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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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린은 오호십육국 시대 후연의 인물로, 모용수의 조카이다. 그는 모용수가 전진으로 망명하려 할 때 이를 밀고하여 모용수의 미움을 샀으나, 비수대전 이후 모용수의 신임을 얻어 후연 건국에 기여했다. 조왕에 봉해졌으나, 참합피 전투에서 패배하고, 반란을 꾀하다 실패하여 여러 차례 주군을 배신하며 몰락했다. 결국 모용덕에게 의탁하여 남연 건국을 도왔으나, 반란을 꾀하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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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린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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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모용 (慕容, Mùróng) |
이름 | 린 (麟, Lín) |
시호 | 장렬(莊烈, Zhuāngliè) |
작위 | 요서왕(遼西王, Liáoxī Wáng) |
생애 | |
출생 | 미상 |
사망 | 398년 |
시대 | 오호 십육국 시대 |
활동 시기 | 후연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모용황 |
형제 | 모용준 모용수 모용덕 모용외 |
기타 정보 | |
직업 | 군인, 왕족 |
주요 활동 | 모반, 군사 활동 |
2. 생애
전연의 오왕 모용수의 서출 셋째 아들로 태어난 모용린은 아버지 모용수가 전진으로 망명하고 후연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배신과 권력 다툼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으며,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2. 1. 초기 생애와 배신
369년, 모용수가 전연에서 전진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울 당시, 모용린은 업으로 돌아와 모용수의 계획을 밀고하여 모용수가 전진으로 완전히 망명하게 만들었다.[2] 이 일로 모용린은 조정에서 밀려나 모용량(慕容亮)이 주둔하던 사성(沙城)으로 떠났다. 370년, 형 모용령이 왕맹(王猛)의 계략으로 전연으로 복귀한 뒤 용성을 점령하려 하자, 모용린은 모용량에게 이를 알려 용성이 함락되는 것을 막았고, 결국 모용령은 섭규(涉圭)에게 살해당했다.[2]그해 전진이 전연을 멸망시킨 뒤, 모용수는 부견을 업으로 데려와 모용린의 어머니를 사형시켰다. 모용린은 처형당하지 않았지만, 모용수와 연을 끊게 되었다. 그러나 383년-384년 비수 대전 이후, 모용수가 전진으로부터 독립하려 할 당시 모용린은 유용한 조언들을 제시하여 모용수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2]
2. 2. 후연 건국과 군사적 활약
384년, 모용수(慕容垂)가 후연(後燕)을 건국하자, 모용린은 전진(前秦)의 잔당과의 싸움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다.[1] 386년 조왕(趙王)에 봉해졌으며,[1] 386년-387년과 390년-391년에는 후연의 속국이었던 북위(北魏)의 탁발계와 함께 흉노의 유현 등 북위의 위협을 격퇴했다.[1] 391년, 모용수에게 탁발규를 중용하여 중산(中山)으로 불러들일 것을 권했지만, 모용수는 따르지 않았다.[1]391년, 탁발규가 후연과 대립하여 침략해 오자, 모용수는 395년에 태자 모용보(慕容寶)를 모용농(慕容農)과 함께 공격에 나서게 했다.[1] 그러나 후연과 북위가 성락(盛樂)에서 대치하자, 탁발규는 모용수가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고, 모용린의 부하인 모여숭(慕輿嵩)이 모용보를 살해하고 모용린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살해되었다.[1] 이 일로 인해 모용보와 모용린 사이에 균열이 생겼고, 후연군은 퇴각했다.[1] 모용보는 모용린을 북위에 대비하여 변방의 수비에 배치했으나, 모용린이 자만했기 때문에 북위군은 참합파에서 모용보의 군대를 대파했다.[1] 396년, 모용수는 북위를 공격하여 성공했지만, 참합파 옆을 지나가다 탄식하며 병이 들어 죽었고, 모용보가 그 뒤를 이었다.[1]
2. 3. 참합파 전투와 몰락
395년 참합파 전투 이후, 모용린은 모용보에게 부장으로서 신뢰를 받았다.[3] 북위의 탁발규가 모용농을 격파하고 병주를 점령한 후 중산으로 향하자, 모용린은 중산 수비를 맡았으나, 수비를 굳게 지키며 북위군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이는 모용농과 모용륭의 반감을 샀다.397년 봄, 중산이 북위에 포위되자, 모용린은 중산 내에서 모용보에 대한 쿠데타를 꾀했다. 그러나 이는 실패했고, 모용린은 중산을 떠나 태항산에 근거지를 두었다. 모용린이 모용회의 원군을 습격할 것을 우려한 모용보는 중산을 버렸다. 중산의 백성들은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모용상을 통치자로 지지했지만, 같은 해 여름, 모용상이 즉위했으나 북위와 싸우려 하지 않고, 기아를 무시하며 잔혹하게 굴었기에 백성들의 분노를 샀다. 모용린은 문이 열린 중산을 습격하여 모용상을 사로잡아 죽였다. 모용린은 스스로 즉위하고 백성들에게 식량 축적을 허가했으나, 북위와 싸우려 하지 않아 결국 북위에 중산을 빼앗겼다. 이후 모용린은 제위를 버리고 업성의 모용덕에게 달아났다.
모용린은 모용덕에게 업성이 수비에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황하 남쪽의 활대에서 북위에 대비할 것을 설득했다. 모용덕은 이에 따랐다. 이후 모용린은 모용덕에게 제위를 권했고, 모용덕은 남연을 건국했다. 모용린은 중용되었지만, 반역을 꾀하다가 모용덕에게 처형되었다.[1][4]
3. 자녀
4. 평가
모용린에 대한 평가는 사료에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자치통감』, 『진서』 등의 사료를 통해 그의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5. 가계도
모용근(慕容根) - 후연의 산기상시(散騎常侍), 후에 북위에 항복했다.
참조
[1]
서적
資治通鑑
[2]
서적
晋書
[3]
서적
晋書
[4]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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