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프란츠 슈레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프란츠 슈레커는 1878년 모나코에서 태어나 빈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한 오스트리아-유대계 작곡가이다. 그는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얻어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이어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곡가였으나, 반유대주의와 나치당의 압력으로 인해 활동이 위축되었다. 슈레커는 1934년 베를린에서 사망했으며, 《먼 곳의 소리》, 《낙인 찍힌 자들》, 《보물 사냥꾼》 등의 오페라와 관현악곡, 실내악곡을 작곡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사람 - 카렐 차페크
    체코의 소설가, 극작가, 언론인, 수필가, 미술 평론가, 번역가인 카렐 차페크는 희곡 《R.U.R.》에서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고 과학기술 윤리 문제와 파시즘 위험을 다룬 작품으로 20세기 체코 문학과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체코어 사용에 기여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사람 - 루돌프 슈타이너
    오스트리아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괴테 연구로 이름을 알린 후 인지학을 창시하여 발도르프 교육, 생물역동 농업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었으나, 유사과학적 요소와 인종 관련 논란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 유대인 작곡가 - 에프렘 짐발리스트
    러시아 제국 출신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육자인 에프렘 짐발리스트는 레오폴트 아우어의 제자로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명성을 얻었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은퇴 후에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 유대인 작곡가 - 하워드 쇼어
    캐나다 출신 영화 음악 작곡가 하워드 쇼어는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음악 감독을 거쳐 《반지의 제왕》 3부작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영화 음악 작곡과 오페라 및 관현악 작품 발표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출신의 천재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다양한 장르에 걸쳐 900곡이 넘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고, 유럽 순회 연주 여행과 빈에서의 프리랜서 활동을 통해 성공적인 음악가 경력을 쌓았으며, 그의 음악은 독일 고전주의 음악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 안톤 브루크너
    안톤 브루크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로, 11개의 교향곡과 종교 음악 등을 작곡했으며,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19세기 서양 고전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란츠 슈레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프란츠 슈레커
출생일1878년 3월 23일
출생지모나코 몬테카를로
사망일1934년 3월 21일
사망지베를린
국적오스트리아
로마자 표기Franz Schreker
1912년경 슈레커
직업
직업작곡가
지휘자
대본가
음악 교육자
교육
교육 기관빈 국립 음악대학교
활동
활동 시기1896년 ~ 1934년
장르오페라
단체
소속 단체빈 국립 음악대학교
베를린 국립 음악대학교
웹사이트
웹사이트schreker.org

2. 생애

프란츠 슈레커는 보헤미아 출신 유대인 궁정 사진가 아버지 이그나츠 슈레커와 슈타이어마르크 주 출신 가톨릭 귀족 어머니 엘레오노레 폰 클로스만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후 1888년 으로 이주하여 빈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10][11] 1900년 졸업 후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지휘자로도 활동하며 필하모니 합창단을 이끌고 젬린스키나 쇤베르크의 주요 작품들을 초연했다.

1908년 무용가 그레테 비젠탈 자매를 위해 작곡한 팬토마임 Der Geburtstag der Infantin|공주님의 생일de이 성공하면서 작곡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12년에는 오페라 Der ferne Klang|아득한 울림de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빈 음악원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Die Gezeichneten|낙인찍힌 자들de(1918), Der Schatzgräber|보물 사냥꾼de(1920) 등 오페라 작품들이 연이어 성공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오페라 작곡가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 시기 작곡된 《실내 교향곡》은 현재까지도 자주 연주되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1920년부터는 베를린 고등음악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교육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그의 오페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 시작했으며, 점증하는 반유대주의나치즘의 대두는 그의 경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1932년 오페라 Der Schmied von Gent|겐트의 대장장이de 초연은 우익 시위로 방해받았고, 나치의 압력으로 Christophorus|크리스토포루스de의 초연이 취소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32년 베를린 고등음악학교 교장직을, 1933년에는 예술 아카데미 교수직을 차례로 잃었다. 1933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회복하지 못하고, 1934년 3월 21일 56세 생일을 앞두고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프란츠 슈레커는 모나코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유대인 궁정 사진가 이그나츠 프란츠 슈레커(Ignaz Franz Schrekker, 원래 이름은 이삭(Isak))였고, 어머니는 슈티리아 가톨릭 귀족 출신인 엘레오노레 폰 클로스만(Eleonore von Cloßmann)이었다.[1] 그는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자랐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1888년 가족과 함께 린츠를 거쳐 으로 이주했다.[1]

