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아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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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반 아센 2세는 1218년부터 1241년 사망할 때까지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을 통치한 군주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불행한 사건들을 겪었지만, 헝가리와의 동맹을 통해 왕위를 되찾았다. 이후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승리하여 발칸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외교와 내정에 힘썼으나,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그의 치세는 막을 내렸다. 이반 아센 2세는 불가리아 역사상 가장 현명하고 성공적인 통치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치세 동안 불가리아 정교회 총대주교구가 부활하고, 최초의 불가리아 주화가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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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아센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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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반 아센 2세 |
원어 이름 | Иван Асен II |
로마자 표기 | Ivan Asen II |
통치 정보 | |
칭호 | 차르 |
국가 | 불가리아 |
재위 기간 | 1218년 – 1241년 |
이전 통치자 | 보릴 |
다음 통치자 | 칼리만 1세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안나 (아니시아) 헝가리의 안나 마리아 이리나 (크세네) |
자녀 | 마리아 벨로슬라바 엘레나 아세니나 타마라 칼리만 1세 미하일 아센 안나테오도라 마리아 아세니나 |
왕가 | 아센 왕조 |
아버지 | 이반 아센 1세 |
어머니 | 엘레나 |
생애 정보 | |
출생 | 1190년대 |
사망 | 1241년 5월/6월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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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 시절
1192년에서 1196년 사이 이반 아센 1세와 엘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이반 아센 1세는 1185년 비잔틴 제국에 대항한 불가리아인과 블라흐족의 대반란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1] 이 반란에는 폰토스 스텝의 유목민 쿠만족이 지원하여 제2차 불가리아 제국 건국을 도왔다.[1] 이 국가는 처음에는 발칸 산맥과 북쪽 평야, 하부 다뉴브 강까지 포함했다.[1]
이반 아센 2세는 즉위 후 트라키아, 알바니아, 마케도니아를 점령하여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니케아 제국과 동맹을 맺고 라틴 제국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이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베네치아 공화국 상인들을 초청하여 통상 관계를 맺고, 수도원과 대학을 건설하는 등 내정에도 힘썼다. 1232년에는 불가리아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독립시키는 등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196년, 보야르(귀족) 이반코가 이반 아센 1세를 살해했다.[2] 그의 남동생 칼로얀이 왕위를 이었다.[2] 칼로얀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서신을 교환하고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여 성좌의 지원을 확보하려 했다.[2] 1207년 10월, 칼로얀은 테살로니키를 포위하던 중 살해되었다.[3]
칼로얀 사후, 그의 쿠만 과부는 칼로얀의 누이의 아들인 보릴과 결혼했고, 보릴이 황제로 선포되었다.[4] 십 대의 이반 아센은 삼촌의 뒤를 이을 강력한 주장이 있었으나, 보릴이 즉위한 정확한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4] 13세기 역사가 조지 아크로폴리테스는 이반 아센이 곧 불가리아에서 도망쳐 "러시아인들의 땅"(갈리치아 공국 또는 키예프)에 정착했다고 기록했다.[4] 에프렘 수도사에 따르면, 이반 아센과 그의 형제 알렉산더는 키예프 루스 공국으로 가기 전에 가정교사에 의해 쿠만족에게 데려갔다.[4]
