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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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향 아래 놓였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제국은 분열되었고, 그리스인들은 헬레니즘 도시로 이주하며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과 인도-그리스 왕국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에 세워졌다. 마케도니아의 지배에 저항하며 그리스 도시들은 연합을 시도했으나, 로마의 개입으로 독립을 잃고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로마 시대에도 그리스의 도시들은 문화적으로 번영했으나,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의 반란과 로마 내전으로 인해 혼란을 겪었다. 결국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그리스를 아카이아 속주로 편입시키며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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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 |
---|---|
개요 | |
시기 | 기원전 323년 ~ 기원전 31년 |
이전 시기 | 고대 그리스 |
이후 시기 | 로마 그리스 |
역사 | |
시작 |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기원전 323년) |
종료 | 악티움 해전 (기원전 31년) 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멸망 (기원전 30년) |
특징 | |
문화 | 그리스 문화의 확산 및 혼합 (헬레니즘) |
정치 | 디아도코이에 의한 제국 분할 및 경쟁 |
경제 | 무역 및 도시 발전 |
주요 국가 | |
국가 | 셀레우코스 제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안티고노스 왕조 아탈로스 왕조 (페르가몬) 아이톨리아 동맹 아카이아 동맹 보스포루스 왕국 |
기타 국가 | 에피로스 시라쿠사 |
주요 인물 | |
인물 | 알렉산더 대왕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피루스 아르키메데스 에라토스테네스 |
전투 및 사건 | |
주요 사건 | 이프소스 전투 (기원전 301년) 코린토스 전투 (기원전 146년) 악티움 해전 (기원전 31년) |
추가 정보 | |
관련 용어 | 헬레니즘 디아도코이 코이네 그리스어 |
2. 마케도니아의 부상과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그리스인들의 시야는 크게 넓어졌고,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에 심했던 도시 국가 간의 갈등은 사소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많은 그리스인들이 동방의 새로운 그리스 제국으로 이주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까지 헬레니즘 도시들이 건설되어 그레코-박트리아 왕국과 인도-그리스 왕국이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존속했다.[1]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패배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다시는 강대국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들은 마케도니아와 그 후계 국가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해야 했지만, 각 도시의 독립성을 중시하여 현실적인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2]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제국은 분열되었고, 마케도니아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차지했다. 그는 테살로니키를 마케도니아의 수도로 삼았다. 아나톨리아의 지배자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에게 도전하며 그리스 도시들에 자유를 약속했고, 이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307년,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아테네를 점령하고 민주정을 복원했으나, 기원전 301년 이프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는 패배했다.
기원전 298년 카산드로스가 죽자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 왕위를 차지했지만, 기원전 285년 그리스 지배자들의 연합에 패배하고 트라키아의 왕 리시마코스에게 그리스 지배권이 넘어갔다. 리시마코스는 기원전 280년에 사망했고, 마케도니아 왕위는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에게 돌아갔다. 그는 갈리아인의 침공을 격퇴했고, 이 과정에서 셀레우코스 제국과 동맹을 맺어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 대항했다.
안티고노스 2세는 기원전 239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고, 그의 가문은 기원전 146년 로마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마케도니아 왕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대한 지배는 간헐적이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등이 반 마케도니아 파벌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안티고노스는 코린토스에 주둔군을 배치했지만, 아테네, 로도스, 페르가몬 등은 독립을 유지하고 아이톨리아 동맹을 결성했다. 스파르타도 독립을 유지했다.
기원전 267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그리스 도시들을 선동하여 크레모니데스 전쟁을 일으켰다. 아테네는 패배하여 독립과 민주정을 잃었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펠로폰네소스반도로 제한되었으나, 기원전 245년 테베를 장악하고 마케도니아 동맹이 되었다. 아테네는 정치적 역할을 잃었지만, 여전히 크고 부유한 도시로 남았다. 기원전 255년, 안티고노스는 코스에서 이집트 함대를 격파하고 에게해 섬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기원전 239년 안티고노스 2세 사후, 아카이아 동맹이 반란을 일으켰다. 안티고노스 도손이 섭정이 되어 기원전 222년 스파르타를 점령했다.
