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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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의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 영화 감독, 배우, 그리고 정치 운동가였다.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며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내면, 사회 비판, 그리고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탐구했다. 1970년, 그는 자위대 주둔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삶과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쟁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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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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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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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히라오카 기미타케 |
출생일 | 1925년 1월 14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요쓰야구 나가즈미초 2초메 (현재의 도쿄도 신주쿠구 요쓰야 4초메 22번지) |
사망일 | 1970년 11월 25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이치가야 혼무라초 1번지 (현재의 이치가야혼무라초 5-1), 육상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 |
매장지 | 다마 묘원 |
필명 | 미시마 유키오 |
로마자 표기 | Mishima Yukio |
일본어 표기 | 三島 由紀夫 |
로마자 표기 (본명) | Hiraoka Kimitake |
일본어 표기 (본명) | 平岡 公威 |
직업 및 활동 | |
직업 | 소설가 극작가 배우 모델 연극 및 영화 감독 공무원 정치 운동가 |
소속 | 대장성 극단 분가쿠자 |
활동 기간 | 1938년–1970년 |
조직 | 다테노카이(“방패회”) |
학력 | |
학력 | 도쿄 대학 졸업 |
학위 | 법학사 (도쿄 대학, 1947년 11월) |
최종 학력 | 도쿄 대학 법학부 법률학과 졸업 |
문학 | |
언어 | 일본어 |
문학 시기 | 현대 문학(20세기 문학) |
장르 | 소설 중편 소설 단편 소설 희곡(신게키|노|가부키|대본|번역 각색) 시나리오 시 여행 문학 자서전, 문학 비평 및 기타 수필 강연 선언문 |
문학 사조 |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퓨전 |
대표 작품 | 가면의 고백 금각사 풍요의 바다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히라오카 요코 |
자녀 | 히라오카 노리코 히라오카 다케시치로 |
친척 | 마쓰다이라 요리히데 (5대 조상) 마쓰다이라 노리타다 (의붓 5대 조상) 히라오카 다자에몬, 미요시 초사이, 마쓰다이라 요리타카, 하시 이치바 (고조부) 나가이 나오유키 (의붓 고조부) 히라오카 다이키치, 나가이 이와노스케, 세가와 아사하루, 하시 겐도 (증조부) 히라오카 사다타로, 하시 겐조 (조부) 히라오카 나쓰, 하시 도미 (조모) 히라오카 아즈사 (부친), 히라오카 시즈에 (모친) 히라오카 치유키 (남동생), 히라오카 미쓰코 (여동생) 하시 겐코, 하시 유키조 (백부) 히라오카 만지로 (대백부) 오야 아쓰시 (대숙부) 히라오카 마스히코, 이소자키 아키라, 나가이 미쓰아키 (부친의 사촌) |
영향 | |
영향 받은 인물 | 하가쿠레 2·26 사건 가미카제 특별공격대 신푸렌 가부키 노가쿠 영화 극화 그리스 비극 고사기 조루리 암흑 무도 무도 신도 유식 양명학 고금와카집 우게쓰 이야기 이세 이야기 무라사키 시키부 이즈미 시키부 후지와라노 사다이에 제아미 우에다 아키나리 이하라 사이카쿠 치카마쓰 몬자에몬 다키자와 바킨 라프카디오 헌 오가와 미메이 마루야마 카오루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쿠사노 신페이 코리 토라히코 모리 오가이 이즈미 교카 나카하라 추야 다나카 후유지 하기와라 사쿠타로 다치하라 미치조 히나쓰 코노스케 호리구치 다이가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니자키 준이치로 호리 다쓰오 가지이 모토지로 사토 하루오 이나가키 타루호 오리구치 시노부 다자이 오사무 가와바타 야스나리 시미즈 후미오 하스다 젠메이 이토 시즈오 호다 요주로 사와무라 소주로 나카무라 우타에몬 프리드리히 횔덜린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레몽 라디게 장 콕토 장 주네 오스카 와일드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프리드리히 니체 토마스 만 제임스 조이스 마르틴 하이데거 라이너 마리아 릴케 빌리에 드 릴라당 스탕달 프로스페르 메리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장 라신 빅토르 위고 마르셀 프루스트 조르주 바타유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아서 C. 클라크 요시다 쇼인 오시오 헤이하치로 이소베 아사이치 카야 하루카타 사이고 다카모리 야마구치 니야 쓰부라야 고키치 에토 코사부로 |
영향을 준 인물 | 이시하라 신타로 오에 겐자부로 고이케 마리코 시마다 마사히코 아사다 지로 무라카미 하루키 나카가미 겐지 나카이 히데오 야마다 에이미 오쿠이즈미 히카루 마치다 고 아베 가즈시게 히라노 게이치로 다케우치 나오코 다나카 신야 이라 세쓰나 다테노카이 회원 청년 민족파 노무라 슈스케 스즈키 쿠니오 우시지마 도쿠타로 미사와 토모 마에노 소이치로 우오타니 테쓰오 니시오 간지 니시무라 코스케 다케모토 다다오 도미오카 고이치로 히지카타 다쓰미 미야자키 마사히로 이타사카 쓰요시 싯코 구사부네 아쿠 마사히코 헨리 스콧 스토크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데이비드 보위 장자크 버넬 폴 슈레이더 비요크 앙드레 피에르 드 망디아르그 보리스 아쿠닌 에드워드 리모노프 |
수상 | |
수상 내역 | 신초사 문학상(1954년) 기시다 희곡상(1955년) 요미우리 문학상(1956년, 1961년) 주간 요미우리 신극상 (1958년) 포르멘토르 국제 문학상 2위 (1964년, 1967년) 마이니치 예술상(1964년) 문부성 예술제상(1965년) 프랑스 투르 국제 단편 영화제 극영화 부문 2위 (1965년) |
작품 | |
데뷔 작품 | " - 아키히코의 어린 추억" (1938년) 꽃이 만발한 숲(1941년)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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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925년 1월 14일, 도쿄시 요쓰야구 나가즈미정 2번지(현 도쿄도 신주쿠 요쓰야 4정목 22번)에서 아버지 히라오카 아즈사와 어머니 시즈에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다타로가 지어준 '기미타케(公威)'라는 이름은, 사다타로의 은인이자 동향 출신 토목공학자 후루이치 고이 남작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1082][1083][1080]
조부 사다타로는 효고현 출신으로 도쿄대학 법학부 졸업 후 내무성 관료를 거쳐 가라후토청 장관 등을 역임했다.[1089] 조모 나쓰코는 에도 막부 와카도시요리였던 나가이 나오유키의 후손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도 혈연이 있었다.[1088][1090] 작가 나가이 가후와는 먼 친척 관계였다.[1092]
미시마 유키오(본명: 히라오카 기미타케)는 어린 시절 할머니 나쓰코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1094] 나쓰코는 기미타케를 부모에게서 데려와 직접 양육하며, 식사와 놀이, 사용하는 언어까지 엄격하게 관리했다.[1081][1083] 자가중독으로 거의 죽을 뻔했던 기미타케는 병약한 체질 때문에 더욱 과보호적인 교육을 받았다.[1081][1094] 하지만 가부키,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즈미 교카 등 나쓰코가 좋아했던 것들은 훗날 기미타케의 문학적 소양에 영향을 주었다.[1096][1097]
1931년 학습원 초등과에 입학한 기미타케는 시나 하이쿠 등을 발표하며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1103] 세계동화집, 천일야화, 오가와 미메이, 스즈키 미에키치 등의 동화와 소년구락부 등을 즐겨 읽었다.[1103][1104] 허약한 체질 때문에 '양초', '퍼런색(アオジロ)'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1095][1106]
1937년 학습원 중등과에 진학한 기미타케는 문예부에 들어가 작문 〈춘초초――초등과 시절의 추억〉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활자화된 작품을 남겼다. 국어 담당 이와다 구로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문학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1083] 와일드, 다니자키 준이치로, 레몽 라디게 등을 읽기 시작했다.[1104]
1938년 처음으로 단편소설 〈수영――아키히코의 유치한 추억〉을 발표했다.[1114] 가부키와 노 관람을 통해 일본 전통 예술에 심취하게 되었다.[1116][1117]
1939년 조모 나쓰코가 사망하고, 시미즈 후미오가 국어 담당이 되면서 헤이안 왕조 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1116][1119]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가운데, 기미타케는 파멸적 심정을 담은 시 〈마가고토〉를 썼다.[1120]
1940년 문예부 위원으로 선출된 기미타케는 호리 다쓰오 문체의 영향을 받은 단편 〈다미에가라스〉를 발표했다. 선배 아즈마 후미히코와 문학적 교류를 시작했다.[1095][1124] 소년 시절 장 콕토, 릴케, 토마스 만, 고이즈미 야쿠모, 니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카하라 주야, 미야자와 겐지, 무로 사이세이, 사토 하루오, 호리 다쓰오, 야스다 요주로, 가지 모토지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모리 오가이의 희곡, 조루리, 《만엽집》, 《고사기》, 《겐지모노가타리》 등 다양한 문학 작품을 탐독했다.[1095][1116][1124][1125][1126][1127]
1941년, 아버지 히라오카 아즈사가 농림성 수산국장에 취임했다. 문학에 몰두하는 아들을 나무라며 원고지를 찢는 아버지와의 갈등이 있었다.[365] 같은 해, 중등과 5학년이 된 기미타케는 일본낭만파 계열 국문학 잡지 『문예문화』에 소설 〈꽃 피는 숲〉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시미즈 후미오의 제안으로 '미시마 유키오'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되었다.[382]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기미타케는 〈이미 시기는 늦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흥분에 휩싸였다.[388]
1942년 학습원 고등과 문과 을류(독일어)에 진학한 미시마는 독일어 교사 Robert Schinzinger|로베르트 신칭거de에게 독일어를 배웠다.[356] 일본낭만파의 호다 요시로, 렌다 요시아키, 이토 시즈오 등의 영향을 받아 시와 소설, 수필을 발표했다.[405]
1943년 학습원 보인회 총무부 총무간사가 되었다.[1159] 직접 쓰고 연출한 극 ‘머지않아 방패와’를 상연했다.[1130][1160] 하스다 젠메이와 후지 마사하루를 통해 작품집 출판을 준비했다.[1161] 영국과 미국과의 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미시마는 "미국과 같은 열약하등한 문화의 나라, 그깟것과 싸워 질까보냐"라며 신성한 일본 고대정신의 승리를 기원하였다.[1167] 베니토 무솔리니에게는 호감을, 아돌프 히틀러에게는 혐오감을 느꼈다.[1168][1169] 재학징집연기임시특례가 공포되어 문과계 학생의 징병유예가 정지되었으나, 빠른년생이었던 미시마는 해당되지 않았다.[1111]
1944년 징병검사를 받고 제2을종으로 합격했으나, 폐침윤 오진으로 즉일귀향 명령을 받았다.[1183] 이 경험은 미시마에게 평생의 콤플렉스와 죽음에 대한 관념을 안겨주었다.[1207][1185][1208] 같은 해 9월, 학습원 고등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1188] 처녀단편집 《꽃이 만발한 숲》이 출판되었다.[1134]
1945년 나카지마 비행기 고이즈미 제작소에 근로동원되어 소설 〈중세〉를 썼다.[1199][1200]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옥음방송을 들으며 종전을 맞이했다.
종전 후, 미시마는 학습원 은사 시미즈 후미오에게 "우리 문학사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전하며 문학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1216] 하스다 젠메이의 자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1178][1179] 누이동생 미쓰코의 죽음과, 친구의 여동생이자 연인이었던 미타니 쿠니코의 결혼은 미시마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1115][1222]
1946년 쇼와 천황의 '인간선언'과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회견 사진에 대해 "어째서 의관속대 차림의 어사진(御写真)으로 하지 않았을까" 하고 중얼거렸다.[1106] 천황제를 공격하는 저널리즘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며 "저 따위 말은 필경에는 세상에서 받아들여 줄 리가 없다"며 강하게 단언하였다.[1106]
GHQ 점령하의 일본에서 일본낭만파는 전범 문학가로 규탄받았다. 미시마는 '스무 살에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하며, 전후에는 '누구에게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무능한 대학생'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초조감을 느꼈다.[1116]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처음 방문하여 〈중세〉와 〈담배〉 원고를 보여주며 문학적 지도를 부탁했다.[1116][1233]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담배〉를 가마쿠라 문고의 잡지 〈인간〉에 추천하여 게재를 성사시켰다.[1240] 이를 계기로 미시마는 가와바타와 평생에 걸친 사제 관계를 맺게 되었다.[1241]
1947년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소토오리히메 전설을 소재로 한 〈가루왕자와 이토히메〉를 발표했다.[1265] 신바시의 불탄 건물에 있던 신문사 신석간에서 하야시 후사오를 처음 만났다.[1266][1267]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미시마 유키오가 〈연초〉와 〈중세〉의 원고를 들고 자신을 찾아왔을 때, 〈연초〉를 읽고 가마쿠라 문고의 잡지 《인간》 편집장 기무라 도쿠조에게 게재를 결정했다.[1240] 〈연초〉는 1946년 6월호부터 발표되어 미시마가 전후 문단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고, 이후 가와바타와 평생에 걸친 사제 관계와 같은 강한 인연의 기초가 되었다.[1241] 미시마는 가와바타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가와바타 상(川端さん)'이라고 불렀으며, 책을 증정할 때에는 반드시 '님(様)'을 붙여 썼다.[1242] 이는 미시마가 가와바타를 '자신을 세상에 내보내주신 유일한 대은인', '평생 잊지 않을 분'으로 존경했기 때문이다. 가와바타는 미시마의 첫 장편 소설인 《도적》의 각 장과 〈중세〉를 친척처럼 퇴고하고 지도하며 대학생인 미시마에게 이바지했다.[1243][1244][1245] 미시마의 재능을 알아본 가와바타는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당시 무명이었던 학생 작가 미시마의 작품을 거절한 우스이 요시미와 나카무라 미쓰오와는 달리, 가와바타는 새로운 재능 발굴에 뛰어나고 이질적인 신인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1234][1239] 가와바타의 '신인 발견의 명인'이라는 별칭은 미시마를 후원함으로써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1234][1239]
1951년부터 금색(禁色)을 연재하며 동성애를 소재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571] 아사히 신문 특별 통신원 자격으로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나 파르테논 신전과 안티노우스상을 보며 고대 그리스의 '육체와 지성의 균형'에 감명을 받았다.[366][574]
1953년 카미시마를 방문하여 어촌을 배경으로 한 소설 파도소리를 구상했다.[578][579] 1954년 《파도소리》를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제1회 신초사 문학상을 수상했다.[569]
1966년 방패의 모임(楯の會)을 만들어 우익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581] 1970년 11월 25일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에서 쿠데타를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모리타 마사카쓰와 함께 할복 자살했다.
