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드라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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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언드라시 2세는 벨러 3세의 아들로, 형 임레에 대항하여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공작을 지냈다. 1205년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한 후, '새로운 제도' 정책으로 귀족의 권한을 강화했다. 갈리치아에 대한 군사 개입과 제5차 십자군에 참여했으며, 1222년 금인칙서를 제정하여 왕실 관료와 귀족의 권리를 향상시켰다. 말년에는 아들과의 갈등, 교황과의 불화 속에서 123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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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드라시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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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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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
재위 | 1205년 5월 7일 – 1235년 9월 21일 |
대관일 | 1205년 5월 29일, 세케슈페헤르바르 |
이전 통치자 | 라슬로 3세 |
다음 통치자 | 벨러 4세 |
출생 | 기원전 1177년경 |
사망일 | 1235년 9월 21일 |
매장지 | 에그레스 수도원 |
종교 | 로마 가톨릭 |
가계 | |
왕조 | 아르파드 왕조 |
아버지 | 벨러 3세 |
어머니 | 안티오크의 아그네스 |
배우자 | |
배우자 | 메라니아의 게르트루데 욜란다 드 쿠르트네 베아트리체 데스테 |
자녀 | |
자녀 | 안나 마리아, 불가리아 황후 벨러 4세 성녀 엘리자베트 칼만, 할리치 공작 언드라시, 할리치 공작 욜란다, 아라곤 왕비 이슈트반 포스트후무스 |
할리치 공작 | |
재위 기간 | 1188년–1189년 또는 1190년 1208년 또는 1209년–1210년 |
이전 통치자 | 로만 므스티슬라비치 로만 이고레비치 |
다음 통치자 |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 |
2. 생애
벨러 3세와 그의 첫째 아내인 안티오케이아의 아그네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197년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와 동맹을 맺고 형 임레 국왕에 대항했다. 1198년 크로아티아 공작, 달마티아 공작 칭호를 받았다.[10]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언드라시 2세에게 십자군 참여를 독려했지만, 언드라시 2세는 임레에 대한 음모를 계속했다. 1199년 3월 10일 임레는 언드라시 2세를 지지했던 바치의 볼레슬로 주교로부터 음모를 증명하는 문서를 입수했다. 그해 여름 벌러톤호 부근 전투에서 임레가 언드라시 2세의 군대를 물리치자, 언드라시 2세는 오스트리아로 도망쳤다.[10]
교황 특사의 중재로 임레와 언드라시 2세 형제는 화해했다. 1200년 여름, 임레는 언드라시 2세의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통치를 승인했다. 1203년 언드라시 2세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바라주딘 인근에서 임레에게 생포되었다.
1204년 임레가 사망하고 라슬로 3세가 즉위하자, 언드라시 2세는 섭정이 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라슬로의 왕권을 침해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언드라시 2세는 이를 무시하고 임레와 라슬로의 재산을 몰수했다. 라슬로 3세는 어머니 아라곤의 콘스탄체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으로 피신했으나 1205년 5월 7일 사망했다.
1205년 5월 29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컬로처 주교 야노시로부터 왕관을 받고 헝가리 국왕에 즉위했다.[12] 1205년부터 1217년까지 갈리치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1222년 금인칙서를 제정하여[22] 헝가리 왕실 관료와 귀족들의 권리를 향상시키고 교회의 이익을 제한했다.[21] 1224년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에 대한 특권을 보장하는 자치법(Diploma Andreanum)을 제정했다. 그의 왕위는 벨러 4세가 승계받았다.
