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노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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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노리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395년부터 423년까지 통치했다. 384년 테오도시우스 1세와 아엘리아 플라킬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393년 아버지에 의해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 서로마 제국은 야만족의 침입에 시달렸고, 스틸리코의 군사적 지휘에 의존했다. 수도는 밀라노에서 라벤나로 옮겨졌고, 423년 사망 후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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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노리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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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호노리우스 |
원래 이름 | Flavius Honorius Augustus |
휘 |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Flavius Honorius |
존호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Flavius Honorius Augustus |
출생일 | 384년 9월 9일 |
출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
사망일 | 423년 8월 15일 (향년 38세) |
사망지 | 라벤나, 이탈리아 |
매장지 | 옛 성 베드로 대성당 |
통치 정보 | |
작위 | 로마 제국의 서방 황제 |
왕조 | 테오도시우스 왕조 |
재위 기간 | 393년 1월 23일 – 423년 8월 15일 (395년 1월 17일부터 선임) |
전임자 | 테오도시우스 1세 |
후임자 | 요한네스 |
공동 통치자 | 아르카디우스 (동, 393–408) 테오도시우스 2세 (동, 408–423) 아탈루스 (로마, 409–410) 콘스탄티누스 3세 (갈리아, 409–411) 콘스탄스 2세 (갈리아, 409–411) 콘스탄티우스 3세 (서, 421)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테오도시우스 1세 |
배우자 | 마리아 (398년 결혼, 407년 사망) 테르만티아 (408년 결혼, 이혼) |
종교 | |
종교 | 니케아 기독교 |
로마자 표기 | |
이름 (로마자) | Flavius Honorius Augustus |
2. 가족
호노리우스는 384년 9월 9일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lat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lat 황제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아엘리아 플라킬라Aelia Flaccillalat 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아르카디우스Arcadiuslat와 누이 풀케리아Pulcherialat가 있었다. 386년 어머니 아엘리아 플라킬라가 사망했고, 387년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는 갈라Gallalat와 재혼했다. 갈라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Valentinian IIlat의 누이로, 당시 침략자 마그누스 막시무스Magnus Maximuslat를 피해 어머니 유스티나Justinalat 등 가족과 함께 테살로니키Thessalonikiell에 피신해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와 갈라 사이에서는 딸 갈라 플라키디아Galla Placidialat가 태어났는데, 그녀는 호노리우스의 이복 여동생이다. 호노리우스, 아르카디우스, 갈라 플라키디아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자녀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자녀들이었다.
384년 9월 9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와 첫 번째 황후 아엘리아 플라킬라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2] 형 아르카디우스와 여동생 풀케리아가 있었고, 이복 여동생으로 갈라 플라키디아가 있었다. 386년 불과 두 살의 나이에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393년 1월 23일 아버지에 의해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되어 공동 황제가 되었다.[2] 이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 사후 에우게니우스가 서로마 제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Stilicholat의 두 딸인 마리아Marialat와 테르만티아Thermantialat 자매와 차례로 결혼했다. 그러나 두 번의 결혼 모두 자녀를 얻지 못했으며, 마리아와는 사별하고 테르만티아와는 이혼했다[26]. 따라서 호노리우스의 직계 후손은 없다.
3. 황제
395년 1월,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할되었고, 호노리우스는 10세의 어린 나이로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형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제국의 실권은 반달족 출신의 유능한 장군 스틸리코가 장악했다.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호노리우스의 장인이 되어(딸 마리아와 결혼시킴) 권력 기반을 다졌다. 호노리우스의 초기 통치는 전적으로 스틸리코의 군사적, 정치적 역량에 의존했다.
401년 알라리크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자, 호노리우스는 402년 수도를 밀라노에서 방어에 더 유리한 해안 도시 라벤나로 옮겼다.[4] 이 결정은 이후 서로마 제국의 중심지가 이탈리아 반도 중심부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라벤나는 476년 제국 멸망 시까지 수도로 남게 되었다.[4]
호노리우스의 치세는 끊임없는 혼란과 제국의 쇠퇴로 점철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길도의 반란이 일어났고,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등 서방 속주에서는 로마 군단과 귀족들이 독자적인 황제를 옹립하며 중앙 정부로부터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빈번했다. 409년에는 로마의 원로원마저 호노리우스를 불신임하고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대립 황제로 내세우기도 했다. 결국 410년경 호노리우스 정부는 브리타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포기했다.
