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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프란체스코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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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이탈리아 아시시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과 성당으로, 1228년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시성된 직후 건설이 시작되었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융합된 건축물로, 상부 교회와 하부 교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부 교회에는 성 프란체스코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1997년 지진으로 훼손되었으나 복구되었고, 조토, 치마부에 등 유명 예술가들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산타 키아라 수도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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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프란체스코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개요
아래쪽 및 위쪽 [[바실리카]], 그리고 [[현관]], 성 프란체스코 광장에서 본 모습.
아래쪽 및 위쪽 바실리카, 그리고 현관, 성 프란체스코 광장에서 본 모습.
위치아시시, 이탈리아
웹사이트http://www.sanfrancescoassisi.org
봉헌 연도1253년
지위교황의 소성전
건축가마에스트로 자코포 테데스코
건축 양식로마네스크 건축
이탈리아 고딕 건축
기공1227년
길이80m
너비50m
네이브 너비18m
교구아시시-노체라 움브라-괄도 타디노 로마 가톨릭 교구
수도회프란치스코 수도회
관할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모 마리아 대성전의 교황 대표
세계유산
명칭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과 기타 프란치스코회 관련 유적
유형문화유산
기준i, ii, iii, iv, vi
지정 연도2000년
지정 번호https://whc.unesco.org/en/list/990
지역유럽 및 북미

2. 역사

성당 아래의 평지에서 바라본 성당과 수도원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사크로 콘벤토 수도원)과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당은 1228년 프란체스코 성인이 시성된 직후 건설되기 시작했다.[3] 시모네 디 푸차렐로(Simone di Pucciarello)가 성당 부지를 기증했는데, 아시시 서쪽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과거 죄인들의 사형이 행해졌던 "지옥의 언덕"(Collo d'Infernoit)이었다. 현재는 "천국의 언덕"이라 불린다.

건물의 주춧돌은 1228년 7월 17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놓았으며, 실제 공사는 그 이전에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3] 이 성당은 초기 프란치스코 회원이자 시리아 관구장이었던 엘리아 봄바르도네(Elia Bombardone) 수사가 설계하고 감독을 맡았다. 교황은 그의 명령에 따라 건설을 시작하여 교회를 교황청의 소유로 선언했다.[3] 교회는 당시 가장 유명한 건축가였던 마에스트로 야코포 테데스코가 설계했다.[3]

하부 성당은 1230년에 완공되었다.[3] 1230년 5월 25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 프란체스코의 부패하지 않은 시신을 현재는 성녀 클라라 성당으로 바뀐 성 제오르지오 성당에 있던 임시 매장지에서 하부 바실리카로 엄숙한 행렬을 지어 옮겼다. 성 프란체스코의 유해가 도둑맞거나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매장지는 숨겨졌다. 상부 바실리카의 공사는 1239년 이후에 시작하여 1253년에 완공되었다.[3] 1253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상부 성당과 하부 성당을 시성하였다.[3]

작은형제회 총장이었던 교황 니콜라오 4세는 1288년 이 성당에 교황 성당의 특권을 부여하였다.[3] 성당을 향해 나 있는 로제 광장은 1474년에 완공된 열주(列柱)로 둘러싸여 있다.[3] 이 광장은 성당으로 모여드는 수많은 순례객들을 수용할 수 있다.[3] 1818년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를 하부 성당의 바닥 아래서 재발견하였다.[3] 교황 비오 9세 임기에 지하성당을 건설하여 신자들이 성인의 묘지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1986년 10월 27일과 2002년 1월, 아시시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이하여 여러 기독교의 분파와 타 종교의 120여 명 이상의 대표들을 만났다.[3]

1997년 9월 26일, 아시시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성당은 심한 훼손(치마부에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볼트 천장 일부가 붕괴하였다.)을 입어 2년간 복구 작업을 위해 폐쇄되었다.

계곡 아래에서 본 성당


북서쪽에서 본 뒷면

2. 1. 고대 로마 시대

아시시는 로마 제국 시대부터 존재했던 오래된 도시였다. 대지 위에 현재의 북동쪽 부분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가는 형태로 도시가 건설되었으며, 당시에는 길이 약 2300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기원전 89년에 로마 제국의 자치 도시로 지정되었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이기도 했다. 기원전 1세기경에 건축된 "'''미네르바 신전'''" 등의 유구는 현재에도 남아 있다.

2. 2. 중세 시대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사크로 콘벤토 수도원)과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당은 1228년 프란체스코 성인이 시성된 직후 건설되기 시작했다.[3] 시모네 디 푸차렐로(Simone di Pucciarello)가 성당 부지를 기증했는데, 아시시 서쪽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과거 죄인들의 사형이 행해졌던 "지옥의 언덕"(Collo d'Infernoit)이었다. 현재는 "천국의 언덕"이라 불린다.

건물의 주춧돌은 1228년 7월 17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놓았으며, 실제 공사는 그 이전에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3] 이 성당은 초기 프란치스코 회원이자 시리아 관구장이었던 엘리아 봄바르도네(Elia Bombardone) 수사가 설계하고 감독을 맡았다. 교황은 그의 명령에 따라 건설을 시작하여 교회를 교황청의 소유로 선언했다.[3] 교회는 당시 가장 유명한 건축가였던 마에스트로 야코포 테데스코가 설계했다.[3]

하부 성당은 1230년에 완공되었다.[3] 1230년 5월 25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 프란체스코의 부패하지 않은 시신을 현재는 성녀 클라라 성당으로 바뀐 성 제오르지오 성당에 있던 임시 매장지에서 하부 바실리카로 엄숙한 행렬을 지어 옮겼다. 성 프란체스코의 유해가 도둑맞거나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매장지는 숨겨졌다. 상부 바실리카의 공사는 1239년 이후에 시작하여 1253년에 완공되었다.[3] 1253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상부 성당과 하부 성당을 시성하였다.[3]

작은형제회 총장이었던 교황 니콜라오 4세는 1288년 이 성당에 교황 성당의 특권을 부여하였다.[3] 성당을 향해 나 있는 로제 광장은 1474년에 완공된 열주(列柱)로 둘러싸여 있다.[3] 이 광장은 성당으로 모여드는 수많은 순례객들을 수용할 수 있다.[3] 1818년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를 하부 성당의 바닥 아래서 재발견하였다.[3] 교황 비오 9세 임기에 지하성당을 건설하여 신자들이 성인의 묘지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1986년 10월 27일과 2002년 1월, 아시시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이하여 여러 기독교의 분파와 타 종교의 120여 명 이상의 대표들을 만났다.[3]

1997년 9월 26일, 아시시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성당은 심한 훼손(치마부에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볼트 천장 일부가 붕괴하였다.)을 입어 2년간 복구 작업을 위해 폐쇄되었다.

