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케네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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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3700년경 헬라도스 문화가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어 기원전 1200년경 멸망한 청동기 문명이다. 주요 도시로 미케네, 티린스, 필로스 등이 있었으며, 선형 문자 B를 사용하여 기록을 남겼다. 귀족 전사 계급이 지배했으며, 벌집 무덤에 매장하는 독특한 매장 문화를 가졌다. 미케네 문명은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으며, 건축, 예술, 금속 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멸망 원인으로는 도리아인의 침략, 자연재해, 기후 변화 등이 제시되고 있으며, 그리스 암흑기 이후 그리스 신화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미케네인은 미노아인과 유전적으로 유사하지만, 서부 대초원 계통의 조상이 혼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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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케네 문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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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미케네 그리스 |
다른 이름 | 미케네 문명 |
지역 | 그리스 본토, 에게 해 제도 및 서부 아나톨리아 |
시기 | 청동기 시대 |
대표 유적 | 미케네 |
주요 유적지 | 필로스 티린스 미데아 오르코메노스 이올코스 |
특징 | |
추가 정보 | 궁궐 중심의 행정 시스템, 경제 및 문화 키클롭스식 축조법 선형 문자 B 스크립트 기록의 그리스어 |
역사 | |
선행 문화 | 미노스 문명 코라쿠 문화 티린스 문화 |
후행 문화 | 그리스 암흑 시대 |
2. 역사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3700년경 헬라도스 문화가 미노스 문명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면서 동부 지중해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3200년경 청동기 문명의 쇠퇴와 함께 번성했다. 흔히 도리아인의 침략으로 멸망했다고 보지만, 화산 폭발이나 기후 변화 등 다른 가설도 있다. 주요 도시는 아르골리스의 미케네와 티린스, 메세니아의 필로스, 아티카의 아테네, 보이오티아의 테베와 오르코메노스, 테살리아의 이올코스 등이었다. 크레타의 크노소스를 정복하기도 했으며, 에페이로스, 마케도니아, 에게해 제도, 소아시아 해안, 키프로스 등지에도 미케네의 취락이 있었다. 심지어 독일에서도 선형 문자 B로 쓰인 유물이, 조지아에서는 미케네의 검이 발견되었다.[247][248][249][250]
미케네 문명은 귀족 전사 계급이 지배했다. 기원전 3500년경 미노스 문명의 크레타 섬까지 진출하여 미노스 문자(선형 문자 A)를 받아들여 선형 문자 B로 발전시켰다. 그리스 전설에 따르면 미케네는 강력한 적수였던 트로이를 두 번이나 패퇴시켰다고 하나, 이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등 신화적 자료에 근거한 것이며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불확실하다. 1876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소아시아(터키) 히살리크에서 유적을 발굴하여 트로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251][252]
미케네 귀족들은 벌집 무덤(tholoi)에 매장되었는데, 검 등 무기와 함께 황금 가면, 관, 갑주, 보석 박힌 무기 등이 부장품으로 묻혔다. 앉은 자세로 매장되었으며, 미라로 매장된 경우도 있다. 사제 계급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도장, 반지, 조상 등을 통해 신과 숭배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몇몇 신의 이름은 올림포스 신들과 일치하지만, 알 수 없는 신들도 많다. 아레스는 에니알리오스(Enyalios)라는 별명으로, 아폴론은 "PA-JA-WO"(Paian)로 불렸다. 아테나 포트니아(Athena Potnia), 에일레이티이아(Eileithyia), 디오뉘소스, 포세이돈(Poseidon) 등이 알려져 있으며, 포세이돈은 배우자 포세이다(Poseida)와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에리니에스 등도 등장한다.
필로스, 미케네, 오르코메노스, 테베, 티린스 등지에서 궁정 프레스코화가 발견되었다. 초기 프레스코화는 기원전 3500년경의 것으로, 키클라데스와 미노아의 영향을 받았으나, 미케네의 특징을 반영하여 변형되었다. 동물 묘사에서도 인간 중심적인 경향을 보인다.
기원전 1200년경 미케네 문명은 멸망했다. 많은 도시들이 약탈당하고 학살의 흔적이 남았으며, 일부 미케네인들은 아나톨리아, 다른 그리스 섬들, 또는 키프로스로 피난했다. 그리스 인구는 급감했고, 궁정과 관련된 선형 문자 B도 사라졌다. 전통적으로 도리아인의 침략을 멸망의 원인으로 보지만, 지진, 가뭄 등 자연재해나 기후 변화도 원인으로 제기되고 있다.[245] 이후 그리스는 그리스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미케네와 티린스 등의 유적은 1876년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발굴되었다.
2. 1. 초기 미케네 시대와 수갱 무덤 시대 (기원전 1750년경~1400년경)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750년경부터 1400년경까지 초기 미케네 시대와 수갱 무덤 시대를 거치며 발전했다. 이 시기는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시기로, 미노아 문명의 멸망 이후 미케네 문명이 주도적인 세력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헬라도스 문화는 미노스 문명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으며, 선형문자 A를 계승한 선형문자 B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케네의 주요 도시는 아르골리스의 미케네와 티린스, 메세니아의 필로스, 아티카의 아테네, 보이오티아의 테베와 오르코메노스, 테살리아의 이올코스 등이었다. 미케네인들은 크레타의 크노소스를 정복하고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다. 이 시기에는 전사 엘리트 계급이 등장하여 사회를 지배했고, 미케네 도자기 등의 유물이 널리 유통되었다. 미케네인들의 활동 범위는 에페이로스, 마케도니아, 에게해의 섬들, 소아시아 해안, 키프로스를 넘어 심지어 독일[249]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조지아에서는 미케네의 검이 발견되기도 했다.[250] 미케네 귀족들은 독특한 형태의 무덤인 벌집 무덤(''tholoi'')에 매장되었는데, 여기에는 검과 같은 무기류와 황금 가면, 관, 갑주, 보석 박힌 무기 등의 부장품이 함께 묻혔다. 이들은 앉은 자세로 매장되었으며, 일부는 미라로 매장되기도 했다. 미케네인들은 일반적인 형태의 신전을 건설하지 않았지만, 레르나 신앙과 같은 가내 성소에서 종교 의식을 치렀다. 선형문자 B 비문에서 확인되는 신들은 아레스(에니알리오스), 아폴론(Paian), 아테나, 에리니에스, 디오뉘소스, 포세이돈, 데메테르, 페르세포네 등이며, 이 중 일부는 후대의 올림포스 신들과 연관이 있다. 미케네 궁정에서는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제작되었는데, 특히 필로스, 미케네, 오르코메노스, 테바이, 티린스에서 발견된 프레스코화는 미노아의 영향을 받았으나 미케네 고유의 특징도 보여준다. 이 시기 미케네 문명의 흥망성쇠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도리아인의 침략, 자연재해, 기후변화 등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트로이아 전쟁과의 관련성 또한 역사적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며,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 이후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2. 2. 코이네 시대 또는 궁정 청동기 시대 (기원전 1400년경~1200년경)
미케네 문명의 전성기인 기원전 1400년경~1200년경은 코이네 시대 또는 궁정 청동기 시대라고 불린다. 이 시기 미케네 문명은 에게해와 소아시아 서부로 세력을 확장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크노소스 궁전을 장악하면서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의 혼합 문화가 형성되었고, 이는 미케네 문명의 문화적 다양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선형 문자 B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활발한 무역 활동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주요 미케네 중심지에는 웅장한 궁전들이 건설되었고, 효율적인 관료주의 네트워크가 확립되어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히야와(Ahhiyawa)를 중심으로 소아시아 서부 지역과도 활발한 교류를 통해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선형문자 B의 사용은 미케네 문명의 행정과 기록 체계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는 당시 사회의 복잡성과 발전된 문명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 시대 미케네인들의 예술적 성취는 궁정 프레스코화에서 잘 나타나며, 에서 보듯이 정교한 그림 기법과 다채로운 색감은 당시 미케네 문명의 높은 예술적 수준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고, 기원전 1200년경 청동기 시대 붕괴와 함께 미케네 문명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이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며, 도리아인의 침입, 자연재해, 기후변화 등이 그 원인으로 제기되고 있다. [245] 하지만,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2. 3. 멸망 또는 후궁정 청동기 시대 (기원전 1200년경~1050년경)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600년경 아카이아인에 의해 아르골리스 지방에서 시작되어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영했다.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예술 등을 받아들였고, 결국 크레타를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미케네는 전설적인 트로이 전쟁을 통해 트로이를 멸망시켰다는 설이 있으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비롯한 신화적 자료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실체는 불확실하다. 1876년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 이후 트로이 유적이 발견되었지만, 호메로스의 기록과의 일치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있다.[251][252]기원전 1200년경, 미케네 문명은 갑작스럽게 붕괴했다. 해양 민족이나 도리아인의 침입이 주요 원인으로 거론되지만,[245] 내부 붕괴나 기후 변동설 등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미케네와 티린스는 파괴되었고, 많은 도시들이 약탈당하고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일부 미케네인들은 아나톨리아, 다른 그리스 섬들, 또는 키프로스로 피난했지만, 그리스 인구는 급감했고, 궁정과 관련된 선형 문자 B의 사용도 중단되었다. 이후 그리스는 역사 기록이 부족한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미케네와 티린스의 유적은 1876년 이후 슐리만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1250년경 그리스 본토의 여러 중심지에서 첫 번째 파괴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이후 요새가 강화되었지만, 결국 문명은 붕괴되었다.