2. 1. 어린 시절과 청년기 (1177년경 ~ 1197년)
벨러 3세와 그의 첫째 아내인 안티오케이아의 아그네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현대 역사가들은 그가 1177년경에 태어났다고 추정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언드라시는 1188년 아버지의 갈리치 공국 침공과 관련하여 처음 언급되었다. 그해, 벨러 3세는 갈리치의 전 공작 블라디미르 2세 야로슬라비치의 요청으로 갈리치를 침공했고, 언드라시에게 그 땅을 하사했다. 그러나 헝가리 군인들이 현지 여성들을 모욕하고 동방 정교회 교회를 존중하지 않아 언드라시의 통치는 인기가 없었다. 결국, 1189년 또는 1190년에 언드라시는 폴란드의 지원을 받은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에게 쫓겨났다.언드라시는 패배 후 헝가리로 돌아왔고, 아버지로부터 별도의 공작령을 받지 못했다. 성지로 십자군을 이끌겠다고 약속한 벨러 3세는 임종 직전 언드라시에게 자신의 서약을 이행하라고 명령했다. 1196년 4월 23일 벨러 3세가 사망하고, 언드라시의 형인 임레가 왕위를 이었다.
언드라시는 임레로부터 헝가리 왕위를 빼앗으려는 계획에 유산을 사용했고[10],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197년 12월, 언드라시의 군대는 마체크(Macsek) 근교에서 임레의 군대에 승리하여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지배권이 언드라시에게 넘어갔다. 1198년 언드라시는 크로아티아 공작, 달마티아 공작 칭호를 받았다.
1198년 초, 로마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언드라시에게 벨러 3세의 유지를 이어받아 십자군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언드라시는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고, 임레와 대립하는 고위 성직자들과 음모를 꾸몄지만, 계획은 직전에 발각되었다[10]。 1199년 여름 언드라시는 라드 전투에서 임레에게 패배하여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교황 특사의 중재로 언드라시와 임레는 화해했고, 1200년 여름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지배권은 임레에게 반환되었다.
1200년경, 언드라시는 메라노의 공녀 게르트루데와 결혼했다.
1203년 언드라시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지만, 임레가 무장을 해제하고 언드라시의 숙영지를 방문하자 언드라시는 즉시 항복했다[11]。 언드라시는 임레에게 체포되었지만, 탈출에 성공했다.
1204년 8월 임레의 어린 아들 라슬로가 즉위했지만, 이후 임레는 건강을 해쳤다. 임레는 헝가리 왕위가 무사히 계승되기를 바라며 화해한 언드라시에게 어린 라슬로를 후견하도록 명령했다. 1204년 가을 임레가 사망한 후, 언드라시는 조카 라슬로의 섭정으로서 헝가리를 통치하고, 임레가 라슬로에게 남긴 재산을 관리했다. 그러나 임레의 아내 콘스탄스가 라슬로를 데리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했기 때문에 언드라시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1205년 5월 7일 라슬로가 사망하고, 언드라시가 헝가리 왕위를 계승했다.
2. 2.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공작 (1197년 ~ 1204년)
벨러 3세와 그의 첫째 아내인 안티오케이아의 아그네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언드라시 2세는 1197년 오스트리아의 공작이었던 레오폴트 6세와 동맹을 맺고 형인 임레 국왕에 대항했다. 1198년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공작 칭호를 받았다.[10]언드라시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금을 이용해 헝가리 영주들 사이에서 지지 세력을 모았다. 그는 형에게 슬라보니아 공작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구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12세기 후반 왕위 계승자의 칭호였다. 또한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와 동맹을 맺고 임레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다. 1197년 12월, 슬라보니아의 마치에서 언드라시의 연합군은 왕실 군대를 격파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임레 왕이 강압적인 상황에서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를 언드라시에게 분봉령으로 넘겨주었다고 믿는다. 반면, 죄르지 셔바도시는 임레가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에서 언드라시의 지배를 인정한 적이 없으며, 언드라시가 형의 승인 없이 공작 칭호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언드라시는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를 독립적인 군주처럼 통치했다. 