플로린 쿠르타와 존 V. A. 파인은 칼로얀 사후에 보야르 집단이 이반 아센에게 왕위를 확보하려 했지만, 보릴의 지지자들에게 제압당했고 이반 아센은 불가리아를 떠나야 했다고 썼다.[4] 역사가 알렉산드루 마게아루는 쿠만족의 영향력 증가에 반대하는 보야르들이 주로 이반 아센을 지지했다고 주장한다.[4]
이반 아센은 러시아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 후, "어떤 러시아 하층민"을 모아 불가리아로 돌아와 보릴을 물리치고 "적지 않은 땅"을 점령했다.[5] 마게아루는 이반 아센이 보릴의 반대자들에게서 받은 돈으로 병사를 고용했을 것이라 추정한다.[5] 역사가 이슈트반 바사리는 이반 아센의 "러시아 하층민"을 반유목민 브로드니키와 연관시킨다.[5]
쿠르타와 파인은 1217년 보릴의 동맹인 헝가리의 앤드루 2세가 제5차 십자군을 떠난 후 이반 아센이 불가리아로 돌아왔다고 기록했다.[6] 보릴은 패배 후 터르노보로 물러났지만, 이반 아센은 그 도시를 포위했다.[6] 아크로폴리테스는 포위 공격이 7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년도를 월로 혼동했다고 본다.[6] 긴 포위 공격 후 터르노보 시민들은 이반 아센에게 항복했고, 그는 보릴을 사로잡아 눈을 멀게 한 후 "불가리아인들의 모든 영토를 장악했다".[6]
3. 통치
1232년 헝가리는 베오그라드를 점령하고 스레데츠(소피아)를 공격하였지만, 이반 아센 2세의 동생인 알렉산더르에게 패배하였다. 1233년 헝가리군이 다시 침입하여 서부 왈라키아를 점령하고 슈베린 바나트를 세웠으나, 몽골 침입 이전에 이반 아센 2세가 격퇴하였다.
1235년 불가리아와 니케아 제국의 동맹으로 이반 아센 2세의 딸 엘레나와 테오도로스 2세의 결혼이 이루어졌고, 불가리아 총대주교구가 부활하였다. 이반 아센 2세와 요한네스 3세는 함께 라틴 제국을 공격했으나, 이반 아센 2세는 니케아 제국의 확장을 경계하여 1237년 동맹을 파기하고 다시 라틴 제국과 연합하려 했다. 그러나 터르노보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아내와 자식 등이 사망하자 이를 신의 징벌로 여기고 니케아와의 동맹을 재개했다.[7]
이반 아센 2세는 치세 후기에 라틴 제국과 니케아 제국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1240년에는 쿠만족 파병과 서방 군대 통과를 허용하기도 했다. 안나 마리아 사후, 이반 아센 2세는 에페이로스의 테오도로스의 딸 이레네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테오도로스는 석방되어 테살로니카로 돌아갔다.
1241년 이반 아센 2세는 헝가리에서 퇴각 중이던 바투 칸의 군대에게 패배하였다. 이는 결정적인 패배는 아니었고, 1242년 몽골이 세운 킵차크 칸국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이때는 이반 아센 2세가 1241년 6월 24일 이미 사망한 후였다.
3. 1. 왕위 복귀와 초기 통치 (1218년 ~ 1230년)
1218년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가 제5차 십자군에서 귀환하였고, 이반 아센 2세는 헝가리의 공주 안나 마리아와의 결혼 동맹을 통해 베오그라드 지역을 반환받았다.[6] 비록 에페이로스 공국의 테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가 오흐리드를 포함한 불가리아인의 거주 영역까지 지배하고 있었으나, 그와도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이반 아센 2세의 딸과 테오도로스의 동생 마누엘의 결혼으로 공고화되었다.
1228년 라틴 제국의 황제 로베르의 사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귀족들은 이반 아센 2세를 어린 보두앵 2세의 적합한 섭정이자 보호자로 생각하였다.[6] 이 때 에페이로스의 테오도로스는 1224년 라틴 제국으로부터 테살로니카를 빼앗았으며, 오흐리드의 독립 대주교를 통해 황제로 즉위하였고,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손에 넣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리고 있었다. 이반 아센 2세의 라틴 제국 개입을 두려워한 그는 1230년 서방 용병을 포함한 그의 군대의 방향을 돌려 북쪽의 불가리아로 향했다. 이반 아센 2세는 클로코트니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테오도로스를 포로로 잡았으며, 테오도로스는 장님이 되었다.[6] 이 승리를 계기로 이반 아센 2세는 동쪽의 흑해와 아드리아노폴리스부터 서쪽의 아드리아해와 두라초까지의 에페이로스 공국의 영토를 정복하였다.
