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명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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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 명원제는 북위 도무제의 장남으로, 409년 이복 동생 탁발소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당한 후 황위에 올랐다. 그는 최굉, 최호 등 한인 관료를 등용하여 통치 기구를 정비하고, 414년에는 후진, 북연, 동진, 유연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유연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유송과의 전쟁을 벌여 황하 이남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으나, 423년 연금술 약 중독으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30편의 문학 작품을 저술했으며, 그의 아들 탁발도가 북위 태무제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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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명원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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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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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拓跋嗣 (Tuòbá Sì, 퉈바 쓰) |
묘호 | 태종(太宗) |
시호 | 명원황제(明元皇帝) ("이해심 있고 식별력이 있는") |
출생 | 392년 |
사망 | 423년 12월 24일 |
아버지 | 북위 도무제 |
어머니 | 선목황후 |
배우자 | 소애황후 밀황후 |
자녀 | 북위 태무제 탁발피 탁발미 탁발범 탁발건 탁발숭 탁발준 무위공주 십평공주 농서공주 |
매장지 | 운중 금릉 |
씨족 | 탁발 |
통치 | |
즉위 | 409년 11월 10일 |
퇴위 | 423년 12월 23일 |
이전 | 북위 도무제 |
이후 | 북위 태무제 |
연호 | |
연호 | 영흥(永興) 409–413 신서(神瑞) 414–416 태상(泰常) 416–423 |
2. 생애
392년, 탁발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유귀인은 탁발사가 태자가 되기 전에 대·북위의 관습에 따라 도무제로부터 죽음을 받았다. 409년, 아버지 도무제가 이복 동생 탁발소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탁발소를 토벌하고 즉위했다.
명원제는 한인 관료인 최굉·최호를 기용하여 통치 기구 정비에 힘썼다. 아버지의 독재적인 통치 방식과는 달리, 중요한 결정에 대해 8명의 관료 회의에서 조언을 구했다.[7] 국사를 처리하는 데 능숙했으며, 사법 집행은 엄격했지만, 결정에는 관용과 관대함을 보이기도 했다.[7]
414년, 후진, 북연, 동진, 유연과 평화 관계를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북연과는 갈등이 발생했다. 415년 북위 북부 지역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수도 이전을 고려했으나, 최호 등의 조언으로 평성에 유지했다.
418년 북연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3] 422년 한식산 복용으로 심각한 질병에 시달렸고,[7] 같은 해 유송을 공격하여 423년 허난성 대부분과 산둥성 서부를 장악했다. 423년 겨울, 중국 연금술 약품 중독으로 사망했고, 태자 도가 태무제로 즉위했다.
2. 1. 초기 생애 (392년 ~ 409년)
391년, 북위 도무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09년, 아버지 도무제가 자신의 이복동생 탁발소에 의해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탁발소를 토벌하고 즉위한다.[1]탁발사는 아버지 탁발규가 386년에 북위를 건국한 후, 392년에 태어났다. 탁발규가 경쟁국인 후연의 영토 대부분을 정복하고 399년에 황제 칭호를 주장하기 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탁발규의 총애를 받던 후궁 유씨로, 철불 추장 유두권(劉頭眷)의 딸이었다. 그는 수도 운중(雲中, 현대 후허하오터, 내몽골)에서 태어났다. 