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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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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춘무는 임진왜란 시기 청주성 탈환에 기여한 의병장이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토정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우고 조헌과 함께 의병으로 활동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탈환에 성공했으며, 이후 선조를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청주성 탈환의 공로로 우의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침술에도 능하여 선조의 병을 치료하기도 했다. 사후 우참찬에 증직되고 민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부모산과 모유정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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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무
기본 정보
학력
학력부산고등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11기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졸업
경력
주요 경력대한민국 육군 대장 예편
제25대 국방부 장관
수상
훈장보국훈장 통일장
보국훈장 천수장
미국 공로훈장

2. 생애

박춘무는 사육신 박팽년의 아우 박인년의 8세손으로, 박기정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에게서 배웠다. 청주 읍성 탈환의 주역 옥천의 조헌도 박춘무와 함께 이지함에게서 배운 문인(門人)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박춘무는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고, 진천에서 왜적을 물리친 뒤 선조를 호위했다. 침술이 뛰어나 선조 등의 병을 치료하기도 했다.

선조 환도 후 귀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고, 여러 관직 제수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별세 후 우참찬에 추증되고 민양(愍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임진왜란 이전

박춘무는 사육신 박팽년의 아우 박인년의 8세손으로, 박기정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청주 읍성 탈환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진 옥천의 조헌 역시 박춘무와 함께 이지함에게서 배운 문인(門人)이다.

2. 2. 임진왜란과 의병 활동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박춘무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스승 이지함에게서 배운 가르침을 바탕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격문을 지어 여러 고을에 보내 의병을 모집했고, 문중과 각지에서 모인 70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부모산에서 훈련했다.

박춘무는 조헌,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 탈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청주성 탈환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보로, 전국적인 의병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전투 후 박춘무는 진천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선조가 있는 의주로 가 왕을 호위했으며, 뛰어난 침술로 선조와 여러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다.

2. 2. 1. 청주성 탈환 전투

1592년 4월, 부산에 침입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을 침략하여 청산, 황간을 불태우고, 5월 2일에는 보은, 회인, 청주, 진천을 거쳐 서울로 진격했다. 일본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일본군의 일부를 청주성에 주둔시켜 충청도 지역을 장악하려 했고, 이로 인해 청주읍성은 3개월 동안 관군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7월 하순, 청주성 탈환 작전이 시작되었다. 4월에 박춘무는 의병 모집 격문을 지어 여러 고을에 보냈고, 7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부모산에서 훈련했다. 7월 4일, 박춘무는 아들 박동명(東命)과 아우 박춘번(春蕃)을 앞세워 복대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공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과 승장(僧將)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이 청주에서 합류하여, 8월 1일 의병, 승병, 관군으로 구성된 3,600여 명의 연합군이 청주성을 공격했다.

조헌과 영규대사의 의병군은 서문을, 관군은 북문을, 박춘무는 남문을 공격했다. 서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던 중, 갑작스러운 천둥 번개로 인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왜군은 북문으로 도망쳤고, 연합군은 무혈 입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청주성 탈환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이었으며, 이 소식은 조선 백성들에게 승리의 희망을, 왜군에게는 패배의 위협을 안겨주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청주성 탈환 이후, 조헌은 좌의대장이 되어 황간, 영동 이남의 적과 싸우기로 했고, 박춘무는 우의대장이 되어 금강 이북의 적과 싸우기로 했다. 그러나 금산이 위급하다는 소식에 조헌은 7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달려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2. 2. 2. 금산 전투와 선조 호위

청주성 탈환은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으로, 이 소식은 우리 민족에게는 승리의 희망을, 적군에게는 패전의 위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었다.

청주성 탈환 후, 조헌은 좌의대장, 박춘무는 우의대장이 되어 각각 황간 영동 이남과 금강 이북의 적을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금산이 위급하다는 소식에 조헌은 700여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향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한편, 박춘무는 진천에서 적을 물리친 후 선조가 있는 의주가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에게 달려갔다. 이후 박춘무는 왕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뛰어난 침술로 선조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다.