또한 세르비아에서도 테오도로스의 사위인 스테판 라도슬라프가 실각하고 이반 아센 2세의 사위인 스테판 블라디슬라프가 집권하였다.[6] 남쪽의 에페이로스 공국령과 테살로니카 지역은 이반 아센 2세의 사위인 마누엘에게 넘겨졌고, 그는 데스포트의 직위로 테살로니카에서 통치하였다. 이반 아센 2세의 성공은 그가 테오도로스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격파한 것만큼이나 그가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여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풀어주었던 덕분이었다.
그의 성공에 고무된 이반 아센 2세는 터르노보의 40 순교자 성당의 기둥에 그가 순교자들의 도움 덕분에 테오도로스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인들의 복종을 얻게 되었다는 내용의 기념비를 새겼다. 하지만 이는 너무 이른 낙관론이었다. 1231년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이 라틴 제국의 섭정으로 임명되면서 이반 아센 2세의 섭정도 끝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불가리아와 라틴 제국의 동맹은 단절되고, 이를 대신하여 불가리아는 니케아 제국과 동맹을 맺게 된다.
3. 2. 클로코트니차 전투와 발칸 반도의 패권 장악 (1230년)
1228년 라틴 제국의 황제 로베르가 사망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귀족들은 이반 아센 2세를 어린 보두앵 2세의 섭정 및 보호자로 고려하였다.[6] 당시 에페이로스 공국의 테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는 1224년 라틴 제국으로부터 테살로니카를 빼앗고 오흐리드의 독립 대주교를 통해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반 아센 2세의 라틴 제국 개입을 우려한 테오도로스는 1230년 서방 용병을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이반 아센 2세는 클로코트니챠 전투에서 테오도로스를 사로잡아 장님으로 만드는 대승을 거두었다.[6] 이 승리로 이반 아센 2세는 동쪽의 흑해와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서쪽의 아드리아해와 두라초에 이르는 에페이로스 공국의 영토를 정복하였다.
세르비아에서는 테오도로스의 사위 스테판 라도슬라프가 실각하고 이반 아센 2세의 사위 스테판 블라디슬라프가 집권하였다.[6] 남쪽의 에페이로스 공국령과 테살로니카 지역은 이반 아센 2세의 사위 마누엘에게 넘겨져 테살로니카에서 데스포트 직위로 통치하였다. 이반 아센 2세의 성공은 군사적 승리뿐만 아니라 포로를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풀어준 덕분이기도 했다.
이반 아센 2세는 자신의 성공을 기념하여 터르노보의 40 순교자 성당 기둥에 기념비를 새겼다. 그러나 1231년 장 드 브리엔이 라틴 제국의 섭정으로 임명되면서 불가리아와 라틴 제국의 동맹은 깨지고, 니케아 제국과의 동맹이 시작되었다.
3. 3. 외교 관계와 내치 (1230년 ~ 1241년)
이반 아센 2세는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의 장녀 Anna Maria|안나 마리아hu와 결혼하여 베오그라드 지역을 반환받았다. 또한 에페이로스 공국의 테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 동맹은 이반 아센 2세의 딸과 테오도로스의 동생 마누엘의 결혼으로 더욱 공고해졌다.[6]
1228년 라틴 제국 황제 로베르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 귀족들은 이반 아센 2세를 어린 보두앵 2세의 섭정으로 고려했다.[6] 그러나 1230년 클로코트니챠 전투에서 에페이로스의 테오도로스는 이반 아센 2세에게 대패하여 포로로 잡혔고, 이반 아센 2세는 에페이로스 공국 영토 대부분을 정복하였다.[6] 또한 세르비아에서는 테오도로스의 사위 스테판 라도슬라프가 실각하고 이반 아센 2세의 사위 스테판 블라디슬라프가 집권하였다.[6]
1231년 장 드 브리엔이 라틴 제국 섭정으로 임명되면서 불가리아와 라틴 제국 간 동맹은 단절되고, 불가리아는 니케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교황과 헝가리를 자극하여 1232년 헝가리가 베오그라드를 점령하고 스레데츠(소피아)를 공격했지만, 이반 아센 2세의 동생에게 패배하였다. 1233년 헝가리군이 다시 침입하여 서부 왈라키아를 점령하고 슈베린 바나트를 세웠으나, 몽골 침입 이전에 이반 아센 2세가 격퇴하였다.
