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흐타르 아우에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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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는 카자흐스탄의 소설가, 극작가, 문학 평론가로, 카자흐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유목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나 세메이 사범학교와 레닌그라드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희곡, 소설, 단편 소설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카자흐 시인 아바이 쿠난바예울리의 삶을 다룬 소설 '아바이'와 '아바이의 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우에조프는 1961년 사망했으며, 사후 그의 이름을 딴 기관, 극장, 학교 등이 설립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는 작가 경력 외에도 교육 및 행정 분야에서 활동했다. 세메이 지방 정부, 카자흐 중앙 집행위원회, 오렌부르크 등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3]
아우에조프는 극작가, 소설가, 번역가, 문학 연구가로서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며 카자흐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희곡, 소설, 번역, 문학 연구로 나눌 수 있다.
2. 생애
1917년, 아우에조프는 15세 소녀 라이한과 결혼하여 1918년에 딸 무가밀리야를 낳았다. 1년 후 아들을 얻었으나 유아기에 사망했고, 1920년에 이혼했다.[3] 1930년대부터 전문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3] 그의 단편 소설은 사이먼 홀링스워스와 사이먼 게오거한이 번역하여 Qazaq Pen Club에서 출판한 ''슬픔 속의 아름다움과 기타 이야기''에 수록되었다.[5]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는 오늘날 카자흐스탄 동부 아바이 구의 유목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아랍 문자와 키릴 문자를 사용하여 카자흐어를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2]
처음에 무흐타르는 카스카불라크에서 공부했고, 나중에는 세메이의 무슬림 마드라사에서 공부했다. 11세에 그는 인근의 5년제 문법 학교로 옮겼다. 1900년에 그의 아버지 오마르한이 사망했고, 1912년에 어머니 누르자말이 사망했다. 어린 무흐타르는 삼촌 카심베크와 할아버지 아우에즈, 할머니 디나스에게 양육되었다. 1907년, 마드라사에서 1년간 공부한 후, 세메이의 대규모 러시아 학교로 보내졌다.[3]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는 시립 대학을 졸업한 후 세메이 사범 신학교에 다녔다. 1912~1913학년도에 무흐타르는 상을 받으며 첫 번째 신학교 과정을 마쳤고, 1919년에 세메이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이 무렵 그는 러시아 및 기타 외국 문학 고전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우에조프는 단편 소설, 시, 기사를 써서 출판하기 시작했다.[3]
아우에조프는 세메이 사범학교와 레닌그라드 국립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2] 1928년,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는 레닌그라드 국립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고 타슈켄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3]
교육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린 아우에조프는 흠잡을 데 없는 주의력, 뛰어난 재능, 날씬한 체격, 그리고 귀족적인 자존심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뛰어난 운동선수였고, 당시 도시 최고의 축구팀이었던 "야리쉬 FC"를 대표했다.[3]
2. 2. 문학 활동 초기
아우에조프는 희곡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쓴 첫 번째 희곡은 ''엔리크-케베크''인데,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슷한 두 젊은 연인의 이야기이다. 그는 사회주의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 20편 이상의 희곡을 썼다.[2] 희곡 집필 이후, 아우에조프는 소설을 쓰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1910년대 무렵 그는 단편 소설, 시, 기사를 써서 출판하기 시작했다.[3]
2. 3. 학자로서의 활동
