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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마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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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믹마스 전투는 사울 왕 치세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사울은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블레셋에 대항하였으며, 요나단의 기습 공격과 이스라엘 군의 합류, 그리고 지진으로 인한 블레셋 군의 혼란을 틈타 승리하였다. 이 전투를 통해 사울은 왕위를 더욱 굳건히 하였으며, 주변 민족들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며 이스라엘의 세력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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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마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게바, 미그론 전투
장소믹마스로 가는 길목인 불레셋 게바, 미그론
결과사울의 대승리, 블레셋 평정과 왕위를 굳힘
교전 세력
교전국 1연합 이스라엘 왕국
교전국 2블레셋
지휘관
이스라엘사울, 요나단
블레셋불명
병력 규모
이스라엘용사 3,000명, 사울과 함께 남은 병력은 600명
블레셋병거 3,000대, 기마 6,000명, 총 48,000명
사상자
이스라엘신뢰할 수 있는 추정치는 없으나, 매우 가벼운 피해
블레셋60,000명 사망
추가 정보
A. Labyː ''믹마스 전투'' (카셀의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
A. Labyː 믹마스 전투 (카셀의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
날짜기원전 1025년경
장소믹마스, 연합 이스라엘 왕국
일부후기 이스라엘 캠페인

2. 배경

사무엘사울을 왕으로 세워 연합 이스라엘 왕국이 성립된 후, 사울은 야베스 길앗 전투에서 암몬을 무찌르고 왕위를 굳혔다.[10]

이후 사무엘이 고별사를 하고 떠나고, 사울은 40세[10]가 되던 해에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 온 블레셋을 무찌르기 위해 국력을 동원하기로 결심한다.

2. 1.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갈등

사무엘에 의해 사울이 왕으로 세워져 연합 이스라엘 왕국이 성립된 후, 사울은 야베스 길앗 전투에서 암몬을 무찌르고 왕위를 굳혔다.[10]

이즈음 사무엘이 고별사를 하고 떠난 후, 사울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 온 블레셋을 무찌르기로 결심한다.

성경에 따르면, 사울의 군대는 보병으로만 구성되어 약 3,000명의 병사와 민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요세푸스와 사무엘기상 13:2에 따르면, 사울은 처음 이들 중 2,000명을 벧엘에서 자신의 경호병으로, 요나단에게 1,000명을 주어 기브아를 되찾는 데 사용하게 했다.[2]

그러나 병사들은 칼이나 창 없이 도끼, 낫, 괭이, 쟁기 쇳조각을 무기로 사용해야 했다. 사무엘기상 13:19는 "이스라엘 온 땅에서 대장장이를 찾아볼 수 없었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요세푸스는 이를 기브아 지역에서 블레셋인들이 체계적으로 그러한 물품을 압수한 탓으로 돌린다.[2] 사무엘기상 13:21에 따르면, "쟁기 쇳조각과 괭이를 가는 데는 2/3 세겔이 들었고, 갈고리와 도끼를 가는 데는 1/3 세겔이 들었다."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만이 창과 청동 직검을 휴대했다고 전해지지만, 요나단 또한 활과 화살통을 무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사울이 기브아에 진을 쳤을 때 유효한 전투 병력은 600명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며, 대규모 탈영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3] 요세푸스는 또한 전투가 끝날 무렵, 탈영병들이 돌아오고 지역 지원군이 합세하면서 이스라엘 군대의 수가 10,000명으로 불어났다고 주장한다.[4]

요나단이 블레셋 수비대에 은밀히 접근한 나할 믹마스


믹마스 전투에서 블레셋 군대의 전체 병력 규모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요세푸스[2]사무엘기상 13:5의 히브리어 본문에 따르면, 블레셋인들은 사울 왕의 군대에 대항하여 30,000대의 전차, 6,000명의 기병, 그리고 다수의 보병(요세푸스는 300,000명으로 명시)을 파견했지만, 블레셋인들이 전장에 30,000대보다 훨씬 적은 수의 전차를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블레셋 군대의 실제 규모와 병력은 6,000명의 기병과 약 3,000개의 특수 부대인 ''하마쉬트'' 부대를 포함하여 4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각 ''하마쉬트''는 전차 2명(전차병 1명과 창과 활, 화살을 가진 궁수 1명)과 보병 주자 3개 분대(각 분대 4명)로 구성되었다. 보병 주자들은 또한 가죽 흉갑을 착용하고 칼, 창, 둥근 청동 방패로 무장했으며, 총 병력은 30,000명이 넘었을 것이다. 전차에 탑승한 전차병과 궁수, 그리고 6,000명의 기병을 더하면 블레셋인들은 이스라엘인에 대항하여 총 48,000명의 병사를 소집한 셈이다.