그는 동전을 주조하고, 토지를 하사하고 특권을 확인했다. 바라주딘과 보드로그도 그의 종주권에 속했다. 프랑코판 가문, 바보니치 가문 및 기타 지역 영주들과 협력했다. 코메스 언드라시와 마카리우스 모노슬로를 포함한 몇몇 유력한 남작들도 그의 포부를 지지했다. 성묘 수도회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 지역에 정착했다. 언드라시는 미로슬라프 오브 훔의 죽음을 틈타 훔을 침공하여 1198년 5월 이전에 적어도 체티나 강과 네레트바 강 사이의 땅을 점령했다. 그는 헌장에서 스스로를 "신의 은총으로, 자다르와 모든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훔의 공작"이라고 칭했다.[10]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언드라시에게 성지로 십자군을 이끌 것을 촉구했지만, 언드라시는 판노니아할머의 수도원장 요한, 바츠 주교 볼레슬라우스 및 다른 많은 고위 성직자와 영주들의 도움을 받아 임레에 대항하는 새로운 음모를 꾸몄다. 1199년 3월 10일 임레는 언드라시를 지지했던 바치의 볼레슬로 주교로부터 자신에 대한 음모를 증명하는 문서를 입수했다. 1199년 여름, 임레는 벌러톤호 부근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언드라시 2세의 군대를 물리쳤고 언드라시 2세는 오스트리아로 도망쳤다.[10]
교황 특사는 임레와 언드라시 2세 형제 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헝가리를 방문했다. 1200년 여름, 임레는 약속대로 언드라시 2세의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통치를 승인했다.
2. 3. "새로운 제도"와 갈리치아 원정 (1205년 ~ 1217년)

에스테르곰의 요한 대주교는 1205년 5월 29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언드라시 2세를 왕으로 즉위시켰다.[12] 언드라시 2세는 "새로운 제도"라고 불리는, 이전 국왕들과는 다른 정책을 도입했다.[13] 그는 왕실 영토, 왕실 성과 거기에 딸린 모든 영지를 상속 가능한 토지로 지지자들에게 분배하면서, "왕실의 토지 분배의 가장 좋은 척도는 그 크기가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13]
이러한 "새로운 제도"는 군주와 헝가리 귀족 간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이전에는 귀족의 지위가 주로 군주에게 봉사한 대가로 받은 수입에 달려 있었지만, "새로운 제도" 도입 이후에는 귀족들의 상속 토지가 충분한 수입을 낳게 되었다.[13] 이 정책으로 군주가 임명한 이슈판(ispán)의 권위에 기반한 자금이 감소했다.[13]
언드라시 2세는 재위 기간 동안 이전 갈리치 공국의 내정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12] 그는 1205년 또는 1206년에 갈리치를 재탈환하기 위한 첫 번째 원정을 시작했다.[12]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체르니고프 공작 브세볼로드 스비아토슬라비치와 그의 동맹자들을 상대로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했고, 스비아토슬라비치와 그의 동맹자들은 철수해야만 했다.[12] 언드라시 2세는 두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며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언드라시 2세가 헝가리로 돌아간 후, 블라디미르 3세 이고레비치는 갈리치와 로도메리아를 모두 점령하고 다니엘 로마노비치와 그의 어머니를 추방했다.[12] 그들은 폴란드의 레셰크 1세에게 도망쳤고, 레셰크 1세는 그들에게 언드라시 2세를 방문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는 안드라시 2세와 레셰크 1세 모두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 그들을 설득하여 공격하지 않도록 했다.[12]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만 2세 이고레비치는 헝가리로 와서 안드라시 2세의 도움을 요청했고, 헝가리 보조 군대의 도움을 받아 갈리치로 돌아가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를 추방했다.
언드라시 2세는 1207년에 스플리트와 오미슈의 자유를 확인하고, 스플리트 대주교의 특권을 열거한 새로운 헌장을 발행했다. 로만 이고레비치와 그의 귀족 간의 분쟁을 이용하여 언드라시 2세는 군대를 갈리치로 보냈고, 코를라트의 베네딕트가 공국을 점령했다(1208년 또는 1209년).[12] 언드라시 2세는 베네딕트를 갈리치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갈리치아-볼히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베네딕트는 "귀족들을 고문했고, 난잡함에 중독되었다"고 한다. 귀족들은 베네딕트를 전복할 수 있다면 노브고로드 공작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에게 왕위를 제안했지만,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는 갈리치를 침공했지만 베네딕트를 물리칠 수 없었다.