아우에조프는 세메이 사범학교와 레닌그라드 국립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희곡 작가로 잘 알려졌으며, 첫 희곡은 ''엔리크-케베크''이다. 그는 카자흐스탄의 사회주의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 20편 이상의 희곡을 썼다. 희곡 집필 이후 소설로 방향을 전환했고, 카자흐 시인 아바이 쿠난바예울리의 삶을 다룬 소설 ''아바이''와 ''아바이의 길''을 출판했다.[2] 니콜라이 고골의 ''검찰관'',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을 카자흐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했다.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는 시립 대학을 졸업한 후 세메이 사범 신학교에 다녔다. 1912-1913학년도에 첫 번째 신학교 과정을 마쳤고, 1919년에 세메이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이 시기에 러시아 및 기타 외국 문학 고전과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단편 소설, 시, 기사를 써서 출판했다. 1928년 레닌그라드 국립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고 타슈켄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4. 말년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는 1961년 6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수술 중 사망했다. 그는 알마티 중앙 묘지에 묻혔으며, 그의 무덤에는 예브게니 부체티치가 만든 흉상이 있다.[2]
1961년 사망 후, 카자흐스탄 공화국 정부는 그의 이름을 기리기로 결정했다. 과학 아카데미 문학 예술 연구소는 아우에조프 과학 아카데미 문학 예술 연구소로 개명되었다. 카자흐 국립 학술 드라마 극장, 아우에조프 생가 박물관, 학교, 거리, 알마티의 도시 지역 또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또한 심켄트에 있는 M. O. 아우에조프 남카자흐스탄 국립 대학교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
2022년 7월 21일, 카자흐스탄 대통령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는 키르기스스탄에서 무흐타르 아우에조프의 흉상을 공개했다.[4]
3. 작품 세계
희곡: 아우에조프는 희곡 작가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초기작 ''엔리크-케베크''는 로미오와 줄리엣과 유사한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 민속 전설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사회주의 관련 문제를 다룬 20편 이상의 희곡을 썼다.
소설: 희곡 창작 이후 아우에조프는 소설에 집중했다. 특히 카자흐의 시인 아바이의 삶을 다룬 소설 ''아바이''와 ''아바이의 길''은 그의 대표작이다. 15년에 걸쳐 완성된 4권짜리 서사시 "아바이 졸리"(아바이의 길)는 레닌상을 수상하고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며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
번역: 아우에조프는 니콜라이 고골의 ''검찰관'',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세계 명작을 카자흐어로 번역하여 카자흐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문학 연구: 아우에조프는 아바이 연구의 창시자이며, "카자흐 아데비에트 타리히"의 주 저자이자 편집자였다. 또한 키르기스 서사시 마나스에 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3. 1. 주제와 특징
아우에조프는 희곡 작가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첫 희곡 ''엔리크-케베크''는 로미오와 줄리엣과 유사하게 두 젊은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었다. 그는 사회주의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 20편 이상의 희곡을 썼다.[2] 1917년, 신학교 재학 중 민속 전설을 바탕으로 쓴 "에닐리크-케베크"와 1921년작 단편 소설 "코르간시즈딘 쿠니"는 작가로서 그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희곡 집필 이후, 아우에조프는 소설 창작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카자흐 시인 아바이의 삶을 다룬 두 권의 소설 – ''아바이''와 ''아바이의 길''–이 출판되었다.[2] 그의 성장기에 무흐타르는 할아버지로부터 아바이와 쿠난바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고, 이는 그의 삶에 큰 영감을 주었다. 그는 15년 동안 4권짜리 서사 역사 소설 "아바이 졸리"(Abai Joly)를 썼다. 이 소설은 러시아어로 번역되었고, 1949년 "아바이" 두 권은 소련으로부터 1급 상을 받았다. "아바이 졸리"는 4권으로 완결되어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30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아바이 졸리"는 아우에조프의 가장 인기 있고 가치 있는 소설 중 하나이다. 1942년 첫 번째 책이 출판되었고, 1947년 두 번째 책 "아바이", 1952년 세 번째 책 "아바이 아가"(형 아바이), 1956년 네 번째 책이 발간되었다. 이후 모든 책은 "아바이 졸리"(아바이의 길)로 제목이 변경되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그는 "오키간 아자마트", "키르 수레트테리", "우일레누", "에스킬리크 콜렌케신데", "키남쉴 보이제트켄", "카랄리 술루" 등의 단편 소설을 썼다. 레닌그라드 유학 시절에는 "카라쉬-카라쉬"와 "콕세렉"이라는 두 편의 호평받은 소설을 썼다.
