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비데오 원더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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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몬테비데오 원더러스는 1902년 창단된 우루과이의 축구 클럽으로,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3번(1906, 1909, 1931) 우승했다. 코파 데 오노르 쿠세니어와 타이 컵에서 우승하는 등 국제 대회에서도 활약했으며, 1975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처음 출전하여 2002년과 2015년에 16강에 진출했다. 2013-14 시즌, 2016 시즌에는 국내 리그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2019년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16강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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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비데오 원더러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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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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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명칭 |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축구 클럽 |
별칭 | Bohemios (보헤미안) Vagabundos (방랑자) |
창단 | 1902년 8월 15일 |
경기장 | 에스타디오 알프레도 빅토르 비에라, 몬테비데오 |
수용 인원 | 10,000명 |
회장 | 가브리엘 블랑코 |
감독 | 안토니오 파체코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리그 정보 | |
리그 | 프리메라 디비시온 |
시즌 | 2024년 |
리그 순위 | 프리메라 디비시온, 16개 팀 중 8위 |
유니폼 정보 | |
홈 유니폼 | pattern_la1: _wanderers18H pattern_b1: _wanderers18H pattern_ra1: _wanderers18H pattern_sh1: _black_stripes pattern_so1: _wanderers18h leftarm1: FFFFFF body1: FFFFFF rightarm1: FFFFFF shorts1: FFFFFF socks1: FFFFFF |
원정 유니폼 | pattern_la2: _wanderers18A pattern_b2: _wanderers18A pattern_ra2: _wanderers18A pattern_sh2: _white_stripes pattern_so2: _wanderers18A leftarm2: FFFFFF body2: FFFFFF rightarm2: FFFFFF shorts2: 000000 socks2: FFFFFF |
세 번째 유니폼 | pattern_la3: _wanderers18t pattern_b3: _wanderers18t pattern_ra3: _wanderers18t pattern_sh3: _black_stripes pattern_so3: _socks leftarm3: FFFFFF body3: FFFFFF rightarm3: FFFFFF shorts3: FFFFFF socks3: FFFFFF |
2. 역사
몬테비데오 원더러스[2]는 19세기 말,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던 시기에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창단한 축구 클럽이다. 사데손 형제들이 주도했으며, 클럽 이름은 잉글랜드의 더 원더러스(The Wanderers)에서 유래했다.
초창기에는 지역 리그가 없어 친선 경기를 치렀고, 알비온 축구 클럽과 함께 우루과이 축구 협회를 창립하고 최초의 우루과이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1902년 8월 15일,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축구 클럽이 정식으로 창단되었으며, 초대 회장은 후안 사데손이었다.
1903년부터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참가하여 1906년, 1909년, 1931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타이 컵에서 우루과이 팀 최다인 3회 우승을 기록하는 등 국제 대회에서도 활약했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는 리그 분열로 인해 FUF 주최 리그와 AUF 주최 리그 두 리그에 모두 참가하기도 했다.
1975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처음 출전한 이후, 2020년까지 9회 출전하여 2002년과 2015년에 16강에 진출했다. 1940년대 이후로는 주요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2013-14 시즌과 2016 시즌에 리그 2위를 차지하는 등 꾸준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2. 1. 창단 초기 (1898–1931)
몬테비데오 원더러스[2]는 19세기 말,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던 시기에 스포츠 정신을 통해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창단했다.사데손 형제들이 주도하여 엘 프라도 지역에서 유명해졌다. 클럽의 이름은 엔리케 사데손과 후안 사데손 형제가 잉글랜드를 여행하면서, 당시 뛰어난 팀이었던 더 원더러스(The Wanderers)에서 비롯되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울버햄튼 원더러스와 볼턴 원더러스도 있었다.

당시에는 지역 리그가 없어 친선 경기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알비온 축구 클럽과 함께 현재의 우루과이 축구 협회를 창립하고 최초의 우루과이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스포츠 분야에서의 차이점으로 인해, 사데손 형제들이 이끄는 젊은 그룹은 1902년 8월 15일, 현재 19 드 아브릴 거리와 아돌포 베로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 알마센 이 바 데 라 칼레에서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축구 클럽을 창단하였다.
원더러스 팀의 유니폼은 파란색과 흰색 세로 줄무늬 셔츠, 흰색 바지, 검은색 양말이었다. 초대 회장은 후안 사데손이었다.