408년, 호노리우스는 궁정 내 모략에 넘어가 제국의 가장 유능한 방어자였던 스틸리코를 반역죄로 처형했다. 이는 제국의 방위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스틸리코 사후 군사적 공백 상태에서 알라리크는 다시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호노리우스와의 협상이 결렬되자 410년 8월 24일 로마를 약탈했다. 이는 약 800년 만에 '영원의 도시' 로마가 외적에게 함락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로마 함락 소식을 들은 호노리우스가 수도 로마가 아닌 자신이 기르던 '로마'라는 이름의 닭이 죽은 줄 알고 안심했다는 일화는 그의 무능함과 현실 감각 부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그가 어리석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스틸리코 사후 콘스탄티우스와 같은 유능한 장군이 등장하여 잠시 제국을 안정시키는 듯했으나, 제국의 전반적인 쇠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서고트족을 갈리아 남서부에 정착시켰으며, 호노리우스의 이복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와 결혼하여 421년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곧 사망했다.
호노리우스는 말년에 이복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와도 불화를 겪었으며, 그녀는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 423년 호노리우스는 후계자 없이 부종으로 사망했다. 그의 28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서로마 제국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고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3. 1. 초기 통치
384년 9월 9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아엘리아 플라킬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르카디우스의 동생이자 갈라 플라키디아의 이복 오빠였다. 386년 불과 두 살의 나이로 집정관(consul)에 임명되었고, 393년 1월 23일에는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되어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2] 이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 사후 에우게니우스가 서로마 제위 찬탈을 시도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394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에우게니우스를 격파하고 서로마 제국을 장악했다.
395년 1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로마 제국은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형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 제국을, 호노리우스는 불과 열 살의 나이로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초기 통치 기간 동안 실질적인 권력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임명한 반달족과 로마인 혼혈 출신의 유능한 장군 스틸리코가 행사했다.[3] 스틸리코는 군사적 안정을 유지하고 제국을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어린 황제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딸 마리아를 호노리우스와 결혼시켰다. 당시 궁정 시인 클라우디아누스는 이 결혼을 축하하는 혼례 서사시를 짓기도 했다. 호노리우스는 또한 교황 인노첸티우스 1세를 비롯한 서방 교회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초기 수도는 밀라노(Mediolanum)였으나, 401년 알라리크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자 402년 호노리우스는 방어에 더 유리한 해안 도시 라벤나로 궁정을 옮겼다.[4] 라벤나는 늪지대와 강력한 요새로 둘러싸여 방어에는 용이했지만, 이탈리아 반도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제국 방어에는 불리한 위치였다. 그럼에도 라벤나는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황제의 거처로 남았으며, 이후 동고트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총독부 수도가 되었다.[4]
호노리우스의 치세는 끊임없는 외침과 내란으로 점철되었다. 397년부터 398년까지 북아프리카의 총독 길도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스틸리코가 파견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402년에는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다시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스틸리코는 폴렌티아 전투에서 이들을 격퇴했지만, 서고트족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405년에는 라다가이수스가 이끄는 또 다른 야만족 무리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으나, 스틸리코는 406년 이들을 격파하고 패잔병 일부를 로마군에 편입시켰다.[4] 같은 해 말, 반달족, 알란족, 스웨비족 등 여러 게르만 부족들이 얼어붙은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를 침공하여 광범위한 약탈을 자행했다.