아우에조프는 카자흐 역사적 주제에 깊이 몰두했다. "에닐리크-케베크", "칸 케네", "킬리 자만", "아이만 – 숄판", "카라킵샤크 코빌란디" 등에서 그의 역사관이 드러난다. 20년 동안 그는 카자흐 문학의 고전이 된 산문과 희곡에 전념했다. 1930년대에는 "카세닌 쿠빌리스타리", "이즈데르", "샤트칼란", "쿰 멘 아스카르", "부르트키위" 등 단편 소설과 "아이만-숄판", "타스 틸렉", "셰카라다", "퉁기 사린" 등 희곡을 썼다.
아우에조프는 문학 작품을 카자흐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했다. 니콜라이 고골의 ''검찰관'',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이 그가 번역한 대표작이다. 그는 20편 이상의 희곡을 썼으며, 니콜라이 고골의 ''검찰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와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세계 및 러시아 고전 드라마 작품들을 번역했다.
1936년, 그는 카자흐 언론 "카자크 아데비에티"에 "타티아니나 키르다기 아니"라는 산문 작품을 게재했는데, 이는 장편 소설의 일부였다. 몇 년 후 (1940년경), 레오니트 소볼레프와 협력하여 "아바이" 비극을 썼다. 아우에조프는 카자흐 문학사 연구와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그는 아바이 연구의 창시자였으며, 다권본 "카자흐 아데비에트 타리히"의 주 저자이자 편집자였다. 키르기스 서사시 마나스에 대한 단행본도 썼다.
3. 2. 문학적 영향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는 다양한 장르의 에세이, 단편 소설, 희곡을 다수 집필했으며, 그중 많은 작품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다. 1917년, 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민속 전설을 바탕으로 한 희곡 "에닐리크-케베크"를 썼다. 1921년에 쓰인 "에닐리크-케베크"와 단편 소설 "코르간시즈딘 쿠니"는 그가 작가로서 가진 뛰어난 재능을 세상에 보여주었다.[6] 1923년부터 문학 활동에 전념하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오키간 아자마트", "키르 수레트테리", "우일레누", "에스킬리크 콜렌케신데", "키남쉴 보이제트켄", "카랄리 술루" 등의 단편 소설을 썼다.
레닌그라드 유학 중에는 "카라쉬-카라쉬"와 "콕세렉"이라는 두 편의 호평을 받은 소설을 썼다. 아우에조프는 카자흐 역사적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에닐리크-케베크", "칸 케네", "킬리 자만", "아이만 – 숄판", "카라킵샤크 코빌란디" 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면모가 드러난다. 20년 동안 그는 카자흐 문학의 고전이 된 산문과 희곡에 전념했다. 1930년대에는 "카세닌 쿠빌리스타리", "이즈데르", "샤트칼란", "쿰 멘 아스카르", "부르트키위"와 같은 단편 소설과 "아이만-숄판", "타스 틸렉", "셰카라다", "퉁기 사린"과 같은 희곡을 썼다.[6]
1936년, 카자흐 언론 "카자크 아데비에티"에 "타티아니나 키르다기 아니"라는 산문 작품을 게재했는데, 이는 같은 이름의 장래 소설의 일부였다. 몇 년 후 (1940년경), 레오니트 소볼레프와의 협력으로 "아바이" 비극을 썼다. 아바이 연구의 창시자였으며, 다권본 "카자흐 아데비에트 타리히"의 주 저자이자 편집자였고, 키르기스 서사시 마나스에 대한 단행본도 썼다.[6]
아바이 졸리 서사시 이후, 미래의 새로운 시대를 묘사하는 새로운 대규모 서사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기의 첫 번째 책은 "오스켄 오르켄"으로, 1962년에 사후에 처음 출판되었다. 카자흐 드라마의 융성기는 아우에조프의 작품과 관련이 있다. 그는 20편 이상의 희곡을 썼으며, 니콜라이 고골의 ''검찰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와 ''말괄량이 길들이기'', 니콜라이 포고딘의 귀족, 콘스탄틴 트레네프의 봄의 사랑, A. 크론의 해군 장교와 같은 세계 및 러시아 드라마의 고전 작품들을 번역했다.[6]
4. 주요 작품 목록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는 소설, 희곡 집필 및 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특히 카자흐 민족 시인 아바이 쿠난바예울리의 삶을 다룬 소설 ''아바이''와 ''아바이의 길''은 그의 대표작이다.[2] 그는 카자흐스탄의 사회주의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 20편 이상의 희곡을 썼으며,[2] 니콜라이 고골의 ''검찰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세계 명작을 카자흐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4. 1. 