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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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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압살롬의 난은 다윗 왕의 아들 압살롬이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 압살롬은 형 암논이 누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에 앙심을 품고 암논을 살해한 후 도망갔다가 돌아와 반란을 준비했다.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지지 세력을 모아 왕이 되었고,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 요르단 강을 건너 피신했다. 후새의 작전으로 압살롬의 군대가 패배하고 압살롬이 죽으면서 반란은 진압되었고,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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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난
압살롬의 난
개요
분쟁압살롬의 난
날짜기원전 979년경
장소이스라엘 에프라임 숲 지방
결과다윗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다윗
교전국 2압살롬 반란군 세력
지휘관 및 지도자
다윗 진영 지휘관다윗
요압
아마사
아비사이
이사이
후사이
압살롬 진영 지휘관압살롬
아히토펠†
병력 규모
다윗 진영 병력(정보 없음)
사상자 규모
다윗 진영 사상자(정보 없음)
압살롬 진영 사상자2만 명 전사

2. 배경

당시 연합 이스라엘 왕국의 왕 다윗에게는 헤브론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이 무려 19명이 되었는데 아들들 사이에서는 권력 다툼이 심각하게 벌어졌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다윗의 첫째 아들이자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의 아들 암논이 다윗의 셋째 아들이자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 압살롬의 누이 다말강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압살롬은 암논을 미워하게 되었다.

암논의 암살, 니콜 드 시몬의 작


2년이 지난 어느 날 압살롬은 형 암논을 포함한 여러 형제들을 에브라임 근처 바알 하초르에서 자신이 주최하는 연회에 초대하였다. 그리고 부하를 시켜 술에 취한 암논을 살해했고 이 일이 다윗에게로 알려지자 압살롬은 그술 왕 암미훗의 아들 달매에게로 도망가 3년 동안 살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에 다윗의 휘하 장수 요압이 압살롬에 대해서 반대했고 다윗도 압살롬을 보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질렀고 다윗은 압살롬과 화해했으나 압살롬은 오히려 반란을 준비했다.

2. 1. 다윗 왕가의 권력 다툼

연합 이스라엘 왕국의 왕 다윗에게는 헤브론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이 19명이나 되었고, 이들 사이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다툼이 심각하게 벌어졌다.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이 셋째 아들 압살롬의 누이 다말강간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일로 압살롬은 암논을 미워하게 되었다. 2년 후, 압살롬은 형제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부하를 시켜 암논을 살해했다.

이후 압살롬은 그술 왕 암미훗의 아들 달매에게로 도망가 3년간 살다가 돌아왔다. 다윗의 휘하 장수 요압은 압살롬에 대해 반대했고, 다윗도 압살롬을 보지 않았다. 분노한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질렀고, 다윗은 압살롬과 화해했으나, 압살롬은 오히려 반란을 준비했다.

2. 2. 암논의 다말 강간 사건

연합 이스라엘 왕국의 왕 다윗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는 권력 다툼이 심각했다. 그러던 중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강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압살롬은 암논을 미워하게 되었다.

2. 3. 압살롬의 복수와 귀환

다윗에게는 헤브론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이 19명이나 되었고, 아들들 사이에서는 권력 다툼이 심각했다. 다윗의 첫째 아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강간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 일로 압살롬은 암논을 미워하게 되었다.

2년 후, 압살롬은 암논을 포함한 여러 형제들을 자신이 주최하는 연회에 초대하여 부하를 시켜 술에 취한 암논을 살해했다. 이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자 압살롬은 그술 왕 암미훗의 아들 달매에게로 도망가 3년 동안 살았다.

다윗의 장수 요압이 압살롬에 대해 반대했고, 다윗도 압살롬을 보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압살롬은 요압의 밭에 불을 질렀고, 다윗은 압살롬과 화해했으나, 압살롬은 오히려 반란을 준비했다.

