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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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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암브로시우스는 4세기 로마 제국의 고위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법학을 공부하고 관료의 길을 걸었다. 밀라노의 수석 집정관을 거쳐 374년 밀라노 주교가 된 그는 아리우스파를 몰아내고 정통 신앙을 옹호하며 교회 정치에 힘썼다. 황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교회 권위를 드높였으며, 테살로니카 학살 사건에 대한 테오도시우스 1세의 공개 참회를 이끌어냈다. 또한, 동방 교부들의 사상을 서방에 전파하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주는 등 서방 교회의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암브로시우스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다양한 저술을 남겼고, 397년에 사망했다. 그의 신학 사상과 윤리 사상은 후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암브로시우스 성가와 밀라노 전례는 가톨릭 교회에서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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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성 암브로시우스
모자이크 (–500)의 상세 모습, 산탄브로조 대성당
직함밀라노 주교
재임 시작374년
재임 종료397년 4월 4일
이전아욱센티우스
이후심플리키아누스
출생 이름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
출생지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갈리아 벨기카, 로마 제국
사망일397년 4월 4일
사망지메디오라눔, 이탈리아, 서방 로마 제국
매장지산탄브로조 대성당 지하 묘지
종교기독교
기념일12월 7일
숭배 대상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성공회
성인 칭호교회 박사
수호 성인밀라노와 양봉가
다른 수호 대상꿀빵 제빵사

주교
양초 제조업자
상인
가축
프랑스 군수품
거위
진저브레드 제조업자
배움
학생
석공
밀랍 녹이는 사람
볼로냐
신학 정보
주요 작품De officiis ministrorum (377–391)
(386–390)
De obitu Theodosii (395)
시대교부 시대
전통 운동삼위일체론
주요 관심사기독교 윤리마리아론
주목할 만한 사상반이교주의, 교회의 어머니

2. 행적

Divi Ambrosii Episcopi Mediolanensis Omnia Opera, 1527


베노초 고촐리의, 암브로시우스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세례를 주는 프레스코


4세기 중반, 로마 제국의 고급 관료의 아들로, 아버지의 임지 갈리아의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현재의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처음 일어난 기적은 "암브로시우스가 아직 유아였을 때, 그가 입을 벌리고 자고 있자 수많은 벌들이 그의 혀에 앉아 그를 쏘는 대신 꿀을 떨어뜨렸다"는 것으로, 그의 비서였던 파울리누스가 기록했다. 이 때문에 그는 성장하여 말솜씨가 뛰어나게 되었다고 한다[36]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관료의 길을 걸었다. 우수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368년에 실미움의 장관, 370년에는 밀라노의 수석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밀라노는 제국의 서방 중심 도시였다.

374년, 암브로시우스의 운명이 크게 바뀌게 된다. 밀라노 주교 아욱센티우스(en)가 사망한 후임 인사 문제로 아리우스파와 반 아리우스파의 민중들이 뒤섞여 소동이 벌어졌다. 인망이 두터웠던 암브로시우스가 조정을 시작하자 파벌 간의 싸움에 지쳐있던 민중들은 암브로시우스야말로 밀라노 주교에 적합하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처음 암브로시우스는 매춘부 2명을 집에 머물게 하는 등 주교 취임을 피하려 했다. 게다가 밀라노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밀라노의 산 시로 지구를 벗어나자마자 민중들에게 붙잡혔다. 그는 베타라는 이름의 암말을 타고 도망치며 "달려라 베타, 달려라 베타 (corri Betta, corri Betta)"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도망쳤기 때문에, 그가 붙잡힌 지역은 오늘날에도 코르베타라고 불린다는 민간 어원이 존재한다[36]。그러나 너무나 열렬한 요구에 암브로시우스는 아직 기독교도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락했다. 사제에 대해 기독교의 교리를 배운 후, 세례를 받고 곧 주교로 서임되었다. 이것이 374년 12월 7일이며, 암브로시우스의 기념일은 이 날짜에서 유래한다.

주교가 된 암브로시우스는 교회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아리우스파를 몰아내고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데 힘썼다. 378년밀라노에 들른 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로마의 전통 종교를 탄압하도록 부추겼고[37], 382년에는 수도 로마의 원로원에서 여신 승리의 여신의 을 철거시켰다[37]384년에는 제단 재건을 호소하는 수도 장관 의 연설에 마음이 흔들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위협하여 계획을 중지시키고[37], 385년부터 386년에 걸쳐서는 아리우스파였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어머니 와도 격렬하게 다퉜다[37]。더욱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유대교를 박해하도록 388년에 약속하게 하고[37], 390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테살로니키에서 민중을 학살하는 사건(테살로니카의 학살)을 일으키자, 테오도시우스의 파문을 선언하고 공개 사과를 요구하여 이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리스어에 정통했던 암브로시우스는 바실리오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 등 동방 교부들의 사상을 배워 이를 서방에 전파하여 서방 교회의 신학 수준을 높였다. 또한 오리게네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을 연구하여 그들의 성서 해석 방법을 서방 교회의 표준으로 삼았다. 젊은 날의 아우구스티누스도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고, 회심을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암브로시우스는 《고대》 시대에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은 최초의 인물이다.