2. 3. 근현대

1997년 9월 26일 아침, 두 차례의 지진이 아시시 인근 지역을 강타하여 각각 규모 5.7과 6.0을 기록했다.[4][5]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했고 많은 고대 건축물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전문가들과 수사들이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의 피해를 조사하던 중 여진이 건물을 흔들어 아치가 붕괴되었다. 이 사고로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 2명과 전문가 2명이 사망했다. 대성당 상부 교회의 조토가 그린 성 프란치스코 생애 연작 프레스코화 대부분은 약간 손상되었지만, 붕괴된 아치 부분의 프레스코화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교회는 복원을 위해 2년 동안 폐쇄되었다.[4][5] 붕괴 장면은 영상으로 기록되었다.[6]

지진으로 무너진 천장 아치의 모습


1818년,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 지하에서 납골당이 발굴되었다. 1954년에 보전 계획이 수립되었고, 아시시는 보전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3. 주요 구조물

3. 1. 산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교황 바실리카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건축과 고딕 건축 양식이 융합된 건축물로, 이탈리아 고딕 건축의 여러 특징을 확립했다. 교회는 마에스트로 야코포 테데스코에 의해 2층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각 층은 교회로 봉헌되었다. 이들은 "상부 교회 (Basilica superiore)"와 "하부 교회 (Basilica inferiore)"로 알려져 있다. 하부 교회는 상부 교회를 지탱하는 큰 지하 묘실과 같은 구조였다. 19세기에 바실리카 아래에 하부 묘실이 건설되었다. 건축학적으로 바실리카의 외관은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과 통합된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수도원의 높은 아케이드가 언덕 경사면에 있는 교회를 지탱하고 지지하기 때문이다.

상부 교회와 하부 교회는 모두 4개의 정사각형 만(bay)이 있는 통로가 없는 네이브(nave), 정사각형 교차부, 양쪽에 반 칸씩 돌출된 트랜셉트(transept), 그리고 앱스(apse)를 갖춘 단순한 십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었다. 하부는 반원형이고 상부는 다각형이었다. 교회의 왼쪽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독립형 종탑이 있다.

하부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완전히 건설되었으며, 네이브 위에는 낮고 반원형의 리브 교차 볼트가, 트랜셉트에는 배럴 볼트가 있었다. 그러나 1350년에서 1400년 사이에 여러 개의 측면 예배당과 트랜셉트 예배당이 추가되면서 공간이 크게 확장되었다. 네이브로 들어가는 주 출입구는 1280년에서 1300년 사이에 건설된 화려한 고딕 양식의 문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후 프란체스코 디 바르톨로메오 다 피에트라산타(d. 1494)가 1487년에 만든 단순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현관으로 둘러싸였다. 고딕 양식의 문의 팀파눔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눈" [7]이라고 불리는 화려한 장미 창이 설치되어 있다.

상부 교회는 높이가 거의 같은 두 개의 수평 구역으로 나누어진 흰색 벽돌로 된 정면을 가지고 있으며, 하부 구역과 높이가 같은 단순한 박공이 있다. 고딕 양식의 단일 대형 문이 있으며, 기둥으로 나뉘어져 있고 두 개의 뾰족한 아치 위에 팀파눔에 장미 창이 설치되어 있다. 문 위, 두 번째 구역에는 크고 화려한 장미 창이 있으며, 장식 세부 사항의 대부분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그 주위에는 사도의 상징이 조각되어 있으며, 창과 결합하여 정사각형 구성을 만든다. 그 위 박공에는 안와 창이 있다. 정면의 왼쪽과 상부 교회 및 하부 교회의 앞마당에서 모두 보이는 곳에는 1754년 교회 지위가 바실리카로 격상되었을 때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축복 로지아가 있다.

내부적으로 상부 교회는 형제 엘리아스의 원래 단순한 통로가 없는 십자형 평면을 유지하고 있다. 하부 교회와 마찬가지로, 리브 교차 볼트가 있는 4개의 만의 네이브가 있다. 하부 교회와 달리 대각선 갈빗대만 반원형이다. 가로 갈빗대는 고딕 양식으로 뾰족하며, 따라서 더 넓은 대각선 갈빗대의 전체 높이까지 올라간다. 각 갈빗대 그룹은 묶음 기둥 그룹에서 시작된다. 외부적으로 기둥과 볼트는 반원형 계획의 튼튼한 부벽으로 지지된다. 하부 교회와 달리, 트랜셉트에도 리브 볼트가 있다.

네이브의 각 만과 성가대의 다각형 앱스에는 기하학적 트레이서리가 있는 높은 고딕 창문이 있다. 앱스의 창문은 13세기 말 아시시 주변에서 활동한 독일 장인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네이브의 왼쪽 창문은 프랑스 공방(1270년)에서 만들었으며, 오른쪽 창문은 마에스트로 디 산 프란체스코의 공방에서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은 13세기 이탈리아 유리 세공의 가장 훌륭한 예 중 하나이다.

이탈리아 교회 건축의 특징과 같이, 주요 장식 특징이자 교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매체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닌 프레스코였다. 가장 초기의 프레스코는 하부 교회의 일부이다. 이 작업은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진행되었으며, 치마부에와 조토와 같이 유명한 예술가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름이 더 이상 알려지지 않은 많은 예술가들도 참여했다.

상부 바실리카의 본당


이 밝고 넓은 바실리카는 십자가와 잎사귀 패턴으로 장식된 아치형 천장이 있는 4개의 베이로 이루어진 단일 본당, 트랜셉트, 다각형의 앱스로 구성되어 있다. 4개의 리브 볼트는 파란색 배경의 금색 별과 그림으로 번갈아 장식되어 있다. 두 번째 볼트는 ''그리스도''가 ''성 프란체스코''를, ''성모''가 ''세례자 요한''을 마주보는 둥근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입구 볼트에는 ''교회의 네 명의 라틴 교부''가 있다. 성 그레고리가 성 제롬을, 성 암브로스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마주보고 있다. 이 그림들은 아이작 마스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성가대석에는 도메니코 인도비니(1501)가 조각과 상감 세공을 한 102개의 나무 의자가 있다. 중앙에는 제단이 있다.

치마부에의 ''십자가형''


트랜셉트와 앱스의 서쪽 끝은 치마부에와 그의 작업장(년부터 시작)의 많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십자가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성 프란체스코가 있는 웅장한 ''십자가형''은 성 프란체스코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숭배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치마부에의 프레스코화는 습기와 부패로 인해 곧 훼손되었다. 그의 색상에 산화납을 사용하고, 석고가 더 이상 신선하지 않았을 때 색상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열화되어 사진 네거티브로 축소되었다.

그 이전에는 트랜셉트의 오른쪽 상단 부분에 (익명의) 북부 마스터, 아마도 영국 예술가(1267-1270)가 몇 가지 장식을 해 놓았다. 그는 ''천사''와 ''사도'' 그림이 있는 서쪽 벽의 두 개의 루네트와 둥근 장식을 완성했다. 또 다른 (익명의) 마스터인 로마 마스터는 ''이사야''와 ''다윗'', 그리고 동쪽 루네트 아래 벽의 나머지 부분을 그렸다.