3. 정체성
미케네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미케네 선형 B 문자 해독 결과, 미케네인들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후기 청동기 시대 그리스어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이는 기원전 2천년기부터 기원전 8세기 페니키아 알파벳에서 유래한 그리스 알파벳이 등장하기까지 그리스어 사용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13] [14] 뿐만 아니라, 미케네 문화의 전파자들이 그리스 반도에 거주했던 인구와 민족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15] 선형 B 문자 해독은 에게 해 지역에 인도유럽어족 언어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16]
호머의 ''일리아스''에는 미케네 그리스 거주민들을 가리키는 다양한 명칭, 즉 아카이아인, 다나안인, 아르고스인 등이 등장한다. [17] 이러한 명칭들은 호머가 ''일리아스''에서 사용할 당시까지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18] 크레타 섬 크노소스의 선형 B 기록에는 기원전 1400년경 ''a-ka-wi-ja-de''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는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아카이아) 국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19]
이집트 기록에는 기원전 1437년경 처음으로 ''T(D)-n-j'' 또는 ''Danaya''(''Tanaju'') 지역이 언급된다. 이 지역은 아멘호테프 3세 통치 기간의 비문에서 지리적으로 정의되는데, 여러 다나야 도시들이 언급되며, 그리스 본토 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20] 미케네, 나플리온, 테베와 같은 도시가 확실하게 확인되었다. 다나야는 아르고스 지역을 지배했던 다나오이 신화 속 왕조의 이름이자, 호머가 그리스 사람들을 부르는 데 사용한 민족명인 ''다나오이''()와 동일시되어 왔다.[20][21]
히타이트 제국 기록에는 기원전 1400년경부터 1220년까지 ''아히야와''라는 국가에 대한 여러 언급이 있다.[25][22] 최근 연구는 텍스트 증거, 히타이트 비문의 새로운 해석, 그리고 미케네-아나톨리아 접촉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아히야와''가 미케네 세계(아카이아인의 땅) 또는 그 일부를 가리켰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23][24] 이 용어는 더 넓은 의미를 가졌을 가능성도 있으며, 미케네인이 정착한 모든 지역 또는 미케네의 직접적인 정치적 통제하에 있는 지역을 가리켰을 수 있다.[25] 12세기 이집트 비문에 나오는 ''에크웨시''는 일반적으로 아히야와인으로 확인되었으며, 해양 민족의 한 그룹으로 언급되었다.[26]
4. 정치 조직
미케네 문명은 미케네, 티린스, 피로스 등에 거석으로 만들어진 성채 궁전을 중심으로 여러 소왕국으로 분립된 정치 체제였다. 후대의 폴리스 사회와 달리, 전제적인 권력을 가진 왕이 통치하는 공납 왕정 체제였다. 왕은 통치 지역으로부터 농작물, 가축, 무기 등을 공납으로 받아 왕궁에서 일하는 장인과 노예들을 부양했다.[243]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처럼 정비된 통치 기구는 없었지만, 공납을 받는 관리들이 존재했다. 왕을 보좌하고 군사력을 지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군사 귀족 에케타(eqeta)를 비롯하여, 라와게타스(lāwāgetas), 코레테(koreter), 포로코레테(prokoreter), 다모코로(damokoros) 등 다양한 지역 관리들이 각 지역의 행정과 공납 수취를 담당했다. 미케네 사회는 자유민과 노예(도에로)로 크게 나뉘었고, 자유민 내부에도 계층적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1. 궁정 국가
미케네 문명은 미케네, 티린스, 피로스 등에 위치한 거대한 성채 궁전을 중심으로 여러 소왕국으로 분립된 정치 체제였습니다. 후대의 폴리스 사회와는 달리, 이들 소왕국에서는 전제적인 권력을 가진 왕이 통치했습니다. 왕은 영토 내 마을들로부터 농작물, 가축, 무기 등을 공납으로 받아 왕궁에서 일하는 다수의 장인과 노예를 부양하는 공납 왕정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공납을 거두는 관리들이 있었지만,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처럼 체계적인 통치 기구는 갖추지 못했습니다.[243] 각 미케네 왕국은 궁전에서 통치하며, 영토 내 산업을 통제했습니다. 선형 문자 B 기록과 당시 히타이트 및 이집트 기록을 통해 미케네 국가의 정치 지형을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4. 2. 사회 및 행정
미케네 문명은 미케네, 티린스, 피로스 등에 거석으로 만들어진 성채 궁전을 중심으로 여러 소왕국으로 분립된 정치 체제였다. 후대의 폴리스 사회와 달리, 전제적인 권력을 가진 왕인 와낙스(wanax)가 군림하여 통치하던 마을들로부터 농작물, 가축, 무기 등을 공납으로 거두어 왕궁에서 일하는 많은 장인과 노예들을 부양하는 공납 왕정 체제였다.[243]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처럼 정비된 통치 기구는 없었지만, 공납을 받는 다양한 관리들이 존재했다. 군사 귀족인 에케타(eqeta)는 왕을 보좌하며 군사력을 지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라와게타스(lāwāgetas)라는 직책도 존재했으나, 그 구체적인 역할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외에도 코레테(koreter), 포로코레테(prokoreter), 다모코로(damokoros) 등 다양한 지역 관리들이 존재하여 각 지역의 행정과 공납 수취를 담당했다. 미케네 사회의 계층은 자유민과 노예(도에로)로 크게 나뉘었으며, 자유민 내부에도 계층적인 차이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5. 경제
미케네 문명의 경제는 궁정 중심의 체제 하에 발달했으며,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File:null|thumb|아르골리스에서 발견되어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된 미케네 궁전 양병(Mycenaean palace amphora), 문어 장식 양병(NAMA 6725)] [[File:null|thumb|동부 지중해 우가릿(Ugarit)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견된 미케네 주전자(stirrup vase)(기원전 1400년경~1300년경) 주전자]] 막대한 노동력과 자원을 동원한 대규모 인프라 건설이 경제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코파이스 분지의 배수 시스템, 티린스의 댐 건설, 네메아 계곡 늪지대의 배수 사업 등은 농업 생산성 향상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효율적인 도로망 건설은 군사력 유지 및 확장뿐 아니라, 원활한 물류 이동을 가능하게 하여 경제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항구 건설 또한 해상 무역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인프라 구축은 미케네 왕국의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와 조직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미케네인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근동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울루부룬 난파선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키프로스를 거점으로 한 미케네와 근동 지역 간의 활발한 교역을 보여준다. 그들의 무역 범위는 이탈리아 반도, 서지중해 지역을 넘어 중앙 유럽, 아일랜드, 심지어 잉글랜드까지 뻗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편과 같은 특수 상품의 무역 또한 미케네 무역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한 광범위한 무역 활동은 미케네 문명의 경제적 번영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문화 교류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1. 조직
미케네 문명의 경제는 중앙 행정부가 재화, 상품, 노동력을 재분배하는 궁정 경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궁전들은 다양한 산업과 상품 생산, 토지 관리 등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궁전에서는 생산된 상품의 집계 및 배급 과정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었다. 하지만 궁전의 통제는 공간적 측면이나 산업별 관리 방식에서 선택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아르골리스에서 발견되어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된 미케네 궁전 양병(Mycenaean palace amphora)이나 우가릿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견된 미케네 주전자(stirrup vase)와 같은 유물들은 당시 궁정 경제의 규모와 복잡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5. 2. 대규모 인프라
미케네 문명의 궁정 중심지는 막대한 노동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대규모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대표적인 예로 코파이스 분지의 배수 시스템, 티린스의 댐 건설, 네메아 계곡 늪지대의 배수 사업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는 농업 생산성 향상과 주민들의 삶의 질 개선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미케네 시대에는 효율적인 도로망이 건설되어 군대의 신속한 배치를 가능하게 하였는데, 이는 미케네 왕국의 군사력 유지 및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항구 건설 또한 미케네 문명의 해상 활동과 무역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러한 인프라 건설은 미케네 문명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조직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러한 대규모 프로젝트들은 당시 뛰어난 기술력과 사회적 조직력을 반영하며, 미케네 문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도로망의 발달은 군사적 측면뿐 아니라 경제적 교류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5. 3. 무역