밀라노에서 전통적으로 불리는 암브로시오 성가라는 라틴어 성가는 암브로시우스에서 유래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밀라노에서 행해지는 전례 양식은 암브로시우스 전례(밀라노 전례)라고 불린다. 암브로시우스에게 귀속되는 성가에는 "테 데움"(주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오소서, 이방인의 구원자여"(베니 레뎀토르 젠티움) 등이 있다.

== 학문 수학 ==

암브로시우스는 337년 혹은 340년에 오늘날의 독일 트리어에서 갈리아 지방의 로마 제국 귀족 가문 출신 장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꿀벌들이 그의 입술에 지식의 단물을 주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훗날 그가 뛰어난 설교자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산탐브로조 제단에는 암브로시우스가 아기였을 때 벌들이 그의 요람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부올비노/부올비노it부조가 있다.

부올비노/부올비노it부조로, 암브로시우스가 아기였을 때 벌들이 그의 요람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림 오른쪽 편에 있고, 하늘에는 세 개의 구름에서 "불꽃을 내뿜고" 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에서 아버지의 친구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로마 황제의 근위대장 겸 재판소장 안치오 프로부스의 도움을 받으며 법률과 수사학 등 여러 학문을 공부하여 뛰어난 법률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직에 들어섰고,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 총독 섹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는 처음에 그에게 사법 고문 자리를 주었다.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관료의 길을 걸었으며,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368년에 실미움의 장관, 370년에는 밀라노의 수석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36]

== 아리우스주의와 보편교회 간의 대립 ==

370년, 암브로시우스는 32세의 나이로 에밀리아와 리구리아 지역의 집정관이 되어 밀라노에 주재했다. 당시 밀라노는 새 주교 임명을 두고 아리우스파와 보편교회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기독교에서는 성자성부의 피조물이라고 본 아리우스파를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언했으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리우스(기원후 336년 사망)는 서기 300년경 하느님 아버지가 아들을 창조했을 것이라고 주장한 기독교 사제였다. 이는 아들이 영원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와 다른 "본질"을 가진 열등한 존재임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독론은 전통에 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리비아 및 기타 로마 속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주교들이 이 논쟁에 참여했고, 사람들은 여러 편으로 갈라져 때로는 거리에서 한쪽 편을 지지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아리우스주의는 서방동방 제국 모두에서 많은 고위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정통주의를 지지했지만, 375년에 제국의 공동 통치자가 된 그의 어린 이복 형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리우스 신조를 따랐다. 암브로시우스는 신학적으로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려 했지만, 젊은 황태자의 입장을 바꾸지는 못했다. 동방에서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역시 니케아 신조를 공언했지만, 그의 지배 지역에는 특히 고위 성직자들 사이에 아리우스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종교적 격동 속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두 지도자, 라티아리아의 팔라디우스와 싱기두눔의 세쿤디아누스 주교는 자신들의 세력을 믿고 그라티아누스에게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설득했다. 이 요청은 매우 공정하게 보여 그라티아누스는 주저없이 이에 응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그 결과를 두려워하여 황제를 설득하여 이 문제를 서방 주교들의 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381년에 32명의 주교로 구성된 시노드가 아퀼레이아에서 열렸다. 암브로시우스는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팔라디우스는 자신의 의견을 옹호하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투표가 이루어졌고 팔라디우스와 그의 동료 세쿤디아누스는 주교직에서 해임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주교로 재임하는 기간의 절반 이상을 아리우스주의와 싸웠다. 교회 내의 일치는 중요했지만, 국가에게도 마찬가지였으며, 로마인으로서 암브로시우스는 이에 대해 강한 의식을 가졌다. 이단에 대한 갈등은 14, 15세기의 종교 개혁에 비견될 만한 종교적 격동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8]

== 주교 서품 ==

암브로시우스는 374년 11월 30일에 세례를 받고 일주일 후인 12월 7일에 주교로 임명되었다.[38] 주교가 된 암브로시우스는 가정교사 심플리키아누스에게서 종교학을 배우고, 엄격한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38] 그는 "나눔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실천"이라는 신념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고 부유층들이 탐욕에서 벗어나 사회공동체에서 이웃과 소유를 나누는 사회선교에 힘썼으며,[38] 곧 서방 교회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성직자가 되었다.[38] 그는 신학적, 도덕적 부흥에 매진했으며 아리우스파 이단 사상에 반대했다.[38]

민중들은 그의 설교를 듣기위해 찾아왔으며,[38]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시켜 훗날 위대한 성인이 되도록 이끌었다.[38]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성서를 주석하는 설교를 듣고 회심했다.[38]

4세기 중반, 로마 제국 고급 관료의 아들로 태어난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관료의 길을 걸었다. 368년에 실미움의 장관, 370년에는 밀라노의 수석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374년, 밀라노 주교 아욱센티우스(en)가 사망한 후 아리우스파와 반 아리우스파 사이에 후임 문제로 소동이 벌어졌다. 암브로시우스가 조정을 시작하자 민중들은 암브로시우스를 밀라노 주교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처음에 주교직을 완강히 거부했지만, 열렬한 요구에 결국 수락하고 세례를 받은 후 주교로 서임되었다.