''이삭은 에서를 거부한다''


1997년 지진으로 심하게 손상된 본당 양쪽의 윗부분은 구약의 총 32개의 장면(''세상 창조''로 시작하여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하다''로 끝남)과 신약의 장면(''수태고지''에서 ''무덤에 있는 여인들'')으로 두 줄로 장식되어 있으며, 입구 벽의 윗부분은 ''오순절''과 ''예수의 승천''의 두 개의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다. 본당의 한 베이를 칠하는 데 약 6개월이 걸렸기 때문에, 치마부에의 추종자인 다양한 로마와 토스카나 마스터들이 자코모, 자코포 토리티 그리고 피에트로 카발리니와 같은 일련의 장면을 그렸다.

세 번째 베이의 중간 부분에 있는 이삭의 삶을 그린 두 개의 프레스코화('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다'와 '이삭 앞에 있는 에서')는 전통적으로 젊은 조토(1290-1295)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전에는 바사리가 잘못 치마부에의 작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마저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익명의 아이작 마스터와 그의 작업장의 작품으로 여긴다. 그의 로마 배경을 증명하는 양식적 세부 사항에서 추론하여, 일부는 아이작 마스터가 피에트로 카발리니 또는 추종자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피에트로 카발리니는 1290년경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교회의 수도원에서 유사한 프레스코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다''를 그렸다. 휴식을 취하는 이삭의 모습은 카발리니의 모자이크 ''성모 탄생''에서 성당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의 앱스에 있는 성모의 모습과 같다. 아이작 마스터는 후대의 벽화에 혁명을 일으킨 진정한 프레스코(''부온 프레스코'') 기법의 첫 번째 실천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8]

성 프란체스코가 교황 호노리우스 3세 앞에서 설교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장식은 본당 하단부를 따라 젊은 조토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28개의 프레스코화 연작이다. 각 베이에는 본당 양쪽의 받침대 위에 세 개의 프레스코화, 입구 옆 동쪽 갤러리에 두 개의 프레스코화, 그리고 입구 벽에 두 개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조토는 성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체스코 전기인 ''레젠다 마이오르''(1266)를 사용했다. 이 연작의 원형은 로마 산 프란체스코 아 리파 교회의 피에트로 카발리니의 (현재는 소실된) 성 프란체스코 연작이었을 것이다. 조토가 이 사건의 증인이었던 것처럼 그림들이 생생하다.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들은 1296년에서 1304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초기 설명에서 모호한 귀속 때문에 조토의 저작권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많은 이탈리아 비평가들은 조토와 그의 작업장의 저작권을 계속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작의 프레스코화와 양식에 작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프레스코화들 중 일부 또는 전부가 조토의 원래 개념을 사용하여 최소 3명의 개별 화가, 즉 성 프란체스코의 전설의 마스터(주요 화가이자 연작의 감독자), 성 프란체스코의 장례의 마스터, 그리고 체칠리아 마스터에 의해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천장의 첫 번째 구간은 젊은 조토 또는 그의 추종자 중 한 명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교회의 네 명의 교부" (제롬,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 암브로스)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세 번째 구간은 야코포 토리티가 그린 그리스도, 마리아, 세례자 요한 및 프란체스코의 네 개의 하트 모양 메달을 보여준다.

상부 바실리카의 첨두 외관에는 쌍문과 아름다운 장미 창이 있는 고딕 양식의 문이 있다.

귀도 데토니 델라 그라치아의 조각인 타우가 영구 전시되어 있다.[9]

형제 엘리아스는 늑골 아치로 이루어진 거대한 지하 납골당으로 하부 바실리카를 설계했다. 그는 시리아에서 단단한 암석으로 거대한 무덤을 건설하면서 경험을 쌓았다.[7]

하부 바실리카의 측면 입구.


문 위에는 두 개의 작은 창문이 있는 큰 장미 창문이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눈"이라고 불린다. [7] 왼쪽 나무 문 장식은 우골리누치오 다 구비오()가, 오른쪽 문 장식은 익명의 움브리아 예술가(1573)가 제작했다. 그들은 성 프란치스코, 성 클라라, 성 루이, 성 안토니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묘사한다. 현관의 왼쪽 벽에는 이 교회에 교황 대성당과 카펠라 파팔레의 칭호를 부여한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흉상이 서 있다.

하부 바실리카로 들어가면, 현관 반대편에서 약 1270년에 세워진 성 카타리나 예배당을 볼 수 있다. 이 예배당은 가타포네 다 구비오에 의해 확장되었고, 교황령을 담당한 교황 특사 에지디오 알보르노스 추기경(1350년부터 1367년까지)의 비용으로 장식되었다. 그는 처음에 이곳에 묻혔지만, 나중에 그의 시신은 스페인, 톨레도로 옮겨졌다. 성 카타리나의 삶에서 8개의 에피소드를 담은 프레스코는 1368-1369년에 '안드레아 피크토르 데 보노니아'에 의해 그려졌다. 안드레아라고 불리는 이 화가는 아마도 알보르노스의 궁정 예술가인 안드레아 데 바르톨리(–1369)일 가능성이 높다(일반적으로, 하지만 잘못되어 안드레아 다 볼로냐로 여겨진다). 이 예배당의 성인들은 파체 디 바르톨로 다시시(1344–1368)가 그렸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아시시의 조반니 디 보니노의 작품이다(14세기 중반).

입구 왼쪽에는 성 세바스티안 예배당이 있는데, 조르제티의 캔버스와 성인의 삶의 에피소드가 벽에 그려져 있으며, 이는 년 G. 마르텔리에 의해 그려졌다(이레네가 성 세바스티안을 돌보는 모습, 도미티아누스 앞에 있는 성 세바스티안). 이 예배당의 왼쪽 벽은 오타비아노 넬리의 몇몇 그림(15세기)과 성 크리스토퍼 그림(움브리아 학파, 14세기)으로 장식되어 있다.

입구 오른쪽에는 익명의 예술가들의 두 개의 기념비가 있다. 첫 번째 공간에는 14세기 초의 반암 꽃병(키프로스 여왕의 선물)으로 덮인 조반니 데 세르치의 영묘와 예루살렘의 왕이자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섭정인 브리엔의 존의 영묘가 있다. 이 마지막 묘비 위에는 복되신 동정녀의 조각상이 서 있고, 그 왼쪽에는 1290년 코스마테스코가 만든 사자에 앉아 있는 왕관을 쓴 여인의 모습이 있다.

이 입구의 세 번째 부분의 벽과 아치에 있는 심하게 훼손된 프레스코는 체사레 세르메이와 G. 마르텔리의 작품이다(1645). 세 번째 부분 오른쪽에 있는 예배당은 성 안토니에게 헌정되었다. 벽의 틈새에는 스폴레토 총독 (당시 교황령의 일부) 블라스코 페르난데스와 그의 아들 가르시아의 묘비가 있다. 두 사람 모두 1367년에 암살되었다(익명의 지역 예술가, 14세기).