클럽은 1902년에 창설되어, 현재도 활동을 이어가는 주요 클럽 중에서는 페냐롤(CURCC 시대 포함), 나시오날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03년부터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참가했다. 아마추어 리그 시대(1900년-1931년)에 국내 리그를 1906년, 1909년, 1931년에 세번 우승했다. 1920년대까지 개최되었던 국내 컵 대회인 코파 콤페텐시아, 코파 데 오노르의 우승 횟수는 모두 나시오날, 페냐롤에 이어 3위이다.
이 시대의 원더러스는 국제 대회에서도 활약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 (AFA)와 우루과이 축구 협회 (AUF)는 양국의 컵 대회 우승팀끼리 대결하는 타이 컵 (Tie Cup)[12]과 코파 데 오노르 쿠세니에르 (Copa de Honor Cusenier)[13]를 공동 개최했다. 원더러스는 우루과이 대표로 이 대회에 여러 차례 출전했으며, 특히 타이 컵에서는 우루과이 팀 최다인 3회 우승을 달성했다.
우루과이 국내 리그는 1923년부터 1925년까지 AUF 주최 리그와 FUF 주최 리그의 두 리그로 분열되어 개최되었다. 원더러스는 AUF 주최 리그에는 본래의 '''몬테비데오 원더러스'''로, 다른 한쪽인 FUF 주최 리그에는 '''아틀레티코 원더러스''' (Atlético Wanderers)로 두 리그에 모두 참가했다. FUF 주최 리그에서 아틀레티코 원더러스가 1923년에 우승, 1924년에 준우승했지만, FUF 주최 리그의 결과는 우루과이 축구 협회 (AUF)로부터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2. 2. 프로 시대 개막 (1932–1951)
1932년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에 10개 팀 중 하나로 참가하며 프로 축구 시대를 맞이했다. 원더러스는 그 해 마지막 경기에서 선두 자리를 놓치며 5위를 기록했다.1934년, 원더러스는 공식 토너먼트 결승전에 진출한 최초의 비전통적인 클럽이 되었으나, 나시오날과의 결승전에서 3-0으로 패배했다.
1937년, 나시오날을 3-0으로 꺾고 우루과이 명예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1934년부터 1942년까지 6번의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며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리그 상위권을 유지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오불리오 바렐라는 1938년 원더러스에서 데뷔하여 5시즌 동안 활약했다.
1950년, 벨라 비스타와 함께 최하위를 기록했다. 두 팀은 타이브레이커 경기를 치렀으나, 세 번의 경기 끝에도 승부가 나지 않아 추첨을 통해 1부 리그 잔류를 결정했다. 원더러스는 추첨에서 승리하여 1부 리그에 잔류했고, 벨라 비스타는 강등되었다.
2. 3. 승격과 강등 (1952–1972)
1952년, 몬테비데오 원더러스는 창단 50주년을 맞이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처음으로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12]이전 시즌 선수단 일부가 남았고, 다른 선수들이 합류했으며, 은퇴를 발표했던 일부 선수들이 결정을 번복했다. 특히, 팀을 위해 1년 더 머물기로 한 호세 마리아 메디나와 은퇴를 결정했던 후안 바우티스타 베수조의 복귀는 주목할 만했다. 훌륭한 시즌을 보낸 후, 원더러스는 우루과이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며 즉시 1부 리그로 복귀했다.[12]
1953년 원더러스는 우루과이 토너먼트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1부 리그 잔류에 성공했고, 이는 다음 시즌에도 이어졌다. 두 시즌 모두 오스카 첼레가 뛰어난 활약을 보였으며, 그의 골로 팀은 승점을 획득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원더러스는 국내 축구에서 상위권으로 복귀했다.[12]
1956년 클럽은 챔피언십 토너먼트에서 4위, 우루과이 토너먼트에서 5위를 차지했다. 1957년 챔피언십 경쟁에서 원더러스는 공식 토너먼트 결승에 복귀했다. 원더러스는 페냐롤과 동률을 이루었으나, 마지막 날 레이싱과의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페냐롤은 상대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몇 달 후, 원더러스는 원정에서 레이싱을 4-0으로 꺾어 2부 리그로 강등시키며 복수했다.[12]
1958년 훌리오 토자가 팀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는 룸보, 나리오, 구아글리아노네(1959년 우루과이 챔피언십 득점), 그와 데 레온으로 구성된 훌륭한 공격진의 일원이었다. 그 해 원더러스는 우루과이 순위에서 5위를 기록했으며, 이는 1959년과 1960년 시즌에도 동일한 순위였다.[12]