2. 1. 출신
1925년(다이쇼 14년) 1월 14일, 도쿄시 요쓰야구 나가즈미정 2번지(현 도쿄도 신주쿠 요쓰야 4정목 22번)에서 아버지 히라오카 아즈사(당시 30세)와 어머니 시즈에(당시 19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079][1080] 체중은 약 2,438그램이었다.[1081][1080] '기미타케(公威)'라는 이름은 조부 사다타로가 지어준 것으로, 사다타로의 은인이자 동향 출신 토목공학자 후루이치 고이 남작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1082][1083][1080]집은 셋집이었지만 같은 번지 내에서 가장 크고 꽤 넓은 2층집이었으며, 가족(부모와 친가 조부모) 외에 식모 6명과 서생, 남자 하인이 있었다.[1084] 3년 후 태어난 여동생 미쓰코, 5년 후 태어난 남동생 치유키가 있었다.[1079]
아버지 아즈사는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1등으로 합격했지만, 면접관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어 대장성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하고 농상무성(기미타케 탄생 직후 농림성으로 변경)에 근무했다.[1085] 기시 노부스케와는 일고, 제대 동창이었다.[1086][1087]
어머니 시즈에는 가가번 번주 마에다 가문을 섬기던 유학자 하시 가문 출신이다. 외조부는 도쿄 가이세이중학교의 다섯 번째 교장으로 한학자 하시 겐조였다.[1083][1088]
조부 사다타로는 효고현 이나미군 시카타촌 오오아자 가미토미키(현 효고현 가코가와시 시카타정 가미토미키)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제국대학 법과대학(현 도쿄대학 법학부) 졸업 후 내무성에 들어가 내무 관료가 되었다. 1893년(메이지 26년) 무가의 딸인 나가이 나쓰와 결혼하여 후쿠시마현 지사, 가라후토청 장관 등을 역임했지만, 의옥사건으로 실각했다(훗날 무죄 판결).[1089]
조모 나쓰코(호적명: 나쓰)는 나가이 이와노조(대심원 판사)와 다카(히타치 시시도번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타카가 측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나쓰코의 외가 쪽 조부 마쓰다이라 요리타카를 거슬러 올라가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어진다.[1088][1090] 나쓰코는 12세부터 17세까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에게 예의범절을 배우며 섬겼다. 나쓰코의 조부는 에도 막부 와카도시요리인 나가이 나오유키였다.[1083][1088]
작가 나가이 가후의 나가이 가문과 나쓰코의 친가 나가이 가문은 같은 일족으로, 나쓰코의 9대 조상 나가이 나오마사의 이복형 나가이 쇼지키가 가후의 12대 조상에 해당한다.[1092] 기미타케는 가후와 풍모가 닮은 아즈사를 몰래 '나가이 가후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088][1093][1080]
조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 미시마 유키오는 3대에 걸쳐 같은 대학의 학부를 졸업한 관료 가문이었다. 에도 막부의 중심을 맡았던 나가이 나오유키의 행정·통치에 관련된 정치는 히라오카 가문의 혈통과 의식에 깊이 침투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1071]
2. 2. 유년기와 "시를 쓰는 소년"의 시대
미시마 유키오(본명: 히라오카 기미타케)는 어린 시절 할머니 나쓰코의 강한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1094] 나쓰코는 기미타케가 태어난 지 49일 만에 "2층에서 아기를 키우는 것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부모에게서 데려와 직접 양육했다. 어머니 시즈에가 젖을 먹일 때조차 회중시계로 시간을 잴 정도였다.[1081][1083] 나쓰코는 좌골신경통으로 자주 앓아 누웠고, 히스테릭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으며, 예의범절에 매우 엄격했다.[1083][1094]
기미타케는 자나 먼지떨이를 휘두르는 것을 좋아했지만, 나쓰코는 이를 빼앗고 소리가 나는 장난감이나 남자아이들이 하는 놀이도 금지했다.[1083][1094] 대신 얌전한 여자아이들을 놀이 상대로 골라주고 여성어를 사용하게 했다.[1094][1095] 1930년(쇼와 5년) 1월, 5세의 기미타케는 자가중독으로 거의 죽을 뻔했다.[1081][1083] 병약한 기미타케를 위해 나쓰코는 식사와 오후 간식(오야쓰)을 엄격히 제한하고, 귀족적인 취향의 과보호적인 교육을 했다.[1081][1094] 하지만 가부키,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즈미 교카 등 나쓰코가 좋아했던 것들은[1096] 훗날 기미타케가 소설가 및 극작가로서의 소양을 기르는 데 도움을 주었다.[1097]
1931년(쇼와 6년) 4월, 기미타케는 학습원 초등과에 입학했다. 다이묘 화족 의식이 강했던 나쓰코의 의향에 따라 학습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1079][1098] 히라오카 가는 평민 계급이었기 때문에 화족 중심의 학습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소개자가 필요했고, 나쓰코의 백부 마쓰다이라 요리야스(우에노 동조궁 신관, 미시마 소설 《신관》·《호색》·《괴물》·《영주》의 모델[1099])가 보증인이 되어주었다.[1098] 당시 학습원은 노기 마레스케가 원장을 맡았던 영향으로 질실강건(質實剛健)을 중시했고, 만주사변 발발 등으로 사회 분위기가 전쟁으로 기울면서 교내도 강경파가 우세했다.[1100][1101] 급우였던 미타니 마코토는 당시 기미타케에 대해 "작은 체구"에 "봄햇살을 맞으며 달려나가던" 뒷모습을 기억한다고 회상했다.[1102]
기미타케는 초등과 1, 2학년 때부터 시나 하이쿠 등을 초등과 기관지 《쇼자쿠라》(小ざくら)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세계동화집, 인도동화집, 《천일야화》, 오가와 미메이, 스즈키 미에키치, 스트린드베리의 동화, 기타하라 하쿠슈, 프랑스 근대시, 마루야마 가오루나 구사노 신페이의 시, 고단샤 《소년구락부》(야마나카 미네타로, 미나미 요이치로, 다카가키 히토미 등), 《스피도 타로》 등을 즐겨 읽었다.[1103][1104] 자가중독과 감기 때문에 학교를 자주 빠졌고, 4학년 무렵에는 폐문 림프선염을 앓아 몸이 나른해지고 자세가 나빠져 교사에게 자주 야단맞았다.[1083][1095]
초등과 3학년 무렵, 작문 〈후쿠로후〉의 "후우로후, 귀녀는 숲의 여왕입니다."라는 내용에 대해 국어 담당 스즈키 히로시 선생에게 "제재는 현재에서 취하도록"이라고 주의받는 등, 국어(작문)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1105] 주치의의 방침으로 햇빛을 쬐는 것을 금지당했던 기미타케는 허약하고 창백한 체질 때문에 '양초', '퍼런색(アオジロ)'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095][1106][1102] 초등과 6학년 무렵에는 "어이 퍼렁이, 너 불알도 똑같이 퍼런색이겠지"라고 놀림받기도 했다.[1102][1107]
기미타케가 6학년이던 1936년(쇼와 11년) 2월 26일에는 2.26 사건이 일어났다. 수업은 1시간 만에 중단되었고, 어떤 일이 있어도 "학습원 학생으로서의 긍지"를 잊지 말라는 훈시를 받고 귀가했다.[1108] 6월에는 히노마루를 "비상한 위엄과 존귀함이 빛나고 있다"고 표현한 작문 〈우리 국기〉(わが国旗)를 썼다.[1109]
1937년(쇼와 12년) 학습원 중등과에 진학한 4월, 부모님의 이사에 맞춰 조부모 슬하를 떠나 시부야구 다이센정 15번지(현 신주쿠 쇼토 2정목 5번 8호)의 셋집에서 부모, 여동생, 남동생과 함께 살게 되었다.[1079][1095] 나쓰코는 일주일에 한 번 기미타케가 묵으러 오는 것을 약속시켰고, 밤낮으로 기미타케의 사진을 안고 울었다고 한다.[1081] 허약했던 기미타케는 중등과에서도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옥상에서 가방을 떨어뜨리거나(그 일로 만년필 3자루가 부러졌다), 급식 접시에 간장을 뿌려 채소 샐러드를 먹을 수 없게 만드는 등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1110]
기미타케는 문예부에 들어가 같은 해 7월 학습원 교내지 《보인회잡지》 159호에 작문 〈춘초초――초등과 시절의 추억〉(春草抄――初等科時代の思ひ出)을 발표하여, 자신의 산문이 처음으로 활자화되었다. 중등과에서 국어 담당이 된 이와다 구로(하이쿠회 '목서회(木犀会)'를 주재한 시인)에게 작문과 단가의 재능을 인정받아 성적도 올라갔다.[1083] 이후 《보인회잡지》에는 중등과, 고등과 약 7년간(중등과는 5년간, 고등과 3년은 9월 졸업) 수많은 시, 산문 작품, 희곡을 발표하게 되었다.[1079][1111] 11, 12세 무렵 와일드에 경도되었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레몽 라디게 등을 읽기 시작했다.[1104]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여 중일전쟁으로 번졌다. 그해 가을, 8세 연상의 고등과 3학년 문예부원 보조 도시타미와 만나 문학적 교류를 맺었다.[1112][1113] 보조는 처음 만났을 때 기미타케에 대해 "인파를 헤치고 화사한 소년이 모자를 고쳐 쓰면서 나타났다. 목이 가늘고, 피부는 새하얬다. 깊이 눌러쓴 학모 차양 깊숙이 커다란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히라오카 기미타케입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고 회상했다.[1112]
1938년(쇼와 13년) 1월경, 처음으로 단편소설 〈수영――아키히코의 유치한 추억〉(――秋彦の幼き思ひ出)을 써서 같은 시기의 〈좌선이야기〉(座禅物語)와 함께 3월의 《보인회잡지》에 발표했다.[1114] 이 무렵 학교 검도의 조조한계고(早朝寒稽古)에 솔선하여 기상하던 기미타케는 연습 후 제공되는 미소시루가 참을 수 없이 맛있다고 어머니에게 자랑하는 등[1083] 중등과에 올라가서는 점차 신체가 튼튼해지기 시작했다.[1115] 같은 해 10월 조모 나쓰코에 의해 처음으로 가부키(《가나데혼 추신구라》)를 관극하고, 외가 쪽 조모 하시 토미(橋トミ)에 의해 노(아메노이와토의 신놀이를 제재로 한 《미와》)를 관람하게 되었다.[1116][1117] 이 체험 이후 기미타케는 가부키와 노 관극에 심취하게 되었고,[1116] 17세부터는 관극 기록 〈히라오카 기미타케 극평집〉(시바이 일기, 芝居日記)을 쓰기 시작했다.[1118]
1939년(쇼와 14년) 1월 18일 조모 나쓰코가 궤양 출혈로 고이시카와구 가고정(현 분쿄구 혼코가고메)의 야마카와 내과의원에서 사망했다.(향년 62세)[1079] 같은 해 4월, 전년부터 학습원에 전임하고 있던 시미즈 후미오가 국어 담당이 되어 국문법, 작문 교사에 추가되었다. 이즈미 시키부 연구가이기도 한 시미즈는 미시마의 평생 스승이 되어 헤이안 왕조 문학에 눈을 뜨게 했다.[1116][1119] 같은 해 9월 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일으키고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1940년(쇼와 15년) 1월, 훗날의 작풍을 방불케 하는 파멸적 심정을 담은 시 〈마가고토〉(「ごと)를 썼다.[1120] 같은 해 어머니 시즈에를 따라 시모오치아이에 사는 시인 가와지 료코를 방문하여 이후 몇 번인가 가르침을 받았다.[1121][1122] 시즈에의 아버지 하시 겐조와 가와지 료코는 친구 사이였다.[1086] 같은 해 2월 야마지 간코가 주재하는 월간 하이쿠 잡지 《구치나시》()에 하이쿠나 시가를 발표했다. 전년부터 별명인 퍼렁이, 덜 익은 호리병박, 흰둥이를 비꼬아 스스로 '세이조()'라는 별호를 지어,[1123] 1년 반 동안 《구치나시》에 하이쿠와 시가를 투고했다.[1079]
같은 해 6월에는 문예부 위원에 선출되어(위원장은 보조 도시타미), 11월에 호리 다쓰오 문체의 영향을 받은 단편 〈다미에가라스〉(彩絵硝子)를 교내지 《보인회잡지》에 발표했다. 이 작품을 읽은 동교 선배 아즈마 후미히코로부터 처음으로 편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편지 왕래가 시작되었다.[1095][1124] 마찬가지로 선배인 도쿠가와 요시야스와도 교우를 시작했다. 아즈마는 결핵을 앓아 오모리구(현 오타구) 덴엔초우 3-20의 자택에서 요양하면서 무로 사이세이, 호리 다쓰오의 지도를 받으며 창작 활동을 하고 있었다.[1124] 한편, 보조 도시타미와의 교류는 점차 소원해졌고, 이때의 복잡한 심정은 훗날 《시를 쓰는 소년》에서 그려지게 된다.[1113]
이 소년 시절에 라디게, 와일드, 다니자키 준이치로 외에도 장 콕토, 릴케, 토마스 만, 고이즈미 야쿠모, 에드거 앨런 포, 릴라당, 모랜드, 보들레르, 메리메, 조이스, 프루스트, 카로사, 니체, 이즈미 교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시가 나오야, 나카하라 주야, 다나카 후유지, 다치하라 미치조, 미야자와 겐지, 이나가키 다루호, 무로 사이세이, 사토 하루오, 호리 다쓰오, 이토 시즈오, 야스다 요주로, 가지 모토지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고호리 도라히코, 모리 오가이의 희곡, 조루리, 《만엽집》, 《고사기》, 《마쿠라노소시》, 《겐지모노가타리》, 《이즈미 시키부 일기》 등도 애독하게 되었다.[1095][1116][1124][1125][1126][1127]
1941년(쇼와 16년) 1월 21일, 아버지 평오카 아즈사가 농림성 수산국장에 취임하여 약 3년간 독신으로 근무했던 오사카에서 귀경했다.[378] 문학에 몰두하는 아들을 나무라며 원고지를 닥치는 대로 찢어버렸다.[365] 공위(히라오카 키미마사)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눈에는 눈물을 글썽였다.[365]
같은 해 4월, 중등과 5학년으로 진급한 공위는 7월에 「꽃 피는 숲」을 완성하고 국어 교사인 시미즈 후미오에게 원고를 우편으로 보내 비평을 요청했다.[381] 시미즈는 「그때까지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것이 격렬하게 불러일으켜지는」 듯한 감명을 받고, 자신이 소속된 일본낭만파 계열 국문학 잡지 『문예문화』 동인들(렌다 요시아키, 이케다 츠토무, 쿠리야마 리이치)에게도 보여주기 위해 시즈오카현 이즈 슈젠지온천 신아이 여관에서 하룻밤 숙박을 겸한 편집 회의에 그 원고를 가지고 갔다.[382] 「꽃 피는 숲」을 읽은 그들은 「천재」가 나타났다며 서로 축하하며 동지에 게재를 즉결했다.[382]
그때 동지의 독자층이 전국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아들의 문학 활동을 반대하는 히라오카 아즈사의 반응 등, 아직 16세인 공위의 미래를 걱정하여 본명 「히라오카 키미마사」가 아닌 필명을 사용하게 되었다.[382] 시미즈는 「당분간 히라오카 키미마사의 실명을 숨기고, 그의 성장을 조용히 지켜보고 싶다 ― 이것이 우연히 일치한 동인들의 의향이었다」라고 합숙 회의를 회상하고 있다.[382] 필명을 생각하고 있을 때, 시미즈들의 머릿속에 「미시마」를 지나온 것과 후지의 백설을 보고 「유키오(雪男)」가 떠올랐다.[382]
귀경 후, 시미즈가 필명 사용을 제안하자, 공위는 처음에는 본명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이고, 「이토 사치오(伊藤左千夫)」와 같은 만요풍의 이름을 원했다.[383][384] 결국 「유키오(由紀雄)」로 하고, 「雄」자가 너무 무겁다는 시미즈의 조언으로 「'''미시마 유키오'''」가 되었다.[382][383][384] 「유키(由紀)」는 대전제의 신사에 사용하는 신곡을 바치기 위해 선택된 두 개의 국군 중 첫 번째 것을 가리키는 「유키」(斎忌, 悠紀, 由基)의 글자에서 따왔다.[387]
릴케와 호다 요시로의 영향을 받은 「꽃 피는 숲」은[388]、『문예문화』쇼와 16년 9월호부터 12월호까지 연재되었다.[364] 제1회 편집 후기에 렌다 요시아키는 「이 어린 작가는, 그러나 '''유구한 일본 역사의 자식이다'''. 우리보다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이미 성숙한 것의 탄생이다」라고 격찬했다.[389][390] 이 찬사는 공위의 의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317][390] 이 9월, 공위는 수필 「惟神之道(가미나가라노미치)」를 노트에 적고, 〈지상과 고텐겐(高天原)의 현수교〉가 되는 惟神之道の 근본 이념인 〈마코토고코로(誠心)〉를 〈인간 본연의 것이면서 일본인에게 있어 가장 현저하다〉이며, 〈풍요로운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 창조의 정신이다〉라고 신도에 대한 깊은 경도를 보였다.[391]
중일전쟁의 확대와 일독이 삼국 동맹 체결로 영국과 미국과 대립을 심화시킨 일본은, 이 해에 실시된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 이후, 점차 전면전 돌입이 짙어지지만, 공위는 〈이미 시기는 늦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했다.[388] 12월 8일에 실시된 말레이 작전과 진주만 공격으로 일본은 마침내 영국과 미국, 네덜란드 등의 연합국과 개전하고,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개전 당일, 교실에 온 마술부 선배로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열심히 하자」라고 감격한 어조로 말을 걸려 공위도 〈말할 수 없는 흥분〉에 휩싸였다.[392]
1942년(쇼와 17년) 1월 31일, 공위는 전년 11월부터 쓰기 시작했던 평론 「왕조 심리 문학 소사」를 학습원 도서관 현상 논문으로 제출했다(이 논문은 다음 해 1월에 입선). 3월 24일, 석차 2번으로 중등과를 졸업하고, 4월에 학습원 고등과 문과 을류(독일어)에 진학했다. 공위는 체육과 물리의 「중상」을 제외하면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다.[394] 운동은 서툴렀지만 고등과에서의 교련 성적은 항상 「상」(甲)이었고,[395] 교관으로부터 근성이 있다며 정신력을 칭찬받은 것을 공위는 자랑으로 여겼다.[365]
독일어는 Robert Schinzinger|로베르트 신칭거de에게 배웠으며,[356] 다른 교사에는 사쿠라이 카이치, 신세키 요조, 노무라 유이치(1957년 동궁대부 재직 중 사망) 등이 있었다.[365][396] 후년 도널드 킨이 독일에서 강연을 했을 때, 청중으로 있던 신칭거가 일어서서 「나는 히라오카 군의(독일어) 선생이었다. 그가 최고였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독일어는 능숙했다.[356][365][397]
일본군이 각지에서 승리를 거듭하고 있던 같은 해 4월, 대동아 전쟁 개전의 고요한 감동을 엄숙하게 적은 시 「대조」를 『문예문화』에 발표했다.[398] 같은 해 5월 23일, 문예부 위원장으로 선출된 공위는 7월 1일에 히가시 후미히코와 도쿠가와 요시야스(도쿄제국대학 문학부에 진학)와 함께 동인지 『'''아카에'''』(『赤絵』)를 창간하고, 「오토와 마야」를 게재했다.[361] 잡지명의 유래는 시가 나오야의 『만력 아카에』에서 따왔다.[399] 공위는 그들과의 우정을 깊게 하고, 병상의 히가시와는 더욱 서신을 주고받았다.[400] 같은 해 8월 26일, 할아버지 테이타로가 사망(향년 79세)했다.[338] 공위는 시 「만가 일편」을 지었다.[401]
같은 해 11월, 학습원의 강연 요청으로 시미즈 후미오와 함께 호다 요시로를 만나, 이후 여러 번 방문했다.[366][402][403][404] 공위는 호다 요시로, 렌다 요시아키, 이토 시즈오 등 일본낭만파의 영향 하에 시와 소설, 수필을 동인지 『문예문화』에 발표했고, 특히 렌다가 설파하는 「황국 사상」「야마토고코로」「미야비」의 마음에 감명받았다.[405] 공위가 「미노모노즈키(実の物月)」, 수필 「이세 이야기의 일」을 게재한 쇼와 17년 11월호에는, 렌다가 「신풍련의 마음」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이것은 렌다에게는 구마모토 제제고의 몇 년 선배인 모리모토 타다시가 저술한 『신풍련의 마음』(국민평론사, 1942년)의 서평이지만, 이 글과 모리모토의 저서를 읽었던 공위는 후년 1966년(쇼와 41년) 8월에 신풍련의 땅인 구마모토를 방문하여 모리모토 타다시(구마모토 상과대학 교수)를 만나게 된다.[406][407]
참고로, 미시마 사후 무라마츠 고가 후미시게로부터 들은 이야기로서, 미시마가 중등과 졸업 전에 제1고등학교 입시 시험을 치러 불합격했다는 설도 있지만,[408] 미시마가 중등과 5학년 때인 9월 25일자 히가시 후미히코에게 보낸 서한에는 고등과는 문과 을류(독일어)로 한다고 전하는 기재가 있으며, 미시마 자신은 그대로 문예부의 기반이 형성되어 있던 학습원 고등과에 진학할 의향이었던 것이 나타나 있다.[408][409] 또한 미시마가 제1고등학교를 응시했는지 여부는 어머니 후미시게의 증언만으로 사실 관계가 불명확하기 때문에, 전집의 연표에도 보충으로 「학습원 재학 중에는 다른 학교의 응시는 할 수 없었다는 설도 있다」고 덧붙여져 있다.[410]
2. 3. '미시마 유키오'의 탄생
1943년(쇼와 18년) 2월 24일, 히라오카 기미타케는 학습원 보인회 총무부 총무간사가 되었다.[1159] 같은 해 6월 6일 보인회 춘계문화대회에서는 그가 직접 쓰고 연출한 극 ‘머지않아 방패와’(4막 4장)가 상연되었다. 원래는 번역극을 기획했으나 시국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야마나시 가쓰노신 학습원 원장으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해, 기미타케가 직접 창작극을 쓰게 되었다.[1130][1160] 3월부터는 《문예문화》에 〈세세에 남기리〉(世々に残さん)를 발표했다.[1114] 같은 해 5월, 기미타케는 《꽃이 만발한 숲》 등의 작품집 출판을 위해 이토 시즈오와 상담하고 있던 하스다 젠메이에게서 교토에 사는 후지 마사하루를 소개받았다. 신인 '미시마'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던 후지도 출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1161]같은 해 6월, 한 달에 한 번 도쿄로 출장을 오던 후지 마사하루는 기미타케를 만나 니시스가모에 사는 의사이자 시인인 하야시 후지마의 집에도 데려갔다.[1162] 그 후 수년간 기미타케는 하야시와 문학적 교류를 하는 등 친하게 지냈다.[1162][1163] 8월에 후지는 기미타케의 책 초판 출판에 대해 "사람들이 안 한다면 내가 진력해서라도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고,[1164] 하스다 역시 "국문학 가운데에서 이야기되고 있던 영(霊)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기미타케를 칭찬했다.[1165] 하스다는 기미타케에게 엽서를 보내 "시우(詩友) 후지 마사하루가 네 소설의 책을 걸맞은 서점에서 출판해야 함에 열심으로 생각하는바, 만일 괜찮다면 그 이의 호의를 받지 않겠나"라며 작품 원고를 후지에게 보낼 것을 권했다.[1166]
