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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드 2세 드러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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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블라드 2세 드러쿨은 1395년 이전에 왈라키아 공작 미르체아 1세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는 헝가리 왕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드의 궁정에서 교육받았으며, 1431년 드라곤 기사단에 임명되어 '드라쿨'(용)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436년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 공작위를 획득했으나,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헝가리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1447년 후냐디 야노시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후손들은 '드라큘라'로 알려졌으며, 그의 가족으로는 미르체아 2세, 블라드 3세, 라두 3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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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드 2세 드러쿨
기본 정보
블라드 드러쿨
칭호왈라키아 공작
재위 기간1436년 – 1442년
이전 통치자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
후임 통치자미르체아 2세
재위 기간 21443년 – 1447년
이전 통치자 2바사라브 2세
후임 통치자 2블라디슬라브 2세
출생 이름블라드 알 2세
출생일c. 1395년
사망일1447년 11월
사망 장소벌테니, 왈라키아 공국
매장 장소데알루 수도원
배우자도암나 에우프락시아
도암나 칼추나 ?
자녀미르체아 2세
블라드 3세
라도 3세
블라드 4세
알렉산드라
가문드라쿨레스티 가문
아버지미르체아 1세
종교동방 정교회
이름
루마니아어Vlad al II-lea
Vlad al II-lea Dracul
Vlad II Drăcul

2. 초기 생애

블라드 2세는 1395년 이전에 왈라키아 공작 미르체아 1세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헝가리 왕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드에게 인질로 보내져 그의 궁정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부다, 뉘른베르크 등 헝가리와 신성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418년 미르체아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적자인 왈라키아의 미하이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2년 후, 미하이 1세는 사촌인 왈라키아의 단 2세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후 10년 동안 단 2세와 블라드의 이복 형제인 왈라키아의 라두 2세 프라즈나글라바가 왈라키아를 두고 서로 싸웠다.

1423년경 블라드는 지기스문트의 허가 없이 부다를 떠나 폴란드로 가려다 국경에서 체포되었다. 얼마 후 지기스문드는 단 2세를 왈라키아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했다. 두카스에 따르면, 블라드는 비잔틴 제국 황제 요한 8세 팔레올로고스의 "군대 장교"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의 황궁에 출입했다. 역사학자 라두 플로레스쿠는 지기스문드가 1423년 베니스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러 온 요한 8세를 맞이하도록 블라드를 임명했고, 블라드는 황제를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고 추정한다. 블라드는 요한 8세가 왈라키아를 차지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1429년 헝가리로 돌아갔다.

블라드는 왈라키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트란실바니아에 정착했다. 시기쇼아라 광장의 3층 건물에 있는 신 르네상스 양식의 벽화는 블라드 드라쿨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벽화는 흰색 터번을 쓰고, 둥근 눈과 긴 콧수염을 가진 뚱뚱한 남자를 묘사한다.

1432년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는 오스만 제국 술탄 무라드 2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아드리아노플로 갔다. 블라드는 트란실바니아로 도망간 왈라키아 보야르(귀족)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를 침공하려 했지만, 알렉산드루 알데아의 주요 관리인 알부에게 저지당했다. 지기스문드는 1434년에야 블라드가 무기를 구입하고 망명한 보야르의 군대를 소집하도록 허가했다. 1435년 알렉산드루 알데아는 심각한 병에 걸렸고, 블라드는 왈라키아를 침공했지만, 알렉산드루 알데아와 그의 오스만 동맹군에게 격퇴당했다.

2. 1. 드라곤 기사단

A simple three-storey house
1430년대 초 블라드 드라쿨이 살았던 시기쇼아라의 블라드 드라쿨의 집


1431년 2월 8일, 헝가리 왕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드는 뉘른베르크에서 블라드를 자신이 설립한 드라곤 기사단의 일등 회원으로 임명했다.[1] 아라곤의 알폰소 5세와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도 이 기사단의 일등 회원이었다.[1] 기사단의 용 문양은 블라드의 루마니아어 별칭인 "드라쿨"(용)을 낳았고, 그의 아들들은 "드라큘라"(드라쿨의 아들)로 알려지게 되었다.[1] 블라드는 지기스문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지기스문드는 그를 왈라키아의 합법적인 공작으로 선언했다. 블라드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그러나 지기스문드는 그가 왈라키아를 차지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

3. 왈라키아 통치

블라드 2세는 1436년 이복형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를 몰아내고 왈라키아 공작이 되었다.[1] 초기에는 헝가리의 지원을 받았으나,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에 맞서 왈라키아를 방어하기도 하고, 때로는 오스만 제국과 협력하여 헝가리를 공격하기도 했다.