2. 2. 사울의 군대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용사 3000명을 뽑았다. 그중 2000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베텔 산악 지방에 있게 하고, 1000명은 아들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땅 기브아에 있게 했다. 나머지 군대는 각자 천막으로 돌려보냈다.[2]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수비대를 치자 블레셋인들은 병거 30000대와 기마 6000명을 모아 벳 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을 쳤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위급하게 되자 굴, 덤불, 바위틈, 구덩이, 웅덩이에 몸을 숨겼고, 일부는 요르단 강을 건너 가드와 길르앗 지방으로 도망갔다.

길갈에 남아있던 사울은 군사들이 겁에 질려 흩어지기 시작하자 사무엘이 오기 전에 제물을 바쳤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크게 화를 내며 하느님께서 다른 왕을 찾으실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무엘은 길갈을 떠나 베냐민 땅 기브아로 올라갔고, 사울을 좇아 군대도 이동하여 사열하니 600명가량 되었다.

사울과 요나단은 군대를 이끌고 베냐민 땅 게바에 머물렀고, 블레셋인들은 믹마스에 진을 쳤다. 블레셋 진영에서는 공격대가 셋으로 나뉘어 출동했는데, 한 부대는 수알 지방 오프라, 다른 한 부대는 벳 호론, 나머지 한 부대는 츠보임 골짜기를 따라 광야가 바라보이는 지역으로 향했다.

당시 블레셋인들은 대장장이에게 칼이나 창을 만들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기구를 벼리기 위해 블레셋인들에게 가야 했다. 보습이나 곡괭이를 벼리는 값은 , 도끼나 낫을 가는 값은 이었다.[2]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울과 요나단의 군사들은 칼이나 창이 없었고, 오직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있었다.[2] 요세푸스는 사울이 기브아에 진을 쳤을 때 유효한 전투 병력은 600명에 불과했고, 전투가 끝날 무렵 탈영병들이 돌아오고 지역 지원군이 합세하면서 이스라엘 군대의 수가 10,000명으로 늘어났다고 주장한다.[3][4]

3. 전투 과정

사울길갈로 이동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규합하여 블레셋에 대항하려 했지만, 세력 불균형으로 인해 대다수가 도망치는 사태를 겪었다. 사울은 선지자 사무엘을 기다리며 7일 동안 공격을 지연시켰고, 그 후 제물 문제로 사무엘과 갈등을 겪은 뒤 사무엘은 떠났다.[2] 사무엘기 상 13:16에 따르면,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 그리고 그와 함께한 백성들은 베냐민 지파기브아에 머물렀고, 블레셋은 믹마스에 진을 쳤다." 요세푸스는 사울이 기브아로 진영을 옮길 때 사울의 원래 병력 중 600명만이 확인되었다고 언급한다.[3]

블레셋은 병력을 세 부대로 나누어 주변 시골의 주요 도로를 점령했고, 사울은 인근 언덕을 점령하여 블레셋의 활동을 관찰했지만 교전하지 않았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블레셋은 믹마스의 세 봉우리와 가파른 낭떠러지가 있는 눈에 띄는 언덕에 진을 치고 방어를 소홀히 했다.[3] 요나단은 블레셋의 측면을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할 수 있는 비밀 통로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5]

