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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다다타카 (16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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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이 다다타카는 1648년에 태어나 1720년에 사망한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이다. 1681년 아버지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15만 석 중 2만 석을 동생에게 분여하고 이세사키 번의 창설을 막부에 인정받았다. 그는 막부 정치 참여와 번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마에바시 영지의 자연재해로 인한 어려움을 겪었다. 1707년 은거 후 손자의 후견을 맡았으며,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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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다다타카 (1648년)
기본 정보
사카이 다다타카
시대에도 시대 전기 - 중기
출생게이안 원년 3월 7일(1648년4월 29일)
사망교호 5년 11월 13일(1720년12월 12일)
개명다다요, 다다아키라
묘소군마현마에바시시고운정의 류카이인
관위종5위하가와치노카미, 종4위하시종
좌근위권소장, 가가쿠노카미, 간데요
막부에도 막부소샤반 겸 지샤부교→오루스이
주군도쿠가와 쓰나요시→이에노부→이에쓰구→요시무네
고즈케마에바시번(우마야바시 번)주
씨족사카이 씨
부모아버지: 사카이 다다키요, 어머니: 마쓰다이라 사다쓰나의 딸・바이코인
형제자매다다타카, 다다히로
배우자정실: 지쿠히메호곤인、구로다 미쓰유키의 딸)
자녀다다스케, 나베히메(이치코、교고쿠 다카토요 계실), 하루히메, 가쓰히메, 기치주로, 야마다 다테와키, 이시마쓰, 쓰치히메(요리코、야나기사와 요시사토 정실), 가네히메, 사토 히코고로, 기쿠히메
양녀: 다네히메(마쓰다이라 노부토시 정실、교고쿠 다카토요의 딸), 마에다 마사토모 정실(나카가와 히사키요의 딸)

2. 생애

사카이 다다타카는 쓰지 겟탄 시게모리에게 무가이류 검술을 배우고, 유학자 사토 나오카타를 초빙하는 등 문무 양도를 중시했다. 검지와 사창제를 실시하고, 『마에바시 풍토기』를 편찬하고 번교 고코도를 부흥시켰으며, 구야바시 성의 이름을 '''마에바시 성'''으로 고쳤다.

그러나 다다타카의 재임 시절, 마에바시 번 영지는 황폐해졌다. 겐로쿠 12년에는 폭풍우 피해를 입었고, 호에이 3년에는 도네가와 강이 범람하여 혼마루 3층 야구라가 붕괴되었다. 이에 다다타카는 호에이 7년, 마에바시에서 긴키의 선진지로 영지를 옮기려 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이후 번 수뇌부는 국가 이전만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암묵적인 이해를 갖게 되었다.[2]

조쿄 원년에는 사나다 가문이 개역된 누마타 번의 구 영지 검지를 명받아, 사나다 가문의 간분 연간 검지에 의한 14만 4000석보다 훨씬 적은 6만 석 정도로 석고를 정했다.[2]

겐로쿠 6년부터 교호 4년까지 로주와 쇼군의 측근에게 보낸 서한은 『어노중방 엿보기』로 현존한다.[2]

『도카이코슈키』에 따르면, "(아버지와 달리) 남색도 여색도 좋아하는 기미는 없다"고 하며, "성현에 가깝고 훌륭한 장수이다"라고 평가받았다.[2]

교호 5년 11월 13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연도사건
1661년종5위하 가와치노카미에 서임
1665년종4위하에 서임
1670년시종에 서임
1698년가악노카미에 임명
1705년고노에쇼쇼에 임명
1707년간게유에 임명


2. 1. 가독 상속과 번정 개혁

메이레키 2년(1656년)에 출사하여, 간분 4년(1664년)에 원복, 이듬해 종4위하에 서임되었고, 간분 6년(1666년)부터 아버지가 하던 전중 의례를 맡았다. 간분 10년(1670년)에 시종에 서임되었고, 엔포 9년(1681년) 2월 27일, 아버지가 막정에서 물러나 은거했기 때문에 가독을 상속했다. 이때 습봉한 15만 석 중 2만 석을 동생인 사카이 타다히로에게 분여하고, 분가 이세사키 번의 창설을 막부에 인정받았다.[2]

