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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요시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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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요시 정권은 미요시 씨가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을 장악한 정권으로, 1532년 미요시 모토나가가 주군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 살해된 후, 그의 아들 미요시 나가요시가 권력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나가요시는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몰아내고 교토를 지배하며 미요시 정권을 수립했다. 이후 나가요시는 쇼군과 간레이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의 세력을 기나이와 시코쿠 지역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나가요시 사후, 미요시 정권은 주요 인물들의 연이은 죽음과 권력 다툼으로 혼란에 빠졌다. 1565년 미요시 삼인중이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암살하는 '에이로쿠의 변'을 일으키며 정권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상경으로 미요시 정권은 붕괴되었고,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15대 쇼군으로 즉위하면서 막을 내렸다. 미요시 정권은 무로마치 막부 체제를 계승했지만, 쇼군과 간레이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국인 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독특한 통치 방식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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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로쿠의 변은 1565년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산닌슈가 아시카가 요시테루 쇼군을 암살하고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옹립하려 한 사건으로, 무로마치 막부 쇠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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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요시 정권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정부명미요시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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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요시 가문 가몬・3층 능형에 다섯 징 박기
미요시 가문가문・3층 능형에 다섯 징 박기
창건년1549년
해산년1568년
대표미요시 나가요시
미요시 요시쓰구
(미요시 씨)
정청 소재지셋쓰 국 이이모리 산성 (본거지)
셋쓰 국 아쿠타가와 산성
지역아와, 사누키, 아와지, 셋쓰, 가와치, 이즈미, 야마시로, 야마토, 단바, 와카사, 하리마
이전 정부[[File:松笠菱(細川向かい松).jpg|25x20px]] 호소카와 정권
비고무로마치 막부가 건재했기 때문에 일본의 정당한 중앙 정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긴키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 전국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 막정을 장악했다.
정치
정치 체제무가 정권
천황고나라 천황 (1526년 ~ 1557년)
오기마치 천황 (1557년 ~ 1586년)
정이대장군아시카가 요시테루 (1546년 ~ 1565년)
아시카가 요시히데 (1568년)
수리직수리대부 미요시 나가요시 (1560년 ~ 1564년)
역사
성립1549년
해체1568년
경제
통화일본 문
기타
공용어중세 일본어
종교신불습합

2. 역사

미요시 나가요시호소카와 하루모토의 가신으로, 기자와 나가마사를 토벌하고(다이헤이지 전투), 호소카와 우지쓰나나 유사 나가노리 등과의 샤리사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셋쓰 슈고다이가 되었다. 1548년, 나가요시는 유사 나가노리의 딸과 결혼하고, 호소카와 우지쓰나와 화해하여 주군 하루모토에게 반기를 들었다.[2]

1549년, 에구치 전투에서 나가요시는 하루모토·미요시 마사나가를 격파했다. 마사나가는 전사했고, 하루모토와 그가 옹립했던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오미로 도망쳤다. 나가요시는 호소카와 우지쓰나와 함께 조락하여 교토를 지배했다. 그러나 우지쓰나는 나가요시의 괴뢰였고, 호소카와 마사모토 이래의 호소카와 정권은 붕괴되었으며, 미요시 정권이 성립했다. 다만, 미요시 정권을 지탱하는 인물 중 몇몇은 우지쓰나로부터 나가요시에게 붙여진 요리키였다는 견해도 있어, 이 단계에서는 우지쓰나·나가요시의 공동 통치가 실체였다는 주장도 있다.[2]

1552년에 미요시 나가요시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화해하고 교토로 맞이했다. 동시에 호소카와 가문의 가독을 호소카와 하루모토에서 호소카와 우지쓰나로 교체하여 우지쓰나를 간레이(管領)로 삼았다. 그러나 요시테루와 하루모토는 나가요시에게 권력을 빼앗긴 것에 불만을 품고 계속 대립했다.

