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브와디스와프 슈필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베를린과 바르샤바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활동했다. 1935년 폴란드 라디오에 합류하여 활동하다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방송국이 폭격당한 후, 바르샤바 게토에서 생존을 위해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 장교 빌름 호젠펠트의 도움을 받아 은신 생활을 했으며, 종전 후에는 폴란드 라디오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그의 회고록 《피아니스트》는 영화로 제작되어 널리 알려졌으며, 2000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폴란드의 피아노 연주자 - 안나 마리아 요페크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의 가수 안나 마리아 요페크는 쇼팽 국립 음악원과 맨해튼 음악 학교에서 클래식과 재즈를 전공하고 세계적인 음악가들과 협업하며 국제적인 인지도를 쌓았으며 폴란드 예술을 세계에 알린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 폴란드의 피아노 연주자 -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외교관, 정치가로서 폴란드 독립 운동에 헌신하여 폴란드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역임하고 쇼팽 해석으로 유명하며, 폴란드 국민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폴란드를 대표하여 서명했다.
  • 소스노비에츠 출신 - 오이겐 폴란스키
    폴란드 출신 축구 선수 오이겐 폴란스키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독일 청소년 대표팀과 폴란드 국가대표팀에서 뛰었고,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헤타페 CF, 1. FSV 마인츠 05, TSG 1899 호펜하임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UEFA 유로 2012에 폴란드 대표로 참가했다.
  • 소스노비에츠 출신 -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는 폴란드 연합노동자당 제1서기를 역임하며 서방과의 관계 개선과 경제 개혁을 추진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실각하고 회고록을 출간했으며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부정적 측면이 공존한다.
  • 폴란드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 볼레스와프 비에루트는 폴란드 사회당과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혁명에 기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 공산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대통령과 총리를 역임하면서 폴란드를 소련의 영향력 아래 두고 스탈린주의적 정책을 시행했다.
  • 폴란드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폴란드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활약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망명 정부의 총리를 역임하며 폴란드군 재건과 연합군 협력을 주도했으나 1943년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여 폴란드 독립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브와디스와프 슈필만
기본 정보
슈필만
이름브와디스와프 슈필만
로마자 표기Władysław Szpilman
출생일1911년 12월 5일
출생지소소니에츠, 콩그레스 폴란드, 러시아 제국
사망일2000년 7월 6일
사망지바르샤바, 폴란드
국적폴란드인
직업작곡가, 피아니스트, 작가
활동 기간1930년–2000년
자녀2명 (incl. 안제이)
묘지포옹즈키 군사 묘지, 바르샤바
음악가 정보
악기피아노
장르클래식 음악
학력쇼팽 음악원
베를린 음악대학
기타

2. 생애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은 폴란드 바르샤바의 (프리데리크 쇼팽 음악대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웠으며,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였던 알렉산데르 미하우워스키와 요제프 스미도비치에게 사사했다.[1][2] 1931년에는 독일 베를린의 예술 아카데미에서 아르투르 슈나벨, 프란츠 슈레커, 레오니드 크로이처에게 배웠다.[1][2]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된 후 바르샤바로 돌아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다. 1935년 폴란드 라디오에 합류하여[3]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라디오의 연주자로 활동했다. 1945년 폴란드 라디오에서 일을 재개했을 때, 6년 전 중단했던 쇼팽의 《c#단조 녹턴》을 연주하며 첫 방송을 열었다.

1945년부터 1963년까지 폴란드 라디오의 대중음악부장을 역임하며, 여러 교향곡 작품과 약 500곡의 대중음악을 작곡했다. 1961년에는 폴란드 소포트에서 소포트 국제 음악제(Sopot International Song Festival)를 창설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바르샤바 게토로 강제 이주당했다.[4] 1942년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로 이송될 위기에서 유대인 게토 경찰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7] 1943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라디오 친구들과 동료 음악가들의 도움으로 은신 생활을 시작했다.[2][9]

1944년, 버려진 건물에서 독일군 장교 빌헬름 호젠펠트에게 발각되었으나, 호젠펠트는 오히려 슈필만을 도와주었다.[2][9]

1944년 슈필만이 빌름 호젠펠트를 만났던 바르샤바 니에포들레글로시 거리 223번지 건물


건물에 부착된 기념 명판


1945년 바르샤바 해방 후, 폴란드군에게 독일군으로 오인받을 뻔했으나 무사히 풀려났다. 1946년 전쟁 중 경험을 담은 『한 도시의 죽음』(Śmierć miasta)을 출판했다. 1951년 호젠펠트의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고 그의 구출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1950년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2002년 『한 도시의 죽음』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전쟁의 피아니스트』가 개봉되었다. 2000년 뇌출혈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

