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결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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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결투쟁은 197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의 메이즈 교도소에서 준군사조직 수감자들이 겪었던 시위의 일환으로, 영국 정부의 특별 범주 지위 철회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수감자들은 1978년부터 감방 내 샤워와 화장실 사용을 거부하며 불결 시위를 시작, 배설물을 감방 벽에 바르는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저항했다. 1980년에는 5가지 요구 사항을 내걸고 단식 투쟁을 시작했고, 1981년에는 바비 샌즈를 포함한 10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은 교도소 정책 변화를 이끌어냈으며, 아일랜드의 역사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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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결투쟁 | |
|---|---|
| 개요 | |
| 다른 이름 | 불결 투쟁 |
| 위치 | 북아일랜드의 교도소 |
| 참가자 | 아일랜드 공화국 수감자 |
| 시작 연도 | 1976년 |
| 종료 연도 | 1981년 |
| 원인 | 정치범 지위 박탈에 대한 항의 |
| 방법 | 감방 가구 파괴 감방 벽에 배설물 도포 소변 배출 |
| 목표 | 정치범 지위 회복 |
| 관련 사건 | 담요 시위 1981년 아일랜드 단식 투쟁 |
2. 배경
1972년 이전까지 북아일랜드 분쟁 관련 준군사 조직 수감자들은 일반 범죄자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베테랑 공화주의자 빌리 맥키가 이끈 IRA 수감자 40명의 단식 투쟁 이후, 영국 정부는 이들에게 특별 범주 지위를 부여했다. 이 지위는 수감자들이 포로와 유사한 대우를 받도록 하여, 감옥 유니폼 착용이나 노동 의무를 면제하는 등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2]
하지만 1976년, 영국 정부는 소위 "범죄화" 정책을 내세우며 이 특별 범주 지위를 일방적으로 철회했다. 이는 1976년 3월 1일 이후 유죄 판결을 받은 수감자들에게 적용되었으며,[3] 수감자들의 자치권과 정치적 상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조치였다.[2] 이에 반발한 수감자들은 저항을 시작했고, 특히 키어런 너전트는 1976년 9월 감옥 유니폼 착용을 거부하며 담요 시위를 개시했다. 이는 이후 불결투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
2. 1. 특별 범주 지위 철회
1972년 7월 이전까지 유죄 판결을 받은 준군사 조직 수감자들은 일반 범죄자와 동일하게 취급받았다. 그러나 베테랑 공화주의자 빌리 맥키가 이끈 40명의 IRA 수감자들이 벌인 단식 투쟁 결과, 특별 범주 지위가 도입되었다. 이 지위는 수감자들이 포로와 유사한 대우를 받도록 보장했는데, 예를 들어 감옥 유니폼 착용이나 감옥 내 노동 의무가 면제되었다.[2]하지만 1976년, 영국 정부는 소위 "범죄화" 정책의 일환으로 북아일랜드 준군사 조직 수감자들에 대한 특별 범주 지위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정책은 기존 수감자들에게 소급 적용되지는 않았고, 1976년 3월 1일 이후 유죄 판결을 받은 수감자들부터 적용되었다.[3]
특별 범주 지위의 폐지는 수감자들이 내부적으로 유지해 온 자치적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으며, 그들의 주장을 외부로 알리는 선전 활동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2] 지위 폐지가 임박하자 수감자들과 교도관 사이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1976년 초, 감옥 내 IRA 지도부는 IRA 군사 위원회에 교도관 암살을 요청하며 "우리는 정치적 지위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으려는 자들은 똑같은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경고했다.[4] 이에 IRA는 1976년 4월 교도관 패트릭 딜런을 총격 살해하는 것으로 응수했으며, 이는 이후 5년간 이어진 시위 과정에서 희생된 19명의 교도관 중 첫 사례였다.[5]
1976년 9월 14일, 새롭게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된 키어런 너전트는 감옥 유니폼 착용을 거부하며 담요 시위를 시작했다. 이 시위에서 IRA 및 아일랜드 민족해방군(INLA) 수감자들은 유니폼 대신 알몸으로 지내거나 감옥에서 지급된 담요를 옷처럼 둘렀다.[3]
2. 2. 범죄화 정책
1972년 7월 이전까지 준군사 조직 수감자들은 일반 범죄자와 동일하게 취급받았다. 그러나 베테랑 공화주의자 빌리 맥키가 이끈 40명의 IRA 수감자들이 벌인 단식 투쟁 이후, 특별 범주 지위가 도입되었다. 이 지위는 수감자들을 포로와 유사하게 대우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에 따라 수감자들은 감옥 유니폼을 입거나 감옥에서 노동할 의무가 면제되었다.[2]하지만 1976년, 영국 정부는 소위 "범죄화" 정책을 추진하며 북아일랜드의 준군사 조직 수감자들에 대한 특별 범주 지위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정책은 기존 수감자가 아닌 1976년 3월 1일 이후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에게 적용되었다.[3]
