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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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육신은 조선 시대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처형된 여섯 명의 신하를 지칭한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에 반발하여 단종 복위를 꾀했으나, 김질의 밀고로 거사가 발각되어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사육신은 이후 충절의 상징으로 추앙받았으며, 숙종 때 명예가 회복되어 노량진에 사육신 공원이 조성되었다. 또한, 세조의 즉위를 거부하고 은퇴한 생육신과 함께 충신으로 칭송받았으며, 관련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장남 향(문종)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여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손자 단종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단종이 강제로 폐위되자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은 세조를 암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밀고로 인해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일가족과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생육신 중 하나인 매월당 김시습은 이들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매장하였다. 현재 서울특별시 노량진에는 사육신을 기념하는 묘지가 있다.
1456년 세조 2년 6월, 김질, 정창손 등은 단종 복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세조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였다. 세조는 성삼문 등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 굴하지 않았다. 결국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등은 거열형에 처해졌고, 유성원은 자결한 후 역시 거열형을 당했다. 이들을 사육신이라 부르며, 이 사건에 연루된 70여 명도 모두 처벌되었다.[1]
2. 단종 복위 운동
이 사건에는 박중림, 윤영손(尹鈴孫), 성승, 권자신 등도 가담하였으나, 신숙주는 참여를 거부하였다.[1] 사육신 집안의 여성들은 난신에 관계된 부녀자라 하여 노비, 관노, 기생 등으로 끌려갔다가 후에 일부 석방되었다. 성삼문의 사위인 박임경이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한강변 노량진에 매장하였다.
세조는 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단종을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금성대군을 유배 보내고, 양녕대군(세종의 친형)과 권람, 한명회 등의 도움을 받아 1455년 윤6월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였다.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났고, 세조는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단종은 명나라에서 일어난 계유정난의 영향으로 상왕에서 폐위되어 녹산군에 봉해졌다가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이에 금성대군과 집현전 학자들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며 동지를 모았으나, 세조 암살 계획은 발각되었고 관련자들은 체포되어 태형과 능지처참 등의 혹독한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때 처형된 자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등을 포함해 70여 명에 달한다. 금성대군과 단종 또한 이 사건으로 사사되어 독약을 받았다.
2. 1. 김질의 배신과 밀고
세조가 단종에게 왕위를 물려받는 형식은 취했지만, 실상은 계략에 의한 왕위 강탈이었다. 특히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등은 수강궁에 있는 상왕 단종의 복위와 반역파 숙청을 꾀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456년(세조 2년)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향응하는 기회를 틈타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이 어긋났다. 이에 김질, 정창손 등은 사태가 불리함을 깨닫고 거사를 밀고하였다.[1] 세조는 곧바로 성삼문 등을 잡아들여 참혹하게 고문했으나, 모두 굴하지 않았다. 결국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등은 거열형에 처해졌고, 유성원은 자결한 후 역시 거열형을 당했다.[1] 이들을 사육신이라 부르며, 이 사건에 연루된 권자신 등 70여 명도 모두 처벌받았다.[1]
3. 혹독한 고문과 처형
사육신 사건으로 500여 명에서 800여 명이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1. 연좌제와 여성들의 비극
세조는 하위지에게 죄를 시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으나, 하위지는 이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사육신과 그 가족들은 본인, 아버지, 형제, 아들, 손자, 조카까지 모두 연좌되어 처형당했다. 생후 1년, 2년 된 어린 남자아이들은 입에 소금을 채워 질식사시키거나, 나이가 찬 뒤에 처형하였다.
백부, 숙부, 조부, 종조부, 사촌까지는 노비로 보내지거나 관노로 고을에 영속되거나 병사로 충군당했고, 5촌 이상은 유배형을 당했다. 사육신 사건으로 500여 명에서 800여 명이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육신이 죽은 뒤,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 관청의 기생 또는 관비로 분배되었다. 권람은 자신의 5촌 조카딸인 권영금을 분배받는 식으로 일부 친족에게 정속된 여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공신 가문에 종과 노리개로 분배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절개를 지키지 않고 공신의 첩이 된 여성들을 비판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었지만, 사육신 가문의 아내와 딸 중 공신들의 성노리개로 겁탈당한 여성들의 기록은 실리지 않았다.
박팽년의 형수인 윤씨는 봉석주의 첩이 되었는데, 윤연령의 딸이며 훗날 선조 때의 형제 정승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증대고모가 된다. 윤씨는 난신에 연좌된 부녀자들의 존재가 언급된 기사에는 나타나지 않던 여성이었다.