바르샤바 포봉스키 군묘지에 있는 블라디슬라프 슈필만의 묘

2. 1. 유년 시절과 교육

슈필만은 폴란드 바르샤바의 (프리데리크 쇼팽 음악대학교)에서 피아노를 공부했으며,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였던 알렉산데르 미하우워스키와 요제프 스미도비치에게 사사했다.[1][2] 1931년에는 독일 베를린의 예술 아카데미에서 아르투르 슈나벨, 프란츠 슈레커, 레오니드 크로이처에게 사사했다.[1][2]

2. 2. 피아니스트 및 작곡가로서의 경력

슈필만은 폴란드 바르샤바의 (프리데리크 쇼팽 음악대학교)에서 피아노를 공부했으며,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였던 알렉산데르 미하우워스키와 요제프 스미도비치에게 사사했다.[1][2] 1931년에는 독일 베를린의 예술 아카데미에서 아르투르 슈나벨, 프란츠 슈레커, 레오니드 크로이처에게 사사했다.[1][2]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된 후 바르샤바로 돌아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다. 주로 독주자로 활동했지만, 로만 토텐베르크, 이다 하엔델, 헨리크 셰링과 같은 바이올리니스트들과 실내악 파트너로도 활동했으며, 1934년에는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브로니슬라프 짐펠과 함께 폴란드 순회 공연을 가졌다.

1935년 4월 5일, 폴란드 라디오에 합류하여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3] 그의 작품으로는 오케스트라 작품, 피아노곡, 영화 음악뿐만 아니라 약 50곡의 노래가 포함되었는데, 이중 많은 곡이 폴란드에서 매우 인기를 얻었다. 1939년 9월 23일, 슈필만은 폴란드 침공 당시 폴스키 라디오의 유명 연주자이자 주요 독주자였으며, 그가 연주한 마지막 쇼팽 독주회 방송 직후 폭격을 당했다. 1945년 슈필만이 폴란드 라디오에서 일을 재개했을 때, 그는 6년 전에 중단했던 쇼팽의 《c#단조 녹턴》을 연주하며 첫 방송을 열었다.

1945년부터 1963년까지 슈필만은 폴란드 라디오의 대중음악부장을 역임했다. 동시에 콘서트 피아니스트이자 실내악 연주자로 폴란드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전역에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여러 교향곡 작품과 오늘날에도 폴란드에서 인기 있는 약 500곡의 다른 작품을 작곡했다. 또한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 음악을 작곡했으며, 1961년에는 폴란드 소포트에서 국제송 콘테스트를 창설하여 50년 이상 매년 여름 개최되도록 했다.

1963년 슈필만과 브로니슬라프 긴펠은 바르샤바 피아노 5중주단을 설립했으며, 1986년까지 로열 페스티벌 홀, 살 플레이엘, 살 가보, 헤르쿨레스 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등 세계 각지에서 2,000회 이상의 공연을 펼쳤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생활하던 시절에도 슈필만은 작곡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그의 작품에는 오케스트라곡, 협주곡, 피아노곡뿐만 아니라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 음악, 그리고 약 500곡에 달하는 노래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중 100곡 이상은 폴란드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1950년대에는 어린이를 위한 노래 약 40곡을 작곡하여 1955년 폴란드 작곡가 연합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그의 아들 안제이 슈필만은 1998년에 슈필만의 작품이 폴란드 외부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 이유에 대해 전후 "유럽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양분된 것" 때문이라고 언급했다.[5]

슈필만의 작품에는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기계의 삶"(1932), 바이올린 협주곡(1933), "옛 스타일의 왈츠"(1937), 영화 음악: "팔레스타인의 새벽, 낮, 밤"(1934), 히스(1938), 무렉 박사(Doctor Murek)(1939),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티노(1940), 자작 주제에 의한 파라프레이즈(1948), "교향악단을 위한 서곡"(1968) 그리고 폴란드에서 매우 인기 있는 많은 노래들이 포함되어 있다.[11]