영국과 미국과의 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기미타케는 "미국과 같은 열약하등(劣弱下等)한 문화의 나라, 그깟것과 싸워 질까보냐 라고 생각합니다",[1167] "미와 영의 저 우인들, 속인들과 우리들은 영원히 싸워야만 하겠죠. 속된 정신이 세계를 덮는 순간, 그때야말로 세계의 멸망입니다."라고 신성한 일본 고대정신의 승리를 기원하였다.[1168] 또한 기미타케는 동맹국 이탈리아의 최고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에게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게는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1168][1169]
같은 해 10월 8일, 편지를 주고받던 아즈마 후미히코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하자,[1170][1171] 기미타케는 조사를 올렸다.[1095] 아즈마의 죽음으로 동인지 《적회》는 2호로 폐간되었다. 후미히코의 아버지 아즈마 후에히코에 따르면, 미시마는 죽을 때까지 후미히코의 기일에 매년 빠짐없이 묘소 참배를 왔다고 한다.[1172] 참고로, 이해 기미타케는 스기나미구 나리무네의 호리 다쓰오의 집을 방문했으며,[1173] 호리로부터 "심플해져라"라는 조언을 받았다.[1174]
당시의 시정은 국민에게 "의례의 강요"를 하여, 전몰병사의 추도식 등의 일이 있을 때마다 오케스트라가 떠들썩하게 〈바다에 가면〉을 연주하고, 확성기로 "말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御託宣をならべる)" 기풍이 있었다.[1175] 기미타케는 이러한 흐들갑스러움에 "마치 아사쿠사 언저리 어느 변두리에 있는 극장의 시국편승극 그 자체같음에, 모독도 그 정도가 극하여, 분만(憤懣)함에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비판, 그저 마음 고요히 "전몰용사에 기념"이라고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친구인 도쿠가와 요시야스에게 전했다.[1175]
그해 10월에는 재학징집연기임시특례가 공포되어 문과계 학생은 징병유예가 정지되었다.[1111] 기미타케는 빠른년생이라 해당되지 않았으나 내년 20세가 되는 동급생의 대부분(다이쇼 13년 5월 이후의 동년출생자)은 12월까지 입대가 의무화되었다(학도출진).[1111] 이에 앞서 10월 21일 비가 오는 가운데, 메이지 신궁 외원 경기장에서 성대한 '출진학도장행회'가 개최되어 기미타케는 그 뉴스에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귀기울였다.[1111]
같은 해 10월 25일 하스다 젠메이는 소집영장을 받고 구마모토에 가기 전, "일본의 앞일을 네게 맏기마"라고 기미타케에 전언하고,[1176][1177] 이튿날 육군중위의 군장과 순백의 장갑을 착용하여 궁성 앞 광장에서 황거를 배례했다.[1178][1179] 기미타케는 일본의 장래와 미적 천황주의(존황)를 하스다로부터 맡겨진 모양이 되었다.[1178][1180][1181] 후지 마사하루 역시 전장으로 향하는 출병 전에 "급작스럽게 부르심을 받아 미시마 군보다 일찍 가게 되었는바, 때마침 운좋게 일수를 기록하여 남기오니, 좋은 사람과 좋은 친구가 되어 한 해를 마음기쁘게 보냈던가"라는 일수를 기미타케에게 보냈다.[1163] 같은 해 12월 징병적령임시특례가 공포되어 징병적령이 19세로 낮아지게 되었다.[1111] 기미타케는 내년으로 바싹 다가선 자신의 입대를 각오하였다.[1111][1182]
1944년(쇼와 19년) 4월 27일, 기미타케도 본적지 효고현 인나미군 시카타촌 촌장 발신의 징병검사통달서를 받아 5월 16일 효고현 가코군 가코가와정(현 가코가와시)의 가코가와정 공회당에서 징병검사를 받았다.[1183] 공회당에 지금도 남아 있는 소나무 아래에서, 십관(약 40 킬로그램)의 모래를 넣은 쌀가마니를 들어올리는 등의 검사도 행해졌다.[1086][1130]
본적지에서 가까운 가코가와에서 징병검사를 받은 것은 "시골 부대에서 검사를 받는 편이 그 가냘픔이 돋보여 징병되지 않고 끝날지 모른다 하는 아버지의 지혜"에서였으나,[1081] 결과는 제2을종으로 합격을 받아 그 부대에 입대하는 것이 되었다(소집영장은 익년 2월).[1111] 징병합격을 알게 된 어머니 시즈에는 슬피 울었으며, 기대가 무너진 아버지 아즈사도 낙심하였다.[1081] 급우 미타니 마코토 등 동급생의 대부분이 특별간부후보생으로서 지원하였으나, 기미타케는 일개 병졸로서 응소할 각오를 정하였다.[1081][1106] 이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하루라도 길게 1행이라도 많이 쓸 수 있는 편을 기미타케가 선택한 것이라고 미타니는 생각하였다.[1106]
징병검사 합격 후 귀경길인 5월 17일, 오사카의 스미요시 중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던 이토 시즈오를 방문하여 북지출정 전에 일시 귀향하고 있던 후지 마사하루의 집을 같이 방문하였다.[1111][1184] 5월 22일 유작이 되리라 생각한 처녀출판본 《꽃이 만발한 숲》의 서문을 의뢰하고자 이토 시즈오의 집을 찾아갔으나, 그에게 나쁜 인상을 주는 바람에 "학교에 3시경 히라오카 옴. 석식을 내어줌. 속인(俗人) 가미호리 옴. 사과를 대접함. 9시경까지 있었음. 역까지 전송함" 하고 일기에 쓰여졌다.[1184][1185] 다만, 이토는 뒷날 《꽃이 만발한 숲》 헌정의 답례로 만날 기회가 너무 적다는 느낌이 듦을 기미타케에 전언하고,[1186] 전후에는 《곶에서의 이야기》를 읽고서 기미타케에 대한 평가를 재고하게 된다.[1184][1185][1187]
1944년(쇼와 19년) 9월 9일, 학습원 고등과를 수석으로 졸업. 졸업생 총대가 된다.[1102][1188] 졸업식에서는 쇼와 천황이 임석하여,[1102][1189] 궁내성으로부터 천황으로부터의 은사의 은시계를 배수받았으며, 주일독일대사로부터 독일문학 원서 3권(나치 하켄크로이츠가 새겨짐)을 받았다.[1115][1188][1189][1191]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학습원장 야마나시 가쓰노신 해군대장과 더불어 궁내에 참내하여 사은회에서 화족회관으로부터 도서 수 권을 받았다.[1188]
대학은 문학부에 진학한다는 선택지도 염두에 있었으나, 아버지 아즈사의 설득에 따라 동년 10월 1일에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독일법학)에 입학(추천입학)하였다.[1115][1192] 이곳에서 배운 단도 시게미쓰의 형사소송법강의의 '철저한 이론의 진행'에 매혹되어 숙달된 법학의 이론성이 소설이며 희곡의 창작에 있어 더없이 유용하게 쓰여 훗날 미시마는 아버지 아즈사에 감사를 표했다.[1193][1194] 아버지는 기미타케가 문학에 열중하는 것을 반대하여 몇 번이고 집필활동을 방해하였으나, 아들을 법학부에 진학시킴에 따라, 미시마의 문학이 일본문학사상에 희유한 이론성을 가지게 된 것은 아즈사의 공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1115]
출판통제에 따른 혹독한 종이부족의 와중, '이승의 유품'으로써 《꽃이 만발한 숲》의 간행에 기미타케는 분주하였다.[1134][1195] 동년 10월 처녀단편집 《꽃이 만발한 숲》(장정은 친구 도쿠가와 요시야스가 맡아봄)이 칠장서원에서 출판되었다.[1134] 기미타케는 17일에 전달받은 견본책 1권을 먼저 입대 직전의 미타니 마코토에게 우에노역에서 헌정하였다.[1102] 자식의 문학활동에 반대하고 있던 아버지 아즈사였으나, 곧 소집을 당하게 될 기미타케를 위하여, 11월 11일 우에노(시타야구) 이케노하타(현 다이토구 이케노하타)의 중화요리점 우월장에서 출판기념회를 개최해줬으며, 어머니 시즈에, 시미즈 후미오 등 《문예문화》의 동인, 도쿠가와 요시야스, 하야시 후지마 등이 출석하였다.[1111][1115][1196]
서점에 진열된 《꽃이 만발한 숲》은, 당시 학생이던 요시모토 다카아키며 아쿠타가와 히로시 따위도 사서 읽어 각고의 문예부며 문학청년들 사이에서 학습원에 '미시마'라는 조숙한 천재소년이 있다는 둥의 소문이 퍼져갔다.[1130][1197][1198] 하지만 기미타케가 동인으로 재적한 일본낭만파의 《문예문화》도 물자부족이며 기업정비의 흐름 속에서 잡지통합요청으로 인하여 8월을 기하여 통권 70호로 종간되고 만다.[1111]
1945년(쇼와 20년), 결국 전황은 핍박하여 대학의 수업을 중단되고, 기미타케는 1월 10일부터 '도쿄제국대학 근로보국대'로서, 군마현 닛타군 오타정의 나카지마 비행기 고이즈미 제작소에 근로동원되어 총무부 조사과에 배속되었다.[1199] 사무작업에 종사하면서 기미타케는 소설 〈중세〉를 써나간다.[1116][1200] 이전, 야스다 요주로에 요쿄쿠의 문체에 대하여 질문했을 때에 기대한 낭만주의적 답변을 얻지 못했던 기억을 되살려 〈중세〉를 엮어 쓰는 것으로 인공적인 호화로운 언어에 의한 절망감에 뒷받침되는 종말관의 미학의 작품화에 도전하여,[1116] 나카가와 요이치의 후의를 얻어 제1회와 제2회의 도중까지를 잡지 《문예세기》에 발표하였다.[1114][1116][1201]
생일인 1월 14일, 예기치 않게 귀경하게 되어 어머니 시즈에가 구워준 핫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다(이 추억은 후년, 유작이 되는 《천인오쇠》에 그려지게 된다).[1202] 2월 4일에 입영통지의 전보가 자택에 다다랐다. 기미타케는 '천황폐하만세'라고 끝맺은 유서를 쓰고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남겼다.[1115][1203][1204] 나카지마 비행기 고이즈미 제작소를 떠나게 되었으나, 군용기 공장은 전년부터 본격화되고 있던 미군에 의한 일본본토공습의 우선목표였다. 기미타케가 입대검사를 받은 10일, 고이즈미 제작소는 미군의 폭격기에 의해 대공습을 받아 결과적으로 미시마의 응소는 재해를 면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1205]
동년 2월 6일, 머리를 마구 흩뜨리며 우는 어머니 시즈에의 전송을 받고서, 기미타케는 아버지 아즈사와 함께 효고현 미야아이촌 다카오카창사(廠舎)에 출입하였다.[1111][1115] 감기로 몸져누워있던 어머니로부터 옮은 기관지염에 의한 현기증과 고열의 증상을 보이고 있던 기미타케는, 체재하고 있던 시카타촌의 지인의 집(好田光伊 댁)에서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1111][1115] 해열제를 복용하여 일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10일 입대 검사 당시 알몸뚱이로 있는 바람에 추위로 인하여 고열이 된 기미타케는, 햇병아리 군의로부터 러셀이 들린다는 말을 듣고, 혈침도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어 폐침윤(결핵의 3기증상)을 진단받아 즉일귀향 명령을 받는다(이후에 도쿄의 병원의 정밀검사로 오진임이 드러났다).[1081][1101][1115][1206] 이 부대의 병사들은 필리핀으로 파견되어 다수가 사상, 거의 전멸당했다.[1101]
전사를 각오한 셈이었음에도, 의사의 문진에 동조하여 과장된 병상보고를 답한 자신의 이때의 양가감정이 이후, 미시마의 안에서 자문자답을 되풀이하게 만든다.[1081] 이 신체의 허약함으로 인해 생겨난 심약함이나 행동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있다"는 의식이 미시마에 있어 평생의 콤플렉스가 되어,[1207] 이후의 그에게 복잡한 생각(언제나 죽음의 관념을 의식하는 사생관이나, 전후는 '여생'이라는 감각)을 안겨주게 된다.[1185][1208]
아즈사가 기미타케와 함께 자택으로 돌아오니 일가는 넘쳐나는 기쁨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였으나, 기미타케는 고열과 여독으로 인하여 홀로 멍한 꼴로 "특공대에 들어가고 싶었다"라는 말을 진지하게 중얼거렸다고 한다.[1115] 기미타케는 그 후 4월, 미타니 마코토 앞으로 "당신과 함께 장래에는, 일본의 문화를 짊어지고 일어설 의기를 품습니다만, 당신이 봉공을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내가 터를 다져놓고 있을 생각입니다"라고 전언하며, 가미카제 특공대에 대하여 뜨거운 마음을 기록하였다.[1209] 병역은 즉일귀향을 받았지만서도, 일시 유예를 받은 것에 불과한지라 다시금 소집될 가능성이 있었다.[1067][1101]
기미타케는 구리야마 리이치를 통하여 노다 우타로(《문예》의 편집장)을 알게 되어, 전시하에 단 하나 남은 문예지 《문예》에 〈서커스〉와 〈예수게이의 사냥〉을 투고, 그중에서 〈예수게이의 사냥〉이 채용되었다.[1210] 처녀단편집 《꽃이 만발한 숲》은 노다를 통하여 3월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헌정되었다.[1211][1212] 가와바타는 《문예문화》의 기미타케의 작품군이며 〈중세〉를 읽어보았었다.[1116][1211] 군마현의 마에바시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미타니 마코토를, 미타니의 가족과 함께 위문중이던 3월 10일의 밤, 도쿄는 대공습을 당했다(도쿄대공습). 초토화된 도쿄에 서둘러 돌아와 기미타케는 가족의 무사를 확인하였다.[1115]
1945년(쇼와 20년) 5월 5일부터 도쿄보다도 위험한 가나가와현 고자군 야마토의 해군고자공창에 근로동원되었다.[1111] 종말관의 가운데 기미타케는 《이즈미 시키부 일기》, 《우에다 아키나리 전집》, 《고사기》, 《일본가요전집》, 《무로마치 시대 소설집》, 《하가쿠레》 따위의 고전, 이즈미 교카, 예이츠 등을 남독하였다.[1116][1213] 6월 12일부터 수일간, 가루이자와에 소개(疎開)하고 있던 애인 미타니 구니코(三谷邦子, 친구 미타니 마코토의 누이동생)를 만나러 가서 난생처음으로 키스를 하였다.[1081][1101] 귀경 후 7월, 전화가 악화되어 공습이 세차지는 한편 기미타케는 유작이 되리라 예상하고 있던 〈곶에서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1114][1116]
1945년(쇼와 20년) 8월 6일, 9일에 잇달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기미타케는 "세계는 끝났다"며 허무적인 기분이 되어 일부러 상공에서 눈에 띄는 하얀 셔츠를 입고 걸어다녔다.[1081][1214] 10일, 기미타케는 고열과 두통으로 인하여 고자공창에서, 일가가 소개하고 있던 고토쿠지의 친척의 집에 귀가하여 매실 엑기스를 홀짝거리면서 자리에 누웠다.[1215] 8월 15일, 종전을 맞이하여 라디오에서 옥음방송을 듣던 와중, "이제부터는 예술가의 세상이니까, 역시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고 아버지 아즈사는 말했다.[1215]
2. 4. 전시하의 청춘·대학 진학과 종전
미시마 유키오(본명: 히라오카 기미타케)는 종전 직후, 학습원 은사인 시미즈 후미오에게 "옥음 방송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우리 문학사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라고 전했다.[1216] 학습원 후배에게는 "절망하지 말고, 지극히 순수하고 지극히 높으며 지극히 아름다운 것을 위해 생기발랄하게 있어주십시오. (중략) 우리들은 임금님의 말씀을 받았으므로 우리들의 문학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시심(詩心)은 개인의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맑고도 드높게, 산뜻하게 삶을 살아주십시오. 미흡하나마 저 역시 살아남아 싸움을 계속하겠습니다."라고 썼다.[1217]미타니 마코토에게는 "제 자신 한몸 안에서라도 최대한 아름다운 질서를 구축해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전후의 문학, 예술의 부흥과, 이에 질서를 부여함에 미흡하나마 전력을 다하여 공헌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후에 대한 결의를 보냈으며,[1218] 9월 자신의 노트에 〈전후어록〉으로서 "일본적 비합리의 온존만이 백년 후 세계문학에 공헌하게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1219]
〈예수게이의 사냥〉을 채용한 《문예》의 노다 우타로에게도 "문학이란 북극성과 같이 질서와 도의를 그 본질로서 전제로 하는 신께서 행하시는 일이므로, 그 신께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봉사함으로써 우리들의 싸움은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라고 열띤 마음을 전했으나,[1220] 전시중에 유작으로 삼을 각오로 쓴 〈곶에서의 이야기〉를 노다로부터 "아쿠타가와상이나 문단에나 맞을 작풍"이라고 엉뚱한 오해를 사서 "약삭빠른" 작품이라고 거절당하고 만다.[1210][1221] 이로 인하여 기미타케는 한 사람 몫을 하는 작가로서의 장래 설계에 여러가지로 고심하게 된다.[1221][1130]
기미타케가 사숙(私淑)하고 있던 하스다 젠메이는 말레이 반도에서 육군중위로서 종전을 맞이하였으나, 1945년 8월 19일에 주둔지 말레이 반도의 조호르바루에서 천황을 우롱한 연대장 나카조 도요마 대좌를 군용권총으로 사살하고 자신도 관자놀이에 권총을 쏴 자결했다(몰년 41세).[1178][1179] 기미타케는 이 부고를 이듬해 여름에야 알게 되었다.[1179]
1945년 10월 23일, 누이동생 미쓰코가 장티푸스로 17세에 급사하여[1115][1222] 기미타케는 소리높여 울었다.[1222][1223] 같은 해 11월 말 혹은 12월경, 6월 가루이자와 방문 후 구니코와 결혼을 미타니가로부터 타진받았을 때 머뭇거린 기미타케는, 구니코가 은행원 나가이 구니오(부친 나가이 마쓰조)와 혼약했음을 전해듣게 되었다.[1221][1222] 1946년 5월 5일 구니코와 나가이는 결혼하여 기미타케는 그날 자택에서 만취하였다.[1173] "여동생의 죽음과, 그 여성의 결혼, 두 가지의 사건이, 내게 이후의 문학적 정열을 추진하는 힘"이 되었다.[1224] 같은 해 9월 16일, 기미타케는 구니코와 길에서 조우하여, 그날의 일을 일기와 노트에 기록하였다.[1225][1226]
이러한 구니코와의 일은 훗날 자전적 소설 《가면의 고백》에서 자세히 쓰여지게 된다.[1226]
1946년 1월 1일, 쇼와 천황은 '인간선언' 조서를 발표했다. 1945년 9월에는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 최고사령기관 GHQ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쇼와 천황이 회견하여 그 사진이 신문에 게재되었다. 기미타케는 이에 대하여 친우인 미타니 마코토에게 "어째서 의관속대 차림의 어사진(御写真)으로 하지 않았을까" 하고 중얼거렸다고 한다.[1106] 또한 미타니와 잿더미가 된 하치코 앞을 거닐던 무렵에는 천황제를 공격하기 시작한 저널리즘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으며 "저 따위 말은 필경에는 세상에서 받아들여 줄 리가 없다"며 강하게 단언하였다 한다.[1106] 미타니는 그 무렵의 기미타케의 말에는 "논리없는 격렬함이 있었다"고 회고한다.[1106]
이 시기에 사이토 기치로라는 일고 문예부 위원으로서 기미타케가 17세 무렵 친교가 있던 인물이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을 총서 형태로 출판하는 계획에 관여하여 기미타케의 시도 총서의 한 권으로 삼아보고 싶다는 말을 건넸다.[1227][1228] 기미타케는 이에 기쁘게 응하여 그 시집명을 《풍요의 바다》라고 하는 안을 회신하였으나,[1229] 용지 입수 문제 등의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했다.[1227][1228]
2. 5. 종전 후의 고민과 초조
GHQ 점령하의 일본에서는 전범으로 낙인찍힌 군인들이 처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극동국제군사재판), 요직에 있던 각계 인물들이 공직추방되었다. 매스컴과 출판업계에도 “프레스 코드”라 불리는 검열이 행해져 일본을 찬미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전시 중 미시마가 속해 있던 일본낭만파의 야스다 요주로, 사토 하루오, 그 주변의 나카가와 요이치와 하야시 후사오 등은 전후 좌익 문학가나 기회주의 작가 등으로부터 전쟁 협력의 “전범 문학가”로 규탄받았다.[1230][1231][1232] 일본 낭만파 내에서 ‘천재인 체하던 소년’이었던 미시마는 ‘스무 살에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하며, 전후에는 ‘누구에게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무능한 대학생’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초조감을 느꼈다.[1116]전쟁의 혼란으로 『문예세기』의 발간은 전후에도 중단된 채, 〈중세〉는 중간까지밖에 발표되지 않았다.[1116] 미시마는 종전 전 가와바타 야스나리로부터 〈중세〉와 문예문화에 발표된 작품을 읽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지만,[1211] 가와바타가 그 작품을 칭찬했다는 소문도 들었다.[1116] 그것을 구원의 줄기로 삼고, ‘나를 격려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던 미시마는 〈중세〉와 신작 단편 〈담배〉 원고를 가지고, 제국대학의 겨울방학 중이던 1946년(쇼와 21년) 1월 27일, 가마쿠라 니카이도에 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집을 처음 방문했다.[1116][1233] 신중하고 예의를 중시하는 미시마는 노다 우타로의 소개장도 지참했다.[1210][1234]
미시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대해,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제부터 일본의 슬픔, 일본의 아름다움만을 노래하겠다.”——이는 한 줄기 피리의 슬픔처럼 들려 내 가슴을 울렸다.’라고 말하며,[1235]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서정가〉 등에 현저한, 단순히 서정적·감각적인 것만이 아닌 〈영혼과 육의 일치〉, 〈한낮의 신비의 세계〉에도 깊은 공감을 가지고 있었다.[1130][1236][1237] 그러한 심령적인 것에 대한 감성은 미시마의 〈꽃이 만발한 숲〉이나 〈중세〉에도 보이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 세계와 통하는 것이었다.[1130]
