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 개요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는 1993년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서 격포항으로 향하던 서해훼리호가 침몰하여 292명이 사망한 대형 해상 사고이다. 사고 당시 정원 221명의 서해훼리호에는 362명이 탑승한 과적 상태였으며, 악천후 속에서 운항이 강행되었다. 과적, 밧줄 감김, 선장의 조작 미숙, 미흡한 안전 관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침몰 원인이 되었으며, 부실한 초기 구조와 미흡한 대처 역시 피해를 키웠다. 사고 이후 정부는 관련자 문책과 제도 개선을 추진했으며, 유가족에 대한 보상과 사회적 파장이 컸다.
| 명칭 | 서해 페리호 침몰 사고 |
|---|---|
| 원어 명칭 (한국어) |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
| 원어 명칭 (한자) | 西海훼리號沈沒事故 |
| 발생일 | 1993년 10월 10일 |
| 발생 시간 (KST) | 10시 10분 |
| 위치 |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위도면 인근 해상 |
| 원인 | 기상 악화, 과적 |
| 최초 보고 | 군산해양경찰서 |
| 탑승 인원 | 362명 |
|---|---|
| 사망 및 실종자 | 292명 |
| 부상자 | 70명 |
-
1993년 해양 사고 -
1993년 빅바이우카노 열차 사고
1993년 빅바이우카노 열차 사고는 앨라배마 주에서 발생한 열차 탈선 사고로, 다리 교각 손상, 기관사 과실, 과속, 열차 제동 시스템 결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47명의 사망자와 103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 참사이다. -
부안군의 역사 -
고부군
고부군은 마한의 고비리국에서 유래하여 백제 시대 고사부리군으로 개칭되었고 조선 시대까지 존속했으나,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정읍군과 부안군에 통합되었으며, 고부 농민봉기는 동학 농민 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부안군의 역사 -
태인군
태인군은 1914년 일제에 의해 정읍군에 통합된 전라북도의 옛 군으로,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고, 식민 지배 체제 강화 및 자원 수탈을 용이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현재까지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 -
1993년 10월 -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1993년 러시아 헌정 위기는 소련 붕괴 후 옐친 대통령과 최고 소비에트 간 권력 투쟁 심화로 발생, 옐친의 경제 개혁 반발과 대통령 권한 축소 시도에 따른 최고 소비에트 해산 및 무력 충돌로 이어져 옐친이 정국을 장악하고 대통령 중심제를 확립한 사건이다. -
1993년 10월 -
모가디슈 전투 (1993년)
1993년 10월 3일부터 4일까지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모가디슈 전투는 유엔의 '희망 회복 작전'의 일환으로 미군 주도 연합군이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 지휘하의 소말리아 민병대를 진압하려 했으나 격렬한 시가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초래하며 미국의 대외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2. 사고 경위
사고 당시 서해훼리호에는 정원 221명을 초과한 362명(승객 355명, 승무원 7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10m/s에서 14m/s의 강풍과 2m에서 3m의 높은 파도로 기상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1993년 10월 10일 오전 9시 40분경, 위도를 출발하여 약 15km 동쪽에 떨어진 격포항으로 향하던 서해훼리호는 임수도 부근에서 10시 10분경 침몰했다. 현장은 혼란에 빠졌고, 초기에는 구조된 인원에 대한 보도가 엇갈렸다.
악천후 속에서 정원 초과, 항해사 미탑승, 선장의 난폭한 조작, 부족한 피난 유도원, 구명정 미작동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피해가 커졌다.
1993년 10월 18일, 김영삼 대통령은 교통부 장관 이계익 및 해운항만청장(차관급) 2명을 경질했다.
2.1. 서해훼리호
1990년 10월 건조된 110톤급 철선인 서해훼리호는 길이 33.9m, 폭 6.2m, 평균 시속 12노트로 전라북도 부안군과 격포항 사이를 1일 1회 정기 운항했으며, 승무원 14명을 포함하여 221명이 정원이었다.
2.2. 침몰
1993년 10월 10일 일요일 오전 9시 40분경, 승객 362명과 화물 16톤을 싣고 위도 파장금항을 출발하여 격포항으로 향하던 서해훼리호는, 10시 10분쯤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돌풍을 만나 회항하려 뱃머리를 돌리던 중 파도를 맞아 심하게 흔들리면서 곧바로 전복, 침몰하였다.
