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커스 F.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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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빅커스 F.B.5는 1914년 처음 비행한 영국의 2인승 푸셔 복엽 전투기이다. 빅커스는 1912년부터 무장 항공기 개발을 시작하여 F.B.1, F.B.2, F.B.3을 거쳐 F.B.5를 개발했다. F.B.5는 100마력 회전 엔진과 루이스 기관총으로 무장했으며, 영국, 프랑스, 덴마크에서 총 224대가 생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실전 투입되었으며, 영국 육군 항공대, 프랑스 육군 항공대, 덴마크 육군 항공대에서 운용되었다. F.B.5는 1915년 말 포커 아인데커에 비해 성능이 떨어져 훈련기로 사용되었으며, 1916년 덴마크에서 면허 생산되어 1924년까지 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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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커스 F.B.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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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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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전투기 |
제작사 | 비커스 리미티드 |
설계자 | 아치볼드 레이스 로우 |
최초 비행 | 1914년 7월 17일 |
도입 시기 | 1914년 11월 |
퇴역 시기 | 영국 공군: 1916년 7월 덴마크: 1924년 |
주요 운용국 | 영국 공군 |
생산 대수 | F.B.5: 207대 F.B.9: 119대 |
파생형 |
2. 역사
영국 육군 항공대는 1915년 2월, F.B.5 기체로 최초의 전투기 부대(제5 비행대)를 결성했다.[1] 최성기에는 11개 중대에 배치되었다.[1] 그러나 정찰기를 격추하는 데는 괜찮았지만, 독일군이 기총 동조 장치를 탑재한 포커 아인데커 단엽 전투기를 운용함에 따라 성능 부족이 곧 드러났다.[1] 전투기로서 속도, 기동성, 상승 성능 모두 부족하다는 결론이 내려져 전선에서의 운용은 단기간에 막을 내렸다.[1]
잔여 기체는 연습기로서 후방 임무로 내려졌고, 1916년까지 영국 전투기대의 주력기는 RAF F.E.2 또는 에어코 DH.2로 대체되었다.[1] 하지만, 독일군은 이 두 기종을 F.B.5로 오인하여, F.B.5가 퇴역한 후에도 "빅커스 전투기와 교전"이라는 보고가 종종 올라왔다.[1] 1917년 7월 6일,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 F.E.2에 의해 부상당했을 때도, F.B.5에 의해 공격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1]
F.B.5의 개발 및 생산, 그리고 개량형에 대한 정보는 아래 표와 같다.
2. 1. 개발 배경
빅커스는 1912년부터 (정찰용으로 만들어져 자신의 나라로 들어오는) 다른 비행기들을 격추시키기 위해 무장된 전쟁 항공기의 개념을 실험했다.[1] 첫 번째 작품은 "Destoryer"로, 나중의 "E.F.B.1"이 되었다.[1] "Destoryer"는 1913년 2월 올림피아 에어로 쇼에서 처녀비행을 하다 추락했다.[1] E.F.B.1은 빅커스 사의 첫 번째 "실험적인 전투 복엽기"이며, 이를 바탕으로 F.B.5가 유명해져 많이 생산되었다.[1]"Destoryer"가 실패하는 와중에도, 빅커스 사는 디자이너가 그려낸 고사포(비행기에 장착된 야포)가 아래에 달린 새로운 디자인처럼 개선되고 무장된 것을 추구하였다. 그것이 빅커스 타입18, 바로 Vickers E.F.B.2였다.[1] 이 비행기는 강철 튜브 구조로 만들어진 80마력, 9개 실린더의 놈 모노수팝 로터리 엔진을 장착하고, 날개와 꼬리는 섬유로 덮었으며, 큰 셀룰로이드 창문으로 엔진 옆을 덮고, 엔진에 가벼운 강철로 불릴 만한 듀랄루민을 덧댄 복엽기였다.[1] 날개가 같지 않은 이 비행기는 날개를 휘어서 좌우 방향을 바꿀 수 있었고 동시에 비틀거리지도 않았다.[1] E.F.B.2는 엔진 돌출부에 1정의 빅커스 기관총을 달고 1913년 11월 26일 비행에 성공하였다.[1]
