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보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보릴은 1207년부터 1218년까지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였다. 그는 칼로얀의 사후 왕위를 계승했으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내외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반란과 라틴 제국, 헝가리 등과의 갈등 속에서 권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1217년 또는 1218년 사촌 이반 아센 2세에게 패배하여 폐위되었고, 눈이 뽑힌 채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3세기 불가리아 사람 - 미하일 아센 2세
    미하일 아센 2세는 아버지 콘스탄틴 티흐의 죽음 후 불가리아의 황제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영향력 아래 좁은 지역을 통치하다 비잔티움 제국으로 망명하여 왕위 복귀 시도에 실패하고 사망했다.
  • 아센 왕조 - 이반 아센 2세
    이반 아센 2세는 1218년부터 1241년까지 불가리아 제2제국을 통치하며 영토 확장, 불가리아 정교회 독립, 그리고 1230년 클로코트니차 전투 승리를 통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어 발칸 반도에서 불가리아의 지배적인 위치를 확립한 차르이다.
  • 아센 왕조 - 이반 아센 3세
    이반 아센 3세는 동로마 제국의 지원으로 1279년 불가리아 황제가 되었으나 이바일로의 재등장으로 망명 후 복위 시도에 실패, 동로마 아산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 불가리아 제2제국 - 스밀레츠
    스밀레츠는 13세기 후반 불가리아의 황제로, 노가이 칸의 지원으로 즉위하여 몽골의 영향력 아래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와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그의 이름은 남극의 스밀레츠 곶의 명칭으로 사용된다.
  • 불가리아 제2제국 - 이바일로
    이바일로는 13세기 불가리아의 돼지치기 출신으로 몽골 침략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켜 황제를 살해하고 불가리아를 점령했으나, 몽골군에게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보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보릴의 인장
보릴의 황금 인장
칭호차르
통치 기간1207년 – 1218년
이전 통치자칼로얀
후임 통치자이반 아센 2세
배우자쿠만족 공주
엘리자베트 드 쿠르트네
왕조아센 왕조

2. 생애

1207년 칼로얀테살로니키 성벽 앞에서 살해당한 후, 칼로얀 암살 계획에 참여했던 보릴이 황위에 올랐다. 보릴이 즉위한 후, 칼로얀의 조카 이반 아센과 알렉산더르는 국외로 망명하여, 쿠만족의 보호를 받다가 갈리치아로 도망쳤다.[15] 보릴은 칼로얀의 미망인 안나와 결혼하여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려 했다.

보릴은 칼로얀의 대외 정책을 계승하려 했으나, 그의 통치 초기에는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의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반발이 일어났고, 그의 동생 스트레즈는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프로세크 요새를 점령했다. 또한 보릴의 사촌인 알렉시 슬라브는 피린산맥 근처 멜니크를 수도로 정하여 독립을 선포했다. 1209년 스트레즈는 세바스토크라토르 칭호를 받고 1214년 죽을 때까지 보릴의 동맹이 되었다.[18]

1208년 보릴은 보루이 전투에서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라틴 제국의 황제 앙리에게 필리포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16] 이로 인해 북부 트라키아와 로도피 지역의 요새들이 라틴 제국령이 되었다.[17]

1211년(혹은 1213년) 비딘에서 4명의 쿠만족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19] 보릴은 혼자서 이 반란에 대처할 수 없었고, 세르비아라틴 제국, 그리고 분열된 불가리아 귀족들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20] 유일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헝가리에 지원을 요청하여 시비우의 요아힘 백작이 이끄는 군대가 반란군을 격파하고 비딘을 점령했다.[16]

1211년 보릴은 터르노보에서 종교 회의를 개최하여 보고밀주의를 비난하였다. 또한, 보릴은 라틴 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칼로얀의 딸 마리아를 앙리와 결혼시키고 많은 선물을 보냈다. 헝가리와도 혼인 관계를 통해 친선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라틴 제국, 헝가리 왕국, 에페이로스 공국과의 동맹은 보릴을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이끌었지만, 1214년(혹은 1215년) 그의 동생 스트레즈가 살해당한 후에는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18] 1216년 앙리가 사망하고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제5차 십자군에 참가하면서, 보릴은 강력한 동맹군을 잃었다.

1217년 혹은 1218년 보릴의 사촌 이반 아센이 돌아와 보릴을 패배시켰고, 보릴은 터르노보에 고립되었다. 7개월 간의 포위 끝에 보릴은 수도에서 도망쳤고, 터르노보 주민들은 이반 아센에게 항복하였다. 보릴은 탈출하는 동안 붙잡혔고, 눈이 뽑힌 뒤 수도원으로 보내졌다.[3]

2. 1. 초기 생애

보릴은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황제(차르)인 표트르 2세, 이반 아센 1세, 칼로얀의 누이의 아들이었다. 그의 이름의 어원은 불확실하며, 슬라브어 동사 ''boriti''(''싸우다'') 또는 튀르크어 명사 ''böri''(''늑대'')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역사가 알렉산드루 마제아루는 이름의 기록된 대부분의 변형(Borilǔ, Burile, Borilus, Burillus)이 "루마니아어처럼 Borilǎ로 발음되었음을 시사한다"고 말한다.