특별 범주 지위의 폐지는 수감자들이 내부적으로 유지해 온 자치 권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으며, 동시에 그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선전적 타격이기도 했다.[2] 특별 범주 지위 폐지가 임박하자 수감자들과 교도관 사이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1976년 초, 감옥 내 IRA 지도부는 IRA 군사 위원회에 교도관 암살을 요청하며 "우리는 정치적 지위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으려는 자들은 똑같은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경고했다.[4] 이에 IRA는 감옥 밖에서 행동으로 대응하여 1976년 4월 교도관 패트릭 딜런을 총격 살해했다. 그는 이후 5년간 이어진 시위 기간 동안 살해된 19명의 교도관 중 첫 번째 희생자였다.[5]
1976년 9월 14일, 새로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된 키어런 너전트는 영국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며 담요 시위를 시작했다. 이 시위에서 IRA 및 INLA 수감자들은 감옥 유니폼 착용을 거부하고, 대신 알몸으로 지내거나 감옥에서 지급된 담요를 몸에 두르는 방식으로 저항했다.[3]
3. 담요 시위 (1976년~1978년)
1972년 빌리 맥키 등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수감자들의 단식 투쟁 결과 도입된 특별 범주 지위는 수감자들을 포로처럼 대우하여 교도소 유니폼 착용이나 노역 의무를 면제해주었다.[2] 그러나 1976년, 영국 정부는 이른바 "범죄화" 정책을 통해 북아일랜드 준군사 조직 수감자들에 대한 특별 범주 지위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정책은 1976년 3월 1일 이후 유죄 판결을 받은 수감자들에게 적용되었다.[3]
특별 범주 지위의 폐지는 수감자들의 자치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자 정치적 선전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2] 이에 대한 저항으로 1976년 9월 14일, 새로 수감된 키어런 너전트는 교도소 유니폼 착용을 거부하고 담요만 걸치는 시위를 시작했다. 이것이 담요 시위의 시작이었다. 이후 IRA 및 INLA 소속 수감자들이 이 시위에 동참하여, 감옥 유니폼 대신 알몸으로 지내거나 감옥에서 지급된 담요를 옷처럼 만들어 입었다.[3] 이 시위는 정치범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범죄화 정책에 반대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감자들과 교도관 사이의 갈등은 점차 격화되었고, 이는 이후 불결 투쟁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5][7]
3. 1. 키어런 너전트의 시위 시작
1972년 7월 이전까지 유죄 판결을 받은 준군사 조직 수감자들은 일반 범죄자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빌리 맥키를 비롯한 40명의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수감자들이 벌인 단식 투쟁 이후, 영국 정부는 특별 범주 지위를 도입했다. 이 지위는 수감자들을 포로와 유사하게 대우하는 것으로, 감옥 유니폼 착용이나 노역 의무가 면제되었다.[2]1976년, 영국 정부는 "범죄화" 정책의 일환으로 북아일랜드 준군사 조직 수감자들에 대한 특별 범주 지위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정책은 기존 수감자가 아닌 1976년 3월 1일 이후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에게 적용되었다.[3] 특별 범주 지위 폐지는 수감자들이 누리던 자치권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으며, 그들의 정치적 명분에도 타격을 주었다.[2] 지위 폐지가 임박하자 수감자와 교도관 사이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1976년 초, 감옥 내 IRA 지도부는 IRA 군사 위원회에 교도관 암살을 요청하며 "우리는 정치적 지위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으려는 자들도 같은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경고했다.[4] 이에 IRA는 1976년 4월 교도관 패트릭 딜런을 살해하며 대응했다. 그는 이후 5년간 이어진 시위 기간 동안 살해된 19명의 교도관 중 첫 번째 희생자였다.[5]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76년 9월 14일, 새로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된 키어런 너전트는 감옥 유니폼 착용을 거부하며 담요 시위를 시작했다. 이 시위는 IRA 및 INLA 수감자들이 감옥 유니폼 대신 알몸으로 지내거나 감옥 담요를 몸에 두르는 방식으로 진행된 저항이었다.[3] 너전트는 이 시위를 시작한 첫 번째 수감자였다.
