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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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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지함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사회 사상가로, 1517년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경덕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성리학적 자연철학을 수용하면서도 백성을 위한 실용적인 면을 강조했다. 유랑 학자로서 전국을 여행하며 백성들의 삶을 체험하고, 시장과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당시 시대상을 앞서간 사상을 펼쳤다. 57세에 관직에 나아가 포천 현감과 아산 현감을 역임하며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쳤으며, 거인청을 설립하여 빈민 구제에 힘썼다. 이이, 조헌 등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토정비결》과 《토정유고》가 있으며, 실학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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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
기본 정보
이지함
이지함
본관전주(全州)
화보(和甫)
토정(土亭)
시호문강(文康)
출생1517년
사망1578년
묘소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산 36-2
가족
아버지증좌찬성(贈左贊成) 이치(李穉)
어머니정부인(貞夫人) 파평 윤씨(坡平 尹氏)
부인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 權氏)
아들이윤경(李潤慶)
경력
음서1566년(명종 21년) - 종6품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1573년(선조 6년) - 종4품 아산현감 (현 충청남도 아산시)
1578년(선조 11년) - 고령현감 (현 경상북도 고령군)
사상과 업적
주요 저서토정비결
관련 인물서경덕, 조식

2. 생애

이지함은 맏형인 이지번과[2][8] 개성의 서경덕에게서 글을 배웠다.[3] 선조 때 뛰어난 행실로 벼슬에 올라 포천 현감을 거쳐 아산 현감을 지냈다. 성품은 기위(奇偉)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했다고 한다.[4] 재물에 욕심이 없어 평생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항상 베옷과 짚신을 신었다.[5] 의약·복서·천문·지리·음양 등에 통달했으며[6] 괴상한 행동과 예언 등의 일화[2][7]가 많다. 이이와 친하여 성리학을 배우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욕심이 많아 배울 수 없다고 거절했다.[8][2]

이지함은 1517년 중종 때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났다. 6대 조상은 이색이다. 아버지 이치(1477~1530)는 수원의 현감이자 좌찬성을 지냈으며, 이지함이 열네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지함은 그의 형 이지번에게서 배웠다. 이지번은 은퇴 후 조용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장남 이산해(1539~1609)는 1590년~1592년과 1600년~1602년에 영의정을 역임했다.

이지함은 서경덕에게서 수학하며,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 유교에서 벗어나는 것도 수용하는 등 혁신적인 사회 경제적 사상에 개방적인 태도를 가졌다. 또한 역학, 천문, 복서, 의학을 공부했다.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 등의 사림 숙청으로 인해 그의 장인이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면서 그의 가문은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지함은 명예를 추구하기보다는 유랑 학자로서 전국의 서민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자 했다. 배를 타고 조선을 여행하며 바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고, 제주도를 세 번이나 성공적으로 항해했다. 자주 항해를 했기에 그의 호 수산을 변형하여 수선(水仙), 즉 물의 신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목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품 생산과 사업 창출을 가르쳐 자급자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 상인을 천시하던 시대적 분위기와 달리 시장과 국내외 무역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이를 통해 서민들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포구 토정로 ( 마포대교 건너편) 근처에 진흙으로 지은 초라한 정자에서 생활했다. 이 3m 남짓한 진흙집이 큰 홍수에도 무너지지 않자 ‘토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여행 중에 쇠솥을 모자로 쓰는 등 기이한 행동과 기행으로 유명하다.

3. 사상과 업적

이지함은 맏형인 이지번[2][8]서경덕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이성리학을 배우라고 권고했으나, 이지함은 욕심이 많아 배울 수 없다고 거절했다.[8][2] 그는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유교에서 벗어나는 것도 수용하는 등 혁신적인 사회 경제적 사상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3] 또한 역학, 천문, 복서, 의학을 공부했다.[6]

이지함은 명예보다 유랑 학자로서 전국의 서민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자 했다. 배를 타고 조선을 여행하며 바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었고, 제주도를 세 번이나 성공적으로 항해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품 생산과 사업 창출을 가르쳐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3] 또한 당시 상인을 천시하던 시대적 분위기와 달리 시장과 국내외 무역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이를 통해 서민들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선조 즉위 후 금고가 해제되자, 57세(1573년)에 관직에 나아가 포천 현감, 아산 현감을 지냈다. 포천 현감 시절에는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은광 개발, 옥 채취, 어업, 소금 생산 등을 통해 곡식을 마련하려 했으나 조정의 반대로 사직했다.[3] 아산 현감 시절에는 거인청(乞人廳)을 설립하여 빈민과 노인들을 돕고, 짚신이나 고기잡이 등 간단한 일을 가르치는 직업 훈련 및 재활 센터를 운영했다.[3]

이지함은 백성을 돌보고 실제 개혁과 개선을 추진하는 실질적인 사례를 제시하여, 실학 운동의 선구자로 여겨진다.[3] 1610년,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 이지함과 이산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화암서원(華巖書院)이 건립되었다.[3]

그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주역의 팔괘와 출생 날짜를 바탕으로 한 예측을 모아 놓은 것이다.[3] 그러나 이 책은 19세기 후반에야 나타났고, 저자가 이지함(토정)의 이름을 빌려 사후적으로 ‘예언’을 덧붙여 책의 예언 능력에 대한 신뢰를 얻으려 했다는 설이 있다.[3] 오늘날에는 실제 이지함이 사회 사상가이자 실용적인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재출판들을 단지 성가신 방해 요소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3]