1892년, 그는 장학금을 받아 빈 국립음악대학교에 입학했다.[1] 처음에는 시그문트 바흐리히(Sigismund Bachrich)와 아놀드 로제(Arnold Rosé)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나,[5][6] 이후 로베르트 푸크스(Robert Fuchs)의 작곡 수업으로 옮겨 1900년에 작곡가로 졸업했다.[1]

2. 2. 초기 경력과 지휘 활동

슈레커는 1892년 장학금을 받고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지기스문트 바하리히와 아르놀트 로제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나[10][11], 이후 로베르트 푸크스의 작곡과로 전과하여 1900년에 졸업했다.

그는 일찍이 1895년에 도블링 음악 애호가 협회(Verein der Musikfreunde Döblingde)를 설립하며 지휘 활동을 시작했다. 1907년에는 빈 필하모닉 합창단을 결성하여 1920년까지 지휘했는데, 이 합창단은 젬린스키의 《시편 23번》과 쇤베르크의 Friede auf Erden|지상의 평화de 및 Gurre-Lieder 등 당대 주요 작곡가들의 여러 작품을 초연하며 주목받았다.[4] 슈레커는 쇤베르크, 젬린스키 등과 함께 고대 이집트와 극동 아시아 등 비서구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스타일을 통합한 유겐트슈틸 운동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4]

작곡가로서 초기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1901년 현악 합주를 위한 Intermezzo|간주곡de 작품 8로 Neue musikalische Press|신음악신문de이 수여하는 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1908년, 무용수 그레테 비젠탈과 그녀의 여동생 엘사의 의뢰로 Kunstschaude 개막 공연을 위해 판토마임 작품 Der Geburtstag der Infantin을 작곡했다. 이 작품의 성공은 슈레커가 작곡가로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젠탈 자매를 위해 Der Wind|바람de, Valse lente|느린 왈츠de, 무용극 Ein Tanzspiel (Rokoko)|로코코de 등 여러 무용 관련 작품을 추가로 작곡했다.

2. 3.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성공

무용가 그레테 비젠탈과 그녀의 여동생 엘자의 의뢰로 1908년 작곡한 팬토마임 《공주님의 생일》(Der Geburtstag der Infantinde)이 성공하면서 예술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성공을 계기로 슈레커는 비젠탈 자매를 위해 《바람》(Der Windde), 《느린 왈츠》(Valse lentede), 무용극 《로코코》(Ein Tanzspiel (Rokoko)de) 등 여러 춤곡 음악을 작곡했다. 슈레커는 그의 모든 성숙기 오페라의 대본을 직접 썼다.[4]

1909년 11월에는 1903년부터 작업해 온 오페라 《아득한 울림》(Der ferne Klangde)의 관현악 간주곡 '밤의 곡'(Nachtstückde)이 초연되었고, 191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오페라 전곡이 초연되면서 큰 성공을 거두며 그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같은 해 빈 국립음대의 교수직을 제안받아 1913년 정교수로 임명되었다.[7]

이 성공은 이후 10년간 이어질 성공의 시작이었다. 그의 다음 오페라 《장난감과 공주》(Das Spielwerk und die Prinzessinde)는 1913년 3월 15일 프랑크푸르트와 빈에서 동시 초연되었으나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빈에서 이 오페라가 일으킨 소동은 슈레커의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이 작품은 후에 1막짜리 '신비극'으로 개작되어 1915년 《장난감》(Das Spielwerkde)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하인리히 고트젤리히(Heinrich Gottselig)가 1922년경에 그린 슈레커의 석판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잠시 성공이 주춤했으나, 1918년 4월 25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오페라 《낙인찍힌 자들》(Die Gezeichnetende)이 초연되면서 슈레커는 당대 오페라 작곡가의 선두 주자로 올라섰다.[8] 1920년 1월 21일 역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된 오페라 《보물 사냥꾼》(Der Schatzgräberde)은 그의 경력에서 정점을 찍은 작품이었다. 이 두 오페라 사이에 작곡된 《실내 교향곡》(1916)은 빈 음악원 교수진을 위해 쓰였으며, 곧 주요 레퍼토리에 포함되어 오늘날까지도 슈레커의 작품 중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 중 하나로 남아 있다.