하부 바실리카는 여러 개의 측면 예배당과 반원형 아치로 이루어진 중앙 본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당은 마에스트로 디 산 프란체스코라는 이름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가 그린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다. 그들은 오른쪽에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 5개를 특징으로 하고, 왼쪽에 똑같이 ''성 프란치스코의 삶'' 장면 5개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병치를 통해 프란체스코회는 그들의 창시자를 두 번째 그리스도로 묘사하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그들은 금색 별로 장식된 낮은 푸른색 천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부 벽의 대부분의 이미지는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부식되었지만, 오른쪽 벽에는 치마부에가 그린 ''천사와 함께 있는 동정녀와 아기''의 단편이 남아 있다.

건조한 석고에 템페라로 그린 이 프레스코는 약 1260–1263년에 완성되었다. 그것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치마부에 이전의 토스카나 벽화의 가장 좋은 예로 여겨진다. 이 교회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귀족 가문을 위한 측면 예배당이 1270년과 1350년 사이에 추가되어 열린 벽의 프레스코를 파괴했다.

왼쪽 첫 번째 예배당은 산 마르티노 예배당으로, 투르의 성 마르티노에게 헌정되었다. 프란체스코회 추기경 젠틸레 포르티노 다 몬테피오레가 건축했으며, 1317년과 1319년 사이에 시모네 마르티니가 성인의 삶을 묘사한 10개의 프레스코로 장식되었다. 이 헌정은 몬테피오레 추기경이 로마의 성 마르티노 "아이 몬티" 바실리카의 추기경 사제로서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의 매장 장소가 될 예정이었다. 아마도 몬테피오레가 사망했을 때(1312년 10월) 미완성 상태였을 것이며, 따라서 그는 이웃한 성 루이 예배당에 묻혔다.[10] 마르티니는 또한 성 엘리자베스 예배당(익랑 남쪽)에 다섯 명의 수행 성인과 함께 ''두 명의 헝가리 왕족 성인과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를 묘사한 3폭 제단화를 그렸다. 이것들은 마르티니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이며 14세기 그림의 가장 훌륭한 예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연백 사용은 이 작품들의 여러 부분의 어두워짐을 초래했다.

산 마르티노 예배당에서 시모네 마르티니가 그린 프레스코로, 기사도 생활을 떠나 군대를 포기하는 성 마르티노.


왼쪽의 다른 예배당은 성 알칸타라의 베드로에게 헌정되었다.

오른쪽 예배당은 다음 성인들에게 헌정되었다.

  • 툴루즈의 루이와 헝가리의 성 스테판, 도노 도니가 그린 프레스코(1575)와 시모네 마르티니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스테인드글라스.
  • 파도바의 안토니오, 체사레 세르메이가 그린 프레스코(1610).
  • 마리아 막달레나. 테오발도 폰타노(1296년부터 1329년까지 아시시의 주교)가 건설한 이 예배당에는 조토의 작업장, 아마도 거장 본인이 그린 최고의 작품(약 1320년)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바사리에 의해 푸치오 카파나로 잘못 귀속되었다.) 측벽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삶'' 장면이 있고(테오발도 폰타노의 초상화 위에), 아치에는 ''그리스도'', ''동정녀'', ''마리아 막달레나'' 및 ''라자로''의 흉상이 있는 원형장식이 있다.


본당은 풍부하게 장식된 반원형 앱스로 끝나며, 트랜셉트가 먼저 나오며, 배럴 볼트가 있다.

오른쪽 트랜셉트의 프레스코는 어린 시절의 그리스도를 묘사하며, 조토와 그의 작업장의 작품이 부분적으로 사용되었고, 익명의 마에스트로 디 산 니콜라의 ''탄생''도 묘사되었다. 가장 낮은 층에는 사후에 두 아이를 돕는 성 프란치스코를 묘사한 세 개의 프레스코가 있다. 조토가 그린 이 프레스코는 당시 혁명적이었으며, 감정을 가진 실제 사람들을 현실적인 풍경 속에 표현했다.

치마부에의 ''마에스타와 성 프란치스코''.


트랜셉트 벽에 치마부에는 ''옥좌에 앉은 우리 주님과 성 프란치스코''의 이미지를 그렸다(1280). 이것은 아마도 성 프란치스코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가까운 초상화일 것이다. 고딕 양식의 이 정적인 그림은 조토의 생생한 프레스코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트랜셉트 북쪽 끝에 있는 이 성 바리의 니콜라오 예배당은 교황 특사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추기경이 의뢰했으며, 1292년에서 1294년 사이에 사망한 추기경의 형제 조반니 오르시니의 무덤이 있다. 장례 기념비는 제단 위의 틈새에 놓여 있으며, 어린 남자의 눕혀진 조각상이 묘실 안에 놓여 있고 두 천사가 옆에 있다. 부조는 움브리아 조각가, 아마도 지역 출신이 조각했다. 무덤과 스테인드글라스 창 사이에는 조토 학파에 속하는 프레스코 3부작이 나타나며, 성 프란치스코와 니콜라와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를 묘사한다. 예배당 벽을 장식한 이 순환은 1307년까지 완성되었으며, 천장과 벽에 성 니콜라의 삶과 기적을 묘사한 12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배당 헌정 장면은 남쪽 벽 입구의 아치 위에 그려져 있다. 구세주는 성 니콜라가 소개한 조반니 오르시니와 성 프란치스코가 소개한 나폴레오네 오르시니의 경의를 받는다. 스테인드글라스 창은 정상에서 그리스도에게 소개된 나폴레오네 추기경과 그 아래 구역에서 성 니콜라에게 소개된 그의 형제를 보여준다. 트랜셉트의 남쪽 끝에서 오르시니 추기경은 성 세례자 요한에게 헌정된 또 다른 예배당을 의뢰했는데, 원래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자신의 무덤을 위해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추기경은 그곳에 묻히지 않았고 무덤은 비어 있었다. 두 오르시니 예배당의 평행한 건축 배열은 그들이 함께 구상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성 세례자 요한에게 헌정된 예배당의 장식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피에트로 로렌체티(또는 그의 작업장)는 마돈나와 아기와 세례자 성 요한과 성 프란치스코가 있는 프레스코 3부작을 실행했다.

14세기 캔버스에 그린 피에트로 로렌체티의 마돈나 데이 트라몬티.


왼쪽 트랜셉트는 1315년에서 1330년 사이에 시에나 화가 피에트로 로렌체티와 그의 작업장에 의해 장식되었다(바사리에 의해 피에트로 로렌체티와 조토와 푸치오 카파나로 잘못 귀속). 이 일련의 템페라 프레스코는 그의 걸작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여섯 장면을 묘사한다. ''십자가에서 내려짐'' 프레스코는 특히 감동적이다. 이 순환을 완성하는 데 약 330단계의 작업이 필요했다. 기념비적인 "십자가 처형" 장면 아래, 피에트로 로렌체티는 성 요한 복음사가와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돈나와 아기의 프레스코를 실행했다(소위 ''마돈나 데이 트라몬티''). 이 프레스코에는 전례 도구와 가짜 벤치가 있는 프레스코 틈새가 함께 제공된다.

