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타 나오마사
1. 개요
미즈타 나오마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을 지낸 인물이다. 아이치현 출신으로,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서 근무하다가 조선총독부 재무국에서 사무관, 사계과장, 재무과장을 역임했다. 1937년 재무국장에 취임하여 1945년까지 재직했으며, 광복 직후 일본인 예금자들의 예금 인출 사태에 대응하여 조선은행권을 대량 발행했으나, 이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여 비판을 받았다. 그는 가쿠슈인 상무이사, 동화협회 발족 멤버로 활동했으며, 취미는 독서, 문예, 타구였다.
| 이름 | 미즈타 나오마사 |
|---|---|
| 한자 표기 | 水田 直昌 |
| 로마자 표기 | Mizuta Naomasa |
| 출생 | 189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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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1947년 |
| 직업 | 검사, 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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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 | 대구 복심 법원 검사 대전 지방 법원 검사 조선 총독부 사법관 연수소 강사 평양 복심 법원 검사 변호사 개업 제국 비밀 탐정사 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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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 | 변호사 (개업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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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인물 | 제국 비밀 탐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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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사망 -
에프렘 짐발리스트
러시아 제국 출신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육자인 에프렘 짐발리스트는 레오폴트 아우어의 제자로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명성을 얻었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은퇴 후에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
1985년 사망 -
김기진
김기진은 팔봉이라는 호를 사용한 한국의 문학평론가, 소설가, 시인으로, KAPF에서 활동하며 경향파 문학 이론을 이끌었으나 친일 행적을 보였고 광복 후에는 반공주의 문인으로 활동했다. -
일본의 재무관료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낸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970년 자위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했다. -
일본의 재무관료 -
하타 이쿠히코
하타 이쿠히코는 일본의 역사학자로, 일본 근현대사와 군사 및 전쟁사를 연구하며 난징 대학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다수의 저서를 저술하여 일본 내외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여러 상을 수상했다. -
1897년 출생 -
정인승
정인승은 일제강점기 국어학자로서 국어사전 편찬에 기여하고, 해방 후에는 여러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건국훈장과 국민훈장을 수훈받았다. -
1897년 출생 -
윤보선
윤보선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한국민주당 창당, 서울특별시장 및 상공부 장관 역임, 제2공화국 대통령 역임, 그리고 민주화 운동 참여 등의 활동을 했다.
2. 생애
아이치현 출신으로, 미즈타 나오아쓰(水田直温일본어)의 맏아들이다. 1921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뒤, 일본 대장성 관료로 근무하였다. 후쿠오카 및 오사카시 미나미(南) 세무서장 등을 역임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로 옮겨와 재무국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에 취임하여 1945년 9월 광복 시점까지 재직했다. 재임 중에는 조선사 편수회 위원을 겸임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경성에서 일본인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하자 대량의 조선은행권을 추가 발행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까지 한국 경제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 1947년 가쿠슈인 상무이사를 지냈으며, 옛 식민지 조선 관련 인사들이 모인 동화협회(훗날의 중앙일한협회) 발족에 참여했다.
2.1. 초기 생애 및 일본 내 활동
아이치현 아이치군 나루미정에서 미즈타 나오아쓰(水田直温일본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1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 대장성에 들어가 이재국에서 근무하며 국제 금융 및 동아시아 경제 사정 조사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1922년 7월 사세관(司税官)에 임명되었고, 이후 후쿠오카 세무서장과 오사카시 미나미(南) 세무서장을 역임했다.
2.2. 조선총독부 관료 시절
아이치현 출신으로, 미즈타 나오아쓰(水田直温일본어)의 맏아들이다. 1921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대장성 이재국(理財局)에서 국제 금융, 동아시아 경제 조사 등의 업무를 맡았으며, 주무국(主務局)으로 옮겨 후쿠오카시 및 오사카시 미나미(南) 세무서장을 지냈다.
1925년 1월, 조선총독부 재무국 사무관으로 임명되어 조선으로 건너왔다. 이재과 세무관을 거쳐 1928년 4월에는 사계과장(司計課長)으로 예산 및 결산 업무를 담당하였다. 1937년 10월 30일에는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에 취임하였으며, 조선사 편수회 위원을 겸임하기도 했다. 그는 1945년 9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재무국장으로 재직하였다.
2.2.1. 해방 직후 활동과 논란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패전 직후, 경성에 있던 일본 자본의 민간 은행에서는 일본인 예금자들이 예금을 대량으로 인출하는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대응하여 당시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이었던 미즈타 나오마사는 1945년 8월 16일부터 말일까지 조선 서적 주식회사의 인쇄 공장에서 천엔짜리 고액 지폐 7 분, 가까사와 인쇄 주식회사에서 백엔짜리 지폐 2.1 분의 조선은행권을 추가로 발행했다. 또한 같은 달 17일에는 "조선 내 통장을 일본에 가져가면 매월 500JPY 한도 내에서 예금을 인출할 수 있으며, 일본에 본점이 있는 은행의 송금 수표는 일본에서도 유효하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금융 모라토리엄 발생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통화량의 급격한 증가를 초래했다. 1945년 8월 15일 당시 조선은행권의 발행 잔액은 4.97이었으나, 불과 한 달여 뒤인 9월 28일에는 8.65으로 급증했다. 이는 해방 직후 혼란한 경제 상황 속에서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으며, 이후 미군정 시기까지 한국 경제에 큰 부담을 안기는 결과를 낳았다.
2.3. 일본 귀국 후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인 1947년에는 가쿠슈인의 상무이사가 되었다. 또한 옛 식민지 조선 관련 인물들이 모여 만든 동화협회(나중에 중앙일한협회로 변경됨)의 발족 멤버로 참여하였다.
3. 취미
취미는 독서, 문예, 타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