3. 2. 교도관과의 갈등
1976년, "범죄화" 정책의 일환으로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의 준군사 조직 수감자들에 대한 특별 범주 지위를 종료했다. 이 조치는 1976년 3월 1일 이후 유죄 판결을 받은 수감자들에게 적용되었다.[3] 특별 범주 지위의 종료는 수감자들의 자치권에 대한 위협이었을 뿐 아니라, 선전 활동에도 타격을 주었다.[2]특별 범주 지위 철회는 수감자와 교도관 사이의 관계를 급격히 악화시켰다. 1976년 초, 감옥 내 IRA 지도부는 IRA 군사 위원회에 교도관 암살을 요청하며 정치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4] 실제로 IRA는 1976년 4월 교도관 패트릭 딜런을 총격 살해했으며, 이는 이후 5년간 이어진 시위 기간 동안 살해된 19명의 교도관 중 첫 번째 희생자였다.[5] 1976년 9월 14일, 새로 수감된 키어런 너전트는 교도소 유니폼 착용을 거부하고 담요만 걸치는 담요 시위를 시작했다.[3]
1978년 3월, 일부 수감자들은 교도관들의 공격을 우려하여 샤워나 화장실 사용을 위해 감방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거부했다. 이에 교도 당국은 감방 안에 세면대를 설치했으나,[5][6] 수감자들이 감방 내 샤워 시설 설치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했고, 수감자들은 세면대 사용마저 거부했다.[5] 1978년 4월 말, H-Block 6 구역에서 수감자와 교도관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해당 수감자는 독방 감금되었고, 그가 교도관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수감자들의 분노는 커졌다.[5]
이에 대한 항의로 수감자들은 감방 내 가구를 부수기 시작했고, 교도 당국은 남은 가구마저 모두 치워버려 감방에는 담요와 매트리스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5] 수감자들이 감방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면서 교도관들은 감방 청소를 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수감자들은 요강을 비울 수 없게 되자 배설물을 감방 벽에 바르기 시작했다. 이로써 담요 시위는 더욱 극한 형태인 더러운 시위로 격화되었다.[7]
당시 상황의 심각성은 1978년 7월 31일 감옥을 방문한 토마스 오 피아흐 로마 가톨릭 추기경이자 아마 대주교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동물조차도 그런 상황에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텐데, 하물며 인간이겠습니까... 썩은 음식 찌꺼기와 인간의 배설물이 벽에 흩어져 있는 몇몇 감방의 악취와 오물은 거의 참을 수 없었다"고 말하며 비인간적인 환경을 강력히 비판했다.[9] 교도 당국은 감방 창문을 부수고 소독제를 뿌린 뒤, 스팀 호스로 벽을 청소하는 등 감방 환경을 개선하려 시도했지만, 수감자들이 감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시위를 재개하여 효과를 보지 못했다.[8]
4. 불결 시위 (1978년~1981년)
1978년 3월, 일부 수감자들이 교도관의 폭력을 우려해 샤워나 화장실 사용을 거부하면서 기존의 담요 시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5][6] 교도 당국이 감방 내 샤워 시설 설치 요구를 거부하고, 항의의 표시로 가구를 부순 수감자들의 감방에서 남은 가구마저 치워버리자,[5] 수감자들은 감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전면 거부했다. 이로 인해 요강을 비우는 행위('slop out')조차 할 수 없게 되자, 수감자들은 배설물을 감방 벽에 바르기 시작하며 불결 시위(dirty protest)로 저항 수위를 높였다.[7]
이 끔찍한 시위 방식은 열악한 교도소 환경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당시 수감자였던 팻 맥고운은 구더기가 들끓는 비위생적인 환경을 증언했으며,[8] 교도 당국은 스팀 청소 등으로 대응했지만 수감자들의 저항을 멈출 수는 없었다.[8] 1978년 중반에는 시위 참여자가 300명에 육박했고, 이들의 투쟁은 국제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8] 1978년 7월, 아마 대주교 토마스 오 피아흐 추기경은 교도소를 방문하여 "동물조차도 살 수 없는 비인간적인 상황"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아일랜드 역사에 뿌리 깊은 저항 정신으로 아일랜드어를 공부하며 정신을 지키는 수감자들의 높은 사기를 언급했다.[9][10]