1553년에는 아쿠타가와 산성의 성주 아쿠타가와 손주로가 나가요시에게 반항하자, 나가요시는 아쿠타가와 씨를 토벌하고 아쿠타가와 산성을 빼앗아 본거지로 삼았다. 이로써 나가요시는 호소카와 정권의 계승자임을 분명히 했다. 쇼군 요시테루와 간레이 우지쓰나는 나가요시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실질적으로는 미요시 정권이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부 재건을 목표로 하는 요시테루 및 하루모토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나가요시는 요시테루를 오미로 추방했다가 다시 데려오는 등 갈등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암살 미수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1558년 기타시라카와 전투 이후 롯카쿠 요시카타의 중재로 요시테루와 화해했고, 1561년에는 하루모토와도 화해하여 13년에 걸친 대립에 마침표를 찍었다.

1553년 나이토 구니사다가 하루모토 측에 의해 토벌된 후, 나가요시는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동생 나가요리를 구니사다의 후계자로 삼아 단바 국을 우지쓰나로부터 분리했다. 이를 통해 나가요시와 우지쓰나의 입장이 역전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미요시씨 역대 무덤 (쇼즈이성 안에 건립)


미요시 정권은 기나이, 시코쿠 동방, 아와지에 세력을 펼치며 안정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요 구성원들의 잇따른 사망으로 그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1561년: 나가요시의 막내 동생 소고 가즈토미가 병사했다.
  • 1562년 3월: 나가요시의 맏형 미요시 지쓰큐가 하타케야마 다카마사와의 구메타 전투에서 전사했다.
  • 1563년 8월: 나가요시의 적자 미요시 요시흥이 사망했다.


요시흥의 사망으로 미요시씨는 후계자를 세워야 했다. 나가요시의 조카이자 가즈토미의 아들인 소고 시게토미(미요시 요시쓰구)가 후계자로 결정되었다.[1] 요시쓰구의 어머니는 구조가 출신으로, 이는 고노에가와 인척 관계인 아시카가 쇼군가에 대항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2]

1564년 5월, 나가요시는 차남 아타기 후유야스를 주살했다.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참소였다는 설도 있지만, 요시쓰구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다는 견해도 있다. 후유야스는 무죄였음이 밝혀졌고, 병을 앓던 나가요시도 같은 해 7월에 사망했다.

나가요시 사후, 미요시 가문의 가독은 요시쓰구가 이었다. 그러나 요시쓰구는 어렸기 때문에 미요시 정권은 요시쓰구의 후견인인 미요시 삼인중과 아와 미요시 가문을 지지하는 시노하라 나가후사, 미요시 야스나가, 야마토의 마쓰나가 히사히데, 단바의 마쓰나가 나가요리에 의한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다.

한편, 나가요시의 괴뢰였지만 각 다이묘와의 정전 협정 등의 중재로 힘을 숨기고 장군 친정을 내걸고 군림했던 제1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나가요시의 죽음을 호기로 보고, 막부 재건을 목표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시테루의 행동에 위기감을 느낀 미요시 삼인중은 1565년 5월 19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요시테루를 그의 거성이자 무로마치 막부의 중심 거점이었던 니조 고쇼에서 암살했다.(에이로쿠의 변)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세력을 위험하게 여긴 미요시 삼인중은 1565년 12월, 쓰쓰이 준케이 등 야마토 국인들과 손을 잡고 야마토를 침공하여 히사히데를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삼인중과 히사히데의 대립이 심해졌다. 또한, 단바의 다이묘가 된 히사히데의 동생 나가요리가 오기노 나오마사에게 토벌되어 연립 정권은 단바를 잃게 되었다.[1]

한편, 요시테루에게는 동생 가쿠케이가 있었고, 요시테루의 옛 신하들이 옹립하여 1566년 2월에 환속,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칭하고, 같은 해 4월 21일에는 종오위하·사마노카미에 서위·임관되었다. 이에 대해 삼인중은 아와 공방·요시쓰나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14대 장군 후보로 옹립했다. 요시히데는 1567년 1월 종오위하·사마노카미에 서임되었다.[1]