1207년 칼로얀이 테살로니키 포위 중에 암살된 후, 칼로얀 암살 계획에 참여했던 보릴이 황위에 올랐다.[2][3] 보릴 즉위 후, 칼로얀의 두 아들 알렉산다르와 이반(이반 아센 2세)는 국외로 망명하여, 쿠만족의 보호를 받다가 할리치-볼히니아로 도망쳤다.[4][5] 즉위한 보릴은 지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칼로얀의 미망인과 결혼했다.[6]

1211년 보릴은 터르노보에서 종교 회의를 개최하였고, 1111년 알렉시오스 1세 때 개최되었던 공의회를 기념하면서 보고밀주의를 비난하였다.

2. 2. 즉위 과정

1207년 칼로얀테살로니키 성벽 앞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가 암살 계획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2][3] 칼로얀이 테살로니키를 포위하던 중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는 도시의 수호 성인 데메트리오스에게 살해당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이야기의 한 버전에서는 성인이 마나스트라스라는 자에게 차르를 죽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제국 황제 앙리는 자신의 편지에서 보릴이 "폭력으로 자신의 뜻을 강요하고 황제의 이름과 휘장을 찬탈했다"고 언급했다. 앙리 드 발랑시엔(빌아르두앵의 조프루아의 연대기를 1207년 이후 계속 씀) 역시 보릴을 불법적으로 제국 왕관을 차지한 배신자로 묘사했다. 알렉산드루 마제아루(Madgearu)에 따르면, 두 기록 모두 보릴이 삼촌 칼로얀을 살해하는 데 칼로얀의 아내와 협력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역사학자 존 V. A. 파인은 "보릴에 대한 증거는 없다"고 강조한다.

보릴은 왕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거나 쿠만족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칼로얀의 미망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그의 가족 구성원을 포함)은 그를 찬탈자로 여겼다. 보릴이 즉위하자, 칼로얀의 후계자였던 그의 조카 이반 아센 2세와 알렉산더르는 처음에는 쿠만족에게, 나중에는 갈리치아로 망명하였다.[15]

2. 3. 불가리아 제국의 혼란

1207년 칼로얀테살로니키 성벽 앞에서 살해당한 것에 보릴이 개입하였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칼로얀이 의도하고 있던 후계자였던 그의 조카 이반 아센과 알렉산더르가 보릴의 왕위 계승 이후 첫번째는 쿠만족에게로, 이후에는 갈리치아로 망명하였다.[15] 보릴은 칼로얀의 미망인 안나와 결혼하였다.

보릴은 칼로얀의 대외 정책을 계승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의 치세 초반, 가족 구성원들 중에서 그에게 반발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그의 동생 스트레즈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니치의 지원을 받아 프로세크 요새를 점령하였다. 보릴의 사촌 알렉시 슬라브는 피린산맥 근처 멜니크를 수도로 정하여 독립을 선포하였다. 1208년 보릴은 보루이 전투에서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라틴 제국 황제 앙리에게 패배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16] 그리하여 북부 트라키아와 로도피 지역의 요새들은 라틴 제국령이 되었다.[17] 1209년 스트레즈는 세바스토크라토르 칭호를 받았고 1214년 죽을 때까지 보릴의 동맹이 되었다.[18]

2. 4. 대외 관계

보릴은 칼로얀의 반(反) 라틴 제국 정책을 계승하려 했으나, 여러 차례 패배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1208년 필리포폴리스(플로브디프) 전투에서 라틴 제국 황제 앙리에게 패배한 후, 북부 트라키아와 로도피 지역 요새들을 상실하며 큰 타격을 입었다.[17]

1211년 (혹은 1213년)에는 비딘에서 쿠만족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보릴은 헝가리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19] 시비우의 요아힘 백작이 이끄는 헝가리 군대가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후 헝가리와의 혼인 동맹은 실현되지 않았다.[16]

1213년 보릴은 라틴 제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칼로얀의 딸 마리아를 앙리와 결혼시키고 많은 선물을 보냈다. 그러나 라틴 제국, 헝가리, 에페이로스 공국과의 동맹은 보릴을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이끌었고, 1214년 (혹은 1215년) 동생 스트레즈가 살해당한 후에는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18]

1216년 앙리의 사망과 1217년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제5차 십자군 참가는 보릴에게 큰 타격이었다. 강력한 동맹들을 잃은 보릴은 결국 1217년 (혹은 1218년) 이반 아센 2세에게 패배하고, 터르노보에서 7개월간 포위된 끝에 권력을 잃었다.