1961년 원더러스는 여러 변화를 겪었다. 유니폼을 완전히 변경하여 수년간 유지했던 두꺼운 흑백 세로 줄무늬, 검은색 바지, 회색 양말의 클래식한 의상에서 가늘고 검은색과 흰색 세로 줄무늬, 흰색 바지, 흰색 양말의 유니폼으로 변경했다. 그 해는 원더러스에게 불규칙한 해였다. 테이블 최하위로 마감했으며, 결승에서 센트로 아틀레티코 페닉스를 4-0, 3-2로 이기며 강등을 결정했다.[12]
1962년, 원더러스는 2부 리그에서 우승하며 1부 리그로 복귀했다. 골키퍼는 발터 타이보, 수비수에는 베이코와 넬슨 디아스, 미드필더에는 헤르민, 포이 모레이라, 공격수에는 카스텔노블, 레데스마, 구아글리아노네, 페레리, 데 레온 등 경험과 젊음이 조화를 이룬 팀이 구성되었다.[12]
1부 리그로 복귀한 후, 1963년과 1964년 시즌에 센테나리오 스타디움에서 강호들을 상대로 잊을 수 없는 경기를 펼치며 3위를 기록했다. 이 두 시즌 동안 타이보, 베이코, 디아스, 헤르민, 포이, 카메라, 카스텔노블, 레데스마 또는 베르토치, 구아글리아노네 또는 플로레스, 토자, 페레리가 선발 출전했다.[12] 또한, 원더러스는 그 해에 나시오날과 페냐롤 다음으로 가장 많은 관중을 경기장으로 불러모은 클럽이었다.[12]
1965년 지역 토너먼트에서의 활약은 매우 저조했다. 그는 두 번째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1966년에는 새로운 강등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처음으로 전년도 우루과이 토너먼트의 점수가 누적되었다.[12] 1967-1968년에는 승격 없이 좋은 시즌을 보냈다. 두 토너먼트 모두에서 승격을 위해 싸웠다. 1968년에는 마지막 날까지 1위를 유지했지만, 논란이 많은 경기에서 벨라 비스타에 1-0으로 패하며 원더러스는 3위로 밀려났다.[12]
1969년 원더러스는 최악의 위기를 겪었다. 경제적인 제약과 스포츠적인 제약 속에서 시즌을 보냈고 6위로 마무리했다. 1970년에는 4위로 순위가 향상되었다. 그 시즌에는 미겔 오르티스가 데뷔했다.[12]
그 해 동안 마테오 기리가 클럽 회장이 되었다. 그와 함께 원더러스는 지역의 명성과 국제적 명성을 되찾았다. 1971년과 1972년 원더러스는 1부 리그로 복귀할 수 있는 강력한 팀을 구성했다.[12]
원더러스는 라스 피에드라스에 정착했고, 마지막 시즌 말에 아니발 알베스의 골로 레이싱을 1-0으로 꺾고 1부 리그로 복귀했다.[12]
2. 4. 프리메라 디비시온 복귀 (1973–1991)
1973년, 몬테비데오 원더러스는 1부 리그 잔류를 목표로 수비 중심의 팀을 구성했다. 센테나리오 경기장에서 나시오날과 페냐롤을 상대로 승점을 획득하는 등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고, 결국 잔류에 성공하며 준수한 순위로 시즌을 마쳤다.[3]1974년-1975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처음으로 진출하며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프리-리베르타도레스 데 아메리카 리그에서 다누비오와 페냐롤에게 연패했지만, 세로와 리버풀을 꺾고 반등했다. 1975년 1월 28일, 나시오날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와싱턴 올리베이라의 결승골로 2-1 승리를 거두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진출권을 획득했다. 1975년 3월 14일에는 우니온 우아랄을 4-0으로 대파하며 대회 첫 승을 기록했다. 비록 조별 리그를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원더러스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3]
1976년에는 국내 토너먼트 상위권을 유지했다. 메이저 리그 3위, 우루과이 리그 5위, 리기야 프리 리베르타도레스 4위를 기록했으며, 리차드 포란과 와싱턴 올리베이라는 뛰어난 활약으로 언론과 팬들의 찬사를 받았다.[3] 1977년에는 페냐롤을 두 번 꺾는 등 선전하며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 6위, 리기야 3위를 기록했다.[3]
1978년 우루과이 토너먼트 5위를 기록했고, 중앙 공격수 알프레도 아리아스가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3] 1979년에는 호르헤 발테르 바리오스가 데뷔하여 주전으로 자리 잡았고, 1979년 10월 17일 나시오날을 5-1로 대파하는 등 인상적인 경기를 펼쳤다.[3]
1980년에는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며 나시오날에 이어 두 번째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3] 1981년에는 리그 3위를 기록했다.[3] 1983년, 엔소 프란체스콜리는 아르헨티나로 이적하였다.[3]
1985년, 오스카르 타바레스 감독 아래 다시 한번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다.[3] 1987년, 챔피언십 경쟁 챔피언과 아메리카의 프리-리버레이터 리그에서 우승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리기야 결승전에서 나시오날을 1-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3]