3. 전투 과정

3. 1. 반란의 준비와 시작

압살롬은 자신이 탈 병거와 말들을 마련하고 자기 앞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50명이나 거느렸다. 그리고 매일 아침 성문으로 오는 사람들을 설득해 자기 편으로 만들게 했다. 4년 뒤 압살롬은 다윗의 허락을 받고 헤브론으로 떠나 자신의 지지 세력들을 모았고 사람을 보내 다윗의 고문인이자 길로 출신 사람 아히도벨도 불러냈다.

그리고 압살롬은 지지 세력들의 추대로 왕이 되어 드디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3. 2. 다윗의 피신

반란이 일어나자 다윗은 자기 아들과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독 제사장과 그의 아들 아히마아스, 아비아달 제사장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언약궤는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고, 백성들만 이끌고 요르단강을 건너 광야길로 피신했다. 그러자 다윗의 벗이자 에렉 출신 사람 후새가 압살롬을 교란시키기 위해 도성으로 들어갔고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러자 다윗의 부하이자 전왕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나귀 한 쌍에 빵 200덩이와 건포도 100뭉치, 여름 과일 100개, 포도주 1부대를 싣고 다윗에게 식량을 지원했다. 다윗이 바후림을 지날 때에는 사울 집안의 친척이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고 돌과 흙을 던지기도 했다.

3. 3. 후새의 작전

압살롬과 아히도벨이 예루살렘에 있던 중, 다윗의 부하 후새는 압살롬을 교란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도성에 들어갔다. 압살롬이 아히도벨과 의견을 나누던 중 아히도벨은 1만 2000명의 군사를 뽑아 다윗의 뒤를 쫓자는 작전을 세웠으나, 후새는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아 압살롬이 직접 전투에 나가라는 작전을 세웠다.

이에 압살롬이 자신의 의견을 따르게 하는데 성공한 후새는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만나 소식을 전하고,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엔 로겔에 서 있다가 소식을 접하면 다윗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결국 아히도벨은 자기 의견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얹고 일어나 고향 성읍으로 돌아가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리고 그는 제 아버지의 무덤에 묻혔다.

3. 4. 압살롬의 추격과 패배

압살롬은 자신의 지지 세력과 함께 요르단 강을 건너 다윗을 추격했다. 다윗은 마하나임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요압, 아비새, 잇대에게 군대를 맡겼다. 에브라임 숲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압살롬의 군대는 크게 패했고, 2만 명이 죽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3. 5. 압살롬의 처형과 반란의 진압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도망가다가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쳤고,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의 얽힌 가지들 밑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압살롬의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휘감겨 공중에 매달리고 말았다. 이를 본 한 군사가 요압에게 보고했고, 요압과 젊은이 10명이 달려와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고 내리쳐 그를 죽였다.

압살롬의 암살, 귀스타브 도어의 작


그리고 요압이 나팔을 불자 모든 군사들이 압살롬의 무리를 추격하는 일을 중지하게 하였다. 전투가 끝나자 요압의 군사들은 압살롬의 시체를 들어 숲 속 큰 구덩이에 던져 넣고 그 위에 커다란 돌무덤을 쌓았다.

압살롬이 죽자 모든 압살롬의 무리는 흩어져 제 집으로 돌아갔다.

4. 다윗의 귀환

다윗은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에게 승전 소식과 압살롬의 처형 소식을 보고받았다. 그러자 다윗은 크게 슬퍼했고, 이를 본 요압이 백성들을 더욱 사랑하라고 설득했다.

이후 다윗은 귀환 준비를 했고 모든 백성들을 데리고 출발했다. 돌아오던 도중 요르단강에서 바후림 출신의 베냐민 사람으로 전에 바후림에서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를 만났는데, 그가 용서를 빌자 다윗은 그를 용서해주었다.

요나단의 아들이자 다윗에게 식량을 지원했던 므비보셋도 달려와 충성을 맹세했으며, 길앗 사람이자 역시 다윗에게 식량을 지원했던 바르실래도 로글림에서 내려왔고 다윗은 그를 축복해주었다.

백성들이 모두 돌아옴에 따라 모든 일들은 마무리되었다.

5. 결과

5. 1. 왕권 강화와 한계

5. 2. 정치적 영향

6. 해석

6. 1. 성경적 관점

6. 2. 역사적 관점

6. 3. 현대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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