주교가 된 후 암브로시우스는 교회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아리우스파를 몰아내고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데 힘썼다. 378년 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로마 전통 종교를 탄압하도록 부추겼고,[37] 382년에는 원로원에서 여신 승리의 여신의 을 철거시켰다.[37] 384년에는 제단 재건을 호소하는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의 연설에 마음이 흔들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위협하여 계획을 중지시켰고,[37] 385년부터 386년에 걸쳐서는 아리우스파였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어머니 와도 격렬하게 다퉜다.[37]

== 황제와의 대립 ==

암브로시우스는 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2세, 테오도시우스 1세와 좋은 관계를 맺었고 다양한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했다.[40] 그라티아누스와 암브로시우스는 개인적인 친분을 맺었고, 암브로시우스가 영적 지도자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오랫동안 통설이었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자료를 통해 뒷받침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40] 382년 경 암브로시우스는 아우소니우스를 대신하여 그라티아누스 궁정에서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승리의 제단 재설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40]

383년, 그라티아누스는 갈리아(프랑스)의 리옹에서 마그누스 막시무스에게 암살당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12세였고, 암살로 인해 그의 어머니 유스티나는 일종의 섭정 자리에 놓였다.[40] 385년(또는 386년)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그의 어머니 유스티나는 상당수의 성직자, 평신도, 그리고 군대와 함께 아리우스파를 공언했다.[40]

아리우스파는 발렌티니아누스가 밀라노의 두 교회를 자신들에게 할당할 것을 요구했다. 하나는 도시 안에 있는 교회(사도 대성당), 다른 하나는 교외에 있는 교회(성 빅토르 교회)였다.[40] 암브로시우스는 교회를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것은 황제의 권한 밖에 있다"라고 대답했다.[40] 암브로시우스는 대성당을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고, 그의 황제에게 날카로운 답변을 보냈다. "만약 당신이 제 몸을 요구한다면, 저는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저를 감옥이나 죽음으로 데려가십시오. 저는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그리스도의 교회를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백성에게 저를 구원하라고 외치지 않겠습니다. 저는 교회를 버리는 대신 제단 앞에서 죽을 것입니다. 백성의 소란은 제가 부추기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그것을 진정시키실 수 있습니다."[40]

386년, 유스티나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리우스파 주교 젊은 아욱센티우스를 맞이했고, 암브로시우스는 다시 밀라노의 교회를 아리우스파가 사용하도록 넘겨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암브로시우스와 그의 교구민들은 교회 안에 바리케이드를 쳤고, 다시 황제의 명령은 철회되었다.[40]

마그누스 막시무스갈리아에서 권력을 찬탈하고(383년) 이탈리아 침공을 고려하자, 발렌티니아누스는 암브로시우스를 보내 그를 만류했고, 사절단은 성공했다(384년).[40] 두 번째, 나중의 사절단은 실패했다.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이탈리아에 진입했고(386-387년) 밀라노가 함락되었다. 유스티나와 그녀의 아들은 도망쳤지만, 암브로시우스는 남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교회의 식기를 녹였다.[40]

안토니 반 다이크가 1619년에 그린 "경건한 허구"인 ''성 암브로시우스가 테오도시우스를 밀라노 대성당에서 막고 있는 모습''. 런던 국립 미술관


390년 테살로니카 학살 이후, 테오도시우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요청에 따라 공개적인 참회 행위를 했다. 암브로시우스는 테살로니카 사건 당시 궁정에 없었지만, 그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얻은 후 테오도시우스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는,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에게 그의 주교로서 그가 참회 행위를 하기 전까지는 그에게 성찬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황제에게 반공개적인 참회 시위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볼프 리비슈츠는 "테오도시우스는 그에 따라 황제의 예복을 입지 않고 교회에 왔고, 크리스마스까지 암브로시우스는 공개적으로 그에게 성찬을 허락했다"라고 말한다.[40]