같은 해 2월, 미시마는 지쿠마쇼보의 잡지 〈전망〉 편집장 우스이 요시미를 방문하여 8편의 원고(꽃피는 숲, 중세, 서커스, 곶에서의 이야기, 채색유리, 담배 등)를 가져갔다.[1116][1238][1239] 우스이 요시미는 그다지 좋아하는 작풍이 아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일종의 천재다”라며 〈중세〉를 채택하려 했다. 그러나 고문인 나카무라 미쓰오는 “말도 안 돼, 마이너스 150점(120점이라고도)이다”라며 거절하여 원고는 폐기되었다.[1238][1239] 실망한 미시마는 ‘이제 성실하게 공부해서 관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1116]
한편, 〈담배〉를 읽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2월 15일, 자신이 간부를 맡고 있는 가마쿠라 문고 발행의 잡지 〈인간〉 편집장 기무라 도쿠조에게 원고를 보여주었고, 게재가 결정되었다.[1240] 〈담배〉는 6월호에 발표되었고, 이것이 미시마의 전후 문단 진출의 발판이 되었으며, 이후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평생에 걸친 사제 관계와 같은 강한 유대의 기초가 형성되었다.[1241]
하지만 그 관계는 소설 수법(구성 등)의 지도나 비판을 받는 제자와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시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나를 세상에 내보내 주신 유일한 은인”, “평생 잊지 못할 분”이라는 강한 마음에서, 존경하는 가까운 사람으로서 “가와바타 상(川端さん)”이라고 불렀으며, 책을 증정할 때도 반드시 “님(様)”이라고 썼다.[1242]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미시마가 착수했던 첫 장편(도적)의 각 장과 〈중세〉를 진심으로 검토하고 지도하여, 대학생이기도 한 그를 도왔다.[1243][1244][1245]
우스이 요시미와 나카무라 미쓰오가 거의 무명의 대학생 작가 미시마의 작품을 거절한 가운데, 새로운 재능 발굴에 능하고, 이질적인 신인에게 관용적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미시마를 후원함으로써, “신인 발견의 명수”라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성은 더욱 강해졌다.[1234][1239] 직업상 많은 신인 작가와 접해 온 기무라 도쿠조도 처음 만난 몇 분 만에 “압도적인 자질을 감지”한 것은 가토 슈이치와 미시마 두 사람뿐이라고 하며,[1240] 미시마는 조언할수록 놀라운 “재능의 빛을 과시”하며 성장해 갔다고 한다.[1232]
그러나 당시, 셋집에 살던 미시마의 집(히라오카 가)은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었고, 경제 상황이 곤궁했다.[1246] 아버지 히라오카 아즈사가 전전인 1942년(쇼와 17년)부터 일하고 있던 일본가스용목탄주식회사(10월부터 일본땔나무주식회사)는 종전으로 기능 정지 상태였다.[1247] 미시마는 장래 작가로서 성공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가난이 문학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상업적인 집필에 빠지지 않도록) 생활 유지를 위해 대학에서의 법학 공부에도 힘을 쏟았다.[1246][1116] 히라오카 아즈사는 종전 당일에 일시적으로 아들이 작가가 되는 것에 이해를 보였지만, 역시 안정된 대장성 관리가 되기를 바랐다.[1115]
어느 날, 기무라 도쿠조는 미시마와 제국대학 도서관 앞에서 만나 잔디밭에서 1시간 정도 담소를 나눈 후, 강의를 들으러 가는 미시마를 따라가 교실을 엿보았다.[1240] 기무라 도쿠조는 “미시마 군이 들어간 26번 교실을 들여다보니, 성실한 우등생처럼 미리 자리를 잡아 두었던 것 같다. 강단 정면 두 번째 줄쯤에 앉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게으른 학생이었던 나 같은 생각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회고했다.[1240]
같은 해 여름, 하스다 젠메이가 종전 때 자결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미시마는 11월 17일 시미즈 후미오, 나카가와 요이치, 구리야마 리이치, 이케다 쓰토무, 사쿠라이 다다요시, 아베 로쿠로, 이마다 데쓰오와 함께 세이조 대학 소심료(素心寮)에서 ‘하스다 젠메이를 추모하는 모임’을 열고,[1248][1249] ‘'''고대의 눈을 사랑하던 그대는 그 몸에 고대를 나타내어 구름 속에 숨어 버렸으니 나는 근대에 남겨져 헛되이 靉靆|아이타이일본어의 눈을 그리워하며 그 몸은 막막한 티끌에 묻히려 하는구나'''라는 시를 하스다 젠메이에게 바쳤다.[1250]
전후 그들과 거리를 둔 이토 시즈오는 불참했고,[1251][1252] 하야시 후사오도 하스다 젠메이의 죽음을 “화가 난다”라고 비판했고, 사토 하루오는 하스다 젠메이를 감쌌다.[1179][1253] 미시마는 추모회 다음 날, 시미즈 후미오에게, ‘황국화 향기 나는 모임에서 하스다 젠메이의 영혼도 함께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옛날 문예문화 동인의 모임을 신들의 모임에 비유했던 때를 그리워하며 되새겼습니다. 이런 모임을 몇 번이나 거듭하면서 문예문화 부흥의 기회를 기다리고 싶지만 어떻습니까?’라고 편지를 보냈다.[1254]
패전 전후에 걸쳐 쓴 〈곶에서의 이야기〉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조언에 따라 고단샤의 〈군상〉에 투고하여 11월호에 무사히 발표되었다.[1255] 이때 미시마는 일본옷 차림에 하카마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1256] 〈인간〉 12월호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로부터 『장군요시히사공 훙서기』를 빌려 다듬은 〈중세〉가 전편 게재되었다.[1114][1243]
당시 미시마는 부모와 동거했지만, 생활비를 지원받지 않고 자신의 원고료로 생활을 꾸리고, 남동생 히라오카 지유키에게도 용돈을 주고 있었던 것이 2005년(헤이세이 17년)에 발견된 “회계 일기”(쇼와 21년 5월부터 쇼와 22년 11월까지 기재)에서 밝혀졌다.[1130][1257] 이 돈의 지출 기록은 작가로서 독립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1130]
2. 6. 가와바타 야스나리와의 만남
1947년(쇼와 22년) 4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소토오리히메 전설을 소재로 한 〈가루왕자와 이토히메〉가 《군상》에 발표되었다. 미시마는 전년인 1946년(쇼와 21년) 9월 16일에 우연히 재회한 유부녀 나가이 쿠니코(결혼 전 성은 미타니)와 그해 11월 6일에 전화 통화를 한 후, 몇 차례 만나거나 친구들과 무도장에 다니기도 했다.[1081][1257] 그러나 미시마는 마음속으로 "생활의 황량한 공백감"이나 "시대의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1222][1265]같은 해 6월 27일, 미시마는 신바시의 불탄 건물에 있던 신문사 신석간에서 하야시 후사오를 처음 만났다.[1266][1267]
2. 7. 학생 작가 시대와 다자이 오사무와의 대면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미시마 유키오가 〈연초〉와 〈중세〉의 원고를 들고 자신을 찾아왔을 때, 〈연초〉를 읽고 가마쿠라 문고의 잡지 《인간》 편집장 기무라 도쿠조에게 게재를 결정했다.[1240] 〈연초〉는 1946년 6월호부터 발표되어 미시마가 전후 문단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고, 이후 가와바타와 평생에 걸친 사제 관계와 같은 강한 인연의 기초가 되었다.[1241]미시마는 가와바타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가와바타 상(川端さん)'이라고 불렀으며, 책을 증정할 때에는 반드시 '님(様)'을 붙여 썼다.[1242] 이는 미시마가 가와바타를 '자신을 세상에 내보내주신 유일한 대은인', '평생 잊지 않을 분'으로 존경했기 때문이다. 가와바타는 미시마의 첫 장편 소설인 《도적》의 각 장과 〈중세〉를 친척처럼 퇴고하고 지도하며 대학생인 미시마에게 이바지했다.[1243][1244][1245]
미시마의 재능을 알아본 가와바타는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당시 무명이었던 학생 작가 미시마의 작품을 거절한 우스이 요시미와 나카무라 미쓰오와는 달리, 가와바타는 새로운 재능 발굴에 뛰어나고 이질적인 신인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1234][1239] 가와바타의 '신인 발견의 명인'이라는 별칭은 미시마를 후원함으로써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1234][1239]
2. 8. 전후 문학
1951년 1월부터 미시마는 ‘20대의 총결산’으로서 ‘자신 내면의 모순과 대립물’의 ‘대화’를 그리겠다는 각오로, 고대 그리스 조각과 같은 미소년과 노작가가 등장하는 소설 금색(禁色) (제1부)을 『군상(群像)』에 연재하기 시작했다.[571] 동성애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문단에서 찬반 양론의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569] 같은 해 11월 10일 신초사(新潮社)에서 『금색 제1부』로 출간되었다.[556] 그 사이에도 미시마는 여러 편의 단편과 중편소설 「나츠코의 모험(夏子の冒険)」 등을 여러 잡지에 발표하고, 첫 번째 평론집 『사냥과 사냥감(狩と獲物)』도 출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364][556]이전부터 ‘일생에 한 번만이라도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싶습니다’라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말했던 미시마는,[572] 자신 안의 과도한 감수성을 혐오하여 ‘육체적 존재감을 가진 지성’을 원했고, 넓은 세계를 갈망했다.[366] 마침 이 무렵, 아버지 아즈사(梓)의 일고(一高) 시절 옛 친구이자 아사히 신문 출판국장인 카지 류이치(嘉治隆一)로부터 해외 여행을 제안받았고, 미시마는 뜻밖의 제안에 기꺼이 승낙했다.[366]
당시 GHQ 점령하에 일반인의 해외 여행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573] 미시마는 같은 해 12월 25일, 아사히 신문 특별 통신원으로 약 반년간의 첫 세계 일주 여행을 위해 요코하마항에서 프레지던트 윌슨(プレジデント・ウィルソン)호를 타고 출항했다.[574] 첫 목적지인 하와이로 향하는 배 위에서 ‘태양과 악수했다’는 미시마는 일광욕을 하면서 ‘자신의 개조’를 생각하기 시작했다.[366]
하와이에서 북미(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뉴욕, 플로리다, 마이애미, 산후안), 남미(리우데자네이루, 상파울루), 유럽(제네바, 파리, 런던, 아테네, 로마)을 여행하는 동안 특히 미시마를 매료시킨 것은 그리워하는 땅인 그리스 아테네와 로마의 바티칸 미술관에서 본 안티노우스상이었다.[366][574] (자세한 내용은 아폴론의 잔#견문록의 개요 참조)
고대 그리스의 ‘육체와 지성의 균형’에 대한 인간 의지, 밝은 고전주의에서 고독을 치유받은 미시마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과 자신이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의 동일한 윤리 기준’을 발견하고, 이듬해인 1952년 5월 10일 하네다 공항(도쿄 국제공항)에 귀국했다.[366][574] 이 세계 여행기는 『아폴론의 잔』으로 정리되어 10월 7일 아사히 신문사에서 출간되었다.[364][556]
여행 전부터 예정했던 「금색(禁色)」 (제2부)의 연재를 귀국 후인 8월부터 『문학계(文學界)』에서 시작한 미시마는 여행 직후의 ‘기념 소설’을 쓰는 것을 피하고, 이즈반도의 이마이하마 해수욕장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익사 사건을 소재로 한 「한여름의 죽음」을 『신초(新潮)』 10월호에 발표했다.[575]
여행 전에 완성했던 희곡 「탑파소녀(卒塔婆小町)」는 미시마가 해외에 체류 중이던 2월에 문학좌(文学座)에 의해 초연되었다.[364][375] 이 작품은 「한단(邯鄲)」「비단 북(綾の鼓)」에 이어 『근대노가쿠집(近代能楽集)』의 세 번째 작품이 되었고, 미시마의 희곡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성공작이 되었다.[321] 이로써 미시마는 극작가로서도 진정한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569]
미시마는 그리스에서 받은 감동의 연장선으로 고대 그리스의 연애 이야기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바탕으로 일본 어촌의 이야기를 구상했다.[577][578] 모델이 될 섬을 찾는 것을 예전 농림성(농림수산성)에 있었던 아버지 아즈사(梓)에게 의뢰한 미시마는[365] 후보지 중에서 『만엽집』의 가마쿠라(歌枕)와 고전 문학의 명소와 가까운 미에현의 카미시마(神島)를 선택했다.[579]
1953년 3월, 도바항에서 카미시마에 간 미시마는 야츠시로 신사(八代神社), 가미시마 등대, 파친코 가게 한 곳도 없고 술집도 없는 섬 주민들의 생활과 자연, 예제(例祭), 신사(神事), 어항, 역사와 풍습, 어부들의 일을 취재하고, 8월 말부터 9월에도 다시 방문하여 태풍과 해녀 등에 대해 취재했다.[578][579] 카미시마 주민들은 처음에 낯선 창백한 얼굴의 마른 미시마의 모습을 보고 요양을 위해 섬에 온 사람으로 오해했다고 한다.[579]
이 섬을 무대로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는 동안 다듬어진 「금색(禁色)」 제2부의 연재를 병행한 미시마는 9월 30일 『금색 제2부』를 출간했고, 남색(男色)의 세계를 그린 『금색』이 완결되었다.[364][556] 12월에는 소년 시절부터 친숙했던 가부키 대본에 처음 도전하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원작 소설을 개작한 가부키 『지옥변(地獄変)』을 나카무라 우에몽(6대) 주연으로 상연했다.[364]
이세만에 떠 있는 작은 섬에 사는 건강하고 소박한 젊은 남녀의 순애를 그린 신작 장편소설 『파도소리』는 이듬해인 1954년 6월 10일 신초사에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곧 도호에서 영화화되어 미후네 도시로의 특별 출연(선장 역)도 캐스팅되었다.[569] 미시마는 이 작품으로 제1회 신초사 문학상(新潮社文学賞)을 수상했는데, 이것이 미시마에게 있어 첫 문학상이었다.[569]
이를 계기로 2년 후에는 미국에서도 『파도소리』(The Sound of the Waves)의 영역본이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미시마의 존재를 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이 되었다.[573] 11월에는 미시마 오리지널 창작 가부키 『정어리장수 사랑의 히키아미(鰯売恋曳網)』가 초연되어 여유를 느끼게 하는 희극(ファルス)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569] 이 작품은 이후 오랫동안 상연되는 인기 가부키가 되었다.[321]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파도소리』의 밝은 세계와 대조적인 종전 직후 청년의 타락과 고독을 그린 『잠긴 방(鍵のかかる部屋)』『급정거(急停車)』, 미시마의 가쿠슈인 시절 자전적 소설 『시를 쓰는 소년(詩を書く少年)』, 소년 시절 동경했던 라디게를 소재로 한 『라디게의 죽음(ラディゲの死)』, ‘키쿠타 지로(菊田次郎)라는 작가의 분신’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화산의 휴가(火山の休暇)』『죽음의 섬(死の島)』)의 마지막 작품 『여행의 묘비명(旅の墓碑銘)』도 발표되었다.[364][580]
2. 9. 할복 자살
1966년 미시마는 방패의 모임(楯の會)이라는 민병대를 만들어 우익 정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방패회는 무장 투쟁 훈련을 했고, 이는 일본의 신우익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68년에는 〈문화방위론〉을 썼는데, 여기서 미시마는 일본 문화의 정신과 '미의 총람자(總攬者)'인 천황을 지키려면 무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주장이 현행 헌법 아래에서도 실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미시마는 죽기 직전 마지막 작품인 《풍요의 바다 4부작》을 완성했다.[581][582]1969년 우익 운동가 에토 고사부로의 자결에 큰 영향을 받은 미시마는, 1970년 11월 25일 방패회 대원 4명과 함께 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에 들어가 총감을 인질로 잡고 쿠데타를 촉구하는 '이치가야 연설'을 했다. 그러나 자위대원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연설을 끝내고 모리타 마사카쓰와 함께 할복 자살했다. 이 사건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3. 사후의 영향
미시마의 자살은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시대착오적인 행위로 인식되었지만, 일본의 보수주의 운동에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266] 그의 자살 이후, 함께 할복한 모리타 마사카즈의 동료들을 중심으로 신우익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들은 자민당 정권과 미국의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우익 세력의 한 축으로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266] 또한, 미시마는 일본 전후 가장 중요한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으로 인식되고 있다. 소설 40권, 희곡 18권, 단편집 20권, 수필 20권 이상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266]
그의 죽음은 헝가리와 폴란드 등지에서 반소련 운동이 격화되던 시기, 정부에 저항하던 지식인들과 학생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266] 헝가리의 시인 이스트베인 바린토는 그의 죽음을 추모하며 'Harakiri'라는 시를 지었으며, 프랑스의 시인 엠마누엘 로텐은 미시마의 영화 '우국'을 보고 감명받아 '사랑과 죽음의 의식'이라는 시를 발표하며 '미시마에게 바치는 시'라는 부제를 달았다.[266]
4. 수상
5. 주요 작품
미시마 유키오는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다.
'''소설'''
- 꽃이 만발한 숲 (1941)
- 담배 (1946)
- 도적 (1948)
- 가면의 고백 (1949)
- 사랑의 갈증 (1950)
- 순백의 밤 (1950)
- 푸른 시절 (1950)
- 금색(禁色) (1951-1953)
- 파도 소리 (1954)
- 금각사 (1956)
- 비틀거리는 미덕 (1957)
- 교쿄의 집 (1959)
- 향연은 끝나고 (1960)
- 우국 (1961)
- 아름다운 별 (1962)
- 오후의 예항 (1963)
- 비단과 명찰 (1964)
- 풍요의 바다, 4부작 (1965-1970)
- 1부, 봄의 눈
- 2부, 분마
- 3부, 새벽의 사원
- 4부, 천인오쇠
'''희곡'''
'''평론'''
'''기타'''
- 薔薇刑|바라케이|장미형일본어 (사진집, 1963)
미시마는 일본 전통극인 노극과 가부키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노극의 주제와 등장인물을 차용하면서도 현대적인 배경과 독특한 해석을 통해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270]
연도 (초연) | 일본어 제목 | 영어 제목 | 장르 |
---|---|---|---|
1950 | 邯鄲 (戯曲)|간단 (기쿄쿠)|간단일본어 | The Magic Pillow | 노극 |
1951 | 綾の鼓 (戯曲)|아야노쓰즈미 (기쿄쿠)|아야노쓰즈미일본어 | The Damask Drum | 노극 |
1952 | 卒塔婆小町 (戯曲)|소토바코마치 (기쿄쿠)|소토바코마치일본어 | Komachi at the Gravepost | 노극 |
1954 | 葵の上 (戯曲)|아오이노우에 (기쿄쿠)|아오이노우에일본어 | 아오이 상 | 노극 |
1954 | 鰯賣戀曳網|이와시우리코이노히키아미|이와시우리코이노히키아미일본어 | 'The Sardine Sellers Net of Love'' | 가부키 |
1955 | 班女 (戯曲)|한뇨 (기쿄쿠)|한뇨일본어 | The Waiting Lady with the Fan | 노극 |
1955 | 芙蓉露大内実記|후요쓰유오우치짓키|후요쓰유오우치짓키일본어 | The Blush on the White Hibiscus Blossom: Lady Fuyo and the True Account of the Ōuchi Clan영어 | 가부키 |
1957 | 道成寺 (戯曲)|도조지 (기쿄쿠)|도조지일본어 | 도조지 사찰 | 노극 |
1959 | 熊野 (戯曲)|유야 (기쿄쿠)|유야일본어 | 유야 | 노극 |
1960 | 弱法師 (戯曲)|요로보시 (기쿄쿠)|요로보시일본어 | The Blind Young Man | 노극 |
1969 | 椿説弓張月 (歌舞伎)|진세쓰유미하리즈키 (가부키)|진세쓰유미하리즈키일본어 | A Wonder Tale: The Moonbow or Half Moon (like a Bow and arrow setting up): The Adventures of Tametomo영어 | 가부키 |
5. 1. 소설
미시마 유키오는 다양한 소설을 집필했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264]- 꽃이 만발한 숲 (1941)
- 담배 (1946)
- 도적 (1948)
- 가면의 고백 (1949)
- 사랑의 갈증 (1950)
- 순백의 밤 (1950)
- 푸른 시절 (1950)
- 금색(禁色) (1951-1953)
- 파도 소리 (1954)
- 금각사 (1956)
- 비틀거리는 미덕 (1957)
- 교쿄의 집 (1959)
- 향연은 끝나고 (1960)
- 우국 (1961)
- 아름다운 별 (1962)
- 오후의 예항 (1963)
- 비단과 명찰 (1964)
- 풍요의 바다, 4부작 (1965-1970)
- 1부, 봄의 눈
- 2부, 분마
- 3부, 새벽의 사원
- 4부, 천인오쇠
1954년에는 『파도소리』로 신초사 신초상을 수상했고,[264] 1956년에는 『금각사』로 요미우리 신문사 요미우리상 장편소설 부문을 수상했다.[264] 1964년에는 『비단과 통찰』로 마이니치 신문사 마이니치 예술상을 수상했다.