불가리아와 니케아의 동맹으로 1235년 이반 아센 2세의 딸 엘레나와 테오도로스 2세 간 결혼이 이루어졌고, 동방 총대주교의 허락 하에 불가리아 총대주교구가 부활하였다. 이반 아센 2세와 요한네스 3세는 함께 라틴 제국을 공격했으나, 이반 아센 2세는 니케아 제국 확장을 경계하여 1237년 동맹을 파기하고 다시 라틴 제국과 연합하려 했다. 그러나 터르노보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아내와 자식 등이 사망하자 이를 신의 징벌로 여기고 니케아와의 동맹을 재개했다.[7]
이반 아센 2세는 치세 후기에 라틴 제국과 니케아 제국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1240년에는 쿠만족 파병과 서방 군대 통과를 허용하기도 했다.
안나 마리아 사후, 이반 아센 2세는 에페이로스의 테오도로스의 딸 이레네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테오도로스는 석방되어 테살로니카로 돌아가 아들 요한네스를 데스포트로 세웠다.
1241년 이반 아센 2세는 헝가리에서 퇴각 중이던 바투 칸의 군대에게 패배하였다.
3. 4. 몽골의 침입과 죽음 (1241년)
이반 아센 2세의 통치에 대한 최후의 기록은 1241년 헝가리에서 퇴각 중이던 바투 칸의 군대에게 패배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결정적인 패배는 아니었고, 1242년 몽골이 세운 킵차크 칸국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이때는 이반 아센 2세가 1241년 6월 24일 이미 사망한 후였다.[7]
1237년 여름, 유럽에 대한 새로운 몽골 침공으로 수천 명의 쿠만족이 대초원에서 도망쳐야 했다. 이반 아센 2세는 불가리아로 도나우강을 건너는 것을 막을 수 없어 그들이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침략하도록 허용했다. 쿠만족은 가장 작은 요새를 점령하고 시골을 약탈했다.
이반 아센은 1240년 5월 전에 헝가리에 사절을 보냈는데, 아마도 몽골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 동맹을 맺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몽골의 권위는 1240년 12월 6일 키예프를 점령한 후 하도나우강까지 확장되었다. 몽골의 확장은 수십 명의 쫓겨난 루스 공작과 보야르를 불가리아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헝가리에 정착했던 쿠만족도 그들의 수장 쾨텐이 1241년 3월에 살해된 후 불가리아로 도망쳤다.
4. 평가
이반 아센 2세는 불가리아의 가장 현명하고 성공적인 통치자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의 치세인 1235년에는 1018년 이후 사라졌던 불가리아 정교회 총대주교구가 부활하였으며, 최초의 불가리아 고유 금전과 동전이 주조되었다. 또한 그의 전임자인 보릴 시기의 중앙 집권력 약화를 억제하였고, 대규모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반 아센 2세는 행정적 통제를 통해 국가 내의 효율성을 강화하고자 하였고, 라구사 공화국(오늘날의 두브로브니크)과 베네치아 공화국과 통상 조약을 맺었다.[5] 그는 전쟁을 억제하고 외교적 해결을 추구하려 하였으나, 그의 정책들은 특히 니케아 제국과 라틴 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러하지 못하였다.
