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 압둘라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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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드 압둘라 칸은 1918년부터 1920년까지 히바 칸국의 마지막 칸이었다. 그는 칭기즈 칸의 후예인 콩기라트 왕조 출신이었으나, 실권은 바스마치 운동 지도자 주나이드 칸에게 있었다. 1920년 볼셰비키에 의해 폐위된 후, 가족과 함께 우크라이나로 추방되어 강제 이주 생활을 했다. 그는 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가족은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 각지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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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압둘라 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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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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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히바 칸국의 칸 |
재위 기간 | 1918년 ~ 1920년 |
선임자 | 이스판디야르 주르지 바하두르 |
후임자 | 붉은 군대의 침공으로 왕정 폐지. 영토는 소비에트 연방에 넘어감. |
출생일 | 1873년 |
출생지 | 히바, 히바 칸국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
사망일 | 1933년 |
사망지 | 크리비리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현재의 우크라이나) |
매장지 | 크리비리흐의 루드니크노예 묘지 |
아버지 | 무함마드 라힘 칸 2세 |
왕가 | 콩기라드 |
종교 | 수니 이슬람 |
2. 생애
사이드 압둘라 칸은 히바 칸국의 마지막 칸이었으나 실권은 없었다. 1920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칸의 자리에서 폐위된 후, 가족들과 함께 우크라이나로 강제 이주되어 유배 생활을 하다가 1933년 그곳에서 사망했다.[1]
2. 1. 히바 칸국의 마지막 칸 (1918년 ~ 1920년)
사이드 압둘라 칸은 명목상의 칭호 군주였을 뿐, 실제 권력은 없었다. 1918년 쿠데타 이후 바스마치 운동의 지도자인 투르크멘 출신 장군 주나이드 칸이 칸국의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1920년, 볼셰비키 세력이 주나이드 칸을 몰아내고 히바 칸국을 멸망시키면서 사이드 압둘라 칸은 칸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다.[1]2. 2. 우크라이나 유배와 강제 이주 (1920년 ~ 1933년)
1920년 2월 2일 퇴위한 후, 사이드 압둘라 칸과 그의 가족은 볼셰비키에 의해 체포되었다. 왕족의 모든 재산, 돈, 보석, 집, 토지 등은 몰수되었다. 1920년 6월 12일에 시작된 재판 결과, 사이드 압둘라 칸과 그의 가까운 남성 친척 9명(다른 자료에 따르면 7명)은 호레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3년에서 5년 동안 추방 및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칸의 다른 가족들, 즉 여성, 노인, 어린이 등은 그들과 분리되어 공화국에 남겨졌다.유배형을 선고받은 이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관계 |
---|---|
사이드 압둘라 칸 | 본인 |
사이드 압둘라 | 아들 |
라흐마툴라 | 아들 |
야쿠브 유수프 | 아들 |
무함마디야르 | 형제 |
압두라스울 | 조카 |
마디야르 | 조카 |
나시르 | 조카 |
이바둘라 | 조카 |
이들은 먼저 히바에서 타슈켄트로 이송되어 이틀간 구금되었고, 이후 기차로 사마라로 옮겨져 3주간 머물렀다. 다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이송된 후, 여러 수용소를 전전했다.
수용소 | 수감 기간 |
---|---|
호르데 수용소 | 2주 |
안드라코프스키 수용소 | 10개월 |
이바노보 수용소 | 2개월 |
1922년 2월 12일, 이들은 갑작스럽게 석방되어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당시 예카테리노슬라프)로 보내졌으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이후 근처 베르호프체보로 옮겨가 지역 국영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24년 7월, 지역 경찰 학교에 입학한 조카 압두라스울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크리비 리로 이주했다. 그들 중 세 명은 오크 발카 탄광(나중에 볼셰비크 탄광으로 개명됨)에서 감시원과 마부로 일했지만, 당시 우크라이나 중부 지역의 높은 실업률 때문에 나머지 가족들은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이들은 러시아어나 우크라이나어를 하지 못했고, 현지에서 필요한 기술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히바에 남겨진 가족들이 빈곤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구걸로 연명하고 있다는 비참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사이드 압둘라 칸과 가족들은 1925년 7월, 크리비 리의 GPU 지부, 우크라이나 SSR 인민 위원회, 전우크라이나 중앙 집행 위원회 등에 호레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다. NKVD는 긍정적으로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최종적으로 우크라이나 GPU는 이들의 귀환이 "대중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OGPU에 보고했고, OGPU는 안전상의 이유로 귀향 요청을 거부했다.
