陂)에서 북위(北魏)에 대패하자, 모용륭은 중산(中山)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모용농과 함께 북위를 공격해 승리하였으나, 모용수는 병으로 사망하였다.

2. 3. 모용보 시대

386년, 모용수는 모용륭을 고양왕(高陽王)으로 봉했다. 이후 모용륭은 다른 세력 및 동진과 계속해서 싸웠다. 389년, 형인 모용농으로부터 용성의 수비를 이어받았을 때 모용농의 규정을 모두 그대로 따랐으며, 모용농과 비슷한 정도로 존경받았다.[2]

모용농과 모용륭은 모두 인망 있는 왕이었기에, 단황후는 모용보보다 황제에 더 적합한 사람을 태자로 세울 것을 건의했지만, 모용수는 모용보의 재능을 믿고 이를 거절했다.

396년(영강 11년) 초, 모용보의 군대가 참합피 전투에서 대패하자, 모용수는 다시 북위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모용륭을 중산으로 불러들이고 용성은 모용회에게 맡겼다. 모용륭과 모용농은 군대를 이끌고 북위를 공격하여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참합피를 지나 이전의 대패를 애도하고 있을 때 모용수가 분사하고, 모용보가 뒤를 이었다.

모용보는 모용수의 후계에 관한 이전 논의를 알고 있었기에 단후(성애황후(成哀皇后))에게 자결을 명하였지만, 처음에는 모용농과 모용륭을 신임하였다. 같은 해 가을, 북위가 후연을 공격하여 도무제가 모용농을 격파하고 병주(幷州)를 빼앗았으며, 중산으로 진격했다. 모용보는 모용린에게 중산을 지키게 했지만, 모용린이 농성하자 모용농과 모용륭은 불만을 표출했다.

397년 봄, 모용린이 모반에 실패하자 중산에서 도망쳤다. 모용보는 모용린이 모용회의 원군을 격파할 것을 두려워하여 중산을 버렸다. 모용농과 모용륭의 신하는 모용보를 따르기보다는 중산에 남을 것을 설득했지만, 모두 충효를 이유로 거절하고 모용회의 원군과 합류했다.

태자가 자신이 아닌 모용책이 된 것에 분노한 모용회는 모반을 계획했다. 이를 알아챈 모용보가 모용회의 군대를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나누어주었지만, 이는 모용회를 더욱 분노하게 하여 암살을 위한 자객이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보내졌다. 모용농은 살아남았지만 뇌가 드러날 정도의 중상을 입었고, 모용륭은 살해되었다. 사후 시호는 강(康)으로 하였다.[3]

3. 자녀


  • 모용충 (서연의 황제 모용충과는 동음이인) : 고양공. 398년 작위가 공으로 강등되어 자결했다.
  • 모용징(慕容澄) : 동평공. 398년에 자결했다.
  • 모용숭 : 고양왕을 계승했으나, 398년 작위가 공으로 강등되어 자살 명령을 받았다.

참조

[1] 서적 晋書「慕容垂載記」巻123
[2] 서적 資治通鑑「晋紀」巻107
[3] 서적 資治通鑑「晋紀」巻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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