1920년 3월, 슈레커는 베를린 국립음대의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몇 년간 절정에 달했으며, 당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다음으로 가장 많이 상연되는 오페라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꼽혔다.

2. 4. 베를린 시기와 몰락

1920년 3월, 슈레커는 베를린 고등음악학교(Musikhochschule) 교장으로 임명되어 1932년까지 재직하며 다양한 학과에서 음악 교육을 실시했다.[3] 이 시기 슈레커의 명성과 영향력은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 정점에 달했으며, 당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다음으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3]

그러나 그의 예술적 운명은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1924년 오토 클렘페러의 지휘로 쾰른 오페라에서 초연된 오페라 ''이렐로헤''(Irrelohe)는 엇갈린 반응을 얻었고, 1928년 에리히 클라이버의 지휘 아래 베를린에서 공연된 ''노래하는 악마''(Der singende Teufel)는 실패로 평가받았다.[3]

정치적 상황의 악화와 반유대주의의 확산 역시 슈레커의 경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3] 1932년 베를린에서 오페라 ''겐트의 대장장이''(Der Schmied von Gent) 초연은 극우 세력의 시위로 얼룩졌으며, 나치당의 압력으로 1933년 프라이부르크에서 예정되었던 오페라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 oder Die Vision einer Oper)의 초연은 취소되었다 (이 작품은 1978년 프라이부르크에서 뒤늦게 초연되었다).[3]

결국 슈레커는 1932년 6월 베를린 고등음악학교 교장직을 잃었고, 이듬해에는 예술 아카데미(Akademie der Künste)의 작곡 교수직에서도 해임되었다.[3] 한때 독일 오페라의 미래로 칭송받았던 그는 작곡가로서 대중의 무관심 속에 놓이고 교육자로서도 소외되는 비극을 겪었다.[3]

1933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슈레커는 회복하지 못하고, 56번째 생일을 이틀 앞둔 1934년 3월 21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3] 나치 독일 치하에서 그의 음악은 다른 많은 유대인 및 반체제 작곡가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금지되었다.[4]

3. 주요 작품

프란츠 슈레커는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작품을 남겼지만, 특히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초기 성공작은 현악 합주를 위한 《간주곡》(Intermezzode) 작품 8로, 1901년 신음악신문으로부터 상을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1908년 무용가 그레테 비젠탈 자매를 위해 작곡한 팬토마임 《왕녀의 생일》(Der Geburtstag der Infantinde)은 그의 예술적 성장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12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된 오페라 《먼 곳의 소리》(Der ferne Klangde)는 슈레커에게 큰 성공을 안겨주었으며, 이후 약 10년간 그의 전성기가 이어졌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는 1918년 초연된 《낙인찍힌 자들》(Die Gezeichnetende)과 1920년 초연된 《보물 사냥꾼》(Der Schatzgräberde)이 있으며, 이 작품들을 통해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오페라 외에도 빈 음악원 교수진을 위해 작곡한 《실내 교향곡》(Kammersymphoniede, 1916)은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되는 그의 대표적인 관현악곡이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발표한 오페라 《이레로헤》(Irrelohede, 1924)와 《노래하는 악마》(Der singende Teufelde, 1928) 등은 이전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반유대주의의 심화는 그의 활동에 큰 제약을 가했다. 그의 마지막 완성된 오페라 《헨트의 대장장이》(Der Schmied von Gentde, 1932)는 초연 당시 우익 세력의 시위로 방해를 받았으며,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de)는 나치의 압력으로 초연이 무산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슈레커의 상세한 작품 목록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오페라

