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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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1783년 멕시코에서 태어난 군인으로, 19세기 초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왕당파 군인으로 복무하며 멕시코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멕시코 독립을 위해 이괄라 계획을 수립하고, 세 가지 보장 군대를 이끌어 독립을 달성하여 1821년 멕시코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반발에 직면하여 퇴위 후 망명했다가 멕시코로 돌아와 처형당했다. 그는 멕시코 국기를 디자인하고, 멕시코라는 국명을 사용하게 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의 유산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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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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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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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구스틴 코스메 다미안 데 이투르비데 이 아람부루 |
출생일 | 1783년 9월 27일 |
출생지 | 누에바에스파냐 바야돌리드 (현재의 미초아칸주 모렐리아) |
사망일 | 1824년 7월 19일 |
사망지 | 멕시코 제1공화국 타마울리파스주 파디야 |
매장 | 1838년 10월 26일, 멕시코시티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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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
작위 | 멕시코 황제 |
통치 기간 | 1822년 5월 19일 – 1823년 3월 19일 |
대관식 | 1822년 7월 21일 |
선임 | 군주제 설립 |
후임 | 임시 정부 (연대순), 막시밀리아노 1세 (황제로서) |
왕조 | 이투르비데 가문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아나 마리아 데 우아르테 이 무니스 |
자녀 | 아구스틴 헤로니모, 멕시코 제국 황태자 |
아버지 | 호세 호아킨 데 이투르비데 이 아레기 |
어머니 | 마리아 호세파 데 아람부루 이 카릴로 데 피게로아 |
정치 경력 | |
직위 | 멕시코 섭정 의장 |
재임 기간 | 1821년 9월 28일 – 1822년 5월 18일 |
이전 | 군주제 설립 |
이후 | 후안 알몬테 (멕시코 제2제국) |
2. 가문과 초기 생애
아구스틴 코스메 다미안 데 이투르비데 이 아람부루는 1783년 9월 27일, 스페인 식민지 누에바에스파냐(현재 멕시코)의 바야돌리드(현 모렐리아)에서 태어났다.[5][6] 그의 아버지는 바스크 귀족 가문 출신으로 누에바에스파냐로 이주한 스페인인이었고,[8] 어머니는 멕시코에서 태어난 순수한 스페인 혈통의 크리오요였다.[7][8] 이투르비데 가족은 바야돌리드의 특권적인 토지 소유 계급에 속했다.[5][6][7] 이투르비데 자신도 평생 크리오요임을 내세웠다.[11][12]
그는 바야돌리드의 콜레히오 데 산 니콜라스라는 가톨릭 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2][5][8] 이후 왕립군에 입대하여[12] 지방 보병 바야돌리드 연대의 장교로 복무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5][6][13][8]
2. 1. 가족 배경
아구스틴 코스메 다미안 데 이투르비데 이 아람부루는 1783년 9월 27일, 당시 바야돌리드라고 불렸던 현재 모렐리아에서 태어났다.[5][6] 그는 대성당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코스마, 다미아노의 이름을 받아 세례를 받았다.[7] 부모에게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고, 결국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8]이투르비데의 부모는 바야돌리드의 특권적인 토지 소유 계급에 속했으며, 아페오와 과라차의 아시엔다와 키리오 인근의 토지를 포함한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5][6][7]
그의 아버지 호아킨 데 이투르비데는 바스크 젠트리 가문 출신으로, 이 가문은 아라곤의 후안 2세 국왕에 의해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조상 중 한 명인 마르틴 데 이투르비데는 1430년대 바스탄 고지 계곡의 왕실 ''메리노''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15세기부터 가문의 많은 이들이 바스크 지방에서 정치적 또는 행정적 직책을 맡았다. 호아킨은 차남이었기 때문에 가문의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었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 누에바에스파냐로 이주했다.[8] 아버지의 귀족적이고 스페인 혈통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반면 그의 어머니의 조상은 덜 명확했다. 그녀는 멕시코에서 태어난 순수한 스페인 혈통의 크리오요였다.[7][8]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미초아칸의 고위 가문 출신이라고 한다.[5][6][9] 스페인 식민 시대에는 군 계급을 포함한 사회적 승진에 인종적 카스트가 중요했으며, 원주민 혈통이 있는 것은 종종 불리하게 여겨졌다.[10] 이투르비데는 평생 동안 자신이 크리오요(스페인계 후손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사람)라고 주장했다.[11][12]
아구스틴은 바야돌리드의 가톨릭 신학교인 콜레히오 데 산 니콜라스에서 공부하며 세속 공무원 과정을 수료했지만,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2][5][8] 그 후 잠시 가족의 아시엔다 중 한 곳에서 감독관으로 일하며 훌륭한 기수임을 증명했다.[2][5]
2. 2. 초기 생애와 교육
아구스틴 코스메 다미안 데 이투르비데 이 아람부루는 1783년 9월 27일, 당시 바야돌리드라고 불렸던 현재 멕시코 미초아칸주의 주도 모렐리아에서 태어났다.[5][6] 그는 대성당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코스마, 성 다미아노의 이름을 따서 세례를 받았다.[7] 그의 부모는 바야돌리드의 특권적인 토지 소유 계층이었으며, 아페오와 과라차의 아시엔다와 키리오 인근의 토지를 포함한 농지를 소유했다.[5][6][7] 이투르비데는 다섯 자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로, 후에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8]아버지 호아킨 데 이투르비데는 바스크 젠트리 가문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아라곤의 후안 2세 국왕에게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조상 중 마르틴 데 이투르비데는 1430년대 바스탄 고지 계곡의 왕실 ''메리노''였으며, 이후 가문의 많은 이들이 바스크 지방에서 정치 및 행정직을 맡았다. 호아킨은 차남이었기에 가문의 토지를 상속받지 못하고 부를 쌓기 위해 누에바에스파냐로 이주했다.[8] 어머니는 멕시코에서 태어난 순수한 스페인 혈통의 크리오요였다.[7][8]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미초아칸의 유력 가문 출신이라고도 한다.[5][6][9] 스페인 식민 시대에는 군 계급을 포함한 사회적 지위 상승에 인종적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했으며, 원주민 혈통이 섞여 있는 것은 불리하게 여겨지기도 했다.[10] 이투르비데 자신은 평생 자신이 크리오요라고 주장했다.[11][12]
