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 (15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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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홍(1534년 ~ 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시기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활동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임진왜란 발발 당시 판옥선을 침몰시키고 도주하는 등 초기 전투에서 부적절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선조를 평양에서 만나 좌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임진강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평양성 전투 이후 파주로 종군하던 중 병으로 사망했다. 사후 선무 원종 일등공신으로 추증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였던 박홍은 왜군이 몰려오자 판옥선 40척을 구멍 내 침몰시키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른 뒤 도망쳐, 동래성 전투에서 송상현을 구원하러 왔으나, 왜군의 수에 놀라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평양으로 피란하는 선조를 찾아가 좌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진강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였다. 성천에서 우위대장과 의용도대장에 임명되었고, 1593년 1월 평양이 탈환되자 김명원을 따라 파주로 종군하던 중 병이 재발하여 치료 중 사망했다.
아버지는 별제 박영무이고 어머니는 직장 정인걸의 딸이다.
2. 생애
임진년(1592년) 왜적이 침범하자, 박홍은 해안으로 나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본진으로 들어가 수비했다. 왜적이 연달아 이웃 고을을 함락하여 구원병의 길이 끊기자, 편장(褊將)을 파견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성 안의 사람들을 먼저 나가게 한 뒤에 자신은 군량과 병기를 챙겨 따라 나가면서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경상도의 방어장(防禦將) 및 조방장(助防將) 등과 같이 죽령으로 물러가 수비하고 있다가 조령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달려갔으나, 어가가 서쪽으로 떠난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난 뒤였다.
행재소로 달려가던 도중 원수 김명원을 만나 좌위 대장에 임명되어 같이 임진강을 수비하였다. 병력을 나누어 신할ㆍ유극량 등과 같이 파주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여러 장수들은 모두 패배하여 죽고 박홍만 혼자 휘하의 병력을 그대로 이끌고 돌아왔다. 얼마 후 임진강 하류의 군대가 붕괴되자 왜적이 곧바로 송경(개성)으로 들이닥쳤다. 박홍은 원수를 따라 샛길을 통해 평양으로 달려가 급수문(急水門)의 조방장이 되었다.
평양이 패배하여 장차 의주 행재소로 가려고 할 때, 순변사 이일이 공을 보고 말하기를,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들이 쓸데없이 죽으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지금 해서(海西)로 가 한쪽 지역이라도 지키고 있으면 후일 조정에서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라고 하자, 박홍이 옳게 여겨 순변사와 같이 평산에 이르러 병력을 수습하여 적진(賊陣)을 공격하기로 계책을 세웠다. 그런데 적병과 교전(交戰)하기 전에 이천에 주둔한 세자가 급히 공을 불렀으므로 군대를 거느리고 달려갔다.
이윽고 세자를 따라 성천으로 들어가 우위 대장(右衛大將)이 되었고 또 의용 도대장(義勇都大將)이 되어 평양 지대로 나가 여러 번 싸워 조금 유리하였다. 그런데 대간(臺諫)이 공이 처음에 신지(信地)를 떠난 것을 소급해 논하여 관작을 삭탈하였으므로 백의종군하였다. 이윽고 공로를 감안해 죄를 용서하고 곧바로 관작을 주었다가 곧바로 거두는 등 이렇게 세 번이나 되풀이하였다. 그때 조정이 멀리 의주에 있었으므로 의논을 주관한 자들이 제각기 자신이 들은 바를 믿은 바람에 이처럼 상벌(賞罰)이 전도되었다.
1593년에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하자 공은 원수를 따라 파주에 이르렀는데, 평소에 앓던 병이 이때에 이르러 심해졌으므로 휴가를 요청하여 배를 타고 호서로 돌아가 병을 치료한 뒤에 다시 나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고향의 집을 70리 앞두고 향년 60세로 배에서 세상을 떠났으므로, 향리의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막론하고 그 말을 듣고 애석해 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박홍(朴泓, 1534년 ~ 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청원(淸源),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아버지는 별제(別提)를 지내고 호조참의에 추증된 박영무(朴英珷)이다. 젊어서부터 활쏘기와 무예에 능했으며, 1556년(명종 11)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이후 강계부 판관, 이산 군수, 의빈부 도사, 정평 부사 등을 역임했다. 1572년(선조 5) 평산 부사로 재직하며 명나라 사신 접대와 도적 진압에 공을 세웠으나 포상받지 못했다.