미케네 문명의 경제에서 무역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케네인들은 지중해 세계를 넘나드는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다양한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이들의 무역 활동은 근동 지역과의 밀접한 문화적 교류로 이어졌다.특히 울루부룬 난파선은 미케네인들의 무역로와 교역품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이 난파선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들은 미케네 문명이 키프로스를 거점으로 근동 지역과 활발하게 교역했음을 증명한다. 키프로스는 미케네 그리스와 근동 사이의 중요한 중개 지점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케네인들의 무역 범위는 매우 넓었다. 이탈리아 반도, 서지중해 지역은 물론, 중앙 유럽, 아일랜드, 심지어 잉글랜드까지 그들의 무역로가 뻗어 있었다고 추정된다. 흥미로운 점은 미케네인들이 아편과 같은 특수한 상품도 무역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미케네인들의 무역 네트워크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다양한 상품을 취급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6. 종교
미케네 유적에서 사찰과 신전은 드물다. 미케네를 제외한 궁정 중심지에는 기념비적인 종교 구조물이 없고, 미케네의 종교 중심지도 후대(기원전 13세기)에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130] 아시네, 베르바티, 멀티, 필로스에서 소규모 신전들이 발견되었고,[123] 미케네, 델포이, 아미클레 근처에서 여러 성역이 발견되었다.[124] Linear B 기록에는 다양한 신들에게 봉헌된 여러 신전들이, 적어도 필로스와 크노소스에서는 언급되어 있으며, 제물을 포함한 다양한 종교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125] 미케네어 기록에는 특정 신전과 사찰을 담당했던 여러 사제와 여사제들이 언급되어 있으며,[126] 여사제들은 사회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고, 미노아 크레타와 마찬가지로 미케네 여성의 종교 의식에서의 역할도 중요했다.[127]
미케네 신화에는 후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많은 신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지만,[128] 이들이 후대와 같은 특징과 역할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129] 일반적으로 미케네 궁정 세계 전체에서 같은 신들이 숭배되었지만, 크레타에서는 지역 신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미케네 종교의 균일성은 후기 청동기 시대 그리스 전역에서 발견된 파이- 및 프사이- 조각상과 같은 고고학적 증거에도 나타난다.[130]
포세이돈 (Linear B: ''Po-se-da-o'')은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진과 관련된 지저신 (''E-ne-si-da-o-ne'': 지진을 일으키는 자)이었지만, 저승의 강의 정령을 나타냈을 가능성도 있다.[131] 파이온 (''Pa-ja-wo'')은 아마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신들의 의사의 전신일 것이다. 그는 환자를 "치유"하는 마법의 노래를 의인화한 존재였다.[132] 여러 신들은 후대 고대에 사용된 칭호로만 식별되었다. 예를 들어, ''Qo-wi-ja''("소 눈의")는 헤라의 표준적인 호메로스 칭호이다.[138] 아레스는 ''에니알리오스''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에니알리오스''가 별개의 신이 아니라고 가정할 때).[133] 헤파이스토스, 에리니아, 아르테미스 (''a-te-mi-to'' 및 ''a-ti-mi-te'') 및 디오니소스 (''Di-wo-nu-so'')도 등장한다.[134][135][136][137] 제우스도 등장하지만, 최고 신은 아니었다.[129]
"여인들" 또는 "여주인들", ''Po-ti-ni-ja'' (''포트니아'')도 언급된다. 아테나 (''A-ta-na'')는 크노소스 비문에 "여주인 아테나"로 나타나는데, 이는 후대 호메로스의 표현과 유사하지만, 필로스 점토판에서는 수식어 없이 언급된다.[142] ''Si-to po-ti-ni-ja''는 농업의 여신으로 보이며, 후대의 데메테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138] 크노소스에는 "미궁의 여주인"이 있다.[139] 필로스에서는 "두 여왕과 왕" (''wa-na-ssoi'', ''wa-na-ka-te'')이 언급된다.[140][141] 여신 ''Pe-re-swa''는 페르세포네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138][142] 마리네우스, 디위아, 코마웬테이아와 같이 후대에 해당하는 신이 없는 미케네 신들도 여러 명 있다.[129]
6. 1. 신과 의례
미케네 유적에서 발견된 종교 건축물은 의외로 적다. 미케네를 제외한 궁정 중심지에는 대규모 종교 시설이 없지만, 미케네의 종교 중심지는 기원전 13세기에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130] 아시네, 베르바티, 멀티, 필로스 등지에서는 소규모 신전이 발견되었고,[123] 미케네, 델포이, 아미클레 부근에서는 여러 성역이 발견되었다.[124] Linear B 기록에는 필로스와 크노소스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다양한 신들에게 봉헌된 신전들이 언급되어 있으며, 제물을 포함한 다양한 종교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125] 미케네어 기록에는 여러 사제와 여사제가 언급되는데, 이들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고, 미노아 크레타와 마찬가지로 미케네 여성의 종교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27]미케네 신화에는 후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많은 신들이 이미 등장하지만,[128] 그들이 당시에도 후대와 같은 특징과 역할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129] 일반적으로 미케네 궁정 세계 전체에서 같은 신들이 숭배되었지만, 크레타에서는 지역 신들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미케네 종교의 균일성은 후기 청동기 시대 그리스 전역에서 발견된 파이- 및 프사이- 조각상과 같은 고고학적 증거에도 나타난다.[130]
포세이돈 (Linear B: ''Po-se-da-o'')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진과 관련된 지저신 (''E-ne-si-da-o-ne'': 지진을 일으키는 자)이었지만, 저승의 강의 정령을 나타냈을 가능성도 있다.[131] 파이온 (''Pa-ja-wo'')은 아마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신들의 의사의 전신일 것이다. 그는 환자를 "치유"하는 마법의 노래를 의인화한 존재였다.[132] 여러 신들은 후대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된 칭호로만 식별된다. 예를 들어, ''Qo-wi-ja''("소 눈의")는 헤라의 칭호이다.[138] 아레스는 ''에니알리오스''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에니알리오스''가 별개의 신이 아니라고 가정할 때).[133] 헤파이스토스, 에리니아, 아르테미스 (''a-te-mi-to'' 및 ''a-ti-mi-te''), 디오니소스 (''Di-wo-nu-so'') 등도 등장한다.[134][135][136][137] 제우스도 등장하지만, 최고 신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29]
미케네어 문자에는 "여인들" 또는 "여주인들", ''Po-ti-ni-ja'' (''포트니아'')가 언급된다. 아테나 (''A-ta-na'')는 크노소스 비문에 "여주인 아테나"로 나타나며, 필로스 점토판에서는 수식어 없이 언급된다.[142] ''Si-to po-ti-ni-ja''는 농업의 여신으로 보이며, 후대의 데메테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138] 크노소스에는 "미궁의 여주인"이 있다.[139] 필로스에서는 "두 여왕과 왕" (''wa-na-ssoi'', ''wa-na-ka-te'')이 언급된다.[140][141] ''Pe-re-swa''는 페르세포네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138][142] 마리네우스, 디위아, 코마웬테이아와 같이 후대에 해당하는 신이 없는 미케네 신들도 존재한다.[129]
7. 여성
미케네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다양했다. 단순히 가정 내 활동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들이 발견된다. 특히 종교 분야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다. 여사제들은 토지를 임대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상류층 엘리트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열쇠 관리인'과 같은 직책을 맡아 중요한 관리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고, 신성한 노예로서도 특별한 지위를 누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들은 미케네 여성들이 종교를 통해 경제적, 사회적 자립을 이루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그 영향력의 범위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7. 1. 일상생활
미케네 시대 여성들의 삶은 벽화와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을 통해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여성들은 다양한 형태의 의복과 장신구를 착용했는데, 특히 화려한 장신구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성들은 가사 노동에 종사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학자들은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렸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 다만, 발굴된 유적에서 여성들이 남성과 동일한 양의 식량을 배급받았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여성 노동자 집단, 즉 작업반의 존재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생산 활동에 참여했음을 시사한다. 일부 여성들은 사제직과 같은 사회적 지위를 얻어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의 획득 과정과 범위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미케네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연구는 아직 진행 중이며, 앞으로 더 많은 연구를 통해 보다 명확한 그림이 그려질 것으로 기대된다.7. 2. 종교
