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체아 1세
1. 개요
미르체아 1세는 1386년부터 1418년까지 왈라키아를 통치한 보이보드이다. 그는 왈라키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으며, 국가 권력 강화, 경제 발전,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1415년에는 오스만 제국에 굴복했다. 미르체아 1세는 정교회를 보호하고, 건축물을 건설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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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미르체아 1세 |
|---|---|
| 루마니아어 표기 | Mircea cel Bătrân |
| 불가리아어 표기 | Мирчо Стари |
| 세르비아어 표기 | Мирча Стари/Mirča Stari |
| 다른 이름 | 미르체아 첼 마레 (Mircea cel Mare) |
| 로마자 표기 | Mirchea Cheol Beateureun |
| 출생 | 1355년경 |
| 사망 | 1418년 1월 31일 |
| 매장 | 1418년 2월 4일 |
| 매장지 | 브르차 코지아 수도원 |
| 작위 | 왈라키아 공 |
|---|---|
| 왈라키아 공 | (1차 통치) |
| 재위 기간 | 1386년 9월 23일 – 1394년 11월 |
| 이전 통치자 | 단 1세 |
| 다음 통치자 | 블라드 1세 |
| 왈라키아 공 | (2차 통치) |
| 재위 기간 | 1397년 1월 – 1418년 1월 31일 |
| 이전 통치자 | 블라드 1세 |
| 다음 통치자 | 미하이 1세 |
| 왕가 | 바사라브 가문 |
|---|---|
| 왕조 | 바사라브 왕조 |
| 아버지 | 라두 1세 |
|---|---|
| 어머니 | 칼리니키아 |
| 배우자 | 도암나 마라, 도암나 안카 |
| 자녀 | 미하이 1세 라두 2세 프라즈나글라바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 블라드 아나 (Ana of Wallachia) 아리나 (Arina of Wallachia) |
| 종교 | 정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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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루마니아 사람 -
블라드 2세 드러쿨
블라드 2세 드라쿨은 15세기 왈라키아 공작으로, 헝가리 왕의 인질로 교육받고 용 기사단에 가입하여 '드라쿨'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지만 결국 살해당했고, 그의 아들 블라드 3세는 드라큘라로 알려졌다. -
왈라키아 공작 -
블라드 3세 체페슈
블라드 3세 체페슈는 15세기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로서 "드라큘라"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며 잔혹한 통치로 "체페슈"라고도 불리며 오스만 제국에 맞섰으나 체포되어 유폐 후 전사했고 그의 통치는 과장되어 흡혈귀 드라큘라 신화의 원형이 되었으며 왈라키아 역사와 국제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왈라키아 공작 -
셰르반 칸타쿠지노
셰르반 칸타쿠지노는 그리스계 귀족 출신으로 오스만 제국에 맞서 빈 전투에 참여하고 왈라키아 공국에서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며, 1688년에 사망했다. -
1418년 사망 -
심종
심종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로, 태조 이성계의 사위가 되어 청원군에 봉해지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신에 책록되었으나, 회안군 이방간과 내통한 죄로 폐서인되어 사망했다. -
1418년 사망 -
심온
심온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태종 때 중용되어 세종 즉위 후 영의정에 올랐으나 역모 혐의로 사사된 후 문종 때 복권되었으며, 드라마에서 재조명되기도 했다.
2. 가족
미르체아는 왈라키아의 보이보드 라두 1세와 그의 부인 칼리니키아의 아들이자 바사라브 가문의 후손이다. 그는 미하일 1세, 라두 2세,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 블라드 2세 드러쿨의 아버지였으며, 미르체아 2세, 블라드 3세 체페슈, 블라드 4세 수도사, 라두 3세의 할아버지였다. 이들은 모두 왈라키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3. 치세
미르체아 1세의 치세는 왈라키아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고 평가받는다. 왈라키아 공국은 세계의 불안정한 지역에 위치하여 국경이 끊임없이 변동했지만, 미르체아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왈라키아는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했다.
미르체아 1세는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다양한 고위 관청을 조직했으며, 경제 발전을 촉진하고 국가 수입을 늘렸다. 또한 국내뿐 아니라 주변 국가에서도 널리 유통되는 은화를 주조했다. 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상인들에게 무역 특권을 주었고, 브라쇼브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갱신했다. 그 결과, 미르체아 1세는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는 다뉴브 성채를 요새화하고 농노로 구성된 "대군"을 강화했다. 그는 또한 동방 정교회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1388년에는 이 지역 최초로 집시 300가구를 수도원에 제공하며 노예를 처리하기도 했다.