곧이어 개발된 기종은 E.F.B.3기로, E.F.B.2기의 엔진에서 셀룰로이드 유리를 떼어내고 날개를 같게 하면서 날개가 휘지 않도록 하고, 좌우 방향 전환을 보조익으로 사용하였다.[1] E.F.B.2기의 무장인 Lewis Gun은 벨트피드(탄띠송탄식) 방식이었으나, 더 가볍고 조작하기 쉬우며 드럼 탄창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1]
1914년 7월 14일, 100마력에 9개 실린더의 놈 모노수팝 로터리 엔진이 두 프로펠러를 움직이는 F.B.5가 탄생했다. F.B.5는 이전의 기종들인 "Destoryer", E.F.B.2, E.F.B.3과 비교하여 더 깨끗하고 간단하게 바뀌었다.[1] F.B.5기는 총 224대가 제작되었고, 영국 빅커스가 119대, 프랑스와 덴마크에서 각각 99대와 6대가 제작되었다.[1]
본 기체는 영국 육군 항공대가 본격적인 전투기로서 세계 최초로 개발, 장비한 기체이다.[1] 그러나 '''"기관총을 설계 단계부터 탑재했다"''' 정도의 의미가 강하며, 정작 중요한 비행 성능은 표적이었던 정찰기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1] 당시에는 대(對) 전투기전 등은 고려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정찰기 격퇴용으로 고안된 (1914년 당시의) 중무장 항공기에 지나지 않았다.[1]
원형은 1913년에 발표된 빅커스 F.B.1 "디스트로이어"로, 시제기 F.B.2와 F.B.3을 거쳐 1914년 7월에 첫 비행을 했다.[1] 기총 동조 장치 개발 전이었으므로 동체 후부에 100마력의 놈 회전형 엔진을 갖추고, 기수 나셀에 조종사와 정찰원을 수용, 정찰원이 조작하는 선회식 기관총을 갖춰 전방 사계를 확보한 형식은 다른 추진식 전투기와 마찬가지였다.[1] 시제기에서는 무장이 자사제 빅커스 기총이었지만, 이는 선회총으로서는 취급이 번거로웠기 때문에, 생산형에서는 표준적인 루이스 기총 한 정으로 교체되었다.[1]
2. 2. 초기 설계 및 실험
빅커스는 1912년부터 다른 항공기를 파괴하기 위해 무장한 항공기 개발을 실험했다. 그 첫 결과물은 "파괴자(Destroyer)" (빅커스 F.B.1)로, 1913년 2월 런던 올림피아 에어쇼에 전시되었으나 첫 비행에서 추락했다.[1] 이 항공기는 트랙터 프로펠러에 사격하는 문제를 피하기 위해 "파르망" 푸셔 레이아웃을 채택했고, 단일 벨트 공급식 빅커스 기관총으로 무장했다.[2]빅커스는 무장 푸셔 복엽기 개발을 계속하여, 수석 설계자 아치 로가 새로운 설계를 했는데, 이것이 빅커스 타입 18, 즉 '''빅커스 F.B.2'''였다. 80hp (60kW) 놈 모노수프 9기통 회전 엔진 1개를 장착한 2[간주] 복엽기로, 강철 튜브 구조에 천으로 덮인 날개와 꼬리, 측면에 큰 셀룰로이드 창이 있는 두랄루민으로 덮인 나셀을 가졌다. 날개폭이 다른 날개는 엇갈리지 않았고, 윙 워핑으로 측면 제어를 했으며, 큰 반원형 수평 미익이 있었다. 무장은 나셀 앞부분에 단일 빅커스 기관총을 장착했는데, 사수에게는 시야가 매우 좋지 않았다.[3][4][16] F.B.2는 1913년 11월 26일 브룩랜즈에서 첫 비행을 했다.[4]
F.B.2와 유사한 엔진을 사용하지만 윙 워핑 대신 에일러론을 사용하고, 날개폭이 같으며, 나셀에 F.B.2에 있던 큰 창이 없는 '''F.B.3'''가 곧이어 개발되었다.[5][6] 벨트 공급식 기관총은 문제가 있었고, 더 가볍고 다루기 쉬운 드럼 공급식 .303 in (7.7 mm) 루이스 기관총으로 무장이 변경되었다.