브리타니아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제국 본토와의 연결이 사실상 끊기고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주둔 군단들은 마르쿠스(406-407), 그라티아누스(407), 콘스탄티누스 3세를 차례로 황제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티누스 3세는 갈리아까지 진출하여 아를을 점령했고, 그의 아들 콘스탄스가 브리타니아를 통치했다.[5] 410년경, 호노리우스 정부는 브리타니아에 더 이상 로마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방어하라는 통보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408년 초, 황후 마리아가 사망하자 스틸리코는 자신의 둘째 딸 테르만티아를 호노리우스와 결혼시켜 권력 기반을 유지하려 했다.[6] 같은 해,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재침입 위협에 대응하여 로마 원로원을 설득해 약 1814.37kg의 금을 지불하여 서고트족을 달래려 했다.[7]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틸리코에 대한 궁정 내 반감이 커져갔다. 408년 5월, 형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려 했으나 스틸리코가 만류했다. 스틸리코가 동로마 제국 문제 처리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올림피우스라는 관리가 호노리우스의 신임을 얻어 스틸리코가 야만족과 결탁하여 반역을 꾀한다고 모함했다. 라벤나로 돌아온 호노리우스는 올림피우스의 참언을 믿고 408년 8월 22일, 제국의 버팀목이었던 스틸리코를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스틸리코의 처형 이후 그의 아들 에우케리우스를 비롯한 지지자들과 그 가족들까지 무자비하게 숙청되었다. 이 숙청 과정에서 스틸리코 휘하에 있던 많은 연합군(foederati) 병사들의 가족들까지 희생되었고, 이에 반발한 병사들은 대거 알라리크에게 투항하여 그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유능한 장군 스틸리코가 제거되자 제국의 방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408년 10월, 알라리크는 스틸리코가 약속했던 정착지와 보상을 요구하며 다시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로마를 포위했고, 기근 직전에 놓인 로마는 약 2267.96kg의 금과 약 13607.76kg의 은을 바치고서야 겨우 포위를 풀 수 있었다. 이후 평화 협상이 시도되었으나, 호노리우스 궁정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변덕으로 인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에 분노한 알라리크는 409년 말, 다시 로마로 진격하여 원로원을 압박해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게 만들었다. 이는 호노리우스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자, 이후 벌어질 로마 약탈의 전조였다.
3. 2. 스틸리코와 이탈리아 방어
호노리우스 치세 동안 갈리아,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등 제국 서방 영토는 외부 세력의 침입과 내부 반란으로 끊임없이 시달렸다. 호노리우스는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기에, 실질적인 통치는 반달족 출신의 유능한 장군이자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외척인 스틸리코에게 의존했다. 스틸리코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방어와 반란 진압에 힘썼다.
첫 번째 위기는 북아프리카의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자 군 사령관이었던 길도가 일으킨 길도의 반란(397년~398년)이었다. 스틸리코는 길도의 동생인 마스케젤을 지휘관으로 파견하여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다음 위기는 401년 말,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의 이탈리아 침입이었다. 당시 스틸리코는 레티아에 있었고, 알라리크는 이 틈을 타 줄리안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했다. 스틸리코는 급히 돌아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의 군단을 소집하여 밀라노에 있던 호노리우스를 구출했다. 402년 4월 6일 부활절, 스틸리코는 폴렌티아 전투에서 알라리크에게 간신히 승리했다. 이후 베로나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정적인 승패는 나지 않았고, 서고트족은 일리리쿰으로 물러났다.
405년에는 라다가이수스가 이끄는 또 다른 게르만 부족 무리가 다뉴브 강을 건너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들은 제국의 심장부를 위협했지만, 스틸리코는 406년에 이들을 격퇴하고 패잔병 상당수를 로마군에 편입시켰다.[4] 하지만 같은 해 말(406년 12월 31일), 반달족, 알란족, 스웨비족 등 여러 부족이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를 침략하면서 제국의 방어선은 큰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409년 히스파니아까지 도달했다.[5]
브리타니아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제국 본토와 고립된 브리타니아 속주는 지원을 받지 못했고, 주둔 병사들은 마르쿠스(406년~407년), 그라티아누스(407년), 콘스탄티누스 3세를 차례로 황제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티누스 3세는 407년 갈리아로 건너와 아를을 점령했고, 그의 아들 콘스탄스가 브리타니아를 다스렸다.[5] 결국 410년경 브리타니아는 제국으로부터 자력으로 방어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스틸리코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궁정 내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했다. 407년 황후 마리아가 사망하자, 408년 초 스틸리코는 자신의 둘째 딸 테르만티아를 호노리우스와 결혼시켰다.[6] 또한 408년, 알라리크의 재침입을 막기 위해 로마 원로원을 설득하여 고트족에게 금 약 1814.37kg를 지불하고 이탈리아를 떠나도록 했다.[7]
하지만 스틸리코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408년 5월, 동로마 제국 황제이자 호노리우스의 형인 아르카디우스가 사망했다.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가려 했으나, 스틸리코는 정세 안정을 위해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제안하며 호노리우스를 만류했다. 스틸리코가 자리를 비운 사이, 올림피우스라는 관리가 호노리우스의 신임을 얻어 스틸리코가 황제를 배신하고 제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모함했다.