당시 서해훼리호에는 정원 221명을 초과한 362명(승객 355명, 승무원 7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기상 상태는 10m/s에서 14m/s의 강풍과 2m에서 3m의 높은 파도로 매우 좋지 않았다. 9개의 구명정 중 2개만이 작동되었고, 생존자들은 2척의 구명정에 나누어 탄 뒤 부유물에 매달렸다.
침몰 원인 중 하나는 과적이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1cm 두께의 밧줄이 양쪽 프로펠러 샤프트에 감겨 있었던 것으로, 어업 활동으로 남겨진 이 밧줄이 서해훼리호가 우현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었을 수 있다.
3. 구조 및 수색
초기에는 사망·실종자를 140명으로 추정했으나 시신 인양이 진행되면서 사망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10월 15일에는 침몰한 선박의 통신실에서 선장, 기관장, 갑판장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11월 2일에는 신고된 마지막 실종자를 끝으로 모두 292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침몰한 선박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잠수부들이 투입되었다.
선체 인양에는 구조함인 구미함의 특수대원, 9,754톤급의 해운항만청 소속 인양선 설악호, 206톤급의 예인선, 52톤급의 양묘선과 이들에 탑승한 200여 명의 승무원이 참여한다고 보도되었고, 10월 17일 선체를 인양하던 도중에 연결한 줄이 끊어져 다시 침몰했다가 10월 27일 다시 인양하였다.
3.1. 초기 구조
사고 직후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들이 조난 사실을 알리고 40여 명의 생존자를 구조했으며, 사고 발생 1시간여 뒤 강풍과 파도 속에서 어선과 헬기, 군경 함정을 동원한 수색작업이 시작되어 10월 10일 22시까지 7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고 51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3.2. 본격적인 수색 및 구조
사고 직후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들이 조난 사실을 알리고 40여 명의 생존자를 구조했고, 사고 발생 1시간여 뒤 강풍과 파도 속에서 어선, 헬기, 군경 함정을 동원한 수색작업이 시작되었다. 10월 10일 22시까지 7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고 51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침몰한 선박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잠수부들이 투입되었다.
3.3. 시신 수습 및 인양
사고 직후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들이 조난 사실을 알리고 40여 명의 생존자를 구조했고, 사고 발생 1시간여 뒤 강풍과 파도 속에서 어선과 헬기, 군경 함정을 동원한 수색작업이 시작되었다. 10월 10일 22시까지 7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고 51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초기에는 사망·실종자를 140명으로 추정했으나 시신 인양이 진행되면서 사망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10월 15일에는 침몰한 선박의 통신실에서 선장, 기관장, 갑판장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11월 2일에는 신고된 마지막 실종자를 끝으로 모두 292구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잠수부들은 침몰한 선박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선체 인양에는 구조함인 구미함의 특수대원, 9,754톤급의 해운항만청 소속 인양선 설악호, 206톤급의 예인선, 52톤급의 양묘선과 이들에 탑승한 200여 명의 승무원이 참여한다고 보도되었고, 10월 17일 선체를 인양하던 도중에 연결한 줄이 끊어져 다시 침몰했다가 10월 27일 다시 인양하였다.
3.4. 선체 인양
사고 직후 구조함인 구미함, 해운항만청 소속 인양선 설악호, 206톤급 예인선, 52톤급 양묘선과 이들에 탑승한 200여 명의 승무원이 선체 인양에 참여한다고 보도되었다. 10월 17일 선체를 인양하던 도중에 연결한 줄이 끊어져 다시 침몰했다가 10월 27일 다시 인양하였다.
4. 원인 분석 및 논란
연호 침몰 사고, 남영호 침몰 사고에 비해 생존자가 많았던 이유는 낚시용 아이스박스와 파카 잠바가 구조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배가 급회전한 것은 조종 미숙에 의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는 위도를 출발하여 격포항으로 향하던 중 임수도 부근에서 침몰했다. 당시 위도 해상은 북서풍 초속 10~14m, 파고 2m~3m의 악천후였다.
