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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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츠 리스트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헝가리 출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그는 뛰어난 피아노 기교와 혁신적인 작곡 스타일로 명성을 얻었으며, 교향시를 창시하고 신독일악파를 이끌었다. 리스트는 피아노 연주 기법을 혁신하고, 자유로운 화성 및 조성 확장을 통해 20세기 음악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피아노곡, 관현악곡, 종교 음악 등이 있으며, '리슈토마니아'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유럽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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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리스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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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프란츠 리스트 |
로마자 표기 | Franz Liszt |
헝가리어 표기 | Liszt Ferenc |
출생일 | 1811년 10월 22일 |
출생지 |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도보랸 |
사망일 | 1886년 7월 31일 |
사망지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바이로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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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
직업 | 피아니스트 작곡가 |
활동 정보 | |
활동 기간 | 1824년 - 1886년 |
장르 | 클래식 음악 |
악기 | 피아노 |
가족 정보 | |
배우자 | 마리 다구 (1833–1839) 카롤린 추 자인-비트겐슈타인 (1847) |
자녀 | 3명, 코지마 바그너 포함 |
기타 가족 | 프란츠 폰 리스트 (사촌) |
기타 정보 | |
별칭 | 피아노의 마술사 |
학력 | 빈 음악원 |
작품 목록 | 작품 목록 |
2. 생애
프란츠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쇼프론 주 도보르얀(현재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주 라이딩)에서 태어났다.[16] 아버지는 아담 리스트이며, 어머니는 안나 리스트(결혼 전 이름은 마리아 안나 라거)였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기타를 연주했으며, 에스테르하지 2세 공작의 궁정 음악가로, 하이든, 훔멜, 베토벤 등 유명 작곡가들과 친분이 있었다.[16]
리스트는 7세 때 아버지에게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곧바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9세 때 쇼프론에서 연주회를 열어 재정적 후원을 받아 빈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16] 빈에서 리스트는 카를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1822년 빈에서 정식 데뷔하여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만나기도 했다.[16]
1823년, 리스트는 파리로 이주하여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려 했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17] 페르디난도 파에르와 안톤 라이하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다.[17] 1827년, 아버지 아담 리스트가 사망하자[17] 어머니와 함께 파리에서 살면서 피아노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17] 이듬해, 샤를 10세의 상업장관의 딸과 사랑에 빠졌으나, 신분 차이로 헤어진 후[18] 종교적으로 방황하는 시기를 보냈다.[19] 빅토르 위고, 하인리히 하이네 등 당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7월 혁명에 영감을 받아 혁명 교향곡을 구상하기도 하고,[20]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레데리크 쇼팽 등과도 친분을 맺었다.[20]
1832년 니콜로 파가니니의 콘서트를 보고 피아노의 거장이 되기로 결심한 리스트는,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다른 피아니스트들을 뛰어넘는 독보적인 인물이 되었다. 1833년,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필사하며 그를 돕고, 프레데리크 쇼팽과의 우정을 쌓았다.[21] 같은 해 마리 다구 백작 부인과 사랑에 빠져 제네바로 이주했다. 1837년에는 지기스문트 탈베르크와 공개 대결을 펼쳤는데, 쥘 자냉(Jules Janin)은 "두 명의 승자와 패자는 없다"라고 평했지만, 벨지오조 공주는 "탈베르크는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이다. 리스트는 독보적이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리스트는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연주 활동을 펼쳤고, 1840년대에는 "리스트 열풍(Lisztomania)"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1847년 리스트는 카롤린 폰 자인-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 깊은 사랑에 빠져 다구 백작부인과 헤어졌다. 공작부인은 리스트에게 작곡에 집중할 것을 권했다.[1] 두 사람은 결혼하려 했으나, 교황청과 비오 9세는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1]
1858년 바그다드의 이발사de 초연에 대한 반대에 직면하여 사임한 리스트는[5] 로마로 이주하였다. 1865년에는 가톨릭 하급 성직자가 되었고, 이후 종교 음악 작곡에 헌신하였다.[6] 1869년부터는 로마,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오가며 생활하였다.[7]
말년의 리스트는 이전의 장대한 피아노곡 대신 짧고 무조적인 곡을 작곡했다. 1885년에는 『무조의 바가텔』을 통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무조 음악을 완성했다. 리스트는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종교 합창곡 작곡과 개혁에도 힘을 쏟았다. 오라토리오 『성 엘리자베트의 전설』,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장엄 미사곡』, 『헝가리 대관 미사곡』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2. 1. 어린 시절

프란츠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쇼프론 주 도보르얀(현재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주 라이딩)에서 태어났다.[16] 아버지는 아담 리스트이며, 어머니는 안나 리스트(결혼 전 이름은 마리아 안나 라거)였다.