라벤나로 돌아온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의 체포와 처형을 명령했고, 스틸리코는 408년 8월 22일 처형당했다. 스틸리코의 몰락과 함께 그의 아들 에우케리우스도 처형되었고, 아내 테르만티아는 궁정에서 쫓겨났다. 또한 스틸리코의 측근과 지지자들도 대거 숙청되었으며,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 과정에서 로마군에 복무하던 스틸리코 휘하 연합군(포에데라티) 병사들의 가족들까지 살해당하자, 분노한 병사들은 대거 알라리크에게 투항했다.
"이탈리아의 수호자"로 불리던 스틸리코의 제거는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408년 10월, 알라리크는 스틸리코가 약속했던 금과 정착지를 요구하며 다시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로마를 포위했고, 기근 직전에 몰린 로마 시는 금 약 2267.96kg와 은 약 13607.76kg를 지불하고서야 포위를 풀 수 있었다.
이후 알라리크는 호노리우스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변덕스러운 호노리우스 궁정은 타결 직전의 평화 협정을 거부했다. 격분한 알라리크는 409년 말 다시 로마로 진격하여 원로원을 압박,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게 했다. 아탈루스는 알라리크와의 약속을 이행하려 했으나, 북아프리카 장악에 실패하여 로마로의 곡물 공급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로마 시민과 알라리크 양쪽 모두에게 신임을 잃었다.
410년, 알라리크는 아탈루스를 폐위시키고 호노리우스에게 마지막으로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호노리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지원군 파병 약속과 아탈루스의 실패에 고무되어 협상을 거부하고 알라리크를 공화국의 적으로 선포했다.[12] 동로마에서 파견된 6개 로마 군단(약 6,000명)[9]은 이탈리아로 오는 도중 알라리크에게 대부분 격파되었다.[10] 스틸리코라는 유능한 지휘관을 잃은 서로마 제국군은 알라리크의 군대에 맞설 능력이 없었다.
결국 410년 8월 24일, 알라리크와 그의 서고트족 군대는 로마의 살라리아 문을 통해 시내로 진입하여 3일간 약탈을 자행했다(410년 로마 약탈). 약 800년 만에 로마가 외적에게 함락된 이 사건은 제국 전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저술하는 계기가 되었다. 약탈 자체는 교회나 종교적 상징물에는 비교적 관대했지만, '영원의 도시' 로마가 함락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상징하는 바는 매우 컸다. 로마 함락 소식을 들은 호노리우스의 반응에 대해서는, 그가 아끼던 닭의 이름이 '로마'였는데, 사자가 "로마가 함락되었다"고 보고하자 자신의 닭이 죽은 줄 알고 놀랐다가 수도 로마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사태를 파악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에드워드 기번은 이 일화의 신빙성을 의심했지만,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이런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호노리우스가 어리석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3. 3. 콘스탄티우스와 제국의 쇠퇴
서로마 제국의 혼란 속에서 호노리우스는 유능한 지휘관 콘스탄티우스를 얻게 되었다. 409년 히스파니아에서는 콘스탄티누스 3세의 장군 게론티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막시무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아를에서 콘스탄티누스 3세를 포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콘스탄티우스는 먼저 막시무스와 게론티우스를 격파하고, 411년에는 콘스탄티누스 3세마저 물리쳤다.
콘스탄티우스의 군대가 이탈리아로 돌아간 직후, 갈리아 북부에서는 알란족, 부르군트족, 갈리아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요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요비누스는 서고트족의 왕 아타울프와 협력하려 했으나, 자신의 동생 세바스티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하면서 아타울프의 반감을 샀다. 결국 아타울프는 호노리우스와 동맹을 맺고 요비누스를 패배시켰으며, 요비누스는 413년에 처형되었다.[13] 같은 시기, 북아프리카에서 헤라클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이탈리아를 침공했으나 실패하고 카르타고로 도주했다가 살해되었다.[13] 스틸리코 사후 잠시 권력을 잡았던 궁정 관리 장 올림피우스 역시 스틸리코를 존경했던 콘스탄티우스 3세에 의해 412년경 처형되었다.