4.1. 무리한 운항
기상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무리하게 운항한 점이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악천후였지만 예보 내용을 따른다면 규정상 출항이 가능한 여건이었고, 승무원들은 출항을 꺼렸으나 일부 승객들이 출항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4.2. 운용 문제
서해훼리호의 운용에는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우선, 승객은 정원을 초과하였고, 승무원은 규정된 인원보다 부족했다. 사고 직전 배가 흔들린 후에 승객들에게 안전하게 선실에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있었고, 그래서 피해가 커졌다는 일부 생존자들의 주장이 있었다. 또한, 선박 회사가 연료를 줄이기 위해 위험한 항로를 운항했다는 현지 주민의 주장도 있었다.
사고 당시 서해훼리호에는 정원 221명을 초과한 362명(승객 355명, 승무원 7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항해사는 탑승하지 않아 갑판장이 대리 업무를 수행했고, 피난 유도원은 2명뿐이었으며, 배에 설치된 구명 보트 4대 중 1대만 작동했다는 점도 피해를 키운 요인으로 지적되었다.
4.3. 열악한 운용 환경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 열악한 운용 환경이 지적되었다. 승객에 비해 운항 횟수는 적었고, 선박 회사가 크게 의존하던 국가 보조금도 중단되었다. 업체는 영세했고, 선장이 업자의 눈치를 보는 환경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4.5. 공식 조사 결과
1993년 12월 1일, 해양 전문가로 구성된 합동조사반은 선박 구조에는 문제가 없고, 정원 초과와 과적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1993년 12월 13일, 사건을 수사한 전주지검은 초과 승선과 과적, 운항 부주의, 방수구 부족 등이 사고의 원인이었다고 발표하였다. 당시 서해훼리호에는 정원 221명을 초과한 362명(승객 355명, 승무원 7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기상 상태는 10m/s에서 14m/s의 강풍과 2m에서 3m의 파고로 매우 좋지 않았다.
침몰의 또 다른 요인으로, 1cm 두께의 밧줄이 양쪽 프로펠러 샤프트에 감겨 있었던 것이 언급되었다. 어업 활동으로 남겨진 이 밧줄은 서해훼리호를 우현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었을 수 있다.
5. 사후 처리 및 여파
서해훼리호는 1993년 10월 10일 오전 9시 40분경 위도(蝟島)를 출발하여 격포로 향하던 중 임수도 부근에서 10시 10분경에 침몰했다. 당시 현장은 혼란에 빠졌으며, 초기에는 생존자 수가 68명 또는 90명으로 다르게 보도되기도 했다. 10월 12일 오전 11시까지 확인된 생존자는 67명이었다.
사고 당시 위도는 북서풍이 초속 10~14m로 불고 파도가 2~3m 높이로 이는 악천후였다. 여기에 정원 221명을 초과한 362명을 태운 과적, 항해사 미탑승, 선장의 난폭한 조작, 부족한 피난 유도원, 고장난 구명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피해를 키웠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10월 18일 교통부 장관 李啓謚한국어 및 해운항만청장(차관급) 2명을 경질했다.
5.1. 희생자 보상
합의에 따라 사망자 1인당 99.1이 유가족들에게 지급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사망자 보상금은 총 28.2이었으나, 서해훼리호의 배상 능력은 1뿐이었고 해운공제조합에서 7.3만 지급되었다. 이에 따라 부족한 금액은 국민성금 9.3과 재해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5.2. 사회적 파장
10월 12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은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를 '후진국형 인재(人災)'라고 주장하였다. 일부 언론에서는 정원을 초과하여 악천후 속에 선박을 운행하는 것을 '준 살인행위', '자살 운항'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대책본부의 운용에 문제가 있었고, 해경의 초기 대응이 늦었다는 점도 논란이 되었다.
당시 여객선 회사가 여객선에 승객을 너무 많이 태워 시체가 무리지어 발견되는 등 인명 피해가 심했기 때문에, 당시 신문에 죽음의 신이 여객선을 유혹하는 장면의 풍자만화가 실리기도 했다.
5.3. 정부 대응 및 후속 조치
정부 주도로 희생자들을 돕기 위한 전국적인 모금이 진행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0월 18일 교통부 장관 및 해운항만청장(차관급) 2명을 경질했다. 문책 인사로서 교통부 장관과 해운항만청장, 군산지방해항청장이 해임되었고, 교통부와 해운항만청의 관계 공무원 38명, 해운조합이사장이 해임되었다.