리스트의 아버지 아담은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기타를 연주했으며, 에스테르하지 2세 공작의 궁정 음악가였다. 그는 하이든, 훔멜, 베토벤 등 유명 작곡가들과 친분이 있었는데, 이는 훗날 리스트가 훌륭한 피아니스트들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리스트는 7세 때 아버지에게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곧바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9세 때에는 쇼프론에서 연주회를 열었는데, 리스트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들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받아 빈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16]
빈에서 리스트는 베토벤과 훔멜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16] 또한 당시 빈 궁정의 음악 감독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웠다. 1822년 12월 1일, 리스트는 빈에서 열린 란트스텐디셔 살 콘서트에서 정식으로 데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귀족 사회에서 환영받았으며,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만나기도 했다.[16]
2. 2. 파리에서의 청소년기
1823년, 리스트는 파리로 이주하여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려 했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17] 대신 페르디난도 파에르와 안톤 라이하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다.[17] 1827년, 아버지 아담 리스트가 사망하자 리스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17] 그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피아노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17]이듬해, 리스트는 샤를 10세의 상업장관의 딸인 카롤랭 드 생크릭과 사랑에 빠졌으나, 신분 차이로 인해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18] 이 일로 큰 상처를 받은 리스트는 종교적으로 방황하는 시기를 보냈다.[19] 그는 빅토르 위고, 하인리히 하이네 등 당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7월 혁명에 영감을 받아 혁명 교향곡을 구상하기도 했다.[20] 또한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레데리크 쇼팽 등과도 친분을 맺었다.[20]
2. 3. 파가니니의 영향
1832년 4월 20일, 니콜로 파가니니의 자선 콘서트를 관람한 리스트는 바이올린의 거장인 파가니니처럼 피아노의 거장이 되기로 결심했다.[21] 당시 파리는 지기스문트 탈베르크, 알렉산더 드라이쇼크 등 피아노 연주자들이 모여드는 중심지였다. 이들은 "세 손 연주 효과"나 옥타브 같은 기교에 집중했는데, 일명 '날아다니는 공중그네 학파'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어려운 피아노 기법 문제들을 해결하며 연주 수준을 크게 높였다. 리스트는 이들 중에서도 모든 피아노 연주 기법을 마스터한 독보적인 인물이었다.2. 4. 유럽 순회 공연
1833년, 리스트는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필사하며 그를 돕고, 프레데리크 쇼팽과의 우정을 쌓았다.[21] 같은 해 마리 다구 백작 부인과 사랑에 빠져 제네바로 이주했다. 1835년, 지기스문트 탈베르크가 파리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펼치자, 리스트는 1836년 가을 ''Gazette musicale''에 탈베르크의 작품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며 논쟁을 벌였다.1837년 2월, 리스트는 파리 음악원에서 탈베르크의 연주를 처음 들었고, 두 피아니스트는 공개 대결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리스트는 ''니오베 모티프에 의한 대 환상곡''과 베버의 ''F단조 협주곡''을 연주했다. 3월 31일, 벨지오조 공주의 살롱에서 열린 두 번째 대결에서 탈베르크는 ''로시니의 "모세"에 의한 환상곡''을 연주했고, 리스트는 ''니오베'' 환상곡을 다시 연주했다.