아구스틴은 바야돌리드에 있는 콜레히오 데 산 니콜라스라는 가톨릭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세속 공무원 과정을 이수했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않았다.[2][5][8] 이후 잠시 가족 소유의 아시엔다 중 한 곳에서 감독관으로 일했는데, 이때 자신이 훌륭한 기수임을 알게 되었다.[2][5]
3. 군 경력
크리오요 출신인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1798년 스페인 왕립군에 입대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으며, 1810년까지 중위로 진급했다.[16] 멕시코 독립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반란군 지도자 미겔 이달고의 합류 제안을 거절하고 스페인 왕당파 군대의 장교로서 반란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6][17]
이투르비데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왕당파 내에서 빠르게 명성을 얻었으나, 반란군과 그 가족들에 대한 잔혹함으로 악명 또한 높았다.[18] 그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엘 드라곤 데 이에로"(El Dragón de Hierro|엘 드라곤 데 이에로es), 즉 "철의 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2] 그는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와 같은 주요 반란군 지도자들과 맞서 싸웠으며, 특히 푸루아란 전투에서의 승리는 모렐로스 세력 약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8][21] 이러한 공적으로 대령까지 진급하고 주요 지역 사령관을 역임했지만,[9][20] 권력을 남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추구했다는 부패 혐의와 잔혹 행위로 인해 1816년 군 지휘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3][9][20]
1년 후 혐의를 벗고 복귀했으나,[3][9][20] 1820년 스페인에서 발생한 리에고 반란과 1812년 카디스 헌법의 부활은 그의 정치적 입장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입헌 군주제 수립으로 페르난도 7세의 권한이 제한되자, 누에바 에스파냐의 보수적인 크리오요들은 스페인 왕정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자치 또는 독립을 모색하기 시작했다.[16][25][22]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투르비데는 멕시코의 독립만이 질서를 유지하고 크리오요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다.[3][12][22]
1820년 말, 남부 지역 반란군 지도자 비센테 게레로를 진압하라는 임무를 받았으나,[16][20] 이투르비데는 오히려 게레로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동맹을 맺었다. 1821년 2월, 두 사람은 멕시코의 독립, 로마 가톨릭교회 신앙의 수호, 모든 주민의 평등 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이괄라 계획을 발표했다.[3] 이 계획은 보수파와 반란군 모두의 지지를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이투르비데는 자신의 왕당파 군대와 게레로의 반란군을 통합하여 '세 가지 보장 군대'(Ejército Trigarante|에헤르시토 트리가란테es)를 창설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5] 이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 왕당파 세력을 몰아내면서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독립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3. 1. 왕당파 군 복무

1798년부터 1810년까지 스페인 왕립 육군에 복무하며 중위까지 진급했다.[16] 19세기 초 누에바 에스파냐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이투르비데는 가브리엘 J. 데 예르모가 이끈 반란을 진압하는 등 초기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16]
1810년 멕시코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반란군의 지도자 중 한 명이자 그의 먼 친척이기도 했던 미겔 이달고 신부는 이투르비데에게 반란군 사령관 중장 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투르비데는 이달고의 봉기가 잘못 계획되었고 방법이 야만적이라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하고, 확고한 왕립 육군 장교로 남았다.[16][17] 그는 처음부터 야심이 컸으며, 종종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반란군을 상대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투르비데는 왕당파 사이에서 빠르게 명성을 얻었지만, 반란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뛰어난 기마 실력을 갖춘 용감한 드라군으로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이끄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전장에서의 용맹함 덕분에 "엘 드라곤 데 이에로"(El Dragón de Hierro|엘 드라곤 데 이에로es), 즉 "철의 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2] 그러나 그는 반란군뿐만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그들의 가족에게까지 잔혹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18] 그는 일기에서 반란군을 "변태", "강도", "신성 모독자"라고 칭했으며,[5] 1814년 부왕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성금요일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파문된 자라고 칭한 반란군 300명을 처형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23] 또한, 반란군 용의자의 어머니, 아내, 자녀 등 민간인을 투옥하는 등[9] 자의적인 행동으로 비판받았다. 1814년에는 여성 100명을 체포하여 "재교육"을 명분으로 여러 가옥에 분산 수감하기도 했다.[24]
그의 주요 전투 경력은 다음과 같다.
- 몬테 데 라스 크루세스 전투 (1810년): 10월 말, 톨루카 계곡의 레르마 강 동쪽 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왕당파는 패배하여 톨루카를 반란군에게 내주었으나, 이투르비데는 이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함과 끈기로 주목받았다.[19][5][16]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 전투가 자신이 직접 참여하여 패배한 유일한 전투라고 주장했다.