그러던 중 390년에 테살로니카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하고 황제 및 황후의 초상화를 흙탕물 속에 집어넣고 갖은 모욕을 가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격분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군대를 보내 그 지방에 사는 모든 사람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해 버렸다.[40] 이 소식을 들은 암브로시우스는 분개하며 즉시 서한을 황제에게 보내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공식적으로 참회할 것과 아울러 당분간 교회 출입을 금지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을 묵살한 황제는 부활절 날에 측근들을 대동하고 교회로 행차하였다. 그러자 암브로시우스는 교회 문을 가로막고 서서 황제가 교회에 못 들어오게 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고, 성탄절 날에 다시 교회로 찾아왔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번에도 입구에서 황제를 제지하며 그에게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황제는 결국 그에게 굴복하여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성찬례에 참석하려고 하니 부디 들여보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가벼운 보속[40]을 명하고 교회 출입을 허가하였다. 또한 한발 더 나아가 로마 제국 내에서의 우상 숭배를 완전히 철폐하였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국가 폭력에 항의함으로써, 인권을 주장하고 행동하는 성직자였던 셈이다. 이 일이 있은 후 보편적인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더 빛나게 되었다.[40]

== 죽음 ==

암브로시우스는 397년 4월 4일 성 토요일(부활절 하루 전날)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에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단 말인가! 오,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하시지 마시고 저를 거절하지 마옵소서”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9] 그의 유해는 성 암브로시오 성당 지하 묘소에 성 게르바시우스와 성 프로타시우스의 유골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9]

성 암브로시오 성당 지하 묘소에 안치된 암브로시오의 유해(흰색 제의 착용), 게르바시우스와 프로타시우스의 유골과 함께


로마 제국을 완전히 장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도시우스 1세는 395년 밀라노에서 사망했고, 암브로시오가 그의 장례 연설을 했다.[9] 암브로시오의 사후, 그의 후임은 심플리키아누스였다.[9] 암브로시오의 유해는 여전히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성당에서 볼 수 있으며, 그곳에서 그는 그의 시대에 게르바시우스와 프로타시우스의 유해로 확인된 유해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존경받고 있다.[9]

2. 1. 학문 수학

암브로시우스는 337년 혹은 340년에 오늘날의 독일 트리어에서 갈리아 지방의 로마 제국 귀족 가문 출신 장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꿀벌들이 그의 입술에 지식의 단물을 주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는 훗날 그가 뛰어난 설교자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산탐브로조 제단에는 암브로시우스가 아기였을 때 벌들이 그의 요람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부올비노/부올비노it부조가 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에서 아버지의 친구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로마 황제의 근위대장 겸 재판소장 안치오 프로부스의 도움을 받으며 법률과 수사학 등 여러 학문을 공부하여 뛰어난 법률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직에 들어섰고,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 총독 섹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는 처음에 그에게 사법 고문 자리를 주었다.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관료의 길을 걸었으며,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368년에 실미움의 장관, 370년에는 밀라노의 수석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36]

2. 2. 아리우스주의와 보편교회 간의 대립

370년, 암브로시우스는 32세의 나이로 에밀리아와 리구리아 지역의 집정관이 되어 밀라노에 주재했다. 당시 밀라노는 새 주교 임명을 두고 아리우스파와 보편교회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 기독교에서는 성자성부의 피조물이라고 본 아리우스파를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언했으나,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리우스(기원후 336년 사망)는 서기 300년경 하느님 아버지가 아들을 창조했을 것이라고 주장한 기독교 사제였다. 이는 아들이 영원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와 다른 "본질"을 가진 열등한 존재임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독론은 전통에 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리비아 및 기타 로마 속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주교들이 이 논쟁에 참여했고, 사람들은 여러 편으로 갈라져 때로는 거리에서 한쪽 편을 지지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아리우스주의는 서방동방 제국 모두에서 많은 고위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정통주의를 지지했지만, 375년에 제국의 공동 통치자가 된 그의 어린 이복 형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리우스 신조를 따랐다. 암브로시우스는 신학적으로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려 했지만, 젊은 황태자의 입장을 바꾸지는 못했다. 동방에서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역시 니케아 신조를 공언했지만, 그의 지배 지역에는 특히 고위 성직자들 사이에 아리우스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종교적 격동 속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두 지도자, 라티아리아의 팔라디우스와 싱기두눔의 세쿤디아누스 주교는 자신들의 세력을 믿고 그라티아누스에게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설득했다. 이 요청은 매우 공정하게 보여 그라티아누스는 주저없이 이에 응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그 결과를 두려워하여 황제를 설득하여 이 문제를 서방 주교들의 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381년에 32명의 주교로 구성된 시노드가 아퀼레이아에서 열렸다. 암브로시우스는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팔라디우스는 자신의 의견을 옹호하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투표가 이루어졌고 팔라디우스와 그의 동료 세쿤디아누스는 주교직에서 해임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주교로 재임하는 기간의 절반 이상을 아리우스주의와 싸웠다. 교회 내의 일치는 중요했지만, 국가에게도 마찬가지였으며, 로마인으로서 암브로시우스는 이에 대해 강한 의식을 가졌다. 이단에 대한 갈등은 14, 15세기의 종교 개혁에 비견될 만한 종교적 격동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8]