414년, 콘스탄티우스는 아타울프를 공격했다. 아타울프는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다시 황제로 내세웠지만, 콘스탄티우스의 공세에 밀려 히스파니아로 후퇴해야 했다. 서고트족의 지원을 잃은 아탈루스는 다시 사로잡혀 폐위되었고, 호노리우스는 로마 개선식에서 아탈루스를 자신의 전차에 묶어 끌고 다니며 모욕을 주었다. 또한 아탈루스가 과거 호노리우스에게 했던 위협을 되갚는 의미로 그의 오른쪽 엄지와 검지를 잘랐으며, 리파리 섬으로 추방했다.[14]
갈리아 북동부는 프랑크족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418년에는 조약을 통해 갈리아 남서부, 옛 갈리아 아키타니아 지역이 서고트족에게 할양되었다. 콘스탄티우스의 영향 아래 호노리우스는 418년 칙령을 발표하여 7개 주(해안 알프스, 나르보넨시스 프리마, 나르보넨시스 세쿤다, 노벰포풀라니아, 아키타니아 프리마, 아키타니아 세쿤다, 비엔넨시스)의 행정적 통제를 완화하고, 각 주의 대표들이 매년 아를에서 회의를 열어 자치적으로 문제를 처리하도록 허용했다. 이는 제국이 고트족에게 할양할 땅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417년, 콘스탄티우스는 호노리우스의 이복 누이인 갈라 플라키디아와 그녀의 의사에 반하여 결혼했다.[14] 421년, 호노리우스는 그를 공동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로 인정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우스 3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콘스탄티우스 3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했으나, 계획을 실행하기 전인 421년 9월에 사망했다.
콘스탄티우스 3세 사후, 420년에서 422년 사이 히스파니아에서는 또 다른 막시무스(혹은 이전과 동일 인물)가 황제를 참칭했다가 몰락했다. 호노리우스의 말년에는 그의 군대와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의 군대가 충돌하는 등 불화가 깊어졌고, 결국 갈라 플라키디아는 아들(미래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과 딸(호노리아)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해야 했다.
423년, 호노리우스는 부종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자녀 없이 사망했다. 그의 치세 동안 브리타니아는 사실상 포기되었고, 스페인과 갈리아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었다. 호노리우스 사후, 로마 원로원은 요한네스를 새로운 서로마 황제로 추대했지만, 이는 제국의 혼란을 더욱 심화시켰다.
4. 평가
호노리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무능하고 우유부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치세 동안 제국은 끊임없는 내우외환에 시달렸으며, 쇠퇴의 길을 걸었다.
가장 큰 실책 중 하나는 유능한 장군 스틸리코를 처형한 것이다. 408년 여름, 호노리우스는 궁정 관리 장 올림피우스와 같은 측근들의 영향을 받아 제국의 버팀목이었던 스틸리코를 제거했다. 스틸리코는 반달족 출신임에도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제국을 지탱해왔으나[9], 그의 제거는 제국의 방위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호노리우스의 부족한 판단력과 정치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 스틸리코 사후 혼란 속에서, 이후 유능함을 보인 장군 콘스탄티우스 3세가 412년경 올림피우스를 처형하고 실권을 잡았으나, 이미 제국의 혼란은 깊어진 상태였다.