요나단은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무기 운반자와 함께 블레셋 주둔지에 조용히 접근하여 두 개의 바위 벼랑을 통과했다. 그들은 단독으로 성벽을 기어올라 주둔지를 공격하여 20명을 죽였다. 진영의 나머지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깨어났고, 다민족 부대 사이에 더 많은 이스라엘인이 있다고 믿으며 전투가 벌어졌다.[3] 혼란 속에서, 이전에 블레셋과 함께 싸웠던 이스라엘 전사 부대가 사울 왕의 군대로 이탈하여 왕의 병력이 600명에서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요세푸스는 또한 인근 동굴에서 사울의 군대를 이탈했던 일부 사람들이 그의 군대에 재합류하여 이스라엘 병력이 총 10,000명으로 불어났다고 묘사한다.[4]

전투 소리에 이끌린 사울은 자신의 군대와 함께 주둔지에 접근했지만 이미 공포에 질려 군대가 붕괴되었고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사울의 군대에서 도망치는 것을 발견했다. 성경에는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블레셋인이 죽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요세푸스는 총 블레셋 사상자를 60,000명으로 추산한다.[9]

3. 1. 블레셋군의 배치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수비대를 치자 블레셋인들은 믹마스에 진을 쳤다. 블레셋 군대의 병력 규모는 논쟁의 대상이지만, 요세푸스와 사무엘기상 13:5의 히브리어 본문에 따르면 병거 30,000대, 기병 6,000명, 그리고 다수의 보병(요세푸스는 300,000명)을 동원했다고 한다.[2] 그러나 실제로는 40,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6,000명의 기병과 약 3,000개의 *하마쉬트* 특수 부대를 포함했다. 각 *하마쉬트*는 전차병 1명과 궁수 1명으로 구성된 전차 2명과 보병 주자 3개 분대(각 분대 4명)로 이루어졌다. 보병 주자들은 가죽 흉갑을 착용하고 칼, 창, 둥근 청동 방패로 무장했다. 이를 모두 합하면 블레셋 군대는 총 48,000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4]

블레셋 진영에서는 공격대가 셋으로 나뉘어 출동했다. 한 부대는 수알 지방의 오프라로, 다른 한 부대는 벳 호론으로, 나머지 한 부대는 츠보임 골짜기를 따라 광야가 바라보이는 지역으로 향했다.

3. 2. 요나단의 기습 공격

יוֹנָתָן|요나단he은 아버지 사울에게 알리지 않고 무기 운반병과 함께 블레셋 주둔지에 조용히 접근하여, 보세스와 스네라는 두 개의 바위 벼랑을 통과했다.[6] 요나단과 무기 운반병은 단독으로 성벽을 기어올라 "소 두 마리가 쟁기질할 수 있는 반 에이커 정도의 땅" 안에서 주둔지를 공격했고, 그 매복에서 20명을 죽였다.[7]

이 공격으로 블레셋 진영은 혼란에 빠졌고, 병사들은 "서로 치고 쓰러지며 흩어졌"다.[7] 다민족 부대 사이에 더 많은 이스라엘인이 있다고 믿은 블레셋 군대는 혼란에 휩싸였다.[3] 이전에 블레셋과 함께 싸웠던 이스라엘 전사 부대가 사울 왕의 군대로 이탈하여 왕의 병력을 600명에서 수천 명으로 늘렸다. 요세푸스는 혼란 중에 인근 동굴 네트워크에서 사울의 군대를 이탈했던 일부 사람들이 그의 군대에 재합류하여 이스라엘 병력이 총 10,000명으로 불어났다고 묘사한다.[4] 사무엘기 상 14장 15절에는 기적적인 지진이 블레셋 군대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3. 3. 전투의 확산

요나단은 그의 무기병과 함께 절벽을 올라가 20명에 달하는 블레셋 군사들을 쳐 죽였다.[2] 베냐민 땅 기브아에 있던 사울은 이 모습을 보고 군대를 정비하고 블레셋인들을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이 오기도 전에 블레셋인들 사이에는 저희끼리 죽이는 혼란이 일어났고, 블레셋 군대에 있던 이스라엘인들도 돌아서서 한 편이 되어 블레셋인들을 공격했다.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숨던 이스라엘군도 나와서 블레셋인들을 추격했고 전투는 벳 아웬 건너편까지 번져나갔다.[2] 요세푸스는 혼란 중에 인근 동굴 네트워크에서 사울의 군대를 이탈했던 일부 사람들이 그의 군대에 재합류하여 이스라엘 병력이 총 10,000명으로 불어났다고 묘사한다.[4] 사무엘기 상 14:15는 기적적인 지진이 블레셋 전체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고 '혼란'을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3. 4. 사울의 실수와 전투의 결과