기원전 221년 안티고노스 도손이 죽자 필리포스 5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헬라스의 총아"로 불리며 그리스를 통일하고 로마에 대항할 능력을 가진 마지막 마케도니아 지배자였다. 그러나 기원전 215년, 필리포스 5세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어 로마의 개입을 초래했다.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기원전 205년에 애매하게 끝났지만,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적이 되었다.[1]
기원전 202년 로마는 카르타고를 무찌르고 동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기원전 198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어났고, 기원전 197년 필리포스 5세는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패배했다.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필리포스 5세에게 함대를 넘겨주고 로마의 동맹국이 될 것을 요구했다. 기원전 196년, 플라미니누스는 그리스 폴리스들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이는 환상일 뿐이었다. 로도스를 제외한 모든 도시는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였고, 민주정 대신 귀족정이 들어섰다.[2]
2. 1. 알렉산드로스 사후의 혼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은 장군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분열되었다. 여러 새로운 왕국들이 수립되었는데, 그중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의 휘하 장군이었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차지했다. 그는 수년간의 전쟁 끝에 그리스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테살로니키를 새로운 마케도니아의 수도로 건설하여 통치하였다.
그러나 카산드로스의 권력은 아나톨리아의 통치자 안티고노스에게 도전을 받았다. 안티고노스는 그리스 도시들에게 그를 지원하면 자유를 회복시켜 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는 카산드로스의 지역 통치자들에 대한 성공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307년,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아테네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억압되었던 민주정을 복원했다. 그러나 기원전 301년, 이프소스 전투에서 카산드로스와 다른 헬레니즘 왕들의 연합이 안티고노스를 격파하면서 그의 도전은 끝나게 되었다.
2. 2. 안티고노스 왕조와 그리스 도시 국가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큰 변화를 겪었다. 그리스인들의 시야는 넓어졌고, 도시 국가 간의 갈등은 사소해 보였다. 많은 그리스인, 특히 젊은이들은 동방의 새로운 그리스 제국으로 이주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까지 헬레니즘 도시들이 생겨났고, 그레코-박트리아 왕국과 인도-그리스 왕국이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존속했다.[1]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에게 패배한 그리스인들은 도시 국가가 다시는 강대국이 될 수 없으며, 마케도니아와 그 후계 국가에 대항하려면 연합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독립을 중시하여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독립을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연합을 시도했다.[2]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제국은 분열되었고, 마케도니아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차지했다. 그는 테살로니키를 수도로 삼고 건설적인 통치를 했다.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에게 도전하며 그리스 도시에 자유를 약속했고, 반란이 일어났다. 기원전 307년,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아테네를 점령하고 민주정을 복원했다. 그러나 기원전 301년, 이프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는 패배했다.

기원전 298년 카산드로스가 죽자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 왕위를 차지했으나, 기원전 285년 그리스 지배자들의 연합에 패배하고 트라키아의 왕 리시마코스에게 그리스 지배권이 넘어갔다. 리시마코스는 기원전 280년에 사망했고, 마케도니아 왕위는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에게 돌아갔다. 그는 갈리아 침공을 격퇴했고, 이 과정에서 셀레우코스 제국과 동맹을 맺어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 대항했다.
안티고노스 2세는 기원전 239년까지 통치했고, 그의 가문은 기원전 146년 로마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마케도니아 왕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리스 도시 국가에 대한 지배는 간헐적이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등이 반(反) 마케도니아 파벌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안티고노스는 코린토스에 주둔군을 배치했지만, 아테네, 로도스, 페르가몬 등은 독립을 유지하고 아이톨리아 동맹을 결성했다. 스파르타도 독립을 유지했다.