2. 3. 주교 서품

암브로시우스는 374년 11월 30일에 세례를 받고 일주일 후인 12월 7일에 주교로 임명되었다.[38] 주교가 된 암브로시우스는 가정교사 심플리키아누스에게서 종교학을 배우고, 엄격한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38] 그는 "나눔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실천"이라는 신념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고 부유층들이 탐욕에서 벗어나 사회공동체에서 이웃과 소유를 나누는 사회선교에 힘썼으며,[38] 곧 서방 교회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성직자가 되었다.[38] 그는 신학적, 도덕적 부흥에 매진했으며 아리우스파 이단 사상에 반대했다.[38]

민중들은 그의 설교를 듣기위해 찾아왔으며,[38]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시켜 훗날 위대한 성인이 되도록 이끌었다.[38]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성서를 주석하는 설교를 듣고 회심했다.[38]

4세기 중반, 로마 제국 고급 관료의 아들로 태어난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관료의 길을 걸었다. 368년에 실미움의 장관, 370년에는 밀라노의 수석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374년, 밀라노 주교 아욱센티우스(en)가 사망한 후 아리우스파와 반 아리우스파 사이에 후임 문제로 소동이 벌어졌다. 암브로시우스가 조정을 시작하자 민중들은 암브로시우스를 밀라노 주교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처음에 주교직을 완강히 거부했지만, 열렬한 요구에 결국 수락하고 세례를 받은 후 주교로 서임되었다.

주교가 된 후 암브로시우스는 교회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아리우스파를 몰아내고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데 힘썼다. 378년 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로마 전통 종교를 탄압하도록 부추겼고,[37] 382년에는 원로원에서 여신 승리의 여신의 을 철거시켰다.[37] 384년에는 제단 재건을 호소하는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의 연설에 마음이 흔들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위협하여 계획을 중지시켰고,[37] 385년부터 386년에 걸쳐서는 아리우스파였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어머니 와도 격렬하게 다퉜다.[37]

2. 4. 황제와의 대립

암브로시우스는 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 2세, 테오도시우스 1세와 좋은 관계를 맺었고 다양한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했다.[40] 그라티아누스와 암브로시우스는 개인적인 친분을 맺었고, 암브로시우스가 영적 지도자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오랫동안 통설이었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자료를 통해 뒷받침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40] 382년 경 암브로시우스는 아우소니우스를 대신하여 그라티아누스 궁정에서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승리의 제단 재설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40]

383년, 그라티아누스는 갈리아(프랑스)의 리옹에서 마그누스 막시무스에게 암살당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12세였고, 암살로 인해 그의 어머니 유스티나는 일종의 섭정 자리에 놓였다.[40] 385년(또는 386년)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그의 어머니 유스티나는 상당수의 성직자, 평신도, 그리고 군대와 함께 아리우스파를 공언했다.[40]

아리우스파는 발렌티니아누스가 밀라노의 두 교회를 자신들에게 할당할 것을 요구했다. 하나는 도시 안에 있는 교회(사도 대성당), 다른 하나는 교외에 있는 교회(성 빅토르 교회)였다.[40] 암브로시우스는 교회를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것은 황제의 권한 밖에 있다"라고 대답했다.[40] 암브로시우스는 대성당을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고, 그의 황제에게 날카로운 답변을 보냈다. "만약 당신이 제 몸을 요구한다면, 저는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저를 감옥이나 죽음으로 데려가십시오. 저는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그리스도의 교회를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백성에게 저를 구원하라고 외치지 않겠습니다. 저는 교회를 버리는 대신 제단 앞에서 죽을 것입니다. 백성의 소란은 제가 부추기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그것을 진정시키실 수 있습니다."[40]

386년, 유스티나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리우스파 주교 젊은 아욱센티우스를 맞이했고, 암브로시우스는 다시 밀라노의 교회를 아리우스파가 사용하도록 넘겨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암브로시우스와 그의 교구민들은 교회 안에 바리케이드를 쳤고, 다시 황제의 명령은 철회되었다.[40]

마그누스 막시무스갈리아에서 권력을 찬탈하고(383년) 이탈리아 침공을 고려하자, 발렌티니아누스는 암브로시우스를 보내 그를 만류했고, 사절단은 성공했다(384년).[40] 두 번째, 나중의 사절단은 실패했다.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이탈리아에 진입했고(386-387년) 밀라노가 함락되었다. 유스티나와 그녀의 아들은 도망쳤지만, 암브로시우스는 남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교회의 식기를 녹였다.[40]

390년 테살로니카 학살 이후, 테오도시우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요청에 따라 공개적인 참회 행위를 했다. 암브로시우스는 테살로니카 사건 당시 궁정에 없었지만, 그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얻은 후 테오도시우스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는,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에게 그의 주교로서 그가 참회 행위를 하기 전까지는 그에게 성찬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황제에게 반공개적인 참회 시위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볼프 리비슈츠는 "테오도시우스는 그에 따라 황제의 예복을 입지 않고 교회에 왔고, 크리스마스까지 암브로시우스는 공개적으로 그에게 성찬을 허락했다"라고 말한다.[40]

