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절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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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절총독은 청나라 시기에 복건성과 절강성을 관할했던 총독이다. 1645년 복건총독으로 처음 설치되어 절강성을 관할했으며, 1648년 절민총독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복건과 절강에 각각 총독부가 설치되었다가, 1687년 복건총독이 복건절강총독으로 개칭되면서 민절총독 체제가 확립되었다. 1738년 이후 복건성과 절강성을 모두 관할했으며, 1885년 복건순무가 폐지되면서 민절총독이 겸임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마지막 민절총독 송수가 피살되면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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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절총독 | |
---|---|
기본 정보 | |
관할 지역 | 푸젠성, 저장성 |
설치 시기 | 청나라옹정제 5년 (1727년) |
폐지 시기 | 신해혁명 이후 (1912년) |
다른 이름 | 민절총독(閩浙總督) |
역대 총독 | |
초대 총독 | 각이납포 |
마지막 총독 | 송수 |
2. 연혁
- 1645년(순치 2년), '''복건총독'''이 설치되어 총독부를 복주에 두고, 저장성도 관할했다.
- 1648년(순치 5년), '''절민총독'''으로 개칭되어 총독부는 구주로 이전되었다.
- 1658년(순치 15년), 복건성과 저장성에 각각 총독부가 설치되어 복건총독부는 장주에, 저장총독부는 온주에 설치되었다.
- 1672년(강희 11년), 복건총독부는 복주로 다시 이전되었다. 이듬해 저장총독은 폐지되었다.
- 1687년(강희 26년), 복건총독이 '''복건절강총독'''으로 개칭되었다.
- 1727년(옹정 5년), 특별히 이위가 저장총독에 임명되었다. 복건절강총독 고기탁은 복건총독으로서 복건성을 전담했다.
- 1734년(옹정 12년) 다시 저장총독이 폐지되고, 복건성과 저장성은 절민총독의 관할이 되었다.
- 1736년(건륭 원년) 이위의 예를 본받아 혜증균이 저장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절민총독 학옥린은 복건성을 전담했다.
- 1738년(건륭 3년) 혜증균이 중앙으로 이동되었기 때문에 다시 학옥린이 두 성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복건, 저장 총독으로 민절총독이 총괄하게 되었다.
- 1885년(광서 11년), 복건순무가 폐지되고 민절총독이 겸임하게 되었다.
-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마지막 민절총독 송수가 피살되었다.
3. 역대 민절총독
1645년(순치 2년) 복건총독이 설치되어 복주에 총독부를 두고 절강성도 관할하였다. 1648년(순치 5년) 절민총독으로 개칭되어 총독부가 구주로 이전되었다. 1658년(순치 15년) 복건성과 절강성에 각각 총독부가 설치되어 복건총독부는 장주에, 절강총독부는 온주에 설치되었다. 1672년(강희 11년) 복건총독부는 복주로 다시 이전되었고, 이듬해 절강총독은 폐지되었다. 1687년(강희 26년) 복건총독은 복건절강총독(민절총독)으로 개칭되었다.
1727년(옹정 5년) 이위가 절강총독에 특별 임명되면서 민절총독은 복건성만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1734년(옹정 12년) 절강총독이 다시 폐지되면서 복건성과 절강성은 다시 민절총독의 관할이 되었다. 1736년(건륭 원년) 혜증균이 절강총독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민절총독은 복건성만 관할하게 되었으나, 1738년(건륭 3년) 혜증균이 중앙으로 이동하면서 민절총독이 다시 복건성과 절강성을 모두 관할하게 되었다.
1885년(광서 11년) 복건순무가 폐지되면서 민절총독이 이를 겸임하게 되었다. 1911년 마지막 민절총독 송수는 신해혁명 당시 반란군에 의해 축출되어 살해되었다.
3. 1. 1645년 ~ 1658년 (복건총독, 절민총독 시기)
1645년(순치 2년) 11월, 장존인이 복건총독에 임명되어 총독부가 복주에 설치되었고 절강성도 관할하였다. 1648년(순치 5년)에는 절민총독으로 개칭되어 총독부가 구주로 이전되었다.이후 1658년(순치 15년)까지 복건성과 절강성을 통합하여 관할하는 절민총독 시기가 이어졌다.
