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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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평은 서진의 제후 모용회의 아들로, 전연의 군사적 요직을 두루 거치며 활약했다. 모용황, 모용준 치세에 군사장군, 전군사, 보필장군 등을 역임하며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고, 모용각 사후에는 섭정으로 전연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부패한 정치로 국력을 쇠퇴시키고, 동진과 전진의 침공을 받아 전연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 전연 멸망 후 고구려로 망명했으나 전진에 넘겨졌고, 이후 전진에서 벼슬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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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각은 전연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모용준 사후 어린 황제를 보좌하며 국정을 주도하여 전연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통솔력, 그리고 내정에도 힘써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여 당나라 시대 명장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오호 십육국 시대의 사도 - 모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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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용평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모용평 |
| 원어 이름 | 慕容評 |
| 작위 | 전연의 권신(權臣) |
| 출생일 | 불명 |
| 출생지 | 전연 |
| 사망일 | 4세기 |
| 사망지 | 불명 |
2. 생애
336년 모용황(慕容皝)이 모용인(慕容仁)을 공격할 때 창려(昌黎)에서 함께 공격하여 군사장군(軍師將軍)이 되었다. 이후 전군사(前軍師)에 임명되었으며,[1] 339년 후조(後趙)의 석성(石成)이 요서(遼西)로 침공해오자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343년 모용준(慕容儁)을 따라 대나라(代) 정벌에 참여하였다.[1]
349년 모용준이 제위에 오르자 보필장군(輔弼將軍)을 제수받았다.[1] 같은 해 후조의 석호(石虎)가 사망하여 혼란해지자 후조를 공격해 가견(賈堅)을 생포하고 태수(太守)로 봉해졌다.[1]
352년 모용각(慕容恪)이 염위(冉魏)의 염민(冉閔)을 붙잡자, 모용평은 업(鄴)에 주둔하던 염민의 아들 염지(冉智)를 공격해 생포하고 염위를 멸망시켰다.[2]
354년 진남장군(鎭南將軍) 및 도독(都督)으로 승진하여 10개 주(州)의 제군사(諸軍事)를 총괄하게 되었으며, 낙수(洛水)에 주둔하였다. 이후 사도(司徒) 및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승진하여 상용왕(上庸王)에 봉해졌고, 장평(張平)을 토벌하여 도주시켰다. 359년 동진(東晉)의 제갈유(諸葛攸)가 북벌을 시도하자 부안(傅顔)과 함께 출격하여 동아(東阿)에서 승리하였다.
360년 모용준이 사망하고 모용위가 즉위하자 태부(太傅)가 되었다.[1] 364년 군대를 지휘하여 허창 및 여남을 차지하였다. 367년 모용각이 사망하자[1] 태사(太師)로서 국정을 주도하며 전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뇌물을 받고 국정을 농단하는 등 부패한 정치를 하여 전연의 국력 쇠퇴를 초래하였다.[1]
이러한 상황은 동진의 환온이 전연을 침공하는 계기가 되었고, 전연은 연이은 패전을 겪었다.[1] 모용수가 군을 재정비하여 동진 군대를 물리쳤으나, 모용평은 모용수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암살을 시도했고, 결국 모용수는 전연을 탈출하여 전진으로 망명하게 되었다.[3]
모용수가 망명한 후, 전진의 왕맹은 낙양을 함락시키고 370년 전연을 본격적으로 정벌하기 시작했다. 모용평은 전연 군대를 이끌고 대항했으나 대패했고, 진양과 상당을 빼앗겼다.[3] 그 해 부견이 직접 군을 이끌고 전연을 공격하여 수도 업이 함락되었고, 모용위는 포로로 잡혀 장안으로 호송되면서 전연은 멸망하였다.[3]
전연이 멸망하자 모용평은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나,[4] 고국원왕은 전진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모용평을 체포해 전진의 곽경(郭慶)에게 넘겨주었다.[4] 이후 부견은 모용평을 급사(給事)로 임명하였으며, 모용수가 모용평의 주살을 청원하였으나 부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범양태수(范陽太守)로 임명해 조정에서 내쫓았다.