탁발규의 맏아들이었고, 아들이 늦게 태어난 것을 매우 기뻐한 아버지가 대사면령을 선포했다고 전해진다.[1] (북위의 공식 역사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탁발규는 21세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생애에 대한 대안적 버전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거일 수 있다.)[1] (경쟁국인 유송 왕조에서 편찬한 ''송서''에는 탁발사가 탁발규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 그러나, 탁발사가 ''위서''에 제시된 것처럼 탁발규의 맏아들이라는 점과 일치하지 않는 점이 없기 때문에, ''위서''의 기록이 일반적으로 정확한 것으로 간주된다.)[1]
탁발사가 성장하면서, 그는 지혜롭고 자애로운 젊은이였으며, 그의 행동은 모두 적절한 예법에 따랐다고 전해진다.[1] 반면, 그의 맏이 동생 탁발소는 폭력적인 젊은이로 묘사되었으며, 종종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약탈하고 맹렬하게 동물을 공격했다.[1] 탁발사는 꾸짖음으로 동생의 행동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탁발소는 변하지 않았고, 그래서 탁발사는 동생을 두려워하며 살았다.[1] 403년, 황제(도무제)가 된 탁발규는 그를 제나라 왕으로 봉했다.[1] 409년, 도무제는 탁발사를 황태자로 책봉하려 했지만, 후계자가 결정되면 그의 어머니를 죽여야 한다는 탁발 전통에 따라, 도무제는 유씨에게 자결을 강요했다.[1] 그렇게 하기 전이나 후에, 그는 탁발사를 불러 이 전통이 한 무제가 어린 황제에게 어머니의 과도한 영향력을 피하기 위해 그의 총애를 받던 후궁 조씨(한 소제의 어머니)를 죽인 것과 같은 논리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1] 탁발사가 아버지 앞에서 물러난 후, 어머니에 대한 애정 때문에 크게 슬퍼했다.[1] 이를 들은 도무제는 그를 다시 궁으로 불렀고, 도무제는 말년에 종종 심한 편집증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기 때문에, 새로운 황태자의 측근들은 그에게 궁에 가지 말고 시골에 숨으라고 제안했다.[1] 탁발사는 이에 동의하고 398년에 도무제가 수도를 옮긴 평성에서 도망쳤다.[1]
한편, 도무제는 탁발소의 죄로 인해 탁발소의 어머니 하란씨를 투옥하고 처형할 계획을 세웠다.[1] 하란씨는 아들에게 그녀를 구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1] 이에 탁발소는 도무제를 암살한 후 황제가 되려고 시도했고, 군대를 장악하려 했다.[1] 이 소식을 들은 탁발사는 평성으로 돌아왔지만, 서서히 지지자를 모으면서 몸을 숨겼다.[1] 탁발소는 그를 찾아 죽이려 했지만, 황실 근위병들은 점차 탁발사의 편으로 기울었고, 황실 근위병들은 탁발소를 체포하여 탁발사에게 데려왔다.[1] 탁발사는 탁발소, 하란씨, 그리고 탁발소의 측근들을 처형했다.[1] 그 후, 그는 명원제로서 황위에 올랐다.[1]
2. 2. 초기 통치 (409년 ~ 414년)
409년, 아버지 도무제가 이복동생 탁발소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탁발소를 토벌하고 북위의 황제로 즉위했다.[7]명원제는 아버지의 독재적인 통치 방식과는 달리, 중요한 결정에 대해 8명의 관료로 구성된 회의에서 조언을 구하여 다양한 의견을 듣고 정보에 입각한 조치를 취하고자 했다.[7] 이 회의는 대부분 선비족 출신으로 구성되었지만, 한족 등 다른 민족들도 포함되었다.[7]
명원제가 즉위했을 당시, 도무제의 말년의 편집증과 폭력은 북위에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7] 관료들은 나태하고 오만했으며, 법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범죄가 만연하여 범죄자들이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행동했다.[7] 명원제는 백성들의 소송을 듣고 법적 사건이 공정하게 판결되도록 하는 관리를 임명하고, 이전에 파면되었던 관료들을 복직시켰으며,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정부 구호 조치를 시행하여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했다.[7]
명원제는 국사를 처리하는 데 능숙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사법 집행을 담당하는 관료들은 실수를 피하기 위해 법 집행에 엄격했다.[7] 그러나 명원제는 결정에 있어서 관용과 관대함을 보이기도 했다.[7] 예를 들어, 안통(安同) 대신이 허가 없이 백성을 강제로 노동에 동원했을 때, 다른 대신들은 그를 엄하게 처벌할 것을 제안했지만, 명원제는 안통의 동기가 백성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그를 사면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원제는 조사에 있어서 통찰력이 있었고, 그의 기준은 매우 엄격하여 관료들이 자주 처벌을 받았다.[7] 413년, 핵심 고문 중 한 명인 탁발굴(拓拔屈)이 하가 지원하는 반군에게 크게 패배한 후, 산시성 지사로 강등되어 술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하자, 명원제는 그를 처형했다.[7]