미케네 문명의 종교에서 여성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했다. 여성들은 단순히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수준을 넘어, 여사제로서 독립적인 지위와 상당한 권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은 토지를 '임대'받아 경제적 이익을 얻었으며, 상류층 엘리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단순히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것 외에도, '열쇠 관리인'과 같은 직책을 통해 중요한 관리 업무를 담당했고, 신성한 노예로서도 특별한 지위를 누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여성들이 미케네 사회에서 종교를 통해 경제적, 사회적 자립을 달성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8. 건축
미케네 문명의 건축은 크레타 문명(미노아 문명)과는 달리 폐쇄적인 성격을 띤다.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가 특징이며, 거대한 돌을 사용한 사이클롭스 석조 건축기술이 사용되었다. 이는 외부의 위협에 대한 방어를 중시했던 미케네 문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요새의 중심에는 메가론이라 불리는 실내 공간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곳이 동선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미노아 문명의 개방적인 중정과는 차이를 보인다. 건축물은 대칭성을 중시했으며, 벽화에는 전사나 사냥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다. 기하학적 문양이나 추상적인 문양이 있는 토기와 금은 세공품도 발견되는데,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 가면은 슐리만이 1876년 미케네 유적 발굴 당시 발견했으며, 현재는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46] 주택은 주로 진흙 벽돌로 지어졌고, 일부 건물에서는 구운 기와 지붕을 사용한 흔적도 확인된다.[246]
8. 1. 궁전
미케네 문명의 건축은 미노아 문명과 달리 폐쇄적인 성격을 띤다. 이는 외부의 위협에 대한 대비책으로 해석된다. 미노아 문명의 개방적인 건축과 대조적으로, 미케네의 건축물들은 거대한 석재를 사용하여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언덕이나 바위 봉우리에 세워졌다. 특히, 사이클롭스 석조 기법이 사용된 성벽은 그 웅장함을 보여준다. 중정은 미노아 문명 건축에서처럼 동선의 중심축 역할을 하지 않고, 대신 메가론이라 불리는 실내 공간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메가론은 기념비적이고 특권적인 공간으로, 중정은 메가론의 부속 공간으로 기능한다. 건물의 설계는 대칭성을 중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궁전 내부에는 전사나 사냥을 묘사한 벽화와 기하학적 무늬 또는 추상적인 문양이 그려진 토기, 그리고 금은으로 만든 잔 등이 발견된다.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은 슐리만이 1876년 미케네 유적 발굴 중 발견한 대표적인 유물로, 현재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가면은 미케네인들의 뛰어난 금속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그들의 호전적인 성격과 칼 및 갑옷 제작 기술 또한 뛰어났음을 시사한다.[246] 필로스, 미케네, 티린스 등 여러 지역의 궁전들은 각각의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기본적인 구조와 건축 양식은 공통점을 보인다. 하지만 각 궁전의 크기, 메가론의 배치, 부속 시설 등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를 보인다.8. 2. 요새
미케네 문명의 건축은 미노아 문명과는 달리 외부의 위협에 대비한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것이 특징이다. 특히, 사이클롭스식 건축으로 지어진 요새 시스템은 거대한 바위를 사용한 성벽 구조로 유명하다. 이러한 거석 건축은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미케네인들이 외부의 침략에 얼마나 심각하게 대비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미케네의 주요 중심지는 이러한 요새 시스템으로 견고하게 방어되었으며, 지하 저수조, 통로, 측면 통로, 첨탑 등 다양한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요새의 중심부에는 메가론이라 불리는 실내 공간이 위치하여 동선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 이는 미노아 문명의 개방적인 중정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246]8. 3. 기타 건축 특징
미케네 문명의 주택들은 주로 진흙 벽돌을 사용하여 건축되었습니다. 일부 건물의 경우에는 구운 기와 지붕을 사용한 흔적도 발견됩니다.9. 전쟁
미케네 그리스인들의 군사적 성격은 발굴된 다수의 무기, 당대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전사와 전투 묘사, 그리고 남아있는 선형 B 문자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168][169] 미케네인들은 군사 기반 시설 개발에 투자했고, 군수 생산과 물류는 궁정 중심지에서 직접 관리했다.[169][170] 필로스 궁전의 선형 B 문자 기록에 따르면, 모든 농촌 공동체(damos)는 군대에 일정 수의 병력을 제공해야 했으며,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171]
초기 미케네 군대는 창, 큰 방패, 그리고 때로는 갑옷을 착용한 중장보병을 기반으로 했다.[172] 하지만 기원전 13세기 후반, 전술과 무기 모두 큰 변화를 겪으면서, 무장 부대는 더욱 균일하고 유연해졌고, 무기는 더 작고 가벼워졌다.[169] 창은 주요 무기였지만, 검은 전투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했다.[173] 활, 곤봉, 도끼, 투석기, 단창도 사용되었다.[173][174] 전차의 전장에서의 정확한 역할과 기여는 증거 부족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다.[175] 기원전 16세기에서 14세기에는 전투 차량으로 사용되었으나, 기원전 13세기에는 전장 수송으로 역할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176]
멧돼지 엄니 투구는 미케네 문명 초기부터 멸망까지 사용된 대표적인 갑옷이었으며, 그리스와 지중해의 당대 예술 작품에서도 여러 번 묘사되었다.[177][178] 대표적인 미케네 갑옷으로는 여러 청동 요소로 구성된 완전한 갑옷 세트인 덴드라 갑옷(기원전 1450~1400년경)이 있다.[179] 고대 그리스 후기 호플리트 갑옷의 대부분 특징은 이미 미케네 시대에 알려져 있었다.[180] "8자형" 방패가 가장 일반적이었고, 후기에는 더 작은 원형 또는 아랫부분이 잘린 거의 원형 방패가 사용되었다.[181][182]
9. 1. 군사력과 무기
미케네 그리스인들의 군사적 성격은 발굴된 다수의 무기, 당대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전사와 전투 묘사, 그리고 보존된 그리스 선형 B 문자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168][169] 미케네인들은 군사 기반 시설 개발에 투자했고, 군수 생산과 물류는 궁정 중심지에서 직접 감독했다.[169][170] 필로스 궁전의 선형 B 문자 기록에 따르면, 모든 농촌 공동체(damos)는 군대에 일정 수의 병력을 제공해야 했다.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171]초기 미케네 군대는 창, 큰 방패, 그리고 경우에 따라 갑옷을 착용한 중장보병을 기반으로 했다.[172] 기원전 13세기 후반, 미케네 전쟁은 전술과 무기 모두에서 큰 변화를 겪었고, 무장 부대는 더욱 균일하고 유연해졌으며, 무기는 더 작고 가벼워졌다.[169] 창은 미케네 전사들의 주요 무기로 남았지만, 검은 전투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했다.[173] 다른 공격 무기로는 활, 곤봉, 도끼, 투석기, 창이 사용되었다.[173][174] 전장에서 전차의 정확한 역할과 기여는 증거 부족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다.[175] 전차는 초기에는 기원전 16세기에서 14세기 동안 전투 차량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13세기에는 전장 수송으로 역할이 제한되었다.[176]
멧돼지 엄니 투구는 미케네 문화의 시작부터 붕괴까지 사용된 가장 두드러진 미케네 갑옷이었다. 그리스와 지중해의 당대 예술 작품에서 여러 번 묘사되기도 했다.[177][178] 여러 청동 요소로 구성된 완전한 갑옷 세트인 덴드라 갑옷(기원전 1450년–1400년경)[179]도 대표적인 예시다.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 후기 호플리트 갑옷의 대부분 특징은 이미 미케네 그리스에 알려져 있었다.[180] "8자형" 방패가 가장 일반적인 미케네 방패였다.[181] 후기 미케네 시대에는 더 작은 유형의 방패, 완전히 원형이거나 아랫부분이 잘린 거의 원형의 방패가 채택되었다.[182]
10. 미술과 도자기
== 미술과 도자기 ==
미케네 문명의 미술은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받았지만, 전사 중심 사회의 특징을 반영하여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예로, 아테네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아가멤논의 마스크"아가멤논의 가면가 있다. 하인리히 슐리만하인리히 슐리만이 미케네의 수갱분묘에서 발굴한 이 금제 마스크는 죽은 전사의 얼굴을 덮었던 것으로, 수염이 있는 남성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의지의 강인함과 결단력이 느껴진다. 이는 죽은 자의 혼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고, 시신을 보존하며 모습을 영속화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케네 예술의 특징은 건축에서도 잘 드러난다. 크레타 궁전과 달리, 미케네나 티린스와 같은 산성(山城) 형태의 거대한 성이 특징적이다. 대표적인 예로 '사자문'이라 불리는 성문이 있는데, 한 쌍의 통돌에 문중방을 얹고, 그 위에 두 마리 사자를 부조한 삼각형의 커다란 석판이 얹혀 있는 구조다. 이 사자문 안쪽의 수갱분묘에서는 슐리만에 의해 많은 재보가 발견되었다. 궁전 내부는 메가론(megaron, 넓은 방)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원시 그리스의 주거 형태로, 현관, 전실, 그리고 중앙에 난로가 있는 커다란 주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미케네 문명의 지배 계층이 인도유럽어족임을 시사한다.
