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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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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연은 407년 선비족의 후연이 멸망한 후, 한족 출신 풍발이 고구려 왕족의 후손인 고운을 옹립하여 건국한 국가이다. 고운은 고구려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고운 사후 풍발이 황제가 된 후 북위와 대립했다. 풍발 사후 내분과 북위의 침략으로 436년 고구려로 망명하며 멸망했고, 이후 고구려에서 풍홍이 살해당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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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국명북연
다른 표기
중국어 간체北燕
중국어 정체北燕
병음Běi Yān
동연東燕
황룡黃龍
북연, 423년경
북연, 423년경
역사
건국 시기407년 7월
멸망 시기436년 3월
건국 사건풍발의 왕위 찬탈 (409년 11월 6일)
멸망 사건풍홍의 죽음 (438년)
이전 국가후연
이후 국가북위
이후 국가2고구려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용성
통치자천왕
초대 천왕모용운 (407년–409년)
2대 천왕풍발 (409년–430년)
3대 천왕풍홍 (430년–436년)
언어 및 민족
공용어한어 (중국어)
민족고구려인
한족
선비족
기타
현재 국가중화인민공화국

2. 역사

407년, 선비족이 건국한 후연의 마지막 황제였던 모용희는 폭정을 일삼았다. 모용희황후가 사망하자 신하들에게 큰 소리로 곡하도록 명령하고 소리가 크지 않은 자들을 처벌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족 출신의 신하 풍발모용보의 양자 고운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희는 폐위되었으며, 수도 용성(龍城,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을 공격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고운은 천왕에 즉위하여 을 본래의 성인 고씨로 고치고 국호인 연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모용씨의 연나라를 후연, 고운의 연나라를 북연으로 구분하고 있다. 일부 학자는 고운의 재위까지를 후연으로 보기도 한다.

고운은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었다. 전연이 342년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함락했을 때, 여러 왕족 구성원들을 포로로 잡아 현재의 랴오닝성 진저우 시에 위치한 칭산(青山)으로 이송했는데, 그곳에서 고운이 태어나 후연의 장군으로 성장했다. 397년, 고운은 연 황제 모용보를 도와 그의 아들 모용회의 반란을 진압하고 모용보의 양자가 되어 모용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408년 고운이 즉위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풀었으며 고운 역시 이에 화답하여 북연과 고구려는 화친하였다. 그러나 유주의 연주 자사 모용의(慕容懿)가 북위에 투항하면서 북위와의 갈등도 시작되었다.

고운은 측근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강한 권력을 주었는데, 이들은 더 큰 권력을 주지 않는 고운을 원망하여 409년 고운을 암살하였다.

풍발은 고운 암살 후 혼란을 평정하고 이반과 도인을 주살했으며,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풍발은 정치에 힘써 국내를 안정시키는 한편 화북의 강자 북위와 대립하였다. 416년부터 북위의 침략을 받았는데, 이는 북위의 사신을 두 차례에 걸쳐 붙잡는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2]

풍발 사후 북위가 점차 우세해졌고, 풍발의 태자와 동생 풍홍의 황위 다툼으로 북연은 혼란에 빠졌다. 풍홍이 승리하여 태자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했으나, 이러한 내전은 조정을 혼란과 동요에 빠트려 국가 위기를 초래하고 북위의 침입을 쉽게 만들었다.

430년 9월, 풍발은 병으로 쓰러졌고, 이후 후계자 쟁탈전이 일어나 풍홍의 세자 풍숭이 북위로 도주하여 요서왕(遼西王)으로 임명되어 망명 정권을 형성하였다.[2]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 용성이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 장수왕에게 망명을 요청, 장수왕은 2만 병력을 보내 풍홍과 백성들을 요동성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풍홍은 오만한 태도로 장수왕을 함부로 대하였다. 분노한 장수왕은 풍홍의 처자식들을 인질로 잡고 풍홍을 북풍(北豐)으로 강제 이송시켰다. 풍홍은 남조의 유송에 망명 요청을 했고, 송나라가 사신 왕백구(王白駒)를 보내 풍홍의 망명을 요청하자, 장수왕은 438년 풍홍과 가족들을 살해하였다.

