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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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복성군은 조선 중종의 서자이며, 경빈 박씨의 아들로, 1509년에 태어났다. 1517년 복성군에 봉해졌으나, 1527년 경빈 박씨가 연루된 작서의 변으로 인해 군호를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불법 행위를 저지르다 김안로 등에 의해 상주로 이배되었고, 정광필 등 그를 옹호하던 인물들 또한 처벌받았다. 결국 1533년 사사되었으며, 이후 김안로의 조작이 밝혀져 신원되었다. 명종 시대에 후사가 정해졌으며, 선조 때 의안군과 신성군이 복성군의 봉사손으로 지정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에 있으며, 인종 때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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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성군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 미 (복성군) |
휘 | 미(嵋), 학수(鶴壽 / ) |
작위 | 조선 중종의 왕자 |
출생일 | 1509년 9월 15일 (음력) |
사망일 | 1533년 5월 26일 (음력) |
시호 | 정민(貞愍) |
가족 관계 | |
부친 | 중종 |
모친 | 경빈 박씨 |
배우자 | 군부인 파평 윤씨 |
자녀 | 1녀 (이운환) |
기타 정보 |
2. 생애
1509년 9월 28일(음력 9월 15일) 중종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숙의 박씨이다. 어릴 때 이름은 학수(鶴壽)였다.[2] 본래 서성군(瑞城君)이었으나, 1517년 복성군으로 개봉되었다.[3] 이후 현감 증 찬성 윤인범(尹仁範)의 딸과 혼인하였다. 중종은 특별히 여희림을 왕자사부로 임명하여 복성군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4]
1518년 6월, 중종은 자신이 즉위 전에 살던 집을 복성군에게 내려주고, 다시 증축해 주었다. 사간원은 이러한 조치가 과분하다고 비판했지만, 중종은 듣지 않았다. 복성군은 입궐하여 주안상이 나올 때, 누군가 술잔을 권하면 술을 마시고 술잔을 자신의 도포자락에 넣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다른 술잔을 가져다 따라서 주곤 했다.
1527년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경빈 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그녀는 세자의 생일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 귀, 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의 북정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하는 사건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경빈 박씨는 혐의를 받아 작호를 빼앗기고 폐서인이 되어 상주의 본가로 내쳐졌으며, 복성군도 군호를 삭탈당하였다.[5] 경빈 처소의 시녀들은 수십 차례의 고문을 당하고 자백을 종용당했다.
복성군은 충청도 태안으로 유배되었으나, 그곳에서 자숙하지 않고 솔개 수십 마리를 잡아 다리에 헝겊을 붙들어 매어 날려보냈다. 헝겊에는 '이 솔개는 날아다니는 곳은 모두 내 땅이며 그곳 백성은 모두 나의 백성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유배지에서도 충청도 이남에서 오는 공납물자를 빼앗아 압수하기도 하였다. 결국 김안로 등에게 빌미를 잡혀 다시 배소가 옮겨져, 경상북도 상주로 이배되었다.[5]
한편 복성군의 처벌을 반대하던 정광필은 의정부영의정에서 해임되었고, 복성군을 가르쳤던 왕자사부 여희림 등도 복성군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세자인 인종은 복성군을 원망하지 않고 그를 석방해달라는 상소를 부왕 중종에게 올렸으며, 복성군의 어린 딸과 두 여동생에게 자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5]
1533년 어머니 경빈 박씨가 사사된 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복성군의 제거를 주장했으며, 이를 거부하던 중종도 결국 복성군의 사사 주청을 받아들였다. 1533년 6월 18일(음력 5월 26일) 복성군은 사사되었다.[5] 복성군이 사사된 뒤, 두 누이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도 작호가 박탈되어 폐서인되었으며, 혜순옹주의 남편 광천위 김인경은 유배되었다.[5] 그러나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사건을 조작한 진범으로 밝혀져 복성군은 신원되었다.[6]
명종은 복성군의 후사로 덕흥군의 3남 하성군을 세웠었다. 그러나 하성군이 왕통을 계승하여 명종의 후계자로 왕이 되자, 해안군 이기의 여섯째 아들 오강군 이건을 양자로 정했고, 오강군도 아들이 없자 선조는 다시 복성군의 후사로 1580년 의안군을 지명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뒤에 다시 신성군을 복성군의 봉사손으로 정했다. 선조는 생부 덕흥군 이초는 대원군으로 추존했어도 양아버지격인 복성군은 추존하지 않았다.
복성군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접동면 궁동리(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 33-47 또는 연평리 362) 산 봉화언덕(烽火峴) 병좌에 조성되었다. 복성군의 부인 파평윤씨의 묘는 양주 접동면 궁동리 능동(陵洞) 부락 자좌에 안장되었다. 인종 즉위 후 복권되면서 합장되었다. 이때 인종의 명으로 황준량 등의 관료들이 만시를 짓기도 했다.