영국 정부의 타협 없는 태도 속에 시위는 계속 확산되어, 1979년 말에는 새로 들어오는 수감자의 90%가 시위에 동참했다.[11] 1980년 1월, 수감자들은 교도소 유니폼 거부, 노역 거부, 자유로운 교류 및 교육/오락 활동 보장, 주 1회 면회/편지/소포 허용, 형기 감면 복원 등 5가지 요구 사항을 발표하며 투쟁 목표를 명확히 했다.[12] 같은 해 2월에는 메이리드 패럴 등 아르마 여성 교도소 수감자들도 불결 시위에 합류했다.[13] 그러나 1980년 6월, 유럽 인권 위원회는 수감자들이 제기한 소송을 기각하며 교도소 상황이 "수감자들이 자초한 것이며 정치적 동정을 얻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판결하여 영국 정부의 입장을 지지했다.[12]
4. 1. 시위의 확산
1978년 3월, 일부 수감자들은 교도관들의 공격을 우려하여 샤워나 화장실 사용을 위해 감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교도 당국은 감방 안에 세면대를 설치했지만,[5][6] 수감자들은 감방 내 샤워 시설 설치를 요구했고, 이것이 거부되자 세면대 사용마저 거부했다.[5] 1978년 4월 말, H-Block 6 구역에서 수감자와 교도관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해당 수감자는 독방 감금되었고, 그가 심하게 구타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5]이에 수감자들은 감방의 가구를 부수며 항의했고, 교도 당국은 남은 가구마저 모두 치워버렸다. 결국 수감자들은 담요와 매트리스만 있는 감방에 남겨지게 되었다.[5] 수감자들이 감방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자 교도관들은 감방 청소를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기존의 담요 시위가 'slop out'(요강 비우기)조차 거부하며 배설물을 감방 벽에 바르는 불결 시위(dirty protest)로 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7] 당시 수감자였던 팻 맥고운은 1985년 인터뷰에서 참혹했던 교도소 내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구토가 나올 때가 있었죠. 너무 기력이 쇠진해서 며칠 동안 가만히 누워 구더기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을 지켜볼 때도 있었고요. 창문으로 빗물이 들어오고, 구더기가 사방에 기어 다니는 곳에 누워 있곤 했죠.[8]
교도 당국은 감방 창문을 부수고 소독제를 뿌린 뒤, 수감자들을 잠시 다른 곳으로 옮기고 고무복을 입은 교도관들을 투입해 스팀 호스로 벽을 청소하는 방식으로 감방 위생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수감자들은 감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시위를 이어갔다.[8] 1978년 중반 무렵에는 시위에 참여하는 수감자가 250명에서 300명에 달했으며, 이 시위는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8] 로마 가톨릭 추기경이자 아마 대주교인 토마스 오 피아흐는 1978년 7월 31일 교도소를 직접 방문한 뒤, 열악한 환경을 강하게 비판했다.
> 일요일 하루 종일 감옥에 머물면서, 300명 이상의 수감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H-Block 3, 4, 5에서 만연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동물조차도 그런 상황에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텐데, 하물며 인간이겠습니까. 제가 본 것 중 가장 비슷한 것은 캘커타 빈민가 하수도관에서 수백 명의 노숙자들이 생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썩은 음식 찌꺼기와 인간의 배설물이 벽에 흩어져 있는 몇몇 감방의 악취와 오물은 거의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중 두 곳에서는 구토를 할까 봐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9]
오 피아흐 추기경은 이러한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수감자들의 사기는 높았다고 덧붙였다.