1961년 그는 매년 여름 폴란드에서 개최되는 소포트 국제 음악제(Sopot International Song Festival)를 기획하고 조직했으며, 이 축제는 50년 이상 계속되고 있다. 그는 또한 폴란드 대중음악 작가 연합을 설립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바르샤바가 독일군에 점령되자, 일부 유대인들은 해외로 탈출했지만 슈필만 가족은 미국 참전을 기대하며 바르샤바에 남았다.[4] 초기에는 독일군이 재산 불가침을 약속했지만, 곧 약속은 파기되었고 유대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다.[4]

1940년 10월 31일, 슈필만과 그의 가족을 포함한 바르샤바의 모든 유대인들은 바르샤바 게토로 강제 이주당했다.[4] 게토는 나치 독일 점령 도시의 다른 지역과 벽으로 분리되었다. 슈필만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음악가로 일하며 ''노보체스나'' 카페, 시엔나 거리의 카페, ''슈투카'' 카페 등에서 연주했다.[5][6]

1942년, 슈필만의 가족은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다.[7] 슈필만은 유대인 게토 경찰의 도움으로 기차에 실리는 것을 피했지만, 그의 가족은 모두 살아남지 못했다.[7] 슈필만은 게토에 남아 노동자로 일하며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위해 무기를 밀반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7]

1943년 2월 13일, 게토가 폐쇄되기 직전 슈필만은 바르샤바에서 숨을 곳을 찾았다. 그는 폴란드 라디오의 친구들, 안제이 보구츠키와 그의 아내 야니나, 체스와프 레비츠키 부부, 비토르트 루토슬라프스키 등 동료 음악가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다.[2][9] 전쟁 중 슈필만을 도운 비유대인 폴란드인은 약 30명에 달했다.[8]

1944년 8월부터 슈필만은 니에포들레글로시 거리 223번지의 버려진 건물에 숨어 지냈다. 11월, 그는 그곳에서 독일군 장교인 빌헬름 호젠펠트 대위에게 발각되었는데, 호젠펠트는 그에게 피아노 연주를 지시하고, 놀랍게도 슈필만을 도와 여러 차례 음식과 물품을 가져다주었다.[2][9] 독일군이 바르샤바에서 후퇴할 때까지 이러한 도움은 계속되었다.

1945년 1월, 바르샤바가 해방된 후, 슈필만은 독일군 코트를 입고 밖을 나갔다가 폴란드군에게 독일군으로 오인받아 총에 맞을 뻔했지만, 오해를 풀고 무사히 돌아왔다.

2. 4. 빌름 호젠펠트와의 만남

1944년 11월, 슈필만은 바르샤바 니에포들레글로시 거리 223번지의 버려진 건물에 숨어 있다가 독일군 장교인 빌름 호젠펠트 대위에게 발각되었다. 호젠펠트는 슈필만에게 건물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게 했다. 놀랍게도 호젠펠트는 슈필만을 도와 여러 차례 음식과 물품을 가져다주었다.[2][9] 호젠펠트는 독일군이 바르샤바에서 후퇴할 때까지 슈필만을 도왔다.

슈필만과 호젠펠트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4년 12월 12일이었다. 독일군이 철수하면서 호젠펠트는 평소보다 많은 식량과 담요, 독일군 코트를 슈필만에게 주었다. 헤어지면서 슈필만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전후 어려움을 겪게 되면 폴란드 방송국의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말했다.

1945년 1월, 바르샤바가 해방된 후, 슈필만은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호젠펠트를 만났지만, 이미 포로들은 다른 곳으로 이송된 뒤였다.

2. 5. 종전 후 활동

슈필만은 1945년 폴란드 라디오에서 일을 재개하면서, 6년 전 마지막 방송에서 연주를 중단했던 쇼팽의 c#단조 녹턴을 다시 연주했다.[10] 1945년부터 1963년까지 폴란드 라디오의 대중음악부장을 역임했으며, 동시에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전역에서 콘서트 피아니스트이자 실내악 연주자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여러 교향곡 작품과 약 500곡의 대중음악을 작곡했다. 또한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 음악을 작곡했으며, 1961년에는 폴란드 소포트에서 국제송 콘테스트를 창설하여 50년 이상 매년 여름 개최되도록 했다.

1963년 슈필만과 브로니슬라프 긴펠은 바르샤바 피아노 5중주단을 설립했으며, 1986년까지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 홀, 파리의 살 플레이엘과 살 가보, 뮌헨의 헤르쿨레스 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등 세계 각지에서 2,000회 이상의 공연을 펼쳤다.

1946년에는 전쟁 중 경험을 정리한 『한 도시의 죽음』(Śmierć miasta)을 출판했다. 이 작품은 호평을 받아 1948년에 영화화되었지만, 원작과 전혀 다른 내용으로 완성되어 슈필만은 실망했다.