궁전의 건축 세부나 내부 장비는 크레타 미술을 모방한 면이 많지만, 회화에서는 미케네의 요소와 크레타의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양식을 보인다. 티린스 성의 ''멧돼지 사냥'' 프레스코화(아테네 국립미술관 소장)가 그 예시다. 크레타풍 동물 묘사가 보이지만, 개들이 멧돼지를 일관되게 공격하는 모습은 미케네인의 호전적인 성격을 반영한다. 크레타 미술의 유화하고 미려한 스타일과는 달리, 미케네 미술은 늠름하고 양식화된 경향을 보인다. 또한 미케네 문명은 여러 곳에 산재하는 지하 묘실 건축으로도 특징지어지는데, 언덕 경사면에 긴 통로를 파고, 그 끝에 지하의 원추형 묘실을 만든 형태다. 묘실 입구는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그리스 왕후들의 장례식에서는 개나 말, 노예까지도 공물로 희생시키는 풍습이 있었다.
최고급 미케네 예술품의 상당수는 크레타에서 수입된 미노아 예술품이거나 크레타 출신 또는 크레타에서 훈련받은 예술가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자기는 이러한 경향이 덜하지만, 미케네 궁전의 문어가 그려진 대형 항아리 (NAMA 6725)는 미노아 해양 양식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하지만 기원전 1350년경 이후에는 이러한 미노아 양식의 영향이 감소한다. 일부 작품에서는 미노아의 주제, 예를 들어 황소 뛰어넘기가 등장하지만, 미케네인의 호전적인 취향에 맞춰 변형된 경우도 있다. 미케네인들은 뛰어난 칼과 갑옷 제작 기술뿐 아니라, 금속 세공 기술도 뛰어났다.[183][246]
10. 1. 금속 공예
미케네 수갱식 무덤에서 발견된 금속 유물들은 미케네 문명의 금속 공예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가장 유명한 유물 중 하나는 하인리히 슐리만이 발견하여 "아가멤논의 가면"이라 명명한 금제 장례 가면이다. 이 가면은 수염을 기른 남성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의지와 강인함이 느껴지는 표정이 특징이다.[183] 이 가면은 죽은 자의 혼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고, 시신을 보존하며 모습을 영속화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이 외에도 은제 포위용 술잔, 황소 머리 술잔, 금제 네스토르의 잔 등 다양한 금속 공예품이 발굴되었다. 금 인장 반지와 조각된 보석들은 미케네 엘리트 계층의 사치스러운 수집품이었음을 보여준다. 미케네인들은 칼과 갑옷 제작에도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을 비롯한 다수의 금속 세공품은 그들의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246] 최고급 미케네 예술품의 상당수는 크레타에서 수입된 미노아 예술품이거나 크레타 출신 또는 크레타에서 훈련받은 장인들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미케네인들의 호전적인 취향을 반영하여 주제가 조정된 경우도 있다. 미케네 궁전의 문어가 그려진 대형 항아리 (NAMA 6725) 와 같이 미노아 양식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미케네의 금속 공예는 독자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10. 2. 선박
미케네 문명의 예술은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나, 전사 중심 사회의 특징을 반영하여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건축은 크레타 궁전과 달리, 미케네나 티린스와 같은 산성(山城) 형태의 거대한 성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 '사자문'이라 불리는 성문이 있는데, 한 쌍의 통돌에 문중방을 얹고, 그 위에 두 마리 사자를 부조한 삼각형의 커다란 석판이 얹혀 있는 구조다. 이 사자문 안쪽의 수갱분묘에서는 슐리만에 의해 많은 재보가 발견되었다. 궁전 내부는 메가론(megaron, 넓은 방)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원시 그리스의 주거 형태로, 현관, 전실, 그리고 중앙에 난로가 있는 커다란 주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미케네 문명의 지배 계층이 인도유럽어족임을 시사한다. 궁전의 건축 세부나 내부 장비는 크레타 미술을 모방한 면이 많지만, 회화에서는 미케네의 요소와 크레타의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양식을 보인다. 티린스 성의 <멧돼지 사냥> 프레스코화는 그 예시로, 크레타풍 동물이 묘사되어 있지만, 개들이 멧돼지를 일관되게 공격하는 모습은 미케네인의 호전적인 성격을 반영한다. 크레타 미술의 유화하고 미려한 스타일과는 달리, 미케네 미술은 늠름하고 양식화된 경향을 보인다. 또한 미케네 문명은 여러 곳에 산재하는 지하 묘실 건축으로도 특징지어지는데, 언덕 경사면에 긴 통로를 파고, 그 끝에 지하의 원추형 묘실을 만든 형태다. 묘실 입구는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참고로, 그리스 왕후들의 장례식에서는 개나 말, 노예까지도 공물로 희생시키는 풍습이 있었다. 최고급 미케네 예술품들은 크레타에서 수입된 미노아 예술품이거나 크레타인 또는 크레타에서 훈련받은 예술가들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자기는 이러한 경향이 덜하지만, 미케네 궁전의 문어가 그려진 대형 항아리 (NAMA 6725)는 미노아 해양 양식에서 직접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1350년 이후에는 그러한 경향이 줄어들었다. 일부 작품에서는 미노아의 주제, 예를 들어 황소 뛰어넘기가 등장하지만, 미케네인의 호전적인 취향에 맞춰 변형된 경우도 있다. 아가멤논의 가면은 미케네 유적 발굴 당시 슐리만이 발견한 대표적인 금속공예품으로, 현재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미케네인들은 뛰어난 칼과 갑옷 제작 기술뿐 아니라, 금속 세공 기술도 뛰어났다.[183][246]10. 3. 인물상과 소상
미케네 시대의 소조상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여성의 모습을 한 Phi, Psi, Tau 형태의 소조상이 있으며, 이는 봉납물이나 장난감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남성, 여성, 또는 소 형태의 테라코타 회전 성형 인형도 발견되었다. 특히 유명한 것은 아테네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아가멤논의 마스크"아가멤논의 가면로, 죽은 전사의 얼굴을 덮었던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진 마스크이다. 수염이 있는 남성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의지의 강인함과 결단력이 느껴진다. 이 마스크는 죽은 자의 혼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고, 시신을 보존하며 모습을 영속화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스크는 하인리히 슐리만하인리히 슐리만이 미케네의 수갱분묘에서 발굴했다. 미케네 문명의 호전적인 성격을 반영하듯 칼과 갑옷 제작뿐 아니라 금은 세공 기술 또한 뛰어났다.10. 4. 프레스코화
미케네 프레스코화는 크레타 미술의 영향을 받았지만, 미케네인 특유의 호전적인 성향과 미술적 취향이 반영되어 차별화된다. 티린스의 성을 장식했던 프레스코화 조각 중 하나인 ''멧돼지 사냥'' (아테네 국립미술관 소장)은 대표적인 예시다. 크레타 프레스코화와 유사한 동물 묘사가 보이지만, 개들이 멧돼지를 일관되게 공격하는 모습에서 미케네인의 단호하고 직선적인 미적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크레타 미술의 유려함과는 달리, 미케네 프레스코화는 역동적이고 강인한 묘사를 통해 사냥, 투우, 전투 장면, 행렬 등 다양한 주제를 표현했다. 궁전과 주거지에서 발견된 벽화 조각들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특히, 전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은 미케네 예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최고급 미케네 예술품의 상당수는 크레타에서 수입된 미노아 예술품이거나 크레타 출신 또는 크레타에서 훈련받은 예술가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미케네인의 취향에 맞춰 주제가 조정된 점이 눈에 띈다. 미케네 궁전의 문어가 그려진 대형 항아리 (NAMA 6725)는 미노아 해양 양식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하지만 기원전 1350년경 이후에는 이러한 미노아 양식의 영향이 감소한다.[183] [246]11. 매장 관습