>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시위를 무기한으로 계속할 의향이 있으며, 범죄자로 분류되는 것보다 죽음을 택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아일랜드 역사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은 이 태도가 우리나라의 과거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알 것입니다. 고립과 영원한 지루함 속에서 그들은 아일랜드어를 공부함으로써 정신을 유지합니다. 이는 열악한 물질적 조건 속에서도 인간 정신이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지표였으며, 아일랜드 단어, 구절, 노래가 감방에서 감방으로 외쳐지고, 치약 튜브의 잔해로 각 감방 벽에 쓰여지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10]
영국 정부가 타협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시위는 계속되었고, 1979년 말에는 새로 들어오는 수감자 10명 중 9명이 시위에 동참할 정도로 확산되었다.[11] 1980년 1월, 수감자들은 다음과 같은 "5가지 요구 사항"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12]
| 번호 | 요구 사항 |
|---|---|
| 1 | 교도소 유니폼을 입지 않을 권리 |
| 2 | 교도소 노동을 하지 않을 권리 |
| 3 | 다른 수감자들과 자유롭게 교류하고, 교육 및 오락 활동을 조직할 권리 |
| 4 | 주 1회 면회, 편지, 소포를 받을 권리 |
| 5 | 시위로 인해 잃어버린 형기 감면의 완전한 복원 |
1980년 2월에는 아르마 여성 교도소의 메이리드 패럴과 30명 이상의 다른 여성 수감자들이 불결 시위에 합류했다. 이는 남성 교도관들의 부당한 대우를 포함한 교도소장과의 여러 갈등 끝에 내려진 결정이었다.[13] 북아일랜드 여성 수감자들은 이미 자신의 옷을 입을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담요 시위는 하지 않았지만, 불결 시위의 일환으로 생리혈을 감방 벽에 바르는 행위 등을 포함했다.
1980년 6월, 영국 정부의 강경한 입장은 유럽 인권 위원회의 결정으로 더욱 힘을 얻었다. 위원회는 키어런 너전트를 포함한 4명의 수감자가 제기한 교도소 내부 상황의 "비인간성"에 대한 소송을 기각하면서, 이러한 상황은 수감자들이 자초한 것이며 "수감자들의 정치적 목적에 대한 동정을 얻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판단했다.[12]
4. 2. 토마스 오 피아흐 추기경의 방문
토마스 오 피아흐 로마 가톨릭 추기경이자 아마 대주교는 1978년 7월 31일 교도소를 방문하여 열악한 환경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교도소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9]> 일요일 하루 종일 감옥에 머물면서, 300명 이상의 수감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H-Block 3, 4, 5에서 만연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동물조차도 그런 상황에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텐데, 하물며 인간이겠습니까. 제가 본 것 중 가장 비슷한 것은 캘커타 빈민가 하수도관에서 수백 명의 노숙자들이 생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썩은 음식 찌꺼기와 인간의 배설물이 벽에 흩어져 있는 몇몇 감방의 악취와 오물은 거의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중 두 곳에서는 구토를 할까 봐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 피아흐 추기경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수감자들의 사기가 높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는 수감자들의 저항 정신이 아일랜드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10]
>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시위를 무기한으로 계속할 의향이 있으며, 범죄자로 분류되는 것보다 죽음을 택하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아일랜드 역사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은 이 태도가 우리나라의 과거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알 것입니다. 고립과 영원한 지루함 속에서 그들은 아일랜드어를 공부함으로써 정신을 유지합니다. 이는 열악한 물질적 조건 속에서도 인간 정신이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지표였으며, 아일랜드 단어, 구절, 노래가 감방에서 감방으로 외쳐지고, 치약 튜브의 잔해로 각 감방 벽에 쓰여지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4. 3. 5가지 요구 사항
영국 정부의 타협 없는 태도 속에 시위는 계속되었고, 1979년 말에는 새로 수감되는 인원 10명 중 9명이 시위에 동참할 정도로 확산되었다.[11] 결국 1980년 1월, 수감자들은 다음과 같은 5가지 요구 사항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12]# 교도소 유니폼을 입지 않을 권리
# 교도소 노동을 하지 않을 권리
# 다른 수감자들과 자유롭게 교류하고, 교육 및 오락 활동을 조직할 권리
# 주 1회 면회, 편지, 소포를 받을 권리
# 시위로 인해 잃어버린 형기 감면의 완전한 복원
이 요구 사항 발표 이후에도 투쟁은 이어졌다. 1980년 2월에는 메이리드 패럴을 비롯한 아르마 여성 교도소의 수감자 30여 명도 불결투쟁에 동참했다.[13] 그들은 북아일랜드의 여성 수감자들이 이미 자신의 옷을 입을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담요 시위를 하지 않았지만, 생리혈을 감방 벽에 바르는 행위 등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유럽 인권 위원회는 키어런 너전트를 포함한 4명의 수감자들이 교도소 내부의 상황이 "비인간적"이라고 제기한 사건을 기각했다. 위원회는 해당 상황이 수감자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며 "수감자들의 정치적 목적에 대한 동정을 얻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판결했다.[12] 이는 수감자들의 요구에 대한 영국 정부의 강경한 입장을 더욱 뒷받침하는 결과를 낳았다.