소설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는 15년 동안 4권짜리 서사 역사 소설 "아바이 졸리"(Abai Joly)를 썼다. 이 소설은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 1949년 소설 "아바이"의 두 권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급 상을 받았다. 이 서사시는 4권으로 완결되었으며 레닌상을 수상했고, 30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7]"아바이 졸리"는 아우에조프가 쓴 가장 인기 있고 가치 있는 소설 중 하나이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은 1942년에 출판되었고, 5년 후인 1947년에 두 번째 책 "아바이"가 출판되었으며, 1952년에는 "아바이 아가"(형 아바이)라는 제목의 세 번째 책이 출판되었다. 마지막으로 1956년에 네 번째 책이 발간되었다. 이후 모든 책은 "아바이 졸리"(아바이의 길)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은 각각 7개의 장과 한 개의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세 번째 책은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네 번째 책도 마찬가지로 에필로그가 하나 있다. 전체 서사시는 각각 독특하고 흥미로운 상황을 포함하는 20개의 짧은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7]
각 장의 제목은 이야기 속 사건들의 심리적 상태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비교해 보면 긍정적이고 행복한 순간보다 비극, 슬픔, 비통함이 훨씬 더 많다. 첫 번째 책에서는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소년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분명히 볼 수 있으며, 네 번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가 어떻게 어른이 되어 변화하고 결국 실패하는지를 볼 수 있다.[7]
4. 2. 희곡
아우에조프는 20편 이상의 희곡을 썼으며, 니콜라이 고골의 ''검찰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와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세계 명작을 번역하기도 했다.[6] 1917년 신학교 재학 중 민속 전설을 바탕으로 쓴 "에닐리크-케베크"와 1921년에 쓰인 "에닐리크-케베크"는 그가 작가로서 가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6]1930년대에는 "아이만-숄판", "타스 틸렉", "셰카라다", "퉁기 사린"과 같은 희곡을 썼고,[6] 1940년경에는 레오니트 소볼레프와 협력하여 "아바이" 비극을 썼다.[6]
4. 3. 번역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는 다양한 장르의 에세이, 단편 소설, 희곡을 다수 집필했으며, 그중 많은 작품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니콜라이 고골의 ''검찰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와 ''말괄량이 길들이기'', 니콜라이 포고딘의 귀족, 콘스탄틴 트레네프의 봄의 사랑, 그리고 A. 크론의 해군 장교와 같은 세계 및 러시아 드라마의 고전 작품들을 번역했다.[6]5. 수상 및 영예
연도 | 수상 및 영예 |
---|---|
1945년 | 1941-1945년 대조국 전쟁에서의 용감한 노동을 위한 메달 |
1948년 | "모스크바 건립 800주년 기념 메달" |
1949년 | 명예 훈장 |
1955년, 1959년 |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 |
1957년 |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과학 분야 명예 인물" 칭호 |
1959년 | 소설-대화 《아바이의 길》로 레닌상 수상.[9] |
1961년 (사후) | 카자흐스탄 공화국 정부 결정: 작가의 이름을 기림. |
카자흐스탄 과학 아카데미 문학 예술 연구소 → 아우에조프 과학 아카데미 문학 예술 연구소로 개명. | |
카자흐 국립 학술 드라마 극장, 아우에조프 생가 박물관, 학교, 거리, 알마티의 도시 지역: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 | |
심켄트 M. O. 아우에조프 남카자흐스탄 국립 대학교: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 | |
2022년 7월 21일 | 카자흐스탄 대통령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키르기스스탄에서 무흐타르 아우에조프 흉상 공개.[4] |
6. 기념 사업
1961년 무흐타르 아우에조프가 사망한 후, 카자흐스탄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여러 기념 사업을 시행했다.