5. 2. 희곡
미시마는 노극과 가부키와 같은 일본 전통극을 위해 작품을 썼다.[270] 그는 노극의 주제, 제목, 등장인물을 현대적인 배경에 접목시켜 독특한 해석을 보여주었다.
연도 (초연) | 일본어 제목 | 영어 제목 | 장르 |
---|---|---|---|
1950 | 邯鄲 | The Magic Pillow | 노극 |
1951 | 綾の鼓 | The Damask Drum | 노극 |
1952 | 卒塔婆小町 | Komachi at the Gravepost | 노극 |
1954 | 葵の上 | 아오이 상 | 노극 |
1954 | 鰯賣戀曳網 | 'The Sardine Sellers Net of Love'' | 가부키 |
1955 | 班女 | The Waiting Lady with the Fan | 노극 |
1955 | 芙蓉露大内実記 | '''' | 가부키 |
1957 | 道成寺 | 도조지 사찰 | 노극 |
1959 | 熊野 | 유야 | 노극 |
1960 | 弱法師 | The Blind Young Man | 노극 |
1969 | 椿説弓張月 | 가부키 |
5. 3. 평론
1967년(쇼와 42년)에는 『하가쿠레 입문』, 『문화방위론』 등의 평론을 다수 발표했다. 『문화방위론』에서는 〈근송도 사이카쿠도 바쇼도 없다〉 쇼와 겐로쿠를 비웃고, 자신은 〈현하 일본의 저주받은 자〉라고 선언하는 등,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명확하게 드러냈다.[688]
5. 4. 기타
미시마 유키오는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花ざかりの森|하나자카리노모리|꽃이 만발한 숲일본어, 煙草|다바코|담배일본어, 仮面の告白|가멘노고쿠하쿠|가면의 고백일본어, 愛の渇き|아이노가와키|사랑의 갈증일본어, 禁色|긴지키|금색일본어, 潮騒|시오사이|파도 소리일본어, 금각사, 憂国|우코쿠|우국일본어, 午後の曳航|고고노에이코|오후의 예항일본어, 豊饒の海|호조노우미|풍요의 바다일본어 4부작 등이 있다. 희곡으로는 鹿鳴館|로쿠메이칸|로쿠메이칸일본어, 近代能楽集|긴다이노가쿠슈|근대노가쿠집일본어, サド侯爵夫人|사도코샤쿠후진|사드후작 부인일본어, わが友ヒットラー|와가토모힛토라|내 친구 히틀러일본어 등이 있으며, 평론으로는 小説家の休暇|쇼세쓰카노큐카|소설가의 휴가일본어, 太陽と鉄|타이요토테쓰|태양과 철일본어, 葉隠入門|하가쿠레뉴몬|하가쿠레 입문일본어, 文化防衛論|분카보에이론|문화방위론일본어 등이 있다. 사진집 薔薇刑|바라케이|장미형일본어을 발표하기도 했다.[270]미시마는 노극과 가부키 등 일본 전통극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노극의 주제와 등장인물을 차용하면서도 현대적인 배경과 독특한 해석을 통해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270]
다음은 미시마 유키오의 노극 및 가부키 작품 목록이다.
연도 (초연) | 일본어 제목 | 영어 제목 | 장르 |
---|---|---|---|
1950 | 邯鄲 (戯曲)|간단 (기쿄쿠)|간단일본어 | The Magic Pillow | 노극 |
1951 | 綾の鼓 (戯曲)|아야노쓰즈미 (기쿄쿠)|아야노쓰즈미일본어 | The Damask Drum | 노극 |
1952 | 卒塔婆小町 (戯曲)|소토바코마치 (기쿄쿠)|소토바코마치일본어 | Komachi at the Gravepost | 노극 |
1954 | 葵の上 (戯曲)|아오이노우에 (기쿄쿠)|아오이노우에일본어 | 아오이 상 | 노극 |
1954 | 鰯賣戀曳網|이와시우리코이노히키아미|이와시우리코이노히키아미일본어 | 'The Sardine Sellers Net of Love'' | 가부키 |
1955 | 班女 (戯曲)|한뇨 (기쿄쿠)|한뇨일본어 | The Waiting Lady with the Fan | 노극 |
1955 | 芙蓉露大内実記|후요쓰유오우치짓키|후요쓰유오우치짓키일본어 | The Blush on the White Hibiscus Blossom: Lady Fuyo and the True Account of the Ōuchi Clan영어 | 가부키 |
1957 | 道成寺 (戯曲)|도조지 (기쿄쿠)|도조지일본어 | 도조지 사찰 | 노극 |
1959 | 熊野 (戯曲)|유야 (기쿄쿠)|유야일본어 | 유야 | 노극 |
1960 | 弱法師 (戯曲)|요로보시 (기쿄쿠)|요로보시일본어 | The Blind Young Man | 노극 |
1969 | 椿説弓張月 (歌舞伎)|진세쓰유미하리즈키 (가부키)|진세쓰유미하리즈키일본어 | A Wonder Tale: The Moonbow or Half Moon (like a Bow and arrow setting up): The Adventures of Tametomo영어 | 가부키 |
도널드 키인은 미시마의 노극 작품 중 다섯 편을 번역하여 『다섯 편의 현대 노극』(1981)을 출간했다.[270]
1966년, 미시마는 英霊の聲|에이레이노코에|영령의 소리일본어를 발표하고 신풍련의 난을 취재하며 일본도를 구입하는 등 우익적 행보를 보였다.[406][407][675] 자위대 체험 입대를 희망하고, 방위성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요청하기도 했다.[676][677] 민족파 잡지 『논쟁저널』 창간에 관여하고, 일본학생동맹과 교류하며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받았다.[678][680]
1967년, 미시마는 자위대에 체험 입대하고 조국방위대 구상을 굳혔다. 육상자위대 조사학교와 협력하여 민병 조직 (타테노카이)을 결성했다.[672] 가라테 수련을 시작하고, 와세다대학 국방부 대표 모리타 히츠카츠를 만났다.[680] 인도 등 해외를 여행하며 소설 暁の寺|아카쓰키노테라|아카쓰키노테라일본어를 취재했다.[685]
미시마 유키오와 관련된 문학비 및 추모비는 일본 각지에 세워져 있다.
- 미에현 쓰시: 神島|가미시마|가미지마일본어 항구에 『파도 소리』 문학비가 있다.
- 시마네현 마쓰에시: 릿쇼대학 쇼난고등학교 정문 앞에 "미시마 유키오・모리타 히스카쓰 열사 숭모비"가 있다.[729]
- 효고현 가코가와시: 하치만 신사 경내에 "미시마 유키오를 추모하는 추도 위령제"가 거행되었다.[759]
-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 미야자키 키요타카 자택 정원에 "미시마 유키오 문학비"가 있다.[752][760]
- 육상자위대 타키가하라 주둔지: 제2중대 대사 앞에 추도비가 있다.[761]
- 시즈오카현 니시이즈정: 코가네자키에 『짐승들의 희롱』 문학비가 있다.[752]
-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 "미시마 유키오 신사"가 있다.[752][762]
- 효고현 가코가와시: 타마노오 지장존에 "미시마 유키오 선생 위령비"가 있다.[752][333]
- 니가타현 우오누마시: 에다오리 고개에 『가라앉는 폭포』 문학비가 있다.[763]
6. 전통 일본극을 위한 희곡
미시마는 사드 부인과 같은 현대극 외에도 노극과 가부키 등 일본 전통극 두 장르를 위해 작품을 썼다. 그는 도쿄 출신이었기 때문에 오사카를 비롯한 지방과 연관되어 있던 번라쿠 인형극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270]
미시마는 노극의 주제, 제목, 등장인물을 차용했지만, 병원이나 무도회장과 같은 현대적 배경과 그의 독특한 해석은 오랫동안 자리 잡았던 원작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도널드 키인은 『다섯 편의 현대 노극』을 번역했다.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 번역되지 않아 공식적인 영어 제목이 없으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로마자 제목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연도 (초연) | 일본어 제목 | 영어 제목 | 장르 |
---|---|---|---|
1950 | 邯鄲|간탄일본어 | The Magic Pillow | 노극 |
1951 | 綾の鼓|아야노쓰즈미일본어 | The Damask Drum | 노극 |
1952 | 卒塔婆小町|소토바 고마치일본어 | Komachi at the Gravepost | 노극 |
1954 | 葵の上|아오이노우에일본어 | 아오이 상 | 노극 |
1954 | 鰯賣戀曳網|이와시우리 고이노 히키아미일본어 | 'The Sardine Sellers Net of Love'' | 가부키 |
1955 | 班女|한조일본어 | The Waiting Lady with the Fan | 노극 |
1955 | 芙蓉露大内実記|후요노쓰유 오우치짓키일본어 | The Blush on the White Hibiscus Blossom: |Lady Fuyo and the True Account of the Ōuchi Clan일본어 | 가부키 |
1957 | 道成寺|도조지일본어 | 도조지 사찰 | 노극 |
1959 | 熊野|유야일본어 | 유야 | 노극 |
1960 | 弱法師|요로보시일본어 | The Blind Young Man | 노극 |
1969 | 椿説弓張月|진세쓰 유미하리즈키일본어 | A Wonder Tale: The Moonbow or Half Moon (like a Bow and arrow setting up): | The Adventures of Tametomo일본어 | 가부키 |
7. 영화
폴 슈레이더 감독의 영화 《미시마: 그의 삶》 (1985)은 택시 드라이버,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각본가로 유명한 폴 슈레이더의 영화이다.
8. 미시마와 관련된 서적
-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새물결 출판사)
- "금각사", 웅진출판, 허호 역.
-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에 있어서 양성대립의 구도"(제이 앤 씨, 허호 저, 일본어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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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Persona: a biography of Yukio Mishima
https://ci.nii.ac.jp[...]
[298]
웹사이트
Yukio Mishima
https://ci.nii.ac.jp[...]
[299]
웹사이트
Mishima, aesthetic terrorist : an intellectual portrait
https://ci.nii.ac.jp[...]
[300]
논문
[301]
웹사이트
みやび 三島由紀夫
http://www.movienet.[...]
[302]
웹사이트
11・25自決の日 三島由紀夫と若者たち
https://web.archive.[...]
2021-08-13
[303]
뉴스
'Mishima: The Last Debate': Careful revival of a battle of wits
https://www.japantim[...]
2020-03-26
[304]
논문
[305]
간행물
GYAN GYAN
http://matsuzack.jou[...]
[306]
서적
Ryuichi Sakamoto Complete Works
Ohta Shuppan
[307]
논문
[308]
웹사이트
はじめの1巻:「ジャコモ・フォスカリ」テルマエ・ロマエ作者が描く60年代の日本
https://mantan-web.j[...]
[309]
논문
[310]
논문
[311]
웹사이트
森村泰昌「美の教室-静聴せよ」展
https://www.tokyoart[...]
[312]
웹사이트
【会期延長】没後50年・三島由紀夫へのオマージュ展、人形作家・写真家 石塚公昭「椿説 男の死」
https://fugensha.jp/[...]
[313]
저널
Lectures for Young Samurai: about politics
1969
[314]
서적
才華繚乱の文学『金閣寺』の時代
[315]
서적
第一章
[316]
서적
大正14年
1996
[317]
서적
第一回 三島由紀夫の誕生
2010
[318]
서적
十四 ノーベル文学賞の有力候補
2014
[319]
서적
ヨーロッパ・フランス語圏における三島劇
2001
[320]
서적
三島由紀夫
2005
[321]
서적
第六回 舞台の多彩の魅力
2010
[322]
서적
各項〈作品解説〉
2010
[323]
서적
第一部 あの“狂乱”の時代を振り返って
2010
[324]
서적
第一章 三島の自決はどう捉えられてきたか
2012
[325]
서적
II 構造と反復 から II 中上健次と三島由紀夫/あるいはオリュウノオバと本多邦繁
2000
[326]
서적
三島由紀夫 人と作品
新潮文庫
1973-12
[327]
서적
不思議な共感 三島由紀夫の生まれ育った時代
2000
[328]
서적
はじめに
1990
[329]
서적
あとがきにかえて――三島由紀夫とはだれだったのか【「昭和の子」として】
2005
[330]
서적
仮面の告白
河出書房
2000
[331]
서적
東文彦宛ての書簡
2004
[332]
서적
第二章
1996
[333]
서적
ミシマ万華鏡――祖父の地
2015
[334]
간행물
II
1987-05
[335]
서적
祖先
1996
[336]
서적
第二章 幽閉された少年
1999
[337]
서적
わが友・平岡梓
1996
[338]
서적
II 三島由紀夫の祖先を彩る武家・華族・学者の血脈
1983
[339]
서적
第一章 原敬暗殺の謎
1999
[340]
서적
松平家の家系図
1983
[341]
서적
故郷七十年
神戸新聞総合出版センター
1998
[342]
서적
2001
[343]
간행물
III
1987-06
[344]
간행물
暴流のごとく――三島由紀夫七回忌に
1990
[345]
서적
平岡公威伝
2003
[346]
서적
解説
2003
[347]
서적
第二部 追想のなかの三島由紀夫――(三)三島由紀夫以前
1988
[348]
간행물
〈両親対談〉三島由紀夫は誰のものか
1974
[349]
서적
解題――神官
2005
[350]
서적
第一章 作家の誕生まで
2006
[351]
간행물
わが思春期
1957-01-00
[352]
간행물
第一部 土曜通信
[353]
편지
東文彦宛ての書簡
1941-01-21
[354]
간행물
ラディゲに憑かれて――私の読書遍歴
1956-02-20
[355]
간행물
年譜
1933-00-00
[356]
간행물
第二部 平岡公威君の思い出
[357]
간행물
昭和11年月日不詳
[358]
서적
二・二六事件と私
河出書房新社
1966-06-00
[359]
편지
我が国旗
1936-06-16
[360]
간행물
岸田今日子さんと恋愛を語る
1954-09-00
[361]
간행물
第二章
[362]
간행물
『詩を書く少年』のころ
[363]
간행물
詩を書く少年
1954-08-00
[364]
간행물
作品目録
[365]
간행물
第三章
[366]
간행물
私の遍歴時代
1963-01-10
[367]
강연
悪の華――歌舞伎
1970-07-03
[368]
간행물
芝居日記
1942-01-01
[369]
간행물
師弟
1948-04-00
[370]
편지
凶ごと
1940-01-15
[371]
간행물
母を語る――私の最上の読者
1958-10-00
[372]
간행물
川路柳虹先生の思ひ出
1998-10-00
[373]
간행물
『恥』
1953-10-00
[374]
간행물
[375]
서적
あとがき――戯曲
新潮社
1954-03-00
[376]
간행물
戯曲の誘惑
1955-09-06
[377]
편지
清水文雄宛ての書簡
1941-09-17
[378]
간행물
年譜
1941-01-21
[379]
간행물
三島由紀夫の原稿用紙
[380]
간행물
第二章 戦中・戦後の苦闘
[381]
편지
清水文雄宛ての書簡
1941-07-28
[382]
간행물
『花ざかりの森』をめぐって
新潮社
1975-01-00
[383]
간행물
私のペンネーム
1953-11-08
[384]
서적
あとがき――『花ざかりの森』
新潮社
1953-11-00
[385]
뉴스
ペンネーム『三島』生まれた臨場感
2016-11-12
[386]
웹사이트
「花ざかりの森」熊本で発見 三島デビュー作直筆原稿「作家誕生語る一級資料」(三島由紀夫の総合研究、2016年11月13日・通巻第996号)
https://web.archive.[...]
2016-11-13
[387]
서적
ペンネームの由来
太陽
2010
[388]
서적
東文彦宛ての書簡
十代
2002
[389]
간행물
編集後記
福島鋳
1941-09
[390]
서적
第一章 その死をめぐって【一、二の疑問――はじめに】
1990
[391]
서적
惟神之道
26巻
2003
[392]
뉴스
大東亜戦争か 太平洋戦争か――歴史的事実なんだ
サンデー毎日
1970-11-29
[393]
서적
東文彦宛ての書簡
十代
2002
[394]
서적
年譜
42巻
2005
[395]
서적
年譜
42巻
2005
[396]
간행물
ドイツ語の思ひ出
29巻
1957-05
[397]
뉴스
対談「平野啓一郎が聞くドナルド・キーンの世界」
読売新聞
2007-07-31
[398]
간행물
大詔
37巻
1942-04
[399]
서적
赤絵
事典
2000
[400]
서적
序
講談社
1971-03
[401]
서적
挽歌一篇
37巻
2004
[402]
서적
東文彦宛ての書簡
十代
2002
[403]
서적
天の時雨
臨時
1971
[404]
서적
第一部・第一章 五 三島由紀夫の日本浪曼派体験
北影
2006
[405]
간행물
『文芸文化』のころ
番町書房
1968-01
[406]
웹사이트
三島由紀夫と神風連(壱)
https://web.archive.[...]