길갈에 남아있던 사울은 군사들이 겁에 질려 흩어지는 것을 보고 사무엘이 오기 전에 먼저 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에게 크게 화를 내며 하느님께서 다른 왕을 찾으실 거라는 경고를 했다. 사무엘은 길갈을 떠나 베냐민 땅 기브아로 올라갔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은 남은 군대 600명과 함께 베냐민 땅 게바에 머물렀다. 블레셋인들은 믹마스에 진을 쳐 이스라엘군과 대치했다.[2]

당시 블레셋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기를 만들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기구를 벼리기 위해 블레셋인들에게 가야만 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울과 요나단의 군사들은 칼이나 창이 없었고, 오직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있었다.

그날 사울은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기 전까지는 아무 음식도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사들은 숲에서 꿀을 발견했지만 맹세 때문에 먹지 못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의 맹세를 듣지 못하고 꿀을 먹고 말았다.

이스라엘군은 믹마스에서 아얄론까지 블레셋인들을 추격해 쳐 죽였지만, 몹시 지쳐 빼앗은 가축의 고기를 피째 먹는 잘못을 저질렀다. 사울은 이를 꾸짖었고, 요나단이 맹세를 어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사울 왕은 백성들의 요구로 요나단을 처벌하지 않았고, 블레셋인들을 추격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요세푸스는 사울이 길갈로 이동하여 블레셋에 대항하려 했지만, 세력 불균형으로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쳤다고 묘사한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며 7일 동안 공격을 지연했고, 제물 문제로 사무엘과 갈등을 겪은 뒤 사무엘은 다시 떠났다.[2]

요세푸스에 따르면, 블레셋은 믹마스의 세 봉우리와 가파른 낭떠러지가 있는 언덕에 진을 치고 방어를 소홀히 했다.[3] 요나단은 비밀 통로를 발견하고 블레셋의 측면을 공격하여 격파했다.[5] 그는 무기 운반자와 함께 블레셋 주둔지에 접근하여 바위 벼랑을 통과했고, 단독으로 성벽을 기어올라 주둔지를 공격하여 20명을 죽였다.[6][7]

진영은 혼란에 빠졌고, 이전에 블레셋과 함께 싸웠던 이스라엘 전사들이 사울 왕의 군대로 합류하여 병력이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요세푸스는 동굴에 숨어있던 사람들도 사울의 군대에 재합류하여 총 10,000명으로 불어났다고 묘사한다.[4] 사무엘기 상 14:15는 기적적인 지진이 블레셋 군대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주장한다.

전투 소리에 이끌린 사울은 자신의 군대와 함께 주둔지에 접근했지만, 이미 블레셋 군대는 붕괴된 후였다. 사울은 도망치는 블레셋을 계속 괴롭혔고, 요세푸스는 그의 군대가 블레셋 진영을 약탈했으며, 사울이 불법 제단을 세우는 등 이단적인 행위를 저질렀다고 묘사한다.[8] 요세푸스는 총 블레셋 사상자를 60,000명으로 추산한다.[9]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위를 굳건히 하고, 모압, 암몬, 에돔, 초바의 왕들과 블레셋, 아말렉 등 주변의 모든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사울에게는 요나단, 이스위, 말기수아, 아비나답 등의 아들과 메랍, 미갈 등의 딸이 있었다.

참조

[1] 성경 Isa. 10:28
[2] 서적 Antiquities of the Jews
[3] 서적 Antiquities of the Jews
[4] 서적 Antiquities of the Jews
[5] 성경 1 Sam. 14:5
[6] 성경 1 Samuel 14:4
[7] 성경 1 Samuel 14:14-16
[8] 서적 Antiquities of the Jews
[9] 서적 Antiquities of the Jews
[10] 문서 본래 히브리어 본문에는 나이를 밝히는 숫자가 없으나 몇몇 70인역 수사본에 따라 사울의 나이를 40세로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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