삼인중은 히사히데와의 싸움에서 요시쓰구를 옹립하고, 1566년 9월에는 아와·사누키의 군세를 이끈 미요시 나가하루, 지쓰큐의 중신 시노하라 나가후사·미요시 야스나가, 아와 호소카와 가문의 호소카와 사네유키, 장군 후보 측·아시카가 요시히데도 합류하여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1567년 4월에 당주 요시쓰구가 갑자기 가출하여 히사히데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이로 인해 히사히데 측은 숨통이 트였지만, 여전히 열세였다 (도다이지 대불전 전투). 삼인중 측의 시노하라 나가후사는 마쓰나가 측의 셋쓰 고시미즈 성을 빼앗아 이곳을 거점으로 야마토 외 각지로 전전했다.

미요시 정권 내부에서 내분이 계속되는 가운데, 아시카가 요시아키오다 노부나가의 원조를 받아, 1568년 9월 7일에 기후성을 출발하여 상락전을 시작했다. 미요시 정권은 노부나가의 침공을 막기 위해 간레이 직을 부여하여 롯카쿠 요시카타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방어하려 했지만, 요시카타는 노부나가의 침공을 받고 패배하여, 9월 12일에 본거지인 칸논지 성이 함락되었다(칸논지 성 전투). 9월 25일에 오다 군이 오쓰까지 진군하자, 미요시 요시쓰구와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항복했고, 협격을 받게 된 시노하라 나가후사와 삼인중의 군은 붕괴, 9월 29일에 야마시로 쇼류지 성으로 퇴각한 이와나리 도모미치가 항복, 9월 30일에 셋쓰 아쿠타가와 산성으로 퇴각한 호소카와 아키모토·미요시 나가야스가 성을 포기, 10월 2일에는 시노하라 나가후사도 고시미즈 성을 포기하고 아와국으로 도망쳤다. 10월 20일에 아시카가 요시히데가 아와국에서 병사했고, 같은 해 10월 18일 요시아키가 15대 쇼군에 취임하면서 미요시 정권은 붕괴되었다.

2. 1. 기나이 진출

미요시 나가요시호소카와 하루모토의 가신으로서 기자와 나가마사를 토벌하고(다이헤이지 전투), 호소카와 우지쓰나나 유사 나가노리 (가와치) 등과의 샤리사 전투에서 많은 무공을 세워 셋쓰 슈고다이로서 하루모토 휘하의 최유력 중신으로 성장했다. 덴분 17년(1548년), 나가요시는 유사 나가노리와 화해하여 그의 딸을 정실로 맞이하고, 동시에 호소카와 우지쓰나와 화해하여 주군이자 원수이기도 한 하루모토에게 반기를 들었다.[2]

덴분 18년(1549년), 에구치 전투에서 하루모토·미요시 마사나가와 싸워 나가요시는 승리했다. 마사나가는 전사했고, 하루모토와 그가 옹립했던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오미로 도망쳤다. 나가요시는 호소카와 우지쓰나와 함께 조락하여 교토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우지쓰나는 나가요시의 괴뢰에 불과했고, 호소카와 마사모토 이래의 호소카와 정권은 실질적으로 붕괴되었으며, 미요시 정권이 성립했다. 다만, 미요시 정권을 지탱하는 미요시 씨의 피관으로 여겨졌던 인물 중 몇몇은 사실 우지쓰나로부터 나가요시에게 붙여진 요리키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등, 이 단계에서는 우지쓰나·나가요시의 공동 통치가 실체였다는 견해도 있다.[2]

2. 2. 미요시 정권의 성립

1552년에 미요시 나가요시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화해하고 교토로 맞이했다. 동시에 호소카와 가문의 가독(家督)을 호소카와 하루모토에서 호소카와 우지쓰나로 교체하여 우지쓰나를 간레이(管領)로 삼았다. 그러나 요시테루와 하루모토는 나가요시에게 권력을 빼앗긴 것에 불만을 품고 계속 대립했다.