410년, 명원제는 고문 중 한 명인 바바송(拔拔嵩)을 유연 공격에 보냈고, 바바송이 유연군에게 포위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를 구원했다.[7]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종종 수도 평성(平城)을 떠나 북쪽과 동쪽 전선(북연 및 유연)의 방어 상태를 점검하여 국가가 적에 대해 제대로 방어될 수 있도록 했다.[7] 초기 통치의 또 다른 특징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자주 소집해야 했다는 것이다.[7]
411년, 북위에 잦은 홍수와 가뭄이 발생하자, 명원제는 과도한 궁녀들을 내보내 궁정 지출을 줄였고, 그들이 미혼 남성과 결혼하여 노동력과 인구를 늘리도록 명령했다.[7] 그의 아버지처럼, 명원제의 통치는 평성을 수도로 확장하고 일반적인 국가 기반 시설을 건설하는 건설 프로젝트를 위임했다는 특징이 있다.[7]
2. 3. 중기 통치 (414년 ~ 418년)
414년, 명원제는 후진, 북연, 동진, 유연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후진 및 동진과의 외교는 대체로 성공적이었지만, 북연 황제 풍발은 명원제의 사신 호뉴우 시먼(忽忸于什門)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요구하여 갈등이 발생했다. 풍발은 호뉴우를 억류하고 북위와의 관계를 거부했다. 유연과의 외교는 처음에는 성공적인 듯 보였으나, 415년 새해 무렵 유연의 가한 위구려 대단(郁久閭大檀)이 침략했다. 명원제는 위구려 대단을 그들의 영토까지 쫓아냈지만, 대혜 진(達奚斤)을 보내 추격하게 했을 때 북위군은 혹독한 날씨로 인해 동상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는 유연이 공격하면 북위가 반격하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패턴의 시작이었다.414년 말, 명원제는 최호(최굉의 아들)에게 ''주역''과 ''홍범''을 가르치도록 했다. 명원제는 신비주의와 점에 매료되어 최호에게 예언을 요청했고, 그 예언은 종종 적중했다. 최호는 명원제의 신뢰를 얻어 중요한 결정에 대한 조언을 하게 되었다.
414~415년, 명원제는 관리들에게 적절한 급여가 지급되지 않아 만연한 부패에 좌절했다. 414년, 그는 백성들이 궁궐에 가서 관리들의 불법 행위를 보고할 수 있도록 명령했고, 관리들의 재산을 검사하여 불법 재산을 압수하도록 했다. 415년, 그는 지방 관리들의 태만을 이유로 세금을 제대로 징수하지 않은 자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이러한 정책이 부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의 후계자 태무제의 치세에도 부패는 여전히 주요 문제였다.
415년, 북위 북부 지역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명원제는 수도를 남쪽의 예성(鄴城, 현재 한단, 허베이)으로 옮기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최호와 관리 주담(周澹)은 선비족의 수적 열세가 한족에게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수도를 평성에 유지하도록 조언했다. 대신 가난한 선비족들을 허베이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기근 이후, 명원제는 토지 경작을 장려하는 조칙을 내렸고, 이후 농업 상황이 개선되어 가축 경제가 번성하게 되었다.
415년 겨울, 후진 황제 요흥은 평화 협정에 따라 그의 딸 서평 공주를 북위에 보내 명원제와 결혼시켰다. 명원제는 그녀를 황후에 걸맞은 의식으로 맞이했지만, 탁발의 관습에 따르면 금 조각상을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후궁만이 황후가 될 수 있었다. 서평 공주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므로 명원제는 그녀를 황후로 책봉하지 않았지만, 궁궐 안에서는 황후로 존경했다.
415~416년, 명원제는 상당과 하내 군의 흉노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초기 진압 노력은 실패했지만, 416년, 최굉의 조언에 따라 장군 이첨 건(乙旃建)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많은 반란군을 포로로 잡았다.