그러던 중 390년에 테살로니카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하고 황제 및 황후의 초상화를 흙탕물 속에 집어넣고 갖은 모욕을 가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격분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군대를 보내 그 지방에 사는 모든 사람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해 버렸다.[40] 이 소식을 들은 암브로시우스는 분개하며 즉시 서한을 황제에게 보내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공식적으로 참회할 것과 아울러 당분간 교회 출입을 금지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을 묵살한 황제는 부활절 날에 측근들을 대동하고 교회로 행차하였다. 그러자 암브로시우스는 교회 문을 가로막고 서서 황제가 교회에 못 들어오게 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고, 성탄절 날에 다시 교회로 찾아왔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번에도 입구에서 황제를 제지하며 그에게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황제는 결국 그에게 굴복하여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성찬례에 참석하려고 하니 부디 들여보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가벼운 보속[40]을 명하고 교회 출입을 허가하였다. 또한 한발 더 나아가 로마 제국 내에서의 우상 숭배를 완전히 철폐하였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국가 폭력에 항의함으로써, 인권을 주장하고 행동하는 성직자였던 셈이다. 이 일이 있은 후 보편적인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더 빛나게 되었다.[40]

2. 5. 죽음

암브로시우스는 397년 4월 4일 성 토요일(부활절 하루 전날)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에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단 말인가! 오,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하시지 마시고 저를 거절하지 마옵소서”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9] 그의 유해는 성 암브로시오 성당 지하 묘소에 성 게르바시우스와 성 프로타시우스의 유골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9]

로마 제국을 완전히 장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도시우스 1세는 395년 밀라노에서 사망했고, 암브로시오가 그의 장례 연설을 했다.[9] 암브로시오의 사후, 그의 후임은 심플리키아누스였다.[9] 암브로시오의 유해는 여전히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성당에서 볼 수 있으며, 그곳에서 그는 그의 시대에 게르바시우스와 프로타시우스의 유해로 확인된 유해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존경받고 있다.[9]

3. 신학 사상

암브로시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 예로니모, 그레고리오 1세와 함께 라틴 교회 박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신학자들은 그를 힐라리오와 비교하는데, 힐라리오는 암브로시우스의 행정적 능력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더 뛰어난 신학적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법학을 전공했고 상대적으로 늦게 성경교리 관련 주제를 다루었음에도 신학자로서 성공했다.

암브로시우스는 그의 강한 주교 의식으로 성장하는 교회의 교리와 그 사제직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당시 유행하던 금욕주의는 그의 젊은 시절 스토아 및 키케로의 교육을 이어받아 그가 높은 수준의 기독교 윤리를 전파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De officiis ministrorum''(성직자의 의무에 관하여), ''De viduis''(과부에 관하여), ''De virginitate''(처녀성에 관하여) 및 ''De paenitentia''(참회에 관하여)가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예배가 신을 섬기는 도구이며, 장소에 따라 변함없이 고정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일종의 전례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이 점에 대해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그는 지역 전례 관습을 따르라고 조언했다. "내가 로마에 있을 때는 토요일에 금식하고, 밀라노에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있는 교회의 관습을 따르십시오."[16][17] 따라서 암브로시우스는 실질적인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어떤 특정 지역 교회가 "올바른" 전례 형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잘못된 갈등에 휘말리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조언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라는 영어 속담으로 남아있다.

암브로시우스는 로마사제였던 심플리키아누스와 함께 신학을 공부했다. 암브로시우스는 당시 서방에서는 드물었던 훌륭한 그리스어 지식을 활용하여 구약 성경과 필로,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우스,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와 같은 그리스 작가들을 연구했으며, 이들과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28]

== 마리아론 ==

암브로시우스는 동정성과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의 역할에 핵심을 두었다.[22] 그의 신학 논문은 다마소, 시리키우스, 레오 13세에게 영향을 미쳤다.

동정녀 탄생은 하느님께 합당하다고 보았다. 하느님의 흠 없는 아들이 인간이 되면서 흠 없는 기원을 유지한 탄생보다 하느님께 더 합당한 인간의 탄생은 없다고 하였다.[23] 주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음을 고백하며, 이는 그녀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했기 때문에 자연 질서를 거부한다고 하였다.[24]

그리스도는 분열되지 않고 하나이며, 우리가 그를 하느님의 아들로 숭배한다면, 동정녀에게서의 그의 탄생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마리아는 하느님의 성전이었지만,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은 아니었기에, 성전 안에 계신 분만이 숭배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25]

즈가리야 사제가 부인했지만, 동정녀는 그 잘못을 바로잡았다고 하였다.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마리아로부터 그 일을 시작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그리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구원이 준비되는 그녀가 구원의 약속된 열매를 가장 먼저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26]

암브로시우스는 독신을 결혼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겼으며, 마리아를 동정성의 모범으로 보았다.[27]

==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

암브로시우스는 정의와 관대함을 연결하여 사회의 상호 의존성을 강조했다. 그는 사회를 결속시키는 것은 서로의 이익에 대한 관심이며, 탐욕은 이러한 상호성을 무너뜨려 사회 붕괴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380년대 후반, 암브로시우스는 밀라노의 엘리트 지주들의 탐욕에 반대하며 부유한 구성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설교를 했다.