1442년,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왈라키아 병합 시도에 제대로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환되어 두 아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매년 공물을 바치고 왈라키아 소년들을 예니체리로 보내는 조건으로 풀려났고, 그의 아들 블라드와 라두는 인질로 남았다.[1]

1443년 왈라키아로 복귀한 블라드 2세는 후냐디 야노시의 "장기 원정" 동안 중립을 지켰다.[1]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 간의 평화 협상에서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반대했지만, 아들 미르체아의 지휘 아래 4,000명의 기병을 보내기도 했다.[1]

1444년 바르나 전투 이후, 블라드 2세는 후냐디를 억류했다가 헝가리의 위협을 받고 석방했다.[1] 1445년, 그는 부르고뉴 공국과 동맹을 맺고 실리스트라, 투트라칸, 주르주, 루세를 공격하거나 점령했다.[1] 그러나 이후 왈라키아와 헝가리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1446년 또는 1447년에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과 평화를 맺었다.[1]

1447년, 후냐디 야노시는 왈라키아를 침공했고, 블라드 2세는 벌테니의 늪에서 살해되었다.[1]

3. 1. 첫 번째 통치 (1436년 ~ 1442년)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가 1437년 12월 9일에 사망한 후, 그의 후원을 받던 블라드 드라쿨은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1436년에 왈라키아 공작이 되었다.[1] 그는 전임자인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가 오스만 제국과 맺은 조약을 확정하지 않았고, 이는 11월에 오스만 제국의 왈라키아 침공을 초래했다.[1]

지기스문트의 죽음과 트란실바니아 농민 봉기로 헝가리가 약화되자, 블라드는 오스만 제국과의 화해를 모색했다. 그는 아드리아노플로 가서 무라드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매년 조공을 바치며 오스만 제국의 군사 작전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1438년 여름, 블라드는 무라드 2세의 헝가리 침공에 동행하여 오스만 제국과 함께 왈라키아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진격했다. 오스만 제국과 왈라키아 군대는 하체그 근처에서 지역 블라흐 ''케네즈''인 칸데아의 군대를 격파하고, 무레슈 강을 따라 행진하며 칼니크, 알바, 세베슈를 점령했다. 세베슈에서 블라드는 도시 지도자들에게 항복을 설득하고, 시비우를 포위했지만 8일 만에 포위를 풀었다. 그들은 헝가리를 떠나기 전에 브라쇼브 외곽을 약탈하고 30,000명 이상의 포로를 데려갔다.

오스만 군대가 왈라키아를 떠난 후, 블라드는 독일의 알베르트 2세에게 포로 석방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블라드의 노력은 양측 모두에게 의심을 샀다. 알베르트는 왈라키아 왕위 찬탈자 왈라키아의 바사라브 2세를 헝가리에 정착하도록 허락했고, 오스만 제국은 주르주 요새를 강화했다.

독일의 알베르트 1세가 1439년 10월 27일에 사망한 후, 헝가리 귀족들은 1440년 초에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3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브와디스와프는 헝가리의 야노슈 후냐디를 1441년 2월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로 임명했다. 후냐디는 1442년 3월 트란실바니아에서 오스만 제국을 격파한 후, 블라드를 배신 혐의로 고발했다. 무라드는 블라드에게 아드리아노플로 와서 충성을 증명하라고 명령했고, 블라드는 떠나기 전 장남 왈라키아의 미르체아 2세를 왈라키아 통치자로 임명했다. 블라드는 아드리아노플에 도착한 직후 체포되어 갈리폴리에 감금되었다.