- 바야돌리드 전투: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그의 고향인 바야돌리드를 포위했을 때, 이투르비데는 수비대를 이끌고 효과적인 기병 돌격을 감행하여 포위를 격파하고 반란군을 숲으로 몰아냈다. 이 공로로 그는 대위로 진급했다.[12][20]
- 반군 추격 및 진급: 대위가 된 후 이 지역에서 반군을 계속 추격하여 알비노 리세아가 이 라욘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고, 이 공로로 다시 진급했다.[20]
- 대령 진급 및 셀라야 연대 지휘 (1813년): 부왕 펠릭스 마리아 카예하는 그를 대령으로 진급시키고 셀라야 연대의 지휘를 맡겼다.[9]
- 과나후아토 바히오 지역 사령관 임명 (1814년): 격전지였던 바히오 지역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20][9] 1813년부터 1815년까지 모렐로스의 주요 군사적 맞수가 되었다.[22]
- 푸루아란 전투 (1814년): 1월 5일 미초아칸의 푸루아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투르비데가 이끄는 부대는 모렐로스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반란군은 600명 이상 사망하고 7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마리아노 마타모로스가 사령관직을 이어받았다. 이 패배로 모렐로스는 이전과 같은 군사적 역량을 회복하지 못했으며,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8][21] 이투르비데와 다른 스페인 지휘관들은 이후 모렐로스를 끈질기게 추격하여 1815년 말 그를 체포하고 처형하는 데 기여했다.[3]
이러한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력은 부패 혐의로 얼룩졌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재정적 이득을 취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12] 군사적으로 통제하는 지역에서 상업 독점을 형성하고, 사유 재산을 약탈하며 군자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았다.[9] 페레스 갈베스 백작 등은 이투르비데를 포함한 많은 왕당파 장교들의 부당 이득 추구가 왕립군의 효율성을 저해한다고 증언했다.[19] 이러한 부패와 잔혹 행위 혐의로 인해 1816년 부왕은 그의 지휘권을 해제했다.[3][9][20]
1년 후, 감사관 바타예르와 부왕 정부 내 확고한 군주주의자들의 지원으로 모든 혐의는 철회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마지막 남은 반군 지도자들을 격파하기 위해 이투르비데가 필요하다고 부왕을 설득했다.[3][9][20] 복귀했지만, 이투르비데는 해임 당시 느꼈던 굴욕감을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9]
1810년부터 1820년까지 이투르비데는 크리오요로서 스페인 군주제와 부르봉 왕조의 누에바 에스파냐 통치를 수호하며 독립 세력에 맞서 싸웠다.[3][12][22] 그러나 1820년 스페인 본국에서 라파엘 델 리에고가 주도한 반란으로 1812년 카디스 헌법이 부활하고 페르난도 7세의 권한이 크게 제한되는 입헌 군주제가 수립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는 멕시코의 왕당파들에게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고, 멕시코 내 정치적 공백과 변화의 가능성을 열었다.[16][25][22] 이 시점까지 이투르비데는 여전히 왕당파 군대의 장교였다.
3. 2. 독립군 전향
1820년 스페인에서는 리에고 반란의 성공으로 1812년 카디스 헌법이 다시 시행되었다. 이 입헌 군주제 헌법은 페르난도 7세 국왕의 권한을 크게 제한했으며, 이는 누에바에스파냐의 크리오요 엘리트들에게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 본토를 포기하거나 급진적인 자유주의 정책을 강요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16][25] 이러한 정치적 불안 속에서 멕시코 귀족들과 보수 세력은 제한적인 자치권이나 완전한 독립을 통해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22]바로 이 시기인 1820년 11월, 이투르비데는 부왕 후안 루이스 데 아포다카에 의해 군 지휘권을 완전히 회복하고,[22] 누에바에스파냐 남부의 왕당파 군대 대령이자 장군으로 복귀했다.[16] 그의 공식적인 임무는 비센테 게레로가 이끄는 멕시코시티 남서부의 잔존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것이었다.[16][20] 이투르비데는 텔롤로아판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오랫동안 이투르비데가 게레로 진압에 실패한 후 전략을 바꿔 동맹을 모색했다고 여겨졌으나, 2006년에 발견된 1820년 11월 20일자 서신 등 새로운 증거들은 그들이 이투르비데의 임무 시작 전부터 이미 접촉하고 협상 중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초기에는 두 군대 간의 충돌도 있었으나, 이투르비데와 게레로는 서신 교환을 통해 서로의 의도를 파악하고 멕시코 독립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로 합의했다. 이투르비데는 스페인의 상황 변화와 공화주의 물결 속에서 멕시코의 독립만이 국가를 안정시키고 기존 사회 질서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으며, 스스로 크리오요 독립 운동의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3][12][22]
이투르비데는 게레로에게 항복 시 완전한 사면을 제안했지만, 게레로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멕시코 독립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회동에 동의했다.[5] 결국 두 사람은 "Abrazo de Acatempan|아브라소 데 아카템판es"으로 알려진 역사적인 만남, 즉 아카템판 포옹을 통해 독립 계획 실행에 최종 합의했다.[2][3]
성공적인 독립을 위해서는 반군 세력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크리오요 귀족, 교회 등 다양한 세력을 규합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이투르비데는 1821년 2월 24일, 게레로 및 또 다른 반군 지도자 과달루페 빅토리아와 함께 "Plan de Iguala|플란 데 이괄라es" 즉, 이괄라 계획을 발표했다.[3] 이 계획은 세 가지 핵심 원칙, 즉 '세 가지 보장'(Tres Garantías|트레스 가란티아스es)을 내세워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 독립: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신앙의 수호 및 멕시코의 유일한 국교 인정.
- 연합: 멕시코 내 모든 주민(유럽인, 아프리카인, 인디오 등) 간의 법적 평등.[3]
이 계획은 군주제를 지향함으로써 왕당파의 지지까지 확보하려 했다. 이괄라 계획 발표 후, 이투르비데는 1821년 3월 1일 자신의 군대와 게레로의 군대를 통합하여 '세 가지 보장 군대'(Ejército Trigarante|에헤르시토 트리가란테es)를 창설하고 총사령관으로 선포되었다.[5] 게레로는 이투르비데를 독립 운동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5] 이로써 멕시코 독립을 위한 강력한 연합 전선이 구축되었다.