416년, 동진의 장군 유유는 후진을 멸망시키기 위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유유의 군대 중 장군 왕중덕(王仲德)이 지휘하는 함대가 북위의 황하 남쪽 전초 기지인 활태(滑台, 현재 안양, 허난)에 접근했다. 북위 장군 우치 건(尉遲建)은 동진 군대를 두려워하여 활태를 포기하고 황하 북쪽으로 도주했다. 명원제는 우치를 처형하고 사신을 보내 유유와 왕중덕을 꾸짖었고, 그들은 공격 대상이 북위가 아닌 후진이며 작전이 끝나면 도시를 반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동진은 실제로 활태를 반환하지 않았고, 북위는 422년까지 황하 남쪽에 주요 세력을 다시 두지 못했다.
416년, 장군 고누관 빈(庫傉官斌)이 북연에서 북위로 귀순했다가 다시 북연으로 돌아가자, 명원제는 이를 구실로 북연을 공격하여 고누관 빈과 그의 친척 고누관 창(庫傉官昌), 고누관 제(庫傉官提)를 죽였다.
동진 군대는 빠르게 후진의 주요 도시 낙양을 점령하고 후진의 수도 장안으로 향했다. 417년 봄, 후진 황제 요홍(요흥의 아들)은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명원제는 회의를 소집하여 유유의 진격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지 여부를 고려했다. 조언자 대부분은 유유가 북위를 공격할 의도가 있는지 우려하여 명원제가 유유의 군대를 요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최호는 이것이 북위를 동진의 공격 대상으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명원제는 부분적으로 동의했지만, 바바 송(巴巴嵩)이 지휘하는 약 10만 명의 군대를 황하 북쪽에 파견하여 전투를 준비하도록 했다. 동진의 배가 바람에 의해 북쪽 강둑으로 날려오면 북위군은 배를 나포하고 승무원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으며, 동진 군대가 북쪽 강둑에 상륙하면 일시적으로 후퇴했다가 다시 배에 탑승하자마자 방어 태세를 재구축했다. 유유는 장군 정오(丁旿)를 보내 북쪽 강둑에 상륙시켜 북위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로써 명원제의 후진 구원 시도는 끝났고, 작전 기간 동안 더 이상의 동진/북위 전투는 없었다. 명원제는 유유의 길을 막을 계획이었지만, 유유는 417년 가을까지 장안을 점령하고 후진을 멸망시켜 명원제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유유에 반대하여 후진으로 피신한 많은 전직 동진 관료들이 북위로 도망쳤고, 명원제는 요씨 황족의 일원을 구출하여 평성으로 데려오는 모든 사람에게 큰 보상을 내리도록 명령했다.
2. 4. 후기 통치 (418년 ~ 423년)
418년, 명원제는 북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여 북연의 수도 합룡(오늘날 랴오닝성 진저우)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다.[3]명원제는 말년에 정기적인 세금 외에 백성들에게서 추가 자원을 징수하기도 했지만, 홍수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여러 차례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4] 또한 순행했던 지역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세금을 감면하거나 면제하기도 했다.[4] 이 시기에는 풍년이 들고 상대적으로 안정되었으며, 417년 이후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민중 봉기는 없었다.[4]
명원제 통치 기간 동안, 혼란을 겪고 있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북위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북위로 귀순하거나 이주해왔고, 명원제는 이들을 받아들였다.[5] 예를 들어 후진이 멸망한 후 여러 가문들이 북위에 충성을 맹세했고, 명원제는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구찬(寇讚)을 임명했다.[5] 이들은 결국 수만 가구로 불어났고, 명원제는 그들을 다스리기 위해 남영군(南永郡)이라는 새로운 행정 구역을 설치했으며, 북위 남쪽 국경으로 들어오는 난민의 수가 이로 인해 세 배로 증가했다고 묘사되어 있다.[5]
420년, 명원제의 부인 요씨가 사망하자, 명원제는 생전에 그녀에게 작위를 내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사후에 황후로 추존했다.[6]