기원전 267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그리스 도시들을 선동하여 크레모니데스 전쟁을 일으켰다. 아테네는 패배하여 독립과 민주정을 잃었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펠로폰네소스반도로 제한되었으나, 기원전 245년 테베를 장악하고 마케도니아 동맹이 되었다. 아테네는 정치적 역할을 잃었지만, 여전히 크고 부유한 도시로 남았다. 기원전 255년, 안티고노스는 코스에서 이집트 함대를 격파하고 에게해 섬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2. 3. 필리포스 5세와 로마의 개입
기원전 221년 안티고노스 도손이 죽자 필리포스 5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그리스를 통일하고 "서쪽에서 몰려오는 구름"인 로마의 발흥에 대항해 독립을 지킬 기회와 재능을 가진 마지막 마케도니아 지배자였다.[1] 그는 "헬라스의 총아(寵兒)"라는 별명이 있었다.[1] 그의 보호하에 나우팍토스 화의(기원전 217년)가 맺어져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연맹들 간의 갈등이 종식되었으며, 이 시기에 그는 아테나이, 로도스, 페르가몬을 제외한 그리스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1]
그러나 기원전 215년, 필리포스는 로마의 적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1] 이 때문에 로마는 처음으로 그리스 문제에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게 된다.[1] 로마는 즉시 아카이아 도시들을 꾀어 필리포스에 대한 명목상의 충성을 버리도록 했으며, 소아시아의 맹주인 로도스와 페르가몬과 동맹을 맺었다.[1] 기원전 212년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어나 기원전 205년에 애매하게 끝났으나, 이때부터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적이 된다.[1] 로마의 동맹 로도스는 에게해 섬들에 지배권을 행사했다.[1]
기원전 202년 로마는 카르타고를 무찔렀고, 이제 동쪽에 관심을 돌릴 여력이 생겼다.[2] 로마는 그리스 동맹국인 로도스와 페르가몬을 이용했다.[2] 기원전 198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어났다.[2] 전쟁의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기본적으로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동방의 강대국 셀레우코스 왕국의 잠재적인 동맹국으로 보았기 때문이다.[2] 필리포스의 그리스 동맹국들은 그를 배신하고 기원전 197년 그는 키노스케팔라이에서 로마의 전임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2]
그리스에는 다행스럽게도 플라미니누스는 온건한 인물로, 그리스 문화의 옹호자였다.[2] 필리포스는 자신의 함대를 넘겨주고 로마의 동맹국으로 전락했다.[2] 기원전 196년 이스토미아 경기에서 플라미니누스는 코린토스와 칼키스에 로마군을 주둔하되 모든 그리스 폴리스에 독립을 선언했다.[2] 그러나 로마가 약속한 자유는 환상일 뿐이었다.[2] 로도스를 제외한 모든 도시는 사실상 로마가 움직이는 새 연맹에 가입되었으며, 민주 정치 대신 로마와 연합한 귀족 정권들이 들어섰다.[2]
3. 도시 국가와 연맹
그리스의 정치적 권력과 자율성은 감소했지만, 폴리스는 여전히 중요한 정치, 사회적 조직 형태였다. 아테네나 에페소스와 같은 전통적인 도시 국가들은 이 시기에 성장하고 번영하기도 했다. 그리스 도시들은 서로 전쟁을 계속했지만, 알렉산드로스 사후 헬레니즘 국가들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동맹을 맺거나, 다른 도시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아쉴로스'(asylos) 상태가 되기도 했다.
아이톨리아 동맹과 아카이아 동맹은 도시 대표자 회의와 동맹 시민 회의로 통치되는 강력한 연방 국가(''코이논'')를 발전시켰다.[2]
3. 1. 도시 국가의 연합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 폴리스들을 격파하면서,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도시 국가가 다시는 패권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폴리스들이 통합하거나 마케도니아 및 그 후계 국가들과 연합하지 않는 한 이들의 패권에 대적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각자 지역의 독립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여 현실적인 통합을 고려하지 못했지만, 독립을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연합을 결성했다.[2]그리스 도시들은 헬레니즘 국가들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맹을 맺거나, 강력한 헬레니즘 국가의 동맹이 되어 다른 도시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는 '아쉴로스'(asylos) 또는 불가침 상태가 되었다. 아이톨리아 동맹과 아카이아 동맹은 강력한 연방 국가 또는 동맹(''코이논'')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도시 대표자들의 회의와 동맹 시민들의 회의로 통치되었다. 처음에는 민족 동맹이었지만, 이 동맹은 나중에 전통적인 지역 밖의 도시를 포함하기 시작했다. 아카이아 동맹은 결국 스파르타를 제외한 펠로폰네소스반도 전체를 포함했으며, 아이톨리아 동맹은 포키스로 확장되었다. 기원전 3세기 동안 이 동맹들은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으며, 아이톨리아 동맹은 델포이에서 켈트족의 그리스 침략을 격퇴했다.[2]
3. 2. 아테네의 변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큰 변화를 겪었다. 특히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에 패배한 후에도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원전 307년 데메트리오스가 아테네를 점령하고 민주정을 복원하기도 했지만, 기원전 301년 이프소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이러한 노력은 좌절되었다.기원전 298년 카산드로스가 죽은 후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지만, 기원전 285년 그리스 지배자들의 연합에 패배했다. 이후 그리스는 트라키아의 뤼시마코스를 거쳐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에게 넘어갔다. 안티고노스 2세는 기원전 239년에 죽을 때까지 통치했으며, 그의 가문은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왕위를 유지했다.
