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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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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루사는 고대 도시로, 현재 트로이의 고고학적 유적지와 동일시된다. 기원전 1400년경 히타이트 제국에 대항한 아수와 연맹의 일원으로 처음 등장하며, 이후 히타이트와 정치적 동맹을 맺고 봉신국이 되었다. 윌루사는 알락산두 조약, 마나파-타르훈타 서한, 타와갈라와 서한, 밀라와타 서한 등 히타이트 기록에 언급되지만, 트로이 전쟁과의 연관성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부족하다. 윌루사의 왕으로는 쿠쿤니, 알락산두, 왈무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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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루사
개요
일반 정보
위치트로아드
언어루비어
히타이트어
문자설형 문자
역사
시대후기 청동기 시대
잠재적 연관성
관련 도시트로이아
그리스어 이름일리온/트로이아

2. 트로이와의 동일시

에밀 포러는 1924년 "윌루사"와 "타루이사"라는 지명이 각각 그리스 이름 "윌리오스"와 "트로이아"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윌루사가 트로이와 동일하다고 처음 제안했다.[2][3] 이후 히타이트 지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동일시는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확고하게 정립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가설로는 윌루사가 비잔틴 시대에 "일루자"(Ἴλουζαel)로 알려졌던 비제술탄 근처에 위치했을 가능성도 제시된다.[4]

2. 1. 언어학적 유사성

에밀 포러는 1924년에 "윌루사"와 관련된 지명 "타루이사"가 각각 그리스 이름 "윌리오스"와 "트로이아"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을 들어 윌루사가 트로이와 동일하며, 아히야와는 그리스인을 가리키는 호메로스의 용어인 ''아카이오이''에 해당한다고 처음 제안했다.[2][3] 히타이트 지리에 대한 후속 연구는 이러한 동일시에 추가적인 지원을 제공했으며 현재 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확고하게 정립된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2. 2. 학계의 입장

윌루사는 트로이의 고고학적 유적지와 동일시되어 왔다. 이러한 동일시는 1924년 에밀 포러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으며, 그는 또한 아히야와라는 이름이 그리스인에 대한 호메로스의 용어인 ''아카이오이''에 해당한다고 제안했다. 포러의 연구는 주로 언어적 유사성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는데, "윌루사"와 관련된 지명 "타루이사"는 각각 그리스 이름 "윌리오스"와 "트로이아"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히타이트 지리에 대한 후속 연구는 이러한 동일시에 추가적인 지원을 제공했으며 현재 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확고하게 정립된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2][3]

2. 3. 비제술탄과의 관련성

윌루사가 비잔틴 시대에 "일루자"(Ἴλουζαel)로 알려져 있던 비제술탄 근처에 위치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4]

3. 역사적 기록

기원전 1400년경 윌루사는 히타이트 제국에 대항하려다 실패한 아수와 연맹의 22개 국가 중 하나로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5][6][7][8] 이때 윌루사는 "윌루시야"로 표기되었으며, "타루이사"와는 별개로 나열되었다.

기원전 1300년대 후반, 윌루사는 히타이트와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쿠쿤니 통치 하에 윌루사는 아르자와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수필룰리우마 1세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기원전 1200년대 초, 윌루사는 히타이트의 봉신국이 되었다.

무와탈리 2세 통치 기간 중, 히타이트는 윌루사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인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야 했다. 마나파-타르훈타 서한에 따르면, 윌루사의 통치자가 피야마라두에 의해 폐위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역사 기록에서 윌루사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히타이트 왕 투드할리야 4세가 미라 왕에게 보낸 밀라와타 서한에 나타난다. 투드할리야는 최근 폐위된 친히타이트 왕 왈무를 윌루사의 왕으로 재설치하려 한다.

이러한 일화들은 트로이 전쟁 신화의 역사적 배경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학자들은 전설 속 특정 사건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찾지 못했으며, 히타이트 문서에서도 윌루사가 그리스인(아히야와)의 공격을 받았다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히타이트학자 트레버 브라이스는 윌루사의 역사가 실제 트로이 전쟁의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14]

3. 1. 아수와 연맹

기원전 1400년경 윌루사는 히타이트 제국에 대항하여 형성된 아수와 연맹의 22개 국가 중 하나였다. 투드할리야 1/2세의 연대기를 포함한 여러 히타이트 문서에는 아수완족의 패배와 그 여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에서 도시의 이름은 후대의 "윌루사"가 아닌 "윌루시야"로 표기되었으며, "타루이사"와는 별도로 언급되었다.[5][6][7][8]