2. 1. 건국 배경

고운은 고구려 왕족의 후손으로, 전연342년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함락했을 때 포로로 잡혀 랴오닝성 진저우 시의 칭산(青山)에서 태어나 후연의 장군으로 성장했다. 397년, 고운은 모용보를 도와 모용회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모용보의 양자가 되어 모용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무렵 모용운은 장군 풍발과 친구가 되었다. 풍발은 한족 출신으로, 그의 조부 풍화(馮和)는 영가의 난 당시 상당군으로 이주한 낙안군 출신이었다. 풍발의 아버지 풍안(馮安)은 서연에서 장군으로 복무했고, 394년 후연이 서연을 정복한 후 풍씨는 용성구로 이주했다. 풍발은 선비족의 영향을 받아 '기직벌(乞直伐)'이라는 선비족식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401년, 모용운의 양아버지의 삼촌인 모용희가 권력을 잡았는데, 그는 잔혹하고 독단적인 통치를 했다. 풍발과 그의 형제 풍사부는 모용희에 대한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그를 전복시키기로 결심했다.

고운의 즉위로 고구려와의 관계는 후연 시대보다 상당히 호전되었지만, 북위와는 유주자사 모용의가 이반하는 등 악화되었다. 409년 10월 고운이 총신에게 살해당하자, 풍발은 이 혼란을 진정시키고 스스로 천왕에 즉위했다. 풍발이 즉위한 시점을 북연의 건국으로 보는 설도 있다.

2. 1. 1. 후연의 혼란과 모용희의 폭정

407년, 선비족이 건국한 후연의 마지막 황제였던 모용희는 폭정을 일삼았다. 모용희황후가 사망하자 신하들에게 큰 소리로 곡하도록 명령하고 소리가 크지 않은 자들을 처벌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족 출신의 신하 풍발모용보의 양자 고운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희는 폐위되었으며, 수도 용성(龍城,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을 공격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모용희는 처음에는 용성을 공격했지만, 공황 상태에서 혼자 전투에서 도망쳤고, 그의 군대가 붕괴된 후 붙잡혀 고운에게 처형되었다.[1]

2. 1. 2. 풍발의 반란과 고운 옹립

407년, 선비족이 건국한 후연의 마지막 황제였던 모용희는 폭군이었다. 모용희황후가 사망하자 모용희는 신하들에게 큰 소리로 곡하도록 명령하고 소리가 크지 않은 자들을 처벌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한족 출신의 신하 풍발모용보의 양자 고운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희는 폐위되었으며, 수도 용성(龍城,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을 공격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고운은 천왕에 즉위하여 을 본래의 성인 고씨로 고치고 국호인 연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모용씨의 연나라를 후연, 고운의 연나라를 북연으로 구분하고 있다. 일부 학자는 고운의 재위까지를 후연으로 보기도 한다.

고운은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었다. 전연이 342년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함락했을 때, 그들은 여러 왕족 구성원들을 포로로 잡아 현재의 랴오닝성 진저우 시에 위치한 칭산(青山)으로 이송했는데, 그곳에서 고운이 태어나 후연의 작은 장군으로 성장했다. 397년, 고운은 연 황제 모용보를 도와 그의 아들 모용회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 보상으로 모용보는 그를 양자로 삼아 이름을 모용운으로 바꿨다.

이 무렵 모용운은 장군 풍발과 친구가 되었다. 풍발은 한족 출신으로 그의 조부인 풍화(馮和)가 영가의 난 당시 상당군으로 이주하기 전에는 낙안군 출신이었다. 풍발의 아버지 풍안(馮安)은 서연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다. 394년 후연이 서연을 정복한 후, 풍씨는 용성구로 다시 이주했다. 풍발은 선비족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며, 그의 별명인 '기직벌(乞直伐)'은 선비족의 기원을 암시한다.

401년, 모용운의 양아버지의 삼촌인 모용희가 권력을 잡았는데, 그는 기록상 잔혹하고 독단적인 통치자로 묘사된다. 풍발과 그의 형제 풍사부는 모용희에 대한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고, 이로 인해 그들은 시골로 도망쳐 그를 전복시키기로 결심했다. 407년, 모용희가 부황후의 장례식을 치르던 중, 풍발과 그의 공모자들은 수도 용성을 장악하고 모용운을 지도자로 추대했다. 모용희는 처음에는 용성을 공격했지만, 공황 상태에서 혼자 전투에서 도망쳤다. 그의 군대가 붕괴된 후, 모용희는 나중에 발견되어 고운에게 처형되었다.