5. 단식 투쟁
수감자들은 정치범 지위 회복을 위한 "5개 요구 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단식 투쟁을 벌였다.[12] 첫 번째 단식 투쟁은 1980년 10월 27일 아일랜드 공화국군(IRA)과 아일랜드 민족 해방군(INLA) 소속 수감자들이 시작하여 53일간 이어졌으나,[14][12] 요구 사항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5]
이에 따라 1981년 3월 1일, 바비 샌즈를 시작으로 두 번째 단식 투쟁이 시작되었고,[16] 이 투쟁이 시작되면서 불결 투쟁은 다음 날 종료되었다.[17] 두 번째 단식 투쟁 과정에서 바비 샌즈를 포함한 10명이 사망했으며,[16] 투쟁은 10월 3일 종료되었다. 이후 새로 임명된 북아일랜드 장관 짐 프라이어는 수감자들이 자신의 옷을 입도록 허용하는 등 일부 요구를 수용하는 교도소 정책 변화를 발표했다.[18]
5. 1. 1차 단식 투쟁 (1980년)
1980년 10월 27일, 아일랜드 공화국군 (IRA) 소속 브렌든 휴즈, 토미 맥키어니, 레이먼드 맥카트니, 톰 맥필리, 숀 맥케나, 레오 그린과 아일랜드 민족 해방군 (INLA) 소속 존 닉슨[14] 등 7명의 수감자들이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소위 "5개 요구 사항"을 통해 무장 단체 수감자로서의 정치범 지위를 회복하고자 했다.[12]단식 투쟁은 53일간 이어졌고, 숀 맥케나가 혼수상태에 빠져 생명이 위독해지자 브렌든 휴즈는 12월 18일 투쟁 중단을 결정했다.[12] 영국 정부는 투쟁 기간 중 30페이지 분량의 문서를 통해 수감자들의 요구 사항 핵심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12] 1981년 1월까지 수감자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수감자들은 영국 정부가 위기 해결에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1981년 2월 4일 다시 단식 투쟁을 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15]
5. 2. 2차 단식 투쟁 (1981년)
1980년의 첫 단식 투쟁이 요구 사항을 완전히 관철하지 못한 채 마무리된 후,[12] 1981년 1월까지도 수감자들의 요구는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1981년 2월 4일, 수감자들은 영국 정부가 위기 해결에 실패했다고 비판하며 "다시 단식 투쟁을 할 의사"가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15]결국 1981년 아일랜드 단식 투쟁은 바비 샌즈가 3월 1일 음식 섭취를 거부하면서 시작되었고,[16] 이와 함께 불결 투쟁은 다음 날인 3월 2일에 종료되었다.[17] 이 두 번째 단식 투쟁은 같은 해 10월 3일까지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바비 샌즈를 포함한 총 10명의 수감자가 목숨을 잃었다.[16] 단식 투쟁이 종료된 지 이틀 후, 새로 임명된 북아일랜드 장관 짐 프라이어는 교도소 정책 변경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모든 무장 단체 수감자들이 항상 자신의 옷을 입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었다.[18]
6. 단식 투쟁 이후
1981년 아일랜드 단식 투쟁은 바비 샌즈가 1981년 3월 1일 단식을 시작하면서 재개되었으며,[16] 10월 3일에 종료되었다.[16] 이 기간 동안 샌즈를 포함하여 총 10명의 수감자가 단식으로 인해 사망했다.[16] 단식 투쟁이 끝난 지 이틀 후인 10월 5일, 새로 부임한 북아일랜드 장관 짐 프라이어는 교도소 정책에 대한 몇 가지 변화를 발표했다. 이 변화에는 모든 무장 단체 수감자들이 항상 자신의 옷을 입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치가 포함되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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