荒木
1971
[407]
서적
第二章 学習院という湖
島内
2010
[408]
서적
序章――雅の棘
1990
[409]
서적
東文彦宛ての書簡
十代
2002
[410]
서적
年譜
42巻
2005
[411]
서적
総務幹事日記
補巻
2005
[412]
서적
神崎陽宛ての書簡
38巻
2004
[413]
서적
蓮田善明宛ての書簡
日録
1996
[414]
간행물
死首の咲顔――三島由紀夫君追悼
追悼文
1971-02
[415]
서적
跋に代へて
26巻
2003
[416]
간행물
林富士馬の詩
日録
1943-08
[417]
간행물
古典の教育
日録
1943-08
[418]
서적
平岡公威宛ての葉書
日録
1996
[419]
서적
東文彦宛ての書簡
十代
2002
[420]
서적
第一部・第一章 四 三島由紀夫の古典礼讃
北影
2006
[421]
논문
東文彦宛ての書簡(昭和18年8月20日付)
2002
[422]
논문
東文彦宛ての書簡(昭和16年9月16日付)
2002
[423]
논문
東文彦 弔詞(昭和18年10月11日付。新潮 1998年12月号)
2002
[424]
간행물
東徤兄を哭す(昭和18年10月9日付。輔仁会雑誌 1943年12月25日・169号)
輔仁会雑誌
1943-12-25
[425]
논문
第四章 三島事件前後の真相
2010
[426]
논문
II 自己改造をめざして――『仮面』の創造
1990
[427]
논문
『盗賊』創作ノート
2000
[428]
논문
徳川義恭宛ての書簡(昭和18年9月25日付)
2002
[429]
논문
昭和18年10月25日
1996
[430]
논문
IV 行動者――訣別
1990
[431]
논문
第一部・第一章 十五 蓮田善明の終戦
2006
[432]
논문
1970
[433]
간행물
善明と由紀夫の黙契
新潮
1971-02
[434]
논문
第一部・第一章 十三・十四 『蓮田善明とその死』序文・日本の知識人に対する怒り
2006
[435]
논문
第六章 命を賭けたライフワーク」「第七章 自決の朝
2010
[436]
논문
富士正晴宛ての書簡(昭和18年12月26日付)
2004
[437]
논문
年譜(昭和19年5月16日)
2005
[438]
논문
十一 平明な主潮と太平洋戦争――2 『春の雪』と三島由紀夫
1971
[439]
논문
第三章 三島由紀夫の青春
2005
[440]
논문
平岡公威宛ての書簡(昭和19年11月22日付)
2005
[441]
논문
伊東静雄宛ての書簡(昭和23年3月23日付)
2004
[442]
간행물
学習院の卒業式
スタイル
1957-03
[443]
논문
年譜(昭和19年9月9日)
2005
[444]
논문
三島由紀夫と昭和の時代
2020
[445]
논문
陛下から拝受された恩賜の銀時計を眺めている写真
1983
[446]
간행물
学生の分際で小説を書いたの記
文藝
1954-11
[447]
간행물
法律と文学
東大緑会大会プログラム
1961-12
[448]
뉴스
私の小説作法
毎日新聞
1964-05-10
[449]
간행물
『花ざかりの森』出版のころ
群像
1958-06
[450]
간행물
『花ざかりの森』のころ
うえの
1968-01
[451]
서적
三島由紀夫伝
文藝春秋
1966-08
[452]
논문
『内部の人間』から始まった
禁色
2008
[453]
논문
平岡梓・倭文重宛ての葉書(昭和20年1月18日付)
2004
[454]
논문
三谷信宛ての書簡(昭和20年1月20日付)
1999
[455]
논문
中河与一宛ての書簡(昭和20年2月23日付)
2004
[456]
간행물
平岡梓・倭文重宛ての葉書
1945-01-17
[457]
간행물
私の遺書
1966-07
[458]
간행물
遺言
1945-02
[459]
간행물
昭和20年1月-2月
[460]
문서
帰郷証明書
三島由紀夫文学館
1945-02-10
[461]
간행물
太陽と鉄
1965-11-1968-06
[462]
인터뷰
三島由紀夫 最後の言葉
筑摩書房
1970-12-12, 1971-01-01
[463]
간행물
第一部・第一章 十二 三島由紀夫の終戦体験
[464]
간행물
三谷信宛ての葉書
1945-04-21
[465]
서적
灰の季節
修道社
[466]
편지
平岡公威宛ての書簡
1945-03-08
[467]
편지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5-03-16
[468]
서적
葉隠入門
光文社
[469]
간행물
民族的憤怒を思ひ起せ――私の中のヒロシマ
1967-08-11
[470]
간행물
八月十五日前後
1955-08-14
[471]
간행물
清水文雄宛ての葉書
1945-08-16
[472]
간행물
神崎陽宛ての葉書
1945-08-16
[473]
간행물
三谷信宛ての書簡
1945-08-22
[474]
간행물
戦後語録
1945-09-16
[475]
간행물
野田宇太郎宛ての葉書
1945-09-02
[476]
간행물
I 青春――恋の破局
[477]
간행물
第一部・第一章 十六 蓮田善明の自決
[478]
간행물
第一章 その死をめぐって【自決をめぐる謎】【射殺されたもの】
[479]
간행물
第一部・第一章 十七 悠久な日本の歴史の請し子
[480]
간행물
第三章 戦後神話のなかで【三島由紀夫の自決】
[481]
간행물
終末感からの出発――昭和二十年の自画像
1955-08
[482]
간행물
三島由紀夫と『鏡子の家』秘話
[483]
간행물
会計日記
1946-09-16
[484]
간행물
解題――仮面の告白
[485]
간행물
III 死の栄光――『優雅』をこえて
[486]
간행물
ある晴れた日に
1973-08
[487]
편지
斎藤吉郎宛ての書簡
1946-01-09
[488]
간행물
第三部 三島由紀夫と戦後文学
[489]
간행물
文学者の戦争責任の問題
[490]
간행물
III『人間』時代――鎌倉文庫 白木屋時代
[491]
논문
川端康成印象記
1946-01-27
[492]
논문
IV 川端康成と三島由紀夫
[493]
간행물
永遠の旅人――川端康成氏の人と作品
別冊文藝春秋
1956-04
[494]
논문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6-04-15
[495]
뉴스
川端氏の『抒情歌』について
民生新聞
1946-04-29
[496]
논문
対談・三島由紀夫
1952-11
[497]
논문
戦後派ならぬ戦後派三島由紀夫
[498]
논문
作家白描――三島由紀夫
[499]
논문
川端康成
[500]
논문
川端さんのこと
[501]
논문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6-05-12
[502]
논문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6-06-15
[503]
논문
第二回 果てしない試行錯誤
[504]
논문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6-08-10
[505]
논문
第三章 意志的情熱
[506]
논문
三島由紀夫のこと
1971-02
[507]
논문
会計日記
1946-11-17
[508]
논문
故蓮田善明への献詩
1946-11-17
[509]
논문
清水文雄宛ての書簡
1946-11-14
[510]
논문
十三 戦後から死まで
[511]
논문
林富士馬宛ての書簡
1946-10
[512]
논문
清水文雄宛ての葉書
1946-11-18
[513]
논문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6-07-06
[514]
논문
初対面
[515]
논문
会計日記
1946-05-1947-11
[516]
논문
第三章 その出会い
[517]
논문
会計日記
1946-12-14
[518]
논문
III 三島由紀夫と太宰治の接点
[519]
논문
練馬の一夜
[520]
논문
第八章
[521]
논문
三島由紀夫の知られざる秘密――太宰治との一夜
1971-02
[522]
논문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7-10-08
[523]
논문
跋
[524]
논문
会計日記
1947-06-27
[525]
논문
林房雄論
新潮社
1963-08
[526]
書籍
会計日記
(不明)
1947-07-03
[527]
書籍
会計日記
(不明)
1947-07-11
[528]
書籍
会計日記
(不明)
1947-07-15
[529]
書籍
会計日記
(不明)
1947-07-17
[530]
書籍
川端康成宛ての書簡
(不明)
1947-07-17
[531]
書籍
第三章
(不明)
[532]
書籍
あとがき
講談社
1965-02
[533]
書籍
I 青春――失われたものへの復讐
(不明)
[534]
書籍
文芸日評
銀座出版社
1947-02-1947-10
[535]
書籍
会計日記
(不明)
1947-09-13
[536]
書籍
創作合評
(不明)
1947-11
[537]
書籍
主要参考文献の展望
(不明)
[538]
書籍
林房雄宛ての書簡
(不明)
1947-11-04
[539]
書籍
年譜
(不明)
1947-12-13
[540]
書籍
平岡公威さんとの忘れ難き出会い
(不明)
[541]
書籍
負けるが勝ち
(不明)
1968-07
[542]
書籍
大蔵事務官平岡公威君
(不明)
[543]
書籍
林房雄宛ての書簡
(不明)
1948-02-21
[544]
書籍
ニューヨークの三島由紀夫
(不明)
1976-11
[545]
書籍
第二章 美神の宇宙
(不明)
[546]
書籍
昭和22年・年月日不詳
(不明)
[547]
書籍
蔵相就任の想ひ出――ボクは大蔵大臣
(不明)
1953-04-1953-05
[548]
書籍
清水基吉宛ての書簡
(不明)
1948-03-23
[549]
書籍
口もとにうかぶ微笑
(不明)
[550]
書籍
『仮面の告白』のこと
(不明)
1965-04
[551]
書籍
大蔵省
(不明)
[552]
書籍
日曜日【成立】
(不明)
[553]
書籍
三島由紀夫
未来社
1956-12
[554]
書籍
序曲
(不明)
[555]
書籍
坂本一亀への書簡
(不明)
1948-11-02
[556]
書籍
著書目録――目次
(不明)
[557]
書籍
火宅【研究】
(不明)
[558]
書籍
岸田国士先生
(不明)
1954-03-06
[559]
書籍
年譜
(不明)
1949-04-24
[560]
書籍
三島由紀夫氏の死ののちに
岩波文庫
1971-01
[561]
간행물
「『仮面の告白』ノート」
河出書房
1949-07
[562]
서신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8-11-02
[563]
논문
仮面の告白【反響】
[564]
논문
「第三回 性の自己決定」
[565]
간행물
「あとがき――『愛の渇き』」
新潮社
1953-08
[566]
간행물
「あとがき――『青の時代』」
新潮社
1953-08
[567]
논문
「『禁色』」
[568]
논문
鉢の木会
[569]
논문
「第三章 問題性の高い作家」
[570]
논문
「第六章 その初演出」
[571]
간행물
「『禁色』は廿代の総決算」
1951-12-17
[572]
서신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50-03-18
[573]
논문
「第五回 多面体としての性」
[574]
서적
アポロの杯
朝日新聞社
1952-10
[575]
간행물
「あとがき――『真夏の死』」
新潮社
1953-11
[576]
간행물
「年譜」
1967-05-01
[577]
간행물
「『潮騒』のこと」
1956-09
[578]
간행물
「『潮騒』執筆のころ」
1965-07
[579]
간행물
「神島の思ひ出」
1955-04
[580]
간행물
「あとがき」
新潮社
1955-07
[581]
간행물
「解説」
新潮文庫
1968-09
[582]
논문
「『潮騒』『沈める滝』をめぐって」
1973-06
[583]
칼럼
「実感的スポーツ論」
1964-10-05
[584]
간행물
「作家の日記」
1955-07
[585]
간행물
「ゴジラの卵――余技・余暇」
1955-12
[586]
논문
「第1章 肉体の飢渇」
[587]
간행물
「自己改造の試み――重い文体と鴎外への傾倒」
1956-08
[588]
논문
「第七回 美の呪縛」
[589]
간행물
「陶酔について」
1956-11
[590]
간행물
「私の健康」
1962-07-27
[591]
간행물
「裸体と衣裳――日記」
1958-04
[592]
논문
「『金閣寺』の狂気と成功」
[593]
논문
「十一 瑤子夫人とUFOを目撃」
[594]
간행물
「わが人生の時の人々――第4回 三島由紀夫という存在」
2000-06
[595]
간행물
「私のすぽーつ・セカンドウインド」
1957-06-16
[596]
서적
第4章 ボクシング――血の優雅
2014
[597]
뉴스
日本文化をハザマで考える/第12回 馬にまたがる三島由紀夫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9-10-01
[598]
서적
問いつづける声
1990
[599]
서적
第四章 時計と日本刀
1999
[600]
서적
第六章 『和漢朗詠集』の一句
1999
[601]
잡지
美智子さまと三島由紀夫のお見合いは小料理屋で行われた
週刊新潮
2009-04-02
[602]
서적
18 人の心
2010
[603]
서적
III 死の栄光――二つの事件――脅迫と告訴
1990
[604]
서적
第八回 時代と向き合う『鏡子の家』
2010
[605]
서적
旅の絵本
講談社
1958-03
[606]
서적
24 一九五七年夏、ニューヨークの三島由紀夫
2007
[607]
서적
第三章 薔薇の痙攣
1998
[608]
잡지
作中人物への傾斜
ポリタイア
1973-10
[609]
잡지
私の見合結婚
主婦の友
1958-07
[610]
기타
小高根二郎宛ての葉書
1959-08-07
[611]
서적
第五章
1990
[612]
기타
『鏡子の家』そこで私が書いたもの
鏡子の家広告用ちらし
1959-08
[613]
뉴스
『鏡子の家』――わたしの好きなわたしの小説
毎日新聞
1967-01-03
[614]
서적
『鏡子の家』の不思議
2000
[615]
서적
阿川弘之からGeorge H. Lynchまでの書簡・葉書
2004
[616]
서적
浅野晃から平岡紀子までの書簡・葉書
2005
[617]
서적
三島由紀夫の名刺
2008-07
[618]
서적
第五章 『鏡子の家』の時代
1990
[619]
서적
第三章 薔薇の痙攣
1998
[620]
서적
年譜
1959-05-10
[621]
웹사이트
住居表示旧新・新旧対照表 6の2(昭和40年11月15日施行)
https://ndlonline.nd[...]
国立国会図書館 Online
1965-11-15
[622]
서적
2000
[623]
서적
年譜
1959-05-06
[624]
뉴스
一つの政治的意見
毎日新聞
1960-06-25
[625]
잡지
1959年の文壇総決算
文學界
1959-12
[626]
서적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59-12-18
[627]
잡지
ファシストか革命家か
映画芸術 No.244
1968-01
[628]
서적
第四章 著名人の時代
2006
[629]
기타
私はいかにして日本の作家となつたか
日本外国特派員協会
1966-04-18
[630]
서적
第四章
1996
[631]
간행물
『風流夢譚』の推薦者ではない――三島由紀夫氏の声明
週刊新潮
1961-02-27
[632]
간행물
第六部 三島由紀夫と六〇年安保
[633]
간행물
第3章 肉体のゆくえ
[634]
간행물
不道徳教育講座――自由と恐怖
週刊明星
1959-07-19
[635]
간행물
第九回 世界の破滅に抗して
[636]
간행물
第十回 神への裏階段
[637]
뉴스
『豊饒の海』について
毎日新聞夕刊
1969-02-26
[638]
간행물
夢と人生
岩波書店
1964-05
[639]
뉴스
東洋と西洋を結ぶ火――開会式
毎日新聞
1964-10-11
[640]
간행물
秋冬随筆――歓楽果てて…
こうさい
1964-12
[641]
간행물
年譜
1964-05-04
[642]
간행물
川端康成
[643]
간행물
34 葬儀委員長川端康成とノーベル文学賞
[644]
뉴스
ノーベル賞と三島、川端の死【ドナルド・キーンの東京下町日記】
https://web.archive.[...]
東京新聞
2013-10-06
[645]
뉴스
三島ノーベル賞目前だった
読売新聞
2014-01-04
[646]
논문
川端康成とノーベル文学賞:スウェーデンアカデミー所蔵の選考資料をめぐって
https://cir.nii.ac.j[...]
佛教大学・京都語文
2014-11
[647]
논문
日本人作家とノーベル文学賞:スウェーデンアカデミー所蔵の選考資料(1958-1969)をめぐって
https://cir.nii.ac.j[...]
佛教大学・京都語文
2020-11
[648]
뉴스
川端康成 ノーベル文学賞受賞2年前の選考で高評価
https://web.archive.[...]
NHK News Web
2017-01-03
[649]
뉴스
特集まるごと「ノーベル文学賞 明らかになる“秘話”」
https://web.archive.[...]
NHK News Web
2015-03-31
[650]
서적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61-05-30
[651]
서적
1961年度ノーベル文学賞に川端康成氏を推薦する
[652]
뉴스
川端康成 ノーベル賞選考で新資料
https://web.archive.[...]
NHK「かぶん」ブログ・NHK科学文化部
2012-09-04
[653]
뉴스
谷崎潤一郎、58年ノーベル賞候補 三島由紀夫が推薦状
https://web.archive.[...]
朝日新聞DIGITAL
2009-09-23
[654]
간행물
製作意図及び経過
新潮社
1966-04
[655]
간행물
映画『憂国』の歩んだ道
[656]
간행물
『天人五衰』の尼寺
[657]
간행물
第六章
[658]
간행물
第五章 文と武の人
[659]
간행물
序文
[660]
웹사이트
第1回三島文学シンポジウム
https://web.archive.[...]
[661]
간행물
『われら』からの遁走――私の文学
講談社
1966-03
[662]
간행물
“三島美学”の傲慢な挑戦――映画『憂國』のはらむ問題は何か
週刊読書人
1966-05-02
[663]
간행물
年譜
1967-05-29
[664]
간행물
第5章 剣道・居合・空手
[665]
간행물
中間者の眼
三田文学
1968-04
[666]
간행물
清水文雄宛ての書簡
1966-06-10
[667]
간행물
私の文学を語る
1968-04
[668]
간행물
奇妙な友情
[669]
간행물
瀬戸内晴美宛ての書簡
1966-05-09
[670]
서적
対話・日本人論
番町書房
1966-10
[671]
간행물
回想の三輪明神
[672]
간행물
第四章 憂国の黙契
[673]
블로그
名作&風景(1) 三島由紀夫『奔馬』と大神神社
https://blog.goo.ne.[...]
2015-10-18
[674]
간행물
習字の伝承
1968-01
[675]
간행물
十九 佩刀『関ノ孫六』の由来
[676]
간행물
第一章
[677]
서적
関ノ孫六――三島由紀夫、その死の秘密
光文社
1973
[678]
간행물
青年について
1967-10
[679]
간행물
第十七章
[680]
간행물
第二章 ノサップ
[681]
뉴스
年頭の迷ひ
読売新聞
1967-01-01
[682]
간행물
奔馬
1967-02
[683]
간행물
IV 行動者――『狂気』の翼
[684]
간행물
最後の電話
1973-06
[685]
뉴스
インドの印象
毎日新聞
1967-10-20
[686]
간행물
第四章 バンコクでの再会
[687]
뉴스
『朱雀家の滅亡』の三島由紀夫――著者との対話
名古屋タイムズ
1967-11-13
[688]
간행물
文化防衛論
1968-07
[689]
간행물
楯の会と論争ジャーナル
[690]
간행물
第五章
[691]
간행물
三輪良雄への書簡
1968-03-18
[692]
간행물
IV 行動者――集団という橋
[693]
간행물
VI 民防活動の目標模索
[694]
간행물
楯の会
[695]
간행물
VII 近目標・治安出動に燃える
[696]
간행물
第四章 邂逅、そして離別
[697]
Youtube
1968年ニュースハイライト
https://www.youtube.[...]
2021-09-26
[698]
Youtube
川端康成 日本人初のノーベル文学賞受賞 三島由紀夫・石原慎太郎もお祝いに(TBSアーカイブ)
https://www.youtube.[...]
2021-10-06
[699]
뉴스
川端康成氏にノーベル文学賞
毎日新聞
1968-10-18
[700]
간행물
豊饒の海【反響】
[701]
간행물
「若きサムラヒのために」――政治について
PocketパンチOh!
1969-05
[702]
Youtube
芥正彦 インタヴュー(2009年1月) 1/8
https://www.youtube.[...]
2010-06-08
[703]
서적
討論・三島由紀夫vs.東大全共闘―〈美と共同体と東大闘争〉
新潮社
1969-06
[704]
뉴스
時代の証言者〈役者の条件20〉――三島由紀夫 肉体の美学
読売新聞
2015-06-29
[705]
간행물
VIII 遠・近目標混淆のなかで
[706]
간행물
小説とは何か 十一
波
1970-05
[707]
간행물
第七章 神々の黄昏――『暁の寺』と国際反戦デー
[708]
간행물
檄
1970-11-25
[709]
편지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69-08-04
[710]
편지
小高根二郎宛ての書簡
1968-11-08
[711]
연표
年譜
1969-11-03
[712]
간행물
三島の死と川端康成
新潮
1990-12
[713]
간행물
『英霊の声』の呪詛と『荒野より』の冷静
[714]
간행물
三島由紀夫の手紙
[715]
편지
ドナルド・キーン宛ての書簡
1970-02-27
[716]
간행물
独楽
辺境
1970-09
[717]
간행물
狂気にあらず ■第十二回公判
[718]
간행물
X 決起の黙契軋み出す
[719]
간행물
国会を占拠せよ ■第二回公判
[720]
뉴스
果たし得てゐない約束――私の中の二十五年
サンケイ新聞
1970-07-07
[721]
편지
山本舜勝宛ての書簡
1970-08-10
[722]
편지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70-07-06
[723]
간행물
プロローグ――個人的な記憶
[724]
간행물
三島の思い出――最後の真の侍――
[725]
뉴스
知られざる家庭人・三島由紀夫
女性自身
1970-12-12
[726]
간행물
第一章 哲学者の三島由紀夫論――7 三島事件の謎をめぐって
[727]
간행물
三島戯曲を演じる
[728]
간행물
夏のある日
[729]
간행물
第六章
[730]
편지
清水文雄宛ての書簡
1970-11-17
[731]
간행물
三島由紀夫の復権
[732]
간행물
私の勲章
[733]
서적
死の向こうへ
光文社知恵の森文庫
2008-11
[734]
서적
三島由紀夫氏のこと
河出書房新社
2008-03
[735]
뉴스
「あの世からでも来るか」おかみ、三島の一言胸に―「最後の晩餐」は鳥鍋
https://web.archive.[...]