4. 멕시코 독립과 제국
이투르비데는 새로 부임한 스페인 대표 후안 오도노후와 만나 최종 항복 조건을 협상했다.[26] 이 협상 결과 체결된 코르도바 조약[19]은 이괄라 계획의 원칙을 재확인하며 멕시코의 독립적인 군주제를 보장했다. 조약은 스페인의 펠리페 7세나 그의 동생 돈 카를로스를 황제로 초청하되, 이들이 모두 거부할 경우 유럽의 다른 왕족 중에서 군주를 찾기로 했다. 그동안은 섭정이 통치하며, 멕시코의 새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기존 법률(1812년 스페인 헌법 포함)이 유지될 예정이었다.[22] 중요한 점은, 오도노후의 제안으로 스페인이 섭정 임명권을 거부할 경우 멕시코 의회가 자유롭게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갖는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투르비데가 처음부터 황제가 되려 했다는 주장에 반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지방의 왕당파 및 반군 사령관들과 협력한 이투르비데는 과거 왕당파 군대의 상당수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2][22] 1821년 9월 27일, 자신의 생일에 세 가지 보장 군대(Ejército Trigarantespa)를 이끌고 멕시코시티에 입성했다.[25] 군대는 삼색(적, 백, 녹) 깃발로 장식하고 환호하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5] 이날 처음으로 "¡비바 이투르비데 1세!"(Viva Iturbide I!spa)라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다음 날, 멕시코는 독립 제국으로 공식 선포되었다. 잔존 스페인 왕당파 군대는 베라크루스의 산 후안 데 울루아 요새로 후퇴했다.[23]
이투르비데는 임시 정부 헌장의 의장으로 임명되었고, 이 헌장은 멕시코를 임시로 통치할 5명의 섭정을 선출했다.[2] 또한 의회가 소집되기 전까지 입법권을 행사할 36명의 구성원을 두었는데, 이투르비데는 헌장의 구성원 선출과 논의 안건 모두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3] 이 임시 정부는 유럽 왕족에게 멕시코 왕위를 제안하는 임무를 맡았으나,[6][23] 과거 반군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새 정부에서 소외되었다.
새 정부는 압도적으로 이투르비데에게 충성했지만,[9] 과거 반군 세력, 다수의 진보주의자, 그리고 펠리페 7세에게 충성하는 세력 등 반대파도 존재했다. 특히 많은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은 스코틀랜드 의례 프리메이슨 지부에 속해 있었으며, 이들은 Escoceses|에스코세스spa(스코틀랜드인)라고 불렸다. 독립 이후 이괄라 계획의 일부 약속들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이 명백해지면서 권력 내부에서도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투르비데는 멕시코시티의 대저택(현재의 이투르비데 궁전)에 정착하며[27]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자신의 군대에 특혜를 요구하며 장관을 직접 임명하는 등 권력을 강화했다.[23] 이런 상황에서 스페인의 펠리페 7세는 멕시코 왕위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다른 가족 구성원의 수락도 금지했으며, 스페인 의회는 코르도바 조약과 멕시코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11] 유럽 군주를 황제로 추대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이투르비데를 지지하는 보수파(conservadoresspa)는 그가 직접 황제가 될 것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4. 1. 이괄라 계획과 독립 선언

1810년 멕시코 독립 전쟁 발발 당시 스페인군 소속으로 독립군 진압에 참여했던 이투르비데는 점차 멕시코 독립 운동에 동조하게 되었다. 그는 멕시코의 독립만이 당시 퍼지던 공화주의 물결로부터 국가를 보호할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고, 크리오요 독립 운동의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성공을 위해서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자유주의 반군, 토지를 소유한 귀족, 그리고 교회를 하나로 묶어야 했다.
이를 위해 이투르비데는 반란군 지도자 비센테 게레로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3] 그는 게레로에게 항복 시 완전한 사면을 제안했지만, 게레로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멕시코 독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만남에 동의했다.[5] 결국 두 사람은 "아카템판 포옹"으로 알려진 만남에서 독립 계획 실행에 합의했다.[2][3]
1821년 2월 24일, 이투르비데는 게레로 및 또 다른 반군 지도자 과달루페 빅토리아와 함께 "이괄라 계획"을 공포했다.[3] 이 계획은 멕시코를 군주제 국가로 독립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보장'을 핵심 내용으로 삼았다.
1. 자유: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2. 종교: 가톨릭교를 새로운 국가의 유일한 종교로 인정.
3. 연합: 스페인인, 크리오요, 메스티소 등 멕시코의 모든 주민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기존의 복잡한 카스트 제도를 철폐하며 노예 제도를 폐지.
이 계획은 마드리드에서 멕시코시티로 누에바에스파냐의 권력 중심을 옮기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기본 계획은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트 7세를 멕시코로 초청하여 통치하게 하는 것이었다. 만약 페르디난트 7세가 오지 않는다면 다른 부르봉 왕가의 일원을 추대하고, 유럽 군주 중 누구도 오지 않을 경우 멕시코인 스스로 통치자를 선출할 권리를 갖는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23] 또한 군주제를 계획함으로써 왕당파의 지지까지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세 가지 보장은 각기 다른 세력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립 약속은 반군들의 참여를 유도했고, 가톨릭 우위 보장은 스페인 자유주의의 반성직자 정책에 불안감을 느끼던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었다.[22] 스페인 본토 출신(''피니스룰라레스'')과 크리오요 간의 평등 보장은 멕시코 내 귀중한 부동산과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던 스페인인들에게 새로운 국가에서도 그들의 재산이 안전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이는 스페인인들이 떠날 경우 멕시코 경제에 큰 타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조치였다.[25]

이괄라 계획은 기존의 사회 질서를 급격히 바꾸거나 토지 소유 계급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독립을 약속했기 때문에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투르비데는 이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서로 싸워왔던 옛 반군과 왕당파 세력을 규합하는 데 성공했다.[25] 1821년 3월 1일, 이투르비데는 통합된 군대인 세 가지 보장 군대( Ejército Trigarante|에헤르시토 트리가란테es )의 수장으로 추대되었고, 게레로 역시 그를 지도자로 인정하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5] 이들은 힘을 합쳐 멕시코 내 잔존 스페인 세력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현직 부왕과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는 이괄라 계획을 인정하지 않았다.[8][9] 스페인 의회는 새로운 "상급 정치 지도자"(부왕 직책은 1812년 스페인 헌법으로 폐지됨)로 후안 오도노후를 파견했다. 그러나 오도노후는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독립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으며, 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이투르비데가 이끄는 세 가지 보장 군대는 1821년 9월 27일 멕시코시티에 입성하며 사실상 독립을 확정지었다.