2. 1. 초기 생애 및 군사 경력
336년 모용황(慕容皝)이 모용인(慕容仁)을 공격할 때 창려(昌黎)에서 함께 공격하여 군사장군(軍師將軍)이 되었다. 이후 전군사(前軍師)에 임명되었으며,[1] 339년 후조(後趙)의 석성(石成)이 요서(遼西)로 침공해오자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343년 모용준(慕容儁)을 따라 대나라(代) 정벌에 참여하였으며,[1] 349년 모용준이 제위에 오르자 보필장군(輔弼將軍)이 되었다. 같은 해 후조의 석호(石虎)가 사망하여 혼란해지자, 후조를 공격해 가견(賈堅)을 생포하고 장무군章武郡중국어 태수(太守)로 봉해졌다.[1]이후 352년 모용각(慕容恪)이 염위(冉魏)의 염민(冉閔)을 사로잡은 후, 업(鄴)에 주둔하던 염민의 아들 염지(冉智)를 공격해 생포하고 염위를 멸망시켰다.[2]
354년 진남장군(鎭南將軍) 및 도독(都督)으로 승진하여 10개 주(州)의 제군사(諸軍事)를 총괄하게 되었으며, 낙수(洛水)에 주둔하였다. 이후 사도(司徒) 및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승진하여 상용왕(上庸王)에 봉해졌고, 장평(張平)을 토벌하여 도주시켰다. 359년 동진(東晉)의 제갈유(諸葛攸)가 북벌을 시도하자 부안(傅顔)과 함께 출격하여 동아(東阿)에서 승리하였다.
2. 2. 모용준 치세
모용황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모용준이 뒤를 이었다. 모용준은 진(晉)으로부터 받은 연왕(燕王)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349년, 후조(後趙)의 황제 석호가 사망하고, 그의 나라는 곧 그의 아들들과 양손자 석민 사이의 내전으로 쇠퇴했다. 이에 모용준은 남쪽으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이후 몇 년 동안 모용준의 여러 차례의 원정에서, 그는 후조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고 석민(당시 석호에게 입양되기 전 아버지의 성씨로 이름을 바꾼 염민)을 사로잡아 단명한 염위(冉魏)를 멸망시켰으며, 모용평은 주요 장군으로 활약했다.
349년 모용준이 제위에 오르자 모용평은 보필장군(輔弼將軍)을 제수받았다.[1] 같은 해 후조의 석호가 사망해 혼란에 빠지자 후조를 공격해 가견(賈堅)을 생포하였고, 장무태수(章武太守)로 봉해졌다.[1]
352년, 모용각이 염위의 염민을 붙잡는 데 성공하자, 모용평은 업(鄴)에 주둔하고 있던 염민의 아들 염지(冉智)를 공격해 생포한 뒤 염위를 멸망시키는 데 공헌하였다.[2] 그는 업성의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354년, 진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황제 칭호를 사용한 모용준은 그에게 낙양 지역의 군사 작전을 맡겼고(비록 전연(前燕)은 이때 낙양을 점령하지 못했지만) 그를 상용왕(上庸王)에 봉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모용평은 여전히 독립을 유지하려 애쓰며 전연, 전진, 그리고 진 사이를 오가는 다양한 전 후조 장군들을 상대로 군대를 이끌었다. 그의 원정은 성공과 실패가 엇갈렸다.
360년, 모용준은 심각한 병에 걸렸고, 그의 유능한 동생 모용각을 아들 모용위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모용평, 양무, 그리고 목유근은 모용각의 보좌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모용준은 곧 사망했고, 모용위가 그의 뒤를 이었다.
2. 3. 모용각 섭정 시기
모용준이 사망하고 모용위가 즉위하자, 모용평은 태부가 되었다.[1] 모용준의 동생인 모용각이 태재로서 나라의 실권을 장악했고,[1] 모용평은 364년부터 시작된 남하 정책에 참여하여 군대를 이끌고 허창과 여남을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다. 367년 5월, 모용각이 병사하자 전연의 실권을 장악했다.[1]그러나 모용평은 부패한 정치를 펼쳤고, 탐욕스러운 성격으로 군수 물자를 횡령하여 사재를 축적하는 등 국정을 농단하여 국가의 쇠퇴를 초래했다. 이 상황을 본 동진의 환온은 세 번째 북벌을 감행하여 전연을 침공했고,[1] 전연군은 연패를 거듭했다. 이에 모용위는 용성으로 환도하는 것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3] 그러나 모용위의 숙부인 모용수가 환온과 대치했고, 더 나아가 전진에 영토 할양을 조건으로 원군을 요청하여 대항했다.[3]
모용수는 전진군 도착 전에 환온을 격파했다. 모용수가 새로운 실력자로서 전연에서 부상하기 시작했지만, 모용평은 이를 미워하여 모용수를 제거하려 했고, 모용수는 부득이 전진으로 망명했다.[3] 모용수의 망명으로 전연을 지탱하는 큰 기둥이 사라졌고, 반대로 전진은 부견과 왕맹 등에 의해 공세로 전환되어, 먼저 낙양이 왕맹에 의해 함락되었다.[3]
2. 4. 섭정 시기 (모용각 사후)
360년, 모용준이 사망하고 모용위가 즉위하자 모용평은 태부(太傅)가 되었다.[1] 364년에는 군대를 지휘하여 허창 및 여남을 차지하였다. 367년 5월, 모용각이 사망하면서[1] 모용평은 태사(太師)로서 국정을 주도하며 전연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뇌물을 받고 국정을 농단하는 등 부패한 정치를 하면서 전연의 국력 쇠퇴를 초래하였다.[1]368년, 전진의 공작 4명이 부견에게 반역을 일으키고 전연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모용덕을 포함한 많은 관리들은 이를 전진 정복의 기회로 여겼지만, 모용평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전진 군대가 반역 공작들을 격파했다.