F.B.5는 1914년 7월 17일에 첫 비행을 했다. 100hp (75kW) 놈 모노수프 9기통 회전 엔진 1개가 2엽 프로펠러를 구동했으며, 이전 모델들보다 단순하고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F.B.5기는 총 224대가 제작되었고, 영국 빅커스가 119대, 프랑스와 덴마크에서 각각 99대와 6대가 제작되었다.
영국 육군 항공대는 F.B.5를 세계 최초로 전투기 용도로 개발했다. 그러나 기관총을 설계 단계부터 탑재했다는 의미는 있었지만, 비행 성능은 정찰기와 큰 차이가 없었다. 당시에는 대(對) 전투기전은 고려되지 않았고, 정찰기 격퇴용으로 고안된 (1914년 당시의) 중무장 항공기였다.
원형은 1913년에 발표된 빅커스 F.B.1 "디스트로이어"이며, 시제기 F.B.2와 F.B.3을 거쳐 1914년 7월에 첫 비행을 했다. 기총 동조 장치 개발 전이었기 때문에 동체 후부에 100hp의 놈 회전형 엔진을 장착하고, 기수 나셀에 조종사와 정찰원을 수용, 정찰원이 조작하는 선회식 기관총으로 전방 사계를 확보한 형식은 다른 추진식 전투기와 같았다. 시제기에서는 자사제 빅커스 기총을 무장했지만, 생산형에서는 루이스 기총 한 정으로 변경되었다.
2. 3. F.B.5 개발 및 생산
빅커스는 1912년 다른 항공기를 파괴하도록 설계된 무장 항공기의 개념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결과물인 항공기는 "파괴자(Destroyer)"(이후 '''빅커스 F.B.1''')였으며, 1913년 2월 런던 올림피아 에어쇼에서 선보였지만, 첫 비행에서 추락했다.[1] 이 항공기는 트랙터 프로펠러를 통해 사격하는 문제를 피하기 위해 "파르망" 푸셔 레이아웃을 사용했으며, 단일 벨트 공급식 빅커스 기관총으로 무장했다.[2]빅커스는 무장 푸셔 복엽기의 개발을 계속 추진했으며, 수석 설계자인 아치 로는 새로운 설계를 그렸는데, 이것이 빅커스 타입 18, 즉 '''빅커스 F.B.2'''였다. 이 항공기는 80hp (60kW) 놈 모노수프 9기통 회전 엔진 1개를 장착한 2간주 복엽기였다. 항공기는 강철 튜브 구조에 천으로 덮인 날개와 꼬리, 측면에 큰 셀룰로이드 창이 있는 두랄루민으로 덮인 나셀을 가지고 있었다. 날개폭이 다른 날개는 엇갈리지 않았고, 윙 워핑으로 측면 제어가 이루어졌으며, 항공기에는 큰 반원형 수평 미익이 있었다. 무장은 나셀 앞부분에 장착된 단일 빅커스 기관총으로, 움직임이 제한적이었고 사수에게는 시야가 매우 좋지 않았다.[3][4][16] F.B.2는 1913년 11월 26일 브룩랜즈에서 첫 비행을 했다.[4] 곧이어 유사한 엔진을 사용하지만 윙 워핑 대신 에일러론을 사용하고, 날개폭이 같으며, 나셀에 F.B.2에 장착된 큰 창이 생략된 '''F.B.3'''가 등장했다.[5][6]
벨트 공급식 기관총은 문제가 있었고, 무기는 더 가볍고 다루기 쉬운 드럼 공급식 .303 in (7.7 mm) 루이스 기관총으로 변경되었다.
F.B.5는 1914년 7월 17일에 처음 비행했다. 100hp (75kW) 놈 모노수프 9기통 회전 엔진 1개가 2엽 프로펠러를 구동했으며, 이전 모델에 비해 단순하고 깔끔하며 일반적인 디자인이었다.