몰다비아의 군주 페트루 무샤트의 중재로, 1389년 폴란드의 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1404년과 1410년에 갱신되었다. 그는 오스만의 팽창에 대항하는 투쟁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3.1. 왈라키아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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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체아 1세의 통치는 왈라키아에 안정을 가져왔다고 평가된다. 왈라키아 공국은 세계의 불안정한 지역에 위치하여 국경이 끊임없이 변동했지만, 미르체아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왈라키아는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했다. 왈라키아의 영토는 북쪽으로는 남카르파티아산맥에서 남쪽으로는 다뉴브강까지, 서쪽으로는 다뉴브강의 철문에서 동쪽으로는 흑해까지 뻗어 있었다. 미르체아 1세의 작위는 그의 영토를 잘 보여준다.
"나,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사랑하시며 자기희생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통치자이자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선물의 주인이며, 운그로블라히아 모든 땅과 산들 위의 일부, 터터르, 그리고 암라슈와 퍼거라슈, 헤르츠를 지배하며 다스리고, 세베린 바나트, 그리고 포두나비아의 도처의 양쪽과, 대해까지의 지배자이며, 드르스토르의 요새의 지배자인 이오 미르체아."
미르체아 1세는 국가의 권력을 강화하고 다양한 고위 관청을 조직했으며, 경제 발전을 촉진하고 국가의 세입을 늘렸다. 또한 국내뿐 아니라 주변 국가에서도 널리 유통되는 은화를 주조했다. 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상인들에게 무역 특권을 주었고, 그의 전임자들이 브라쇼브 사람들에게 준 특권을 갱신했다. 그 결과, 미르체아 1세는 군사력을 증강시킬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는 다뉴브 성채를 요새화하고 농노로 구성된 "대군"을 강화했다. 그는 또한 동방 정교회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몰다비아의 군주 페트루 무샤트의 중개를 통해, 1389년 폴란드의 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1404년과 1410년에 갱신되었다. 그는 오스만의 팽창에 대항하는 투쟁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3.2.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
미르체아 1세는 도나우 강 남쪽에서 튀르크인들과 싸우던 불가리아인들을 지원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1394년, 바예지드 1세는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도나우 강을 건넜다. 미르체아는 약 1만 명의 병력밖에 없었기에 정면 승부로는 이길 수 없었다. 그는 적군을 기아 상태로 몰아넣고 소규모 국지전과 후퇴를 반복하는, 오늘날 게릴라전이라 불리는 전술을 택했다(전형적인 비대칭 전쟁의 형태). 1394년 10월 10일, 두 군대는 로비네 전투에서 충돌했다. 숲과 늪지대가 많은 지형 덕분에 오스만인들은 군대를 제대로 전개할 수 없었다. 미르체아는 격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여 오스만인들을 나라 밖으로 몰아냈다. 이 전투는 후에 시인 미하이 에미네스쿠가 그의 제3서간에서 서사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미르체아는 헝가리로 후퇴해야 했고, 튀르크인들은 블라드 우주르파토룰을 왈라키아의 옥좌에 앉혔다.
1396년, 미르체아는 헝가리 국왕이 시작한 반오스만 원정에 참여했다. 이 원정은 9월 25일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의 승리로 끝났다. 1397년, 미르체아는 트란실바니아 공인 스티보르의 도움을 받아 블라드 우주르파토룰을 물리치고, 도나우 강을 건너온 또 다른 오스만 원정대를 저지했으며, 1400년에는 나라를 침범한 또 다른 오스만 원정대를 물리쳤다.
1402년 여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 렌크(타메를란)에게 술탄 바예지드 1세가 패배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혼란의 시대가 열렸고, 미르체아는 이를 이용하여 헝가리 국왕과 함께 튀르크인들에 대한 원정을 조직했다. 1404년 미르체아는 다시 도브루자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미르체아는 오스만 제국의 왕위 계승 싸움에 참여하여 무사 첼레비가 옥좌에 오르도록 도왔다(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때가 바로 미르체아 1세의 권력의 정점이었다.
재위 말년에 미르체아는 오스만 튀르크와 조약을 체결했다. 오스만인들은 연간 3000골드의 공물을 받는 대신 왈라키아를 속주("파샤리크")로 만드는 것을 그만두었다.
3.3. 외교 관계
미르체아 1세의 치세는 왈라키아에 안정을 가져왔다고 평가받는다. 왈라키아 공국의 국경은 계속 변했지만, 미르체아 1세 통치 시기에 왈라키아는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했다. 북쪽으로는 남카르파티아산맥, 남쪽으로는 다뉴브강, 서쪽으로는 다뉴브강의 철문, 동쪽으로는 흑해까지 이르렀다. 미르체아 1세의 칭호는 그의 영토를 반영한다.