1553년에는 호소카와 정권이 거점으로 삼았던 아쿠타가와 산성의 성주 아쿠타가와 손주로가 나가요시에게 반항하자, 나가요시는 아쿠타가와 씨를 토벌하고 아쿠타가와 산성을 빼앗아 본거지로 삼았다. 이로써 나가요시는 호소카와 정권의 계승자임을 분명히 했다. 쇼군 요시테루와 간레이 우지쓰나는 나가요시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실질적으로는 미요시 정권이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부 재건을 목표로 하는 요시테루 및 하루모토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나가요시는 요시테루를 오미로 추방했다가 다시 데려오는 등 갈등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암살 미수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1558년 기타시라카와 전투 이후 롯카쿠 요시카타의 중재로 요시테루와 화해했고, 1561년에는 하루모토와도 화해하여 13년에 걸친 대립에 마침표를 찍었다.

호소카와 우지쓰나를 옹립하는 과정에서, 나가요시는 우지쓰나를 지지해 온 나이토 구니사다의 존재를 경계해야 했다. 1553년 나이토 구니사다가 하루모토 측에 의해 토벌된 후, 나가요시는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동생 나가요리를 구니사다의 후계자로 삼아 단바 국을 우지쓰나로부터 분리했다. 이를 통해 나가요시와 우지쓰나의 입장이 역전되었다고 평가받는다.

2. 3. 잇따른 일족의 죽음으로 인한 혼란



미요시 정권은 기나이, 시코쿠 동방, 아와지에 세력을 펼치며 안정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요 구성원들의 잇따른 사망으로 그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1561년: 나가요시의 막내 동생이자 '오니 소고'라 불린 소고 가즈토미가 병사했다.
  • 1562년 3월: 나가요시의 맏형 미요시 지쓰큐가 하타케야마 다카마사와의 구메타 전투에서 전사했다.
  • 1563년 8월: 나가요시의 적자 미요시 요시흥이 사망했다.


특히 요시흥의 사망으로 미요시씨는 후계자를 세워야 했다. 나가요시의 조카이자 가즈토미의 아들인 소고 시게토미(미요시 요시쓰구)가 후계자로 결정되었다.[1] 요시쓰구의 어머니는 구조가 출신으로, 이는 고노에가와 인척 관계인 아시카가 쇼군가에 대항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2]

이러한 가독 계승에는 혼란이 있었다. 1564년 5월, 나가요시는 차남 아타기 후유야스를 주살했다.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참소였다는 설도 있지만, 요시쓰구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다는 견해도 있다. 후유야스는 무죄였음이 밝혀졌고, 병을 앓던 나가요시도 같은 해 7월에 사망했다.

2. 4. 에이로쿠의 변

나가요시 사후, 미요시 가문의 가독은 요시쓰구가 이었다. 그러나 요시쓰구는 어렸기 때문에 미요시 정권은 요시쓰구의 후견인인 미요시 나가야스, 미요시 마사야스, 이와나리 도모미치 등 미요시 삼인중과 아와 미요시 가문을 지지하는 시노하라 나가후사, 미요시 야스나가, 야마토의 마쓰나가 히사히데, 단바의 마쓰나가 나가요리에 의한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다.

한편, 나가요시의 괴뢰였지만 각 다이묘와의 정전 협정 등의 중재로 힘을 숨기고 장군 친정을 내걸고 군림했던 제1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나가요시의 죽음을 호기로 보고, 이전부터 친밀한 관계에 있던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아사쿠라 요시카게 등 여러 다이묘에게 상경을 요청하며 막부 재건을 목표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시테루의 행동에 위기감을 느낀 미요시 삼인중은 에이로쿠 8년(1565년) 5월 19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요시테루를 그의 거성이자 무로마치 막부의 중심 거점이었던 니조 고쇼에서 암살했다.