422년, 명원제는 심각한 질병에 시달렸는데, 이는 그가 수년간 복용한 인기 있는 연금술 약인 한식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7] 그는 최호에게 자신의 죽음 이후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자문을 구했다.[7] 최호는 그가 회복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그의 맏아들인 14세의 탁발도를 태평왕으로 책봉하고, 권한의 일부를 태자에게 넘겨 자신의 부담을 덜 것을 조언했다.[7] 발발송 또한 동의했고, 명원제는 탁발도를 태자로 책봉하고, 나아가 태자 도가 황위에 올라 부황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다.[7] 그는 핵심 측근인 발발, 최호, 대계진, 안지동, 구목릉관, 구돈퇴를 태자의 보좌관으로 임명했다.[7] 이 시점부터 대부분의 문제는, 특히 내정 문제는 태자 도가 처리하고, 명원제는 중요한 문제만 처리했다.[7]
422년 후반, 유송이 420년에 동진의 왕위를 찬탈하고 유송을 건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명원제는 유송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회의를 소집하여, 최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송으로부터 황하 이남의 세 주요 도시인 낙양, 호뢰, 활태를 공격하여 점령할 계획임을 조언자들에게 알렸다. 그는 대계를 유송을 공격할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대계는 먼저 활태를 포위했지만, 신속하게 함락시키지 못하자 명원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대계를 지원했다. 그는 또한 태자 도에게 군대를 이끌고 북쪽 국경으로 가서 유연의 공격을 방어하도록 했다. 이후 활태가 함락되었고, 대계는 호뢰와 낙양으로 진격했다. 한편, 명원제는 또한 의참견과 장군 어청, 여대비, 보기를 동쪽으로 보내 오늘날 산둥성 서부의 여러 군현을 점령했다. 그러나 유송의 청주(오늘날 산둥성 중부 및 동부)의 다른 도시들이 함락되었지만, 북위군은 청주의 수도인 동양(오늘날 산둥성 칭저우)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결국 식량 부족과 다수의 병사들이 질병에 걸려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북위군은 또한 유능한 유송 장군 모덕조가 방어하는 호뢰 포위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동안 423년 봄에 낙양과 허창(오늘날 허난성 쉬창)을 점령하여 호뢰에 대한 유송의 구원군이 올 길을 차단했다. 423년 여름, 호뢰가 함락되었다. 이로써 전쟁은 종식되었고, 북위는 오늘날 허난성 대부분과 산둥성 서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명원제는 북위에 대한 모덕조의 맹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호뢰를 방어하기 위해 그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존경했고, 그래서 그에게 전형적인 행동으로 호뢰 수비대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423년, 명원제는 또한 유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북쪽 국경에 성벽을 건설하는 대규모 건설 사업을 시작했다.
423년 겨울, 명원제는 중국 연금술 약품 중독으로 사망했다. 태자 도가 태무제로 즉위했다.
훗날 위서는 명원제의 중국 학문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다. 그는 평생 동안 30편의 문학 작품을 저술했다.
3. 외교 관계
415년 겨울, 요흥은 평화 협정에 따라 그의 딸 서평 공주를 북위에 보내 명원제와 결혼시켰다. 명원제는 그녀를 황후에 걸맞은 의식으로 맞이했지만, 탁발의 관습에 따라 금 조각상을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후궁만이 황후가 될 수 있었다. 서평 공주는 이를 실패하여, 명원제는 그녀를 황후로 책봉하지 않았지만, 궁궐 안에서는 그녀를 아내이자 황후로 존경했다.
416년, 진의 장군 유유는 후진을 멸망시키기 위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유유의 군대 중 하나인 장군 왕중덕(王仲德)이 지휘하는 함대가 북위의 황하 남쪽에 있는 유일한 주요 전초 기지인 활태(滑台, 현재 안양)에 접근했다. 북위의 장군 우치 건(尉遲建)은 진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활태를 포기하고 황하 북쪽으로 도주했다. 명원제는 우치를 처형한 후 사신을 보내 유유와 왕중덕을 꾸짖었고, 그들은 공격 대상이 북위가 아닌 후진이며, 작전이 끝나면 도시를 반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진은 실제로 활태를 반환하지 않았고, 북위는 422년까지 황하 남쪽에 주요 세력을 다시 두지 못했다.