본 기체는 영국 육군 항공대가 본격적인 전투기로서 세계 최초로 개발, 장비한 기체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관총을 설계 단계부터 탑재했다"''' 정도의 의미가 강하며, 정작 중요한 비행 성능은 표적이었던 정찰기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물론 시대적으로 대(對) 전투기전 등은 고려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정찰기 격퇴용으로 고안된 (1914년 당시의) 중무장 항공기에 지나지 않았다.
원형은 1913년에 발표된 빅커스 F.B.1 "디스트로이어"로, 시제기 F.B.2와 F.B.3을 거쳐 1914년 7월에 첫 비행을 했다. 기총 동조 장치 개발 전이었으므로 동체 후부에 100hp의 놈 회전형 엔진을 갖추고, 기수 나셀에 조종사와 정찰원을 수용, 정찰원이 조작하는 선회식 기관총을 갖춰 전방 사계를 확보한 형식은 다른 추진식 전투기와 마찬가지였다. 시제기에서는 무장이 자사제 빅커스 기총이었지만, 이는 선회총으로서는 취급이 번거로웠기 때문에, 생산형에서는 표준적인 루이스 기총 한 정으로 교체되었다.
1915년 2월, 영국 육군 항공대는 본 기체로 최초의 전투기 부대(제5 비행대)를 결성했다. 최성기에는 11개 중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정찰기를 격추하는 것은 아직 괜찮았지만, 독일군이 기총 동조 장치를 탑재한 포커 아인데커 단엽 전투기를 운용함에 따라 성능 부족이 곧 드러나게 된다. 전투기로서는 속도, 기동성, 상승 성능 모두가 부족하다는 결론이 내려져, 전선에서의 운용은 단기간에 막을 내렸다.
잔여 기체는 연습기로서 후방 임무로 내려졌고, 1916년까지 영국 전투기대의 주력기는 RAF F.E.2 또는 에어코 DH.2로 대체되었지만, 독일군은 이 두 기종을 본 기체로 오인하여, 본 기체가 퇴역한 후에도 "빅커스 전투기와 교전"이라는 보고가 종종 올라왔다. 1917년 7월 6일, F.E.2에 의해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 부상당했을 때도, 본 기체에 의해 공격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2. 4. 개량형
기종 | 설명 |
---|---|
E.F.B.2 (빅커스 타입 18) | 100마력(75kW) 그놈 모노수프 회전식 엔진을 장착한 단발 2인승 전투기 시제기이다. 윗 날개에 약간의 돌출부가 있었고, 날개 비틀림 제어 방식을 사용했다. 엔진실에는 큰 셀룰로이드 창이 있었고, 빅커스 기관총 한 정으로 무장했다. 한 대가 제작되었다.[16] |
E.F.B.3 (빅커스 타입 18B) | 날개 길이가 같고, 에일러론 제어 방식과 창문이 없는 개선된 엔진실을 갖춘 개량형 전투기이다. 한 대가 제작되었다.[16] |
E.F.B.4 | "디스트로이어"와 유사한 설계를 제안했지만 제작되지는 않았다.[12] |
E.F.B.5 | E.F.B.3을 더욱 개선한 기체이다. 영국 육군 항공대(RFC)와 영국 해군 항공대(RNAS)를 위해 6대가 제작되었다.[7] |
F.B.5 | E.F.B.5의 양산형으로, 사각형 꼬리 날개를 사용했다.[7] 빅커스에서 최소 120대, 다라크 모터 엔지니어링 컴퍼니에서 75대, Tøjhusvoerkstedt(덴마크 병기창)에서 12대, 총 207대 이상 제작되었다.[17] |
F.B.6 | E.F.B.5와 달리 개선된 비대칭 날개와 상부 날개에만 에일러론이 장착된 시험 제작기이다. 한 대가 제작되었다.[18] |
F.B.9 | F.B.5의 개선형으로, 개선된 날개와 꼬리 날개, 더 유선형의 엔진실, 새로운 V자형 착륙 장치, 기존의 케이블 버팀대 대신 유선형 Rafwire 버팀대를 사용했다.[19] 빅커스에서 95대, 다라크에서 24대, 총 119대가 제작되었다.[17] |
F.B.10 | 100마력(75kW) 이소타 프라스키니 엔진을 장착한 개발 제안이다. 제작되지는 않았다.[20] |
S.B.1 | 1914년에 E.F.B.3을 기반으로 하고 100마력(75kW) 안자니 성형 엔진을 장착한 이중 조종 훈련기 설계이다. 제작되지는 않았다.[21][22] |
F.B.5는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영국 육군 항공대, 프랑스 육군 항공대, 덴마크 육군 항공대에서 운용되었다.