미케네 문명의 매장 관습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보였다. 초기에는 주로 개인 무덤 형태로, 구덩이 또는 돌로 둘러싼 석관에 매장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부장품은 토기와 드물게 장신구 정도였다.[199] 중기 헬라딕 시대부터는 엘리트 계층을 위한 구덩이 또는 석관 무덤에 봉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200] 이러한 매장 방식은 쿠르간 문화와 연관짓는 시각도 있지만,[201] 미케네 매장은 그리스 본토의 토착적인 발전이며, 특히 수직갱 무덤이 토착 통치자들의 매장에 사용되었다.[202] 구덩이와 석관 무덤은 미케네 시대 내내 단일 매장이나 더 정교한 가족 무덤과 함께 사용되었다.[203] 미케네 A 무덤군과 B 무덤군은 집단 매장의 또 다른 예시로, 무기, 화려한 장신구, 금은 잔 등의 부장품은 매장자의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여준다.[204] 후기 헬라딕 시대에는 직사각형 형태의 공동 묘지가 등장했고, 화장도 점차 늘어나 미케네 시대 후반에는 흔해졌다.[205]
톨로스 무덤(벌집 무덤)은 기원전 15세기 초에 등장한 새로운 엘리트 매장 방식이다.[206] 미케네에서 발견된 가장 인상적인 무덤들은 톨로스 형태의 기념비적인 왕가 무덤들로, 도시의 왕족을 위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07] 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가 가장 유명하며, 미케네 지역에서는 총 9개의 톨로스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6개는 기원전 1400년에서 1300년 사이 후기 헬라딕 IIA 시대의 것이다.[207] 다른 왕조나 파벌들이 과시적인 매장으로 경쟁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208]
11. 1. 매장 방식
초기 미케네 시대의 매장 방식은 주로 구덩이 또는 돌로 둘러싼 석관 형태의 개인 무덤이었으며, 부장품은 토기와 드물게 장신구에 국한되었다.[199] 공동체 엘리트 구성원들의 매장은 구덩이 또는 석관 무덤에 이루어졌으며, 중기 헬라딕 시대부터는 봉분으로 덮이기도 했다.[200] 이는 쿠르간 문화와 연관된다는 주장도 있으나,[201] 미케네 매장은 그리스 본토의 토착적인 발전으로, 수직갱 무덤을 통해 토착 통치자들을 매장했다는 것이 정설이다.[202] 구덩이와 석관 무덤은 미케네 시대 내내 단일 매장이나 정교한 가족 무덤에 사용되었다.[203] 미케네 A 무덤군 및 B 무덤군은 엘리트 계층의 집단 매장 방식을 보여준다.[204] 이러한 무덤에서는 사망자 옆에서 무기 세트, 화려한 지팡이, 금은 잔 등이 발견되어 당시 사회적 지위를 보여준다.[204] 후기 헬라딕 시대부터는 직사각형 형태의 공동 묘지가 등장했다. 하지만 톨로스가 엘리트 지배자, 개인 무덤이 하층 계급, 공동 무덤이 일반 민중의 매장 방식이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화장은 시대가 지날수록 늘어나 미케네 시대 말기에 상당히 일반화되었다.[205] 기원전 15세기 초에는 새로운 엘리트 매장 형태인 톨로스가 등장했고,[206] 미케네의 기념비적인 왕가 무덤, 특히 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는 도시의 왕족을 위한 것이었다.[207] 미케네 지역에서는 총 9개의 톨로스 무덤이 발견되었으며, 그중 6개는 후기 헬라딕 IIA 시대 (기원전 1400년~1300년경)에 해당한다.[207] 서로 다른 왕조나 파벌이 과시적인 매장을 통해 경쟁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208]11. 2. 톨로스 무덤
후기 헬라딕 시대부터 등장한 톨로스(벌집 무덤)는 미케네 문명의 특징적인 매장 방식이다. [206] 초기 미케네 시대에는 주로 구덩이 또는 돌로 둘러싼 석관 형태의 개인 무덤이 사용되었고, 부장품도 토기나 드문 장신구에 국한되었다. [199] 중기 헬라딕 시대부터는 엘리트 구성원들의 무덤에 봉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200] 미케네 A 무덤군과 B 무덤군은 엘리트 계층의 집단 매장 방식을 보여주는데, 무덤에서 발견된 무기, 장신구, 금은 잔 등은 당시 사회적 지위를 반영한다. [204] 하지만, 모든 매장 형태가 사회적 계층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직사각형 형태의 공동 묘지도 존재했으며, 화장 또한 시대가 지나면서 증가했다. [205]톨로스는 기원전 15세기 초 새로운 엘리트 매장 형태로 등장했다. [206] 가장 유명한 톨로스는 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로, 미케네의 왕족을 위한 기념비적인 무덤으로 여겨진다. [207] 미케네 지역에서는 총 9개의 톨로스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중 6개는 기원전 1400년에서 1300년 사이 후기 헬라딕 IIA 시대의 것이다. [207] 일각에서는 서로 다른 왕조나 파벌이 화려한 무덤을 통해 경쟁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08] 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는 톨로스 무덤의 대표적인 예시이며, 톨로스 무덤 자체가 엘리트 지배자들의 무덤임을 시사한다.
12. 요리
미케네 문명의 요리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자세히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하지만 미케네, 글라, 필로스 등지에서 발견된 꼬치구이용 접시가 당시 요리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209] 이른바 "수블라키 접시" 또는 휴대용 그릴이라고 불리는 이 직사각형 세라믹 팬은 고기 꼬치를 놓는 데 사용되었다.[209] 이 접시들을 직접 불 위에 올려놓았는지, 아니면 뜨거운 숯을 담아 휴대용 바비큐처럼 사용했는지는 불확실하다.[209][210] 더 많은 유적 발굴과 연구를 통해 미케네인들의 식생활에 대한 더욱 풍부한 정보가 밝혀지길 기대한다.
13. 문자
기원전 1600년경 미케네 그리스인들은 미노아 문명의 선형 A 문자를 차용하여 선형 B 문자라는 자신들만의 음절 문자를 개발했습니다.[211] 선형 B 문자는 미케네 궁전에서 경제 거래 기록 등 행정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미케네 방언의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211] 처음에는 크레타에서 아서 에반스 경에 의해 발견되었으나,[212][213] 1952년 마이클 벤트리스에 의해 해독되어 고대 그리스어임이 밝혀졌습니다.[212][213] 벤트리스의 해독은 미케네 그리스어가 호머의 언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 방언임을 보여주었습니다.[211] 미케네 지역 전역에서 유사한 기록이 발견되었지만, 서기관들은 때때로 지역 방언의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공통 언어의 존재는 공유된 관료 시스템과 문자 체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214] 선형 B 문자는 점토판에 새겨져 기록되었으며, 초기에는 크노소스에서 발견되어 미노아 문명의 유물로 여겨졌으나, 1939년 피로스 궁전에서 발견된 점토판을 통해 미케네 문명에서 사용된 것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이후 1952년 미케네 궁전, 1971년 티린스에서도 선형 B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이 발굴되었습니다.