쥘 자냉(Jules Janin)은 "두 명의 승자와 패자는 없다"라고 평했지만, 벨지오조 공주는 "탈베르크는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이다. 리스트는 독보적이다."라고 선언했다. 앨런 워커는 리스트가 더 큰 갈채를 받았다고 평가했다. 이후 리스트는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연주 활동을 펼쳤고, 1840년대에는 "리스트 열풍(Lisztomania)"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2. 5. 바이마르 시대
1847년 리스트는 키예프에서 카펠마이스터로 일하던 중 카롤린 폰 자인-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 깊은 사랑에 빠져 다구 백작부인과 헤어졌다. 공작부인은 리스트에게 피아노 공연보다는 작곡에 집중할 것을 권했다.[1] 두 사람은 결혼하려 했으나, 교황청과 비오 9세는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는 전 남편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압력 때문이었다. 자인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살아있었고, 3년 전 재혼한 상태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황제의 부관을 맡았던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 또한 니콜라이 1세는 과거 리스트의 연주 도중 수다를 떨다가 망신을 당한 적이 있어 앙금이 남아있었다.[1]2. 6. 로마 시대
바그다드의 이발사de 초연에 대한 반대에 직면하여 1858년 사임한 리스트는[5] 로마로 이주하였다. 1865년에는 가톨릭 하급 성직자가 되었고, 이후 종교 음악 작곡에 헌신하였다.[6] 1869년부터는 로마,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오가며 생활하였다.[7]2. 7. 말년
1860년대와 1870년대에 리스트의 작품 대부분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음악계의 진보 운동 중심은 1870년대 바그너가 있는 바이로이트로 옮겨갔다. 말년의 리스트는 이전의 장대한 피아노곡 대신 짧고 무조적인 곡을 작곡했다. 이 시기의 음악은 깊이 있는 음악이 많아졌으며, 특히 1880년 이후에는 5분 이상의 곡은 거의 없고 더욱 심오해졌다. 1885년에는 『무조의 바가텔』을 통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무조 음악을 완성했다.리스트는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종교 합창곡 작곡과 개혁에도 힘을 쏟았다. 오라토리오 『성 엘리자베트의 전설』,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장엄 미사곡』, 『헝가리 대관 미사곡』 등 관현악을 수반하는 대곡과 『십자가의 길』과 같은 무조적인 작품, 그리고 많은 소품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작곡 활동은 당시 가톨릭 교회 음악 개혁 운동과도 연관되어 리스트의 창작 활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3. 주요 작품
리스트는 다작의 작곡가로, 피아노 음악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오케스트라와 실내악곡도 작곡했다.[1] 그의 피아노 작품은 연주하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하며,[1] 일부는 시나 미술 등 음악 외적인 영감에서 비롯된 표제 음악이다.[1] 리스트는 교향시의 창시자로 여겨진다.[1]
리스트의 작품은 초고, 2고 등 개정판이 많아 전체 작품 수를 세기 어렵다. 분실되거나 미완성된 작품도 400곡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1] 현재 리스트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레스리 하워드의 '리스트 피아노곡 전집'(전 57권, CD 95매)이 대표적이다.[1]
작품 번호는 험프리 시얼이 분류한 시얼 번호(S.)와 페터 라베의 라베 번호(R.) 두 가지가 사용되지만, 현재는 시얼 번호가 더 많이 사용된다.[1]
3. 1. 피아노곡
리스트는 19세기 대표적인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피아노에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더해 생동감 넘치는 연주를 선보였다. 그는 피아노를 단순한 타악기가 아닌 오케스트라 전체를 표현할 수 있는 악기로 보았으며, 피아노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섬세한 표현과 기교를 추구했다.[1] 그는 인상주의 음악의 선구자로 여겨지며, 모리스 라벨과 클로드 드뷔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후기에는 무조성의 실험적인 곡들을 작곡하는 등 피아노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리스트의 대표적인 피아노곡은 다음과 같다.