이름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
장존인 | 1645년 | 1647년 | |
진금 | 1647년 | 1652년 | |
유청태 | 1652년 | 1654년 | |
둔태 | 1654년 | 1656년 | |
이솔태 | ![]() | 1656년 | 1658년 |
3. 2. 1658년 ~ 1687년 (복건총독, 저장총독 분리 시기)
1645년(순치 2년), 복주(福州)에 복건총독부를 설치하고 절강성을 관할했다. 1648년(순치 5년), 절민총독으로 개칭하고 총독부를 구주(衢州)로 이전했다. 1658년(순치 15년), 복건성과 절강성에 각각 총독부를 설치하여 복건총독부는 장주(漳州)에, 절강총독부는 온주(溫州)에 두었다.1672년(강희 11년), 복건총독부를 복주로 이전하고, 이듬해 절강총독을 폐지했다. 1687년(강희 26년), 복건총독을 복건절강총독(민절총독)으로 개칭했다.
3. 2. 1. 복건총독
李率泰중국어는 1658년부터 1664년까지 복건총독을 역임했다. 이후 주창좌(朱昌祚)가 1664년부터 1665년까지, 장조린(張朝璘)이 1666년부터 1667년까지 복건총독을 맡았다. 조택보(祖澤溥)는 1667년부터 1669년까지, 유두(劉斗)는 1670년부터 1672년까지 복건총독으로 재직했다.1672년, 범승모(范承謨)가 복건총독에 임명되었으나, 1674년 경정충에게 붙잡혀 사실상 사임했다. 같은 해 랑정좌(郎廷佐)가 복건총독이 되어 1676년까지 재직했고, 1676년부터 1678년까지는 랑정상(郎廷相)이 복건총독을 맡았다.
요계성(姚啟聖)은 1678년부터 1683년까지 복건총독으로 재직했다. 1683년 시유한(施維翰)이 복건총독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후 1684년부터 1687년까지는 왕국안(王國安)이 복건총독을 역임했다.
이름 | 부임 시기 | 사임 시기 |
---|---|---|
이율태(李率泰) | 1658年(顺治十五年)중국어 | 1666年(康熙五年)중국어 |
장조린(張朝璘) | 1666年(康熙五年)중국어 | 1667年(康熙六年)중국어 |
유두(劉斗) | 1670年(康熙九年四月)중국어 | 1672年(康熙十一年)중국어 |
범승모(范承謨) | 1672年(康熙十一年十月壬子)중국어 | 1674年(康熙十三年三月庚辰)중국어 (경정충에게 붙잡혀 사실상 사임) |
랑정좌(郎廷佐) | 1674年(康熙十三年七月辛未)중국어 | 1676年(康熙十五年)중국어 |
랑정상(郎廷相) | 1676年(康熙十五年七月庚子)중국어 | 1678年(康熙十七年五月戊申)중국어 |
요계성(姚啟聖) | 1678年(康熙十七年五月戊申)중국어 | 1683年(康熙二十二年)중국어 |
시유한(施維翰) | 1683年(康熙二十二年冬)중국어 | 1684年(康熙二十三年春)중국어 (부임하지 못한 채 사망) |
3. 2. 2. 저장총독
1658년(순치 15년)부터 1684년(강희 23년)까지 존속했던 청나라의 저장 지역 총독 직책과 역대 총독은 다음과 같다.이름 | 부임 시기 | 사임 시기 |
---|---|---|
조국조 | 1658년(순치 15년) | 1661년(순치 18년) |
조정신 | 1661년(순치 18년) | 1669년(강희 8년) |
유조기 | 1669년(강희 8년) | 1673년(강희 12년) |
이지방 | 1673년(강희 12년) | 1682년(강희 21년) |
시유한 | 1682년(강희 21년) | 1683년(강희 22년) |
왕국안 | 1684년(강희 23년) | 1684년(강희 23년) |
1658년(순치 15년), 복건성과 절강성에 각각 총독부가 설치되었는데, 저장총독부는 온주에 설치되었다. 1673년(강희 12년)에는 저장총독이 폐지되었다.
1727년(옹정 5년), 이위가 저장총독으로 특별 임명되었으나, 1734년(옹정 12년)에 다시 저장총독이 폐지되었다. 1736년(건륭 원년), 혜증균이 저장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1738년(건륭 3년)에 다시 폐지되었다.