2. 5.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삼인중의 대립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세력을 위험하게 여긴 미요시 삼인중은 에이로쿠 8년(1565년) 12월, 과거 히사히데에게 쓰쓰이 성을 빼앗기고 (쓰쓰이 성 전투) 방랑하던 쓰쓰이 준케이 등 야마토 국인들과 손을 잡고 야마토를 침공하여 히사히데를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삼인중과 히사히데의 대립이 심해졌다. 또한, 단바의 다이묘가 된 히사히데의 동생 나가요리가 오기노 나오마사에게 토벌되어 연립 정권은 단바를 잃게 되었다.[1]

한편, 요시테루에게는 동생 가쿠케이(覚慶)가 있었고, 요시테루의 옛 신하들이 옹립하여 에이로쿠 9년(1566년) 2월에 환속, 아시카가 요시아키 (후의 요시아키)라 칭하고, 같은 해 4월 21일에는 종오위하·사마노카미(次期将軍이 취임하는 관직)에 서위·임관되었다. 이에 대해 삼인중은 과거의 사카이 공방이었던 아와 공방·요시쓰나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14대 장군 후보로 옹립했다. 요시히데는 에이로쿠 10년(1567년) 1월 종오위하·사마노카미에 서임되었다.[1]

삼인중은 히사히데와의 싸움에서 요시쓰구를 옹립하고, 에이로쿠 9년 9월에는 아와·사누키의 군세를 이끈 미요시 나가하루, 지쓰큐의 중신 시노하라 나가후사·미요시 야스나가, 아와 호소카와 가문의 호소카와 사네유키, 장군 후보 측·아시카가 요시히데도 합류하여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에이로쿠 10년 4월에 당주 요시쓰구가 갑자기 가출하여 히사히데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이로 인해 히사히데 측은 숨통이 트였지만, 여전히 열세였다 (도다이지 대불전 전투). 삼인중 측의 시노하라 나가후사는 마쓰나가 측의 셋쓰 고시미즈 성을 빼앗아 이곳을 거점으로 야마토 외 각지로 전전했다. 이 시기의 나가후사에 대해, 『프로이스 일본사』에는 "이 무렵, 그들(미요시 삼인중) 이상으로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관할할 정도였던 것은 시노하라 殿이었고, 그는 아와국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집정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

2. 6. 오다 노부나가의 상경과 미요시 정권의 붕괴

미요시 정권 내부에서 내분이 계속되는 가운데, 나가사쿠의 변으로 호소카와 후지타카, 잇시키 후지나가 등 막신의 원조를 받아 도망쳤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오와리·미노를 영유하며 기세를 올리던 오다 노부나가의 원조를 받아, 에이로쿠 11년(1568년) 9월 7일에 기후성을 출발하여 상락전을 시작했다. 내분에 시달리고 있던 미요시 정권은 노부나가의 침공을 막기 위해 간레이 직을 부여하여 롯카쿠 요시카타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방어하려 했지만, 요시카타는 노부나가의 침공을 받고 허무하게 패배하여, 9월 12일에 본거지인 칸논지 성이 함락되었다(칸논지 성 전투). 9월 25일에 오다 군이 오쓰까지 진군하자, 미요시 요시쓰구와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항복했고, 협격을 받게 된 시노하라 나가후사와 삼인중의 군은 붕괴, 9월 29일에 야마시로 쇼류지 성으로 퇴각한 이와나리 도모미치가 항복, 9월 30일에 셋쓰 아쿠타가와 산성으로 퇴각한 호소카와 아키모토·미요시 나가야스가 성을 포기, 10월 2일에는 시노하라 나가후사도 고시미즈 성을 포기하고 아와국으로 도망쳤다. 10월 20일에 아시카가 요시히데가 아와국에서 병사했고, 같은 해 10월 18일 요시아키가 15대 쇼군에 취임하면서 미요시 정권은 붕괴되었다.