3. 운용 내역
1914년 11월, 첫 F.B.5가 영국 육군 항공대의 제6 비행대대에 인도되었고,[7] 1914년 12월 25일에는 첫 실전 투입에서 독일 타우베 단엽기를 공격했으나, 기관총 고장 등의 문제점을 겪기도 했다.[8]
F.B.5는 제11 비행대대가 1915년 7월 25일 프랑스 빌레르브르토뇌에 배치되면서 세계 최초의 전투기 비행대대를 구성하는데 기여했다.[11] 제18 비행대대 RFC도 F.B.5를 운용했다.
하지만 1915년 말, 포커 '아인데커'와 같은 신형 전투기의 등장으로 성능적 한계를 드러냈고, 1916년 7월에는 최전선에서 완전히 철수하여 훈련기로 사용되었다.[14]
덴마크에서는 F.B.5 12대가 면허 생산되어 1917년부터 1924년까지 덴마크 육군 항공대에서 운용되었다.[14]국가 운용 부대 영국 영국 육군 항공대 제2 / 5 / 7 / 11 / 16 / 18 / 24 / 25 / 32 / 35 / 42 비행대 (119기) 프랑스 프랑스 육군 항공대 (99기) 덴마크 덴마크 육군 항공대 (12기)
3. 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4년 11월, 첫 번째 F.B.5가 영국 육군 항공대(RFC) 제6 비행대대에 네더러본에 인도되었다.[7] 1914년 12월 25일, F.B.5 664호기가 조이스 그린 비행장에서 이륙하여 독일의 타우베 단엽기를 공격했고, 루이스 기관총이 고장난 후 소이탄을 장착한 카빈총으로 타우베를 명중시켜 격추했을 가능성이 있다.[8] 18일 후, M. R. 치드슨 소위와 D. C. W. 샌더스 소위는 프랑스에서 첫 번째 F.B.5인 1621호기를 조종하다가 독일군 점령 지역 뒤에 불시착하여 새 비행기가 적의 손에 들어갔다.[9]
F.B.5는 1915년 2월 5일 제2 비행대대 RFC에 처음으로 투입되면서 서부 전선에서도 운용되기 시작했다.[10] 1915년 7월 25일, 제11 비행대대 RFC가 F.B.5로 완전히 무장하여 프랑스 빌레르브르토뇌에 배치되면서 세계 최초의 전투기 비행대대가 되었다.[11] 제18 비행대대 RFC 역시 1915년 11월 프랑스에 배치되어 F.B.5만을 운용했다. 제11 비행대대의 소위 G.S.M. 인설은 1915년 11월 7일 건버스기를 조종하여 독일 항공기를 격추한 공로로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12]
초기 항공기에는 영국에서 제작한 모노수파프 엔진이 장착되었는데, 초기에는 프랑스에서 제작한 엔진보다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입증되었고, 유용한 총기 장착 방식이 개발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13] F.B.5는 전방 발사 기관총을 장착하여 큰 이점을 가졌지만 비교적 속도가 느렸다. 독일 조종사들은 종종 자국의 항공기의 우수한 속도를 이용하여 전투를 피했지만, 이는 하늘에서 적기를 몰아내는 데 유용했다.[14] 이 기종을 조종하여 에이스가 된 조종사/관측병 팀은 라이오넬 리스와 제임스 맥킨리 하그리브스 단 한 팀뿐이었다.[15]
1915년 말까지 이 항공기는 포커 ''아인데커''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다. 개선된 비커스 F.B.9의 견본이 프랑스로 보내졌고, 로열 항공기 공장 F.E.2b의 충분한 공급을 기다리는 동안 F.B.5와 F.B.9는 모두 1916년 7월까지 최전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영국에서 운용 중인 나머지 기체는 대부분 훈련기로 사용되었다.[14]
3. 2. 실전 기록