4. 사육신의 매장과 추모
단종이 강제로 폐위되자 사육신은 세조 암살을 통해 단종 복위를 꾀하였으나, 밀고자에 의해 적발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일가족과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당했다. 당시 시체는 처형장인 새남터에 그대로 버려졌으나, 생육신 중 하나인 매월당 김시습이 몰래 매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서울특별시 노량진에 사육신을 기념하는 묘지가 있다.[5] 성삼문의 사위인 박임경이 수습하여 한강변 노량진에 매장하였다는 설도 있다.
사육신 일족 중 후손이 생존하고 있는 집안은 박팽년가와 하위지 가문이다. 하위지의 조카 하포, 하박, 하원 등은 미성년자라서 처형되지 않았고, 박팽년의 며느리 이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과 박팽년가의 노비로 함께 끌려온 여종의 딸을 바꾸어서 자신의 딸이라 주장하여 아들을 살렸다. 아들 박비는 성종 때에 자수하여 특별히 사면되고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세조는 사육신의 시신이 매장된 뒤 이를 보고 당대에는 역적이지만 후대에는 충신이 되겠다고 한탄한 바 있다. 한편 사육신의 편에서 세조의 편으로 전향한 신숙주, 김질, 정인지는 배신자의 상징처럼 여겨져 비판과 지탄,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사육신은 사후 중종 때 복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현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이 사육신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계속 올려 영조, 정조 때에 관작이 복구되고 증직과 시호가 내려졌다. 1782년(정조 6) 정조는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 하위지 · 유성원 · 김문기를 추모하여 노량진에 조선육신이라는 신도비를 세워주었다.
성종 때 사림파가 등장하여 명분론에 근거하여 세조의 권력 장악을 찬탈로 간주하게 되자( 무오사화), 이에 저항하여 충의에 순절한 신하들이 추앙받게 되었고, 단종 복위 사건으로 처형된 주요 6인이 “사육신”으로 불리게 되었다. 숙종 때인 1691년에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면서 한강 남쪽 노량진에 민절서원이 세워졌다(현재 동작구 사육신공원).
세조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은퇴하여 평생 관직을 고사한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専),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温)의 “생육신”(生六臣)도 사육신과 함께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2007년에 사육신을 소재로 한 드라마(사육신)가 대한민국에서 제작·방영되었다.
4. 1. 사육신묘와 신도비

사육신의 시신을 누가 매장하였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통설에 의하면 매월당 김시습이 비밀리에 사육신의 시신을 한강변에 매장했다고 한다.
김시습은 어느 날 밤에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의 시신과 박팽년의 형제들과 부친 박중림, 성삼문의 형제들과 부친 성승의 시신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노량진에 안장하였다.
이때 박팽년의 형제들과 부친을 근처에 묻고 박씨지묘라는 비석을 따로 더 세웠고, 성삼문의 형제들의 시신은 성삼문 묘 근처에 묻고, 성승의 묘는 성삼문의 묘 앞쪽 혹은 뒤쪽에 묻고 성씨 지묘라고 쓴 비석을 두 기 더 세웠다.
그러나 훗날 성승의 묘로 전하는 묘소는 실전되었고, 후대에 충청남도 홍성군에 성승 장군과 그보다 앞서 사망한 본부인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성승의 묘소에 실제 성승의 시신이 있는가 여부는 불투명하다. 근처에는 성삼문의 생가와 사육신 사건 이전에 사망한 성삼문의 본부인 묘소도 있다.
5. 사육신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복권
사육신은 세조에 의해 강제로 폐위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처형당한 여섯 신하를 말한다. 이들의 시신은 생육신 중 한 명인 김시습에 의해 서울특별시 노량진에 매장되었다.[5]
세조는 사육신의 시신이 매장된 뒤 이를 보고 당대에는 역적이지만 후대에는 충신이 될 것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사육신의 편에서 세조의 편으로 돌아선 신숙주, 김질, 정인지는 배신자로 여겨져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사육신에 대한 복권 움직임은 중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현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이 사육신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고, 영조, 정조 때에 관직이 복구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1782년(정조 6) 정조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를 추모하여 노량진에 조선육신이라는 신도비를 세웠다.[5]
5. 1. 사림파의 등장과 명분론
조선 성종 때 사림파가 등장하여 명분론에 근거하여 세조의 권력 장악을 찬탈로 간주하게 되자(무오사화), 이에 저항하여 충의에 순절한 신하들이 추앙받게 되었고, 단종 복위 사건으로 처형된 주요 6인이 “사육신”으로 불리게 되었다.[1] 숙종 때인 1691년에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면서 한강 남쪽 노량진에 민절서원이 세워졌다(현재 동작구 사육신공원).[1]또한, 세조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은퇴하여 평생 관직을 고사한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의 “생육신”도 사육신과 함께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1]
5. 2. 생육신과의 비교
사육신은 세종이 죽으면서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손자 단종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긴 것에서 시작되었다. 단종이 강제로 폐위되자, 이들은 세조 암살을 통해 단종 복위를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생육신 중 한 명인 매월당 김시습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서울특별시 노량진에 매장하였다.[1]사육신은 죽음으로 충성을 바친 여섯 명의 신하를 의미하며,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가 해당된다. 반면, 생육신은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명의 신하로, 김시습, 남효온, 이맹전, 조려, 성담수, 원호가 있으며, 남효온 대신 권절이 꼽히기도 한다.[1]
성종 때 사림파가 등장하여 세조의 집권을 찬탈로 규정하면서 사육신이 충신으로 추앙받게 되었고, 숙종 때인 1691년에는 이들의 명예가 회복되어 동작구 사육신공원에 민절서원이 세워졌다. 생육신 또한 사육신과 함께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1]
6. 사육신을 다룬 작품
사육신 이야기는 문학과 TV 드라마에서도 자주 각색되어 왔다. 최근에는 북한에서 제작된 사극이 방영되었는데, 이 드라마는 남한에서 방영된 최초의 북한 드라마로 2007년 8월 남한에서 방송되었다.[3] 같은 해, 대한민국에서 사육신을 소재로 한 드라마 사육신이 제작·방영되었다.