- '''초절기교 연습곡'''(Études d'exécution transcendante): 다양한 스타일과 높은 기술적 난이도를 가진 곡으로, "가장 리스트다운 리스트"라고 묘사된다.[4]
- '''파가니니 대연습곡'''(Grandes études de Paganini): 니콜로 파가니니의 기교를 피아노로 표현하고자 한 곡으로, 유명한 "라 캄파넬라"를 포함한다.[4]
-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 유럽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으로, 철저하게 개정되었다.[4]
- '''피아노 소나타 B단조''': "19세기 소나타 형식에 대한 가장 독창적인 공헌 중 하나"로 평가받는 곡이다.[4]
- '''헝가리 광시곡'''(Hungarian Rhapsodies): 헝가리를 방문하는 동안 들었던 로마니 밴드의 영향을 받아 작곡한 곡이다.[4]
- '''사랑의 꿈'''
- '''위안'''
- '''무조의 바가텔'''(Bagatelle sans tonalité): 1885년에 작곡된 곡으로, 리스트가 오랫동안 추구해 온 무조 음악을 완성한 작품이다.[6]
3. 2. 관현악곡
리스트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교향시를 창시하여 음악에 문학적 요소를 도입하고 자유로운 화성을 사용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표제 음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시적 이미지나 서사에 의해 주도되는 작품을 옹호했다.리스트의 주요 관현악곡은 13개의 교향시로, 1848년에서 1858년 사이에 작곡된 12개의 교향시와 그 이후에 작곡된 곡들로 구성된다. 이 작품들은 단악장 형식의 관현악곡으로, 문학적, 서사적 요소를 담고 있다. 대표적인 교향시로는 프렐류드, 마제파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리스트는 파우스트 교향곡, 단테 교향곡 등의 관현악곡을 작곡했다.
3. 3. 종교 음악
리스트는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종교 합창곡의 작곡과 개혁에 힘을 쏟았다. 오라토리오 『성 엘리자베트의 전설』,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장엄 미사곡』, 『헝가리 대관 미사곡』과 같은 대규모 관현악곡, 그리고 『십자가의 길』과 같이 만년의 무조적인 작품, 그리고 여러 소품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그의 종교 음악 작곡 활동은 당시 가톨릭 교회 음악 개혁 운동과도 연관되어 있으며, 리스트의 창작 활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3. 4. 가곡
리스트의 가곡들은 오늘날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19] 리스트는 137개의 세속 성악곡을 작곡했으며, 그중 82곡은 대부분 1840년대에 작곡된 피아노 반주가 있는 독창곡이다.[20] 가사는 대부분 독일어이지만,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로 된 것도 있고, 헝가리어로 된 3곡, 러시아어와 영어로 된 것이 각각 1곡씩 있다.[21]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은 가곡에서 사용된 아리오소와 레치타티보 스타일에서 확인할 수 있다.[20] 바이마르 시절, 리스트는 궁정 오페라 가수들을 지도했으며, 로자와 한스 폰 밀데를 포함한 여러 저명한 음악가들이 그의 가곡을 불렀다.[19]대표적인 가곡은 다음과 같다:
4. 음악적 특징 및 영향
쇼팽과 리스트는 1830년대 초 파리에서 같은 예술가 그룹에서 활동하며 처음 만났고, 1833년 중반까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둘은 여러 차례 함께 공연했는데, 쇼팽은 대중 앞에서 공연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공연들은 그의 총 공연 횟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1840년대 초, 둘의 관계는 식었는데,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두 음악가의 성격 차이와 서로 가까이 살지 않았다는 점 등이 원인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쇼팽과 리스트가 서로의 작곡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찰스 로젠은 쇼팽의 연습곡 Op. 10, No. 9과 리스트의 초절 기교 연습곡 10번 초기 버전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지만, 앨런 워커는 그러한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리스트는 다작의 작곡가로, 피아노 음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오케스트라와 다른 실내악단을 위한 작품도 작곡했다. 그의 피아노 작품은 종종 연주하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하며, 시나 미술과 같은 음악 외적인 영감을 바탕으로 한 표제 음악이 많다. 