메라니아의 게르트루데 왕비의 두 형제는 독일 왕 슈바벤의 필리프의 살해에 연루된 혐의로 1208년에 헝가리로 도망쳤다.[13] 안드라시 2세는 스페세시 지역(현재의 스피시)에 있는 에크베르트 주교에게 광대한 영지를 하사했다.[13] 게르트루데의 막내 동생인 아퀼레이아의 베르톨드 총대주교는 1206년부터 칼로차 대주교였으며, 1209년에는 크로아티아의 반과 달마티아의 반으로 임명되었다. 안드라시 2세가 아내의 독일 친척과 측근들에게 보인 관대함은 지역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13]
1209년, 자다르 포위전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빼앗겼던 자다르는 안드라시 2세의 달마티아 봉신 중 한 명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베네치아인들은 1년 후에 그 도시를 재탈환했다.
로만 이고레비치는 1209년 초 또는 1210년에 그의 형제인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와 화해했다. 그들의 연합군은 베네딕트의 군대를 격파하고 헝가리인들을 갈리치에서 추방했다.[12]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는 안드라시 2세를 달래기 위해 그의 아들 중 한 명을 "헝가리의 왕에게 선물"로 보냈다. 불만을 품은 헝가리 귀족들은 안드라시 2세의 사촌에게 왕관을 제안했지만, 사절은 1210년 스플리트에서 체포되었다.[13] 1210년대 초, 안드라시 2세는 트란실바니아 작센족, 블라흐족, 세케이족 및 페체네그족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보내 불가리아의 보릴의 반역적인 쿠만족 추장과의 싸움을 지원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헝가리 군대는 벨그라드와 바란츠를 점령했고, 안드라시 2세의 군대는 비딘에서 쿠만족을 격파했다. 안드라시 2세는 바르카사그를 튜튼 기사단에게 하사했다. 기사단은 헝가리 왕국의 가장 동쪽 지역을 쿠만족으로부터 방어하고, 그들의 가톨릭 개종을 장려해야 했다.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의 전제적인 행동에 경각심을 느낀 귀족들은 1210년 또는 1211년에 안드라시 2세에게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갈리치의 통치자로 복위시켜 달라고 요청했다.[12] 안드라시 2세와 그의 동맹국(폴란드의 레셰크 1세와 최소 5명의 루스 공)은 군대를 갈리치로 보내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복위시켰다. 1212년, 지역 귀족들은 다니엘 로마노비치의 어머니를 추방했고, 그녀는 안드라시 2세에게 군대를 직접 이끌고 갈리치로 가도록 설득했다.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을 체포하여 헝가리로 데려갔다. 안드라시 2세가 갈리치에서 철수한 후, 귀족들은 다시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에게 왕위를 제안했고, 므스티슬라비치는 다니엘 로마노비치와 그의 어머니를 공국에서 추방했다.
안드라시 2세는 1213년 여름에 갈리치에 대한 새로운 원정을 떠났다. 그가 부재한 동안, 게르트루데 왕비가 그녀의 독일 측근들을 편애하는 것에 분개한 헝가리 귀족들은 9월 28일 필리시 언덕에서 그녀와 그녀의 측근들을 체포하여 살해했다.[13] 그녀의 살해 소식을 들은 안드라시 2세는 헝가리로 돌아와 살인자의 처형을 명령했다. 그러나 살인 공모자들은 심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안드라시 2세가 "변태"라고 부른 헝가리 귀족 집단은 안드라시 2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장남인 8세 헝가리의 벨라 4세에게 왕관을 씌우려고 음모를 꾸몄지만, 그는 안드라시 2세를 폐위시키는 데 실패했고 안드라시 2세는 1214년에 벨라 4세의 대관식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안드라시 2세와 폴란드의 레셰크 1세는 동맹 조약을 맺었고, 이 조약은 안드라시 2세의 둘째 아들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의 콜로만이 폴란드의 레셰크 1세의 딸과 결혼해야 할 의무를 부과했다. 안드라시 2세와 레셰크 1세는 1214년에 갈리치를 공동 침공했고, 콜로만이 왕자가 되었다. 그는 프셰미실을 폴란드의 레셰크 1세에게 양도하기로 동의했다.[13] 이듬해 안드라시 2세는 갈리치로 돌아와 프셰미실을 점령했다.[13] 폴란드의 레셰크 1세는 곧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와 화해했고, 그들은 함께 갈리치를 침공하여 콜로만이 헝가리로 도망가도록 강요했다.