3. 3. 1687년 ~ 1911년 (민절총독 시기)
1687년 (강희 26년), 복건총독이 '''복건절강총독'''으로 개칭되었다.이름 | 부임 시기 | 사임 시기 |
---|---|---|
왕신명 | 1687년 (강희 26년) | 1688년 (강희 27년) |
왕지 | 1688년 (강희 27년) | 1689년 (강희 28년) |
흥영조 | 1689년 (강희 28년) | 1692년 (강희 31년) |
주굉좌 | 1692년 (강희 31년) | 1695년 (강희 34년) |
곽세륭 | 1695년 (강희 34년) | 1702년 (강희 41년) |
김세영 | 1702년 (강희 41년) | 1706년 (강희 45년) |
양내 | 1706년 (강희 45년) | 1710년 (강희 49년) |
범시숭 | 1710년 (강희 49년) | 1715년 (강희 54년) |
고로-만보 | 1715년 (강희 54년) | 1725년 (옹정 3년) |
고기탁 | 1725년 (옹정 3년) | 1729년 (옹정 7년) |
사이직 | 1729년 (옹정 7년) | 1730년 (옹정 8년) |
고기탁 | 1730년 (옹정 8년) | 1730년 (옹정 8년) |
유세명 | 1730년 (옹정 8년) | 1732년 (옹정 10년) |
호옥린 | 1732년 (옹정 10년) | 1739년 (건륭 4년) |
덕패 | 1739년 (건륭 4년) | 1742년 (건륭 7년) |
나소도 | 1742년 (건륭 7년) | 1744년 (건륭 9년) |
마이태 | 1744년 (건륭 9년) | 1746년 (건륭 11년) |
가이얼지선 | 1746년 (건륭 11년) | 1757년 (건륭 22년) |
양응거 | 1757년 (건륭 22년) | 1759년 (건륭 24년) |
양정장 | 1759년 (건륭 24년) | 1764년 (건륭 29년) |
소창 | 1764년 (건륭 29년) | 1768년 (건륭 33년) |
최응계 | 1768년 (건륭 33년) | 1770년 (건륭 35년) |
종음 | 1770년 (건륭 35년) | 1778년 (건륭 43년) |
양경소 | 1778년 (건륭 43년) | 1779년 (건륭 44년) |
삼보 | 1779년 (건륭 44년) | 1780년 (건륭 45년) |
부명안 | 1780년 (건륭 45년) | 1781년 (건륭 46년) |
진휘조 | 1781년 (건륭 46년) | 1782년 (건륭 47년) |
부륵혼 | 1782년 (건륭 47년) | 1785년 (건륭 50년) |
아덕 | 1785년 (건륭 50년) | 1786년 (건륭 51년) |
부강 | 1786년 (건륭 51년) | 1786년 (건륭 51년) |
창청 | 1786년 (건륭 51년) | 1787년 (건륭 52년) |
이시요 | 1787년 (건륭 52년) | 1788년 (건륭 53년) |
복강안 | 1788년 (건륭 53년) | 1789년 (건륭 54년) |
오랍나 | 1789년 (건륭 54년) | 1795년 (건륭 60년) |
복강안 | 1795년 (건륭 60년) | 1796년 (가경 원년) |
괴륜 | 1796년 (가경 원년) | 1799년 (가경 4년) |
서린 | 1799년 (가경 4년) | 1799년 (가경 4년) |
고로-장린 | 1799년 (가경 4년) | 1800년 (가경 5년) |
옥덕 | 1800년 (가경 5년) | 1806년 (가경 11년) |
아림보 | 1806년 (가경 11년) | 1809년 (가경 14년) |
방유전 | 1809년 (가경 14년) | 1810년 (가경 15년) |
왕지이 | 1810년 (가경 15년) | 1817년 (가경 22년) |
동교증 | 1817년 (가경 22년) | 1820년 (가경 25년) |
경보 | 1820년 (가경 25년) | 1822년 (도광 2년) |
조신진 | 1822년 (도광 2년) | 1825년 (도광 5년) |
손이준 | 1825년 (도광 5년) | 1832년 (도광 12년) |
정조락 | 1832년 (도광 12년) | 1836년 (도광 16년) |
종상 | 1836년 (도광 16년) | 1839년 (도광 19년) |
주천각 | 1839년 (도광 19년) | 1839년 (도광 19년) |
계량 | 1839년 (도광 19년) | 1839년 (도광 19년) |
등정진 | 1839년 (도광 19년) | 1840년 (도광 20년) |
안백도 | 1840년 (도광 20년) | 1841년 (도광 21년) |
양국정 | 1841년 (도광 21년) | 1842년 (도광 22년) |
이량 | 1842년 (도광 22년) | 1843년 (도광 23년) |
유운가 | 1843년 (도광 23년) | 1850년 (도광 30년) |
유태 | 1850년 (도광 30년) | 1851년 (함풍 원년) |
계지창 | 1851년 (함풍 원년) | 1852년 (함풍 2년) |
오문용 | 1852년 (함풍 2년) | 1853년 (함풍 3년) |
혜성 | 1853년 (함풍 3년) | 1853년 (함풍 3년) |
왕의덕 | 1854년 (함풍 4년) | 1859년 (함풍 9년) |
경단 | 1859년 (함풍 9년) | 1862년 (동치 원년) |
기령 | 1862년 (동치 원년) | 1863년 (동치 2년) |