''어린 시절''과 ''수난'' 프레스코의 병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 프란치스코의 ''연민''의 평행성을 강조한다.

프레스코가 있는 교황 제단


앱스에 있는 교황 제단은 1230년에 코모에서 가져온 하나의 돌 덩어리로 만들어졌다. 제단 주변에는 다양한 스타일의 기둥에 의해 지지되는 일련의 장식된 고딕 아치가 있다. 아름다운 고딕 호두나무 합창단석은 1471년 아폴로니오 페트로키 다 리파트란소네가 토마소 디 안토니오 피오렌티노와 안드레아 다 몬테팔코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한때 스테파노 피오렌티노의 십자가형 알레고리를 묘사한 프레스코가 있었지만(1622년 파괴됨), 앱스의 벽은 현재 체사레 세르메이 디 오르비에토(1609–1668)가 그린 "최후의 심판"으로 덮여 있다.

아치 창의 반달형 부분의 그림(1315–20)은 ''성 프란치스코의 승리''와 마에스트로 델레 벨레라고 불리는 사람(아시시 아치의 거장), 조토의 제자(약 1330년)가 그린 ''순종'', ''가난'', ''정조''의 세 가지 알레고리를 묘사한다.

이 하부 바실리카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조반니 디 보니노와 그의 작업장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하 묘소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본당 중간 지점에서 이중 계단을 통해 지하 묘소로 내려갈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이 매장지는 1818년에 발견되었다. 그의 유해는 형제 엘리아스에 의해 중세 유럽에서 성유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숨겨졌으며, 이는 존 M. 스위니가 쓴 《열광자(The Enthusiast)》에 나오는 이야기이다.[11] 교황 비오 7세의 명령에 따라 하부 바실리카 아래에 지하 묘소가 건설되었다. 이 묘소는 파스콸레 벨리가 신고전주의 양식의 귀중한 대리석으로 설계했다. 그러나 1925년에서 1932년 사이에 우고 타르키에 의해 신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설계되었다.

철 띠가 있는 고대 석관은 제단 위의 열린 공간에 안치되어 있다. 1934년 그의 가장 충실한 형제들, 루피노 형제, 안젤로 형제, 마세오 형제, 레오 형제는 제단을 둘러싼 벽의 구석에 묻혔다.

지하 묘소 입구에는 자코파 데이 세테솔리의 유해가 담긴 항아리가 추가되었다. "자코파 형제"라고 애정 어린 호칭으로 불린 이 로마 귀족 여성은 성 프란치스코의 가장 충실한 친구이자 후원자였다. 그녀는 그의 임종 시 포르치운콜라에 함께 있었다.

3. 1. 1. 건축 양식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건축과 고딕 건축 양식이 융합된 건축물로, 이탈리아 고딕 건축의 여러 특징을 확립했다. 교회는 마에스트로 야코포 테데스코에 의해 2층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각 층은 교회로 봉헌되었다. 이들은 "상부 교회 (Basilica superiore)"와 "하부 교회 (Basilica inferiore)"로 알려져 있다. 하부 교회는 상부 교회를 지탱하는 큰 지하 묘실과 같은 구조였다. 19세기에 바실리카 아래에 하부 묘실이 건설되었다. 건축학적으로 바실리카의 외관은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과 통합된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수도원의 높은 아케이드가 언덕 경사면에 있는 교회를 지탱하고 지지하기 때문이다.

상부 교회와 하부 교회는 모두 4개의 정사각형 만(bay)이 있는 통로가 없는 네이브(nave), 정사각형 교차부, 양쪽에 반 칸씩 돌출된 트랜셉트(transept), 그리고 앱스(apse)를 갖춘 단순한 십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었다. 하부는 반원형이고 상부는 다각형이었다. 교회의 왼쪽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독립형 종탑이 있다.

하부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완전히 건설되었으며, 네이브 위에는 낮고 반원형의 리브 교차 볼트가, 트랜셉트에는 배럴 볼트가 있었다. 그러나 1350년에서 1400년 사이에 여러 개의 측면 예배당과 트랜셉트 예배당이 추가되면서 공간이 크게 확장되었다. 네이브로 들어가는 주 출입구는 1280년에서 1300년 사이에 건설된 화려한 고딕 양식의 문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후 프란체스코 디 바르톨로메오 다 피에트라산타(d. 1494)가 1487년에 만든 단순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의 현관으로 둘러싸였다. 고딕 양식의 문의 팀파눔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눈" [7]이라고 불리는 화려한 장미 창이 설치되어 있다.

상부 교회는 높이가 거의 같은 두 개의 수평 구역으로 나누어진 흰색 벽돌로 된 정면을 가지고 있으며, 하부 구역과 높이가 같은 단순한 박공이 있다. 고딕 양식의 단일 대형 문이 있으며, 기둥으로 나뉘어져 있고 두 개의 뾰족한 아치 위에 팀파눔에 장미 창이 설치되어 있다. 문 위, 두 번째 구역에는 크고 화려한 장미 창이 있으며, 장식 세부 사항의 대부분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그 주위에는 사도의 상징이 조각되어 있으며, 창과 결합하여 정사각형 구성을 만든다. 그 위 박공에는 안와 창이 있다. 정면의 왼쪽과 상부 교회 및 하부 교회의 앞마당에서 모두 보이는 곳에는 1754년 교회 지위가 바실리카로 격상되었을 때 건설된 바로크 양식의 축복 로지아가 있다.

내부적으로 상부 교회는 형제 엘리아스의 원래 단순한 통로가 없는 십자형 평면을 유지하고 있다. 하부 교회와 마찬가지로, 리브 교차 볼트가 있는 4개의 만의 네이브가 있다. 하부 교회와 달리 대각선 갈빗대만 반원형이다. 가로 갈빗대는 고딕 양식으로 뾰족하며, 따라서 더 넓은 대각선 갈빗대의 전체 높이까지 올라간다. 각 갈빗대 그룹은 묶음 기둥 그룹에서 시작된다. 외부적으로 기둥과 볼트는 반원형 계획의 튼튼한 부벽으로 지지된다. 하부 교회와 달리, 트랜셉트에도 리브 볼트가 있다.

네이브의 각 만과 성가대의 다각형 앱스에는 기하학적 트레이서리가 있는 높은 고딕 창문이 있다. 앱스의 창문은 13세기 말 아시시 주변에서 활동한 독일 장인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네이브의 왼쪽 창문은 프랑스 공방(1270년)에서 만들었으며, 오른쪽 창문은 마에스트로 디 산 프란체스코의 공방에서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은 13세기 이탈리아 유리 세공의 가장 훌륭한 예 중 하나이다.