時事通信
2020-11-24
[736]
웹사이트
「死を恐れるのは人間の本能です」10年前、立花隆が“最後のゼミ生”に伝えていたメッセージ
https://bunshun.jp/a[...]
文春オンライン
2021-06-24
[737]
논문
第八章 〈神〉となるための決起
2012
[738]
논문
1971
[739]
논문
第四章 決起――三島由紀夫が貫いた美学【なぜこの日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か】
2020
[740]
논문
第10章 虚無の極北の小説――十一月二十五日
2010
[741]
논문
三島由紀夫
1971
[742]
뉴스
三島由紀夫
週刊サンケイ
1970-12-31
[743]
논문
辛すぎた四十五年の生涯
2005
[744]
논문
慶応大学病院法医学部 解剖所見
1970-11-26
[745]
논문
没後
[746]
논문
関の孫六の刃こぼれ ■第八回公判
[747]
뉴스
週刊現代
1970-12-12
[748]
서적
夢の始末書
角川書店
1984-08
[749]
논문
武人としての死 ■第九回公判
[750]
논문
『風流夢譚』事件
2000
[751]
논문
第六章 三島由紀夫の遺言状
1985
[752]
논문
第八章
[753]
논문
33 三島由紀夫の自決
2007
[754]
논문
国を思う純粋な心に ■第五回公判
[755]
논문
恐るべき計画家・三島由紀夫
[756]
웹사이트
三島由紀夫と川端康成(補遺2)
https://web.archive.[...]
2012-04-17
[757]
논문
第四章 その時、そしてこれから
[758]
웹사이트
隠し文学館 花ざかりの森
http://www.3ihanazak[...]
[759]
논문
昭和46年
[760]
논문
年譜 昭和46年
2005
[761]
논문
あとがき
1980
[762]
논문
昭和58年
[763]
논문
年譜 平成3年
2005
[764]
간행물
日本とは何か
文藝春秋
2003
[765]
간행물
他者の言説――中上健次と三島由紀夫/あるいはオリュウノオバと本多邦繁
愛知短期大学 国語国文
2000
[766]
논문
谷崎潤一郎
[767]
간행물
美のかたち――『金閣寺』をめぐって
文藝
2004
[768]
논문
横光利一
[769]
논문
新版への序文
2000
[770]
간행물
表層への回帰――三島由紀夫論
象
2000
[771]
서적
小説家の休暇
講談社
1955-11
[772]
간행물
芸術にエロスは必要か
文藝
1955-06
[773]
간행물
古今集と新古今集
国文学攷
1967-03
[774]
간행물
鴨長明
文藝文化
1941-04-12 # 4월부터 12월까지(7월 제외)
[775]
책
第七章 自決の朝
2010
[776]
서적
危険な思想家
光文社カッパブックス
1965-03
[777]
책
第一章『白馬の騎士』の主題、第二章 終末感の美学
1968
[778]
간행물
小説とは何か 七
波
1969-09-10 # 9, 10월호
[779]
간행물
三島由紀夫とニーチェ――悲劇的文化とイロニー
群像
1988-06
[780]
책
VI『太陽と鉄』、「その死の場合」から「あとがき」
1977
[781]
간행물
蘭陵王
群像
1969-11
[782]
책
序
1970
[783]
책
大団円『豊饒の海』
2000
[784]
책
豊饒の海【研究】
[785]
책
紙上映画『世界の驚異』
[786]
간행물
わが魅せられたるもの
新女苑
1956-04
[787]
책
書くことが生きることと密接につながっていた
[788]
서적
盗賊
真光社
1948-11
[789]
책
ハロルド・クラーマン氏を紹介されて
2007
[790]
간행물
映画・芸術の周辺
SCREEN (雑誌)
1956-09
[791]
서적
対談・人間と文学――告白の形式
講談社
1968-04
[792]
간행물
戯曲を書きたがる小説書きのノート
日本演劇
1949-10
[793]
간행물
同人雑記
聲
1960-10
[794]
간행물
『金閣寺』について
文藝
1956-12
[795]
간행물
問題提起 (一)新憲法における『日本』の欠落
憲法改正草案研究会配布資料
1970-05
[796]
간행물
問題提起 (二)戦争の放棄
憲法改正草案研究会配布資料
1970-07
[797]
뉴스
『変革の思想』とは――道理の実現
読売新聞夕刊
1970-01-19, 1970-01-21, 1970-01-22
[798]
책
第五章 皇室と憲法〔アメリカの属国〕
2020
[799]
뉴스
三島由紀夫 自決9カ月前の肉声…TBSに録音テープ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7-01-12
[800]
뉴스
三島由紀夫「平和憲法は偽善。憲法は、日本人に死ねと言っている」TBSが未公開テープの一部を公開・放送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17-01-12
[801]
책
新発見 自決九ヵ月前の未公開インタビュー――三島由紀夫 素顔の告白
[802]
책
三島由紀夫未公開インタビュー
[803]
간행물
自衛隊二分論
20世紀
1969-04
[804]
강연
国家革新の原理――学生とのティーチ・イン その三
茨城大学講堂
1968-11-16
[805]
간행물
武士道と軍国主義
PLAYBOY
1970-07, 1978-08 # 1970년 7월 작성, 1978년 8월 게재
[806]
간행물
国家革新の原理――学生とのティーチ・イン その一
一橋大学
1968-06-16
[807]
간행물
現代における右翼と左翼――リモコン左翼に誠なし
流動
1969-12
[808]
뉴스
STAGE-LEFT IS RIGHT FROM AUDIENCE
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
1969-11-29
[809]
서적
第四章 だからあれほど言ったのに〔大衆社会と全体主義〕
[810]
서적
第III部 語る/騙る(検閲と表現:外国人記者の被爆地ルポ ほか)――柳瀬善治『26 文学者・文化人と核武装論』
[811]
Youtube
1969年、カナダのテレビ局による、三島由紀夫の貴重なインタビュー
https://www.youtube.[...]
2009-08-09
[812]
간행물
三島由紀夫の死と日本の核武装
https://ssl.nishioka[...]
WILL
2011-02
[813]
간행물
肉体の運動 精神の運動――芸術におけるモラルと技術
文學界
1968-09
[814]
간행물
天皇と現代日本の風土
論争ジャーナル
1968-02
[815]
간행물
私の聞いて欲しいこと
済寧
1970-06
[816]
간행물
第四章 だからあれほど言ったのに〔大衆社会と全体主義〕
文藝
1967-03
[817]
간행물
英霊の聲
文藝, 河出書房新社
1966-06
[818]
뉴스
三島由紀夫氏の“人間天皇”批判――小説「英霊の聲」が投げた波紋
サンデー毎日
1966-06-05
[819]
간행물
文武両道と死の哲学
論争ジャーナル
1967-11
[820]
간행물
昭和廿年八月の記念に
新潮
1979-03
[821]
간행물
模造文化の時代
新潮
1986-08
[822]
서적
第二章 たった一度の思考的対決――三島由紀夫と福田恆存
[823]
서적
終章 畏るべき天皇
毎日新聞社
2007-12
[824]
서적
昭和天皇
岩波新書
2008-01
[825]
서적
『女帝』を認めた三島の真意
[826]
간행물
三島由紀夫は『女系天皇』を『容認』していたか?
三島研究
2021-04
[827]
웹사이트
三島は女系天皇をみとめていなかった――男系天皇論者であることは、三島の作品を読んで、その男女観からも明らか
https://web.archive.[...]
三島由紀夫の総合研究
2012-06-24
[828]
서적
付章
[829]
Youtube
「三島由紀夫と楯の会」〜元楯の会有志が語る会
https://www.youtube.[...]
2020-11-27
[830]
뉴스
元楯の会第二班班長・本多清と一水会・鈴木邦男の対談
週刊現代
2017-12-09
[831]
서적
特攻隊
[832]
간행물
栄誉の絆でつなげ菊と刀
日本人及日本人
1968-09-10
[833]
간행물
お茶漬ナショナリズム
文藝春秋
1966-04
[834]
간행물
刺客と組長――男の盟約
週刊プレイボーイ
1969-07-08
[835]
서적
『青春監獄』の序
東京ライフ社
1955-09
[836]
뉴스
愛国心――官製のいやなことば
朝日新聞
1968-01-08
[837]
편지
東文彦宛ての書簡
1943-03-24
[838]
간행물
革命哲学としての陽明学
諸君!
1970-09
[839]
간행물
反革命宣言
論争ジャーナル
1969-02
[840]
서적
第五章 皇室と憲法〔新宿騒乱と治安出動〕
[841]
논문
국가혁신의 원리――학생과의 티치·인 그 둘
早稲田大学
1968-10-03
[842]
간행물
방담·하늘에 대신하여
1968-07-16
[843]
논문
미시마 유키오의 생사관――정감의 정신구조【정치사와 미적사】
[844]
간행물
부도덕교육강좌――암살에 대해
1959-08-02
[845]
논문
미
[846]
논문
사
[847]
논문
소설가의 휴가
[848]
논문
소설가의 휴가
[849]
강연
일본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에 서서
1968-12-01
[850]
논문
제2장 바카란 무엇인가?〔미시마 유키오 vs 동경대 전공투〕
[851]
논문
제3장 죽는 법과 사는 법〔기독교의 기믹〕
[852]
비디오
NHK영상파일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3
NHK엔터프라이즈·포니캐니온
2008
[853]
논문
프롤로그
[854]
뉴스
일본에 대한 신조
애히메신문
1967-01-01
[855]
간행물
학생을 납득시킬 만한 완력――스파르타 교육의 추천
1964-07
[856]
뉴스
발사탑 고전 현대어역 절대반대
요미우리신문 석간 칼럼
1960-08-31
[857]
서적
[858]
간행물
극화에 있어서의 젊은이론
1970-02-01
[859]
간행물
나의 만화
1956-03-05
[860]
서적
선데이와 매거진 창간과 사투의 15년
광문사신서
2009-04
[861]
간행물
현대일본 100인의 생활과 의견
1967-04
[862]
서적
신·UFO입문
환동사신서
2007-05
[863]
간행물
사회요리 미시마정――우주식 「나는 원반」
1960-09
[864]
간행물
SF팬의 제멋대로인 희망
1963-09
[865]
간행물
소설이란 무엇인가 십
1970-03, 1970-04
[866]
논문
분장광
1944-08
[867]
편지
평오카 기코에게 보낸 엽서
1960-11-11
[868]
논문
종장
[869]
웹사이트
빛나는 선배들 제1회전 후 대중문화의 기수(NO.1) 고질라(신)을 쏜 남자 영화 프로듀서 다나카 유키치(중32회)
https://web.archive.[...]
2014-11-29
[870]
논문
제3장 슈퍼스타 제1호 탄생!
[871]
웹사이트
역사|동영주식회사〔임협·실록〕
https://web.archive.[...]
[872]
뉴스
楠목 건의 「전략독서일기」【제22회】『영화는 야쿠자나리』(1)
https://president.jp[...]
프레지덴트사
2012-09-11
[873]
서적
영화는 야쿠자나리
신초사
[874]
서적
임협영화가 청춘이었다
도쿠마쇼텐
[875]
논문
개인이 조직을 무너뜨리는 도덕――「사무라이」에 대해
[876]
서적
2001年映画の旅:ぼくが選んだ20世紀洋画・邦画ベスト200
文藝春秋
2000-12-01
[877]
서적
映画伝説 ジャン=ピエール・メルヴィル
フィルムアート社
2009
[878]
웹사이트
好きな書評家 『三島由紀夫のフランス文学講座』
https://allreviews.j[...]
筑摩書房
[879]
논문
噂
1972
[879]
논문
(추가 정보 필요)
2010
[880]
웹사이트
三島文学に先駆けた橋健行
https://web.archive.[...]
2011-11-11
[880]
논문
第二章 三島由紀夫の先駆――伯父・橋健行の生と死
2016
[881]
뉴스
フランスのテレビに初主演――文壇の若大将三島由紀夫氏
毎日新聞夕刊
1966-03-10
[881]
논문
(추가 정보 필요)
2003
[882]
서적
今村均回顧録
芙蓉書房出版
1993
[883]
서적
平岡家系図解説
1971
[883]
논문
1983
[883]
논문
1999
[884]
논문
第二章 祖父・平岡定太郎
2005
[885]
논문
第一章 黄金の王国
1998
[886]
논문
本籍地 平岡家の謎
1997
[887]
논문
農民の劣等感―三島由紀夫の虚勢―
1971-02
[887]
논문
2005
[887]
논문
噂
1972
[888]
서적
厠と排泄の民俗学――補論
批評社
2004-12
[889]
논문
序章――鹿鳴館の香水
1990
[890]
논문
林房雄宛ての書簡
1971-06-13
[890]
논문
2004
[891]
서적
私の履歴書 第22集
日本経済新聞社
1964-11
[891]
서적
私の履歴書 経済人7
日本経済新聞社出版局
1980
[891]
논문
1983
[891]
논문
1990
[891]
논문
1999
[892]
서적
永井亨博士回顧録 思い出話
[892]
논문
1983
[893]
논문
第二章 映画『人斬り』と三島由紀夫――田中新兵衛と永井尚志
2011
[894]
논문
好色
1948-07
[894]
논문
2002
[895]
논문
三島由紀夫と橋家 もう一つのルーツ
2011
[895]
논문
2016
[896]
논문
特別公開 三島由紀夫未発表原稿・ノート
2000
[897]
서적
解説『人間喜劇』エピソード
徳間文庫カレッジ
2015-10
[898]
논문
2004
[899]
서적
源泉の感情 三島由紀夫対談集
河出書房新社
1970-10
[899]
서적
河出文庫
2006-02
[900]
서적
夷斎座談 石川淳対談集
中央公論社
1977-10
[900]
서적
中公文庫
1981-08
[901]
서적
尚武のこころ 三島由紀夫対談集
日本教文社
1970-09
[901]
서적
1986-04
[902]
서적
生涯にわたる阿修羅として
徳間書店
1970
[903]
논문
あとがき 発見のこと――燦爛へ
2017
[904]
뉴스
三島の肉声テープ、自らの文学の「欠点」語る
讀賣新聞
2017-01-12
[905]
논문
1983
[905]
서적
源泉の感情 三島由紀夫対談集
河出文庫
2006-02
[906]
웹사이트
矢頭保が”カリスマ写真家”になるまで/その2・・・パートナー兼パトロンだったアメリカ人メレディス・ウィザビー(Meredith Weatherby)と写真集三部作「体道」「裸祭り」「OTOKO」
https://menookashi.b[...]
2016-05-13
[907]
웹사이트
夜想 yaso 特集 耽美 sense of beauty
https://aucview.aucf[...]
aucfan Co.,Ltd
2024-11-14
[908]
웹사이트
成 山 画 廊
http://www.gallery-n[...]
2024-11-14
[909]
웹사이트
『薔薇刑』:三島由紀夫と細江英公の“決闘”写真集
https://www.nippon.c[...]
2024-09-25
[910]
웹사이트
体道 日本のボディビルダーたち 矢頭保 - 古本買取販売 ハモニカ古書店 建築 美術 写真 デザイン 近代文学 大阪府古書籍商組合加盟店
https://hamonika-kos[...]
2024-11-13
[911]
웹사이트
矢頭保 体道・日本のボディビルダーたち
https://colaboy.ocnk[...]
2024-11-13
[912]
뉴스
三島由紀夫の幻の写真集「男の死」 米出版(中日新聞 2020年10月19日)
https://www.chunichi[...]
中日新聞
2020-10-19
[913]
웹사이트
Yukio Mishima: The Death of a Man
https://www.rizzoliu[...]
[914]
뉴스
【独自】三島由紀夫が死の直前に企画、幻の写真集刊行へ…「男の死」一冊50万円
https://www.yomiuri.[...]
読売新聞
2020-11-11
[915]
웹사이트
Otoko Photo-Studies of the Young Japanese Male(Signed) - 矢頭 保 / Tamotsu Yato
https://made-in-wond[...]
2024-11-13
[916]
간행물
編集協力
태양
2010
[917]
뉴스
三島由紀夫、没後40年で関連本ラッシュ “仮面”の素顔気さくな一面も
https://web.archive.[...]
MSN産経ニュース
2010-11-23
[918]
서적
戦後派作家は語る
筑摩書房
1971
[919]
간행물
虹の門
臨時
1971
[920]
간행물
浪曼
1975
[921]
서적
ゲーメストムック Vol.8――鉄拳 完全解析マニュアル
新声社
1995
[922]
서적
金子一馬画集 III
新紀元社
2008
[923]
간행물
第三部 一九七八年――再生のとき〈六月九日 ナパ〉
コッポラ
2002
[924]
간행물
第三部 一九七八年 新しい旅立ち〈六月九日 ナパ〉
コッポラ
1992
[925]
간행물
第三部 一九七八年――再生のとき〈十月十九日 ナパ〉〈十月二九日 ナパ〉
コッポラ
2002
[926]
간행물
第三部 一九七八年 新しい旅立ち〈十月十九日 ナパ〉〈十月二九日 ナパ〉
コッポラ
1992
[927]
간행물
ユリイカ 特集 攻殻機動隊 STAND ALONE COMPLEX
青土社
2005-10
[928]
간행물
エピローグ “増殖”する三島由紀夫
岡山
2014
[929]
간행물
肉体で描かれた三島由紀夫へのオマージュ――ベジャール の『M』
論集III
2001
[930]
간행물
年譜 昭和45年
42巻
2005
[931]
간행물
鮮やかに甦るあの頃
8巻
2001
[932]
서적
安部公房全集 24 1973.03-1974.02
新潮社
1999-09
[933]
간행물
反政治的な、あまりにも反政治的な……
事典
2000
[934]
간행물
ドナルド・キーン宛ての書簡
38巻
2004
[935]
서적
複雑な彼
角川文庫
2009-11
[936]
간행물
思い出の三島由紀夫
39巻
2004
[937]
간행물
尚武の心と憤怒の抒情―文化・ネーション・革命
40巻
2004
[938]
간행물
三島由紀夫への弔辞
追悼文
1999
[939]
간행물
三島由紀夫の日蝕――その栄光と陶酔の虚構
没後20
1990
[940]
간행물
今、蘇る危うい予告
太陽
2010
[941]
뉴스
没後50年 三島由紀夫と私―文学の天才 肉体に劣等感 闊達な論客『知的刺激受けた』
産経新聞
2020-11-05
[942]
간행물
磯田光一
事典
2000
[943]
간행물
太陽神と鉄の悪意――三島由紀夫の死
磯田
1979
[944]
간행물
伊東静雄全集推薦の辞
31巻
2003
[945]
뉴스
三島由紀夫『春の雪』
日本経済新聞
1969-01-12
[946]
논문
清水文雄宛ての書簡
1942-07-23
[947]
간행물
雷蔵丈のこと
日生劇場
1964-01
[948]
논문
紅茶の〈はしご〉
新潮社
1975-02
[949]
논문
第六章 ベナレス
[950]
뉴스
朝日新聞夕刊
1970-11-25
[951]
논문
資料編
[952]
논문
大江健三郎
[953]
간행물
現代作家はかく考える
1964-09
[954]
간행물
すばらしい技倆、しかし…―大江健三郎氏の書下し『個人的な体験』
1964-09-14
[955]
논문
大江健三郎
[956]
논문
澁澤龍彦宛ての書簡
1967-12-25
[957]
논문
世界の文学と三島
[958]
논문
『日本刀は武士の魂』 ■第七回公判
[959]
논문
異色の対談
[960]
간행물
加藤道夫氏のこと
1955-09
[961]
간행물
楽屋で書かれた演劇論
1957-01
[962]
논문
第十四章 その鎮魂
[963]
논문
昭和28年12月28日
[964]
간행물
天狗道
1964-07
[965]
논문
続・川端康成の思い出(二)
[966]
간행물
本当の自殺をした男
1972-06
[967]
논문
第五章 自決の背景
[968]
논문
三十二 三島の霊と話をしていた川端康成
[969]
간행물
25周年 最後の秘話
1995-12
[970]
논문
八 岸田今日子の半裸の『サロメ』
[971]
뉴스
空飛ぶ円盤と人間通――北村小松氏追悼
1964-04-30
[972]
논문
表面的な思い出など――三島由紀夫
[973]
간행물
あとがき(「夜の向日葵」)
1953-04
[974]
논문
断雲
[975]
논문
[976]
간행물
三島由紀夫の手紙
1974-12-13 to 1975-04-18
[977]
서적
長女が読む本
三笠書房
1988-07
[978]
논문
おじさんはもうすぐ死ぬけれど……
[979]
논문
第四章 その時、そしてこれから―― 一期 伊藤邦典
[980]
논문
『天皇中心の国家を』■第十五回公判
[981]
간행물
現代女優論――越路吹雪
朝日新聞
1961-07-15
[982]
간행물
六 越路吹雪とのロマンスの行方
[983]
간행물
越路吹雪との対談「ミュージカルみやげ話」
中央公論
1958-03
[984]
간행물
第二章 『楯の会』入会
[985]
간행물
清水文雄宛ての葉書
1946-10-12
[986]
간행물
清水文雄宛ての書簡
1943-07-29
[987]
간행물
多少の縁
新潮社
1975-07
[988]
간행물
三島由紀夫氏を悼む
ユリイカ (雑誌)
1971-01
[989]
웹사이트
書評
https://web.archive.[...]
