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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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부상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물물 교환을 매개하는 행상인의 일종이다. 조선시대에는 길드적 성격을 띠며,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으로 나뉘어 물품을 구분하여 취급했다. 보부상단은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상업 활동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군량 수송 등 국가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 전기에는 이성계의 지원을 받아 독점적인 전매권을 보장받았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83년 혜상공국 설치 이후, 보부상은 상리국으로 개칭되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참여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상무사로 개칭되는 등 변화를 겪었다.
보부상은 삼국시대 이래 농업생산자·가내 수공업자·시장상인 등과 소비자 사이의 물물 교환을 매개하던 행상인이 그 원형일 것으로 생각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공양왕 때 보부상을 시켜 소금을 운반했다는 기록이 정사에 등장한다. 고종 때 발행된 혜상공국서(惠商公局序)와 완문(完文)[2]에 따르면, 보부상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기자조선 때 부상들을 동원해 느티나무를 심게 한 데서 유래한다고 주장하며, 위화도 회군 때 보부상 회두인 토산인[3] 백달원이 800여 명의 보부상 회원을 동원해 군량미를 운반해 준 공로로, 이성계가 왕이 된 후 각종 행상권을 전담시켰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조정이 이들을 단속하고 지원하기 위해 '보부청(褓負廳)'을 설치하면서 공인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길드는 배타적인 자격 요건과 내부 서열, 독점적 상행위 권리를 특징으로 한다. 부상(負商, 등짐장수)은 나무그릇, 토기 등과 같은 저가의 생활용품을 대량으로 지게에 지고 다녔는데 어염(魚鹽)[4] · 토기 · 목기 · 목물(木物) · 수철(水鐵)[5] 등 다섯 물건의 전매권이 부여되었다. 이에 대해 '''보상'''(褓商, 봇짐장수)은 필묵, 금·은·동 제품 등의 정밀한 세공품(細工品)을 보자기에 싸서 휴대하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녔다. 부상과 보상은 두 개의 상단(商團)으로 나뉘어 있었고 취급하는 물품도 구분하여 서로 침범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보부상에게 부보상이라는 명칭을 하사하고,[7] 각종 행상권과 독점적인 전매권을 보장해줬다.[8] 보부상들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바탕으로 평시에는 상업에 종사했고, 전시에는 군량 수송 등 국가적인 임무를 수행했다.[8]
2. 기원
3. 보부상의 길드적 성격
보부상단은 일반적으로 몇 개의 군·현을 묶어 각 지점의 관할 단위로 삼아 임소(任所)를 두고, 임소의 우두머리인 본방(本房) 1인을 선출하여 사무를 총괄하게 했다. 본방들 중 접장(接長)을 선출하여 지점을 대표하게 했고, 한성부의 본부에서는 접장들 중 다시 도접장(都接長)을 뽑아 8도의 각 단위를 대표하게 했다. 접장을 거친 사람은 반수(班首)나 영위(領位)에 오르는데, 이는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조선 건국을 도왔던 백달원이 초대 도반수(都班首)에 오른 것이 시초이다.[6] 보부상단은 지역별로 정해진 기율에 따라 접장의 소임과 권한을 정해 행상들을 통솔했으며, 일종의 신분증인 도서(圖書)를 발급해 소속 행상들의 신분을 보장해줬다. 이를 통해 보부상단은 전국적 네트워크를 갖추고 영향력을 발휘했다.
보부상단의 길드적 성격을 보여주는 내부 상규는 다음과 같다.4. 조선시대 보부상의 활동
4. 1. 조선 전기
태조 이성계는 1392년 건국과 더불어 보부상에게 부보상이라는 명칭을 하사하고,[7] 독점적인 전매권을 보장해줬다.[8] 보부상들은 전국적 네트워크를 배경으로 평상시에는 상업에 종사했고, 전시에는 군량 수송 등 국가적 임무를 수행했다.[8]
4. 2. 조선 중기 이후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권율에게 양식을 조달했다.[1]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 양곡을 조달했다.[2] 홍경래의 난 때는 의주 접장 허항(許沆)이 부상(負商)을 이끌고 진압에 협력했다.[3] 병인양요 때는 강화도에 군량을 운반했다.[4]
5. 대한제국 시기 보부상의 변화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군량을 운반했다. 보부청이 설치되어 그동안 따로 관리되던 부상단과 보상단을 통합 관리했으며, 고종의 형인 이재면이 초대 청무(廳務)를 맡았다.[1]
1883년(고종 20년) 대원군 일파가 쫓겨나고 정부 조직이 개편되면서 혜상공국이 설치되었는데, 보부청도 그 아래 통합되어 군국아문의 관할을 받게 되었다.[1]
1885년(고종 22년) 혜상공국은 상리국으로 개칭되었고, 부상을 좌단(左團), 보상을 우단(右團)으로 새로 명명했다.[1]
1894년(고종 31년)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엄순영(嚴順榮)·송학헌(宋鶴憲)·최해승(崔海昇) 등이 보부상 백여 명을 동원해서 조선 관군과 일본 연합군의 길잡이가 되어 난을 진압하는데 일조했다.[1]
1898년(광무 2년) 황국협회가 만들어지면서, 보부상 관리 업무는 혜상공국에서 황국협회로 이관되었다. 독립협회의 만민 공동회를 습격하여 독립협회와 함께 해산되었다.[1]
1899년(광무 3년) 상리국의 좌·우단은 상무사에 이속되고 좌단은 좌사, 우단은 우사로 개칭했다. 후에 상무사는 진흥회사로 개칭됐고 보부상 활동 확장을 꾀했으나 이미 정치경제적 환경은 크게 변한 뒤였다.[1]
6. 관련 문화재
울산 보부상단 문헌자료는 울산광역시의 민속문화재 제1호이다.
참조
[1]
문서
표준국어대사전
[2]
문서
한성부완문(漢城府完文)
1879
[3]
문서
황해도 토산현(兎山縣)
[4]
문서
어염(魚鹽)
[5]
문서
수철(水鐵)
[6]
뉴스
역사속 경제위인 - 보부상과 백달원(하)
http://ahaeconomy.co[...]
아하경제
2011-01-16
[7]
웹인용
부보상, 한국의 전통행상
http://newsplus.chos[...]
조선닷컴
2010-05-28
[8]
웹인용
[金요일에 보는 경제사]조선 건국과 멸망의 주역이었던 상인, 보부상
https://www.asiae.co[...]
아시아경제
2017-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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