독립 직후, 멕시코는 심각한 경제 문제에 직면했다. 이투르비데 정부는 멕시코를 떠나는 스페인인들이 소유한 토지를 하드 통화(신용도 높은 통화)와 교환하도록 허용하는 협정에 서명했는데,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스페인인들은 멕시코 내의 좋은 토지를 대거 소유하고 있었고, 그 대금을 지불하느라 멕시코는 보유하고 있던 통화를 거의 소진했다. 심지어 교회의 은 종이나 금 제단까지 녹여야 할 정도였으며, 이로 인해 멕시코는 국제 사회에 등장하자마자 사실상 파산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4. 2. 멕시코 제국 성립
1798년부터 1810년까지 스페인군에 복무하며 중위까지 진급했던 이투르비데는 1810년 멕시코 독립 전쟁 발발 초기에는 스페인군 소속으로 독립군 진압에 참여했다. 유능한 지휘관으로 인정받아 1816년에는 북부 멕시코 스페인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점차 멕시코 독립의 필요성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는 공화주의 물결로부터 멕시코를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 독립이라고 확신하고, 크리오요 독립 운동의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독립을 성공시키기 위해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내 다양한 세력, 즉 자유주의 반군, 토지 소유 귀족, 교회를 규합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이구알라 계획"을 작성했다. 이 계획은 세 가지 보장을 핵심으로 내세웠다.
- 자유: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 종교: 가톨릭교를 멕시코의 유일한 국교로 인정
- 연합: 멕시코의 모든 주민에 대한 평등한 대우
이 계획은 반군, 성직자, 스페인인 등 주요 세력의 지지를 얻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군주제를 채택하여 왕당파의 지지까지 확보하고자 했다. 이투르비데는 반군 지도자 빈센테 게레로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고, 여러 차례 독립 의지를 보여주었다.[3] 이투르비데는 게레로에게 항복 시 완전한 사면을 제안했으나, 게레로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멕시코 독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만남에 동의했다.[5] 두 사람은 "아카템판 포옹"으로 알려진 역사적인 만남에서 이구알라 계획 실행에 합의했으며,[2][3] 이 계획은 1821년 2월 24일 이투르비데, 게레로, 그리고 또 다른 반군 지도자인 과달루페 빅토리아에 의해 공개되었다.[3]
1821년 3월 1일, 이투르비데는 이 계획을 실행할 군대인 "세 가지 보장 군대"(Ejército Trigarantees)의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고, 게레로는 그의 지도력을 인정하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5] 이투르비데가 이끄는 세 가지 보장 군대는 다른 반란군 세력을 성공적으로 규합하여 멕시코 내 스페인 왕당파 세력을 몰아냈다.
1821년 9월 27일, 이투르비데는 세 가지 보장 군대를 이끌고 멕시코시티에 입성하여 멕시코의 독립을 선언하고 신정부의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 과정에서 멕시코를 떠나는 스페인인들이 소유한 토지를 하드 통화(신용도 높은 기축 통화)와 교환하는 협정을 체결하는 실책을 범했다. 당시 스페인인들은 멕시코 내 양질의 토지를 대거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 대금을 지불하느라 신생 멕시코는 보유 통화를 모두 소진하고 말았다. 심지어 교회의 은 종이나 금 제단까지 녹여야 했으며, 결국 멕시코는 국제 사회에 등장할 때부터 사실상 파산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투르비데는 유럽 왕족을 군주로 추대하는 군주제를 이상으로 삼는 보수파(conservadoreses)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이 여전히 멕시코 재정복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의 어떤 왕가도 멕시코의 왕위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다. 결국 보수파는 나폴레옹 1세의 선례를 따라 이투르비데 스스로 황제가 될 것을 설득했다.
4. 3. 황제 즉위
이투르비데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왕족이 아닌 자신이 통치자가 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지만, 결국 황제직을 수락하게 되었다. 1822년 5월 18일 저녁, 거리에 나온 병사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이투르비데는 의회의 승인 없이는 이 영예를 받을 수 없다며 공식적인 수락을 보류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의회가 소집되었고, 표결 결과 찬성 77표, 반대 15표로 이투르비데를 황제로 지명했다. 1822년 7월 21일, 그는 멕시코 제국의 초대 황제 '''아구스틴 1세'''로 공식 즉위했다.
그러나 아구스틴 1세는 군대를 지휘하듯 국가를 통치하려 했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인물들을 투옥하는 등 권위적인 통치 방식을 보였다. 이러한 방식에 대한 반발은 빠르게 커져나갔다. 1823년에는 과달루페 빅토리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아나 등을 중심으로 각 주의 주지사 및 군대 사령관들이 카사 마타 강령(Plan de Casa Mata|플란 데 카사 마타spa)을 발표하고, 이투르비데를 타도하여 멕시코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5. 몰락과 망명, 그리고 최후
아구스틴 1세로 즉위한 이투르비데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 의회 해산, 그리고 재정 문제 등은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20][25] 특히 공화주의자들과 과거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반대는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의 반란과 카사 마타 계획 선포로 이어졌고, 이는 제국에 등을 돌리는 군 지휘관들과 지역들의 증가로 나타났다.[3][23]
결국 군사적, 정치적 지지 기반을 상실한 이투르비데는 1823년 3월 퇴위를 결정했고, 이로써 1년도 채 안 된 멕시코 제1제정은 막을 내렸다.[23][25]
퇴위 후 이투르비데는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망명했다.[5] 이탈리아와 영국 등지에서 머물며 회고록을 집필하던 중,[5][8] 스페인의 멕시코 재침공 소식을 접하고 조국에 봉사하고자 귀국을 결심했다.[11][12] 그러나 당시 멕시코 의회는 이미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멕시코 땅을 밟으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제정한 상태였다.[11][12][23]
1824년 7월, 타마울리파스주 해안에 상륙한 이투르비데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지역 의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7][9][6] 그의 갑작스러운 처형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시간이 흐른 뒤 멕시코 독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멕시코 시티 대성당에 안치되었다.[16][7]
5. 1. 통치와 반발
이투르비데는 임시 정부 헌장의 의장으로 임명되어, 새로 독립한 멕시코를 잠정적으로 통치할 5명의 섭정을 선출하는 과정을 주도했다.[2] 그는 헌장 구성원의 임명과 논의 안건 모두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3] 이 과정에서 과거 반군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정부 구성에서 배제되었다.