아테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같은 다른 지배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 기원전 267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선동으로 안티고노스에 대항하여 크레모니데스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배했고, 독립과 민주 정치를 잃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여전히 그리스에서 가장 크고 부유하며 진보한 도시로 남아 있었다.
라미아 전쟁에서 안티파트로스에게 패배한 후, 아테네는 피레아스 항구에 마케도니아 수비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무스와 같은 다른 헬레니즘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고, 기원전 307년 데메트리우스가 도시를 점령하면서 다시 독립을 꾀했다. 데메트리우스가 마케도니아를 점령한 후, 아테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과 동맹을 맺고 기원전 287년에 반란을 일으켜 마케도니아를 격파했으나, 피레아스는 계속 점령당한 상태였다.
아테네는 크레모니데스 전쟁과 같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을 받아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아테네의 주요 동맹국이 되어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아테네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기원전 224/223년에 13번째 필레를 프톨레마이스로 명명하고 프톨레마이아라는 종교 숭배를 설립했다.
헬레니즘 시대 아테네에서는 신희극이 발전하고,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과 같은 헬레니즘 철학 학파들이 부상했다. 세기가 바뀔 무렵,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 약화되자 아테네의 후원자이자 보호자가 되었다. 아테네는 나중에 페르가몬의 왕 아탈로스 1세를 위한 숭배를 설립하기도 했다.
4. 로마 시대의 그리스
로마는 점차 그리스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고, 결국 그리스를 속주로 편입시켰다. 기원전 192년 안티오코스 3세가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로마와 셀레우코스 제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하면서 그리스는 로마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후 로마는 그리스 내부 분쟁에 개입하며 영향력을 확대했고, 기원전 171년에는 마케도니아 왕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아카이아 동맹 또한 로마에 의해 해산되면서 그리스의 독립은 종말을 맞이했다.
기원전 88년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리스는 다시 한번 혼란에 휩싸였다. 여러 그리스 도시들이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합류했지만, 결국 로마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로마 내전으로 그리스는 전쟁터가 되었고,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아카이아 속주로 로마 제국에 직접 편입되었다. 로마와의 투쟁으로 그리스는 인구가 감소하고 혼란을 겪었지만, 로마의 지배로 전쟁은 종식되었고, 아테네, 코린토스, 테살로니키, 페트라스 같은 도시들이 재건되어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4. 1. 로마의 발흥과 그리스 지배
기원전 192년, 로마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자 안티오코스 3세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하여 아이톨리아 동맹의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일부 그리스 도시들은 그를 로마로부터의 구원자로 여겼지만, 마케도니아 왕국은 로마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191년,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테르모퓔라이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격파하고 그를 아시아로 퇴각시켰다. 이 전쟁으로 로마군은 처음으로 아시아에 진출하여 마그네시아 전투(기원전 190년)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다시 격파했다. 이로써 그리스는 로마의 동방 진출로에 놓이게 되었고, 로마군은 영구적으로 주둔하게 되었다. 기원전 188년 아파메이아 조약으로 로마는 그리스 전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했다.[1]이후 로마는 그리스 내부 분쟁에 개입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마케도니아는 명목상 로마의 동맹이었으나 여전히 독립적인 상태였다. 기원전 179년 필리포스 5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페르세우스는 마케도니아의 지배하에 그리스를 통일하려는 야망을 품었으나, 당시 마케도니아는 이를 실현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그러나 로마의 동맹국인 페르가몬의 왕 에우메네스 2세는 페르세우스가 로마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로마를 설득했다.[2]
4. 2. 그리스 독립의 종말