1951년, 서독에서 폴란드 라디오 방송국으로 호젠펠트의 아내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호젠펠트가 소련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으며, 전쟁 중에 슈필만을 도왔으니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슈필만은 폴란드 공산당에 호젠펠트의 구출을 요청했지만, 소련 측은 수용소에는 전쟁 범죄자만 수감되어 있다는 답변을 했다. 1957년 11월, 슈필만은 호젠펠트의 집이 있는 풀다로 향했지만, 호젠펠트가 이미 사망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호젠펠트 가족과 슈필만 가족은 가족끼리 교류하게 되었다.

슈필만은 1950년 6월에 결혼하여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연주 활동을 했으며, 음악가로서 성공하여 당시 폴란드에서는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2002년에는 『한 도시의 죽음』을 원작으로 한 영화 『전쟁의 피아니스트』가 개봉되었다. 시사회에는 호젠펠트의 아들도 초대되었다. 2000년뇌출혈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

2. 6. 회고록 《피아니스트》와 영화

1946년, 슈필만은 자신의 경험을 담은 회고록 《죽어가는 도시》(Śmierć miasta)를 출판했다. 이 책은 예르지 발도르프가 수정하고 비에자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나, 폴란드 스탈린주의 당국에 의해 검열을 받았다.[12][13][5] 예를 들어, 그를 도운 독일군 장교 빌름 호젠펠트(Wilm Hosenfeld)의 국적은 오스트리아인으로 변경되었다.

1998년, 슈필만의 아들 안제이는 아버지의 회고록을 확장하여 재출간했다. 독일어판(''Das wunderbare Überleben'')이 먼저 출판되었고, 이후 영어판 ''피아니스트''(The Pianist)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3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선데이 타임스'' 등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최고 도서"로 선정되었다. 2000년에는 유대인 분기별 윙게이트 상을, 2002년에는 ''리르''와 ''엘르''에서 "올해의 최고 도서"로 선정되었다. 폴란드어판 ''Pianista : warszawskie wspomnienia 1939–1945''는 2001년부터 3년 동안 폴란드 신문 ''르제치포스폴리타'' 베스트셀러 목록 1위를 차지했다.

회고록은 널리 찬사를 받았다. ''인디펜던트''는 "강렬하고 가슴 아픈 걸작"이라고 평가했으며, 다른 영국 일간지는 "그 시대를 그린 가장 강력한 서술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야누시 코르착(Janusz Korczak)에 대한 묘사는 "압도적으로 강력하고 애절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9년 영어판에는 빌름 호젠펠트의 일기(1942-44) 발췌본이 포함되었다.

2002년,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이 이 회고록을 바탕으로 영화 피아니스트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3개 부문(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최우수 작품상,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에이드리언 브로디(Adrien Brody)는 이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이 영화는 블라디슬라프 슈필만이 제공한 청사진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슈필만의 아들 안제이는 슈필만의 곡들을 모아 ''웬디 랜드가 부르는 피아니스트의 노래''라는 CD를 발매했다.

2. 7. 죽음과 유산

슈필만은 2000년 7월 6일, 88세의 나이로 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15][16] 그는 포봉즈키 군묘지에 안장되었다. 2011년 9월 25일, 폴란드 라디오 스튜디오 1은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7] 2011년 12월 4일, 바르샤바 니에포들레글로치 거리 223번지에 슈필만을 기리는 기념비(폴란드어와 영어로 새겨짐)가 공개되었다. 기념비 제막식에는 그의 아내 할리나 슈필만과 아들 안제이, 그리고 빌름 호젠펠트의 딸 요린데 크라이치-호젠펠트가 참석했다.[18][19] 다음 날, 슈필만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폴란드 대통령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가 슈필만의 미망인과 아들, 그리고 크라이치-호젠펠트를 만났다.[20]

미국의 클래식 및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우리 케인은 다양한 장르에서 슈필만의 작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케인의 콘서트 CD는 2014년 2월 24일에 발매되었다.[21]

3. 주요 작품

슈필만은 오케스트라곡, 협주곡, 피아노곡뿐만 아니라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 음악, 그리고 약 500곡에 달하는 노래를 작곡했다.[5] 그중 100곡 이상은 폴란드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5] 1950년대에는 어린이를 위한 노래 약 40곡을 작곡하여 1955년 폴란드 작곡가 연합으로부터 상을 받았다.[5]