슈레커는 그의 모든 성숙기 오페라의 대본을 직접 썼다.[4] 1909년 11월, 그가 1903년부터 작업해 온 오페라 먼 곳의 소리( Der ferne Klangde )의 복잡한 관현악 간주곡(제목은 Nachtstück|나흐트슈튀크de)이 격렬한 반응 속에 초연되었다. 1912년 8월 18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에서 오페라 전곡이 초연되면서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같은 해, 빌헬름 보프(Wilhelm Bopp) 감독은 슈레커에게 그가 공부했던 빈 음악원의 임시 교수직을 제안했고, 1913년 초 그는 정교수로 임명되었다.[7]

이 성공은 작곡가에게 약 10년간의 큰 성공을 예고했다. 그의 다음 오페라인 장난감과 공주( Das Spielwerk und die Prinzessinde )는 1913년 3월 15일 프랑크푸르트와 빈에서 동시에 초연되었지만, 평가는 엇갈렸다. 이 작품은 후에 1막으로 개작되어 1915년 《장난감》( Das Spielwerkde )이라는 제목으로 개정되었다. 빈 초연 당시 일어난 소동은 오히려 슈레커의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그의 성공 가도를 잠시 멈추게 했지만, 1918년 4월 25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오페라 《낙인찍힌 자들》( Die Gezeichnetende )이 초연되면서 슈레커는 당대 오페라 작곡가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8] 1920년 1월 21일, 역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된 《보물 사냥꾼》( Der Schatzgräberde )은 그의 경력에서 정점을 찍은 작품이었다.

1920년 3월, 그는 베를린 국립음대( Hochschule für Musik in Berlinde )의 학장으로 임명되어 1932년까지 재직하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몇 년간 최고조에 달했으며, 당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다음으로 가장 많이 상연되는 오페라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1924년 쾰른에서 오토 클렘페러의 지휘로 초연된 《이레로헤》( Irrelohede )가 엇갈린 평가를 받고, 1928년 베를린에서 에리히 클라이버의 지휘로 초연된 《노래하는 악마》( Der singende Teufelde )가 실패하면서 그의 운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와 정치적 상황의 변화는 그의 경력에 종말을 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32년 베를린에서 초연된 《헨트의 대장장이》( Der Schmied von Gentde )는 우익 세력의 시위로 방해를 받았고, 프라이부르크에서 예정되었던 《크리스토포루스》( Christophorusde )의 초연은 나치의 압력으로 취소되었다. 결국 1932년 6월 베를린 국립음대 학장직에서 물러났고, 이듬해에는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의 작곡과 교수직에서도 해임되었다. 1933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이듬해 3월 21일 56세 생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슈레커가 작곡한 오페라 목록이다.

작곡 연도제목 (원제)형식초연 정보비고
1901–1902불꽃 (Flammende)단막 오페라작품 번호 10
1903–1910먼 곳의 소리 (Der ferne Klangde)3막 오페라1912년 8월 18일, 프랑크푸르트
1908; 1909–1912장난감과 공주 (Das Spielwerk und die Prinzessinde)프롤로그와 2막 오페라1913년 3월 15일, 프랑크푸르트 및 빈 동시 초연
1915장난감 (Das Spielwerkde)1막《장난감과 공주》 개작
1911; 1913–1915낙인찍힌 자들 (Die Gezeichnetende)3막 오페라1918년 4월 25일, 프랑크푸르트
1915–1918보물 사냥꾼 (Der Schatzgräberde)프롤로그, 4막, 간주곡, 에필로그 구성 오페라1920년 1월 21일, 프랑크푸르트
1919–1924이레로헤 (Irrelohede)3막 오페라1924년, 쾰른
1924–1928크리스토포루스, 또는 오페라의 환영 (Christophorus, oder Die Vision einer Operde)프롤로그, 2막 (3장) 오페라
1927–1928노래하는 악마 (Der singende Teufelde)4막 오페라1928년, 베를린
1929–1932헨트의 대장장이 (Der Schmied von Gentde)[9]3막 오페라1932년 10월 29일, 베를린
1933–1934멤논 (Memnonde)미완성 (서곡과 초고만 남음)


