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백기 (백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백기는 백제 무왕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달솔 관직을 지냈다. 616년 무왕의 명을 받아 군사 8,000명을 이끌고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했으나, 역시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602년에는 무왕이 직접 아막산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좌평 해추가 4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의 4개 성을 공격했으나 참패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백씨 (백제) - 백가 (귀족)
    백가는 백제 시대 웅진 토착 호족 출신 귀족으로, 위사좌평에 임명되어 숙위병을 관장하다 가림성 부임 문제로 동성왕을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무령왕에 의해 진압 및 처형되었다.
  • 백제의 군인 - 성왕 (백제)
    성왕은 백제의 제26대 왕으로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는 등 백제 중흥을 위해 노력했으며 불교를 장려하고 왜에 불교를 전파했지만, 신라와의 관계 악화로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 백제의 군인 - 충상
    충상은 7세기 백제 장수로,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과 함께 싸우다 신라에 투항하여 신라 귀족이 되었고, 백제부흥군 정벌에도 참여했다.
  • 백제의 달솔 - 흑치상지
    흑치상지는 백제 부흥 운동에 참여했다가 당나라에 투항하여 당나라 장군으로 활약하며 티베트, 돌궐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모함으로 옥사 후 명예를 회복한 인물이다.
  • 백제의 달솔 - 해충 (백제)
    아신왕 사후 전지왕 옹립에 기여한 해충은 해씨 가문 출신으로, 전지왕 즉위 후 달솔에 임명되어 조세를 하사받는 등 백제 초기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백기 (백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백기
원어 이름苩奇
한글백가
한자苩奇
로마자 표기Baek Gi
신상 정보
국적백제
성별남성
출생지백제 웅진
가문백씨
관직 정보
작위백제달솔
군주백제 무왕
소속백제군
지휘백제군
참전모산성 전투

2. 생애

백기는 달솔(達率)을 지냈다.[3]

602년(무왕 3) 8월, 백제 무왕(武王)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을 공격했다. 그러나 신라 진평왕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저항하여 백제군이 불리해져 철수하였다. 무왕은 신라가 소타(小陁)·외석(畏石)·천산(泉山)·옹잠(甕岑) 등 4개 성을 새로 쌓아 백제와의 경계에 접근하며 침략한 것에 분노하여, 좌평(佐平) 해추에게 4만 대군을 이끌고 이 4개 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해수만 간신히 도망쳐 오는 참패를 겪었다.[3]

14년 후인 616년(무왕 17) 10월, 백기는 무왕의 명을 받아 군사 8,000명을 거느리고 다시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하였으나[4][3],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5] 아막산성은 백제본기 본문에는 모산성(母山城)으로 적혀 있으나, 같은 성이다. 이 기록은 백제본기 말고 신라본기에도 있는데, 둘 다 승패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백제가 공략에 실패한 듯하다.|group="주"}}

2. 1. 관직

2. 2. 신라와의 전투

602년(무왕 3) 8월, 무왕이 친히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을 공격했다가 패하였고, 좌평(佐平) 해수(解讎) 역시 4만의 대군을 이끌고 신축한 신라의 소타(小陁)·외석(畏石)·천산(泉山)·옹잠(甕岑) 등 4성을 공격했다가 목숨만 건질 정도로 참패하였다.[3]

616년(무왕 17) 10월, 다시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하려는 무왕의 왕명을 받아 군사 8,000명을 거느리고 아막산성을 공략하였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3][5] 백제본기 본문에는 모산성(母山城)으로 적혀 있으나, 아막산성과 같은 성이다.[4] 이 기록은 백제본기 말고 신라본기에도 있는데, 둘 다 승패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백제가 공략에 실패한 듯 하다.

2. 2. 1. 602년 아막산성 전투

602년(무왕 3년) 8월, 무왕이 직접 신라의 아막산성(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을 공격했으나, 신라의 진평왕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저항하며 싸웠기 때문에 불리해져 철수했다. 신라는 새롭게 소陁·외석·천산·옹잠 등 4개 성을 쌓아 백제와의 경계에 접근하여 침략했으므로, 무왕은 분노하여 좌평 해추에게 명하여 4만 대군을 이끌고 새로 축조된 4개 성을 공격했지만, 해추만 간신히 혼자 도망치는 참패를 겪었다[3]

2. 2. 2. 소타, 외석, 천산, 옹잠 4성 전투

요약(summary)과 원본 소스(source)가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요약과 원본 소스를 제공해주시면 위키텍스트를 작성해 드리겠습니다.

2. 2. 3. 616년 아막산성 전투

616년(무왕 17) 10월, 다시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하려는 무왕의 왕명을 받아, 군사 8,000명을 거느리고 아막산성[4]을 공략하였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3].[5]

참조

[1] 문서 艸部|草冠「艹」に「白部|白」
[2] 서적 巻185「辺防」第1・東夷(上)・百済条
[3] 서적 巻27「百済本紀」第5、武王条
[4] 문서 百済本紀の本文には母山城と記されているが、阿莫山城と同じ城である
[5] 문서 2016-12-28
[6] 서적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