13. 1. 선형 문자 B
기원전 1600년경, 미케네 그리스인들은 미노아 문명의 선형 A 문자를 차용하여 선형 B 문자라는 자신들만의 음절 문자를 개발했습니다.[211] 이 문자는 미케네 궁전에서 경제 거래 기록 등 행정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미케네 방언의 그리스어로 작성된 점토판과 일부 토기에 남아 있습니다.[211] 초기에는 크레타 섬에서 발견된 점토판 때문에 미노아 문명의 문자로 여겨졌으나,[212][213] 1939년 피로스 궁전에서 선형 B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이 발견되면서 미케네 문명에서 사용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이후 1952년에는 미케네 궁전, 1971년에는 티린스에서도 점토판이 발굴되었습니다. 영국의 건축가이자 암호 해독가인 마이클 벤트리스는 1952년 선형 B 문자를 해독하여 이것이 고대 그리스어, 즉 미케네 그리스어임을 밝혀냈습니다.[212][213] 이는 미케네 그리스어가 호머의 언어에서 서사시적 시가의 오랜 구전 전통의 결과로 생존한 요소들을 가진 가장 오래된 그리스 방언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211] 미케네 지역의 기록들은 대체로 유사했지만, 서기관들은 때때로 지역 방언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있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공통 언어의 존재는 공유된 관료 시스템과 문자 체계에 의해 설명될 수 있습니다.[214]14. 유산
그리스 암흑기 이후, 그리스는 트로이 전쟁 서사시를 포함한 신화와 전설 속에서 부상했습니다.[215] 고전 시대 그리스인들은 미케네 시대를 영웅의 시대이자 신들과 가까운 시대로 이상화했습니다.[216] 호메로스 서사시의 전설은 그리스 과거의 일부로 받아들여졌고, 19세기가 되어서야 학자들이 역사적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215] 1876년, 하인리히 슐리만의 미케네 발굴은 고고학적으로 이를 뒷받침했습니다.[217] 슐리만은 일리아드의 역사적 정확성을 증명하려 했습니다.[215]
미케네 신들의 이름은 후대 올림포스 신화의 주요 인물이 되었고,[218] 미케네어는 그리스어의 최초 기록입니다.[219] 미케네어 어휘의 상당 부분은 현대 영어에도 남아있습니다.[220]
미케네인들은 토목공학의 선구자였으며, 로마 시대까지 유럽에서 전례없는 요새, 다리, 배수로, 수로, 댐, 도로 등을 건설했습니다. 삼각형 아치 등 건축 혁신도 이루었습니다.[221] 미노아 문명의 예술과 공예도 전파했습니다. 미케네 문명은 다른 유럽 후기 청동기 시대 문화보다 발전했습니다.[222] 미케네의 여러 업적은 후대에 이어졌고, 미케네 그리스를 문명의 요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221]
일부 학자들은 해양 민족의 일부를 미케네 그리스인으로 보고 있습니다.[223][224] 우카슈 니에시오워프스키-스파노의 2020년 연구에 따르면, 성경의 레위 사람들은 그리스어 "*la-wo" (''laoi'') – "백성" 또는 "무장한 사람들"과 관련이 있습니다.[225] 니에시오워프스키-스파노는 레위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미케네 그리스 용병 집단이라고 주장합니다.[225]
14. 1. 미케네의 유산
고대 그리스인들은 미케네 시대를 영웅의 시대이자 신들과의 친밀함과 물질적 풍요의 영광스러운 시대로 이상화했습니다. [216] 특히 호메로스 서사시의 전설은 그리스의 과거로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하인리히 슐리만의 1876년 미케네 유적 발굴은 이러한 인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217] 슐리만은 일리아드의 역사적 정확성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215] 미케네 시대의 신들과 여신들은 후대 올림포스 신전의 주요 인물이 되었고, 미케네어는 그리스어의 최초 기록된 증거입니다. [218] [219] 미케네어 어휘의 상당 부분은 현대 영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20]미케네인들은 토목공학 분야에서도 선구자였습니다. 요새, 다리, 배수로, 수로, 댐, 도로 등 로마 시대까지 유럽에서 전례 없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건설했으며, 삼각형 아치와 같은 건축 혁신도 이루었습니다. [221] 또한 미노아 기원의 예술과 공예를 전파했고, 유럽의 다른 후기 청동기 시대 문화보다 더 발전했습니다. [222] 이러한 업적들로 인해 미케네 그리스는 문명의 요람으로 여겨져도 무리가 없습니다. [221] 일부 학자들은 근동으로 이주한 해양 민족을 미케네 그리스인으로 보기도 하며, [223][224] 우카슈 니에시오워프스키-스파노의 연구에 따르면, 성경의 레위 사람들은 미케네 그리스 용병 집단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225]
15. 유전학 및 인류 측정 연구
미케네인과 관련된 유전학 및 인류 측정 연구는 그들의 기원과 유전적 구성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Argyropoulos 외(1989)의 연구는 두개안면 형태 분석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미케네인 포함)과 현대 그리스인 사이의 현저한 유사성을 발견하여 그리스 민족 집단의 두개 및 안면 형태가 4,00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음을 시사했다.[226] Papagrigorakis 외(2014)의 연구 또한 현대 그리스인과 고대 그리스인(미케네인 포함) 사이의 두개학적 유사성을 확인했다.[227]
Lazaridis 외(2017)의 고고유전학 연구는 미노아인과 미케네 그리스인이 유전적으로 매우 유사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을 밝혔다. 현대 그리스인은 미케네인과 유사하지만 초기 신석기 시대 조상의 혼합이 더 추가되었다. 이집트나 페니키아 식민지 개척민에 의한 이주는 연구 결과에서 확인되지 않았다.[231] 미케네 그리스인과 미노아인은 현대 그리스, 키프로스, 알바니아, 이탈리아 인구와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웠다.
Clemente 외(2021)의 연구에 따르면, 초기 청동기 시대 에게 해의 미노아, 헬라딕, 키클라데스 문명의 인구는 유전적으로 동질적이었으나, 중기 청동기 시대에는 폰토-카스피아 대초원의 Yamnaya 관련 인구로부터의 유전자 흐름으로 인해 더욱 다양해졌다. 이 유전자 흐름은 기원전 2300년경으로 추정되며, 프로토 그리스어의 등장과 일치한다. 현대 그리스인은 이들과 약 90%의 조상을 공유하며, 미케네인의 경우 이 대초원 관련 조상은 희석되었다.[232]
Lazaridis 외(2022)의 연구는 추가적인 미케네 및 미노아 표본을 분석하여 미케네인이 서부 대초원(Yamnaya 유사) 조상의 유입으로 미노아인과 차별화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미케네 표본은 평균 약 8.6%의 대초원/Yamnaya 유사 조상과 4.3%의 동유럽 사냥꾼-채집인 조상, 그리고 거의 같은 비율의 코카서스 사냥꾼-채집인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미케네인에게는 대초원 조상이 전혀 없었다.[236] 그리스 본토 출신 미케네인의 EHG 조상 비율은 다양했고, 크레타 출신 미케네인은 상당한 EHG 조상을 보였다.[235] 나머지 미케네 조상은 미노아인과 그리스 본토의 초기 청동기 시대 인구와 유사했다. 이 연구 결과는 미케네인이 Yamnaya 유사 대초원 이주민과 미노아 유사 인구 간의 혼합 결과라는 가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233] 미노아인은 주로 초기 유럽 농부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235] Paul Heggarty는 이 연구 결과에 대해 Yamnaya 문화의 조상 혼합의 기여가 적다는 점을 지적했다.[237]
Skourtanioti 외(2023)의 연구는 그리스 본토와 에게 해 출신의 청동기 시대 개인에 대한 게놈 전체 데이터를 분석했다.[238] 미케네(후기 청동기 시대) 개인은 초기 청동기 시대 개인과 달리 중앙 및 동유럽 청동기 시대 인구 방향으로 편차를 보였는데, 이는 서부 대초원 관련 조상 때문이다.[239] 이 조상의 유입은 기원전 15세기 이후 섬에 대한 미케네의 지배와 관련이 있었고,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후기 이주에도 기인했을 수 있다.[240]
연대 | 위치 | 성별 | mtDNA | Y-DNA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남성 | T2b | CT |
BC | 펠로폰네소스, 아파테이아 갈라타스 | 남성 | X2 | J2a1 |
BC | 펠로폰네소스, 아파테이아 갈라타스 | 여성 | X2 | – |
BC | 펠로폰네소스, 아카이아, 미그달리아 | 여성 | H26b | – |
BC | 아이기나, 라자리데스 | 여성 | T1a5 | – |
BC | 프티오티스, 프로스키나스 | 남성 | ? | J |
BC | 펠로폰네소스, 아카이아, 미그달리아 | 남성 | T1a4 | J2b2a1 |
BC | 펠로폰네소스, 아카이아, 미그달리아 | 남성 | K1a | J2b2a1 |
BC | 펠로폰네소스, 아카이아, 미그달리아 | 남성 | K1a | J2b2a1 |
BC | 아티카, 콜리크레피-스파타 | 여성 | T2c1+146 | – |
BC | 펠로폰네소스, 아카이아, 미그달리아 | 남성 | U8b1a2b | G2a2a1 |
BC | 펠로폰네소스, 아카이아, 미그달리아 | 여성 | U3c | – |
BC | 펠로폰네소스, 메세니아, 네스토르 궁전 | 남성 | ? | F |
BC | 아티카, 콜리크레피-스파타 | 여성 | HV | – |
BC | 아티카, 콜리크레피-스파타 | 여성 | HV0a | – |
BC | 펠로폰네소스, 아카이아, 미그달리아 | 남성 | U8b1a2b | J2b2a1 |
BC | 펠로폰네소스, 코린토스, 아이도니아 | 남성 | R0a1a | C1a2 |
BC | 펠로폰네소스, 코린토스, 아이도니아 | 여성 | K1a2c | – |
BC | 아티카, 콜리크레피-스파타 | 남성 | H5 | J2a1a2b2a2b2~ |
BC | 펠로폰네소스, 아르골리스, 티린스 | 남성 | W1h1 | J2a1a1a2 |
BC | 아티카, 글리카 네라 | 남성 | ? | R1b1a1b |
BC | 아이기나, 라자리데스 | 남성 | H | G2a |
BC | 아티카, 글리카 네라 | 남성 | U3c | J2a1a |
BC | 펠로폰네소스, 페리스테리아 트리필리아 | 여성 | H | – |
BC | 살라미스, 아기아 키리아키 | 여성 | X2d | – |
BC | 펠로폰네소스, 메세니아, 네스토르 궁전 | 여성 | J1c1 | – |