3. 2. 관현악곡


  • 1896: 현악 합주와 하프를 위한 '사랑의 노래' Liebeslied für Streichorchester und Harfedeu
  • 1899: '스케르초' Scherzodeu
  • 1899: '교향곡 가단조' Op.1 Symphonie a-molldeu (4악장은 소실됨)
  • 1900: 현악 합주를 위한 '스케르초' Scherzo für Streichorchesterdeu
  • 1900: 현악 합주를 위한 '간주곡' Intermezzo - Satz für Streichorchesterdeu (나중에 '낭만적 모음곡'의 제3곡으로 사용됨)
  • 1900: 관현악 반주부 여성 합창곡 '시편 제116번' Op.6 Der 116. Psalm für Frauenchor und Orchesterdeu
  • 1902: 관현악 반주가 딸린 합창곡 '백조의 노래' Op.11 Schwanengesang für Chor und Orchesterdeu
  • 1902-1903: 대관현악과 오르간을 위한 교향적 서곡 '에케하르트 서곡' Op.12 Ekkehard, symphonische Ouvertüre für großes Orchester und Orgeldeu
  • 1903: '낭만적 모음곡' Op.14 Romantische Suitedeu
  • 1904: '환상적 서곡' Op.15 Phantastische Ouvertüredeu
  • 1905: 오스카 와일드 동명 원작에 의한 동화 무도음악 '왕녀의 생일' Der Geburtstag der Infantindeu
  • 1908: '축전 왈츠와 왈츠풍 간주곡' Festwalzer und Walzerintermezzodeu
  • 1908: '느린 왈츠' Valse lentedeu
  • 1908-1909: 대관현악을 위한 '무용극 (로코코)' Ein Tanzspiel (Rokoko) für großes Orchesterdeu
  • 1909: 소관현악을 위한 마임 '바람' Der Wind - Pantomime für kleines Orchesterdeu
  • 1909: '야상곡' (오페라 '먼 곳의 소리' 중에서) Nachtstück aus der Oper Der ferne Klangdeu
  • 1909: '중성을 위한 5개의 노래' Fünf Gesängedeu (관현악 편성은 1920년)
  • 1913: '어떤 드라마를 위한 서곡' Vorspiel zu einem Dramadeu (오페라 '낙인 찍힌 자들' 중에서)
  • 1916: '실내 교향곡' Kammersymphoniedeu (대편성을 위한 '신포니에타' Sinfoniettadeu로도 구상됨)
  • 1918: 교향적 간주곡 (오페라 '보물 사냥꾼' 중에서) Symphonisches Zwischenspiel aus der Oper Der Schatzgräberdeu
  • 1923: 관현악 모음곡 '왕녀의 생일' Suite für Orchesterdeu (1905년 작품 편곡)
  • 1927: 관현악을 위한 팬토마임 '스페인의 축제' Pantomime Spanisches Fest für Orchesterdeu
  • 1928: '실내 관현악을 위한 작은 모음곡' Kleine Suite für Kammerorchesterdeu
  • 1929: '2개의 서정시' Zwei lyrische Gesängedeu (월트 휘트먼 원시에 의거, 관현악 편성은 1929년)
  • 1929–1930: '대관현악을 위한 네 개의 소품' Vier kleine Stücke für großes Orchesterdeu
  • 1932–1933: 멜로드라마 '인타페르네스의 여인' Das Weib des Intaphernes - Melodramdeu
  • 1933: '어떤 그랜드 오페라를 위한 서곡' Vorspiel zu einer großen Operdeu (미완성 오페라 '멤논' Memnondeu 중에서)

3. 3. 그 외 작품


  • 초기 합창곡
  • 초기 피아노곡
  • 가곡 (약 40곡)

4. 평가 및 영향

프란츠 슈레커는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다음으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과 영향력의 정점에 있었다. 그는 생전에 독일 오페라의 미래로 칭송받기도 했다.[3]