"나,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사랑하시며 자기희생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통치자이자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선물의 주인이며, 운그로블라히아 모든 땅과 산들 위의 일부, 터터르, 그리고 암라슈와 퍼거라슈, 헤르츠를 지배하며 다스리고, 세베린 바나트, 그리고 포두나비아의 도처의 양쪽과, 대해까지의 지배자이며, 드르스토르의 요새의 지배자인 이오 미르체아."
미르체아 1세는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다양한 고위 관청을 조직했으며, 경제 발전을 촉진하고 국가 수입을 늘렸다. 또한 국내외에서 널리 유통되는 은화를 주조했다. 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상인들에게 무역 특권을 주었고, 브라쇼브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갱신했다. 그 결과, 미르체아 1세는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는 다뉴브 성채를 요새화하고 농노로 구성된 "대군"을 강화했다. 그는 또한 동방 정교회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1388년에는 이 지역 최초로 집시 300가구를 수도원에 제공하며 노예를 처리하기도 했다.
몰다비아의 군주 페트루 무샤트의 중재로, 1389년 폴란드의 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1404년과 1410년에 갱신되었다. 그는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오스만의 팽창에 대항하는 공동의 이익 때문이었다.
튀르크족에 맞서 싸우는 도나우 남쪽 불가리아인들을 지원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갈등이 발생했다. 1394년, 바예지드 1세는 4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뉴브강을 건넜다. 미르체아 1세는 10,000명 정도의 병력밖에 없었기에 야전에서 생존하기 어려웠다. 그는 게릴라 전쟁을 선택하여, 소규모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며 오스만 군대를 굶주리게 했다. 1394년 10월 10일(또는 1395년 5월 17일), 로비네에서 두 군대가 충돌했고, 미르체아 1세는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하여 오스만인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튀르크인들이 찬탈공 블라드를 왈라키아의 왕좌에 앉히면서 미르체아 1세는 헝가리로 퇴각해야 했다.
1396년, 미르체아 1세는 헝가리 군주가 시작한 반오스만 십자군에 참여했지만, 9월 25일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했다. 1397년, 미르체아 1세는 헝가리의 지원으로 찬탈자 블라드를 물리치고 다뉴브강을 건넌 오스만의 또 다른 원정대를 저지했다. 1400년에는 튀르크인들의 또 다른 원정대를 격파했다.
1402년 여름, 앙카라에서 티무리 랑이 술탄 바예지드 1세를 패배시키면서 오스만 제국은 무정부 시대에 접어들었다. 미르체아 1세는 이를 이용하여 헝가리 왕과 함께 튀르크에 대항하는 군사 작전을 조직했다. 1404년, 미르체아 1세는 다시 도브루자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미르체아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왕좌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여 무사가 왕위에 오르도록 도왔다.
그의 치세가 끝날 무렵, 미르체아 1세는 오스만 제국과 조약을 맺었다. 매년 3,000개의 금 조각을 공물로 바치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은 왈라키아를 속주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
3.4. 말년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에게 패배하고 오스만 제국이 분열 상태에 빠지자(오스만 제국 공위 시대), 밀차는 주변 기독교 국가들과 연합하여 반 오스만 운동을 전개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 세르비아의 스테판 라자레비치 등과 연합하여 1404년 불가리아에서 발생한 반 오스만 봉기를 지원하고 도브로자를 회복했다. 오스만 황위를 주장하는 바예지드 1세의 네 명의 아들 중, 밀차는 처음에는 무사를 지지했지만, 지지자를 계속 바꾸면서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한 땅의 탈환을 추진했다. 1415년, 메흐메트 1세 치하에서 통일을 회복한 오스만 제국에 대해, 밀차는 영토 유지와 종교의 자유를 조건으로 굴복을 서약했다.
1418년 1월 31일, 밀차는 사망했다. 사후, 공위는 그의 아들들과 단 1세의 아들들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졌고, 정권은 매우 짧은 기간 동안 교체되었다. 이로 인해 공권력은 약화되었고, 대신 지주 귀족(보이에리)들의 세력이 강해졌다.
5. 유산
미르체아 1세는 독일 역사가 레운클라비우스(Leunclavius)에 의해 "가장 용감하고 능력 있는 기독교 왕자"로 묘사되었으며, 32년 동안 왈라키아를 통치했다. 미르체아 1세는 크테토르(ktetor)로서 코지아 수도원 등 여러 기념물을 건설했는데, 1390년경 컬리머네슈티(Călimănești) 근처에 코지아 수도원을 세웠다. 라자리차 교회, 벨루체, 나우파라, 칼레니치 수도원의 모델을 바탕으로 세르비아 건축 양식을 본떠 교회들을 건립했다.
5.1. 대중문화
1989년 영화 《미르체아》에서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가 미르체아 역을 맡았으며, 감독도 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