같은 해 5월 19일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6월 28일에 아버지가 재정을 내린 에치고 소동에 연좌되어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로부터 비색을 명받았다. 12월 27일에 비색이 해제되었고, 조쿄 2년(1684년) 4월에는 주자반 겸 사사 봉행에 취임했고, 겐로쿠 2년(1689년)에는 병으로 사직했다. 겐로쿠 9년(1696년)에 루마즈메가 되었고, 겐로쿠 11년(1698년) 2월 15일에 에도성 오오루스이(大留守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엔포 2년(1674년)의 마쓰다이라 사다후사 이래 24년만의 직책이었기 때문에, 직무에 당황하는 일이 많아 로주·아베 마사타케나 측근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문의하고 있다. 그 후에도 근무 상황은 변하지 않고, 겐로쿠 13년(1700년) 2월 15일에 병으로 사직했다. 오오루스이에 대해서는, 가문이 높은 사카이 씨에게 준 한직이 아니냐고 여겨지고 있다.[2]

호에이 4년(1707년)에는 2만 석 가증을 받아 15만 석으로 복귀하지만, 같은 해 11월 7일에 은거, 가독을 장남인 타다스케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타다스케가 불과 3개월 후인 호에이 5년(1708년) 1월 25일에 급사하고, 뒤를 이은 손자인 치카요시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은거의 몸이면서 치카요시의 후견을 맡았다. 또한, 친척인 부젠나카쓰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타네[1]의 불행을 고치려고 했었다(하지만, 나중에 상담을 중단하고, 오가사와라 나가타네는 개역되었다).[2]

막부 정치에 대한 개혁을 여러 번 로주에게 사신이라는 형태로 제언했지만, 쓰나요시 정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슈 번주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제8대 쇼군에 취임하자 이나바 마사유키·오가사와라 나가시게와 함께 막부의 구신으로서 우대받았다. 특히 요시무네는 타다타카를 소환하거나 하야시 노부아츠를 통해 하문을 했으므로 타다타카도 요시무네에게 의견을 진술하고 있다.[2]

번정은 문무 양도를 중시하여, 쓰지 겟탄 시게모리에게 무가이류 검술을 배우고, 유학자 사토 나오카타를 초빙했다. 검지와 사창제를 시작하고, 『마에바시 풍토기』의 편찬이나 번교 고코도를 흥하게 하고, 구야바시 성의 이름을 '''마에바시 성'''으로 고쳤다. 그러나, 타다타카 시절에는 마에바시 영지가 황폐해져, 겐로쿠 12년(1699년)에 폭풍우를 겪었고, 호에이 3년(1706년)에는 토네가와 범람으로 혼마루 3층의 야구라가 붕괴된다. 이 때문에 타다타카는 호에이 7년(1710년), 막부에 마에바시에서 긴키의 선진지로의 국가 이전을 공작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더 이상 국가 이전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후 번 수뇌의 암묵적인 이해가 되어 간다.[2]

조쿄 원년(1684년)에는 사나다 씨가 개역된 누마타 번의 구 영지의 검지를 명받아, 사나다 씨의 간분 연간의 검지에 의한 내부 14만 4000석을 크게 밑도는, 6만 석 정도라는 석고를 정하고 있다.[2]

겐로쿠 6년(1693년)부터 교호 4년(1719년)까지 로주와 쇼군의 측근에게 보낸 서한은 『어노중방 엿보기』로 현존하고 있다.[2]

2. 2. 막부 정치 참여와 개혁 제안

메이레키 2년(1656년)에 출사하여 간분 4년(1664년)에 원복, 이듬해 종4위하에 서임되었고, 간분 6년(1666년)부터 아버지가 하던 전중 의례를 맡았다. 간분 10년(1670년)에 시종에 서임되었다. 엔포 9년(1681년) 2월 27일 아버지가 막정에서 물러나 은거했기 때문에 가독을 상속했다. 습봉한 15만 석 중 2만 석을 동생인 사카이 타다히로에게 분여하고, 분가 이세사키 번의 창설을 막부에 인정받았다.

같은 해 5월 19일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6월 28일에 아버지가 재정을 내린 에치고 소동에 연좌되어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로부터 비색을 명받았다. 12월 27일에 비색이 해제되었고, 조쿄 2년(1684년) 4월에는 주자반 겸 사사 봉행에 취임했으며, 겐로쿠 2년(1689년)에는 병으로 사직했다. 겐로쿠 9년(1696년)에 루마즈메가 되었고, 겐로쿠 11년(1698년) 2월 15일에 에도성 오오루스이(大留守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엔포 2년(1674년)의 마쓰다이라 사다후사 이래 24년만의 직책이었기 때문에, 직무에 당황하는 일이 많아 로주·아베 마사타케나 측근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문의했다. 그 후에도 근무 상황은 변하지 않고, 겐로쿠 13년(1700년) 2월 15일에 병으로 사직했다. 오오루스이에 대해서는, 가문이 높은 사카이 씨에게 준 한직이 아니냐고 여겨지고 있다.