아히야와인들이 반란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황 증거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하투사에서 발견된 미케네 양식의 칼에는 아수완 군인에게서 빼앗아 히타이트 폭풍의 신에게 바친 것이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5][6][7][8]

3. 2. 히타이트와의 관계

기원전 1400년경 윌루사는 히타이트 제국에 대항하려다 실패한 아수와 연맹의 22개 국가 중 하나로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이때 윌루사는 "윌루시야"로 표기되었으며, "타루이사"와는 별개로 나열되었다. 하투사에서 발견된 미케네 양식의 칼에는 아수완 군인에게서 빼앗아 히타이트 폭풍의 신에게 바친 것이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어, 아히야와인들이 반란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5][6][7][8]

기원전 1300년대 후반, 윌루사는 히타이트와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쿠쿤니 통치 하에 윌루사는 아르자와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수필룰리우마 1세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기원전 1200년대 초, 윌루사는 히타이트의 봉신국이 되었다. 윌루사 왕 알락산두와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 사이에 체결된 ''알락산두 조약''은 이러한 정치적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다. 이 조약에서 윌루사를 대신하여 조약을 보증하는 신 중 하나는 아팔리우나스(아폴론)이다. 알락산두는 잠재적인 반히타이트 활동에 대한 정보와 군사 원정을 위한 병력을 제공해야 했다. 윌루사 군인들은 카데시 전투에서 히타이트 군대에 복무한 것으로 보인다.[9]

무와탈리 통치 기간 중, 히타이트는 윌루사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인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야 했다. 마나파-타르훈타 서한에 따르면, 윌루사의 통치자가 피야마라두에 의해 폐위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피야마라두는 아히야와를 대신하여 이 지역의 다른 친히타이트 통치자들을 전복시켰다는 것이다. 타와갈라와 서한은 윌루사를 둘러싼 히타이트와 아히야와 간의 이전 불일치를 암시하지만, 이것이 실제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마나파-타르훈타 서한의 구획선은 피야마라두의 활동과 윌루사 사건이 별개의 주제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여, 윌루사 왕이 실제로 피야마라두에 의해 폐위되었는지, 아니면 내부 봉기나 히타이트에 대한 반란으로 인해 권력을 잃었는지에 대해서는 학문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10][11]

역사 기록에서 윌루사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히타이트 왕 투드할리야 4세가 미라 왕에게 보낸 밀라와타 서한에 나타난다. 투드할리야는 최근 폐위된 친히타이트 왕 왈무를 윌루사의 왕으로 재설치하려 한다. 이 서한은 왈무가 어떻게 폐위되었는지 명시하지 않지만, 아히야와가 더 이상 주요 세력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12][13]

이러한 일화들은 트로이 전쟁 신화의 역사적 배경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학자들은 전설 속 특정 사건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찾지 못했으며, 히타이트 문서에서도 윌루사가 그리스인-아히야와의 공격을 받았다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히타이트학자 트레버 브라이스는 윌루사의 역사가 실제 트로이 전쟁의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14]

3. 3. 알락산두 조약

기원전 1200년대 초, 윌루사는 히타이트의 봉신국이 되었다. 서부 아나톨리아 국가와 히타이트 간의 일반적인 정치적 관계는 지역 통치자가 히타이트 군대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히타이트의 정치적 이익을 지지하는 상호 조약 의무로 구성되었다. 그러한 조약의 현존하는 한 예는 윌루사 왕인 알락산두와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 사이에 맺어진 ''알락산두 조약''이다. 윌루사를 대신하여 조약을 보증하는 신 중 하나는 아팔리우나스(아폴론)이다.[9]

문서에 명시된 바와 같이, 알락산두의 의무에는 잠재적인 반(反)히타이트 활동에 대한 시의적절한 정보뿐만 아니라 군사 원정을 위한 병사도 포함되었다. 일부 증거는 무와탈리가 이 후자의 의무를 발동했음을 시사하는데, 윌루사 군인들이 카데시 전투에서 히타이트 군대에 복무한 것으로 보인다.[9]

3. 4. 마나파-타르훈타 서한과 피야마라두

무와탈리 2세 통치 기간 중, 히타이트는 윌루사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야 했다. 이 사건은 마나파-타르훈타 서한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지만, 정확한 상황은 불분명하다.[10] 피야마라두가 아히야와를 대신하여 이 지역의 다른 친히타이트 통치자들을 전복시켰던 인물인데, 윌루사의 통치자가 피야마라두에 의해 폐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이 있다. 이 해석은 이후 타와갈라와 서한에서 잠재적인 지지를 받는데, 이 서한은 윌루사를 둘러싼 히타이트와 아히야와 간의 이전 불일치를 암시한다.[10]