후연의 중위장군 풍발은 407년 7월에 주군이었던 황제 모용희를 살해하고 후연을 멸망시켰다. 풍발은 후연의 제2대 황제 모용보의 양자 고운을 새로운 황제(천왕)로 옹립하여 스스로 실권을 장악했는데, 이것이 북연의 건국이라고 한다. 고운은 고구려인의 후예로, 천왕에 즉위한 후에는 성을 고씨로 되돌렸다.

2. 2. 고운과 풍발의 통치

선비족이 건국한 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희는 폭군이었다. 407년 모용희의 황후가 사망하자 신하들에게 큰 소리로 곡하도록 명령하고 소리가 크지 않은 자들을 처벌했다. 이 사건으로 한족 출신 신하 풍발모용보의 양자 모용운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희는 폐위되었으며, 수도 용성(龍城,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을 공격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모용운은 천왕에 즉위하여 을 본래의 고씨로 고치고 국호인 연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모용씨의 연나라를 후연, 고운의 연나라를 북연으로 구분한다.

고운은 측근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강한 권력을 주었는데, 이들은 더 큰 권력을 주지 않는 고운을 원망하여 409년 고운을 암살하였다.

풍발은 고운 암살 후 혼란을 평정하고 이반과 도인을 주살했으며,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풍발은 정치에 힘써 국내를 안정시키는 한편 화북의 강자 북위와 대립하였다. 풍발 사후 북위가 점차 우세해졌고, 풍발의 태자와 동생 풍홍의 황위 다툼으로 북연은 혼란에 빠졌다. 풍홍이 승리하여 태자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했으나, 이러한 내전은 조정을 혼란과 동요에 빠트려 국가 위기를 초래하고 북위의 침입을 쉽게 만들었다.

내전 이후 북연은 북위의 압박으로 435년 풍홍은 고구려에 망명을 요청하였다.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 용성이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 장수왕에게 망명을 요청, 장수왕은 2만 병력을 보내 풍홍과 백성들을 데려갔다. 풍홍은 요동성에 머물며 재기를 다짐했으나, 오만한 태도로 장수왕을 함부로 대하였다. 분노한 장수왕은 풍홍의 처자식들을 인질로 잡고 풍홍을 북풍(北豐)으로 강제 이송시켰다. 풍홍은 남조의 유송에 망명 요청을 했고, 송나라가 사신 왕백구(王白駒)를 보내 풍홍의 망명을 요청하자, 장수왕은 438년 풍홍과 가족들을 살해하였다.

북연의 건국 연도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고운이 모용보의 양자로 후연 황족의 일원이었기에 후연의 마지막 통치자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고구려 출신으로 즉위 후 옛 성씨로 돌아갔기에 풍발을 북연의 첫 통치자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따라서 북연 건국 연도는 407년 또는 409년이 될 수 있다.[1]

2. 2. 1.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

고구려 광개토대왕408년에 사신을 보내 고운에게 종족의 예를 갖추었고, 고운 역시 이에 화답하여 북연과 고구려는 평화로운 관계를 맺었다. 고운은 고씨로 성을 회복하여 고구려와의 관계를 개선했다.[3]

2. 2. 2. 북위와의 갈등

408년 고운이 즉위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풀었으며 고운 역시 이에 화답하여 북연과 고구려는 화친하였다. 그러나 유주의 연주 자사 모용의(慕容懿)가 북위에 투항하면서 북위와의 갈등도 시작되었다.

북연은 북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기에 풍발은 동진, 하, 유연, 거란 등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그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세금 부담을 줄임으로써 백성의 지지를 확보했다.[1] 416년부터 북위의 침략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북위의 사신을 두 차례에 걸쳐 붙잡는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2]

430년 9월, 풍발은 병으로 쓰러졌고, 이후 후계자 쟁탈전이 일어나 풍홍의 세자 풍숭이 북위로 도주하여 요서왕(遼西王)으로 임명되어 망명 정권을 형성하였다.[2]

2. 2. 3. 풍발의 통치와 내치

407년, 한족 출신 신하 풍발은 폭군이었던 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희를 폐위시키고,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천왕으로 추대했다. 모용운은 고씨로 고치고 국호인 연은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역사가들은 모용씨의 연나라를 후연, 고운의 연나라를 북연으로 구분한다.

