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 (오호 십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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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은 351년 저족의 포홍의 후계자 부건이 건국한 오호 십육국 시대의 국가이다. 부건은 동진을 속여 관중을 점령하고 전진을 세웠으며, 352년 황제를 칭했다. 부건 사후 폭정을 일삼은 부생을 몰아내고 부견이 즉위하여 한족 왕맹을 등용, 내치를 다지고 국력을 키웠다. 370년 전연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했지만, 383년 비수 전투에서 동진에게 대패하면서 쇠퇴, 여러 국가로 분열되어 394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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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오호 십육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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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상태 | 제국 |
정부 형태 | 군주제 |
존속 기간 | 351년 ~ 394년 |
건국 | 351년 3월 4일 |
멸망 | 394년 |
이전 | 부건의 장안 입성 (350년) |
이후 | 부홍의 사망 (405년) |
수도 | 장안 (351년 ~ 385년), 진양 (385년 ~ 386년), 난안 (386년 ~ 394년), 황중 (394년) |
공용어 | 한어 선비어 |
종교 | 불교 도교 중국 민간 신앙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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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주요 사건 | 부건의 황제 칭칭 (352년) 부견의 전연 멸망 (370년) 비수 대전 (383년) 부견의 사망 (385년 10월 16일) |
지도자 | 부건 (351년 ~ 355년) 부생 (355년 ~ 357년) 부견 (357년 ~ 385년) 부비 (385년 ~ 386년) 부등 (386년 ~ 394년) 부숭 (394년) |
직책 | 천왕, 황제 |
역사적 맥락 | |
이전 국가 | 후조 전연 전량 대 추지 |
이후 국가 | 후연 후진 후량 동진 북위 서진 서연 추지 |
2. 역사
저족은 오호십육국시대 초기 포홍의 지도 아래 전조와 후조에 복속하며 용병으로 활동했다. 349년 후조 황제 석호 사후 혼란기에 포홍은 350년 자립하여 삼진왕(三秦王)을 칭하고 성을 부(苻)로 바꾸었으나 곧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 부건이 뒤를 이어 관중으로 진출, 351년 장안을 점령하고 전진을 건국하였다.
352년 황제에 즉위한 부건은 관중 지역을 평정하고 354년 동진의 환온이 이끈 북벌군을 격퇴하며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355년 부건이 사망하고 아들 부생이 즉위했으나, 그는 폭정을 행하여 민심을 잃었다. 357년 부홍의 손자이자 부건의 조카인 부견이 쿠데타를 일으켜 부생을 폐위시키고 천왕으로 즉위하였다.
부견은 한족 출신 왕맹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강력한 개혁을 추진, 법치를 확립하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정복 전쟁에 나서 370년 전연을 멸망시키고, 373년에는 동진의 양주 일대를 점령했으며, 376년에는 전량과 대나라를 차례로 멸망시켜 화북 통일을 달성하였다. 화북 통일 직후 재상 왕맹이 사망하였고, 부견은 이상주의적 정책과 함께 무리한 전쟁을 지속하였다. 378년에는 동진의 양양을 점령하였다.
383년, 부견은 천하 통일을 목표로 대규모 동진 정벌군을 일으켰으나, 비수대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는 전진 제국의 급격한 붕괴를 초래했다. 하북에서는 모용수가 후연을, 관중에서는 요장이 후진을 건국하는 등 복속했던 여러 세력들이 독립하였다. 385년, 부견은 서연의 공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후진의 요장에게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부견 사후, 그의 서장자 부비는 업에서 탈출하여 진양에서 황제로 즉위했으나 386년 서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동진군에게 살해되었다. 농서 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하던 부등이 황제로 즉위하여 후진과 항쟁했으나 394년 요흥에게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 부숭이 황중(湟中)으로 도망쳐 잠시 제위를 이었으나, 같은 해 서진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면서 전진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2. 1. 건국 배경
오호 중 하나인 저족은 현재 중국의 간쑤성이나 산시성 지역에 거주했던 민족으로, 오호 십육국 시대에는 장안 서쪽의 무도군과 약양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전진을 건국한 부(苻)씨는 본래 포(蒲)씨였으며, 하(夏) 왕조 시대 장안 근처 유호(有扈) 부족의 후손이라 주장했다.저족의 지도자 포홍(蒲洪)은 진주·양주 일대 저족을 이끌었다. 이들은 오호십육국 시대 초기에 전조에 복속했다가, 전조가 후조에 멸망하자 후조에 귀순했다. 서진 멸망 후 혼란기에 많은 난민이 합류하자 포홍은 려양공(呂梁公)을 자칭하며 세력을 키웠다. 후조의 석호 치하에서 포홍은 저족과 강족을 수도 근처로 이주시키는 정책에 관여했고, 자신은 방두(枋頭, 현재 허비, 허난성)에서 저족을 감독하는 교위(護氐校尉)를 맡으며 석호의 신임을 얻었다. 후조는 저족을 기주 일대로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349년, 석호 사후 후조에서 내란이 발생하자 포홍은 석준을 지지하며 혼란에 개입했다. 이후 독립 국가 건설을 목표로 관중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350년, 포홍은 예언에 따라 성씨를 부(苻)로 바꾸고 삼진왕(三秦王)을 칭했으나, 같은 해 3월 부하 마추에게 독살당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셋째 아들 부건은 혼란을 수습하고 350년에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처음 왕호를 폐지하고 동진에 복속하는 척하며 관중의 군벌 두홍(杜洪)을 방심시킨 뒤,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351년 1월, 부건은 천왕(天王) 및 대선우(大單于)를 칭하고 연호를 황시(皇始)로 정하며 동진으로부터 독립, 장안을 수도로 삼아 전진을 건국했다.