이러한 배제는 과거 반군 세력뿐 아니라 다수의 진보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펠리페 7세에게 충성하는 이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많은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은 스코틀랜드 의례의 프리메이슨 지부에 속해 있었으며, 이들 반대파는 ''에스코세스''(스코틀랜드인)라고 불렸다. 이괄라 계획이 다양한 파벌 간의 타협안이었음에도, 독립 이후 그 약속들을 이행하기 어렵다는 점이 명백해지면서 권력 내부에서도 혼란이 커졌다.
이투르비데는 멕시코시티로 돌아와 현재 이투르비데 궁전으로 알려진 저택에 머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시작했다.[27] 그는 자신의 군대에 특혜를 요구하고 장관을 독단적으로 임명하는 등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23] 한편, 스페인의 펠리페 7세는 멕시코 왕좌 제안을 거부했고, 스페인 의회(코르테스) 역시 코르도바 조약을 비준하지 않아 멕시코의 완전한 독립 인정은 불투명해졌다.[11][23] 이로 인해 유럽의 어떤 왕족도 멕시코 왕위를 수락하지 않았다.[25]
이투르비데가 이끄는 섭정 위원회는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해 제헌 의회를 소집했다.[22] 그러나 1822년 2월 의회가 개원하자, 의회는 주권이 국민이 아닌 의회 자신에게 있으며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모두 갖는다고 선언했다. 이는 사실상 이투르비데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시도였다. 또한 의회는 군대 급여 삭감과 군 규모 축소를 논의하며 이투르비데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3][22]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1822년 5월, 군중 시위와 의회의 결정으로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22] 그러나 이 과정이 민중의 자발적인 요구였는지, 아니면 이투르비데와 그의 추종자들이 연출한 정치적 술수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기도 한다.[3][23][8][22] 미국 정부는 제임스 먼로 대통령 하에 조엘 로버츠 포인셋을 특사로 파견하여 상황을 주시했다. 포인셋은 제국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보았지만 미국은 멕시코의 독립을 공식 인정했으며,[28] 멕시코 북부 영토 매입 의사를 타진했으나 이투르비데 정부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1822년 7월 21일, 이투르비데는 멕시코시티 대성당에서 멕시코 헌법 황제 '''아구스틴 1세'''로 즉위했으며, 부인 아나 마리아 우아르테 데 이투르비데도 황후로 대관되었다.[3] 대관식은 의회 의장 라파엘 망기노 이 멘디빌이 집전했는데, 이는 교회가 아닌 국가가 주권을 갖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했다.[9] 황제의 지위는 세습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며, 그의 제국은 남쪽의 파나마부터 북쪽의 오리건 컨트리까지 광대한 영토를 아울렀다. 이 영토에는 현재의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과 캘리포니아, 텍사스, 애리조나, 유타, 네바다, 콜로라도, 뉴멕시코 등 미국 남서부 지역이 포함되었다.[31]
아구스틴 1세는 군대를 지휘하듯 국가를 통치하려 했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투옥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고수했다. 이에 대한 반발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1822년 12월,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베라크루스 계획을 발표하며 공화주의자 과달루페 빅토리아의 지지를 얻어 이투르비데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3] 이 계획은 해산된 제헌 의회의 복귀를 요구했으며, 곧이어 비센테 게레로, 니콜라스 브라보 등 다른 반군 지도자들도 합류했다.
상황은 이투르비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반란 진압을 위해 파견된 에체바리 장군을 포함한 일부 제국군 장교들이 변절하여 반란군에 가담했다. 이들은 카사 마타 계획(Plan de Casa Mataes)을 선포하여 새로운 의회 소집과 황제 선출의 무효화를 요구했다. 특히 이 계획은 지방 정부에 임시 자치권을 부여함으로써 각 지역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고, 치아파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와 현재의 중앙 아메리카 지역이 이 계획을 받아들였다. 중앙 아메리카 지역은 1823년 중앙 아메리카 연합주로서 멕시코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23]
산타 안나의 군대가 멕시코시티로 진격하고 군 지도자들의 이탈이 계속되자, 이투르비데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했다.[2] 1823년 3월, 그는 자신이 해산했던 의회를 다시 소집하고 퇴위를 제안했다. 그러나 의회는 그의 퇴위를 수락하는 것이 황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거부하는 대신, 황제로서의 선출 자체를 무효화하고 이괄라 계획과 코르도바 조약의 인정 또한 철회했다.[23]
이후 행정권은 과달루페 빅토리아, 니콜라스 브라보, 페드로 셀레스티노 네그레테로 구성된 삼두 정치 체제에게 넘어갔다.[25]
5. 2. 카사 마타 계획과 퇴위
아구스틴 1세로 즉위한 이투르비데는 군대를 지휘하듯 국가를 통치하려 했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투옥하는 등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다.[23]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군대에 특혜를 요구했고, 장관 임명 등 국정 운영에서도 개인적인 판단을 앞세웠다.[23] 이러한 통치 방식에 대한 불만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결정적으로 1822년 12월,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과거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과달루페 빅토리아의 지지를 받아 베라크루스 계획을 발표하며 이투르비데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3] 산타 안나는 처음에는 공화국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행동했음을 훗날 인정했지만,[3] 그의 계획은 해산되었던 의회를 다시 소집하여 국가의 정치 체제를 결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투르비데의 회유 시도에도 불구하고, 산타 안나는 베라크루스에서 저항을 준비했다.