고운이 즉위한 후, 408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갖추자, 고운도 이에 화답하여 북연과 고구려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고운은 409년 자신의 측근이었던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암살당했다.

풍발은 고운 암살 이후 혼란을 평정하고 이반과 도인을 처형한 뒤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풍발은 정치에 힘써 국내를 안정시키는 한편, 고구려와는 계속 화친하고 화북의 강자로 등장한 북위와 대립하였다. 풍발은 동진, , 유연, 거란, 우문부와 좋은 관계를 맺어 북위에 대항했다. 그는 농업을 장려하고 세금 부담을 줄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416년부터 북위의 침략을 받았지만, 북위는 서쪽의 와도 적대하고 있어 북연에 대규모 공세를 가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북연 내부에서는 풍발의 사촌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분이 발생하여, 북연의 상황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430년, 풍발은 병으로 쓰러져 차남 풍익에게 국사를 위임했지만, 외척 송씨의 반발로 유폐되었다. 이 혼란 속에서 풍발은 사망했고, 그의 동생 풍홍이 새로운 천왕으로 즉위했다.

2. 3. 쇠퇴와 멸망

407년, 선비족이 건국한 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희는 폭군이었다. 모용희의 황후가 사망하자, 신하들에게 큰 소리로 곡하도록 명령하고 소리가 크지 않은 자들을 처벌한 사건을 계기로 한족 출신 신하 풍발모용보의 양자 모용운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희는 폐위되어 수도 용성(龍城,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에서 처형되었다. 모용운은 천왕에 즉위하여 고씨로 고치고 국호는 연을 유지하였다. 역사가들은 모용씨의 연나라를 후연, 고운의 연나라를 북연으로 구분한다.

고운은 즉위 후,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화친하였다. 408년 광개토대왕이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표하자, 고운 역시 이에 화답하였다.[1] 그러나 409년 고운은 측근들에게 암살당했고, 풍발이 혼란을 평정하고 황제로 즉위했다.[1]

풍발은 북위와 대립하였는데, 풍발이 살아있을 때는 대등했으나, 풍발 사후 북위가 점차 우세해졌다.[1] 북연은 와도 적대하던 북위의 대규모 공세를 받기 어려웠지만, 내부에서는 풍발의 종형(從兄) 풍만니와 아들 풍유진의 반란 등 내분으로 안정되지 못했다.

2. 3. 1. 풍발 사후의 내분

430년 9월, 풍발이 병으로 쓰러져 차남 풍익에게 국사를 위임했다. 그러나 외척 송씨가 이에 반발하여 풍발을 유폐시키자, 풍발의 동생 풍홍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혼란 속에서 풍발은 사망했고, 풍홍이 새로운 천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북연에서는 그 후 후계자 쟁탈전이 일어나 풍홍의 세자 풍숭이 북위로 도주하여 보호를 받는 등, 이미 말기 증상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풍발 사후, 태자와 풍발의 동생인 풍홍이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어 북연은 혼란에 빠졌다.[1] 결국 풍홍이 승리하여 태자를 죽이고 황제로 즉위하였다.[1] 그러나 이러한 북연의 내전은 조정을 혼란과 동요에 빠트려 국가의 위기로 이어졌으며, 한편으론 북위의 침입을 쉽게 만들어준 결과를 낳았다.[1]

당시 북위는 서쪽의 하(夏)의 위협을 처리하고 북연을 정복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2] 432년부터 연은 북위의 공격에 주기적으로 시달렸다.[2] 433년, 후계 문제로 인해 풍홍의 아들들이 요서군을 북위에 넘겨주었다.[2]

2. 3. 2. 북위의 침공과 고구려로의 망명

407년, 선비족이 건국한 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희가 폭군으로 백성들을 괴롭히자, 한족 출신 신하 풍발모용보의 양자 고운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모용희는 폐위되어 처형되었고, 고운은 천왕에 즉위하여 을 본래의 고씨로 고치고 국호는 연을 유지하였다. 역사가들은 모용씨의 연나라를 후연, 고운의 연나라를 북연으로 구분한다.