슈레커의 음악은 리하르트 바그너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성숙한 스타일은 매우 개성적인 화성 언어를 보여준다. 이는 기본적으로 조성 음악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반음계적이고 복조성적인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다채로운 음향을 만들어낸다.[4] 그는 또한 표현주의 양식을 사용하여 동시대 작곡가이자 친구였던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음악적 영감을 주고받았다.[4] 특히 그의 오페라는 극적인 표현력과 섬세한 심리 묘사, 뛰어난 관현악 기법으로 주목받았다. 모리스 라벨은 빈 방문 시 슈레커의 《실내 교향곡》 악보를 구해 프랑스로 가져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나 1924년 오토 클렘페러 지휘로 쾰른에서 초연된 오페라 《이렐로헤(Irrelohe)》가 엇갈린 반응을 얻고, 1928년 에리히 클라이버 지휘 아래 베를린에서 공연된 《노래하는 악마(Der singende Teufel)》가 실패하면서 그의 예술적 운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여기에 나치즘의 대두와 반유대주의의 확산은 슈레커의 경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1932년 베를린에서 《겐트의 대장장이(Der Schmied von Gent)》 초연은 극우 세력의 시위로 얼룩졌고, 나치당의 압력으로 1933년 프라이부르크에서 예정되었던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 oder Die Vision einer Oper)》의 초연은 취소되었다 (이 작품은 1978년에야 프라이부르크에서 초연될 수 있었다). 결국 슈레커는 1932년 6월 베를린 고등음악학교 교장직을, 이듬해에는 예술 아카데미 작곡과 교수직을 차례로 잃었다.[3] 나치 독일 시대(제3제국)에는 그의 음악이 다른 많은 유대인 및 진보적 예술가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퇴폐음악'으로 낙인찍혀 연주가 금지되었다.[4] 이러한 정치적 탄압과 1934년 뇌졸중으로 인한 그의 이른 죽음은 슈레커의 음악이 독일어권 밖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4]

수십 년간 잊혔던 슈레커의 작품은 1950년대 후반 테오도르 아도르노에 의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아도르노는 슈레커 음악의 특징인 다채로운 화음의 음색과 음향에 주목하며, 이것이 포스트 세리얼 음악의 음향 작곡법(Sonorism)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12]

최근 들어 슈레커는 독일어권 국가와 미국을 중심으로 상당한 명성 회복을 누리고 있다. 200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는 켄트 나가노 지휘로 《표식받은 자들(Die Gezeichneten)》이 공연되었고, 빈 유대인 박물관에서는 그의 생애와 작품을 조명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2010년에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취리히 오페라 등에서 《먼 곳의 소리(Der ferne Klang)》가 새롭게 무대에 올랐으며, 같은 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오페라에서 《표식받은 자들》이, 바드 서머스케이프 페스티벌에서 《먼 곳의 소리》가 공연되며 미국 초연이 이루어졌다. 《이렐로헤》 역시 2004년 빈 폴크스오퍼, 2010년 본 오페라, 2022년 리옹 국립 오페라 등에서 공연되며 재조명받고 있다. 호주 작곡가 데이비드 스탠호프는 슈레커의 "극의 서곡(Prelude to a Drama)"을 녹음하는 등, 그의 작품은 세계 각지에서 다시 연주되고 연구되고 있다.

슈레커는 작곡가로서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베를린 고등음악학교 교장과 예술 아카데미 교수로서 에른스트 크레네크, 알로이스 하바, 야샤 호렌슈타인, 아르투르 로진스키, 한스 슈미트-이젤슈테트, 우와디스와프 슈필만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참조

[1] 웹사이트 Schreker, Franz https://www.deutsche[...] Deutsche Biographie 1934-03-21
[2] 웹사이트 Schreker (Schrecker), Ehepaar https://www.musiklex[...]
[3] 웹사이트 Franz Schreker http://orelfoundatio[...]
[4] 서적 Forbidden Music: The Jewish Composers Banned by the Nazis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13-06-18
[5] 웹사이트 Programme notes for a concert of Schreker http://www.hrt.hr/gp[...]
[6] 웹사이트 Franz Schreker (1878–1934): de la gloire à la renaissance en passant par l'oubli http://www.mus.ulava[...] 1983-01
[7] 간행물 Hailey
[8] 간행물 Celestini
[9] 웹사이트 Müde fährt der Schmied gen Himmel http://www.kultivers[...] 2013-04-05
[10] 웹사이트 Programme notes for a concert of Schreker http://www.hrt.hr/gp[...] 2009-02-01
[11] 웹사이트 Sonances article about Schreker http://www.mus.ulava[...] 2009-02-01
[12] 서적 作曲の20世紀ⅰ 音楽之友社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