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람 지퍼스
1. 개요
볼프람 지퍼스는 독일의 나치 친위대(SS) 장교로, 아넨에르베의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나치 정권의 인체 실험에 깊이 관여했다. 1905년 힐데스하임에서 태어나 반유대주의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나치당에 입당한 후 엑스터른슈타이네 재단을 맡고 아넨에르베에서 실무를 담당했다. 특히, 아우구스트 히르트의 인종 연구를 위해 112명의 유대인 수감자를 살해하고 인골을 수집하는 데 관여했다.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8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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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된 나치 강제 수용소 관련자 -
카를오토 코흐
카를오토 코흐는 나치 친위대 대령이자 작센하우젠, 부헨발트, 마이다네크 강제 수용소 소장을 역임하며 부패와 횡령 혐의로 친위대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독일 군인이다. -
뉘른베르크 미군 군사재판 사형수 -
파울 블로벨
파울 블로벨은 나치 친위대 장교로서 유대인 학살에 가담하고 존더코만도 4a의 지휘관으로 바비 야르 학살을 조직했으며,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
뉘른베르크 미군 군사재판 사형수 -
카를 브란트
카를 브란트는 나치 독일의 의사로서 아돌프 히틀러의 주치의를 역임하고 T4 작전을 주도하며 인체 실험을 발안하여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
과학적 인종주의자 -
폴 브로카
폴 브로카는 뇌 기능 국재화 연구의 선구자이자 프랑스의 외과의, 인류학자였지만, 그의 인류학 연구는 과학적 인종주의적 편견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으며, 특히 브로카 영역 연구는 신경학 발전에 기여했으나, 두개골 측정을 통한 인종 간 지능 비교 연구는 과학적 인종주의 논쟁의 사례로 비판받는다. -
과학적 인종주의자 -
한스 아이젠크
한스 아이젠크는 생리학적, 유전적 요인에 기반한 성격 이론을 제시하고 외향성, 신경증적 경향, 정신병질의 세 가지 주요 성격 차원으로 구성된 인격 모델과 아이젠크 성격 검사(EPQ)를 개발한 저명한 영국 심리학자이다.
2. 초기 생애와 민족주의 활동
볼프람 지퍼스는 1905년 하노버 주 (현재 니더작센 주) 힐데스하임에서 개신교 교회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쳄발로, 오르간,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독일 바로크 음악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학생 시절부터 반유대주의 단체인 "독일 민족 방위 동맹(Deutschvölkischer Schutz- und Trutzbund, DSTB)"에 참여하여 과격한 활동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 후, 세일즈맨으로 일하면서 슈투트가르트의 전문 대학에 다니며 역사, 철학, 종교를 공부했다. 이후 민족주의적 귀농 운동인 아르타만 연맹에서 활동했다.
3. 나치당 입당과 아넨에르베 활동
지퍼스는 1929년 나치당에 입당했다. 1933년 하인리히 힘러가 토이토부르크 숲의 엑스터른슈타인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한 Externsteine-Stiftung("엑스터른슈타인 재단")을 이끌었다. 1935년 SS에 입대했다.
3.1. 아넨에르베와 인체 실험
1935년 친위대(SS)에 입대한 지퍼스는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아넨에르베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넨에르베 운영의 실질적인 책임자였으며, 전쟁 말까지 SS-Standartenführer 계급으로 승진했다.
1943년 지퍼스는 Institut für Wehrwissenschaftliche Zweckforschung(군사 과학 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광범위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수행했다. 또한 아우구스트 히르트의 Reichsuniversität Straßburg에서의 연구를 위해 두개골과 골격 수집을 지원했으며, 이 과정에서 112명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사진 촬영 및 인류학적 측정을 받은 후 선택되어 살해되었다.
4. 재판과 처형
지퍼스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재판을 받았다. 기자 윌리엄 L. 쉬러는 그의 "굵고 먹물처럼 검은 수염" 때문에 그를 "나치 푸른 수염"이라고 불렀다. 아넨에르베의 일부로 설립된 군사 과학 연구소는 뉘른베르크 검찰에 의해 인체 실험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지퍼스는 최고 행정 책임자로서 범죄 실험을 적극적으로 돕고 장려한 혐의를 받았다.
지퍼스는 국제 군사 재판소에 의해 범죄 조직(SS) 구성원으로, 전쟁 범죄 및 반인륜적 범죄 실행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다. 그는 변호 과정에서 1933년 초부터 히틀러와 힘러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 반 나치 저항 운동의 일원이었으며, 힘러에게 접근하여 그의 행적을 관찰하기 위해 아넨에르베의 관리자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저항 지도자의 조언에 따라 나치 정권 전복에 도움이 될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그 직책에 머물렀다고 주장했다.
1947년 8월 20일 의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지퍼스는 1948년 6월 2일 바이에른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5. 영향
1980년대 러시아의 극우 정치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은 볼프람 지퍼스를 언급하며 "한스 지버스"라는 알터 에고를 채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