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혜
1. 개요
상혜는 전한 시대의 인물로, 흉노에 사자로 갔다가 억류되었으나 귀환 후 광록대부에 임명되었다. 오손에 사자로 파견되어 흉노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 인수를 도둑맞아 처벌 위기에 놓였으나 오히려 장라후에 봉해졌다. 이후 구자국을 공격하여 뇌단을 죽인 자를 처형하고, 전속국에서 활약하다가 우장군을 거쳐 원제를 섬기다 죽었으며, 시호는 장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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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7년 사망 -
파르나케스 2세
파르나케스 2세는 미트리다테스 6세를 배신하고 로마에 항복하여 보스포로스 왕국의 왕이 되었으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배 후 살해당하며 몰락했고, 젤라 전투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명언을 탄생시켰다. -
기원전 47년 사망 -
유종고
유종고는 후한 시대 치천경왕 유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부도덕한 행실로 영토가 삭감되는 징계를 받았고, 치천사왕으로 28년 만에 사망하여 시호를 '사'라 하였으며, 그의 아들 유상이 왕위를 이었다. -
전한의 열후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전한의 열후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1세기 중국 사람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기원전 1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소제는 상혜의 절개를 높이 사 광록대부에 임명하였다. 이후 상혜는 외국의 일에 정통하여 여러 공을 세웠다. 감로 연간에 후장군 조충국이 죽자 우장군에 임명되었고, 선제를 이어 즉위한 원제를 섬기다가 초원 2년(기원전 47년)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장무(壯武)이며, 아들 상성이 작위를 이었다. 장라후는 엄후 상성, 애후 상한으로 이어졌고, 상흡 때 건무 4년(28년)까지 이어졌으나 후계자가 없어 단절되었다.
2.1. 초기 생애와 흉노 억류
常惠중국어는 집안이 가난하여, 천한 원년(기원전 100년)에 모집에 응하여 이중감 소무를 따라 흉노에 사자로 갔다가 억류되었다. 한나라 사자가 왔을 때 상혜가 몰래 사자를 만난 것을 계기로 한나라는 소무 등의 생존을 알게 되었고, 시원 6년(기원전 81년)이 되어서야 한나라로 귀국할 수 있었다.
2.2. 오손과의 동맹과 흉노 정벌
본시 2년(기원전 72년), 상혜는 오손에 사자로 파견되었다. 오손공주와 곤미(昆彌) 옹귀미는 사람을 통해 상혜에게 위급함을 알렸고, 한나라는 기병 15만 명을 동원하여 전광명, 조충국, 전순, 범명우, 한증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상혜는 교위에 임명되어 부절을 갖고 오손군을 통솔하였고, 옹귀미 또한 직접 기병 5만여 명을 이끌고 종군하여 우록리왕(흉노 서남부를 관리하는 흉노의 제후왕)의 아정을 쳐서 선우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 형수, 거차(居次), 명왕(名王) 이하 39,000명을 잡고 수많은 가축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상혜는 병졸 10여 명을 이끌고 옹귀미를 따라 귀환하던 길에 오손 사람들에게 인수를 도둑맞고 말았다. 한나라에 돌아온 상혜는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죄하였으나, 이때 흉노가 싸우지 않고 달아났기 때문에 조충국을 비롯한 다섯 장군들은 전과가 미미했고, 상혜와 옹귀미가 이끈 오손군만 전과를 올렸기 때문에, 도리어 공을 인정받아 장라후(長羅侯, 장라는 진류군에 속한 지역으로 현재의 허난성 창위안현 일대)에 봉해졌다.
한나라는 공을 세운 오손인들을 위한 포상금 또한 준비하였고, 상혜는 포상금을 전달하러 다시 사자로 파견되었다. 이때, 상혜는 예전에 구자국에서 한나라 교위 뇌단(賴丹)을 죽인 일을 들어 가는 김에 구자국을 치자고 건의했는데, 선제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대장군 곽광은 편의대로 하라고 에둘러 일렀다.
상혜는 사졸 5백 명을 이끌고 오손에 갔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역의 병력 2만 명을 모았다. 또 부사(副使)를 시켜 구자국 동쪽에서 2만 명을 모으고, 오손의 병사 7천 명을 더 모아 세 방면에서 구자국을 칠 준비를 하였다.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구자국 왕에게 예전에 한나라 교위를 죽인 것을 책망하는 글을 보냈는데, 왕은 선왕 때의 귀인 고익(姑翼)이 벌인 일이라고 변명하였다. 상혜는 고익을 자신에게 보내면 용서해 주기로 약속하고, 왕이 고익을 보내니 그를 죽이고 돌아갔다.
2.3. 구자국 정벌
본시 2년(기원전 72년), 상혜는 오손에 사자로 파견되었다. 공주와 곤미(昆彌) 옹귀미는 사람을 통하여 상혜에게 사태의 위급함을 다시 알렸고, 이에 한나라에서는 기병 15만 명을 동원하고, 전광명, 조충국, 전순, 범명우, 한증을 장군에 임명하여 출진시켰다. 상혜는 교위에 임명되어 부절을 갖고 오손군을 통솔하였고, 곤미 또한 몸소 기병 5만여 명을 이끌고 종군하여, 우록리왕(흉노 서남부를 관리하는 흉노의 제후왕)의 아정을 쳐서 선우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형수·거차(居次)·명왕(名王) 이하 39,000명을 잡는 전과를 올리는 한편 수많은 가축을 노획하였다.