1990년, 리그 최종 라운드에서 나시오날과 페냐롤을 꺾으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3]
2. 5. 국제 대회 진출 (1992–2015)
1990년대 초반까지 몬테비데오 원더러스는 리그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며 상위권을 유지했다. 1994년 토르네오 클라우수라에서는 우승을 눈앞에 두었으나, 막판 부진으로 인해 최종 3위에 머물렀다.[3] 1990년대 후반, 팀은 점차 쇠퇴기를 겪으며 어려움을 겪었다. 1998년에는 1부 리그 복귀 후 거의 30년 만에 강등되는 아픔을 겪었다.[3]2000년, 전 몬테비데오 원더러스 선수였던 호세 다니엘 카레뇨 감독의 지휘 아래 2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1부 리그로 복귀했다.[3] 2001년에는 리기야 프레리베르타도레스에서 무패 우승을 달성하며 다시 한번 국제 대회 진출권을 획득했다.[3] 2002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나, 페냐롤과의 승부차기 끝에 아쉽게 탈락했다.[3]
2014년, 몬테비데오 원더러스는 클로징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며 오랜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3] 2015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다시 한번 16강에 진출하며 국제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입증했다.[3]
2. 6. 현재 (2016–현재)
2015-2016 시즌, 가스톤 마차도 감독 아래 팀은 챔피언십에서 5위를 기록하며 코파 수다메리카나에 진출했다.[4] 가스톤 로드리게스는 클라우수라 토너먼트에서 16골, 우루과이 토너먼트에서 19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다.2017년, 몬테비데오 원더러스는 리그 4위를 기록하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차 예선에 진출했다.[4] 크리스티안 팔라시오스는 29골(보헤미오 유니폼을 입고 19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고, 세르히오 블랑코는 클럽 통산 득점 기록을 105골로 경신했다.[4]
2018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차 예선에서 올림피아(파라과이)에 합계 0-2로 패해 탈락했다. 리그에서는 불안정한 시즌을 보냈지만, 클로징 토너먼트에서 3위를 기록하며 5년 연속 국제 대회 진출을 확정했다.
2019년, 코파 수다메리카나 16강에 진출하며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단계에서 페루의 스포르트 우앙카요를 합계 3-1로 꺾고, 2단계에서는 우루과이의 세로를 로리고 파스토르의 골로 1-0으로 이겼다. 16강에서는 브라질의 코린치안스에게 패했다. 리그에서는 감독 교체 등으로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두며 국제 대회 진출권을 얻지 못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리그가 중단되는 등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마우리시오 라리에라 감독의 유망한 출발 이후 연패를 기록했고, 다니엘 카레뇨 감독으로 교체되었다.
3. 경기장
구단은 창단 후 30년 동안 리버풀의 현재 경기장인 에스타디오 벨베데레를 포함하여 4개 이상의 홈 구장을 사용했다.[5] 현재 홈 구장은 몬테비데오 프라도 지구에 위치한 에스타디오 비에라이다.[5]
알프레도 빅토르 비에라 경기장은 우루과이 1부 리그에서 활동하는 축구 클럽인 몬테비데오 원더러스의 경기장이다. 1933년 10월 15일 원더러스 파크로 개장했으며, 처음에는 9,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여러 차례 개조를 거쳐 현재는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6] 그러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나 코파 수다메리카나와 같은 국제 선수권 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충분한 수용 능력을 갖추지 못하여 몬테비데오 원더러스는 시 소유인 센테나리오 스타디움을 사용한다.[6]
몬테비데오 프라도에는 에스타디오 비에라 근처에 에스타디오 사롤디 ( 리버 플레이트 경기장)와 에스타디오 호세 나사지 공원 ( 벨라 비스타 경기장) 등 두 개의 경기장이 더 있다.
4. 우승 기록
(리그)
토너먼트
(리그)
(컵)
(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