같은 해, 악완은 귀족들이 평민들을 봉토에 편입시켜 세금을 내지 않게 하는 부패 관행을 개혁하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악완은 곧 사망했는데, 《진서》에는 모용평이 개혁으로 잃을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독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4. 1. 환온의 북벌과 모용수의 망명
모용각이 병으로 사망하자 전연의 실권을 장악한 모용평은 뇌물을 받고 국정을 농단하는 등 부패한 정치를 하면서 전연의 국력 쇠퇴를 초래하였다.[1] 이러한 상황은 동진의 환온이 전연을 침공하는 계기가 되었고, 전연은 연이은 패전을 겪었다.[1] 모용수가 군을 재정비하여 동진 군대를 물리쳤으나, 모용평은 모용수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암살을 시도했고, 결국 모용수는 전연을 탈출하여 전진으로 망명하게 되었다.[3]모용수가 망명한 후, 전진의 왕맹은 낙양을 함락시키고 370년 전연을 본격적으로 정벌하기 시작했다. 모용평은 전연 군대를 이끌고 대항했으나 대패했고, 진양과 상당을 빼앗겼다.[3] 그 해 부견이 직접 군을 이끌고 전연을 공격하여 수도 업이 함락되었고, 모용위는 포로로 잡혀 장안으로 호송되면서 전연은 멸망하였다.[3]
2. 4. 2. 전진의 침공과 전연 멸망
369년, 동진(東晉)의 장군 환온이 전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모용평이 파견한 모든 군대를 격파했다.[1] 여기에는 모용장(慕容臧)이 지휘하는 주요 군대도 포함되었으며, 수도인 업성 근처까지 진격했다. 모용평과 모용위는 공황 상태에 빠져 옛 수도인 화룡(和龍, 현대 금주시, 요녕성)으로 도주하는 것을 고려했다. 이전에 모용평에 의해 권위가 약화되었던 모용수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겠다고 자청했다. 한편, 모용평은 전진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며, 전진이 지원한다면 365년에 모용각이 점령했던 낙양 지역을 전진에 할양하겠다고 제안했다. 모용수와 모용덕은 환온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전진 군대가 곧 도착하여 환온에게 또 다른 패배를 안겼다. 이로써 환온은 다시는 전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수 없게 되었다.[3]그러나 모용평과 가제 태후는 곧 두 가지 파괴적인 결정을 내렸다. 모용수(그의 아내가 자신의 여동생이었지만 그를 총애하지 않았다)에게 여전히 앙심을 품고 있던 가제 태후는 모용수와 그의 군대에 대한 보상을 거부하고, 실제로 그를 죽이려 했다. 모용평 또한 모용수를 불안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 결정에 동의했다. 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전진으로 도망쳐 부견의 장군이 되었다. 또한, 그들은 이전에 약속했던 낙양 지역을 전진에 할양하는 것을 거부했다. 분노한 부견은 369년 말, 재상 왕맹이 지휘하는 6만 명의 군대를 전연에 파견했다.[3]
370년 봄, 왕맹은 먼저 낙양으로 진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호관(壺關, 현대 장치시, 산서성)으로 진격하여 가는 길에 전연의 모든 저항을 격파했으며, 진양(晉陽, 현대 태원시, 산서성)을 점령했다. 모용평은 3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왕맹에 맞섰지만, 왕맹을 두려워하여 노수(潞川, 현대 장치시)에서 멈춰섰다. 왕맹은 곧 그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한편, 모용평은 이때 부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숲과 하천에 경비병을 배치하여 평민은 물론 자신의 병사들조차 돈이나 비단을 지불하지 않으면 나무를 베거나 낚시를 할 수 없도록 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지만, 병사들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졌다. 이를 들은 모용위는 사신을 보내 그를 질책하고 재산을 병사들에게 분배하라고 명령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370년 겨울, 양 군대가 교전했고, 모용평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왕맹은 그를 격파했으며, 모용평은 혼자 업성으로 도망쳤다. 모용위는 업성을 버리고 화룡으로 도주하려 했지만, 도중에 체포되어 전연은 멸망했다.[3]
2. 5. 전연 멸망 이후
전연이 멸망하자 모용평은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나,[4] 고국원왕은 전진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모용평을 체포해 전진의 곽경(郭慶)에게 넘겨주었다.[4] 이후 부견은 모용평을 급사(給事)로 임명하였으며, 모용수가 모용평의 주살을 청원하였으나 부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범양태수(范陽太守)로 임명해 조정에서 내쫓았다.참조
[1]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2]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3]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4]
서적
五胡十六国、中国史上の民族大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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