진 군대는 빠르게 후진의 주요 도시 낙양을 점령한 후 후진의 수도 장안으로 향했다. 417년 봄, 후진 황제 요홍은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명원제는 회의를 소집하여 유유의 진격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지 여부를 고려했다. 조언자 대부분은 유유가 실제로 북위를 공격할 의도가 있는지에 대해 우려하여 명원제가 유유의 군대를 요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최호는 이것이 북위를 진의 공격 대상으로 만들 것이라고 반대했고, 명원제는 부분적으로 동의했지만 여전히 바바 송(巴巴嵩)이 지휘하는 약 10만 명의 군대를 황하 북쪽에 파견하여 전투를 준비하도록 했다. 진의 배가 바람에 의해 북쪽 강둑으로 날려오면, 북위군은 그 배를 나포하고 승무원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으며, 진 군대가 북쪽 강둑에 상륙하면 북위군은 일시적으로 후퇴한 다음, 진 군대가 다시 배에 탑승하자마자 북쪽 강둑 방어 태세를 재구축했다. 이러한 괴롭힘에 분노한 유유는 그의 장군 정오(丁旿)를 보내 북쪽 강둑에 상륙하여 북위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로써 명원제의 후진 구원 시도는 끝났고, 작전 기간 동안 더 이상의 진/북위 전투는 없었다. 명원제는 여전히 후진 군대에 의해 저지될 경우 유유의 길을 막을 계획이었지만, 유유는 417년 가을까지 장안을 점령하고 후진을 멸망시켰다. 명원제의 계획된 공격은 실현되지 않았다. 유유에 반대하여 후진으로 피신한 많은 전직 진 관료들이 북위로 도망쳤고, 명원제는 요씨 황족의 일원을 구출하여 평성으로 데려오는 모든 사람에게 큰 보상을 내리도록 명령했다.
418년, 명원제는 북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여 북연의 수도 합룡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했다.
423년, 명원제는 유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북쪽 국경에 성벽을 건설하는 대규모 건설 사업을 시작했다.[1]
3. 1. 유연과의 관계
414년, 명원제는 후진, 북연, 진, 유연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후진 및 진과의 외교는 대체로 성공적이었으나, 북연과의 관계는 풍발이 사신 호뉴우 시먼(忽忸于什門)에게 무릎을 꿇을 것을 요구하면서 갈등을 겪었고, 풍발은 호뉴우를 억류하고 북위에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했다. 유연과의 외교는 초기에는 성공적인 듯 보였으나, 415년 새해 무렵 유연의 가한 위구려 대단(郁久閭大檀)이 침략했고, 명원제는 이에 대응하여 위구려 대단을 그들의 영토까지 쫓아냈다. 그러나 명원제가 그의 조언자 대혜 진(達奚斤)을 보내 유구려 대단을 추격하게 했을 때, 북위군은 혹독한 날씨를 만나 동상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는 여러 세기 동안 지속될 주제를 시작하게 되는데, 유연이 공격하면 북위가 성공적으로 반격하지만, 이후 유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3. 2. 유송과의 관계
422년 후반, 유송이 420년에 동진의 왕위를 찬탈하고 유송을 건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명원제는 유송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최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원제는 유송으로부터 황하 이남의 세 주요 도시인 낙양, 호뢰, 활태를 공격하여 점령할 계획임을 조언자들에게 알렸다. 그는 대계를 유송 공격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1]대계는 먼저 활태를 포위했지만, 신속하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명원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대계를 지원했다. 그는 또한 태자 도에게 군대를 이끌고 북쪽 국경으로 가서 유연의 공격을 방어하도록 했다. 이후 활태가 함락되었고, 대계는 호뢰와 낙양으로 진격했다. 한편, 명원제는 의참견과 장군 어청, 여대비, 보기를 동쪽으로 보내 오늘날 산둥성 서부의 여러 군현을 점령하도록 했다. 유송의 청주(오늘날 산둥성 중부 및 동부)의 다른 도시들이 함락되었지만, 북위군은 청주의 수도인 동양(오늘날 산둥성칭저우)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결국 식량 부족과 다수의 병사들이 질병에 걸려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1]