어머니 상을 치른 후 도총부 도사를 거쳐 영암 군수로 3년간 재직했다. 이후 비변사 낭청, 천성 만호, 부산 첨사를 역임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귀성 부사를 거쳐 1580년(선조 13) 만포 첨사로 발탁되어 군정을 정비하고 호인(胡人)들을 회유하여 포로를 돌려받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1583년(선조 16) 종성 부사로 부임하여 오랑캐의 난을 진압하고 백성들을 구휼했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 의금부에 투옥될 뻔했으나 절도사의 변호로 풀려났다. 이후 호군, 금위, 내승을 겸임하고 덕원 부사로 부임하여 귀신 재앙을 막는 등 치적을 쌓았으나, 얼마 후 파직되었다.
1587년(선조 20) 아버지 상을 당했다. 복상 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백성을 너그럽게 다스리고 군정을 정비하여 순무어사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2. 2. 경상좌수사 시절과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였던 박홍은 왜군이 몰려오자 판옥선 40척을 침몰시키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른 뒤 도망쳤다. 동래성 전투에서는 송상현을 구원하러 왔으나, 왜군의 수에 놀라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평양으로 피란하는 선조를 찾아가 좌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진강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였다. 성천에서 우위대장과 의용도대장에 임명되었고, 1593년 1월 평양이 탈환되자 김명원을 따라 파주로 종군하던 중 병이 재발하여 치료 중 사망했다.
임진년(1592년) 왜적이 침입하자, 박홍은 해안으로 나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본진으로 들어가 수비했다. 왜적이 이웃 고을을 함락하여 구원병의 길이 끊기자, 편장을 파견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성 안의 사람들을 먼저 나가게 한 뒤 군량과 병기를 챙겨 따라 나가면서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경상도의 방어장, 조방장 등과 죽령으로 물러가 수비하다가 조령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달려갔으나, 어가는 이미 서쪽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행재소로 가던 중 김명원을 만나 좌위대장에 임명되어 임진강을 수비했다. 병력을 나누어 신할, 유극량 등과 파주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패배했고, 박홍만 혼자 병력을 이끌고 돌아왔다. 임진강 하류 군대가 붕괴되자 왜적이 송경으로 들이닥쳤고, 박홍은 원수를 따라 샛길을 통해 평양으로 가 급수문의 조방장이 되었다.
평양이 패배하고 의주 행재소로 가려 할 때, 순변사 이일이 박홍에게 해서로 가 한 지역이라도 지키고 있으면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라 했다. 박홍은 이일과 평산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적진을 공격하기로 했으나, 이천에 주둔한 세자가 불러 군대를 거느리고 갔다. 성천에서 우위대장, 의용도대장이 되어 평양 지대로 나가 여러 번 싸워 조금 유리했으나, 대간이 박홍이 처음에 신지를 떠난 것을 논하여 관작을 삭탈하여 백의종군했다.
이후 공로를 감안해 죄를 용서하고 관작을 주었다가 거두는 일이 세 번 반복되었다. 1593년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하자, 박홍은 원수를 따라 파주에 이르렀으나, 평소 앓던 병이 심해져 휴가를 요청하여 배를 타고 호서로 돌아가 병을 치료하려 했다. 고향 집을 70리 앞두고 향년 60세로 배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선무 원종 일등공신으로 정해지고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아들 박진남이 정난 공신이 되면서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더 추증되었다.
2. 2. 1. 임진왜란 초기 졸전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였던 박홍은 왜군이 몰려오자 판옥선 40척에 구멍을 내 침몰시키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른 뒤 도망쳤다. 동래성 전투에서는 송상현을 구원하러 왔으나, 왜군의 수에 놀라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이후 평양으로 피란하는 선조를 찾아가 좌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진강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였다. 성천에서 우위대장과 의용도대장에 임명되었고, 1593년 1월 평양이 탈환되자 김명원을 따라 파주로 종군하던 중 병이 재발하여 치료 중 사망했다.
임진년(1592년) 왜적이 침범하자, 박홍은 해안으로 내려가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본진으로 들어가 수비하였다. 왜적이 연달아 이웃 고을을 함락하여 구원병의 길이 끊기자, 편장(褊將)을 파견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성 안의 사람들을 먼저 나가게 한 뒤에 자신은 군량과 병기를 챙겨 따라 나가면서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경상도의 방어장(防禦將) 및 조방장(助防將) 등과 같이 죽령으로 물러가 수비하고 있다가 조령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달려갔으나, 어가가 서쪽으로 떠난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난 뒤였다.