그런데 상혜는 병졸 10여 명을 이끌고 곤미를 따라 귀환하던 길에 오손 사람들에게 인수를 도둑맞고 말았다. 한나라에 돌아온 상혜는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죄하였으나, 이때 흉노가 싸우지 않고 달아나는 바람에 조충국을 비롯한 다섯 장군들은 전과가 미미했고, 상혜와 곤미가 이끈 오손군만 전과를 올렸기 때문에, 도리어 공을 인정받아 장라후(長羅侯, 장라는 진류군에 속한 지역으로 현재의 허난성 창위안현 일대)에 봉해졌다.
한나라에서는 공을 세운 오손인들을 위한 포상금 또한 준비하였고, 상혜는 포상금을 전달하러 다시 사자로 파견되었다. 이때, 예전에 구자국에서 한나라 교위 뇌단(賴丹)을 죽인 일을 들어 가는 김에 구자국을 치자고 하였는데, 선제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대장군 곽광은 편의대로 하라고 에둘러 일렀다.
상혜는 사졸 5백 명을 이끌고 오손에 갔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역의 병력 2만 명을 모았다. 또 부사(副使)를 시켜 구자국 동쪽에서 2만 명을 모으고, 오손의 병사 7천 명을 더 모아 세 방면에서 구자국을 칠 준비를 하였다.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구자국 왕에게 예전에 한나라 교위를 죽인 것을 책망하는 글을 보냈는데, 왕은 선왕 때의 귀인 고익(姑翼)이 벌인 일이라고 변명하였다. 상혜는 고익을 자신에게 보내면 용서해 주기로 약속하고, 왕이 고익을 보내니 그를 죽이고 돌아갔다.
2.4. 이후 생애
집안이 가난하여 자원해 이중감(栘中監) 소무를 따라 흉노에 사자로 갔다가 억류되었고, 소제 때 송환되었다. 소제는 상혜의 절개를 높이 사 광록대부에 임명하였다. 이때 오손이 흉노의 침입을 받아 오손공주가 한나라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나라에서는 말을 모아 흉노를 치려 하였는데, 때마침 소제가 붕어하고 선제가 즉위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본시 2년(기원전 72년), 상혜는 오손에 사자로 파견되었다. 공주와 곤미(昆彌) 옹귀미는 사람을 통하여 상혜에게 사태의 위급함을 다시 알렸고, 이에 한나라에서는 기병 15만 명을 동원하고, 전광명·조충국·전순·범명우·한증을 장군에 임명하여 출진시켰다. 상혜는 교위에 임명되어 부절을 갖고 오손군을 통솔하였고, 곤미 또한 몸소 기병 5만여 명을 이끌고 종군하여, 우록리왕(흉노 서남부를 관리하는 흉노의 제후왕)의 아정을 쳐서 선우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형수·거차(居次)·명왕(名王) 이하 39,000명을 잡는 전과를 올리는 한편 수많은 가축을 노획하였다.
그런데 병졸 10여 명을 이끌고 곤미를 따라 귀환하던 길에 오손 사람들에게 인수를 도둑맞고 말았다. 한나라에 돌아온 상혜는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죄하였으나, 이때 흉노가 싸우지 않고 달아나는 바람에 조충국을 비롯한 다섯 장군들은 전과가 미미했고, 상혜와 곤미가 이끈 오손군만 전과를 올렸기 때문에, 도리어 공을 인정받아 장라후(長羅侯, 장라는 진류군에 속한 지역으로 현재의 허난성 창위안현 일대)에 봉해졌다.
한나라에서는 공을 세운 오손인들을 위한 포상금 또한 준비하였고, 상혜는 포상금을 전달하러 다시 사자로 파견되었다. 이때, 예전에 구자국에서 한나라 교위 뇌단(賴丹)을 죽인 일을 들어 가는 김에 구자국을 치자고 하였는데, 선제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대장군 곽광은 편의대로 하라고 에둘러 일렀다.
상혜는 사졸 5백 명을 이끌고 오손에 갔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역의 병력 2만 명을 모았다. 또 부사(副使)를 시켜 구자국 동쪽에서 2만 명을 모으고, 오손의 병사 7천 명을 더 모아 세 방면에서 구자국을 칠 준비를 하였다.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구자국 왕에게 예전에 한나라 교위를 죽인 것을 책망하는 글을 보냈는데, 왕은 선왕 때의 귀인 고익(姑翼)이 벌인 일이라고 변명하였다. 상혜는 고익을 자신에게 보내면 용서해 주기로 약속하고, 왕이 고익을 보내니 그를 죽이고 돌아갔다.
이후 상혜는 소무가 전속국이 되었을 때, 외국의 일에 정통하여 여러 공을 세웠다. 감로 연간에 후장군 조충국이 죽었을 때에는 우장군에 임명되었고, 선제의 뒤를 이은 원제 또한 섬기다가 죽었다. 시호를 장무(壯武)라 하였고, 아들 상성이 작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