이반 아센 2세가 이들 중 한 국가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는 위험한 것이었고 그의 동맹들에게는 이득이 되는 것이었다. 결국 에페이로스의 테오도로스를 격파하고 니케아와 친선 관계를 취한 그의 정책들은 니케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회복할 비잔티움 제국의 계승자라는 입지를 안정시켜주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또한 그의 사후 세르비아와 테살로니카에 대한 불가리아의 영향력도 끊겨졌다. 그가 남긴 행정 기구들은 그의 후계자들이 외부의 도전에 대처하기엔 불충분한 것이었고, 불가리아는 1242년 킵차크 칸국의 조공국이 된 것 이외에도 1246년부터 니케아, 에페이로스, 헝가리에게 영토를 빼앗기게 되었다. 이반 아센 2세가 이러한 도전에 대처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가 중세 불가리아의 내부 번영과 평화, 외부 헤게모니를 주도하였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크로폴리테스는 이반 아센 2세를 "자신의 백성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훌륭함을 증명한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역사가 진 W. 세들러는 그를 "불가리아의 마지막 실질적인 강한 통치자"라고 묘사했다. 그는 성공적인 군사 지휘관이자 노련한 외교관으로서, 시메온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제1차 불가리아 제국에 포함되었던 거의 모든 영토를 정복했다. 그는 또한 헝가리가 불가리아에 주요 위협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다.
보야르들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전리품에 대한 갈망은 이반 아센 2세에 대한 충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유대 관계는 왕권의 지배력을 영구적으로 확보할 수 없었다. 지방 보야르들은 세금 징수와 군대 소집을 통제했기 때문에 여전히 지방의 실제 통치자로 남았다. 이반 아센 2세의 통치는 몽골의 유럽 침공으로 인해 "완전한 재앙의 순간에 끝났다". 몽골군은 1242년에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불가리아인들에게 매년 공물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이반 아센 2세의 후계자가 미성년자였던 탓에 보야르 파벌이 형성되었고, 주변 강대국들은 빠르게 주변 영토를 정복했다.
5. 가족 관계
이반 아센 2세는 세 번 결혼하였다. 첫 번째 아내인 안나는 정식 부인이 아닌 첩으로 여겨지며, 두 딸을 낳았다.
- 마리아 : 테살로니카의 마누엘과 결혼하였다.
- 벨로슬라바 : 세르비아의 스테판 블라디슬라프 1세와 결혼하였다.
두 번째 아내는 헝가리의 마리아이며, 1237년에 사망하였다. 네 자녀를 낳았다.
세 번째 아내는 에페이로스의 테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의 딸인 이레네이며, 세 아이를 낳았다.
- 안나-테오도라 : 1253년 이전에 세바스토크라토르 페터르와 결혼, 그들의 딸은 비딘의 데스포트 시슈만과 결혼하여 시슈만 왕가의 시조가 되었다.
- 마리아 : 1256년 ~ 1257년 불가리아의 차르였던 미초 아센과 결혼하여 1279년 ~ 1280년 불가리아의 차르였던 이반 아센 3세를 낳았다.
- 미하일 아센 1세 : 1246년 ~ 1256년 불가리아의 차르였다.
이반 아센 1세 | 엘레나-예프게니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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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span=3 | | 이반 아센 2세 | colspan=3 | | |||||||
안나 | 안나 마리아 | 이레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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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 10%; border-right:solid black 1px" | | 1 | 1 | 2 | 2 | 2 | 2 | 3 | 3 | 3 |
마리아 | 헬레나 | 칼리만 아센 1세 | 미하일 아센 | 마리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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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슬라바 | 타마르 | 페테르 | 안나-테오도라 |
참조
[1]
서적
The Byzantine Empire of Thessaloniki, 1224-1242
https://books.google[...]
Municipality of Thessaloniki, Thessaloniki History Center
[2]
기타
[3]
기타
Familijata na Asenevci
[4]
서적
Istorija na srednovekovna Bǎlgarija VII-XIV vek (tom 1)
Anubis
[5]
웹사이트
Bulgarian National Bank
http://www.bnb.bg
2009-03-26
[6]
서적
비잔티움 제국사
까치
[7]
서적
비잔티움 제국사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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