2. 3.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개성으로 환도하자 박춘무는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는데, 이는 그의 사심 없는 충성심을 보여준다. 박춘무가 별세하자 왕은 우참찬을 추증하고 민양(愍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3. 부모산과 모유정 설화

모유정(母乳井)은 부모산 상봉에 있는 우물로, '영천(靈泉)'이라고도 불린다. 임진왜란 당시 화천당(華遷堂) 박춘무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모유정 설화에 따르면, 박춘무는 의병을 이끌고 청주성과 아양산을 탈환한 후 왜군의 포위로 인해 식량과 물 부족에 시달렸다. 기진한 박춘무에게 백발 노인이 나타나 소나무 밑에서 물이 솟아날 것을 알려주었고, 실제로 그 자리에서 많은 양의 물이 솟아나 의병들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박춘무는 이 우물을 '어머니의 젖'과 같은 은혜로운 우물이라는 뜻의 '모유정'이라 이름 짓고, 산 이름을 부모산이라 칭하였다.

현재 모유정은 부모산 중턱의 연화사(蓮華寺) 뒤편 통신탑 시설 안에 있으며,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뭄에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설화 속 모유정은 통신탑 시설 내부에 있어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이나, 이곳에서 자연 발생하는 지하수 2개가 등산로 시작 지점인 식당 근처와 연화사 용왕각 안에서 용출되고 있어 이 약수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3. 1. 모유정 설화의 내용

임진왜란 당시 박춘무가 복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고 아양산마저 탈환하여 그곳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번번이 박춘무에게 패한 왜군은 군사로 아양산을 포위하고 식량 보급을 차단하여 의병을 압박하였다. 아양산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왜장은 포위를 굳게 해서 식량과 물의 공급을 철저히 막았다.

이에 박춘무가 이끄는 의병은 굳게 단결하여 항전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식량과 물이 부족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보름을 넘기자 굶어죽는 자(餓死)가 속출했고, 박춘무도 기진하여 산기슭 큰 소나무 밑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동안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중에 지팡이를 짚은 백발 노인이 나타나 박춘무를 독려하여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박춘무 머리맡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켰다. 박춘무가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군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주위에 모여 들었다.

박춘무는 군사들에게 머리맡에 있는 소나무를 뽑게 했다. 소나무가 채 뽑히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많은 양의 물이 솟구쳐 나왔다. 수량이 많아 식수는 물론 말의 목욕까지 시킬 정도였다.

이에 군사들은 용기백배하여 항전했고, 산중에 많은 수량의 수맥이 발견된 것을 알게 된 왜병은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빠져나갔다. 왜병이 물러가자 박춘무는 목타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물을 내린 것은 마치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돌보고 음식을 주는 어버이의 은혜와 같다고 하여 제단을 모으고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때부터 아양산은 부모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박춘무가 죽음 직전에 계시를 받아 판 우물을 '모유정'(母乳井)이라 부르게 되었다.

3. 2. 설화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

모유정 설화는 임진왜란 당시 박춘무가 이끄는 의병이 청주성을 탈환하고 아양산에 머물 때 겪은 물 부족 문제를 기적적으로 해결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설화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 항전 의지: 식량과 물 부족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항전한 의병들의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 지도자의 리더십: 위기 상황에서 백발 노인의 계시를 받아 우물을 발견하고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킨 박춘무의 리더십을 강조한다.
  • 자연의 은혜: 굶주린 아이에게 젖을 주는 어머니처럼, 메마른 산에서 솟아난 물은 백성을 살리는 자연의 은혜를 상징한다.
  • 지명 유래: 모유정 설화는 부모산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배경을 설명하며,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모유정은 현재 부모산 중턱에 있는 연화사 뒤편 통신탑 시설 안에 위치해 있다.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며, 그 옆에는 오래된 나무가 있어 설화의 신빙성을 더한다. 일반인의 출입은 제한되지만, 모유정에서 나오는 지하수는 등산로 시작 지점과 연화사 용왕각에서 용출되어 약수로 이용되고 있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박기정(朴箕精)
박춘영(朴春英)
박춘화(朴春華)
박춘옹(朴春蓊)
동생박춘번(朴春蕃)
아들박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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