352년 1월, 부건은 황제로 즉위했으나 초기 전진은 아직 작은 나라였다. 그는 두홍의 잔존 세력 및 동진의 북벌군과 싸우며 관중 지역을 점차 평정했다. 354년 2월, 동진 정서대장군 환온의 북벌군 침공을 받았으나 6월에 격퇴하고 산시 일대에서 세력을 확고히 했다. 이로써 전진은 후조 멸망 후 화북 지역을 선비족 모용씨의 전연과 양분하는 주요 세력으로 성장했다.

355년 6월 부건이 사망하자, 셋째 아들 부생이 제2대 황제로 즉위했다. 부생은 356년 2월 전량을 복속시키고, 357년 5월에는 강족 지도자 요양을 살해하고 동생 요장을 복속시키는 등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잔인한 통치로 민심을 잃었고, 357년 6월 사촌인 부법과 부견 형제의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이후 부견이 제3대 황제(천왕)로 즉위했다.
2. 2. 부건과 부생의 통치
후조 황제 석호 사후 자립했던 저족의 지도자 부홍(원래 성은 포(蒲))은 350년 성씨를 부(苻)로 고치고 관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부하였던 마추에게 독살당했다. 그의 뒤를 이은 셋째 아들 부건은 잠시 왕호를 폐하고 동진에 신하로 속하는 척하며 관중의 군벌 두홍을 방심시킨 뒤, 장안을 기습 공격하여 점령했다. 351년 1월, 부건은 천왕·대선우를 칭하고 황시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장안을 수도로 삼아 전진을 건국했다.
352년 1월, 부건은 황제에 즉위했으나 초기 전진의 세력은 아직 미약했다. 그는 두홍의 잔당을 소탕하고 동진의 북벌군과 싸우면서 점차 관중 지역을 평정해 나갔다. 354년에는 동진의 대장군 환온이 이끄는 대규모 북벌군이 쳐들어왔으나, 부건은 초토화 전략 등을 사용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관중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이 과정에서 태자 부창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기도 했지만, 전진은 산시성 일대까지 세력을 떨치며 화북 서쪽의 강자로 부상하여, 동쪽의 전연과 화북을 양분하는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355년 6월, 부건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부생이 제2대 황제로 즉위했다. 부생은 356년 전량을 복속시키고, 357년에는 강족의 지도자 요양을 전투에서 죽이고 그의 동생 요장을 복속시키는 등 군사적으로는 성과를 거두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부생은 성품이 매우 잔인하고 포악하여 사소한 이유로 많은 고위 관료들을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크게 잃었다. 결국 357년 6월, 부생의 폭정에 반발한 부건의 조카이자 부생의 사촌 동생인 부견과 부법 형제가 쿠데타를 일으켜 부생을 시해하고, 부견이 제3대 군주(천왕)로 즉위하였다.