이탈리아 교회 건축의 특징과 같이, 주요 장식 특징이자 교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매체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닌 프레스코였다. 가장 초기의 프레스코는 하부 교회의 일부이다. 이 작업은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진행되었으며, 치마부에와 조토와 같이 유명한 예술가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름이 더 이상 알려지지 않은 많은 예술가들도 참여했다.

3. 1. 2. 상부 성당



이 밝고 넓은 바실리카는 십자가와 잎사귀 패턴으로 장식된 아치형 천장이 있는 4개의 베이로 이루어진 단일 본당, 트랜셉트, 다각형의 앱스로 구성되어 있다. 4개의 리브 볼트는 파란색 배경의 금색 별과 그림으로 번갈아 장식되어 있다. 두 번째 볼트는 ''그리스도''가 ''성 프란체스코''를, ''성모''가 ''세례자 요한''을 마주보는 둥근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입구 볼트에는 ''교회의 네 명의 라틴 교부''가 있다. 성 그레고리가 성 제롬을, 성 암브로스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마주보고 있다. 이 그림들은 아이작 마스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성가대석에는 도메니코 인도비니(1501)가 조각과 상감 세공을 한 102개의 나무 의자가 있다. 중앙에는 제단이 있다.

트랜셉트와 앱스의 서쪽 끝은 치마부에와 그의 작업장(년부터 시작)의 많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십자가 발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성 프란체스코가 있는 웅장한 ''십자가형''은 성 프란체스코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숭배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치마부에의 프레스코화는 습기와 부패로 인해 곧 훼손되었다. 그의 색상에 산화납을 사용하고, 석고가 더 이상 신선하지 않았을 때 색상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열화되어 사진 네거티브로 축소되었다.

그 이전에는 트랜셉트의 오른쪽 상단 부분에 (익명의) 북부 마스터, 아마도 영국 예술가(1267-1270)가 몇 가지 장식을 해 놓았다. 그는 ''천사''와 ''사도'' 그림이 있는 서쪽 벽의 두 개의 루네트와 둥근 장식을 완성했다. 또 다른 (익명의) 마스터인 로마 마스터는 ''이사야''와 ''다윗'', 그리고 동쪽 루네트 아래 벽의 나머지 부분을 그렸다.

1997년 지진으로 심하게 손상된 본당 양쪽의 윗부분은 구약의 총 32개의 장면(''세상 창조''로 시작하여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하다''로 끝남)과 신약의 장면(''수태고지''에서 ''무덤에 있는 여인들'')으로 두 줄로 장식되어 있으며, 입구 벽의 윗부분은 ''오순절''과 ''예수의 승천''의 두 개의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다. 본당의 한 베이를 칠하는 데 약 6개월이 걸렸기 때문에, 치마부에의 추종자인 다양한 로마와 토스카나 마스터들이 자코모, 자코포 토리티 그리고 피에트로 카발리니와 같은 일련의 장면을 그렸다.

세 번째 베이의 중간 부분에 있는 이삭의 삶을 그린 두 개의 프레스코화('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다'와 '이삭 앞에 있는 에서')는 전통적으로 젊은 조토(1290-1295)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전에는 바사리가 잘못 치마부에의 작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마저도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익명의 아이작 마스터와 그의 작업장의 작품으로 여긴다. 그의 로마 배경을 증명하는 양식적 세부 사항에서 추론하여, 일부는 아이작 마스터가 피에트로 카발리니 또는 추종자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피에트로 카발리니는 1290년경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교회의 수도원에서 유사한 프레스코화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다''를 그렸다. 휴식을 취하는 이삭의 모습은 카발리니의 모자이크 ''성모 탄생''에서 성당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의 앱스에 있는 성모의 모습과 같다. 아이작 마스터는 후대의 벽화에 혁명을 일으킨 진정한 프레스코(''부온 프레스코'') 기법의 첫 번째 실천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8]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장식은 본당 하단부를 따라 젊은 조토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28개의 프레스코화 연작이다. 각 베이에는 본당 양쪽의 받침대 위에 세 개의 프레스코화, 입구 옆 동쪽 갤러리에 두 개의 프레스코화, 그리고 입구 벽에 두 개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조토는 성 보나벤투라의 성 프란체스코 전기인 ''레젠다 마이오르''(1266)를 사용했다. 이 연작의 원형은 로마 산 프란체스코 아 리파 교회의 피에트로 카발리니의 (현재는 소실된) 성 프란체스코 연작이었을 것이다. 조토가 이 사건의 증인이었던 것처럼 그림들이 생생하다.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들은 1296년에서 1304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초기 설명에서 모호한 귀속 때문에 조토의 저작권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많은 이탈리아 비평가들은 조토와 그의 작업장의 저작권을 계속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작의 프레스코화와 양식에 작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프레스코화들 중 일부 또는 전부가 조토의 원래 개념을 사용하여 최소 3명의 개별 화가, 즉 성 프란체스코의 전설의 마스터(주요 화가이자 연작의 감독자), 성 프란체스코의 장례의 마스터, 그리고 체칠리아 마스터에 의해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천장의 첫 번째 구간은 젊은 조토 또는 그의 추종자 중 한 명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교회의 네 명의 교부" (제롬,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 암브로스)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다. 세 번째 구간은 야코포 토리티가 그린 그리스도, 마리아, 세례자 요한 및 프란체스코의 네 개의 하트 모양 메달을 보여준다.

상부 바실리카의 첨두 외관에는 쌍문과 아름다운 장미 창이 있는 고딕 양식의 문이 있다.

귀도 데토니 델라 그라치아의 조각인 타우가 영구 전시되어 있다.[9]

3. 1. 3. 하부 성당

형제 엘리아스는 늑골 아치로 이루어진 거대한 지하 납골당으로 하부 바실리카를 설계했다. 그는 시리아에서 단단한 암석으로 거대한 무덤을 건설하면서 경험을 쌓았다.[7]

문 위에는 두 개의 작은 창문이 있는 큰 장미 창문이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눈"이라고 불린다. [7] 왼쪽 나무 문 장식은 우골리누치오 다 구비오()가, 오른쪽 문 장식은 익명의 움브리아 예술가(1573)가 제작했다. 그들은 성 프란치스코, 성 클라라, 성 루이, 성 안토니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묘사한다. 현관의 왼쪽 벽에는 이 교회에 교황 대성당과 카펠라 파팔레의 칭호를 부여한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흉상이 서 있다.