사업 종류 | 내용 |
---|---|
기관 명칭 변경 | |
기타 | 알마티의 학교, 거리, 도시 지역 |
흉상 설치 |
7. 연구 및 평가
무흐타르 아우에조프는 카자흐스탄의 작가이자 학자로서, 그의 작품과 연구는 카자흐 문학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카자흐 민족의 삶과 역사, 사회주의 건설 과정을 다룬 그의 작품은 카자흐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는 ''아바이의 길''과 희곡 ''엔리크-케베크'' 등이 있다.
아우에조프는 니콜라이 고골의 ''검찰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여러 문학 작품을 카자흐어로 번역했다.[2]
사후 카자흐스탄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려 카자흐 국립 학술 드라마 극장, 아우에조프 생가 박물관, 알마티의 한 지역, 심켄트의 M. O. 아우에조프 남카자흐스탄 국립 대학교 등 여러 기관과 장소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4] 2022년에는 키르기스스탄에서 그의 흉상이 공개되기도 했다.[4]
아우에조프의 작품은 러시아어, 카자흐어뿐만 아니라 영어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그의 작품과 관련된 연구 논문도 다수 발표되었다.[5]
7. 1. 주요 연구
아우에조프는 에세이, 단편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다수 집필했으며, 그중 많은 작품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다. 1917년, 신학교 재학 중 민속 전설을 바탕으로 한 희곡 "에닐리크-케베크"를 썼다. 1921년에 쓰인 희곡 "에닐리크-케베크"와 단편 소설 "코르간시즈딘 쿠니"는 그가 작가로서 가진 뛰어난 재능을 세상에 보여주었다.[6] 1923년부터 문학 활동에 전념하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1926년까지 "오키간 아자마트", "키르 수레트테리", "우일레누", "에스킬리크 콜렌케신데", "키남쉴 보이제트켄", "카랄리 술루" 등의 단편 소설을 썼다.[6]레닌그라드 유학 시절에는 "카라쉬-카라쉬"와 "콕세렉"이라는 두 편의 호평받은 소설을 썼다.[6] 아우에조프는 카자흐 역사적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의 역사에 대한 몰두는 "에닐리크-케베크", "칸 케네", "킬리 자만", "아이만 – 숄판", "카라킵샤크 코빌란디" 등의 작품에서 드러난다.[6] 20년 동안 카자흐 문학의 고전이 된 산문과 희곡에 전념했으며, 1930년대에는 "카세닌 쿠빌리스타리", "이즈데르", "샤트칼란", "쿰 멘 아스카르", "부르트키위"와 같은 일련의 단편 소설과 "아이만-숄판", "타스 틸렉", "셰카라다", "퉁기 사린"과 같은 희곡을 썼다.[6]
1936년, 카자흐 언론 "카자크 아데비에티"에 "타티아니나 키르다기 아니"라는 산문 작품을 게재했는데, 이는 같은 이름의 장래 소설의 일부였다.[6] 몇 년 후(1940년경), 레오니트 소볼레프와 협력하여 "아바이" 비극을 썼다.[6] 아우에조프는 위대한 과학자이자 교육자로서 카자흐 문학의 역사와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아바이 연구의 창시자이자 다권본 "카자흐 아데비에트 타리히"의 주 저자 겸 편집자였다. 또한 키르기스 서사시 마나스에 대한 단행본도 썼다.[6]