이후 비센테 게레로와 니콜라스 브라보 같은 인물들도 반란에 합류했으나 초기에는 패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투르비데가 반란 진압을 위해 파견했던 에체바리 장군을 비롯한 일부 제국군 지휘관들이 오히려 산타 안나 측으로 돌아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제국군 내부의 충성심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산타 안나는 게레로, 브라보 및 에체바리 등 배반한 제국군 장교들과 연합하여 1823년 2월 1일, 카사 마타 계획(Plan de Casa Mata|플란 데 카사 마타es)을 선포했다. 이 계획은 새로운 의회 소집과 함께 이투르비데 황제 선출의 무효화를 요구했으며, 지방 정부에 자치권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하여 전국적인 지지를 얻었다.[23] 치아파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와 중앙 아메리카 지역(현재의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온두라스)까지 이 계획을 지지하며 멕시코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23]
산타 안나의 군대가 멕시코 시티로 진격하는 동안 제국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와해되거나 반란군에 합류했다.[2] 이투르비데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국가 전체가 카사 마타 계획을 지지하는 상황에서, 이투르비데는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1823년 3월 19일, 자신이 해산시켰던 의회를 다시 소집하고 퇴위 의사를 밝혔다.[2]
그러나 의회는 그의 퇴위를 수리하는 대신, 황제 선출 자체가 무효였음을 선언하며 이구알라 계획과 코르도바 조약의 인정 또한 철회했다.[23] 이로써 멕시코 제1제정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막을 내렸고, 국가의 행정권은 과달루페 빅토리아, 니콜라스 브라보, 페드로 셀레스티노 네그레테로 구성된 삼두 정치 체제로 이양되었다.[25]
5. 3. 망명과 귀환, 그리고 처형
1823년 3월 19일, 이투르비데는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고 국외로 떠나는 데 동의했다.[25][23] 그 대가로 종신 연금을 약속받았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8] 망명길에는 과거 반군 지도자였던 니콜라스 브라보가 동행했는데, 그는 이투르비데를 다소 거칠게 다루었다. 망명을 떠나는 이투르비데를 향한 민중의 지지는 여전했으나, 정부는 민중 봉기를 우려하여 그를 비밀리에 이동시켰다.[5]1823년 5월 11일, 이투르비데는 가족과 함께 영국 선박 ''롤린스''호를 타고 이탈리아 리보르노 (당시 토스카나 대공국 영토)로 향했다.[5] 그곳에서 작은 시골집을 빌려 '리보르노 선언'이라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지만,[5]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8] 망명 중 스페인의 멕시코 재정복 계획에 동참해 달라는 가톨릭 국가 연합의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압력으로 토스카나에서 추방되어 영국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8]
영국 런던에서 그는 자서전 ''Statement of Some of the Principal Events in the Public Life of Agustín de Iturbideeng''를 출판했다.[8] 한편, 멕시코 의회는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멕시코 땅을 밟을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 이 법령은 특정 개인을 겨냥했다는 점에서 법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투르비데 본인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11][12][23]
스페인이 멕시코를 다시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영국에 있는 이투르비데에게 전해졌다.[11][12] 그는 멕시코의 미래를 깊이 우려했으며, 지지자들로부터 귀국하면 해방자로 환영받고 스페인 침략에 맞설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받았다.[11] 1824년 2월 13일, 그는 멕시코 의회에 스페인의 공격이 있을 경우 조국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뜻을 전했으나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다.[23] 결국 멕시코 내 보수 세력의 설득에 넘어가 귀국을 결심했다.[6][12]
1824년 7월 14일[3][23] (일부 자료는 15일로 기록[6]), 이투르비데는 아내와 두 자녀, 그리고 사제 한 명과 함께 타마울리파스주 해안의 소토 라 마리나에 상륙했다. 처음에는 지역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으나, 곧 지역 군 사령관인 펠리페 데 라 가르자 장군에게 체포되었다.[7][9] 데 라 가르자는 과거 이투르비데 통치 시절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면받은 인물이었기에 체포를 망설이는 듯했으나, 결국 이투르비데를 인근 마을인 파디야로 압송했다.[7][9]
파디야의 지역 의회는 재판을 열어 이투르비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7] 그는 마지막 의식을 치른 후 "멕시코인들이여! 나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우리 종교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하고 죽는다... 나는 여러분을 돕기 위해 왔고, 여러분과 함께 죽기 때문에 기쁘게 죽습니다. 나는 반역자가 아닌 명예롭게 죽습니다. 나는 이 오점을 제 자녀와 유산에 남기지 않겠습니다. 나는 반역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9] 그는 1824년 7월 19일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6]
이투르비데의 처형 소식은 왕당파들의 분노를 샀으며, 일각에서는 이를 '왕 살해'이자 '존속살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9] 그의 시신은 파디야의 한 교회에 안장되어 한동안 방치되었다.[9] 그러나 1833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대통령이 그의 명예 회복을 결정했고, 1838년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 대통령 재임 시기에 이르러 유해를 수도 멕시코 시티로 옮겨 "국가의 해방자"로 재평가하고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 의회 역시 과거의 적대적인 태도를 바꿔 그를 독립 영웅으로 인정했다.[16][7] 그의 유해는 멕시코 시티 대성당 내 산 펠리페 데 헤수스 예배당에 안치되었으며, 묘비에는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 멕시코 독립의 창시자..."라는 문구가 스페인어로 새겨져 있다.[7]
1865년에는 그의 손자인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 이 그린과 살바도르 데 이투르비데 이 마르산이 멕시코 제2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의 양자로 입적되기도 했다.[6]
6. 유산과 평가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멕시코 독립을 이끈 핵심 인물이었으나, 황제 즉위 후 1년도 채 안 되어 권좌에서 물러나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짧은 통치와 극적인 몰락은 멕시코 역사에서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낳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퇴위 후 이투르비데는 니콜라스 브라보의 호위 아래 망명을 떠났는데, 여전히 많은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의 마차를 군중이 직접 끌고 가려 했을 정도였으나, 정부는 민중 봉기를 우려하여 그를 비밀리에 이동시켰다. 1823년 5월, 그는 가족과 함께 영국 선박을 타고 이탈리아 리보르노로 떠나[5] 그곳에서 회고록 집필을 시작했다. 망명 기간 동안 그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스페인의 멕시코 재정복 시도를 돕지 않겠냐는 가톨릭 국가 연합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스페인의 압력으로 토스카나에서 추방되어 영국으로 이주했다.[8]
영국에서 그는 자서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공적 생애에서 주요 사건의 진술''을 출판했다. 망명 중이던 그에게 멕시코 의회는 연금을 약속했지만 지급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귀국 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투르비데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스페인이 멕시코를 다시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11][12], 그는 조국을 돕기 위해 1824년 멕시코 의회에 복귀 의사를 밝혔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23] 결국 멕시코 내 보수파의 설득으로 귀국을 결심했으나[6][12], 상륙 직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특정 인물을 겨냥한 이러한 법령은 법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투르비데의 유산은 복합적이다. 그는 멕시코 최초의 '카우디요'로 평가받으며 이후 군사 지도자들의 통치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이 존재한다.[3] 또한 오늘날 멕시코의 국명이나 멕시코 국기의 기원[4][7], 멕시코 국가 가사 등[22]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황제 즉위 과정과 통치 방식, 독립 이후의 행보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 역시 존재하며, 이는 그의 사후 명암이 엇갈리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논란으로 인해 그의 유해는 다른 독립 영웅들과 함께 "엘 앙헬" 기념비에 안치되지 못하고 멕시코시티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에 남아 있다.
