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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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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용상은 후연의 황족으로, 모용보로부터 개봉공에 봉해져 중산을 지켰다. 397년 모용보가 북위에 패하여 달아나자 중산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건시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나,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었다. 결국 모용린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으며, 북위가 중산을 점령한 후 시신이 다시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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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상
기본 정보
전한 왕조의 기
전한 왕조의 기
모용 (慕容)
상 (詳)
작위연나라의 왕 (燕王)
시호없음
생몰년? ~ 397년
시대오호 십육국 시대
민족선비족
생애
즉위397년
폐위397년
주요 사건모용린의 반란
스스로 연왕 자칭
백성들의 원망
살해당함

2. 생애

모용황의 증손자이자,[1] 모용보로부터 개봉공(開封公)으로 봉해졌으며, 중산을 지켰다. 모용상은 후연 시기에 남안공을 지낸 모용청(慕容青)이라는 형이 있었다.[2] 396년에는 상곡의 태수를 지냈다. 이후 모용보의 아들인 모용회가 모용보에 반란을 일으켰다 패배하여 중산으로 오자 모용회를 살해하였다.

397년 모용보가 북위 군대에 패하여 (薊)로 피신하자, 중산에서 스스로 후연 황제를 자칭하고 연호를 건시(建始)로 하였다.[3] 그러나 폭정을 펼쳐 민심을 잃었고, 그 해 모용린이 이끄는 정령족 군대에 살해되었다.[3]

모용상의 치세는 단 두 달에 불과했다. 그는 술에 중독되었고 쾌락적인 활동에 몰두했으며, 가족혼담을 포함하여 중산에서 500명 이상을 무차별 처형했다.[7] 기근이 닥쳐 백성들이 성 밖에서 식량을 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397년 가을, 모용린과 그의 추종자들이 중산으로 들어가 모용상을 생포하여 참수했다.[8] 모용린은 그 후 스스로 연나라 황제를 칭했으나, 북위가 다시 중산을 공격했다. 397년 11월, 중산은 위나라에 함락되었고, 탁발규는 모용상의 시신을 파내어 다시 참수했다.[9]

2. 1. 초기 생애와 배경

모용황의 증손자이자,[1] 모용보로부터 개봉공(開封公)으로 봉해졌으며, 중산을 지켰다. 모용상은 후연 시기에 남안공을 지낸 모용청(慕容青)이라는 형이 있었다.[2] 396년에는 상곡의 태수를 지냈다. 이후 모용보의 아들인 모용회가 모용보에 반란을 일으켰다 패배하여 중산으로 오자 모용회를 살해하였다.

2. 2. 모용보 치세와 중산에서의 황제 즉위

모용보에게서 개봉공(開封公)으로 봉해졌으며, 중산을 지켰다. 이후 모용보의 아들 모용회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여 중산으로 도망쳐 오자, 모용회를 살해하였다.[3]

397년 모용보가 북위 군대에 패하여 (薊)로 피신하자, 중산에서 스스로 후연 황제를 자칭하고 연호를 건시(建始)로 하였다.[3] 그러나 폭정을 펼쳐 민심을 잃었고, 그 해 모용린이 이끄는 정령족 군대에 살해되었다.[3]

2. 3. 폭정과 최후

모용보에게서 개봉공(開封公)으로 봉해졌으며, 중산을 지켰다. 이후 모용보의 아들인 모용회가 모용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여 중산으로 오자 모용회를 살해하였다.

397년 모용보가 북위의 군대에 패한 뒤 로 피신하자, 중산에서 스스로 후연의 황제를 자칭하면서 연호를 건시(建始)로 하였다. 그러나 폭정으로 인해 곧 민심을 잃게 되었고, 그 해 모용린이 이끄는 정령족의 군에 의해 살해되었다.[6]

모용상의 치세는 단 두 달에 불과했다.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모용상은 잔혹하고 무책임한 통치자로 드러났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술에 중독되었고 쾌락적인 활동에 지나치게 몰두했다고 한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가족혼담을 포함하여 중산에서 500명 이상을 무차별적으로 처형했다.[7] 또한 중산에는 기근이 닥쳤고, 백성들이 성 밖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을 때 모용상은 이를 거부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었다.

새로운 지도자를 갈망하던 중산 백성들은 모용상과의 마지막 만남 이후 숨어 지내던 모용린에게 기대를 걸었다. 397년 가을, 모용상은 장군 장상을 상산군에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장상이 그곳에 있는 동안 모용린과 그의 남은 병사들은 장상의 군대에 섞여 중산으로 돌아갔다. 모용린과 그의 추종자들은 성문이 열리자 몰래 중산으로 들어갔고, 안으로 들어가 모용상을 생포하여 참수했다.[8] 모용린은 그 후 스스로 연나라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모용린의 선포 직후, 북위가 다시 중산을 공격했다. 397년 11월, 중산은 마침내 위나라에 함락되었다. 모용상은 죽은 후 장례를 치렀다. 탁발규는 탁발고의 죽음에 비통해했다고 전해지며, 모용상의 시신을 파내어 다시 참수했다.[9]

3. 평가

모용상에 대한 평가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후연의 황제 모용보(혜민제)와 대립하였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Zizhi Tongjian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Wei Shu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Zizhi Tongjian
[7] 서적 Jin Shu
[8] 서적 Zizhi Tongjian
[9] 서적 Wei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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