호에이 4년(1707년)에는 2만 석 가증을 받아 15만 석으로 복귀했지만, 같은 해 11월 7일에 은거, 가독을 장남인 타다스케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타다스케가 불과 3개월 후인 호에이 5년(1708년) 1월 25일에 급사하고, 뒤를 이은 손자인 치카요시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은거의 몸이면서 치카요시의 후견을 맡았다. 또한, 친척인 부젠 나카쓰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타네[1]의 불행을 고치려고 했었다(하지만, 나중에 상담을 중단하고, 오가사와라 나가타네는 개역되었다).

막부 정치에 대한 개혁을 여러 번 로주에게 사신이라는 형태로 제언했지만, 쓰나요시 정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슈 번주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제8대 쇼군에 취임하자 이나바 마사유키·오가사와라 나가시게와 함께 막부의 구신으로서 우대받았다. 특히 요시무네는 타다타카를 소환하거나 하야시 노부아츠를 통해 하문을 했으므로 타다타카도 요시무네에게 의견을 진술하고 있다.

2. 3. 은거와 사망

엔포 9년(1681년) 2월 27일, 아버지 다다키요가 막부 정치에서 물러나 은거했기 때문에 가독을 상속받았다. 상속받은 15만 석 중 2만 석을 동생인 사카이 타다히로에게 나누어 주고, 분가 이세사키 번의 창설을 막부에 인정받았다.[1]

같은 해 5월 19일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6월 28일에는 아버지가 재정을 내린 에치고 소동에 연좌되어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서 비색을 명받았다. 12월 27일에 비색이 해제되었고, 조쿄 2년(1684년) 4월에는 주자반 겸 사사 봉행에 취임했으며, 겐로쿠 2년(1689년)에는 병으로 사직했다. 겐로쿠 9년(1696년)에 루마즈메가 되었고, 겐로쿠 11년(1698년) 2월 15일에 에도성 오오루스이(大留守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엔포 2년(1674년)의 마쓰다이라 사다후사 이래 24년 만의 직책이었기 때문에, 직무에 당황하는 일이 많아 로주·아베 마사타케나 측근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문의했다. 그 후에도 근무 상황은 변하지 않고, 겐로쿠 13년(1700년) 2월 15일에 병으로 사직했다. 오오루스이에 대해서는, 가문이 높은 사카이 씨에게 준 한직이 아니냐고 여겨지고 있다.[1]

호에이 4년(1707년)에는 2만 석 가증을 받아 15만 석으로 복귀했지만, 같은 해 11월 7일에 은거, 가독을 장남인 다다스케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다다스케가 불과 3개월 후인 호에이 5년(1708년) 1월 25일에 급사하고, 뒤를 이은 손자인 치카요시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은거의 몸이면서 치카요시의 후견을 맡았다. 또한, 친척인 부젠 나카쓰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타네의 불행을 고치려고 했었다(하지만, 나중에 상담을 중단하고, 오가사와라 나가타네는 개역되었다).[1]

교호 5년(1720년) 11월 13일에 사망했으며, 향년 73세였다.[1]

3. 연보


  • 게이안 원년(1648년): 태어났다.
  • 덴나 원년(1681년): 가독을 상속하고, 2만 석을 분여받았다.
  • 조쿄 4년(1687년) 3월 10일: 주자번 겸 사찰 봉행에 임명되었다.
  • 겐로쿠 2년(1689년) 7월 21일: 주자번 겸 사찰 봉행에서 사임하였다.
  • 겐로쿠 3년(1690년) 11월 13일: 이름을 "다다아키"에서 "다다타카"로 고쳤다.[3]
  • 겐로쿠 9년(1696년): 유마즈메가 되었다.
  • 겐로쿠 11년(1698년): 오오루스이에 임명되었다.
  • 겐로쿠 13년(1700년): 오오루스이에서 면직되었다.
  • 호에이 4년(1707년): 2만 석을 가증받고, 치사은거하였다.
  • 교호 5년(1720년): 사망하였다(향년 73세).

4. 관련 서적


  • 후쿠도메 마키 『도쿠가와 쇼군 측근 연구』 (아즈카라 쇼보, 2006년)
  • 후쿠다 치즈루 『사카이 다다키요』 (깃카와 코분칸・인물총서, 2000년)
  • 후쿠도메 마키 『명문 푸다이 다이묘・사카이 타다타카의 분투』 (카도카와 가쿠게이 출판, 2009년)

참조

[1] 문서
[2] 서적 前橋市史 前橋市 1973
[3] 서적 前橋市史 前橋市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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