1926년, 경찰에서 퇴직한 압두라스울이 크리비 리의 가족들과 합류했다. 그는 아내 올림피아다와 함께 왔으며, 이후 현지 여성인 블라다 짓코프스카야와 재혼했다. 칸의 대가족은 탄광 병영 중 한 곳에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사이드 압둘라 칸은 우크라이나로 유배된 지 13년 후인 1933년경 병원에서 사망했다.[1]
2. 3. 우크라이나에서의 죽음 (1933년)
사이드 압둘라 칸은 크리비 리흐에서 가정을 이루지 않고, 볼셰비크 탄광에서 경비원으로 계속 일했다. 그는 직장에서 "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콩기라트 왕조 출신의 호레즘 마지막 칸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았다. 1932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대규모 기근(홀로도모르)이 시작되었다. 1933년 사이드 압둘라 칸은 병에 걸려 탄광 병원에 입원했고, 이질 진단을 받았다. 그는 오랜 질병과 영양실조로 인해 한 달 뒤 사망했으며, 탄광 묘지에 묻혔다.3. 가족과 후손
사이드 압둘라 칸의 형인 무함마디야르는 추방 당시 약 70세의 고령으로 일을 할 수 없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홀로도모르) 시기에는 구걸로 연명해야 했다. 1933년 중앙아시아로의 귀환이 허용되자 히바로 돌아가려 했으나, 타슈켄트에 도착한 후 다시 구걸에 의존하게 되었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1936년 타슈켄트에서 사망했다.[1][2][3]
칸의 남동생 이바둘라는 어린 시절부터 청각 장애가 있어 평생 일을 하지 못하고 크리비 리흐의 탄광 상점 근처 시장에서 구걸을 했다. 1934년 여름,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서 우연히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1][2][3]
1933년 이후 망명자들의 이동이 자유로워지자, 칸의 아들 라흐마툴라와 유수프 야쿠브는 친척들이 살고 있던 타슈켄트로 이주했다.[1][2][3] 칸의 또 다른 아들인 사이드 압둘라 역시 아내와 함께 타슈켄트로 이주하여 통역사로 일했으며, 이후 오시로 옮겨 탐사 작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말년에 음주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1941년에는 사람을 치는 사고를 일으켜 노동 수용소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아내는 1944년 크리비 리흐로 돌아갔으며, 사이드 압둘라는 1960년대 초에 사망했다.[1][2][3] 소련 시대 동안 모든 망명자들은 히바로 돌아가는 것이 금지되었으나, 소련 내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에는 제약이 없었다.[1][2]
1934년 이후 크리비 리흐에는 나시르와 압두라술 형제만 남게 되었다. 나시르는 망명자 중 교육 수준이 높았음에도 경비원으로 일하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여러 차례 결혼했지만 가난으로 인해 헤어진 것으로 보이며, 1944년 홀로 사망했다.[1][2][3] 압두라술은 작은 집을 짓고 결혼하여 광산 마을에서 여생을 보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강제 노동으로 끌려갔다가 석방된 후 마부로 일했다. 그는 세 딸과 손자, 증손자를 두었으며, 1990년대에 사망했다. 사망 직전인 1990년에는 히바를 방문하여 조부인 무하마드 라힘 칸 2세의 무덤을 참배했다.[1][2][3]
압두라술의 이야기는 그리고리 후세이노프가 저술한 책 "동쪽에서 온 바람"(Вітер зі Сходу|비테르 지 스호두uk)의 주요 내용이 되었다. 이 책은 압두라술의 증언과 기록 보관소 자료, 문서 등을 바탕으로 망명자들의 삶을 다루고 있으며, 압두라술의 후손들이 제공한 사진, 문서, 원고 등도 포함되어 있다.[1]
4. 역사적 기록과 유산
1980년대 초 우크라이나 작가 그리고리 자말로비치 후세이노프는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사이드 압둘라 칸의 후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삶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특히 그는 크리비 리에 살고 있던 칸의 조카 압두라스울 무함메데야로비치 마디야로프를 인터뷰하여, 칸의 후손들이 우크라이나에서 겪었던 역사와 생활상에 대한 자세한 증언을 확보했다.
후세이노프는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칸이 어떻게 탄광에서 일했는가"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또한, 2019년 2월에는 망명자들의 삶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다룬 책 Вітер зі Сходу|비테르 지 스호두uk("동쪽에서 온 바람")의 출판 계획이 알려지기도 했다. 이 책은 압두라스울이 후세이노프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 들려준 이야기, 다양한 기록 보관소의 자료와 문서, 1990년 히바 방문 후 압두라스울이 느꼈던 감상 등을 토대로 집필되었다. 더불어 압두라스울의 후손들이 후세이노프에게 제공한 수많은 사진, 문서, 원고 자료들도 책의 중요한 내용을 구성했다.
참조
[1]
서적
History of Civilizations of Central Asia volume VI
[2]
서적
History of Civilizations of Central Asia volume VI
[3]
문서
[4]
문서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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