6. 1. 논란과 재평가
이투르비데의 통치는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는 멕시코 독립을 이끈 연합의 지도자이자 독립 후 첫 통치자로서 멕시코와 유럽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다. 많은 멕시코 자치주의자들은 입헌 군주제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논리적인 해결책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대의 정부를 지지하는 이들과 멕시코의 군주제 전통 유지를 원하는 이들 사이의 타협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300년간 누에바에스파냐가 군주제 하에 있었으므로, 어떤 형태로든 군주제가 지속되는 것이 국가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이투르비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1822년 12월 베라크루스 계획을 통해 과달루페 빅토리아의 지원을 받아 이투르비데에게 공개적으로 반대했다.[3] 이후 빈센테 게레로, 니콜라스 브라보 등 다른 지도자들과 제국군 장교들까지 합세하여 카사 마타 계획을 선포, 새로운 의회 소집과 황제 선출 무효화를 요구했다. 이 계획은 지방 정부에 일시적 자치권을 부여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고[23], 결국 이투르비데는 퇴위를 선택하게 된다. 그는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퇴위한다고 밝혔으나, 의회는 그의 퇴위를 수락하는 대신 황제 선출 자체를 무효화했다.[23]
역사가 에릭 반 영은 이투르비데가 "정치적 수완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기회주의자였고 장기적으로 나쁜 판단으로 흐려졌다"고 평가하며, 그의 왕위 찬탈이 독립 투쟁의 마지막에 일어났기에 덜 냉소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19] 이투르비데는 종종 혁명가보다는 반동주의자로 묘사되는데, 이는 미겔 이달고의 초기 독립 운동에 참여하지 않다가 자신의 이익과 부합할 때 합류한 태도 때문이다. 그의 독립 운동 역할은 교육 자료에서 빈센테 게레로와 함께 다뤄지며, 그의 유산은 논란의 대상이다. 그의 즉위나 죽음을 기념하는 공식 행사는 거의 열리지 않는다.
멕시코 역사에서 독립 기념일에 대한 시각도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랐다. 보수주의자들은 이투르비데가 멕시코 시티에 입성한 9월 27일을 선호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이달고가 반란을 촉구한 9월 16일을 선호했다.[33] 현대 멕시코에서는 자유주의적 관점이 우세하여 이투르비데를 개인적 권력을 위해 국가를 배신한 타락한 영웅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33] 1949년 소설 ''라 구에라 로드리게스'' 이후, 그의 친구이자 귀족인 마리아 이그나시아 로드리게스 데 벨라스코와의 불륜설이 퍼졌으나 이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기반하며, 오히려 그녀의 평판이 높아지면서 이투르비데의 평가는 상대적으로 낮아졌다.[34][35] 일부 역사서는 이달고와 이투르비데를 대조하며 "영광과 망각"이라는 부제를 달기도 한다.[36]
이투르비데의 군사 쿠데타와 정치 방식은 멕시코 최초의 "카우디요"(카리스마 넘치는 군사 지도자)로서 이후 산타 안나나 포르피리오 디아스와 같은 인물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적 전통의 시작으로 간주되기도 한다.[3] 이러한 논란 때문에 그의 유해는 다른 독립 지도자들과 함께 "엘 앙헬"에 안치되지 못하고 국립 대성당에 남아 있다. 다만, 1921년 멕시코 혁명 이후 대통령이 된 알바로 오브레곤은 독립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이투르비데의 역할을 일부 인정했는데, 이는 오브레곤 자신이 군사적 강자로서 과거 역사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37][38][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투르비데는 멕시코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국가 공식 명칭이 "멕시코 합중국"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멕시코"라는 이름이 사용되는 것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또한 오늘날 사용되는 멕시코 국기의 삼색(빨강, 하양, 초록)은 원래 이구알라 계획의 세 가지 보증(자유, 종교, 연합)을 상징했으며, 국기 중앙의 독수리 문양은 스페인 문장 대신 아즈텍 제국의 상징을 부활시킨 것이다.[4][7] 그는 멕시코 국가에도 언급되어 있다.[22]
6. 2. 멕시코 국기에 미친 영향
이투르비데가 남긴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멕시코 국기의 기본 디자인이다.[4] 그가 제안한 국기는 녹색, 흰색, 빨간색의 세로 삼색기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원래 이구알라 계획에서 제시된 세 가지 보장, 즉 독립(자유), 종교(가톨릭), 연합(스페인인과 아메리카인)을 상징했다.[4] 또한 그는 국기 중앙에 스페인을 상징하는 문장 대신, 아즈텍 제국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의 상징인 '선인장 위에 앉아 뱀을 물고 있는 독수리' 문양을 넣었다. 이는 새로 탄생한 멕시코 제국을 고대 아즈텍 제국과 연결하려는 의도였다.[4][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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