하부 바실리카로 들어가면, 현관 반대편에서 약 1270년에 세워진 성 카타리나 예배당을 볼 수 있다. 이 예배당은 가타포네 다 구비오에 의해 확장되었고, 교황령을 담당한 교황 특사 에지디오 알보르노스 추기경(1350년부터 1367년까지)의 비용으로 장식되었다. 그는 처음에 이곳에 묻혔지만, 나중에 그의 시신은 스페인, 톨레도로 옮겨졌다. 성 카타리나의 삶에서 8개의 에피소드를 담은 프레스코는 1368-1369년에 '안드레아 피크토르 데 보노니아'에 의해 그려졌다. 안드레아라고 불리는 이 화가는 아마도 알보르노스의 궁정 예술가인 안드레아 데 바르톨리(–1369)일 가능성이 높다(일반적으로, 하지만 잘못되어 안드레아 다 볼로냐로 여겨진다). 이 예배당의 성인들은 파체 디 바르톨로 다시시(1344–1368)가 그렸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아시시의 조반니 디 보니노의 작품이다(14세기 중반).

입구 왼쪽에는 성 세바스티안 예배당이 있는데, 조르제티의 캔버스와 성인의 삶의 에피소드가 벽에 그려져 있으며, 이는 년 G. 마르텔리에 의해 그려졌다(이레네가 성 세바스티안을 돌보는 모습, 도미티아누스 앞에 있는 성 세바스티안). 이 예배당의 왼쪽 벽은 오타비아노 넬리의 몇몇 그림(15세기)과 성 크리스토퍼 그림(움브리아 학파, 14세기)으로 장식되어 있다.

입구 오른쪽에는 익명의 예술가들의 두 개의 기념비가 있다. 첫 번째 공간에는 14세기 초의 반암 꽃병(키프로스 여왕의 선물)으로 덮인 조반니 데 세르치의 영묘와 예루살렘의 왕이자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섭정인 브리엔의 존의 영묘가 있다. 이 마지막 묘비 위에는 복되신 동정녀의 조각상이 서 있고, 그 왼쪽에는 1290년 코스마테스코가 만든 사자에 앉아 있는 왕관을 쓴 여인의 모습이 있다.

이 입구의 세 번째 부분의 벽과 아치에 있는 심하게 훼손된 프레스코는 체사레 세르메이와 G. 마르텔리의 작품이다(1645). 세 번째 부분 오른쪽에 있는 예배당은 성 안토니에게 헌정되었다. 벽의 틈새에는 스폴레토 총독 (당시 교황령의 일부) 블라스코 페르난데스와 그의 아들 가르시아의 묘비가 있다. 두 사람 모두 1367년에 암살되었다(익명의 지역 예술가, 14세기).

하부 바실리카는 여러 개의 측면 예배당과 반원형 아치로 이루어진 중앙 본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당은 마에스트로 디 산 프란체스코라는 이름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가 그린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다. 그들은 오른쪽에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 5개를 특징으로 하고, 왼쪽에 똑같이 ''성 프란치스코의 삶'' 장면 5개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병치를 통해 프란체스코회는 그들의 창시자를 두 번째 그리스도로 묘사하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그들은 금색 별로 장식된 낮은 푸른색 천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부 벽의 대부분의 이미지는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부식되었지만, 오른쪽 벽에는 치마부에가 그린 ''천사와 함께 있는 동정녀와 아기''의 단편이 남아 있다.

건조한 석고에 템페라로 그린 이 프레스코는 약 1260–1263년에 완성되었다. 그것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치마부에 이전의 토스카나 벽화의 가장 좋은 예로 여겨진다. 이 교회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귀족 가문을 위한 측면 예배당이 1270년과 1350년 사이에 추가되어 열린 벽의 프레스코를 파괴했다.

왼쪽 첫 번째 예배당은 산 마르티노 예배당으로, 투르의 성 마르티노에게 헌정되었다. 프란체스코회 추기경 젠틸레 포르티노 다 몬테피오레가 건축했으며, 1317년과 1319년 사이에 시모네 마르티니가 성인의 삶을 묘사한 10개의 프레스코로 장식되었다. 이 헌정은 몬테피오레 추기경이 로마의 성 마르티노 "아이 몬티" 바실리카의 추기경 사제로서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의 매장 장소가 될 예정이었다. 아마도 몬테피오레가 사망했을 때(1312년 10월) 미완성 상태였을 것이며, 따라서 그는 이웃한 성 루이 예배당에 묻혔다.[10] 마르티니는 또한 성 엘리자베스 예배당(익랑 남쪽)에 다섯 명의 수행 성인과 함께 ''두 명의 헝가리 왕족 성인과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를 묘사한 3폭 제단화를 그렸다. 이것들은 마르티니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이며 14세기 그림의 가장 훌륭한 예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연백 사용은 이 작품들의 여러 부분의 어두워짐을 초래했다.

왼쪽의 다른 예배당은 성 알칸타라의 베드로에게 헌정되었다.

오른쪽 예배당은 다음 성인들에게 헌정되었다.

  • 툴루즈의 루이와 헝가리의 성 스테판, 도노 도니가 그린 프레스코(1575)와 시모네 마르티니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스테인드글라스.
  • 파도바의 안토니오, 체사레 세르메이가 그린 프레스코(1610).
  • 마리아 막달레나. 테오발도 폰타노(1296년부터 1329년까지 아시시의 주교)가 건설한 이 예배당에는 조토의 작업장, 아마도 거장 본인이 그린 최고의 작품(약 1320년)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바사리에 의해 푸치오 카파나로 잘못 귀속되었다.) 측벽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삶'' 장면이 있고(테오발도 폰타노의 초상화 위에), 아치에는 ''그리스도'', ''동정녀'', ''마리아 막달레나'' 및 ''라자로''의 흉상이 있는 원형장식이 있다.


본당은 풍부하게 장식된 반원형 앱스로 끝나며, 트랜셉트가 먼저 나오며, 배럴 볼트가 있다.

오른쪽 트랜셉트의 프레스코는 어린 시절의 그리스도를 묘사하며, 조토와 그의 작업장의 작품이 부분적으로 사용되었고, 익명의 마에스트로 디 산 니콜라의 ''탄생''도 묘사되었다. 가장 낮은 층에는 사후에 두 아이를 돕는 성 프란치스코를 묘사한 세 개의 프레스코가 있다. 조토가 그린 이 프레스코는 당시 혁명적이었으며, 감정을 가진 실제 사람들을 현실적인 풍경 속에 표현했다.