1914년 11월, 첫 F.B.5가 영국 육군 항공대(RFC) 제6 비행대대에 네더러본에 인도되었다.[7] 1914년 12월 25일, F.B.5 664호기가 조이스 그린 비행장에서 이륙하여 독일의 타우베 단엽기를 공격했고, 루이스 기관총이 고장난 후 소이탄을 장착한 카빈총으로 타우베를 명중시켜 격추했을 가능성이 있어 F.B.5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8] 18일 후, 같은 비행 승무원인 M. R. 치드슨 소위와 D. C. W. 샌더스 소위가 프랑스에서 첫 번째 F.B.5인 1621호기를 조종하다가 독일군 점령 지역 뒤에 불시착하여 새 비행기가 적의 손에 들어갔다.[9]
1915년 2월 5일, F.B.5는 제2 비행대대 RFC에 처음으로 투입되면서 서부 전선에서도 운용되기 시작했다.[10] 1915년 7월 25일, 제11 비행대대 RFC가 F.B.5로 완전히 무장하여 프랑스 빌레르브르토뇌에 배치되기 전까지 다른 여러 부대에서 한두 대씩 운용되었다. 이로써 제11 비행대대는 세계 최초의 전투기 비행대대가 되었다.[11] 1915년 11월 7일, 제11 비행대대의 소위 G.S.M. 인설은 건버스기를 조종하여 독일 항공기를 격추한 공로로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12] 1915년 11월 프랑스에 배치된 제18 비행대대 RFC 역시 F.B.5만을 운용했다.
초기 항공기에는 영국에서 제작한 모노수파프 엔진이 장착되었는데, 초기에는 프랑스에서 제작한 엔진보다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입증되었고, 유용한 총기 장착 방식이 개발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13] F.B.5는 전방 발사 기관총을 장착하여 큰 이점을 가졌지만 비교적 속도가 느렸다. 독일 조종사들은 종종 자국의 항공기의 우수한 속도를 이용하여 전투를 피했지만, 이는 하늘에서 적기를 몰아내는 데 유용했다.[14] 이 기종을 조종하여 에이스가 된 조종사/관측병 팀은 라이오넬 리스와 제임스 맥킨리 하그리브스 단 한 팀뿐이었다.[15]
1915년 말까지 이 항공기는 포커 ''아인데커''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다. 개선된 비커스 F.B.9의 견본이 프랑스로 보내졌고, 로열 항공기 공장 F.E.2b의 충분한 공급을 기다리는 동안 F.B.5와 F.B.9는 모두 1916년 7월까지 최전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영국에서 운용 중인 나머지 기체는 대부분 훈련기로 사용되었다.[14]
F.B.5는 영국 육군 항공대가 본격적인 전투기로서 세계 최초로 개발, 장비한 기체이다. 그러나 '''"기관총을 설계 단계부터 탑재했다"''' 정도의 의미가 강하며, 정작 중요한 비행 성능은 표적이었던 정찰기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물론 시대적으로 대(對) 전투기전 등은 고려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정찰기 격퇴용으로 고안된 (1914년 당시의) 중무장 항공기에 지나지 않았다.
1915년 2월, 영국 육군 항공대는 본 기체로 최초의 전투기 부대(제5 비행대)를 결성했다. 최성기에는 11개 중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정찰기를 격추하는 것은 아직 괜찮았지만, 독일군이 기총 동조 장치를 탑재한 포커 아인데커 단엽 전투기를 운용함에 따라 성능 부족이 곧 드러나게 된다. 전투기로서는 속도, 기동성, 상승 성능 모두가 부족하다는 결론이 내려져, 전선에서의 운용은 단기간에 막을 내렸다.