2. 1. 생애 초기
1509년 9월 28일(음력 9월 15일) 중종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숙의 박씨이다. 어릴 때 이름은 학수(鶴壽)이다.[2] 본래 서성군(瑞城君)이었으나, 1517년 복성군으로 개봉되었다.[3] 이후 현감 증 찬성 윤인범(尹仁範)의 딸과 혼인하였다. 중종은 특별히 여희림을 왕자사부로 임명하여 복성군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4]1518년 6월, 중종은 자신이 즉위 전에 살던 집을 복성군에게 내려주고, 다시 증축해 주었다. 사간원은 이러한 조치가 과분하다고 비판했지만, 중종은 듣지 않았다.
복성군은 입궐하여 주안상이 나올 때, 누군가 술잔을 권하면 술을 마시고 술잔을 자신의 도포자락에 넣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다른 술잔을 가져다 따라서 주곤 했다.
2. 2. 작서의 변과 최후
장경왕후가 세자를 낳고 죽은 뒤 경빈 박씨는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야망을 가졌다. 1527년 세자의 생일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의 북정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경빈 박씨가 혐의를 받아 작호를 빼앗기고 폐서인이 되어 상주의 본가로 내쳐졌다. 이때 경빈 처소의 시녀들은 수십 차례의 고문을 당하고 자백을 종용당한다. 복성군도 군호를 삭탈당하였다.[5]복성군은 충청도 태안으로 유배되었으나 그곳에서 자숙하지 않고 솔개 수십 마리를 잡아서 다리에 헝겊을 붙들어 매어 날려보냈다. 헝겊에는 '이 솔개는 날아다니는 곳은 모두 내 땅이며 그곳 백성은 모두 나의 백성이다'라고 적어놓았다. 한편 유배소에서도 그는 충청도 이남에서 오는 공납물자를 빼앗아 압수하기도 하였다. 결국 김안로 등에게 빌미를 잡혀 다시 배소가 옮겨져, 경상북도 상주로 이배되었다.[5]
한편 복성군의 처벌을 반대하던 의정부영의정 정광필은 복성군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영의정에서 해임되었고, 복성군을 가르쳤던 왕자사부 여희림 등도 복성군에 연루시켜 유배되었다. 한편 세자인 인종은 원망하지 않고 그를 석방해달라는 상소를 부왕 중종에게 올리기도 했고, 복성군의 어린 딸과 두 여동생에게 자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5]
1533년 어머니 경빈 박씨가 사사된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복성군의 제거를 주장했으며 이를 거부하던 중종도 결국 복성군의 사사 주청을 받아들였다. 1533년 6월 18일(음력 5월 26일) 사사되었다.[5]
2. 3. 사후
복성군이 사사된 뒤, 두 누이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도 작호가 박탈되어 폐서인되었으며 혜순옹주의 남편 광천위 김인경은 유배되었다.[5] 하지만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사건을 조작한 진범으로 밝혀져 신원되었다.[6]명종은 복성군의 후사로 덕흥군의 3남 하성군을 세웠었다. 그러나 하성군이 왕통을 계승하여 명종의 후계자로 왕이 되자 해안군 이기의 여섯째 아들 오강군 이건을 양자로 정했고, 오강군도 아들이 없자 선조는 다시 복성군의 후사로 1580년 의안군을 지명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뒤에 다시 신성군을 복성군의 봉사손으로 정했다.
그러나 선조는 생부 덕흥군 이초는 대원군으로 추존했어도 양아버지격인 복성군은 추존하지 않았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접동면 궁동리(현, 남양주시 진접읍 연평리 33-47 또는 연평리 362) 산 봉화언덕(烽火峴) 병좌에 조성되었다. 복성군의 부인 파평윤씨의 묘는 양주 접동면 궁동리 능동(陵洞) 부락 자좌에 안장되었다. 인종 즉위 후 복권되면서 합장되었다. 이때 인종의 명으로 황준량 등의 관료들이 만시를 짓기도 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왕 | 중종 | |
생모 | 경빈 박씨 | |
여동생 | 혜순옹주 | |
여동생 | 혜정옹주 | |
정부인 | 군부인 파평 윤씨 | 윤인범(尹仁範)의 딸 |
딸 | 이운환(李雲環)[7] | |
사위 | 전주 최씨 최예수(崔禮秀) | |
외손자 | 최기(崔玘) | |
외손자 | 최무(崔珷) | |
양자 | 하성군 | 입승대통으로 인한 파양[8] |
양자 | 오강군 이건(李鍵) | 이복 남동생 해안군의 6남 |
양손자 | 의안군 이성(李珹) | 선조의 3남 |
양손자 | 신성군 이후(李珝) | 선조의 4남 |
4. 대중문화
참조
[1]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중종 9권, 4년(1509년) 9월 15일 3번째기사
1509-09-15
[2]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중종 26권, 11년(1516년) 11월 15일 5번째기사
1516-11-15
[3]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중종 28권, 12년(1517년) 6월 28일 3번째기사
1517-06-28
[4]
문서
여희림
1533
[5]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중종 74권, 28년(1533년) 5월 26일 5번째 기사
1533-05-26
[6]
웹인용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복성군
http://people.aks.ac[...]
2012-02-03
[7]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인종 1권, 1년(1545년) 1월 25일 2번째기사
1545-01-25
[8]
문서
이복 남동생 덕흥대원군의 3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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