암브로시우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별개의 외부인이 아닌, 연대해야 할 통일된 사람들의 일부로 여겼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단순한 관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부여했고 부자들이 찬탈한 자원에 대한 상환으로 보았다. 그는 정의를 "형제자매"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정의하며, 그들이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3. 1. 마리아론

암브로시우스는 동정성과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의 역할에 핵심을 두었다.[22] 그의 신학 논문은 다마소, 시리키우스, 레오 13세에게 영향을 미쳤다.

동정녀 탄생은 하느님께 합당하다고 보았다. 하느님의 흠 없는 아들이 인간이 되면서 흠 없는 기원을 유지한 탄생보다 하느님께 더 합당한 인간의 탄생은 없다고 하였다.[23] 주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음을 고백하며, 이는 그녀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했기 때문에 자연 질서를 거부한다고 하였다.[24]

그리스도는 분열되지 않고 하나이며, 우리가 그를 하느님의 아들로 숭배한다면, 동정녀에게서의 그의 탄생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마리아는 하느님의 성전이었지만,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은 아니었기에, 성전 안에 계신 분만이 숭배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25]

즈가리야 사제가 부인했지만, 동정녀는 그 잘못을 바로잡았다고 하였다.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마리아로부터 그 일을 시작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그리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구원이 준비되는 그녀가 구원의 약속된 열매를 가장 먼저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26]

암브로시우스는 독신을 결혼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겼으며, 마리아를 동정성의 모범으로 보았다.[27]

3. 2.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암브로시우스는 정의와 관대함을 연결하여 사회의 상호 의존성을 강조했다. 그는 사회를 결속시키는 것은 서로의 이익에 대한 관심이며, 탐욕은 이러한 상호성을 무너뜨려 사회 붕괴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380년대 후반, 암브로시우스는 밀라노의 엘리트 지주들의 탐욕에 반대하며 부유한 구성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설교를 했다.

암브로시우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별개의 외부인이 아닌, 연대해야 할 통일된 사람들의 일부로 여겼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단순한 관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부여했고 부자들이 찬탈한 자원에 대한 상환으로 보았다. 그는 정의를 "형제자매"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정의하며, 그들이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4. 저술

암브로시우스는 신학, 윤리, 성서 주석, 설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저술을 남겼다.[32] 그의 저작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교리에 있어서는 카이사레아의 바실과 다른 그리스 저자들을 따르지만, 인간의 신의 은총, 개인적인 기독교인의 삶에서 믿음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뚜렷한 서방적 성격을 부여했다.

암브로시우스의 첫 작품은 ''De paradiso''(377–378)로 추정된다.[32]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De officiis ministrorum'' (377–391)이며,[32] ''창조의 6일/Exameronit'' (386–390)과 ''De obitu Theodosii'' (395)는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중 하나이다.[32]

''De officiis ministrorum'' (377–391)는 현재 성 갈 수도원 도서관 (Cod. Sang. 97 p. 51)에 보관되어 있는 년 필사본으로 전해진다.[32]

일부 저작의 귀속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De mysteriis''는 일반적으로 암브로시우스의 저작으로 여겨지는 반면, 이와 관련된 ''De sacramentis''는 다른 스타일로 쓰여졌고 약간의 암묵적인 불일치가 있어 저자에 대한 합의가 덜 이루어지고 있다.[33] ''De sacramentis''는 때때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으로 잘못 식별되기도 했다.[34]

다음은 암브로시우스의 주요 저작 목록이다.