2. 4. 1. 라틴 제국과의 전쟁

칼로얀의 대외 정책을 계승하려던 보릴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1208년 보루이 전투에서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필리포폴리스(플로브디프) 전투에서 라틴 제국의 황제 앙리에게 패배하였다.[16] 이 패배로 북부 트라키아와 로도피 지역의 요새들이 라틴 제국에 넘어갔다.[17]

라틴 제국, 헝가리, 에페이로스 공국과의 동맹은 보릴을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이끌었지만, 1214년(혹은 1215년) 그의 동생 스트레즈가 살해당한 후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2. 4. 2. 헝가리 왕국과의 관계

1211년(혹은 1213년) 비딘에서 쿠만족 귀족 4명이 반란을 일으켰다.[19] 보릴은 혼자 힘으로 이 반란에 대처할 수 없었고, 세르비아와 라틴 제국은 물론, 분열된 불가리아 귀족들도 그를 돕지 않았다.[20] 보릴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헝가리였다.[16] 이에 시비우의 요아힘 백작이 이끄는 헝가리 군대가 반란군을 진압하고 비딘을 점령했다.[16]

이후 보릴은 헝가리와 혼인 관계를 통해 친선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2. 4. 3. 기타 국가들과의 관계

라틴 제국, 헝가리, 에페이로스 공국과의 동맹은 보릴을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이끌었지만, 1214년(혹은 1215년) 그의 동생 스트레즈가 살해당한 후에는 어떠한 진전도 보지 못하였다.[18] 1216년 앙리가 사망하고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제5차 십자군에 참가하면서, 보릴은 강력한 동맹군을 잃었다.[10]

2. 5. 종교 정책

1211년 보릴은 터르노보에서 종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1111년 알렉시오스 1세 때 개최되었던 공의회를 기념하고 보고밀주의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었다.[16] 이와 더불어 보릴은 칼로얀의 딸 마리아를 라틴 제국의 앙리와 결혼시키면서 많은 선물을 보냈다. 보릴은 헝가리와도 혼인 관계를 통해 친선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2. 6. 몰락

1217년 혹은 1218년, 보릴의 사촌 이반 아센이 불가리아로 돌아와 보릴에게 승리하였다. 이로 인해 보릴은 터르노보에 고립되었다.[3] 7개월 동안 포위 공격을 받은 끝에 보릴은 수도에서 도망쳤고, 터르노보 주민들은 이반 아센에게 항복하였다.[3] 보릴은 탈출 과정에서 붙잡혀 장님이 된 뒤 수도원으로 보내졌다.[3]

3. 가족 관계

아크로폴리테스는 보릴의 첫 번째 부인이 칼로얀의 미망인으로, "스키타이인"(쿠만족)이었다고 묘사했다.[15] 보릴과 칼로얀의 미망인 간의 결혼은 교회법을 위반했지만, 불가리아 교회는 이에 항의하지 않았다. 아베네의 발두인, ''플랑드르 연대기'' 및 기타 서유럽 연대기에서는 라틴 황제 앙리의 이름 없는 조카딸(앙리의 누이 플랑드르의 욜란다와 쿠르트네의 피터 2세의 딸)이 보릴과 관련된 "요하니스"와 결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신뢰하는 역사가들은 보릴이 1213년 또는 1214년의 평화 조약 이후 앙리의 조카딸과 결혼했다고 추정한다. 이 이론이 맞다면, 보릴의 첫 번째 부인은 사망했거나 수도원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보릴의 딸은 1214년 헝가리 왕세자 벨라와 약혼했지만, 보릴이 폐위되면서 결혼은 무산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History
[2] 서적 ブルガリア
[3] 서적 ブルガリア 風土と歴史
[4] 서적 ブルガリア
[5] 서적 Southea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500-1250 Cambridge University Press
[6] 서적 ビザンツ帝国史
[7]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A Critical Survey from the Late Twelfth Century to the Ottoman conquest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8] 서적
[9] 서적 Cumans and Tatars: Oriental Military in the Pre-Ottoman Balkans, 1185-136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0] 서적 ビザンツ帝国史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ビザンツ帝国史
[14] 서적 ビザンツ帝国史
[15] 서적 Southea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500-125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6] 서적
[17] 서적 Cumans and Tatars: Oriental Military in the Pre-Ottoman Balkans, 1185-1365 Cambridge University Press
[18]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A Critical Survey from the Late Twelfth Century to the Ottoman conquest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 서적
[20]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