북위군은 유능한 유송 장군 모덕조가 방어하는 호뢰 포위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동안 423년 봄에 낙양과 허창 (오늘날 허난성쉬창)을 점령하여 호뢰에 대한 유송의 구원군이 올 길을 차단했다. 423년 여름, 호뢰가 함락되었다. 이로써 전쟁은 종식되었고, 북위는 오늘날 허난성 대부분과 산둥성 서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명원제는 북위에 대한 모덕조의 맹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호뢰를 방어하기 위해 그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존경했고, 그래서 그에게 전형적인 행동으로 호뢰 수비대의 목숨을 살려주었다.[1]
3. 3. 후진, 북연과의 관계
414년, 명원제는 후진, 북연, 진, 유연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후진 및 진과의 외교는 대체로 성공적이었지만, 북연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명원제의 사신 호뉴우 시먼(忽忸于什門)은 북연 황제 풍발에게 무릎을 꿇을 것을 요구했고, 풍발은 이에 반발하여 호뉴우를 억류하고 북위와의 관계를 거부했다.416년, 명원제는 북위에서 북연으로 귀순했다가 다시 북연으로 돌아간 장군 고누관 빈(庫傉官斌)을 구실로 북연을 공격했다. 북위군은 고누관 빈 뿐만 아니라 북연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던 그의 친척 고누관 창(庫傉官昌)과 고누관 제(庫傉官提)를 죽였다.
4. 내정
명원제는 아버지 탁발규의 독재적인 통치 방식과는 달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8명의 관료로 구성된 회의를 설치하여 다양한 의견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고자 했다. 이 회의는 대부분 선비족 출신이었지만, 한족 등 다른 민족들도 포함되었다. 이는 이후 북위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7]
탁발규 말년의 편집증과 폭력으로 인해 북위 내부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명원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국사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사법 집행을 담당하는 관료들은 실수를 피하기 위해 법 집행에 매우 엄격했다. 또한, 결정에 있어서 관용과 관대함을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안통(安同) 대신이 허가 없이 백성을 강제 동원했을 때, 다른 대신들은 엄벌을 주장했지만, 명원제는 안통의 동기가 백성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사면했다. 그러나 조사에 있어서는 매우 통찰력이 있었고, 기준이 엄격하여 관료들이 자주 처벌을 받았다.[7] 413년에 원성후 탁발굴은 하가 지원하는 반군에게 대패를 당한 후, 병주의 지사로 강등되어 술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하자 명원제는 그를 처형했다.
414년, 명원제는 후진, 북연, 진, 유연과 평화로운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후진, 진과의 외교는 대체로 성공적이었지만, 북연 황제 풍발과의 갈등이 있었고, 유연과의 외교는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415년 새해 무렵 유연의 가한 위구려 대단(郁久閭大檀)이 침략했고, 명원제는 이에 대응했다.
414-5년, 명원제는 관료들의 만연한 부패에 좌절했다. 414년, 백성들이 궁궐에 가서 관리들의 불법 행위에 대해 직접 보고할 수 있도록 명령했고, 관리들의 재산을 검사하여 불법 재산을 압수하도록 했다.
415년 겨울, 후진의 황제 요흥은 딸 서평 공주를 북위에 보내 명원제와 결혼시켰다. 415-6년, 상당과 하내 군의 흉노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했다. 416년, 진(晋)의 장군 유유는 후진을 멸망시키기 위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417년 봄, 후진 황제 요홍은 긴급 지원을 요청했고, 명원제는 유유의 진격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지 여부를 고려했다.