스틸리코의 부재는 곧바로 재앙으로 이어졌다. 그의 처형 직후부터 알라리크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은 로마를 포위했다. 호노리우스는 라벤나에 머물며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는 서고트족이 지쳐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전략을 택했으나, 이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당시 동로마 제국이 지원군을 보냈지만 알라리크의 매복으로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10] 호노리우스는 알라리크와의 협상 기회를 여러 차례 놓쳤고, 심지어 알라리크를 공화국의 영원한 적으로 선포하며[12] 협상을 거부하는 등 외교적 실책을 범했다. 결국 410년 8월 24일, 로마는 약 800년 만에 외적에게 약탈당하는 참극을 겪었다. 410년 로마 약탈은 당시 로마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저서 ''신국론''을 저술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약탈 자체는 교회와 종교 조각상 등이 보존되는 등 비교적 온건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제국의 수도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은 서로마 제국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호노리우스의 무능함과 현실 감각 부재를 보여주는 일화로 프로코피우스가 전하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로마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호노리우스가 처음에는 자신이 기르던 '로마'라는 이름의 닭이 죽은 줄 알고 놀랐다가, 수도 로마가 함락되었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안심했다는 내용이다. 프로코피우스, 『반달 전쟁』 III.2.25–26 이 일화의 진위 여부는 불확실하지만[20], 당시 사람들이 호노리우스를 얼마나 어리석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치세 내내 콘스탄티누스 3세, 요비누스, 헤라클리아누스 등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등 속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갔다. 409년에는 히스파니아에서 콘스탄티누스 3세의 장군 게론티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막시무스를 황제로 추대하기도 했다. 410년에는 브리타니아 지배를 공식적으로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콘스탄티우스 3세를 등용하여 411년 콘스탄티누스 3세를, 413년에는 요비누스를[13], 414년에는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진압하는 등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으나, 421년 콘스탄티우스 3세를 공동 황제로 인정한 후 동로마 제국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양국 간의 군사적 갈등 위기가 고조되기도 했다. 심지어 말년에는 자신의 이복 여동생 갈라 플라키디아와 불화하여 그녀와 조카(미래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콘스탄티노플로 쫓아내기도 했다.
J. B. 버리[21]를 비롯한 후대의 역사가들 역시 호노리우스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그의 통치가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속화했다고 본다. 그는 제국의 위기 상황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된 판단과 무관심으로 몰락을 자초한 황제로 기록되었다.
한편, 그의 치세에는 로마에서 남성이 바지 착용을 금지하는 칙령[22]이나 마지막 검투사 경기가 열린 후 금지[23]되는 등 사회적 변화도 있었다.
5. 기타
410년, 호노리우스는 지역 야만인의 침입에 맞서 도움을 요청하는 브리튼의 간청에 답해 ''호노리우스의 칙령''을 발표했다. 당시 서고트족 문제에 집중하고 있던 호노리우스는 멀리 떨어진 브리튼에 군사적 지원을 할 여력이 없었다. 6세기 비잔티움 학자 조시무스에 따르면, "호노리우스는 브리튼의 도시들에 편지를 써서 스스로를 지키라고 명령했다."[17] 그러나 이 문장은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논의 중간에 갑자기 등장하며 브리튼에 대한 추가 언급이 없어,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 칙령이 브리튼이 아닌 이탈리아의 브루티움 지역에 적용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18][19]
프로코피우스는 그의 저서 『전쟁사』에서 로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호노리우스의 일화를 전한다. 아마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 호노리우스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그에 따르면, 로마 함락 소식을 들은 호노리우스는 자신이 아끼던 '로마'라는 이름의 닭이 죽었다고 오해했다가, 도시 로마가 함락된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안도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기번과 같은 근대의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를 단순한 소문으로 치부하지만, 이는 호노리우스에 대한 당시 로마 대중의 부정적인 여론을 짐작하게 한다.[20] J. B. 버리 등 19세기와 20세기의 일부 역사가들도 호노리우스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21]
호노리우스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 시내에서 남성이 바지를 입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22] 또한, 마지막으로 알려진 검투사 경기가 그의 치세에 열렸다.[23] 그는 399년과 404년에 검투사 경기를 금지했는데, 이는 검투사 시합에 반대하던 텔레마쿠스라는 기독교 수도사의 순교가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호노리우스의 능은 바티칸 언덕에 있었으며, 구 성 베드로 대성당의 횡단면에서 접근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아내 마리아가 안치되었고, 이후 테르만티아,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 그리고 다른 황실 가족 구성원들도 이곳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8세기에는 성 페트로닐라 예배당으로 개조되어 성 페트로닐라의 유물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이 건설되면서 철거되었다.[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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キリスト教は離婚を認めていないため、結婚はなかったとするしかなかった。その後、死去するまで結婚することは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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