아바이 졸리 서사시 이후, 미래의 새로운 시대를 묘사하는 새로운 대규모 서사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기 그의 첫 번째 책은 "오스켄 오르켄"으로, 1962년에 사후에 처음 출판되었다.[6] 카자흐 드라마의 융성기는 아우에조프의 작품과 관련이 있다. 그는 20편 이상의 희곡을 썼으며, 니콜라이 고골의 ''검찰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와 ''말괄량이 길들이기'', 니콜라이 포고딘의 귀족, 콘스탄틴 트레네프의 봄의 사랑, 그리고 A. 크론의 해군 장교와 같은 세계 및 러시아 드라마의 고전 작품들을 번역했다.[6]
8. 영화화된 작품
제목 | 연도 | 제작 스튜디오 | 각본 | 감독 | 촬영 | 출연 |
---|---|---|---|---|---|---|
라이한 | 1940 | 썸네일 | 무흐타르 아우에조프 | M. 레빈 | H. 나자리안츠 | E. 오미르자코프, D. 보케예바, S. 코잠쿨로프 |
아바이 앤데리 | 1945 | 카자흐필름 | M. 아우에조프, G. 로샬 | G. 로샬 | G. 피쉬코바 | K. 쿠아니슈파예프, K. 바디로프, Sh. 아이마노프, S. 코잠쿨로프 |
쉰다기 시나르 | 1966 | 카자흐필름 | K. 무하메잔노프 | S. 호지코프 | A. 아슈라포프 | S. 파노프, G. 아딜로바, N. 잔투린, Y. 노가이바예프 |
카라스-카라스 | 1969 | 카자흐필름, 키르기즈필름 | 아킴 타라지 | B. 샴시에프 | S. 초크모로프, S. 주마딜로프, M. 리스쿨로프, B. 키디케예바 | |
콕세렉 | 1973 | 카자흐필름 | A. 미할코프-콘찰로프스키, E. 트로피닌 | T. 오케예프 | K. 키디랄리예프 | S. 초크모로프, K. 우알리예프, K. 사타예프 |
카랄 술루 | 1982 | 카자흐필름 | E. 시나르바예프 | E. 시나르바예프 | N. 아린바사로바, N. 잔투린 | |
아바이 | 1995 | 카자흐필름 | A. 아미르쿨로프, L. 아힌자노바, A. 바라노프, S. 아프리모프 | A. 아미르쿨로프 | A. 술레예프 | G. 투리크바예프, T. 자만쿨로프, B. 리모바, F. 잔틸레우오바 |
참조
[1]
서적
The path of Abai
"Zhazushy"
2009
[2]
웹사이트
Iraj Bashiri, Biographies: Central Asia and Iran
https://www.angelfir[...]
[3]
웹사이트
Mukhtar Auezov Fund. The autobiography and letters
http://www.auezov.kz
[4]
웹사이트
Президент Токаев открыл бюст Мухтара Ауэзова в Чолпон-Ате
https://tengrinews.k[...]
2022-07-21
[5]
웹사이트
"Beauty in Mourning" has been translated into English
https://adebiportal.[...]
2023-01-23
[6]
서적
The path of Abai
"Zhazush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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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Kazakh culture, reference encyclopedia
"Aruna Ltd."
2005
[8]
웹사이트
Mukhtar Auezov Fund. Filmography
http://www.auezov.kz[...]
[9]
웹사이트
Mukhtar Auezov Fund. Awards
http://www.auezov.kz[...]
[10]
웹사이트
Mukhtar Auezov Fund. Diplomas
http://www.auezov.k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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