후연 시기에 연나라는 고구려와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고운이 즉위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408년에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표했고, 고운 역시 이에 화답하여 북연과 고구려는 화친하였다.

고운은 측근들에게 강한 권력을 주었으나, 이들은 더 큰 권력을 원하며 409년에 고운을 암살하였다. 풍발은 혼란을 평정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정치에 힘써 국내를 안정시키는 한편, 고구려와는 계속 화친하고 화북의 강자로 등장한 북위와 대립하였다.

풍발 사후, 태자와 풍발의 동생 풍홍이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는 내전이 발생하여 북연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풍홍이 승리하여 황제가 되었으나, 이러한 내전은 북위의 침입을 쉽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435년, 풍홍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망명을 요청하였다.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수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장수왕에게 망명을 요청하였고, 장수왕은 군사를 보내 풍홍과 백성들을 요동성으로 데려갔다.[3] 그런데 풍홍은 오만불손한 태도로 장수왕을 함부로 대하였고, 이에 분노한 장수왕은 풍홍을 외곽 지역으로 강제 이송시켰다. 그러자 풍홍은 남조의 유송에 망명 요청을 했고, 송나라가 사신을 보내 풍홍의 망명을 요청하자, 장수왕은 438년에 풍홍과 가족들을 모두 살해하였다.[3]

2. 3. 3. 풍홍의 죽음과 북연의 완전한 멸망

430년, 풍발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태자 풍익(馮翼)과 자신의 아들을 황위 계승자로 만들고 싶어했던 총애하는 후궁 송부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상황은 곧 풍발의 동생이자 재상풍홍에게까지 알려졌고, 그는 군대를 이끌고 수도를 장악했다. 풍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풍홍은 풍익을 포함한 풍발의 모든 아들들을 학살하고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

당시 북위는 서쪽의 하(夏)의 위협을 처리하고 북연을 정복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431년에 서쪽의 하(夏)를 멸망시켰으므로, 432년부터는 매년 북연을 공격했다. 433년, 후계 문제로 인해 풍홍의 아들들이 요서군을 북위에 넘겨주었다.[1] 풍홍은 항복을 거부하고 유송과 동맹을 맺어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 했으며, 435년 1월에는 유송의 속국이 되기까지 했지만, 북위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436년 3월에는 북위의 대규모 공세를 받아 4월에 고구려로 망명했다. 이로써 북연은 국가로서는 멸망했다.[2]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요청하였다. 436년에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망명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장수왕은 2만의 병력을 보내 북위군보다 먼저 용성에 도착해 풍홍과 그 백성들을 데려갔다. 고구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풍홍은 요동성에 머물며 재기를 다짐했다. 그런데 자신의 처지를 생각도 하지 않고 오만불손한 태도로 장수왕을 함부로 대하였다. 이에 분노한 장수왕은 풍홍의 처자식들을 인질로 잡고 풍홍은 고구려의 외곽지역인 북풍(北豐)으로 강제 이송시킨다. 그러자 풍홍은 남조의 유송에 망명요청을 했다. 이에 응한 송나라가 사신 왕백구(王白駒)를 고구려로 보내 풍홍을 망명시킬 것을 요청하자 장수왕은 풍홍을 위험인물로 간주하여 438년에 그 가족들과 함께 모두 살해하였다. 이로서 북연은 완전히 멸망했다.[2]

3. 역대 군주

묘호시호이름재위 기간연호
미상혜의(惠懿)모용운
(고운)
407년–409년정시(正始) 407년–409년
태조(太祖)문성(文成)풍발409년–430년태평(太平) 409년–430년
소성(昭成)풍홍430년–436년대흥(大興) 431년–436년
1 고운의 성씨는 그가 모용에 의해 입양되었을 때 모용으로 변경되었다. 만약 고운이 후연의 군주로 계산된다면, 북연은 409년에 시작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407년에 시작되었다.


4. 문화

최근 랴오닝성 베이표 시 시관잉진에서 북연 재상 펑수푸의 화려한 분묘가 발굴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서적 Asia major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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