좌종당 | 1863년 (동치 2년) | 1866년 (동치 5년) |
오당 | 1866년 (동치 5년) | 1867년 (동치 6년) |
마신이 | 1867년 (동치 6년) | 1868년 (동치 7년) |
영계 | 1868년 (동치 7년) | 1871년 (동치 10년) |
장지만 | 1871년 (동치 10년) | 1871년 (동치 10년) |
이학년 | 1871년 (동치 10년) | 1876년 (광서 2년) |
문욱 | 1876년 (광서 2년) | 1876년 (광서 2년) |
하경 | 1876년 (광서 2년) | 1884년 (광서 10년) |
양창준 | 1884년 (광서 10년) | 1888년 (광서 14년) |
변보제 | 1888년 (광서 14년) | 1892년 (광서 18년) |
담종린 | 1892년 (광서 18년) | 1894년 (광서 20년) |
변보천 | 1894년 (광서 20년) | 1898년 (광서 24년) |
허응규 | 1898년 (광서 24년) | 1903년 (광서 29년) |
석량 | 1903년 (광서 29년) | 1903년 (광서 29년) |
이흥예 | 1903년 (광서 29년) | 1904년 (광서 30년) |
위광도 | 1904년 (광서 30년) | 1905년 (광서 31년) |
승윤 | 1905년 (광서 31년) | 1905년 (광서 31년) |
숭번 | 1905년 (광서 31년) | 1905년 (광서 31년) |
단방 | 1905년 (광서 31년) | 1906년 (광서 32년) |
주부 | 1906년 (광서 32년) | 1906년 (광서 32년) |
정진탁 | 1906년 (광서 32년) | 1907년 (광서 33년) |
송수 | 1907년 (광서 33년) | 1911년 (선통 3년) |
- 1727년 (옹정 5년), 특례로 이위가 저장총독에 임명되었다. 복건절강총독이었던 고기탁은 복건총독으로서 복건성을 전임했다.
- 1734년 (옹정 12년), 다시 저장총독이 폐지되었고, 복건성 및 저장성은 절민총독의 관할이 되었다.
- 1736년 (건륭 원년), 이위의 사례에 따라 혜증균이 저장총독에 임명되었다. 절민총독이었던 호옥린은 복건성을 전임했다.
- 1738년 (건륭 3년), 혜증균이 중앙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다시 호옥린이 양성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복건·저장의 총독으로서 '''민절총독'''이 통괄하게 되었다.
- 1885년 (광서 11년), 복건순무가 폐지되었고, 민절총독이 겸임하게 되었다.
4. 민절총독과 조선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청나라는 회사(回賜) 형태로 물품을 하사하는 조공 무역 관계를 맺었다. 민절총독은 이러한 조공 무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복건성, 절강성 등 민절총독 관할 지역은 조선 사신들이 해로를 통해 이동하는 주요 경로였기 때문이다.
조선과 청나라 상인들은 민절총독 관할 지역의 항구를 통해 활발한 해상 무역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민절총독은 해상 무역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과 청나라 어민들은 황해에서 어업 활동을 하면서 잦은 충돌을 빚었다. 특히, 민절총독 관할 지역과 가까운 해역에서 어업권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조선 어민들이 풍랑을 만나 민절총독 관할 지역으로 표류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이 경우, 민절총독은 표류민들을 구조하고 조선으로 송환하는 절차를 담당했다.
5. 평가 및 의의
민절총독은 청나라 지방 통치 체제의 중요한 부분으로, 해상 방어와 대외 교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조선과의 관계에서 조공 무역, 해상 교류, 어업권 분쟁, 표류민 문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민절총독의 존재는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역학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민절총독은 푸젠성과 저장성을 관할하며, 이 지역의 해상 방어와 대외 교류를 책임졌다. 특히 대만이 푸젠성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대만 통치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중도 진보적 관점에서 보면, 민절총독은 과거의 유산으로서, 현재의 한중 관계에 있어서도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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