2. 3. 부견의 통치와 화북 통일
357년, 부견은 쿠데타를 일으켜 폭정을 행하던 부생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대진천왕'''(大秦天王)이라 칭하며 즉위하였다.[1] 저족 출신이었지만 유교 교육을 깊이 받은 부견은 한족 출신 왕맹을 재상으로 중용하여 국가 개혁을 단행했다. 왕맹은 부견의 신임을 바탕으로 강력한 법 집행과 정치 개혁을 통해 전진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1] 부견과 왕맹은 초기 황제들의 중상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주의로 전환하여 호상(豪商) 세력을 억제하고, 장안과 관중 지역의 관개 시설을 정비했다. 또한 흉노와 선비족 등 여러 민족을 농업 지역으로 이주시켜 농업 생산 기반을 확충했다.[1] 이와 함께 관료 기구를 정비하고 법제를 제정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했으며, 교육을 장려하고 전통적인 중국 의례를 복원하는 데 힘썼다.[1]즉위 초기에는 황족들의 반란과 흉노, 강족 등의 저항에 직면했으나, 368년까지 이러한 내부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고 본격적인 대외 팽창에 나섰다. 369년, 동진의 환온이 전연을 공격하자 이를 격퇴하고, 이듬해인 370년 11월에는 왕맹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전연을 멸망시키고 화북 동부 지역을 장악했다.[2][3] 이후 371년 4월에는 구지를,[3] 373년에는 동진으로부터 사천 지역을 차지했다. 376년 8월에는 전량을 멸망시켜 량주를 평정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대나라를 멸망시켰다.[2][3] 이로써 전진은 오호 십육국 시대 국가 중 유일하게 화북 통일을 달성하였다.[4][3] 부견은 패배시킨 국가의 지배층들을 관대하게 대우하고 자신의 정권에 참여시키는 포용책을 펼쳤다.

화북 통일 이후 전진의 위세는 절정에 달하여 고구려와 신라 등 주변 국가들이 조공하며 복속했다. 화북 지역의 사회는 안정되었고 인구는 2,300만 명에 달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다.[3] 그러나 화북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직후 재상 왕맹이 사망하면서 전진은 점차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부견은 이상주의에 입각하여 정복한 민족들을 수도 장안 인근에 이주시키고, 지배 민족인 저족을 화북 각지의 거점 도시에 분산시키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오히려 지배력 약화의 요인이 되었다.

부견은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았지만,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379년에는 고승 도안을 장안으로 초빙하여 정치 고문으로 삼았고, 382년에는 장군 여광에게 서역 원정을 명하여 쿠차의 고승 구마라집을 데려오도록 했다. 한편, 통일 이후에도 남쪽의 동진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아 378년에는 동진의 중요 거점인 양양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지속적인 군사 활동과 내부 정책의 불안정성은 훗날 전진이 급격히 쇠퇴하는 배경이 되었다.
2. 4. 비수대전과 전진의 쇠퇴
화북 통일에 큰 공헌을 한 왕맹은 375년에 사망했다. 왕맹은 죽기 전 부견에게 동진 정벌을 만류하며, 아직 완전히 복속되지 않은 선비족이나 강족 등 정복지의 여러 민족을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천하 통일을 염원했던 부견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양한 민족 집단을 통합한다는 명분 아래, 강족과 선비족 상당수를 수도 장안 인근으로 이주시키고, 지배 민족인 저족을 새로 정복한 지역 곳곳으로 보내는 정책을 추진했다.378년, 부견은 동진 정벌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동진의 영토인 양양을 포위하고 팽성을 공격했다. 379년 양양은 함락되었으나, 팽성 공격은 동진의 명장 사현에게 격퇴되어 건강으로 나아가는 데는 실패했다.
383년 8월, 부견은 마침내 천하 통일을 목표로 신하들의 거듭된 반대를 무릅쓰고 대규모 동진 정벌군을 일으켰다. 동원된 병력은 기록상 백만 명에 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2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부견의 동생 부융이 이끄는 선봉대가 수춘을 함락하는 등 초기에는 전진군이 우세를 보였다. 그러나 비수(淝水)를 사이에 두고 사안, 사현, 사석 등이 이끄는 동진군 주력과 대치하게 되면서 전황은 급변했다. 전투 중, 과거 동진 출신으로 전진에 항복했던 장수 주서가 전진군 진영 후방에서 "진(秦) 군대가 패했다!"라고 외치며 혼란을 야기했다. 이는 동진군의 기습과 맞물려 전진군 전체에 큰 동요를 일으켰고, 병사들은 삽시간에 무너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 결정적인 패배로 부견 자신도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으며, 동생 부융은 전사했다. 부견은 선비족 모용수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간신히 북쪽으로 후퇴했다(비수대전).