새로운 관료인 재무관은 1214년경부터 왕실의 재산을 관리했다.[13] 그러나 왕실 수입은 상당히 감소했다. 재무관의 조언에 따라 안드라시 2세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고 주조, 소금 거래 및 관세에서 왕실 수입을 수입 수수(farm out)했다. 동전의 연간 교환도 왕실 재산에 더 많은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헝가리에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안드라시 2세는 1216년 여름에 폴란드의 레셰크 1세와 새로운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레셰크 1세와 안드라시 2세의 아들인 콜로만은 갈리치를 침공하여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와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추방한 후 콜로만이 복위되었다. 같은 해 안드라시 2세는 세르비아 대공을 만났다. 그는 스테판 네마니치가 안드라시 2세의 두 번째 아내의 삼촌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황제와 협상하도록 설득했다. 스테판 네마니치는 1217년에 세르비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안드라시 2세는 세르비아를 침공할 계획이었지만, 성 사바가 그를 만류했다.
2. 4. 제5차 십자군 (1217년 ~ 1218년)
András II영어는 1217년부터 1218년까지 제5차 십자군에 참여했다. 1216년 7월,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언드라시에게 그의 아버지 벨러 3세가 십자군을 이끌라는 서약을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11] 언드라시는 1201년, 1209년, 1213년에 최소 세 번이나 십자군 파병을 연기했지만, 마침내 교황의 요청에 동의했다.[17]몇몇 역사학자들은 언드라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황제로 선출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십자군에 참여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아내의 삼촌인 황제 앙리가 사망했기 때문이다.[11] 1217년 교황 호노리우스가 쓴 편지에 따르면, 라틴 제국의 사절들은 언드라시에게 그들이 그 또는 그의 장인인 쿠르트네의 피터를 황제로 선출할 계획이라고 알렸다.[19] 그러나 라틴 제국의 남작들은 1216년 여름 쿠르트네의 피터를 선출했다.
언드라시는 제5차 십자군 원정을 위해 왕실 영지를 팔고 저당 잡았다.[17] 그는 자신의 군대를 위한 수송을 확보하기 위해 자다르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베네치아 공화국에 넘겨주었다.[17] 1217년 7월, 언드라시는 자그레브를 떠났으며,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6세와 메라니아의 오토 1세 공작이 그를 동반했다. 그의 군대는 너무 커서 언드라시와 그의 부하들이 두 달 후에 스플리트에 승선했을 때 그 대부분이 뒤에 남았다. 배는 그들을 아크레로 수송했고, 그들은 10월에 상륙했다.