3. 2.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가 1437년 12월 9일에 사망하면서,[1] 헝가리는 약화되었다.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과 화해를 모색하고 아드리아노플로 가서 무라드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술탄에게 매년 조공을 바치고, 술탄의 명령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군사 작전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1438년 여름, 블라드는 무라드 2세의 헝가리 침공을 안내했다. 오스만 제국과 왈라키아 군대는 하체그 근처에서 지역 블라흐 ''케네즈''인 칸데아의 군대를 격파하고, 세베슈에서 도시 지도자들에게 항복을 설득했다. 시비우를 포위했지만 8일 만에 끝났다.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블라드의 노력은 양측 모두에게 의심을 샀다. 독일의 알베르트 1세는 왈라키아 왕위 찬탈자를 헝가리에 정착시켰고, 오스만 제국은 주르주 요새를 강화했다.

1442년 3월, 헝가리의 야노슈 후냐디가 트란실바니아에서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자, 오스만 총독은 블라드를 배신 혐의로 고발했다. 무라드는 블라드를 아드리아노플로 소환했고, 블라드는 체포되어 갈리폴리에 감금되었다.

1442년 8월, 무라드는 하딤 셰하베딘을 보내 왈라키아를 병합하려 했으나, 후냐디는 오스만 제국 군대를 전멸시키고 블라드의 사촌을 왈라키아의 보예보드로 만들었다. 그해 말, 무라드 2세는 블라드를 석방했다. 블라드는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고, 연례 공물을 지불하며, 왈라키아 소년 500명을 보내고, 두 아들 블라드와 라두를 인질로 보내야 했다.

타원형 눈과 긴 콧수염을 가진 남자가 진주와 깃털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있다
블라드 드라쿨의 아들, 블라드 차페쉬(또는 드라큘라)


1443년에서 1444년 사이, 후냐디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장기 원정" 동안 블라드는 중립을 유지했다.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 간의 평화 협상에서 무라드 2세는 블라드의 궁정 방문 의무를 면제하려 했지만, 교황 사절이 평화 조약 비준을 막았다. 블라드는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하지 않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아들 미르체아의 지휘 아래 4,000명의 기병을 보냈다.

1444년 11월 10일,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은 참패했다. 블라드는 다뉴브 강에서 후냐디를 억류했다가, 헝가리의 팔라틴의 위협을 받고 석방했다.

1445년 봄, 부르고뉴 공국 십자군 함대가 흑해에서 오스만 함대를 공격했다. 블라드는 이사크체아에서 바브랭과 동맹을 맺고, 아들 미르체아의 지휘 아래 군대를 소집했다. 부르고뉴와 왈라키아 군대는 실리스트라를 포위했지만 실패했고, 투트라칸의 요새를 정복했다. 블라드는 바브랭에게 주르주 공격을 설득했고, 주르주 포위 공격 중, 오스만 수비대는 항복했지만 학살당했다. 루세의 오스만 수비대도 항복했다. 블라드는 11,000명 이상의 불가리아인들에게 망명을 제공했다. 니코폴에서 헝가리 군대와 합류했지만, 이른 서리로 인해 십자군은 작전을 포기했다.

왈라키아와 헝가리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블라드는 왈라키아 상인들이 트란실바니아에서 체포되었다고 불평하며, 자신의 "어린 자녀들을 학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말했다. 1446년 또는 1447년에 블라드는 오스만인과 평화를 맺었다.

3. 3. 헝가리와의 갈등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가 1437년 12월 9일에 사망한 후, 그의 사위이자 후계자인 독일의 알베르트 2세는 블라드 2세에게 트란실바니아를 보호하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블라드 2세는 이를 무시했다. 지기스문트의 죽음과 트란실바니아 농민 봉기는 헝가리를 약화시켰고,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그는 아드리아노플로 가서 무라드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매년 조공을 바치며, 술탄의 군사 작전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1438년, 블라드 2세는 무라드 2세의 헝가리 원정에 동행하여 하체그 등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세베슈의 주민들을 설득하여 항복하도록 했다. 시비우 포위는 8일 만에 끝났지만, 브라쇼브 외곽을 약탈하고 많은 포로를 데려갔다. 블라드 2세는 알베르트 왕에게 포로 석방을 제안했지만, 왕은 그들을 반역자로 간주하여 거절했다.