에우메네스의 책략으로 로마는 기원전 171년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10만 명의 병력을 그리스로 보냈다. 마케도니아는 로마군에 대항할 수 없었고, 페르세우스는 다른 그리스 도시들의 지원을 얻는 데 실패했다. 로마군의 지휘가 허술했던 덕분에 3년을 버텼지만, 기원전 168년 로마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보내 피드나에서 마케도니아군을 격파했다. 페르세우스는 사로잡혀 로마로 압송되었고, 마케도니아 왕국은 네 개의 소국으로 분할되었으며, 마케도니아를 지원한 그리스 도시들은 징벌을 받았다. 로마의 동맹국이던 로도스와 페르가몬도 사실상 독립을 잃었다.안드리스코스라는 모험가의 지도로 기원전 149년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그 결과, 다음 해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지역 최초로 로마 속주가 되었다. 로마는 그리스 독립의 마지막 보루였던 아카이아 동맹에게 해산을 요구했다. 아카이아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로마에 전쟁을 선포했다.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들이 아카이아 편에 섰으며, 노예들까지 그리스 독립을 위해 싸우도록 해방되었다. 로마 집정관 루키우스 뭄미우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진격하여 코린토스에서 그리스인들을 제압하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기원전 146년, 섬 지역을 제외한 그리스 반도는 로마의 보호령이 되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제외한 지역에는 로마의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모든 도시들은 로마의 지역 동맹의 지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의 마지막 왕이 죽으면서 왕국을 로마에 넘겨주었고, 에게해 반도가 로마령 아시아 속주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 -|]]|thumb|350px|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마케도니아 병사. 팔레스트리나의 나일 모자이크 묘사, 기원전 100년경]]
기원전 88년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가 로마에 반란을 일으켜 10만 명이 넘는 로마인들과 로마의 소아시아 동맹국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그리스는 완전히 몰락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그리스인이 아니었으나, 아테네를 포함한 여러 그리스 도시들은 그들의 괴뢰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미트리다테스에게 합류했다. 로마 장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미트리다테스를 격퇴하자, 로마는 그리스에 보복하였고 그리스 도시들은 다시는 독립을 회복하지 못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기원전 65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대 폼페이우스)에게 패배했다.
로마의 내전으로 그리스는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결국 기원전 27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그리스를 로마 제국의 아카이아 속주에 직접 편입시켰다. 로마와의 투쟁으로 그리스는 인구 감소와 혼란을 겪었다. 그럼에도 로마의 지배로 최소한 전쟁은 끝났고, 아테네, 코린토스, 테살로니카, 페트라스 같은 도시들은 곧 재건되어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4. 3. 로마 통치와 그리스의 변화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기원전 88년 로마에 반란을 일으켜 10만 명이 넘는 로마인들과 로마의 소아시아 동맹국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그리스는 큰 타격을 입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리스인이 아니었으나, 아테네를 포함한 여러 그리스 도시들은 자신들의 괴뢰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합류했다. 로마 장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6세를 쳐부수자 로마는 그리스에 다시 앙갚음을 하여 그리스 도시들은 다시는 독립하지 못하게 되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기원전 65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대 폼페이우스)에 마침내 패퇴한다.로마의 내전으로 그리스는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결국 기원전 27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그리스를 로마 제국의 아카이아 속주에 직접 편입되었다. 로마와 투쟁하면서 그리스는 인구 감소와 혼란을 겪었다. 그럼에도 로마의 지배로 최소한 전쟁은 끝났고, 아테네, 코린토스, 테살로니키, 페트라스 같은 도시들은 곧 재건되어 번영을 누리게 된다.
참조
[1]
백과사전
Hellenistic Age
https://www.britanni[...]
2022-06-21
[2]
서적
Ancient Greece: A Political, Social, and Cultural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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