십자군의 지도자로는 예루살렘 왕 브리엔의 요한,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구호 기사단 단장, 템플 기사단 단장, 그리고 튜튼 기사단 단장이 있었다. 그들은 언드라시가 회의를 주재한 아크레에서 전쟁 회의를 열었다. 11월 초, 십자군은 요르단강을 향한 원정을 시작하여 이집트 술탄 알 아딜 1세가 싸우지 않고 후퇴하도록 강요했고, 십자군은 그 후 베이산을 약탈했다. 헝가리군은 1217년 11월 10일, 요르단강 연안의 벳새다에서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의 군대에 승리했다.[18] 패배한 아이유브군은 요새와 마을로 퇴각했다. 그러나 투석기와 쇠뇌가 언드라시에게 기한 내에 도착하지 않아, 헝가리군은 아이유브군이 농성하는 레바논과 타볼 산을 공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십자군이 아크레로 돌아온 후, 언드라시는 다른 군사 행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성유물을 수집했는데, 여기에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사용된 물 항아리, 성 스테파노와 성녀 마가렛의 머리, 사도 토마스와 바르톨로메오의 오른손,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의 일부가 포함되었다. 아크레의 "사악하고 뻔뻔한 사람들"이 그에게 "독이 든 음료를 몰래 건넸다"고 하는 토마스 대주교의 보고가 신뢰할 수 있다면, 언드라시가 활동을 중단한 이유는 병 때문이었다.
언드라시는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메랑쿠르의 라울이 그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음에도 불구하고 1218년 초에 귀국하기로 결정했다.[18] 언드라시는 먼저 트리폴리를 방문하여 1월 10일에 안티오크의 보에몽 4세와 뤼지냥의 멜리센데의 결혼식에 참여했다. 트리폴리에서 그는 킬리키아로 가서, 아르메니아 왕 레오 1세와 함께 언드라시의 막내 아들 언드라시와 레오의 딸 이사벨라를 약혼시켰다. 언드라시는 룸 술탄국의 셀주크 왕조를 거쳐 니케아 (현재의 이즈니크, 터키)에 도착했다. 그의 사촌들(그의 삼촌 게저의 아들들)은 그가 니케아에 있을 때 그를 공격했다. 그는 그의 장남 벨라를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 황제의 딸 마리아 라스카리나와 결혼시켰다. 그가 불가리아에 도착했을 때, 언드라시는 토마스 대주교에 따르면 "그의 딸이 결혼할 것이다"라는 완전한 보증을 줄 때까지 억류되었다. 언드라시는 1218년 말 헝가리로 돌아왔다.[18]

2. 5. 금인칙서 (1218년 ~ 1222년)
언드라시 2세는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후, 헝가리가 혼란에 빠지고 재정이 파탄난 것을 알게 되었다[17]. 일부 귀족들은 에스테르곰 대주교 요한을 헝가리에서 추방하기도 했다[17].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막대한 부채로 언드라시 2세는 세금을 인상하고 주화 가치를 떨어뜨려야 했다[17].1219년, 갈리치아의 칼만은 노브고로드 공 므스티슬라프에게 쫓겨났다. 헝가리는 노브고로드와 화해했고, 언드라시 2세는 므스티슬라프의 딸을 막내아들 언드라시와 결혼시켰다.
언드라시 2세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급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중소 귀족과 일부 대귀족의 불만을 샀다[20]. 수입을 늘리기 위해 임시세를 제정하고,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에게 화폐 주조, 세금 징수, 광산 경영을 허가했다. 그러나 이는 언드라시 2세에 대한 지지를 더욱 떨어뜨렸다[21]. 재정 개혁 과정에서 악화가 주조되었고, 언드라시 2세에게 반감을 가진 귀족들은 슬라보니아를 다스리던 왕자 벨러를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13].
1222년, 언드라시 2세에게 불만을 품은 조정 신하와 귀족들이 대거 궁정에 몰려들었고, 언드라시 2세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금인칙서를 발포했다[22]. 금인칙서는 조정 신하와 대귀족의 권리를 확대하고 교회의 이익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21]. 이 칙서는 종종 잉글랜드 왕국에서 제정된 마그나 카르타와 비교되기도 한다[12][20]. 그러나 헝가리 왕들은 칙서의 조항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았다[23].

