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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청동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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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한반도에서 청동기 문화를 사용했던 시기를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에 청동기 시대가 없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광복 이후 한국 고고학 연구를 통해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가 존재함이 밝혀졌다. 현재 한반도 전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며, 가장 오래된 청동 유물은 기원전 13세기로 추정된다. 주요 유물로는 세형 동검, 잔무늬 거울, 민무늬 토기 등이 있으며, 널무덤, 고인돌, 돌널무덤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발견된다. 이 시기에는 농경이 시작되었으며, 사회적 계층 분화가 나타나 고대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부여 송국리 유적, 울주 검단리 유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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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청동기 시대
개요
청동검
한국식 동검
시대청동기 시대
존속 기간기원전 2000년경 ~ 기원전 400년경
이전 시대신석기 시대
다음 시대철기 시대
문화적 특징
대표 유물청동검
청동 거울
고인돌
민무늬 토기
경제 기반농경 (벼농사 시작)
사회 구조계급 발생, 군장 사회
거주 형태움집 (지상 가옥화)
대표 유적지미송리식 토기
고인돌
반달돌칼
돌널무덤
돌무지무덤
주요 사건 및 변화
농경 기술 발달벼농사 시작, 농업 생산력 증가
사회 변화계급 분화 심화, 족장 사회 등장
무덤 양식 변화고인돌 축조, 권력 과시
청동기 제작제한적 생산, 지배 계층의 권위 상징
지역별 특징
한반도다양한 형태의 청동기 유물 출토, 고조선 건국
만주 지역청동기 문화 발전, 요령식 동검
요동 지역비파형 동검 출토
참고 문헌

2. 특징 및 연구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 학자들은 한국에 청동기 시대가 없었고, 금속 문화는 중국의 영향으로만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국 학자들의 연구로 한국에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각지에서 출토되는 청동기 유물들이 이를 뒷받침한다.[2]

과거에는 한국의 청동기 유물이 북한에만 있다는 설도 있었지만, 현재는 함경북도에서 전라남도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된다. 청동기 시대는 석기 시대 이후, 또는 석기와 공존하는 금석 병용기 시대동기 시대를 거쳐 나타난다. 한국에서는 뚜렷한 금석병용기 유물은 없지만, 청동기 유물은 석기, 청동 유물, 철기와 함께 출토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철기가 나오는 김해 패총을 금석 병용기로 잘못 정의하기도 했다.[2]

청동기 유물과 함께 출토된 간 돌칼

2. 1. 시대 구분

현재까지 발견된 한국 최고(最古) 청동 유물은 2016년 11월 강원도 정선군 아우라지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 장신구이며,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3세기 유물로 판명되었다.

현재 청동기 시대의 상한(上限) 문제는 학계에서 정론(定論)이 없는데, 기원전 15~10세기, 기원전 20~15세기 등 대체로 두 설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청동기 유물이 중국의 영향권이 아니므로, 재검토해야 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돌널무덤은 그 분포가 남(南)시베리아·만주·한국 등지까지 넓게 퍼져 있는데, 시베리아의 돌널무덤은 기원전 15세기이므로, 이 연대가 한국의 청동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한국의 돌널무덤에서도 청동기 유물이 나오기 때문에,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반드시 기원전 15세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향후 그 연대가 더 올라갈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논란은 여전했다.[3]

2. 2. 유물

붉은 간토기


진주시 대평면에서 출토된 민무늬 토기


한국의 청동기로는 세형 동검, 잔무늬 거울, 청동촉, 구리창 등이 있다. 세형 동검은 만주, 한국, 일본규슈, 러시아의 연해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출토된다. 과거에는 한국에서 발견되는 간석기 돌검을 동검의 모방품으로 보았지만, 현재는 이러한 해석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외에도 제사나 주술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지방울, 잔무늬 거울 등이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는 토기는 주로 민무늬 토기이다. 빗살무늬 토기와는 달리 밑이 편평한 것이 특징이며, 일반적으로 구릉 지대에서 발견되지만, 청동기와 함께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대전 괴정동에서는 검은 간토기가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기도 하였다. 반달 돌칼은 민무늬 토기 유적에서만 발견되며, 이는 중국 룽산 문화의 특징과 연결되어 농경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지지만, 그 전파 경로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2. 2. 1. 한국 고유의 청동기



한국의 청동기에는 세형 동검(細形銅劍), 잔무늬 거울(다뉴세문경(多鈕細紋鏡)), 청동촉(靑銅鏃), 구리창(동모(銅鉾)) 등이 있다. 특히 세형 동검은 만주, 한국, 일본규슈(九州), 러시아의 연해주에까지 걸친 광대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과거 한국에서 나오는 간석기 돌검을 동검의 모방품으로 보았으나, 현재는 이러한 해석이 타당성을 잃고 있다. 그 외 경문청동기를 비롯하여 제사나 주술 등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가지방울, 잔무늬 거울 등도 출토되고 있다.