4. 평가와 영향

이이는 이지함을 "물건에 비유하자면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진금괴석(珍禽怪石) 같다."라고 평가했다.[8] 조헌은 "마음이 깨끗하고 사욕이 적어서 고결한 행실은 세상에 모범이 되었다."라고 평가했다.[9]조선왕조실록》에는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돌보는 정성을 다했으며, 맑은 마음에 욕심이 적고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0]

1713년(숙종 39)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9] 1718년(숙종 44)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1] 이지함은 백성을 돌보고 실제 개혁과 개선을 추진한 실질적인 사례를 제시하여, 성리학에 대한 저항이 증가하던 조선 시대에 이상적인 벼슬아치이자 목민관(牧民官)의 모범으로 자주 인용되었다. 또한 실학 운동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1610년,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 이지함과 이산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화암서원이 건립되었다. 그의 저술은 토정유고로 편찬되었다.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주역의 팔괘와 출생 날짜를 바탕으로 한 예측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19세기 후반에야 나타났고, 저자가 이지함(토정)의 이름을 빌려 사후적으로 ‘예언’을 덧붙여 책의 예언 능력에 대한 신뢰를 얻으려 했다는 설이 있다. 해방 이후, 토정비결의 재출판이 해마다 증가했지만, 오늘날에는 이지함이 사회 사상가이자 실용적인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재출판들을 성가신 방해 요소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2015년 9월 16일, 마포구청장은 유랑하는 선비로서의 토정을 묘사한 동상과 토정이 주도한 염전 농사의 모습을 묘사한 조각상들을 포함한 '토정 이지함 이야기 거리'를 개설했다. 오늘날 이지함은 실용적인 인물, 시대를 앞서간 실학자로서, 모호한 교리적 차이보다 경제와 백성의 복지를 우선시한 인물로 자주 인용된다.

5. 저서



이지함은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주역의 팔괘와 출생 날짜를 바탕으로 한 예측을 모아 놓은 것이다.[2] 그러나 이 책은 19세기 후반에야 나타났고, 저자가 이지함(토정)의 이름을 빌려 사후적으로 ‘예언’을 덧붙여 책의 예언 능력에 대한 신뢰를 얻으려 했다는 설이 있다.[1]

6. 기타

1992년 《이지함선생묘》가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320호로 지정되었다. 이지함은 이상적인 벼슬아치, 목민관의 모범으로 백성들에게 자주 인용되었으며,[1] 조선 성리학에 대한 저항이 증가하던 시대에 백성을 돌보고 실제 개혁과 개선을 추진하는 실질적인 사례를 제시하여 실학 운동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2]

1610년,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 이지함과 이산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화암서원이 건립되었다.[3] 그의 저술은 토정유고로 편찬되었다.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주역팔괘와 출생 날짜를 바탕으로 한 예측을 모아 놓은 것으로, 장인의 학자 학살로 인한 죽음[4]임진왜란을 예측[5]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은 19세기 후반에야 나타났고, 저자가 이지함(토정)의 이름을 빌려 사후적으로 ‘예언’을 덧붙여 책의 예언 능력에 대한 신뢰를 얻으려 했다는 설이 있다.[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지함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이지함은 딸의 얼굴을 보고 딸이 부유해지면 요절할 운명임을 알았다. 그래서 이지함은 딸이 점쟁이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토정비결』을 저술했다. 딸의 점괘가 너무 정확해서 이지함은 딸이 곧 부유해져 저주를 받을까 걱정하여 책을 수정하여 고의적인 오류를 첨가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이 책은 때때로 부정확한 점괘를 보여줄 수 있다.[7]

이 책은 요르겐센(Jorgensen)이 편찬한 『정감록』에서 번역 및 비판되었다.[8] 해방 이후, 토정비결의 재출판이 해마다 더욱 증가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실제 이지함이 사회 사상가이자 실용적인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재출판들을 단지 성가신 방해 요소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9]

2015년 9월 16일, 마포구청장은 유랑하는 선비로서의 토정을 묘사한 동상과 토정이 주도한 염전 농사의 모습을 묘사한 조각상들을 포함한 '토정 이지함 이야기 거리'를 개설했다.[10][11]

오늘날 이지함은 실용적인 인물, 시대를 앞서간 실학자로서, 모호한 교리적 차이보다 경제와 백성의 복지를 우선시한 인물로 자주 인용된다.

7.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이우(李堣, 1432년 ~ ?)성균관대사성, 증 참판, 이계전(1404년 ~ 1459년)의 아들
조부이장윤(李長潤)봉화현감, 증 이조판서
아버지이치(李穉, 1477년 ~ 1530년)수원판관, 증 좌찬성
어머니진사 김맹권(金孟權)의 장녀
이지영(李之英)
이지번(李之蕃, 1508년 ~ 1575년)내자시정, 증 영의정,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무(李之茂)생원, 증 영의정·한창부원군, 이산보(1539년 ~ 1594년)의 아버지


참조

[1] 서적 아계유고
[2] 실록 선조수정실록 1578-07-01
[3] 서적 화담집
[4] 실록 선조수정실록 1586-10-01
[5] 실록 선조수정실록 1573-05-01
[6] 서적 장암집
[7] 실록 영조실록 1754-11-27
[8] 서적 율곡전서 1578-07
[9] 실록 숙종실록 1713-05-20
[10] 실록 선조실록 1578-07-24
[11] 실록 숙종실록 171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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