트랜셉트 벽에 치마부에는 ''옥좌에 앉은 우리 주님과 성 프란치스코''의 이미지를 그렸다(1280). 이것은 아마도 성 프란치스코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가까운 초상화일 것이다. 고딕 양식의 이 정적인 그림은 조토의 생생한 프레스코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트랜셉트 북쪽 끝에 있는 이 성 바리의 니콜라오 예배당은 교황 특사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추기경이 의뢰했으며, 1292년에서 1294년 사이에 사망한 추기경의 형제 조반니 오르시니의 무덤이 있다. 장례 기념비는 제단 위의 틈새에 놓여 있으며, 어린 남자의 눕혀진 조각상이 묘실 안에 놓여 있고 두 천사가 옆에 있다. 부조는 움브리아 조각가, 아마도 지역 출신이 조각했다. 무덤과 스테인드글라스 창 사이에는 조토 학파에 속하는 프레스코 3부작이 나타나며, 성 프란치스코와 니콜라와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를 묘사한다. 예배당 벽을 장식한 이 순환은 1307년까지 완성되었으며, 천장과 벽에 성 니콜라의 삶과 기적을 묘사한 12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배당 헌정 장면은 남쪽 벽 입구의 아치 위에 그려져 있다. 구세주는 성 니콜라가 소개한 조반니 오르시니와 성 프란치스코가 소개한 나폴레오네 오르시니의 경의를 받는다. 스테인드글라스 창은 정상에서 그리스도에게 소개된 나폴레오네 추기경과 그 아래 구역에서 성 니콜라에게 소개된 그의 형제를 보여준다. 트랜셉트의 남쪽 끝에서 오르시니 추기경은 성 세례자 요한에게 헌정된 또 다른 예배당을 의뢰했는데, 원래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자신의 무덤을 위해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추기경은 그곳에 묻히지 않았고 무덤은 비어 있었다. 두 오르시니 예배당의 평행한 건축 배열은 그들이 함께 구상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성 세례자 요한에게 헌정된 예배당의 장식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피에트로 로렌체티(또는 그의 작업장)는 마돈나와 아기와 세례자 성 요한과 성 프란치스코가 있는 프레스코 3부작을 실행했다.

왼쪽 트랜셉트는 1315년에서 1330년 사이에 시에나 화가 피에트로 로렌체티와 그의 작업장에 의해 장식되었다(바사리에 의해 피에트로 로렌체티와 조토와 푸치오 카파나로 잘못 귀속). 이 일련의 템페라 프레스코는 그의 걸작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여섯 장면을 묘사한다. ''십자가에서 내려짐'' 프레스코는 특히 감동적이다. 이 순환을 완성하는 데 약 330단계의 작업이 필요했다. 기념비적인 "십자가 처형" 장면 아래, 피에트로 로렌체티는 성 요한 복음사가와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돈나와 아기의 프레스코를 실행했다(소위 ''마돈나 데이 트라몬티''). 이 프레스코에는 전례 도구와 가짜 벤치가 있는 프레스코 틈새가 함께 제공된다.

''어린 시절''과 ''수난'' 프레스코의 병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 프란치스코의 ''연민''의 평행성을 강조한다.

앱스에 있는 교황 제단은 1230년에 코모에서 가져온 하나의 돌 덩어리로 만들어졌다. 제단 주변에는 다양한 스타일의 기둥에 의해 지지되는 일련의 장식된 고딕 아치가 있다. 아름다운 고딕 호두나무 합창단석은 1471년 아폴로니오 페트로키 다 리파트란소네가 토마소 디 안토니오 피오렌티노와 안드레아 다 몬테팔코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한때 스테파노 피오렌티노의 십자가형 알레고리를 묘사한 프레스코가 있었지만(1622년 파괴됨), 앱스의 벽은 현재 체사레 세르메이 디 오르비에토(1609–1668)가 그린 "최후의 심판"으로 덮여 있다.

아치 창의 반달형 부분의 그림(1315–20)은 ''성 프란치스코의 승리''와 마에스트로 델레 벨레라고 불리는 사람(아시시 아치의 거장), 조토의 제자(약 1330년)가 그린 ''순종'', ''가난'', ''정조''의 세 가지 알레고리를 묘사한다.

이 하부 바실리카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조반니 디 보니노와 그의 작업장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3. 1. 4. 지하 묘소



본당 중간 지점에서 이중 계단을 통해 지하 묘소로 내려갈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이 매장지는 1818년에 발견되었다. 그의 유해는 형제 엘리아스에 의해 중세 유럽에서 성유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숨겨졌으며, 이는 존 M. 스위니가 쓴 《열광자(The Enthusiast)》에 나오는 이야기이다.[11] 교황 비오 7세의 명령에 따라 하부 바실리카 아래에 지하 묘소가 건설되었다. 이 묘소는 파스콸레 벨리가 신고전주의 양식의 귀중한 대리석으로 설계했다. 그러나 1925년에서 1932년 사이에 우고 타르키에 의해 신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설계되었다.

철 띠가 있는 고대 석관은 제단 위의 열린 공간에 안치되어 있다. 1934년 그의 가장 충실한 형제들, 루피노 형제, 안젤로 형제, 마세오 형제, 레오 형제는 제단을 둘러싼 벽의 구석에 묻혔다.

지하 묘소 입구에는 자코파 데이 세테솔리의 유해가 담긴 항아리가 추가되었다. "자코파 형제"라고 애정 어린 호칭으로 불린 이 로마 귀족 여성은 성 프란치스코의 가장 충실한 친구이자 후원자였다. 그녀는 그의 임종 시 포르치운콜라에 함께 있었다.

3. 2. 산타 키아라 수도원

'''산타 키아라 수도원'''(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ta Chiara)은 키아라 (클라라)가 1212년에 청빈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그룹을 만들어 세운 여자 수도원이다. 키아라성 프란체스코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의 모든 재산을 포기했다. 1257년에 완성되었으며, 분홍색과 흰색 줄무늬가 특징이다. 수도원 지하에는 키아라의 유해를 모신 방이 있다.

3. 3. 기타

4. 문화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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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의의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세계유산 기준 1, 2, 3, 4, 6을 충족하는 문화 유산이다.


5. 접근성

로마피렌체에서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며, 로마에서는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또한 로마, 피렌체, 페루자에서 각각 정기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참조

[1] 서적 Vite de'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 architetti
[2] 웹사이트 Totius Orbis Of The Holy Father Benedict XVI for the Coordination of Pastoral Activities and Initiatives at the Basilicas of St Francis and of St Mary of the Angels in Assisi https://www.vatican.[...] Holy See 2005-11-09
[3] 서적 Francesco d'Assisi e le origini dell'arte del Rinascimento in Italia
[4] 간행물 Emergency Stabilization of the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 http://crm.cr.nps.go[...] National Park Service – US Department of the Interior 2000
[5] 간행물 Restoring the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 http://crm.cr.nps.go[...] National Park Service – US Department of the Interior 2001
[6] AV media Earthquake Assisi, Italy - Terremoto Assisi, Italia 1997 https://m.youtube.co[...] 2006-10-22
[7] 서적 Assisi, Heart of the World Edizione Porziuncola 2001
[8] 문서 Mural Painting as a Medium: Technique, Representation and Liturgy https://www.academia[...] Pannonhalma Abbey 2014
[9] 서적 Rick Steves' Italy http://archive.org/d[...] Avalon Travel Publishing 2005-10-04
[10] 웹사이트 Assisi http://www.keytoumbr[...] Key to Umbria 2011-09-15
[11] 웹사이트 Italophile Book Reviews: The Enthusiast by Jon M. Sweeney http://italophileboo[...] 201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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