7. 기타 관련 인물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이 사실을 누설했다가, 정창손 등의 설득에 넘어가 계획을 폭로하게 되면서 사육신은 모두 참살당했다. 사육신 집안의 여성들은 난신에 관계된 부녀자라 하여 노비가 되거나 관노, 기생 등으로 끌려갔다가 뒤에 일부 석방되었다.
사육신의 시신은 성삼문의 사위인 박임경이 수습하여 한강변 노량진에 매장하였다.[5]
어느날 야밤에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 하위지 · 유성원 · 유응부의 시신과 박팽년의 형제들과 부친 박중림, 성삼문의 형제들과 부친 성승의 시신을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노량진에 안장하였다.
이때 박팽년의 형제들과 부친을 근처에 묻고 박씨지묘라는 비석을 따로 더 세웠고, 성삼문의 형제들의 시신을 성삼문 묘 근처에 묻고, 성승의 묘는 성삼문의 묘 앞쪽 혹은 뒷쪽에 묻고 성씨 지묘라고 쓴 비석을 두 기를 더 세웠다.
성승의 묘로 전하는 묘소는 실전되었고, 후대에 충청남도 홍성군에 성승 장군과 그보다 앞서 사망한 본부인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성승의 묘소에 실제 성승의 시신이 있는가 여부는 불투명하다. 근처에는 성삼문의 생가와 사육신 사건 이전에 사망한 성삼문의 본부인 묘소도 있다.
사육신이 죽은 뒤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청의 기생, 관비로 분배되었다. 권람은 자신의 5촌 조카딸인 권영금을 분배받는 식으로 일부 친족에게 정속된 여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공신가에 종과 노리개로 분배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절개를 지키지 않고 공신의 첩이 된 여성들을 비판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었지만, 사육신 가문의 아내와 딸 중 공신들의 성노리개로 겁탈당한 여성들의 기록은 실리지 않았다.
박팽년의 형수로 봉석주의 첩이 된 윤씨는 윤연령의 딸이며, 후일 선조 때의 형제 정승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증대고모가 된다. 윤씨는 난신에 연좌된 부녀자들의 존재가 언급된 기사에는 나타나지 않던 여성이기도 했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백옥헌(白玉軒) 이개의 종증손이 토정비결의 저자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학자 토정 이지함이고, 학자 성암 이지번이다.
백옥헌 이개의 종고손은 조선중기의 동인, 북인의 당수였던 아계 이산해(李山海)였다.
성삼문의 6촌 동생인 성담수는 생육신의 한사람이었고, 성담수의 동생이자 성삼문의 또다른 6촌 동생인 성담년은 성종 때 출사하였다. 생육신 성담수와 성담년의 외조카이며 성삼문의 7촌 외조카는 중종 때의 훈구파 영의정 경재 이기였다.
7. 1. 사육신 가문의 후손
사육신 일족 중 후손이 생존하고 있는 집안은 박팽년가와 하위지 가문이다. 하위지의 조카 하포, 하박, 하원 등은 미성년자라서 처형되지 않았고, 박팽년의 며느리 이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과 박팽년가의 노비로 함께 끌려온 여종의 딸을 바꾸어서 자신의 딸이라 주장하여 아들을 살렸다.[5] 아들 박비는 성종 때에 자수하여 특별히 사면되고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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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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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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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제목 : 북한 드라마 '사육신' 내년KBS 방영
http://linux23.kbs.c[...]
Yahoo News
2006-04-08
[4]
문서
생육신과 기타 은자들의 경우는 또다시 청담파로 재분류하기도 한다.
[5]
문서
유명조선국육신묘비명(조선시대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사육신의 묘비명)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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