행재소로 달려가던 도중 원수 김명원을 만나 좌위 대장에 임명되어 같이 임진강을 수비하였다. 병력을 나누어 신할ㆍ유극량 등과 같이 파주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여러 장수들은 모두 패배하여 죽고 박홍만 혼자 휘하의 병력을 그대로 이끌고 돌아왔다. 얼마 후 임진강 하류의 군대가 붕괴되자 왜적이 곧바로 송경(개성)으로 들이닥쳤다. 박홍은 원수를 따라 샛길을 통해 평양으로 달려가 급수문(急水門)의 조방장이 되었다. 평양이 패배하여 의주 행재소로 가려고 할 때, 순변사 이일이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들이 쓸데없이 죽으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지금 해서(海西)로 가 한쪽 지역이라도 지키고 있으면 후일 조정에서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라고 하자, 박홍은 옳게 여겨 순변사와 같이 평산에 이르러 병력을 수습하여 적진을 공격하기로 계책을 세웠다.
적병과 교전하기 전, 이천에 주둔한 세자가 급히 박홍을 불러 군대를 거느리고 달려갔다. 세자를 따라 성천으로 들어가 우위 대장, 의용 도대장이 되어 평양 지대로 나가 여러 번 싸워 조금 유리하였다. 그러나 대간이 박홍이 처음에 신지(信地)를 떠난 것을 소급해 논하여 관작을 삭탈하였으므로 백의종군하였다. 이후 공로를 감안해 죄를 용서하고 관작을 주었다가 거두는 일이 세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2. 2. 2. 평양성 전투와 사망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였던 박홍은 왜군이 몰려오자 판옥선 40척을 침몰시키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른 뒤 도망쳤다. 동래성 전투에서는 송상현을 구원하러 왔으나, 왜군의 수에 놀라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평양으로 피란하는 선조를 찾아가 좌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진강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였다. 성천에서 우위대장과 의용도대장에 임명되었고, 1593년 1월 평양이 탈환되자 김명원을 따라 파주로 종군하던 중 병이 재발하여 치료 중 사망했다.
임진년(1592년) 왜적이 침입하자, 박홍은 해안으로 나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본진으로 들어가 수비했다. 왜적이 이웃 고을을 함락하여 구원병의 길이 끊기자, 편장을 파견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성 안의 사람들을 먼저 나가게 한 뒤 군량과 병기를 챙겨 따라 나가면서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경상도의 방어장, 조방장 등과 죽령으로 물러가 수비하다가 조령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달려갔으나, 어가는 이미 서쪽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행재소로 가던 중 김명원을 만나 좌위대장에 임명되어 임진강을 수비했다. 병력을 나누어 신할, 유극량 등과 파주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패배했고, 박홍만 혼자 병력을 이끌고 돌아왔다. 임진강 하류 군대가 붕괴되자 왜적이 송경으로 들이닥쳤고, 박홍은 원수를 따라 샛길을 통해 평양으로 가 급수문의 조방장이 되었다.
평양이 패배하고 의주 행재소로 가려 할 때, 순변사 이일이 박홍에게 해서로 가 한 지역이라도 지키고 있으면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라 했다. 박홍은 이일과 평산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적진을 공격하기로 했으나, 이천에 주둔한 세자가 불러 군대를 거느리고 갔다. 성천에서 우위대장, 의용도대장이 되어 평양 지대로 나가 여러 번 싸워 조금 유리했으나, 대간이 박홍이 처음에 신지를 떠난 것을 논하여 관작을 삭탈하여 백의종군했다.
이후 공로를 감안해 죄를 용서하고 관작을 주었다가 거두는 일이 세 번 반복되었다. 1593년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하자, 박홍은 원수를 따라 파주에 이르렀으나, 평소 앓던 병이 심해져 휴가를 요청하여 배를 타고 호서로 돌아가 병을 치료하려 했다. 고향 집을 70리 앞두고 향년 60세로 배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선무 원종 일등공신으로 정해지고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아들 박진남이 정난 공신이 되면서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더 추증되었다.
3. 가족 관계
4. 평가
4. 1. 당대 평가
4. 2. 현대의 평가
5. 논란
5. 1. 임진왜란 초기 행적 논란
5. 2. 잦은 패전과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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