BC | 아이기나, 라자리데스 | 여성 | K2a2a | – |
BC | 펠로폰네소스, 아르골리스, 티린스 | 남성 | H13a2a | J2a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H41a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남성 | K1a+195 | J2a1a1a2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N1a1b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남성 | ? | G2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H4a1 | – |
BC | 포키스, 카스트룰리-데스피나 | 여성 | K1a2 | – |
BC | 펠로폰네소스, 아르골리스, 티린스 | 여성 | V | – |
BC | 포키스, 카스트룰리-데스피나 | 남성 | H2 | G2a2b |
BC | 포키스, 카스트룰리-데스피나 | 남성 | W1 | J2a1a2b2a2b2~ |
BC | 펠로폰네소스, 코린토스, 아이도니아 | 여성 | U5a1d2b | – |
BC | 펠로폰네소스, 코린토스, 아이도니아 | 남성 | N1b1a2 | J2a |
BC | 펠로폰네소스, 코린토스, 아이도니아 | 남성 | N1b1a2 | J2a2~ |
BC | 펠로폰네소스, 코린토스, 아이도니아 | 남성 | ? | R1b1a1b |
BC | 포키스, 카스트룰리-데스피나 | 남성 | K2b | G |
BC | 포키스, 카스트룰리-데스피나 | 여성 | U3b1b | – |
BC | 펠로폰네소스, 메세니아, 네스토르 궁전 | 남성 | H7 | G |
BC | 펠로폰네소스, 메세니아, 네스토르 궁전 | 남성 | ? | G2a2a1a2a1a1 |
BC | 펠로폰네소스, 메세니아, 네스토르 궁전 | 여성 | J1c+16261 | – |
BC | 펠로폰네소스, 메세니아, 네스토르 궁전 | 여성 | K1c1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W1h1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남성 | ? | CT |
BC | 포키스, 카스트룰리-데스피나 | 남성 | T2c1d1 | G2a2b2b1a1a2 |
BC | 포키스, 카스트룰리-데스피나 | 여성 | U3b | – |
BC | 포키스, 카스트룰리-데스피나 | 여성 | U3b1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H7c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남성 | H4a1 | E1b1b1a1b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H1bm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HV1abc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남성 | H | J2a/J2a1a~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남성 | J2b1 | R1b1a1b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남성 | K1a4b1 | J2a1a1a2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N1'5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HV1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남성 | H1 | G2a2b2a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H1e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H1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H1az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W6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HV4a1+16291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남성 | X2 | J2a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여성 | H1m | – |
BC | 크레타섬, 하니아 | 남성 | J2b1 | G2a |
BC | 펠로폰네소스, 메세니아, 네스토르 궁전 | 남성 | N1a1a1a3 | R1b1a1b2a |
BC | 펠로폰네소스, 메세니아, 네스토르 궁전 | 남성 | ? | R1b1a1b |
BC | 펠로폰네소스, 메세니아, 네스토르 궁전 | 남성 | X | R1b1a1b |
BC | 파로스, 쿠쿤나리스 | 여성 | H5a2 | – |
BC | 파로스, 쿠쿤나리스 | 남성 | U1a1a | J1/J1b |
BC | 파로스, 쿠쿤나리스 | 여성 | J2b1b1 | – |
BC | 파로스, 쿠쿤나리스 | 여성 | H+16291 | – |
15. 1. 유전 연구
Argyropoulos 외(1989)의 연구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미케네인 포함)과 현대 그리스인의 두개안면 형태가 매우 유사하여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이는 그리스 민족 집단의 두개 및 안면 형태가 지난 4,00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음을 시사한다.[226] Papagrigorakis 외(2014)의 연구 또한 현대 그리스인과 고대 그리스인(미케네인 포함) 사이의 두개학적 유사성을 확인했다.[227]Lazaridis 외(2017)의 연구는 미노아인과 미케네인이 유전적으로 매우 유사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을 밝혔다. 현대 그리스인은 미케네인과 유사하지만 초기 신석기 시대 조상의 혼합이 더 추가되었다. 이 연구는 이집트나 페니키아 식민지 개척민의 이주 가능성을 데이터를 통해 배제하며, 에게 해 문화가 이 지역의 오래된 문명의 이주민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가설을 기각했다.[228] 미케네인과 미노아인은 현대 그리스, 키프로스, 알바니아, 이탈리아 인구와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웠다.[229] [230] [231]
Clemente 외(2021)의 연구는 초기 청동기 시대 에게 해 지역의 미노아, 헬라딕, 키클라데스 문명의 인구가 유전적으로 동질적이었지만, 중기 청동기 시대에는 폰토-카스피아 대초원의 Yamnaya 관련 인구로부터의 유전자 흐름으로 인해 더욱 다양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스 북부의 중기 청동기 시대 개인의 게놈 분석 결과, 이들은 대초원과 관련된 조상의 비율이 훨씬 더 높았다. 이 유전자 흐름은 기원전 2300년경으로 추정되며, 프로토 그리스어의 등장을 설명하는 주요 언어 이론과 일치한다. 현대 그리스인은 이들과 약 90%의 조상을 공유하며, 두 시대 사이의 연속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미케네인에게서 대초원 관련 조상의 비율은 희석되었다.[232]
Lazaridis 외(2022)의 연구는 새로운 미케네 및 미노아 표본을 분석하여, 미케네인이 서부 대초원(Yamnaya 유사) 조상의 유입으로 미노아인과 차별화되었음을 밝혔다. 미케네 표본은 평균 약 8.6%의 대초원/Yamnaya 유사 조상을 가지고 있으며, 동유럽 사냥꾼-채집인(EHG) 조상(평균 4.3%)과 거의 같은 비율의 코카서스 사냥꾼-채집인 조상(평균 4.3%)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일부 미케네인에게는 대초원 조상이 전혀 없었다. 그리스 본토 출신의 미케네 표본은 EHG 조상의 비율이 19%에서 12%까지 다양했고, 크레타 출신의 미케네인은 24%의 EHG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 미케네 조상은 미노아인과 그리스 본토의 초기 청동기 시대 인구와 유사했다. 엘리트 미케네 표본(네스토르 궁전 등)은 일반 인구와 조상 구성 측면에서 차이가 없었다.[233] [234] [235] [236] 미노아인은 주로 초기 유럽 농부 조상(평균 74%)을 가지고 있으며, 코카서스 사냥꾼-채집인 조상(평균 18.2%)도 가지고 있었다. 일부 미노아인과 미케네인에게서 레반트 선토기 신석기 시대 조상이 확인되었다.[235] 이 연구 결과는 미케네인이 Yamnaya 유사 대초원 이주민의 후손과 미노아 유사 인구 간의 혼합의 결과라는 가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며,[233] 대초원 이주민은 인도유럽어 사용자이자 그리스어의 조상으로 간주된다.[236]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Paul Heggarty는 이 연구에 대해 Yamnaya 문화의 조상 혼합의 "작은 기여"와 대초원을 인도유럽어의 "가장 초기의 원래 출처"로 연결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을 표명했다.[237]
Skourtanioti 외(2023)의 연구는 그리스 본토와 에게 해 출신의 청동기 시대 개인에 대한 게놈 전체 데이터를 분석했다.[238] 미케네(후기 청동기 시대) 개인은 초기 청동기 시대 개인과 달리 중앙 및 동유럽 청동기 시대 인구 방향으로 편차를 보였는데, 이는 이전 표본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서부 대초원 관련 조상 때문이다. 이 조상의 잠재적 원천에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서부 대초원 에네올리틱-청동기 시대' 및 '독일 끈문화'와 관련된 그룹이 포함되었으며, 후자의 두 그룹이 가장 적합한 원천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 유전적 친화성이 유래된 지역을 더 자세히 식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239] 그리스 남부 본토 출신의 미케네인은 평균 22.3%의 대초원 관련 조상을 가지고 있었고, 근처 섬과 키클라데스 제도 출신의 후기 청동기 시대 개인은 이러한 조상의 양이 약간 적었다. 크레타에서는 기원전 17세기에서 16세기에 거슬러 올라가는 표본에 이러한 대초원 관련 조상이 최소한으로 있거나 전혀 없었던 반면, 기원전 1300년경에 거슬러 올라가는 후기 표본은 0%에서 약 40%의 대초원 관련 조상까지 다양했다. 이 대초원 관련 조상의 유입은 기원전 15세기 이후 섬에 대한 미케네의 지배와 관련이 있었고, 이탈리아와 같은 더 먼 지역으로부터의 후기 이주에도 부분적으로 기인했을 수 있다.[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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