2. 6. 아들과 교회와의 갈등 (1222년 ~ 1234년)
1222년 언드라시 2세는 테오도르 차나드 팔라틴을 해임하고 율리우스 칸을 복귀시켰다. 이듬해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언드라시 2세에게 새로운 십자군을 시작하라고 촉구했다. ''콘티누아티오 클라우스트로네우부르겐시스''의 보고서가 신뢰할 수 있다면, 언드라시 2세는 새로운 십자군을 시작할 의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지만, 다른 출처에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다. 언드라시 2세는 장남 벨러를 위해 새로운 결혼을 주선하려 했지만,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1223년 가을에 벨러와 그의 아내 사이를 중재했다. 이 일로 언드라시 2세는 분노했고, 벨러는 오스트리아로 도망쳤다. 벨러는 주교들이 언드라시 2세를 설득하여 그를 용서하도록 한 후 1224년에 돌아왔다.1224년 ''디플로마 안드레아눔''에서 언드라시 2세는 트란실바니아 남부 헤르만슈타트 지역에 거주하는 "작센족"의 특권을 확인했다. 이듬해 그는 자신의 종주권을 제거하려 했던 튜턴 기사단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 기사단은 바르카사그와 인접한 땅을 떠나야 했다. 언드라시 2세의 사절단과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6세는 6월 6일에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을 종식시키는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일환으로 레오폴트 6세는 자신의 군대가 헝가리에서 야기한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언드라시 2세는 장남 벨러를 트란실바니아 공작으로 만들었다. 벨러의 이전 공작령은 1226년에 언드라시 2세의 차남 콜로만에게 주어졌다. 벨러 공작은 쿠만족에 대한 종주권을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쿠만족은 카르파티아 산맥 동쪽에 거주했다. 1226년에 언드라시 2세는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는데, 이는 므스티슬라비치가 이전의 타협에도 불구하고 언드라시 2세의 막내 아들에게 할리치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언드라시 2세는 할리치에서 프셰미실, 테레보블, 기타 요새를 포위하여 점령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크레메네츠와 즈베니고로드에서 패배하여 철수해야 했다. 므스티슬라비치는 1227년 초에 할리치를 언드라시 2세의 아들에게 양도했다.

1228년, 언드라시 2세는 아들 벨러에게 이전 토지 부여를 수정할 권한을 부여했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도 벨러의 노력을 지원했다. 벨러는 게르트루데 여왕 살해 음모에 가담했던 두 귀족, 시몬 카치치와 뱅크 바르-칼란의 영지를 몰수했다. 1229년, 언드라시 2세는 벨러의 제안에 따라 벨러에게 복종한 쿠만족 추장들의 특권을 확인했다. 에스테르곰 대주교 로베르트는 언드라시 2세가 유대인과 무슬림을 계속 고용하고 있다는 이유로 교황청에 불만을 제기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대주교에게 언드라시 2세가 비 기독교 관료를 해고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종교적 제재를 가할 권한을 부여했다. 압박을 받은 언드라시 2세는 1231년에 새로운 금인칙서를 발표했는데, 이는 무슬림의 고용을 금지하고 에스테르곰 대주교에게 새로운 금인칙서의 조항을 지키지 않을 경우 왕을 파문할 권한을 부여했다.[24] 그해 후반에 언드라시 2세는 할리치를 침공하여 막내 아들 언드라시를 왕위에 복귀시켰다.
로베르트 대주교는 1231년 금인칙서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무슬림의 고용이 계속되었다는 이유로 1232년 2월 25일에 파문을 선언하고 헝가리에 금지령을 내렸다.[24] 대주교가 무슬림이 언드라시 2세를 설득하여 교회 재산을 몰수하게 했다고 비난했기 때문에, 언드라시 2세는 대주교에게 재산을 돌려주었고, 대주교는 곧 금지령을 해제했다. 언드라시 2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추기경 자코모 디 페코라리를 교황 사절로 헝가리에 파견하고 교황의 특별한 허가 없이는 아무도 파문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언드라시 2세는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막내 아들을 지원하기 위해 할리치로 떠났지만, 교황 사절과의 협상을 계속했다. 1233년 8월 20일, 베레그 현의 숲에서 그는 베레그 서약을 하고, 왕실 수입을 관리하기 위해 유대인과 무슬림을 고용하지 않으며, 빼앗긴 교회 수입에 대한 보상으로 를 지불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언드라시 2세는 9월에 에스테르곰에서 맹세를 반복했다.