그의 아들 안제이는 1998년에 슈필만의 작품이 폴란드 외부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 이유에 대해, 전후 "유럽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양분된 것" 때문이라고 언급했다.[5]

슈필만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11]


  •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기계의 삶"(1932)
  • 바이올린 협주곡(1933)
  • "옛 스타일의 왈츠"(1937)
  • 영화 음악: "팔레스타인의 새벽, 낮, 밤"(1934), 히스(1938), 무렉 박사(Doctor Murek)(1939)
  •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티노(1940)
  • 자작 주제에 의한 파라프레이즈(1948)
  • "교향악단을 위한 서곡"(1968)
  • 그 외 폴란드에서 매우 인기 있는 많은 노래들


그의 작품은 현재 뉴욕, 베를린, 런던에 있는 Boosey & Hawkes/Bote & Bock Music Publishers에서 출판되고 있다.[11]

4. 수상 및 서훈

슈필만은 2000년 7월 6일, 88세의 나이로 바르샤바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여 포봉즈키 군묘지에 묻혔다.[15][16]

2011년 9월 25일, 폴란드 라디오 스튜디오 1은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7] 2011년 12월 4일에는 바르샤바 니에포들레글로치 거리 223번지에 폴란드어와 영어로 새겨진 슈필만을 기리는 기념비가 공개되었다. 기념비 공개식에는 슈필만의 아내 할리나 슈필만과 아들 안제이, 그리고 빌름 호젠펠트의 딸 요린데 크라이치-호젠펠트가 참석했다.[18][19]

다음 날, 슈필만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폴란드 대통령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는 슈필만의 미망인과 아들, 그리고 크라이치-호젠펠트를 만났다.[20]

미국의 클래식 및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우리 케인은 다양한 장르에서 슈필만의 작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했으며, 2014년 2월 24일에 케인의 콘서트 CD가 발매되었다.[21]

5. 슈필만을 연기한 배우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한 2002년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애드리언 브로디가 슈필만을 연기했다.[1] 브로디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이 영화는 블라디슬라프 슈필만이 제공한 청사진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생존에 대한 헌사입니다."라고 말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Wladyslaw Szpilman http://www.boosey.co[...] 2019-09-11
[2] 웹사이트 The Pianist – Wladyslaw Szpilman – Homepage http://www.szpilman.[...] 2019-09-11
[3] 서적 The Pianist Orion Books 1999-00-00
[4] 서적 The Pianist: The Extraordinary True Story of One Man's Survival in Warsaw Picador 1999-09-01
[5] 서적 The Pianist Orion Books 2005-00-00
[6] 백과사전 Polski Słownik Biograficzny Polska Akademia Nauk 2013-00-00
[7] 서적 Warsaw Ghetto: A Diary https://www.amazon.c[...] L. B. Fischer 1945-01-01
[8] 서적 Polin: Studies in Polish Jewry Volume 32: Jews and Music-Making in the Polish Lands https://books.google[...]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20-01-14
[9] 문서 Szpilman 2005
[10] 웹사이트 Szpilman's Warsaw: The History Behind The Pianist 2011-02-27
[11] 웹사이트 Information on Szpilman's works at Boosey & Hawkes http://www.boosey.co[...] 2019-09-11
[12] 서적 Tradition, Translation, Trauma: The Classic and the Modern Classical Presence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1-00-00
[13] 서적 Śmierć miasta (a.k.a. The Pianist) Wiedza 1946-00-00
[14] 서적 The Pianist Orion Books 2005-00-00
[15] 학술지 Obituaries: Władysław Szpilman 1911‒2000 https://academic.oup[...] 2003-11-00
[16] 웹사이트 'The Pianist' hero Władyslaw Szpilman died 18 years ago this week. https://www.thefirst[...] 2019-02-26
[17] 웹사이트 Polish Radio – Studio 1 named after Pianist Szpilman http://thenews.pl/1/[...]
[18] 웹사이트 Tablica przypomni ocalenie Szpilmana http://tvp.info/info[...] 2011-12-04
[19] 웹아카이브 Szpilman, Wladyslaw https://web.archive.[...]
[20] 뉴스 Poland celebrates The Pianist's 100th birthday http://www.thenews.p[...] 2011-12-05
[21] 웹사이트 Uri Caine Plays Szpilman – "the Polish Gershwin" http://culture.pl/en[...]
[22] 웹사이트 CiNii(クリストファー・W・A・スピルマン) https://ci.nii.ac.jp[...]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