  • ''창조의 6일/Exameronit'' (386–390)
  • ''De paradiso'' (낙원에 관하여, 377–378)
  • ''De Cain et Abet'' (카인과 아벨에 관하여, 377–378)
  • ''De Noe'' (노아에 관하여, 378–384)
  • ''De Abraham'' (아브라함에 관하여, 380년대)
  • ''De Isaac et anima'' (이삭과 영혼에 관하여, 387–391)
  • ''De bono mortis'' (죽음의 유익에 관하여, 390)
  • ''De fuga saeculi''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에 관하여, 391–394)
  • ''De Iacob et vita beata'' (야곱과 행복한 삶에 관하여, 386–388)
  • ''De Joseph'' (요셉에 관하여, 387–388)
  • ''De patriarchis'' (족장들에 관하여, 391)
  • ''De Helia et ieiunio'' (엘리야와 금식에 관하여, 377–391)
  • ''De Nabuthae'' (나봇에 관하여, 389)
  • ''De Tobia'' (토비아에 관하여, 376–390)
  • ''De interpellatione Iob et David'' (욥과 다윗의 기도, 383–394)
  • ''Apologia prophetae David'' (예언자 다윗의 변호, 387)
  • ''Enarrationes in xii psalmos davidicos'' (다윗의 시편 12편 해설)
  • ''Expositio in Psalmum cxviii'' (시편 118편 해설, 386–390)
  • ''Expositio Esaiae prophetae'' (예언자 이사야 해설)
  • ''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누가복음 해설, 377–389)
  • ''De officiis ministrorum'' (성직자의 의무에 관하여, 377–391)
  • ''De virginibus'' (처녀에 관하여, 377)
  • ''De viduis'' (과부에 관하여, 377)
  • ''De virginitate'' (처녀성(순결)에 관하여, 378)
  • ''De institutione virginis'' (처녀를 위한 지침, 391–392)
  • ''Exhortatio virginitatis'' (처녀 예찬, 393–395)
  • ''De fide'' (신앙에 관하여, 378–380)
  • ''De Spiritu Sancto'' (성령에 관하여, 381)
  • ''De incarnationis dominicae sacramento'' (주님의 성육신의 성사에 관하여, 381–382)
  • ''Explanatio symboli ad initiandos'' (세례를 받을 사람들을 위한 신조 해설)
  • ''De sacramentis'' (성사에 관하여, 390)
  • ''De mysteriis'' (신비에 관하여)
  • ''De paenitentia'' (참회에 관하여, 384–394)
  • ''Expositio fidei'' (신앙 해설)
  • ''De sacramento regenerationis sive de philosophia'' (재생의 성사, 또는 철학에 관하여)
  • ''De excessu fratris'' (형제의 죽음에 관하여, 375–378)
  • ''De obitu Valentiniani'' (발렌티니아누스의 죽음에 관하여)
  • ''De obitu Theodosii'' (테오도시우스의 죽음에 관하여, 395년 2월 25일)
  • ''Contra Auxentium de basilicis tradendis'' (아욱센티우스를 반대하며 바실리카 양도에 관하여, 386)

5. 유산

웨스트민스터 대성당(Westminster Cathedral), 런던에 있는 암브로시우스의 모자이크


암브로시우스는 서방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 신학자이자 정치가, 목회자였다. 그의 신학 사상과 윤리 사상은 후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영향을 받아 회심하고 기독교 신학을 발전시켰다.

암브로시우스는 초기 기독교 찬송가에서 중요한 혁신가였다.[31] 그는 라틴 찬송가를 쓴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의 찬송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완전한 라틴 찬송가이다.[31]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그에게 귀속되는 네 개의 찬송가("Aeterne rerum conditor", "Deus creator omnium", "Iam surgit hora tertia", "Veni redemptor gentium")가 보편적으로 인정된다.[31] 이 찬송가들은 엄격한 강세 4보격으로 쓰여졌으며, 위엄 있는 단순함으로 특징지어져 후대에도 유익한 모델로 사용되었다.[31]

암브로시우스는 암브로시우스 성가의 레퍼토리를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작곡했는지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31] 암브로시우스 성가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지만, 암브로시우스 성가의 멜로디는 암브로시우스의 작품으로 여겨지지 않는다.[31]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는 전통적으로 찬송가 "Te Deum"을 작곡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귀속을 기각했다.

암브로시우스 성가와 암브로시우스 전례는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교회에서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암브로시우스는 밀라노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축일은 12월 7일이다.

참조

[1] 웹사이트 Saint Ambrose, in the Sacello di San Vittore in Ciel d'Oro https://www.jstor.or[...] Artstor 2021-01-08
[2] 서적 The Old Catholic: Or the History, Doctrine, Worship, and Polity of the Christians https://books.google[...] T T Clark Edinburgh
[3] 서적 Patrology: The Lives and Works of the Fathers of the Church https://books.google[...] B. Herder 1908
[4] 간행물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Supplementum, Volumen IV http://dx.doi.org/10[...] 1971-03
[5] Citation Santi Beati http://www.santiebea[...]
[6] CE1913
[7] 서적 Outreach and Renewal: A First-millennium Legacy for the Third-millennium Church https://books.google[...] Liturgical Press
[8] Harvnb
[9] 웹사이트 Saint Ambrose, Bishop and Confessor, Doctor of the Church. December 7. Rev. Alban Butler. 1866. Volume XII: December. The Lives of the Saints https://www.bartleby[...] 2019-06-10
[10] 웹사이트 The Calendar https://www.churchof[...] 2021-03-27
[11] 서적 Lesser Feasts and Fasts 2018 https://books.google[...] Church Publishing, Inc. 2019-12-17
[12] 웹사이트 The Religious History of the Roman Empire https://oxfordre.com[...] 202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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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문서 アンブロシウス(メディオーラーヌムの)
[38] 서적 기독시민의 사회적 책임 http://www.yes24.com[...]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2010-05-03
[39] 문서 한글개역판 사도행전
[40] 문서 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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