리스트는 교향시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리스트는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제창한 표제음악을 더욱 발전시켜 교향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확립하고 13곡의 교향시를 작곡했다. 낭만파 시대 대표적인 작곡가 중 한 명으로서 신낭만파에 속하며, 교향시를 창시하여 음악에 문학적 요소를 도입하고 자유로운 화성을 사용하여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기에는 무조성의 실험적인 곡들을 작곡하는 등 피아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리스트의 후기 작품들은 전통적인 화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시도를 보여주며, 죽음과 애도와 관련된 작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3] 1885년에 『무조의 바가텔』로 오랫동안 추구해 온 무조 음악을 완성했다.[6]
베를리오즈, 바그너 등과 함께 신독일악파를 이끌었다.[1] 1859년 프란츠 브렌델은 자신의 출판물 Neue Zeitschrift für Musik|신음악잡지de에서 리스트가 바이마르에 있을 당시 그와 관련된 음악가들을 가리켜 "신독일악파"라는 이름을 만들었다.[1] 신독일악파는 표제 음악의 발전, 화성 실험, 광범위한 변조, 그리고 리트모티프와 주제 변형의 사용과 같은 형식적 혁신을 공유했다.[2]
절대음악을 옹호한 브람스 등 보수주의자들에게 도전하는 진보적인 작곡가들의 느슨한 연합이었다.[1]
4. 1. 피아노 기교의 혁신
니콜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은 리스트는 자신도 피아노의 초절기교를 목표로 하였다. "피아노는 그 자체로 오케스트라다"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피아노의 표현 가능성을 극대화했다. 옥타브 도약, 빠른 패시지, 넓은 음역 사용 등 화려하고 어려운 기교를 구사했다. 페달 사용, 음색 변화 등을 통해 오케스트라와 같은 풍부한 음향을 만들어냈다.[4] 대표적으로 베토벤 교향곡 피아노 편곡, 베를리오즈 교향곡 피아노 편곡,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 피아노 편곡, 대연주회용 독주곡 등이 있다.[4]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뛰어난 기교를 지녀 "피아노의 마술사"라고 불렸으며, 어떤 곡이든 초견으로 연주해 냈다.[4] 그의 기교와 음악성 때문에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손가락이 여섯 개인가?"라는 소문이 진지하게 믿어질 정도였다.[4] 리스트 사후, 그를 뛰어넘는 피아니스트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진다.
"여섯 손가락"은 과장이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손가락을 늘이는 연습을 거듭하여 손가락이 길었고 12도의 음정도 가볍게 잡을 수 있었다. 그는 10도가 넘는 화음이 연속되는 곡을 작곡하기도 했으며(나중에 8도로 개정한 곡도 있다), 그의 곡에는 양손을 벌려 4옥타브의 음이 자주 사용되었다. 또한 빠른 패시지에서도 음수가 많은 화음을 자주 사용했다. "라 캄파넬라"가 대표적이며 양손 옥타브 도약, 빠른 포지션 이동이 많지만, 그 징후는 처녀작인 "12의 연습곡" 작품 1의 제6곡에서 이미 볼 수 있다.
리스트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의 기록에 따르면, 섬세하면서도 매우 열정적이고 강력한 연주를 했다고 하며, 연주 중에 현이 끊어지거나 피아노의 해머가 고장 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처음부터 피아노 세 대를 준비해서 연주한 적도 있었다. 한 대가 고장 나면 다음 피아노로 옮겨 연주하는 식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피아노 제조 회사인 베젠도르퍼는 리스트의 연주에 견딘 것으로 유명해졌다.
리스트는 즉흥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악보는 물론 건반조차 보지 않고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여 연주했다고 한다(연주 중인 리스트의 사진이나 초상화 중 건반을 보고 연주하는 것은 한 장도 없다).
4. 2. 교향시 창시
리스트는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제창한 표제음악을 더욱 발전시켜 교향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확립했다.[8] 그는 13곡의 교향시를 작곡했지만, 오늘날 전주곡을 제외하고는 연주되는 경우가 드물다.제목 | 원제 | 작곡 연도 | 연주 시간 |
---|---|---|---|
산 위에서 들리는 소리 | Ce qu'on entend sur la montagne | 1848-56년 | 약 30분 |
타소, 비탄과 승리 | Tasso, lamento e trionfo | 1848-54년 | 약 21분 |
전주곡 | Les préludes | 1848-53년 | 약 15분 |