독일의 알베르트 1세가 1439년 사망하고, 1440년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3세가 헝가리 왕으로 선출된 후, 1441년 헝가리의 야노슈 후냐디가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로 임명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후냐디는 블라드 2세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십자군에 합류할 것을 요구했다.

1442년 3월, 후냐디가 트란실바니아에서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자, 오스만 총독은 블라드 2세를 배신 혐의로 고발했다. 무라드 2세는 블라드 2세를 소환했고, 블라드 2세는 왈라키아의 미르체아 2세에게 왈라키아를 맡기고 아드리아노플에 도착한 직후 체포되어 갈리폴리에 감금되었다.

1442년 8월, 무라드 2세는 하딤 셰하베딘을 보내 왈라키아를 병합하려 했으나, 후냐디는 9월에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고 블라드 2세의 사촌 왈라키아의 바사라브 2세를 왈라키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그해 말, 무라드 2세는 블라드 2세를 석방했고,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지원, 연례 공물, 왈라키아 소년 500명의 예니체리 복무, 두 아들 (블라드 3세와 라두 첼 프루모스)의 인질 제공을 약속해야 했다.

3. 4. 두 번째 통치 (1443년 ~ 1447년)

1442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2세는 블라드 2세가 왈라키아를 오스만 제국에 병합하려는 루멜리아의 베일레르베이 하딤 셰하베딘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소환했다. 블라드 2세는 두 아들 블라드와 라두와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 갔다가 모두 체포되었다. 블라드 2세는 오스만 제국에 매년 공물을 바치고, 왈라키아 소년 500명을 예니체리로 보내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그의 아들들은 인질로 남았다.[1]

1443년, 블라드 2세는 왈라키아 공작으로 복귀했다. 그는 1443년 10월부터 1444년 1월까지 이어진 후냐디 야노시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장기 원정" 동안 중립을 지켰다. 술탄이 그의 두 아들의 석방을 약속했기 때문이다.[1]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 간의 평화 협상에서 무라드 2세는 블라드 2세가 직접 술탄을 알현해야 하는 의무를 면제해 주려 했지만, 교황 사절 율리아노 체사리니는 평화 조약 비준을 반대했다. 대신 교황은 브와디스와프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 전쟁을 계속할 것을 촉구했다.[1] 폴란드 역사가 얀 드우고쉬에 따르면, 블라드 2세는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하지 않도록 설득하려 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 미르체아의 지휘 아래 4,000명의 기병을 십자군에 합류시켰다.[1]

1444년 11월 10일,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은 대패했다. 전투 후 후냐디는 왈라키아를 통해 헝가리로 돌아가려 했으나, 왈라키아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블라드 2세는 헝가리의 팔라틴 라슬로 헤르데바리가 전쟁을 위협한 후에야 그를 석방했다.[1] 역사가 존 제퍼슨은 블라드 2세가 후냐디를 술탄에게 넘겨주기 위해 억류했다고 주장한다.[1] 반면, 카밀 무레샤누는 후냐디를 붙잡은 군인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억류되었다고 썼다.[1] 역사가 커트 W. 텝토우는 블라드 2세가 후냐디에게 바르나 전투 참패의 책임을 물어 거의 죽일 뻔했다고 말한다.[1] 블라드 2세는 후냐디를 석방하면서 그에게 귀중한 선물을 주고 헝가리 국경까지 동행했다.[1]

1445년 봄, 부르고뉴 공국 십자군 함대가 흑해에서 오스만 함대를 공격했다. 부르고뉴 함대 사령관 와레랑 드 바브랭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동 작전을 협상하기 위해 헝가리로 사절을 보냈다. 후냐디의 요청에 따라 바브랭의 사절 페드로 바스케 데 사아베드라가 블라드 2세를 방문하여 바브랭과 만나도록 설득했다. 7월에 블라드 2세는 이사크체아로 가서 바브랭과 동맹을 맺었다. 블라드 2세는 4,000~6,000명의 군대를 소집하여 아들 미르체아의 지휘하에 두었다.[1]