비수에서의 참패는 화북을 통일했던 전진의 지배력을 급격히 약화시켰다. 384년 1월, 부견을 호위하며 후퇴했던 모용수는 업을 거쳐 중산에서 자립하여 후연을 건국했다. 4월에는 강족의 지도자 요장이 관중 북부(현재 산시성 셴양 시싱핑 시 동쪽 마목장)에서 자립하여 후진을 세웠다. 한편, 관중에 거주하던 선비족 모용홍과 모용충 형제도 화음에서 봉기하여 서연 세력을 형성하고 수도 장안을 압박했다. 부견은 이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장안은 서연군의 포위 속에서 극심한 혼란과 기근에 시달렸다.
385년 5월, 모용충이 이끄는 서연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부견은 결국 장안을 버리고 오장산(현재 산시성 바오지 시치산 현 서북쪽)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7월, 후진을 건국한 요장에게 사로잡혀 신평으로 끌려가 황제 자리를 넘기라는 협박을 받았다. 부견이 이를 끝까지 거부하자, 8월에 요장은 부견을 살해했다. 부견의 죽음으로 전진은 사실상 멸망 상태에 이르렀다.
부견의 서장자 부비는 업에서 모용수의 공격을 1년 넘게 막아내다 탈출하여 진양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부견의 사망 소식을 듣고 황제에 즉위했으나(385년), 386년 서연의 모용영에게 패배하고 동진군에게 살해되었다. 농서 일대의 전진 세력을 이끌던 부등은 부비의 사망 소식을 듣고 황제로 즉위하여(386년), 관중의 전진계 세력과 연합하여 수년간 후진의 요장을 공격했다. 그러나 389년 본거지를 기습당해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393년 요장이 죽자 부등은 후진에 대한 최후의 공세를 감행했지만, 요장의 아들 요흥의 반격에 대패하여 살해되었다. 부등의 태자 부숭은 황중(湟中)으로 도망쳐 황제 자리를 이었으나, 394년 서진의 걸복건귀에게 공격받아 살해되면서 전진은 완전히 멸망했다.
2. 5. 전진의 멸망
383년 8월, 부견은 천하 통일을 목표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진 정벌에 나섰다. 총 100만(혹은 90만, 실제로는 20만 명 정도로 추정)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동진의 국경 전역을 공격했지만, 부견이 직접 지휘한 비수(淝水) 방면의 주력군은 동진의 명장 사현과 사석 등의 활약과 내부 배신(과거 동진의 양주자사였던 주서의 거짓 외침 "견이 패했다!")으로 인해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비수대전). 이 전투에서 부견은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동생 부융은 전사했으며, 전진군은 선비족 모용수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겨우 장안으로 퇴각했다.비수대전의 참패는 전진의 급격한 몰락을 가져왔다.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전진의 통치력은 크게 흔들렸다.
- 384년 1월, 모용수는 허베이성 중산에서 자립하여 후연을 건국했다.
- 384년 4월, 강족의 요장은 위북(渭北)의 마목장(馬牧場)에서 부견의 처벌을 두려워하여 자립, 후진을 건국했다.
- 화음에서는 모용홍과 모용충 형제가 선비족을 규합하여 서연을 세우고 장안을 공격했다. 384년 6월 모용홍은 암살되었으나 서연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 385년, 걸복국인은 농서에서 서진을 건국했다.
- 386년, 서역 원정에서 돌아온 여광은 량주를 점령하고 후량을 건국했다.
- 386년, 선비족 탁발부의 탁발규는 대나라를 재건하고 훗날 북위로 발전시켰다.
부견은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서연 군대의 압박과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385년 5월 장안을 탈출하여 오장산(五將山)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7월에 후진의 요장에게 사로잡혀 신평(新平)으로 연행되었고, 황제 자리 선양을 거부하다가 8월에 살해되었다.
부견 사후, 그의 서장자 부비는 업에서 모용수에게 패배한 뒤 산시성진양으로 도망쳐 황제로 즉위하여 전진의 재건을 시도했다. 그러나 전진의 영역은 하동(河東) 일대로 축소되었고, 후연과 서연 사이에서 고전하다가 386년 10월, 서연의 모용영에게 패배하고 동원(東垣)에서 동진 군대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간쑤성 동부 지역에 있던 부견의 먼 친척 부등이 386년 11월 부한(枹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후진과 수년간 항쟁했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389년 대계 전투(大界戰鬪)에서 크게 패배하고 세력이 약화되었다. 394년 7월, 요장의 사망을 틈타 후진에 대한 최후의 공격(폐교 전투, 廢橋之戰)을 감행했으나 요흥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부등의 아들 부숭이 칭하이성 황중(湟中)으로 도망쳐 마지막 황제로 즉위했으나, 같은 해 10월 서진의 걸복건귀에게 공격받아 살해되면서 전진은 완전히 멸망했다.