418년, 명원제는 북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지만, 수도 합룡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했다. 420년, 명원제의 부인 요씨가 사망하자, 사후에 황후로 추존했다. 422년, 명원제는 한식산 중독으로 추정되는 심각한 질병에 시달렸다. 같은 해 후반, 유송이 동진을 찬탈하고 건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송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423년, 유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북쪽 국경에 성벽을 건설하는 대규모 건설 사업을 시작했고, 같은 해 겨울 중국 연금술 약품 중독으로 사망했다.
위서는 명원제의 중국 학문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다. 그는 평생 동안 30편의 문학 작품을 저술했다.
4. 1. 민생 안정 정책
명원제는 아버지 탁발규의 독재적인 통치 방식과는 달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8명의 관료로 구성된 회의를 설치하여 다양한 의견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고자 했다. 이 회의는 대부분 선비족 출신이었지만, 한족 등 다른 민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이후 북위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7]탁발규 말년의 편집증과 폭력으로 인해 북위 내부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관료들은 나태하고 오만했으며, 법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범죄가 만연하여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명원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성들의 소송을 직접 듣고 공정하게 판결하도록 담당 관리를 임명했으며, 이전에 파면되었던 관료들을 복직시키고, 정부 구호 조치를 시행하여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었다.[7]
명원제는 국사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사법 집행을 담당하는 관료들은 실수를 피하기 위해 법 집행에 매우 엄격했다. 또한, 결정에 있어서 관용과 관대함을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안통(安同) 대신이 허가 없이 백성을 강제 동원했을 때, 다른 대신들은 엄벌을 주장했지만, 명원제는 안통의 동기가 백성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사면했다. 그러나 조사에 있어서는 매우 통찰력이 있었고, 기준이 엄격하여 관료들이 자주 처벌을 받았다.[7]
411년, 북위에 잦은 홍수와 가뭄이 발생하자, 명원제는 궁녀들을 내보내 궁정 지출을 줄이고, 미혼 남성과 결혼시켜 노동력과 인구를 늘리도록 했다. 또한 평성을 수도로 확장하고 국가 기반 시설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7]
414년과 415년에는 관리들의 만연한 부패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관리들에게 적절한 급여가 지급되지 않아 부패가 만연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직접 관리들의 불법 행위를 보고하도록 하고, 관리들의 재산을 검사하여 불법적으로 취득한 재산을 압수하도록 했다. 또한, 직무에 태만한 지방 관리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이 관리들의 부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의 후계자 태무제 시대에도 여전히 주요 문제였다.[7]
415년, 북부 지역에 대기근이 발생하자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는 것을 고려했으나, 최호와 주담(周澹)의 조언에 따라 평성에 유지했다. 대신 가난한 선비족들을 허베이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토지 경작을 장려하는 조칙을 내려 농업 상황을 개선하고 가축 경제를 번성하게 했다.[7]
명원제 말년에는 세금 외에 추가 자원을 징수하기도 했지만, 홍수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여러 차례 세금을 면제하거나 감면해 주었다. 이 시기에는 풍년이 들고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417년 이후 민중 봉기는 없었다.[7]
혼란을 겪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북위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북위로 귀순하거나 이주해왔다. 명원제는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구찬(寇讚)'이라는 관직을 설치하고, '남영군(南永郡)'이라는 새로운 행정 구역을 설치하여 관리했다. 이로 인해 북위 남쪽 국경으로 들어오는 난민의 수가 세 배로 증가했다고 한다.[7]
5. 가족 관계
배우자 | 자녀 |
---|---|
조애황후 요씨 | |
밀황후 두씨 | 탁발도 (제1황자) |
대부인 모용씨 | 낙평려왕 탁발비 (제2황자) |
부인 모용씨 | 낙안선왕 탁발범 (제4황자) |
부인 윤씨 | 영창장왕 탁발건 (제5황자) |
생모미상 |
6. 연호
참조
[1]
문서
7th year of the Dengguo era
[2]
서적
Book of Wei
[3]
문서
jisi day of the 11th month of the 8th year of the Taichang era
[4]
문서
renshen day of the 10th month of the 5th year of the Yixi era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7]
서적
Book of W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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