9월 중순, 부르고뉴와 왈라키아 연합군은 실리스트라를 포위했지만 점령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투트라칸의 작은 요새를 정복하고 파괴했다. 블라드 2세는 바브랭에게 주르주를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주르주 포위 공격 중, 대형 봄바드의 철제 링 두 개가 갑자기 부러져 두 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블라드 2세는 포격 사이에 봄바드가 식도록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새의 오스만 수비대는 오스만 제국으로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러나 그들이 요새를 떠난 후 왈라키아 군인 2,000명이 블라드 2세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학살했다. 블라드 2세는 1442년 자신의 억류에 대한 책임이 오스만 수비대 사령관에게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1]

얼마 지나지 않아 루세의 오스만 수비대도 항복했다. 블라드 2세는 오스만인에게 반란을 일으킨 11,000명 이상의 불가리아인들에게 망명을 제공하여 그들이 다뉴브 강을 건너 왈라키아로 가도록 도왔다. 부르고뉴 십자군과 왈라키아인들은 니코폴에 접근했는데, 그곳에서 야노시 후냐디의 지휘 아래 헝가리 군대가 9월 14일에 그들과 합류했다. 그러나 이른 서리가 십자군이 10월에 작전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1]

왈라키아와 헝가리 사이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 1445년 말, 블라드 2세는 브라쇼브의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왈라키아 상인들이 트란실바니아에서 체포되었다고 불평했다. 그는 헝가리 왕의 "신하"가 되기 위해 자신의 "어린 자녀들을 학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그가 그의 두 아들이 오스만 제국에서 살해되었다고 확신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술탄은 소년들을 해치지 않았다. 1446년 또는 1447년에 블라드 2세는 오스만인과 평화를 맺었고, 불가리아 난민을 오스만 제국으로 돌려보내는 데 동의하기도 했다. 그는 1447년 7월 몰도바 왕위 쟁탈전에 몰도바의 로만 2세를 지지하는 쪽으로 개입했다. 폴란드도 로만을 지원했지만, 로만의 반대자인 몰도바의 페트루 3세는 후냐디의 피보호자였다.[1]

1447년 7월 20일, 야노시 후냐디는 브라쇼브의 시민들에게 블라드 2세의 사촌인 왈라키아의 블라디슬라프 2세를 왈라키아 왕위 찬탈자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후냐디는 11월 말에 예상치 못하게 왈라키아로 쳐들어가 블라디슬라프를 데려갔다. 블라드 2세는 트르고비슈테에서 도망쳤지만, 벌테니의 늪에서 붙잡혀 살해되었다.[1] 1447년 12월 4일에 쓰여진 편지에서 후냐디는 자신을 "트란스알파인 지역(왈라키아)의 보예보드"라고 칭하고 트르고비슈테를 자신의 요새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그가 그 당시 왈라키아를 장악했음을 암시한다.[1] 후냐디는 블라디슬라프를 왈라키아의 왕위에 앉혔다.[1]

4. 죽음

1447년, 야노시 후냐디의 공격을 받아 왈라키아에서 도망쳤으나, 벌테니 근처의 늪에서 붙잡혀 살해되었다. 그의 장남 미르체아 2세는 트르고비슈테에서 생매장되었다. 블라드 드라쿨의 묘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카자쿠는 그가 아마도 스나고브 수도원에 묻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5. 가족

블라드 2세는 여러 부인과 애인을 두었으며, 그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다. 첫 번째 부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1] 두 번째 부인은 몰다비아 공녀 바실리사(혹은 크네아즈나, 에우프락시아)로, 알렉산드루 1세의 딸이었다.

미르체아 2세, 블라드 3세 체페슈(드라큘라), 라두 3세 미남공 등은 블라드 2세의 아들들이며, 이 외에도 여러 사생아를 두었다.[1]

5. 1. 가계도

블라드 2세의 첫 번째 부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후처는 몰다비아 공녀 바실리사로, 알렉산드루 1세 선량공의 장녀이자 슈테판 3세의 부계 조모이다.[1]

블라드 2세의 적출 장자는 미르체아 2세이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블라드 4세 수도승공은 블라드 2세와 그의 애인 중 한 명인 카르투나라는 왈라키아 귀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블라드 3세 (가시공·드라큘라)와 라두 3세 (미남공)는 몰다비아의 바실리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네 아들은 모두 왈라키아 공작위에 올랐다. 블라드 2세는 많은 애인을 두었으며, 미르체아 1세에서 따온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아들 미르체아를 포함한 몇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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