오르페우스 | Orpheus | 1853-54년 | 약 11분 |
프로메테우스 | Prometheus | 1850-55년 | 약 13분 |
마제파 | Mazeppa | 1851-54년 | 약 16분 |
축제의 소리 | Festklänge | 1853년 | 약 20분 |
영웅의 애가 | Héroïde funèbre | 1849-54년 | 약 27분 |
헝가리 | Hungaria | 1854년 | 약 23분 |
햄릿 | Hamlet | 1858년 | 약 14분 |
훈족의 전투 | Hunnenschlacht | 1856–57년 | 약 15분 |
이상 | Die Ideale | 1857년 | 약 27분 |
요람에서 무덤까지 | Von der Wiege bis zum Grabe | 1881-82년 | 약 14분 |
4. 3. 화성 및 조성의 확장
리스트는 낭만파 시대 대표적인 작곡가 중 한 명으로서 신낭만파에 속하며, 교향시를 창시하여 음악에 문학적 요소를 도입하고 자유로운 화성을 사용하여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곡 수는 매우 많고, 그 평가는 오늘날에 있어서 각각 다르나, 교향시 형식의 완성, 또 근대적 색채의 관현악법의 일면을 개척한 것은 동일하게 인정받고 있다.특히 후기에는 무조성의 실험적인 곡들을 작곡하는 등 피아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리스트의 후기 작품들은 전통적인 화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시도를 보여주며, 죽음과 애도와 관련된 ''음울한 곤돌라(La lugubre gondola)''와 ''불운!(Unstern!)''과 같은 작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3]
1881년 작품 ''회색 구름(Nuages gris)''에서 리스트의 실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 곡은 g단조 조표를 사용하지만 모호한 화성으로 끝나며, 뚜렷한 선율과 화성이 아닌 여러 단편들의 집합으로 질감을 생성하고, 증2도와 같은 반음계와 불협화음을 사용한다.[4]
''차르다시 마카브르(Csárdás macabre)''와 "고집 차르다시"(Csárdás obstinée)는 단 하나의 선율적 모티브와 리듬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불협화음이나 완전5도로 연주하거나 숨은 관계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예시이다.[4] 그의 일부 성악곡도 조표가 없고 화성이 모호한 악장이 있는 ''십자가의 길(Via crucis)''과 같이 이러한 유형의 실험을 보여준다.[5]
말년에 리스트는 1885년에 『무조의 바가텔』로 오랫동안 추구해 온 무조 음악을 완성했다.[6]
4. 4. 신독일악파의 리더
베를리오즈, 바그너 등과 함께 신독일악파를 이끌었다.[1] 1859년 프란츠 브렌델은 자신의 출판물 Neue Zeitschrift für Musik|신음악잡지de에서 리스트가 바이마르에 있을 당시 그와 관련된 음악가들을 가리켜 "신독일악파"라는 이름을 만들었다.[1] 리스트를 제외한 가장 저명한 회원으로는 바그너와 베를리오즈가 있었지만(바그너는 그 명칭을 거부했지만), 페터 코르넬리우스, 한스 폰 뷜로우, 요아힘 라프도 그룹에 포함되었다.[1] 신독일악파는 표제 음악의 발전, 화성 실험, 광범위한 변조, 그리고 리트모티프와 주제 변형의 사용과 같은 형식적 혁신을 공유했다.[2]절대음악을 옹호한 브람스 등 보수주의자들에게 도전하는 진보적인 작곡가들의 느슨한 연합이었다.[1] 두 파벌 간의 불화는 종종 "낭만주의자들의 전쟁"으로 묘사된다.[2] 각 진영은 베토벤을 자신의 전신으로 주장했다.[2] 신독일악파의 음악을 선보이기 위해 여러 축제가 마련되었는데, 특히 1859년 라이프치히와 1861년 바이마르에서 열렸다.[2] 신독일악파와 밀접하게 관련된 알게마이네 도이체 무직파라인은 이때 설립되었고, 리스트는 1873년 명예 회장이 되었다.[2] 그러나 1860년대와 1870년대의 리스트 작품 대부분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고, 브렌델과 베를리오즈는 1860년대 후반에 사망했기 때문에 음악계의 진보 운동의 중심은 1870년대 바그너가 있는 바이로이트로 옮겨갔고, 그는 신독일악파와 Neue Zeitschrift|신음악잡지de에서 완전히 벗어났다.[2]
5. 리스트와 한국
리스트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에 소개되어 연주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서양 음악 교육이 확산되면서 리스트의 피아노 작품은 널리 연주되었다. 특히, Ungarische Rhapsodien|웅가리셰 랍소디엔de으로 잘 알려진 헝가리 광시곡과 사랑의 꿈 등 대중적인 곡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1]
백건우한국어, 서혜경한국어, 임동혁한국어 등 한국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들이 리스트의 작품을 연주하고 음반을 발매하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대학교 등 주요 음악 대학에서 리스트의 작품이 교육 과정에 포함되어 있으며, 리스트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비롯한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 연주자들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1]