3. 정권 구조

미요시 정권은 무로마치 막부의 기존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은 무가 정권이었다. 쇼군을 꼭두각시로 삼아 정소 집사인 이세 사다타카와 협력하여 막부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막부의 요직을 명예직으로 전국의 유력 다이묘들에게 주어 그들을 회유하는 등, 막부 기능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미요시 정권은 내부 구조가 매우 취약하여, 정권은 나가요시 개인의 능력과 그의 친동생인 미요시 지큐, 아타키 후유야스, 소고 가즈마사 등과 적남인 미요시 요시오키라는 제한된 인물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다만, 이러한 견해는 일치하지 않으며, 미요시 정권이 기존 정치 구조를 포괄하면서도 쇼군·간레이와 같은 상위 권력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행동하고, 국인층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상위 권력이나 그 권위·틀을 상대화하여 성립된 정권이며, '''호소카와 정권(=무로마치 막부 체제)과의 명백한 정치적 단절이 존재한다'''는 지적도 있다.[1] 오다 정권아시카가 요시아키 추방 후 미요시 정권을 본뜬 통치 방법을 채택한 것처럼, 미요시 정권은 통일 정권에 앞서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요시 정권 자체도 상위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립한 것은 아니었다.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반강제로 미요시 나가요시 부자나 마쓰나가 히사히데에게 영전을 수여하고, 그들을 무로마치 막부의 의례 질서에 편입시켜 막부에 출사하도록 강요했다. 에이로쿠 연간에는 아시카가 쇼군에 의한 미요시 정권 통제가 어느 정도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통제가 나가요시 부자 사후에 미요시 씨(특히 미요시 산닌슈)의 경계심을 강하게 하여 에이로쿠의 변의 한 원인이 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2]

경제력에서는 사카이를 지배하에 두는 등 다른 다이묘들을 능가했지만, 그 영지 지배는 복잡했다. 구 호소카와 영지 지역에서도 아쿠타가와 산성 등을 근거로 나가요시의 직할 지배가 진행된 셋쓰·야마시로 및 사카이, 지큐에게 통치를 맡긴 미요시 씨 본래의 거점인 아와, 후유야스·가즈토라를 양자로 보내 지배한 아와지·사누키, 미요시 정권 성립 과정에서 미요시 씨의 군사력에 따라 그 입장을 안도받은 전 슈고 다이묘를 고쿠슈로 하는 형식을 취한 단바(나이토 씨)·이즈미(마쓰우라 씨)에서는 통치 형태가 달랐다. 에이로쿠 원년(1558년)경부터 시작된 구 호소카와 영지 이외로의 진출 과정에서도, 중신인 마쓰나가 씨를 고쿠슈로 보낸 야마토에서처럼, 획일화된 통치는 채택되지 않았다.

미요시 정권은 조정과의 관계도 다른 다이묘에 비해 매우 특수했다. 나가요시의 관직은 지쿠젠노카미, 슈리노다이부로, 이는 관직으로서는 평범한 것이었다. 또한, 나가오 가게토라(우에스기 겐신)가 상경하여 윤지를 얻으려 했을 때, 이를 방해하지 않았다. 한편, 조정에 비용을 마련하여 헌금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이는 나가요시의 천황에 대한 무관심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사실 미요시 정권이 처한 특수한 입장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야마시로를 비롯한 기나이에는 금리, 공가가 파악하는 장원이 많았다. 이러한 지역에서의 연공, 군역 징수, 검지는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 이러한 세력에 너무 배려하면 영지 경영에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나가요시는 아와·사누키·아와지라는 본래 영지와 사카이를 본거지로 삼아 장악하고, 그 외 소령에 대해서는 "완만한 지배"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나가요시는 미요시 가문의 가신단이 공가의 장원을 함부로 압령하는 일이 있어도, 어느 정도는 "묵인"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조

[1] 서적 中世後期細川氏の権力構造 吉川弘文館
[2] 서적 義輝の政治活動とその原因 吉川弘文館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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