3. 정치
부견은 한학(漢學)에 대한 소양을 바탕으로 왕맹을 중용하여 한족의 전통적인 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그는 중국 고대에 이상적인 정치 공간으로 여겨진 명당(明堂)을 건설하고, 도성 남쪽 교외에서 지내는 남교 제사, 황제가 직접 농사를 짓는 의례인 적전(籍田) 친경, 황후가 누에를 치는 의례인 양잠례 등 중국의 전통적인 국가 의례를 잇달아 도입했다. 특히 전연을 멸망시키고 중원의 지배자가 된 이후에는 유교 이념에 기반한 국가 건설과 풍속 정립에 더욱 힘썼으며, 조위와 서진 시대의 사족(士族) 계급 호적 제도를 부활시켜 이들을 전진 왕조 체제 안으로 편입시키려 노력했다.
부견은 당시 혼란했던 화북 지역을 통일하기 위해 여러 민족을 아우르는 융합 정책을 추진했다. 자신이 정복한 선비이나 강족 등을 수도 장안 주변으로 이주시켜 중용하는 한편, 자신의 기반 세력인 저족은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새로운 지배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전진의 핵심 기반인 저족 집단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훗날 전진 왕조가 해체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왕맹과 부융은 이러한 정책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부견에게 간언했지만, 부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호 십육국 시대의 여러 정권들은 강력한 단일 군주 중심 체제라기보다는, 왕족이나 부족장이 이끄는 여러 집단이 연합한 형태의 정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진 역시 저족을 핵심으로 흉노, 선비, 한족 등을 지배하는 연합 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부견이 왕권을 강화하려 해도 그 성장을 저해하는 내부적 요인이 많았다. 그럼에도 부견이 현상 유지보다는 적극적인 세력 확장을 추구했기 때문에, 새로운 지배지로부터 인재, 세수, 군사력,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왕권 강화를 위해 필수적이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 융합책을 추진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진이 멸망시킨 이전 국가의 황족들에게 중요한 관직이나 군사 지휘권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진의 중추 세력 내에서도 많은 의문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4. 대외 관계
전진은 주변국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는데, 특히 고구려와는 불교 전파를 계기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다.[6][7][8]
4. 1. 고구려와의 관계
372년 전진의 부견은 승려 순도를 고구려에 보내 불상과 경문을 전했다.[6] 이는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사건이다. 이후 374년에는 승려 아도가 전진에서 건너와 불도를 전파했다.[7]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375년에 초문사(肖門寺)를 세워 순도를 머물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를 머물게 하는 등[8]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하고 보급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전진과 평화적인 관계를 수립하고, 불교를 국가 통치 이념의 하나로 받아들였다.5. 역대 황제
묘호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
---|---|---|---|---|
고조(高祖) | 경명(景明) | 부건(苻健) | 351년 ~ 355년 | 황시(皇始) 351년 ~ 355년 |
– | 려왕(厲王)¹ | 부생(苻生) | 355년 ~ 357년 | 수광(壽光) 355년 ~ 357년 |
세조(世祖) | 선소(宣昭) | 부견(苻堅) | 357년 ~ 385년 | 영흥(永興) 357년 ~ 359년 감로(甘露) 359년 ~ 364년 건원(建元) 365년 ~ 385년 |
– | 애평(哀平) | 부비 | 385년 ~ 386년 | 태안(太安) 385년 ~ 386년 |
태종(太宗) | 고(高) | 부등 | 386년 ~ 394년 | 태초(太初) 386년 ~ 394년 |
– | – | 부숭 | 394년 (몇 달) | 연초(延初) 394년 |
¹ 부생은 황제로 재위했으나 사후 왕으로 추증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https://www.sinica.e[...]
[2]
문서
Zizhi Tongjian
[3]
문서
Zizhi Tongjian
[4]
서적
中国古代王朝和政权名号探源
华中师范大学出版社
2000-11
[5]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6]
서적
삼국사기
[7]
서적
삼국사기
[8]
서적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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