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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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젤주는 스위스 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역사적으로 바젤 주교가 통치했으나 바젤 공의회 이후 도시의 부와 중요성이 커졌다. 1499년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여 연방의 주가 되었으며, 종교 개혁을 거치면서 개신교 도시로 변화했다. 1833년 도시와 시골 지역 간의 갈등으로 인해 바젤-시티와 바젤란트주로 분리되었으며, 1999년 헌법 개정을 통해 두 지역이 각각 칸톤으로 인정되었다.
종교 개혁 이전 바젤은 바젤 주교가 통치했으며, 바젤 문장에 나타난 주교 지팡이가 이를 기념한다. 15세기 후반 바젤 공의회(1431–49) 이후 바젤 시는 부와 중요성이 커졌다. 1459년에 바젤 대학교가 설립되었고, 이 도시는 종교 개혁 직전 독일 르네상스의 지적 중심지가 되었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가 바젤에서 가르쳤고, 요하네스 페트리와 요한 프로벤에 의해 초기 인쇄소가 세워졌다. 1495년 바젤은 상부 라인 제국 관구에 편입되었고, 주교는 교황 공의회에 참석했다.
1792년, 혁명적인 프랑스 괴뢰 공화국인 라우라시아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이듬해 몇 달 동안 존속하다가 복원된 바젤주와 헬베티아 공화국, 프랑스 제1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2. 역사적 배경
2. 1. 바젤 주교령과 스위스 연방 가입 (15세기~16세기)
바젤 공의회(1431–49) 이후 바젤 시는 부와 중요성이 커졌다.[1] 1459년에 바젤 대학교가 설립되었고, 이 도시는 종교 개혁 직전의 독일 르네상스 지적 중심지가 되었다.[1]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가 바젤에서 가르쳤고, 요하네스 페트리와 요한 프로벤에 의해 초기 인쇄소가 세워졌다.[1]
바젤은 슈바벤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로, 1499년 바젤 조약에 의해 샤프하우젠의 자유 제국 도시와 함께 1501년 구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여 연방의 11번째와 12번째 주가 되었으며, 12년 후 아펜첼이 합류하여 프랑스 혁명 전쟁까지 스위스를 구성했던 ''드라이체른 오르테''를 완성했다.[1]
2. 2. 종교 개혁과 그 영향 (16세기~17세기)
요하네스 오에콜람파디우스는 에라스뮈스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초판 공동 편집자이자 폰 우테나임 주교 치하의 대성당 설교자로서, 바젤에 종교 개혁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1529년, 바젤 시는 오에콜람파디우스를 중심으로 개신교 도시가 되었고, 주교좌는 포렌트루이로 이전되었다.[3]
1536년 3월, 존 칼빈의 칼뱅주의 교리를 해설한 기독교 강요 초판이 바젤에서 출판되었다.[4] 이는 당시 프랑스에서 박해받던 위그노들을 옹호하기 위해 바젤에서 저술된 것으로, 이후 칼뱅주의로 알려지게 된 개신교 교리의 중요한 해설서였다.
1543년에는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인체 해부학에 관한 최초의 서적인 ''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바젤에서 출판 및 인쇄하였다.[5]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바젤 칸톤은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3] 이는 약 150년 전 주교령이 거부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법적 지배가 사실상 제거되었음을 의미한다.
3. 분리와 재통합 시도 (18세기~현재)
1830년까지 바젤은 통일된 주였으나, 시와 시골 지방 자치 단체의 시민들 간의 갈등이 있었다. 칸톤 의회는 도시 출신 의원들이 지배했지만, 도시 인구는 시골 전체 인구보다 적었다. 1830년 바트 부벤도르프 회의에서 시골 출신 시민들은 도시와 시골 간의 동등한 권리와 인구에 비례한 의회 대표를 요구했으나, 도시는 이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시골 지역의 불만은 커져 리슈탈에서 새로운 지방 정부가 구성되기도 했으나, 1831년 바젤 출신 병력이 리슈탈을 점령하면서 진압되었다. 시골의 불안은 1832년까지 지속되었고, 1833년 휠프텐샨츠 전투에서 도시 병력이 패배하는 등 양측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3. 1. 19세기 초 분리 운동
1830년까지 바젤은 도시와 시골 지방 자치 단체의 시민들이 모두 칸톤 의회에 참여하는 통일된 주였다. 그러나 칸톤 의회는 도시 출신 의원들이 지배했지만, 도시 인구는 시골 전체 인구보다 적었다. 1830년 바트 부벤도르프에서 열린 회의에서 25명의 바젤비터(시골 출신 시민)가 도시와 시골 간의 동등한 권리와 인구에 비례한 의회 대표를 요구하는 서한을 도시에 보냈다.
도시가 이 요구를 거부하자 시골 지역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리슈탈에서 시골 출신 몇몇 남자가 3,000명의 군대에 의해 보호받는 새로운 지방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1831년 1월 16일 바젤 출신 병력이 리슈탈을 점령하고 새로운 정부를 몰아냈다. 시골의 불안은 1832년까지 지속되었고 양측 모두 서로에게 부당한 행위를 저질렀다.
1833년 8월 3일, 1,200명 이상의 도시 병력이 리슈탈로 진격했지만, 휠프텐샨츠 전투에서 반군의 우세한 병력에 의해 바젤로 후퇴해야 했다. 도시로 돌아가는 길은 매복 공격을 받았고 도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분쟁 이후, 스위스 최고 권위 기관인 타크자충은 1833년 8월 17일에 바젤 칸톤의 분리를 청원받았고, 9일 후 운터발덴과 아펜첼의 선례를 따른 반 칸톤으로의 분할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바젤 칸톤은 바젤슈타트주와 바젤란트주로 분할되었다.
3. 2. 분리 이후와 재통합 논의
1969년 바젤란트주 주민투표에서 재통합 안건이 부결되었다. 그 이후 두 칸톤은 바젤 대학교의 공동 재정 지원 및 운영과 같은 여러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3] 1844년 스위스 헌법은 "바젤"을 스위스의 22개 "주권 칸톤" 중 하나로 계속 인정했으며, '바젤 (슈타트 운트 란트)'로 열거했다. 이런 의미에서 스위스 연방의 주권 회원으로서 바젤 칸톤은 1999년까지 존속했으며, 개정된 헌법은 처음으로 두 개의 이전 반 칸톤을 "칸톤"으로 인정했다.[3]
4. 현재 갈라져 있는 칸톤
참조
[1]
문서
[2]
서적
Basel - A Center at the Fringe
Christoph Merian Verlag
2006
[3]
웹사이트
Philipp von Gundelsheim
http://www.deutsche-[...]
2001
[4]
서적
The New Cambridge Modern History
1990
[5]
서적
The Illustrations from the Works of Andreas Vesalius of Brussels
Courier Dover Publication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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