한국 작곡가들은 리스트의 음악 어법, 특히 화려한 피아노 기교와 낭만적인 선율을 차용했다. 또한, 리스트의 교향시 형식을 차용한 작품들이 창작되었다.[1]
5. 1. 한국에서의 수용
일제강점기부터 리스트의 작품이 한국에 소개되어 연주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서양 음악 교육이 확산되면서 리스트의 피아노 작품은 널리 연주되었다. 특히, Ungarische Rhapsodien|웅가리셰 랍소디엔de으로 잘 알려진 헝가리 광시곡과 사랑의 꿈 등 대중적인 곡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5. 2. 한국 연주자들의 활동
백건우한국어, 서혜경한국어, 임동혁한국어 등 한국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들이 리스트의 작품을 연주하고 음반을 발매하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대학교 등 주요 음악 대학에서 리스트의 작품이 교육 과정에 포함되어 있으며, 리스트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비롯한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 연주자들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5. 3. 한국 창작 음악에의 영향
한국 작곡가들은 리스트의 음악 어법, 특히 화려한 피아노 기교와 낭만적인 선율을 차용했다. 또한, 리스트의 교향시 형식을 차용한 작품들이 창작되었다.6. 평가
리스트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혁신적인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피아노 연주 및 작곡 기법, 교향시 창시, 화성 및 조성 확장 등 음악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바르토크, 코다이, 드뷔시, 라벨 등 후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쇼팽 사후 처음 출간된 쇼팽 전기의 저자이기도 하다.[1]
20세기 전반 낭만주의 음악은 스트라빈스키, 쇤베르크, 바르토크 등 작곡가들이 새로운 방향으로 예술 형식을 이끌면서 점차 인기를 잃었다. 리스트의 음악은 그들의 간결한 스타일과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과장된"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작품은 기존 정전의 일부가 되지 못했고, 아방가르드로서 인정받지도 못했다. 이 시기 그의 피아노 음악은 소수의 피아니스트들에게만 주목받았고, ''사랑의 꿈''과 ''헝가리 광시곡''과 같은 몇몇 인기 있는 작품만이 모음집으로 출판되었다. 페루치오 부소니와 험프리 시어는 주목할 만한 지지자였다. 그의 관현악 작품 중에서는 ''프렐류드''와 ''파우스트 교향곡''만이 정기적으로 연주되었다.
1950년대 낭만주의 부흥 기간 동안 리스트의 작품과 저술은 더 큰 관심을 받았고, 학자들은 그의 작품의 폭넓은 범위와 독창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녹음되어 출시되었고, 악보의 완전한 판본이 출판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리스트 콩쿠르가 열리고 있으며, 리스트 학회는 그의 작품을 홍보하고 있다.
학자 제임스 디빌은 "19세기 작곡가 중 바그너를 제외하고는 리스트처럼 후대에 영향을 미친 작곡가는 거의 없었다."라고 썼다. 프로코피예프는 리스트의 협주곡을 높이 평가했고, 스트라빈스키는 "작곡에 있어 엄청난 재능을 가진 위대한 리스트를 존경한다."라고 말했다. 리스트의 피아노 음악은 인상주의 음악의 드뷔시와 라벨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리스트는 또한 코다이, 도나니, 바르토크를 비롯한 초기 20세기 헝가리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회색 구름'', ''에스테 빌라의 분수'', ''차르다시 마카브르''와 같은 리스트의 후기 작품들은 미래의 발전을 예견한 것으로 여겨진다. 리스트는 또한 4도로 코드를 구성하는 음조 언어를 개척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쇤베르크가 사용한 기법이다.
리스트가 발명한 교향시는 그의 생애 말년부터 1920년대까지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친구인 생상스는 교향시를 작곡했고, 또 다른 친구인 스메타나는 ''나의 조국''을 작곡했다. 프랑크, 당디, 드보르자크, 드뷔시는 모두 1880년대와 1890년대에 교향시를 작곡했다. 시벨리우스는 리스트의 교향시의 영향을 받았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이 무렵에 주목할 만한 음색시 모음집을 작곡했는데, 이것 역시 리스트에게 빚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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