平凡社
2006-12-18
[990]
간행물
最新版 三島由紀夫と記憶と精霊たち
[991]
간행물
第十章 白い錬金術師の家
[992]
간행물
昔の友
新潮社
1975-04
[993]
간행물
果敢な敵の死悲し
サンケイ新聞
1970-11-26
[994]
간행물
自殺の形而上学
1971-02
[995]
간행물
文学者の生きかたと死にかた
文和書房
[996]
간행물
存在感獲得への熟望
[997]
간행물
武田泰淳
[998]
간행물
文学は空虚か
1970-11
[999]
간행물
太宰治
[1000]
간행물
『仮面の告白』
[1001]
간행물
『道化』と『仮面』の双曲線
ユリイカ
1975-03
[1002]
간행물
谷崎潤一郎宛ての書簡
1963-01-03
[1003]
간행물
『国を守る』とは何か
朝日新聞
1969-11-03
[1004]
간행물
三島由紀夫と刑事訴訟法
日本法律家協会
1971
[1005]
웹사이트
三島の理解者 堤清二氏が死去
https://web.archive.[...]
2013-11-29
[1006]
간행물
三島由紀夫の未発表原稿
立風書房
1982
[1007]
간행물
十七 『憂国』の妻・鶴岡淑子のその後
[1008]
간행물
貴顕
[1009]
간행물
第六章 『豊饒の海』の北白川祥子
[1010]
간행물
ケンタウロスの嘆き
潮
1971-02
[1011]
간행물
解題――愛の処刑
[1012]
간행물
中村歌右衛門
[1013]
간행물
『三島歌舞伎』の世界
マリ・クレール
1989-10
[1014]
간행물
三島文学の背景
国文学 解釈と教材の研究
1970-05-25
[1015]
간행물
たった一度だけの出会い
新潮社
1973-11
[1016]
논문
野坂昭如
2000
[1017]
뉴스
ただ喪に服するのみ
1970-12-12
[1018]
간행물
I
1987-01
[1019]
간행물
橋川文三への公開状
1968-10
[1020]
뉴스
狂い死の思想
1970-11-26
[1021]
논문
『悲しみの琴』に献辞
1972
[1022]
간행물
『薔薇刑』体験記
1963-07
[1023]
뉴스
三島由紀夫への予言
1968-07-07
[1024]
간행물
日沼氏と死
1968-09
[1025]
논문
三島由紀夫論
1960-04
[1026]
논문
九 『風流夢譚』事件の余波
2014
[1027]
논문
第三章 『奔馬』への旅
1998
[1028]
논문
わたしの中の三島さん
2002
[1029]
서적
富士正晴宛ての書簡
1947-11-19 #쇼와 22년을 서기로 변환
[1030]
논문
三島君の精神と裸体
1971
[1031]
뉴스
壮烈な憤死
1970-11-26
[1032]
서적
坊城俊民宛ての書簡
1970-11-19 #쇼와 45년을 서기로 변환
[1033]
논문
誠実なる警告
2005
[1034]
논문
七 西にコクトー、東に三島『からっ風野郎』
2014
[1035]
논문
『からっ風野郎』
1996
[1036]
논문
原作から主演・監督まで
2006
[1037]
논문
第二章 第一回パリ憂国忌
1998
[1038]
논문
第六章 追悼二十年目の高揚
2010
[1039]
논문
わたしが愛した人々 美輪明宏をもっと理解するための4人
2002
[1040]
논문
第二章 天上界の麗人 美輪明宏
2016
[1041]
논문
希――青い花々
1992
[1042]
논문
丸山(美輪)明宏
2000
[1043]
Youtube
三島由紀夫 没後50年 生前最後の手紙につづられた言葉 /Mishima pondered on the Socrates’ death before Harakiri suicide.
https://www.youtube.[...]
2020-11-26
[1044]
논문
出逢いから傍に落ち着くまで
2007
[1045]
논문
第一章 曙
2005
[1046]
논문
第三章 惜別の時
2015
[1047]
논문
そして三十三年が経った
2002
[1048]
논문
優しく澄んだ眼差し
2002
[1049]
논문
第三章 青い華――絶対への回帰
2015
[1050]
논문
第十一章 その夜の宴
1985
[1051]
간행물
デカダンス意識と生死観
1968-06
[1052]
간행물
十二 男性ヌードへの挑戦『薔薇刑』
[1053]
간행물
終章 誰が三島を殺したのか
[1054]
서적
インドへ
文藝春秋
1977-06
[1055]
간행물
吉田健一
[1056]
간행물
三島さんのこと
小澤書店
1971-02
[1057]
간행물
三島由紀夫の苦悩
[1058]
간행물
「サロメ」上演を託されて
[1059]
뉴스
ロンドン通信
1965-03-25
[1060]
간행물
伝説から実像へ
[1061]
웹사이트
日本を愛したドナルド・キーンさん 原点は源氏物語と兵士の日記〈AERA〉
https://dot.asahi.co[...]
2019-03-06
[1062]
간행물
第十一章 死後
[1063]
간행물
三島由紀夫と『黒船』
[1064]
논문
Yukio Mishima: Dialectics of Mind and Body
1975-01
[1065]
논문
Mishima Yukio and his Suicide
1972
[1066]
웹사이트
http://biblioklept.o[...]
[1067]
간행물
第一回 三島由紀夫の誕生
[1068]
간행물
十四 ノーベル文学賞の有力候補
[1069]
간행물
ヨーロッパ・フランス語圏における三島劇
[1070]
간행물
三島由紀夫
[1071]
서적
三島由紀夫 人と作品
新潮文庫
1973-12
[1072]
간행물
不思議な共感、三島由紀夫の生まれ育った時代
[1073]
간행물
はじめに
[1074]
간행물
第六回 舞台の多彩の魅力
[1075]
간행물
各項〈作品解説〉
[1076]
간행물
第一部 あの“狂乱”の時代を振り返って
[1077]
간행물
第一章 三島の自決はどう捉えられてきたか
[1078]
간행물
II 構造と反復、II 中上健次と三島由紀夫/あるいはオリュウノオバと本多邦繁
[1079]
간행물
第一章
[1080]
간행물
大正14年
[1081]
서적
仮面の告白
河出書房
1949-07
[1082]
편지
東文彦宛ての書簡
1941-04-11
[1083]
간행물
第二章
[1084]
간행물
II
1987-05
[1085]
간행물
祖先
[1086]
서적
第二章 幽閉された少年
1999
[1087]
서적
わが友・平岡梓
1996
[1088]
서적
II 三島由紀夫の祖先を彩る武家・華族・学者の血脈
1983
[1089]
서적
第一章 原敬暗殺の謎
1999
[1090]
서적
松平家の家系図
1983
[1091]
서적
故郷七十年
神戸新聞総合出版センター
1959-11
[1092]
서적
2001
[1093]
잡지
III
1987-06
[1094]
잡지
暴流のごとく――三島由紀夫七回忌に
1976-12
[1095]
서적
平岡公威伝
1942-02-28
[1096]
서적
解説
1969-01
[1097]
서적
第二部 追想のなかの三島由紀夫――(三)三島由紀夫以前
1988
[1098]
잡지
〈両親対談〉三島由紀夫は誰のものか
1973-11
[1099]
서적
解題――神官
2005
[1100]
서적
第一章 作家の誕生まで
2006
[1101]
잡지
わが思春期
1957-01-09
[1102]
서적
第一部 土曜通信
1999
[1103]
서적
東文彦宛ての書簡
1941-01-21
[1104]
잡지
ラディゲに憑かれて――私の読書遍歴
1956-02-20
[1105]
서적
年譜
1933
[1106]
서적
第二部 平岡公威君の思い出
1999
[1107]
서적
昭和11年月日不詳
1936
[1108]
서적
二・二六事件と私
河出書房新社
1966-06
[1109]
서적
我が国旗
1936-06-16
[1110]
잡지
岸田今日子さんと恋愛を語る
1954-09
[1111]
서적
第二章
[1112]
서적
『詩を書く少年』のころ
1971
[1113]
잡지
詩を書く少年
1954-08
[1114]
서적
作品目録
[1115]
서적
第三章
1996
[1116]
잡지
私の遍歴時代
1963-01-10 - 1963-05-23
[1117]
강연
悪の華――歌舞伎
1970-07-03
[1118]
잡지
芝居日記
1989-10 - 1990-02
[1119]
잡지
師弟
1948-04
[1120]
서적
凶ごと
1940-01-15
[1121]
간행물
母を語る――私の最上の読者
1958-10
[1122]
간행물
川路柳虹先生の思ひ出
1998-10
[1123]
간행물
『恥』
1953-10
[1124]
서적
[1125]
간행물
あとがき――戯曲
新潮社
1954-03
[1126]
뉴스
戯曲の誘惑
東京新聞夕刊
1955-09-06
[1127]
서한
清水文雄宛ての書簡
1941-09-17
[1128]
간행물
年譜
1941-01-21
[1129]
간행물
三島由紀夫の原稿用紙
[1130]
간행물
第二章 戦中・戦後の苦闘
[1131]
서한
清水文雄宛ての書簡
1941-07-28
[1132]
간행물
『花ざかりの森』をめぐって
新潮社
1975-01
[1133]
뉴스
私のペンネーム
東京新聞夕刊
1953-11-08
[1134]
간행물
あとがき――『花ざかりの森』
新潮社
1953-11
[1135]
뉴스
ペンネーム『三島』生まれた臨場感
朝日新聞
2016-11-12
[1136]
웹사이트
「花ざかりの森」熊本で発見 三島デビュー作直筆原稿「作家誕生語る一級資料」
https://web.archive.[...]
三島由紀夫の総合研究
2016-11-13
[1137]
간행물
ペンネームの由来
[1138]
서한
東文彦宛ての書簡
1941-11-10
[1139]
간행물
編集後記
1941-09
[1140]
간행물
惟神之道
1941-09-22
[1141]
뉴스
大東亜戦争か 太平洋戦争か――歴史的事実なんだ
サンデー毎日
1970-11-29
[1142]
서한
東文彦宛ての書簡
1943-01-11
[1143]
간행물
年譜
1942-03
[1144]
간행물
年譜
1943-1944
[1145]
간행물
ドイツ語の思ひ出
1957-05
[1146]
인터뷰
平野啓一郎が聞くドナルド・キーンの世界
読売新聞
2007-07-31
[1147]
간행물
大詔
1942-04
[1148]
간행물
赤絵
[1149]
간행물
序
講談社文芸文庫
2007-04
[1150]
간행물
挽歌一篇
1942-08-26
[1151]
서한
東文彦宛ての書簡
1942-11-15
[1152]
간행물
天の時雨
[1153]
간행물
『文芸文化』のころ
番町書房
1968-01
[1154]
웹사이트
三島由紀夫と神風連(壱)
https://web.archive.[...]
2007-05-07
[1155]
간행물
第二章 学習院という湖
[1156]
서적
序章――雅の棘
1990
[1157]
서적
東文彦宛ての書簡
2002
[1158]
서적
年譜
2005
[1159]
서적
総務幹事日記
2005
[1160]
서적
神崎陽宛ての書簡
2004
[1161]
서적
蓮田善明宛ての書簡
1996
[1162]
간행물
死首の咲顔――三島由紀夫君追悼
1971-02
[1163]
서적
跋に代へて
七丈書院
2003
[1164]
간행물
林富士馬の詩
1943-08
[1165]
간행물
古典の教育
1943-08
[1166]
서적
平岡公威宛ての葉書
1996
[1167]
서적
東文彦宛ての書簡
2002
[1168]
서적
東文彦宛ての書簡
2002
[1169]
서적
東文彦宛ての書簡
2002
[1170]
간행물
東文彦 弔詞
2002
[1171]
간행물
東徤兄を哭す
2003
[1172]
서적
第四章 三島事件前後の真相
2010
[1173]
서적
II 自己改造をめざして――『仮面』の創造
1990
[1174]
서적
『盗賊』創作ノート
2000
[1175]
서적
徳川義恭宛ての書簡
2002
[1176]
서적
昭和18年10月25日
1996
[1177]
서적
IV 行動者――訣別
1990
[1178]
서적
第一章 三島由紀夫と日本浪曼派
2006
[1179]
서적
1970
[1180]
간행물
善明と由紀夫の黙契
1971-02
[1181]
서적
第六章 命を賭けたライフワーク、第七章 自決の朝
2010
[1182]
서적
富士正晴宛ての書簡
2004
[1183]
서적
年譜
2005
[1184]
서적
十一 平明な主潮と太平洋戦争――2 『春の雪』と三島由紀夫
1971
[1185]
서적
第三章 三島由紀夫の青春
2005
[1186]
서적
平岡公威宛ての書簡
[1187]
서적
伊東静雄宛ての書簡
2004
[1188]
간행물
学習院の卒業式
1957-03
[1189]
서적
年譜
2005
[1190]
서적
三島由紀夫と昭和の時代
2020
[1191]
서적
陛下から拝受された恩賜の銀時計を眺めている写真
アルバム
1983
[1192]
간행물
学生の分際で小説を書いたの記
文藝
1954-11
[1193]
간행물
法律と文学
東大緑会大会プログラム
1961-12
[1194]
뉴스
私の小説作法
毎日新聞
1964-05-10
[1195]
간행물
『花ざかりの森』出版のころ
群像
1958-06
[1196]
간행물
『花ざかりの森』のころ
うえの
1968-01
[1197]
서적
三島由紀夫伝
文藝春秋
1966-08
[1198]
간행물
『内部の人間』から始まった
禁色
[1199]
편지
平岡梓・倭文重宛ての葉書
1920-01-18
[1200]
편지
三谷信宛ての書簡
1920-01-20
[1201]
편지
中河与一宛ての書簡
1920-02-23
[1202]
편지
平岡梓・倭文重宛ての葉書
1920-01-17
[1203]
간행물
私の遺書
文學界
1966-07
[1204]
서적
遺言
アルバム
1920-02
[1205]
서적
昭和20年1月-2月
日録
[1206]
문서
帰郷証明書
1920-02-10
[1207]
간행물
太陽と鉄
批評
1965-11-1968-06
[1208]
인터뷰
三島由紀夫 最後の言葉
図書新聞
1970-12-12, 1971-01-01
[1209]
편지
三谷信宛ての葉書
1920-04-21
[1210]
서적
灰の季節
修道社
1958-05
[1211]
편지
平岡公威宛ての書簡
1920-03-08
[1212]
편지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20-03-16
[1213]
서적
葉隠入門
光文社
1967-09
[1214]
뉴스
民族的憤怒を思ひ起せ――私の中のヒロシマ
週刊朝日
1967-08-11
[1215]
뉴스
八月十五日前後
毎日新聞
1955-08-14
[1216]
편지
清水文雄宛ての葉書
1920-08-16
[1217]
편지
神崎陽宛ての葉書
1920-08-16
[1218]
편지
三谷信宛ての書簡
1920-08-22
[1219]
문서
戦後語録
1920-09-16
[1220]
편지
野田宇太郎宛ての葉書
1920-09-02
[1221]
문서
I 青春――恋の破局
[1222]
뉴스
終末感からの出発――昭和二十年の自画像
新潮
1955-08
[1223]
문서
三島由紀夫と『鏡子の家』秘話
[1224]
뉴스
終末感からの出発――昭和二十年の自画像
新潮
1955-08
[1225]
문서
会計日記
1921-09-16
[1226]
서적
解題――仮面の告白
[1227]
서적
III 死の栄光――『優雅』をこえて
[1228]
간행물
ある晴れた日に
ポリタイア
[1229]
서적
斎藤吉郎宛ての書簡
1946-01-09
[1230]
서적
第三部 三島由紀夫と戦後文学
[1231]
서적
文学者の戦争責任の問題
[1232]
서적
III『人間』時代――鎌倉文庫 白木屋時代
[1233]
간행물
川端康成印象記
1946-01-27
[1234]
서적
IV 川端康成と三島由紀夫
[1235]
간행물
永遠の旅人――川端康成氏の人と作品
別冊文藝春秋
[1236]
서적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6-04-15
[1237]
뉴스
川端氏の『抒情歌』について
民生新聞
1946-04-29
[1238]
간행물
対談・三島由紀夫
文學界
[1239]
서적
戦後派ならぬ戦後派三島由紀夫
[1240]
서적
作家白描――三島由紀夫
[1241]
서적
川端康成
[1242]
서적
川端さんのこと
[1243]
서적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6-05-12
[1244]
서적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6-06-15
[1245]
서적
第二回 果てしない試行錯誤
[1246]
서적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6-08-10
[1247]
서적
第三章 意志的情熱
[1248]
간행물
三島由紀夫のこと
文學界
[1249]
간행물
会計日記
1946-11-17
[1250]
간행물
故蓮田善明への献詩
おもかげ
1946-11-17
[1251]
서적
清水文雄宛ての書簡
1946-11-14
[1252]
서적
十三 戦後から死まで
[1253]
간행물
林富士馬宛ての書簡
光耀
[1254]
서적
清水文雄宛ての葉書
1946-11-18
[1255]
서적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6-07-06
[1256]
서적
初対面
[1257]
간행물
会計日記
[1258]
서적
第三章 その出会い
[1259]
간행물
会計日記
1946-12-14
[1260]
서적
III 三島由紀夫と太宰治の接点
[1261]
논문
練馬の一夜
[1262]
논문
三島由紀夫氏の思い出
[1263]
논문
三島由紀夫の知られざる秘密――太宰治との一夜
[1264]
논문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7-10-08
[1265]
논문
跋
桜井書店
1947-11
[1266]
논문
会計日記
1947-06-27
[1267]
논문
林房雄論
新潮社
1963-08
[1268]
논문
会計日記
1947-07-03
[1269]
논문
会計日記
1947-07-11
[1270]
논문
会計日記
1947-07-15
[1271]
논문
会計日記
1947-07-17
[1272]
논문
川端康成宛ての書簡
1947-07-17
[1273]
논문
第三章
[1274]
논문
あとがき
講談社
1965-02
[1275]
논문
I 青春――失われたものへの復讐
[1276]
논문
文芸日評
銀座出版社
1947-12
[1277]
논문
会計日記
1947-09-13
[1278]
논문
創作合評
[1279]
논문
主要参考文献の展望
[1280]
논문
林房雄宛ての書簡
1947-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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