2. 2. 2. 토기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는 토기는 주로 민무늬 토기이다. 민무늬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와는 달리 밑이 편평하며, 일반적으로 구릉 지대에서 출토되지만 때때로 청동기와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대전 괴정동 유적에서는 검은 간토기가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기도 하였다. 반달 돌칼은 민무늬 토기 유적에서만 발견되는데, 이는 룽산 문화(龍山文化)의 특징과 연결되어 농경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 다만, 반달 돌칼의 전파 경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2. 3. 무덤

강화도 고인돌


청동기 시대에는 널무덤, 고인돌(지석묘), 돌널무덤(석관묘), 독무덤(옹관묘), 움무덤(토광묘) 등 다양한 무덤 양식이 나타났다.[1]

2. 3. 1. 널무덤

은파군 갈현리 하석동, 황주군 천주리 한밭골, 황주군 흑교리, 재령군 부덕리 수역동, 은율군 운성리, 황주군 선봉리, 경주 구정리 등에서 세형 동검 등이 쇳조각(철편)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함경도 흥남군 호상동, 홍원군 운포리, 영흥군 소라리, 성주군 대성리, 경성군 동관리, 신창군 세동리에서도 청동 유물이 출토되었다.

2. 3. 2. 돌널무덤

강계군 어뢰면, 영덕군 사천리, 사리원 상매리, 서광군 천곡리에서 청동 유물이 출토되었다.

2. 3. 3. 고인돌

한국의 고인돌은 과거 남방식·북방식으로 구별하였지만, 북한에서도 남방식 고인돌이 발견되면서 이러한 구분이 정확한 개념이라고 보기 어렵게 되었다. 양주군 사노리, 봉산군 어수구, 김해 무계리에서 청동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외에도 대전 괴정동과 전라남도 화순에서 청동제 유물이 출토되어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고인돌의 전파 경로는 불분명하다. 중국 동북 지방에 많이 분포하고 있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만주, 한국, 일본의 규슈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따라서 한국의 고인돌이 자체적으로 발생한 문화인지, 대륙이나 해로를 통해 전래된 것인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고인돌의 연대는 기원전 8세기 이전에 시작되어 기원전 3~2세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2. 4. 대표 유적지

3. 경제 활동

청동기 시대의 경제 활동은 어로, 수렵 및 채집과 같은 초보적 단계를 벗어나 최소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반달돌칼의 존재는 농경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고, 거대한 고인돌을 조영할 수 있는 힘도 실은 양곡의 충족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청동기라는 이기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벌써 신분제의 초기적 성립을 보여주기 때문에 자유자재의 양식 생산이 가능한 사회에서 청동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들 청동기를 만들 수 있는 사회적 바탕이 곧 고대 국가를 세울 수 있는 힘과 조직의 근원이 된 것이다.

4. 일제 식민사관 비판과 극복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식민사관에 입각한 일본 학자들은 한국에 청동기 시대가 없었고 금속 문화 자체도 중국의 영향으로만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국인 학자들의 활발한 고고학 연구를 통해 한국에도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각지에서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면서 물적 증거도 확보되었다.

과거에는 한국의 청동기 유물이 북한 지역에만 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현재는 함경북도에서 전라남도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이러한 주장은 모두 수정되었다.

원래 청동기 시대는 석기 시대를 거치거나 지역에 따라서는 석기와 공존하는 금석 병용기 시대 혹은 동기 시대를 거친 뒤에 나타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뚜렷한 금석병용기 유물은 발굴되지 않았다.[2] 청동기 유물은 석기와 함께 나오거나, 순수하게 청동 유물만 나오기도 하며, 철기와 함께 출토되기도 한다. 이는 보편적인 현상임에도 일제강점기의 연구는 철기가 나오는 김해 패총을 금석 병용기라고 잘못 정의하였다.

5. 사진

참조

[1] 웹인용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23-01-28
[2] 웹사이트 금석병용기 http://100.empas.com[...]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03-21
[3] 논문 호서지역 무문토기의 변화와 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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