그러나 타와갈라와 서한은 불일치가 격렬한 설형 문자 태블릿을 넘어 확대되었는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으며, 마나파-타르훈타 서한은 피야마라두와 윌루사의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연결하지 않기 때문에 이 증거는 결정적이지 않다.[10] 마나파-타르훈타 서한의 구획선이 피야마라두의 활동과 윌루사 사건이 별개의 주제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은 이 해석에 반하는 증거이다.[11] 따라서 윌루사 왕이 피야마라두에 의해, 내부 봉기에 의해 폐위되었는지, 아니면 히타이트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권력을 유지했는지에 대해서는 학문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11]

3. 5. 타와갈라와 서한

타와갈라와 서한은 히타이트와 아히야와 간에 윌루사를 둘러싸고 일어난 이전의 불일치를 암시한다. 그러나 이 불일치가 무력 충돌로 확대되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10]

3. 6. 밀라와타 서한과 왈무

히타이트 왕 투드할리야 4세가 미라 왕에게 보낸 밀라와타 서한에는 윌루사의 왕 왈무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왈무는 아히야와의 습격으로 인해 왕위에서 폐위되었고, 미라 왕국으로 망명하였다.[12] 투드할리야 4세는 서한을 통해 왈무를 윌루사의 왕으로 복위시키려 했으며, 왈무가 윌루사의 통치자가 되지만 미라 왕이 이 지역의 다양한 왕국에 대한 최종 권한을 유지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즉, 양국 모두 봉신 지위를 유지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12]

4. 윌루사의 왕


  • 쿠쿤니 (기원전 1350년경?)
  • 알락산두 (기원전 1300년경 – 기원전 1280년 이후)
  • 왈무 (기원전 1250년경 – 기원전 1220년 이후)

4. 1. 쿠쿤니

수필룰리우마 1세와 동시대 인물로, 알락산두의 선임자이다.

Kukkunni영어는 기원전 1350년경(?) 인물이다.

4. 2. 알락산두

알락산두는 기원전 1300년경 윌루사를 통치한 왕으로, 기원전 1280년 이후까지 통치했다. 히타이트 왕 무르실리 2세무와탈리 2세와 동시대 인물로, 그들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1]

4. 3. 왈무

왈무(Walmu|왈무hit)는 기원전 1250년경 윌루사를 통치했던 왕이다. 히타이트 왕 투달리야 4세와 미라의 봉신이었으나, 아히야와인들의 습격으로 윌루사가 점령당하면서 폐위되었다. 이후 밀라와타(밀레투스)에서 온 편지에 따르면, 왈무는 미라 왕국의 종주였던 타르카스나와에게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1] 투달리야 4세는 왈무를 히타이트 왕국으로 보내라고 타르카스나와에게 촉구했는데, 이는 왈무를 왕위에 복귀시키고 두 사람 모두 봉신의 지위로 돌려보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1]

5. 트로이 전쟁과의 연관성 논란

일반적으로 윌루사에 관한 이야기는 트로이 전쟁 신화가 역사적 사실일 수 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 그러나 학자들은 전설 속 특정 사건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찾지 못했으며, 히타이트 문서에서는 윌루사-트로이가 그리스인-아히야와에게 공격받았음을 시사하지 않는다. 저명한 히타이트학자 트레버 브라이스는 윌루사의 역사에 대한 현재의 이해가 실제 트로이 전쟁이 있었다는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경고하며, "자료가 적을수록 원하는 결론에 맞게 조작하기가 더 쉽다"고 말했다.[14]

참조

[1] 서적 The Trojans and Their Neighbours Routledge
[2] 서적 The Ahhiyawa Texts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3] 서적 The Trojans and their Neighbours Taylor & Francis
[4] 웹사이트 Vangelis D. Pantazis (Nikaea), "Wilusa: Reconsidering the Evidence", ''KLIO'', 91 (2009), σ. 305-307. https://drive.google[...] 2016-11-03
[5] 간행물 The Late Bronze Age in the West and the Aegean Oxford University Press
[6] 서적 The Trojans and their Neighbours Taylor & Francis
[7] 서적 1177 BC: The Year Civilization Collapsed Princeton University Press
[8] 서적 The Ahhiyawa Texts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9] 서적 The Trojans and their Neighbours Taylor & Francis
[10] 서적 The Trojans and their Neighbours Taylor & Francis
[11] 서적 The Ahhiyawa Texts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12] 서적 The Trojans and their Neighbours Taylor & Francis
[13] 서적 The Ahhiyawa Texts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14] 서적 The Trojans and their Neighbours Taylor & Fran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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