잔여 기체는 연습기로서 후방 임무로 내려졌고, 1916년까지 영국 전투기대의 주력기는 RAF F.E.2 또는 에어코 DH.2로 대체되었지만, 독일군은 이 두 기종을 본 기체로 오인하여, 본 기체가 퇴역한 후에도 "빅커스 전투기와 교전"이라는 보고가 종종 올라왔다. 1917년 7월 6일, F.E.2에 의해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 부상당했을 때도, 본 기체에 의해 공격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3. 3. 퇴역 및 유산
F.B.5는 1915년 2월 5일 제2 비행대대에서 처음으로 서부 전선에서 운용되기 시작했다.[10] 1915년 7월 25일 제11 비행대대가 F.B.5로 완전히 무장하여 프랑스 빌레르브르토뇌에 배치되면서 세계 최초의 전투기 비행대대가 되었다.[11] 제11 비행대대의 소위 G.S.M. 인설은 1915년 11월 7일 건버스기를 조종하여 독일 항공기를 격추한 공로로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12]
초기 항공기에는 영국에서 제작한 모노수파프 엔진이 장착되었는데, 프랑스에서 제작한 엔진보다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입증되었다.[13] F.B.5는 전방 발사 기관총을 장착하여 큰 이점을 가졌지만 비교적 속도가 느렸다. 독일 조종사들은 종종 자국 항공기의 우수한 속도를 이용하여 전투를 피했지만, 이는 하늘에서 적기를 몰아내는 데 유용했다.[14]
1915년 말까지 이 항공기는 포커 ''아인데커''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다. 개선된 비커스 F.B.9의 견본이 프랑스로 보내졌고, 로열 항공기 공장 F.E.2b의 충분한 공급을 기다리는 동안 F.B.5와 F.B.9는 모두 1916년 7월까지 최전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영국에서 운용 중인 나머지 기체는 대부분 훈련기로 사용되었다.[14]
빅커스사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적극적인 실험 프로그램을 지속했으며, 1917~18년의 빅커스 F.B.26 뱀파이어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단좌식 푸셔 전투기를 개발했지만, F.B.5는 빅커스 비미 폭격기가 전쟁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늦게 실전 배치되기 전까지 빅커스사의 유일한 주요 생산 항공기였다.
빅커스 F.B.5는 독일 조종사들이 영국의 푸셔 항공기를 "빅커스형"이라고 계속 부르면서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 D.H.2 또는 F.E.2b 푸셔를 상대로 많은 승리가 "빅커스" 파괴로 보고되었다.
F.B.5 건버스 비행 복제기는 1966년에 완성되어 1968년 말까지 비행했다. 현재(2014년)는 런던 근교 헨던에 있는 영국 왕립 공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4. 운용 국가
Royal Danish Army Air Corps영어는 1916년부터 1924년까지 12대의 면허 생산 항공기를 운용했다.[1]
Royal Flying Corps영어
- 제2 비행대 RFC[2]
- 제5 비행대 RFC[3]
- 제7 비행대 RFC[4]
- 제11 비행대 RFC[5]
- 제16 비행대 RFC[6]
- 제18 비행대 RFC[7]
- 제24 비행대 RFC[8]
- 제25 비행대 RFC[9]
- 제32 비행대 RFC[10]
- 제35 비행대 RFC[11]
- 제41 비행대 RFC[12]
영국 육군 항공대는 119기를 제작하여 제2, 5, 7, 11, 16, 18, 24, 25, 32, 35, 42 비행대에서 운용했다.[13]
프랑스 육군 항공대(Aéronautique Militaire)는 99기를 제작했다.[14]
덴마크 육군 항공대는 6기를 제작했고, 최종적으로 총 12기가 인도되어 1917년부터 1924년까지 운용했다.[15]
5. 성능 제원 (F.B.5)
일반 특성 | |
---|---|
승무원 | 2명 (조종사 1명, 관측/사수 1명) |
길이 | 약 8.23m |
날개폭 | 약 10.97m |
높이 | 약 3.35m |
날개 면적 | 약 35.49m2 |
자체 중량 | 약 553.38kg |
최대 이륙 중량 | 약 929.86kg |
엔진 | 놈 몽소파프 9기통 회전 엔진 1기, 100hp |
성능 | |
최고 속도 | 약 1524.00m에서 70mph |
항속 거리 | 약 402.33km |
최대 상승 고도 | 약 2743.20m |
체공 시간 | 4시간 30분[24] |
고도 도달 시간 | 약 1524.00m까지 16분 |
무장 | |
기관총 | 1 × 0.303 in (7.7 mm) 루이스 경기관총 (관측석)[23] |
참조
[1]
서적
[2]
간행물
Flight
1913-02-22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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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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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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