언드라시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1233년 말에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언드라시 2세는 과부가 된 후, 1234년 5월 14일에 23세의 베아트리체 데스테와 결혼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그의 세 번째 결혼에 강하게 반대했다. 보스니아 주교 요한은 언드라시 2세가 베레그 서약에도 불구하고 비 기독교 관료를 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234년 전반기에 헝가리에 새로운 금지령을 내렸다. 언드라시 2세와 에스테르곰 대주교 로베르트는 주교의 행위에 대해 교황청에 항의했다.
2. 7. 말년 (1234년 ~ 1235년)
1234년 가을, 다닐로 로마노비치가 할리치를 포위했고, 이 과정에서 언드라시 2세의 막내 아들이 사망했다.[1] 1235년 여름, 언드라시 2세는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여 프리드리히 공작에게 헝가리 약탈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요했다.[1]1234년 5월, 쿠르트네의 욜랑드와 사별한 언드라시 2세는 이탈리아의 에스테 가문 출신으로 30세 연하인 베아트리체 데스테를 왕비로 맞이했다. 베아트리체와의 재혼은 그와 아들들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같은 해 여름, 베레그 협정을 준수하지 않은 언드라시 2세는 보스니아 주교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았고, 언드라시 2세는 파문이 월권 행위에 해당한다며 교황에게 호소했다.
언드라시 2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8월 31일에 언드라시 2세와 그의 아들들은 성좌의 승인 없이는 파문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1] 언드라시 2세는 9월 21일에 사망하여[2] 에게르스 수도원에 묻혔다.[3]
3. 유산
벨러 3세와 그의 첫째 아내인 안티오케이아의 아그네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왕위는 벨러 4세가 승계받았다.[1]
4. 가족 관계
언드라시 2세는 벨러 3세와 그의 첫째 아내인 안티오케이아의 아그네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200년경 메라노 공작 베르톨트 3세의 딸 게르트루드(1213년 사망)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자녀 이름 | 출생-사망 | 배우자 | 비고 |
---|---|---|---|
마리아 | 1203년 - 1237년 | 불가리아 황제 이반 아센 2세 | |
벨러 4세 | 1206년 - 1270년 | 헝가리 국왕 | |
엘리자베트 | 1207년 - 1231년 | 튀링겐 방백 루트비히 4세 | 성 엘제베트(엘리자베트) |
칼만 | 1208년 - 1241년 | 할리치 공작, 슬라보니아 공작 | |
언드라시 | 1210년 - 1234년 |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의 딸 엘레나 | 할리치 공작 (1228년 - 1229년, 1231년 - 1233/4년) |
1215년에 라틴 황제 피에르 드 쿠르트네의 딸 욜랑드(1233년 사망)와 결혼하여 1녀를 두었다.
자녀 이름 | 출생-사망 | 배우자 | 비고 |
---|---|---|---|
욜란다 | 1215년 - 1251년 | 아라곤 왕 하이메 1세 |
1234년에 에스테 가문의 페라라 공작 알도브란디노 1세의 딸 베아트리체(1245년 사망)와 결혼하여, 언드라시 2세 사후에 1남을 낳았다.
자녀 이름 | 출생-사망 | 배우자 | 비고 |
---|---|---|---|
이슈트반 | 1236년 - 1271년 | 슬라보니아 공작, 언드라시 3세의 아버지 |
참조
[1]
서적
Archdeacon Thomas of Split: History of the Bishops of Salona and Spl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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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ypatian Codex II: The Galician-Volynian Chronicle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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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ハンガリー王国の再編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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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の十字軍 「ヨーロッパ」の北方拡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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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海大学出版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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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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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字軍大全 年代記で読むキリスト教とイスラームの対立
東洋書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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ビザンツとスラヴ
中央公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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