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상
1. 개요
모용상은 후연의 황족으로, 모용보로부터 개봉공에 봉해져 중산을 지켰다. 397년 모용보가 북위에 패하여 달아나자 중산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건시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나,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었다. 결국 모용린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으며, 북위가 중산을 점령한 후 시신이 다시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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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 모용 (慕容) |
|---|---|
| 휘 | 상 (詳) |
| 작위 | 연나라의 왕 (燕王) |
| 시호 | 없음 |
| 생몰년 | ? ~ 397년 |
| 시대 | 오호 십육국 시대 |
| 민족 | 선비족 |
| 즉위 | 397년 |
|---|---|
| 폐위 | 397년 |
| 주요 사건 | 모용린의 반란 스스로 연왕 자칭 백성들의 원망 살해당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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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년 사망 -
암브로시우스
암브로시우스는 4세기 로마 제국의 관료 출신으로 밀라노 주교가 되어 아리우스파를 물리치고 교회 권위를 드높였으며,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주는 등 서방 교회의 신학 발전에 기여하고, 397년에 사망했다. -
397년 사망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넥타리오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넥타리오스는 4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제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주재하고 아리우스파 등과의 논쟁에 관여했으며 교회 개혁을 추진하여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
후연의 황제 -
모용성
모용성은 후연의 황족으로, 모용보의 장남이며, 난한을 무너뜨리고 황제에 즉위했으나 폭정을 일삼았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했지만 반란으로 사망하여 소무황제라 불린다. -
후연의 황제 -
모용희
모용희는 후연의 황족으로, 모용수의 아들이자 모용보의 조카이며, 조카 모용성 사망 후 16세에 천왕으로 즉위했으나 폭정을 일삼다 풍발의 반란으로 처형되었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모용황의 증손자이자, 모용보로부터 개봉공(開封公)으로 봉해졌으며, 중산을 지켰다. 모용상은 후연 시기에 남안공을 지낸 모용청(慕容青)이라는 형이 있었다. 396년에는 상곡의 태수를 지냈다. 이후 모용보의 아들인 모용회가 모용보에 반란을 일으켰다 패배하여 중산으로 오자 모용회를 살해하였다.
397년 모용보가 북위 군대에 패하여 계(薊)로 피신하자, 중산에서 스스로 후연 황제를 자칭하고 연호를 건시(建始)로 하였다. 그러나 폭정을 펼쳐 민심을 잃었고, 그 해 모용린이 이끄는 정령족 군대에 살해되었다.
모용상의 치세는 단 두 달에 불과했다. 그는 술에 중독되었고 쾌락적인 활동에 몰두했으며, 가족혼담을 포함하여 중산에서 500명 이상을 무차별 처형했다. 기근이 닥쳐 백성들이 성 밖에서 식량을 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397년 가을, 모용린과 그의 추종자들이 중산으로 들어가 모용상을 생포하여 참수했다. 모용린은 그 후 스스로 연나라 황제를 칭했으나, 북위가 다시 중산을 공격했다. 397년 11월, 중산은 위나라에 함락되었고, 탁발규는 모용상의 시신을 파내어 다시 참수했다.
2.1. 초기 생애와 배경
모용황의 증손자이자, 모용보로부터 개봉공(開封公)으로 봉해졌으며, 중산을 지켰다. 모용상은 후연 시기에 남안공을 지낸 모용청(慕容青)이라는 형이 있었다. 396년에는 상곡의 태수를 지냈다. 이후 모용보의 아들인 모용회가 모용보에 반란을 일으켰다 패배하여 중산으로 오자 모용회를 살해하였다.
2.2. 모용보 치세와 중산에서의 황제 즉위
모용보에게서 개봉공(開封公)으로 봉해졌으며, 중산을 지켰다. 이후 모용보의 아들 모용회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여 중산으로 도망쳐 오자, 모용회를 살해하였다.
397년 모용보가 북위 군대에 패하여 계(薊)로 피신하자, 중산에서 스스로 후연 황제를 자칭하고 연호를 건시(建始)로 하였다. 그러나 폭정을 펼쳐 민심을 잃었고, 그 해 모용린이 이끄는 정령족 군대에 살해되었다.
2.3. 폭정과 최후
모용보에게서 개봉공(開封公)으로 봉해졌으며, 중산을 지켰다. 이후 모용보의 아들인 모용회가 모용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여 중산으로 오자 모용회를 살해하였다.
397년 모용보가 북위의 군대에 패한 뒤 계로 피신하자, 중산에서 스스로 후연의 황제를 자칭하면서 연호를 건시(建始)로 하였다. 그러나 폭정으로 인해 곧 민심을 잃게 되었고, 그 해 모용린이 이끄는 정령족의 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모용상의 치세는 단 두 달에 불과했다.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모용상은 잔혹하고 무책임한 통치자로 드러났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술에 중독되었고 쾌락적인 활동에 지나치게 몰두했다고 한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가족혼담을 포함하여 중산에서 500명 이상을 무차별적으로 처형했다. 또한 중산에는 기근이 닥쳤고, 백성들이 성 밖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을 때 모용상은 이를 거부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었다.
새로운 지도자를 갈망하던 중산 백성들은 모용상과의 마지막 만남 이후 숨어 지내던 모용린에게 기대를 걸었다. 397년 가을, 모용상은 장군 장상을 상산군에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장상이 그곳에 있는 동안 모용린과 그의 남은 병사들은 장상의 군대에 섞여 중산으로 돌아갔다. 모용린과 그의 추종자들은 성문이 열리자 몰래 중산으로 들어갔고, 안으로 들어가 모용상을 생포하여 참수했다. 모용린은 그 후 스스로 연나라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모용린의 선포 직후, 북위가 다시 중산을 공격했다. 397년 11월, 중산은 마침내 위나라에 함락되었다. 모용상은 죽은 후 장례를 치렀다. 탁발규는 탁발고의 죽음에 비통해했다고 전해지며, 모용상의 시신을 파내어 다시 참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